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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이양숙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e-러닝국제협력센터 책임연구원 주목받는 우리의 교육정보화 성과 교육부는 올해 2월 'e-러닝 세계화 전략'을 수립하고 개발도상국 교육정보화지원사업·국제세미나·공동연구 등 다양한 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이는 지난 교육정보화 10년의 성과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기대가 함께 어우러져 나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지식이 사회 모든 영역의 성장 동력으로 자리매김하는 지식경제시대에,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각국은 평생학습사회의 구축과 국가인적자원개발체제의 혁신을 모색하기 위해 교육에서 정보통신기술 활용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IT강국이자 교육을 통해 국가발전을 이룬 나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의 발자취와 성과는 국제사회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e-러닝의 세계화를 위한 국가적 노력도 강화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 경험을 국제사회와 공유하여 국제교육정보 격차 해소에 기여하기 위해, 개발도상국 교육정보화 지원사업, 국제교류협력사업 등의 e-러닝 세계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e-러닝 세계화 사업은 우리나라의 e-러닝 전담 추진기관인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중심이다. 2002년부터 추진해 온 개발도상국 교육정보화 지원사업은 교육정보화를 통해 교육정보격차를 해소하고 교육발전을 이루고자 하는 개발도상국들의 교육기관 및 교육정책결정자, 교육행정가 및 교사들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사업내용은 크게 PC 및 ICT 기기 등 교육정보화 장비지원과 교원 및 교육행정가 대상의 연수로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교육부-시·도교육청-한국교육학술정보원 간 협력체제를 구축하였고, PC 지원 및 연수 등에 한국의 각급학교, NGO, 정보통신 분야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장비지원, 교원 연수 및 컨설팅 제공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는 몽골, 캄보디아 등 8개국이 지원 대상이었으며, 2005년에는 14개국, 2006년에는 17개국으로 확대되었다. 16개 시·도교육청이 교육부에 지원을 요청하거나 협력하고 있는 국가 또는 지원희망국가 중 1개 국가를 택해 지원하고 있다. 개발도상국에 지원하는 PC는 전국 각급학교의 교체 대상 PC와 기업체 등에서 기증 받은 저성능 PC(펜티엄 II, III 급)를 '일자리만들기운동본부' 등의 민간 기구와 연계하여 재조립한 후, 기업들로부터 기증받은 프로그램 및 교육용 콘텐츠 등을 탑재하여 보급한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15개국에 약 4500대의 PC와 정보화기기를 지원했다. 교원 정보화 연수는 3개 과정으로 구성하였으며,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은 연수과정의 기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현지 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수혜국의 교원 수준에 적합한 연수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시·도교육청과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이를 다시 조정하고 있다. 연수 프로그램의 기본 구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ICT 소양 과정'으로서, ICT 활용교육을 위한 컴퓨터 기초 소양 함양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는 ICT 활용교육의 이해, ICT 활용 우수사례 등 ICT 활용 교육에 필요한 기초 개념과 우수 사례를 중점 연수하고, PC 및 인터넷을 다루기 위해 필요한 기초와 학습 지원용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방법도 연수한다. 두 번째는 'ICT 활용교육 과정'으로서, ICT 활용교육에 대한 이해와 적용 능력을 함양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ICT 소양 과정'의 내용에 ICT 활용교육 평가방법, ICT 활용수업 설계실습, ICT 활용수업 설계안 발표 등 ICT 활용 교육을 중점 연수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세 번째 과정은 교육정보화 정책입안 및 교육행정 양성과정으로서 교원은 물론 학교 CEO 및 교육정책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자국의 교육정보화 정책 수립을 위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들의 정책 수립 사례를 위주로 연수하게 된다. 즉,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 정책 및 추진체제, 세계의 교육정보화 정책 동향 이해, 국가 교육정보화 정책 수립의 이해 및 적용, 우리나라의 교원 연수 정책 이해 등으로 구성되며 ICT 활용 교육에 대한 기초와 사례도 포함되어 있다. 2005년에는 11개국의 교원 약 330명에 대한 연수가 이루어졌다.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는 사업을 효과적이고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개발도상국 지원에 앞서 사전 현지조사를 통해 수혜국의 교육정보화 환경을 가급적 정확하게 파악하여 해당 국가 상황에 적합한 지원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향후 추가 지도를 통해 교육정보화 지원사업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도록 사업의 내실을 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부 간, 기관 간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협력과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04~2005년에는 인도네시아, 코스타리카 등 6개국에 대한 교육정보화 정책 컨설팅을 수행한 바 있다. 국제적인 협력사업도 지속적 추진 교육정보화를 통한 교육발전에 있어서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다양한 국제협력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APEC, OECD, UNESCO, World Bank 등 국제기구, 프랑스·이스라엘·미국·일본 등 교육정보화에 적극적인 각 국가, 마이크로소프트, 선마이크로시스템즈 등 글로벌 IT 기업 등 다양한 파트너들과 국제 공동세미나, 개발도상국 지원사업, 연수사업, 공동연구 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은 APEC 사이버교육 협력사업, OECD 정책연구사업 등에 참여하고, 유네스코와는 개도국 교육정보화 지원사업을 협력하여 추진한 바 있다. 또한 이들 기구 및 World Bank가 주관하는 국제회의에 활발히 참여했다. 프랑스, 이스라엘, 몽골과 e-러닝 공동세미나를 개최했으며, 9월에는 World Bank와 공동으로 'e-러닝을 통한 교육혁신'에 관한 국제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또한 유네스코 신탁기금사업으로 개발도상국 교육정책결정자들을 위한 연수사업 추진을 유네스코와 협의 중이다. 선마이크로시스템즈가 운영하는 'GELC'에 적극 참여하고, 스탠포드학습혁신센터와 혁신적인 교수·학습방법에 관한 공동연구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국제협력사업이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은 프랑스 원격교육센터, 일본국립멀티미디어교육원, 마이크로소프트 등 각국의 교육정보화 유관기관 및 기업들과 MOU 체결을 통한 상호협력체제를 구축했다. 아울러 관련 국제회의에 활발히 참여하여 우리나라 교육정보화 성과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고,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각국 정부 관리, 학자, 기업인, 언론인, 교사 등을 대상으로 한국의 e-러닝 성과와 주요 사업들에 대한 설명과 컨설팅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2001년부터 2002년에는 APEC 회원국 10개국이 참여하는 사이버교육 협력사업에 참여했으며, ICT 활용교육에 관한 OECD 정책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2005년 5월에는 한국과 프랑스 간 교육정보화 분야 협력증진을 위한 공동세미나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본 행사에는 양국 교육전문가 430명이 참여한 가운데 초·중등교육에서의 ICT 활용교육, 표준화, ICT 활용교육 우수사례 등 주요 교육정보화 사안들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양국 전문가들 간 협력을 증진했다. 그해 11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함께 한 정보화 선도교사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약 25개국 교사 및 교육전문가 250명이 참가했으며, 유네스코는 후원기관으로 참여했다. 2006년 4월에는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e-러닝 세미나를 개최하여, 양국의 e-러닝 정책과 초·중등 및 고등교육에서의 e-러닝, e-러닝 산업발전에 관한 경험을 공유하고 상호 협력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 2005년 한 해 동안, 우리나라와 e-러닝 협력을 논의하기 위해 방문한 인사가 30개국 330명에 달하고 있다. 현재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 정책 및 교육시스템 도입을 위한 컨설팅 요청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05년 11월, e-러닝국제협력단 사무국을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 설치함으로써, 교육정보화 경험을 국제사회와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협력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적극적인 e-러닝 세계화 추진은 지난 10년간의 체계적인 교육정보화 성과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교육정보화의 결실이자 새로운 방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e-러닝 세계화가 내실 있게 추진되고 우리나라가 진정한 e-러닝 선도국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교육정보화를 통한 교육혁신과 질적 발전을 이루기 위한 일관되고 체계적인 정책 추진과 각 참여기관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필수적이다.
임헌배 | 삼육재활학교 교사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 도래와 함께 수요자 중심의 교육, 좀 더 질 높은 교육, 교수·학습 방법 다양화 등의 변화가 현 교육 패러다임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전문가와 학자들에 의하여 신사회적인 특징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정보화는 정보통신기술을 사회생활전반에 이용함으로써 능력을 배가시키는 효율성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장애학생의 부족한 정보접근 기회 이런 관점에서 교육정보화는 정보화 사회로의 본격적인 진입과 더불어 현재 우리 교육을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교육으로 재구성함에 있어, 정보기술을 기반기술로 활용하여 교육의 내용과 방법, 교육의 형태를 다양화하고 개선하는 노력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아울러 필자가 느끼는 것은 단순히 교육의 내용과 방법적인 변화뿐만이 아니라 교육구성원 개개인의 의식과 형태를 정보화 사회에 맞게 변화하도록 유도하고 촉진함으로써, 보다 탄력적이고 융통성 있는 교육, 보다 효율적인 교육을 구현하기 위한 총체적인 활동이 가능하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 교육정보화의 새로운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3년 교육부에서는 '특수교육 발전 종합계획'에 따라 특수교육 정보화 사업이 추진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특수교육 정보화 체제 구축, 학습보조도구 및 지원공학기구 개발과 보급, 특수교육 정보자료 개발사업 확대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반학생들의 정보접근기회에 비하여 장애학생의 정보접근기회가 매우 부족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직접 경험에 의한 학습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장애로 인하여 우선 겪게 되는 교육기회의 부족이나 제한은 장애학생들이 그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혹은 원하는 시기에 선택하여 학습할 수 있는 기회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점의 인식에서 출발한 특수교육정보화에 대한 노력은 장애학생들에게 일고 있는 정보화의 바람을 긍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맞춤 컴퓨터 교육으로 적응력 키워 본교의 경우 1980년대부터 기술관련 교과나 학생 동아리 활동을 통하여 장애학생들에게 정보 활용 능력 배양을 위한 컴퓨터 교육을 실시해 왔으며, 정보화 교육의 질을 결정할 수 있는 교사들에 대한 연수 또한 꾸준히 실시해 오고 있다. 1996년부터는 컴퓨터를 최신기종으로 새롭게 교체하고, 컴퓨터실을 정비하여 학생들이 쉽게 컴퓨터와 접할 수 있게 하였으며 각 교실에도 컴퓨터를 설치함으로써 모든 교과수업에 걸쳐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98년부터 특기·적성교육이 실시된 후 본교의 컴퓨터 교육은 직업교육, 계발활동, 특기·적성교육으로 분리되어 교육됨으로써 각 활동의 성격이나 교육적인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초등부부터 고등부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교사들에게 있어서는 업무 및 수업활용과 관련된 기능을, 학부모들에게도 기초에서 정보 활용 기능까지 익힐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함으로써 가정과 연계한 정보화 교육이 가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2000년도와 2001년도에는 컴퓨터실 1실을 증설하여 더욱 많은 학생들이 컴퓨터를 여가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증설한 컴퓨터실은 2006년도에 직업교육실로 바꿔 컴퓨터를 활용한 직업교육 시 장애학생들의 컴퓨터 접근을 최대한으로 높일 수 있도록 각종 보조공학기기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서사장애로 인하여 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이를 컴퓨터를 이용하여 의사표현을 하고, 나아가서는 컴퓨터 학습 혹은 직업교육에 이르기까지 적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하여 2000년부터 본교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교내 워드프로세서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인터넷의 기초 사용법과 주어진 문제의 이해를 통한 정보 검색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교내 정보검색대회를 같은 해부터 실시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교내 대회 실시는 장애학생들이 컴퓨터 활용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성취감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같은 노력으로 최근 개최되고 있는 각종 정보화 관련 대회에 본교 학생들이 참가하여 좋은 성적으로 입상하고 있다. 게임을 통하여 장애를 가진 학생이 여가 시간을 보다 즐겁게 활용함은 물론 컴퓨터 및 정보화 교육에 더욱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기본 인지 발달 능력의 향상을 꾀하기 위함으로 본교에서는 교내 워드프로세서대회와 교내 정보검색대회 이외에도 각 과정별 게임대회를 실시하고 있다. 아울러 장애학생들이 지닌 컴퓨터 활용능력 수준을 객관적으로 인증해 주는 컴퓨터 활용능력 인증제 시행을 통해 학생들이 정보사회에서 갖추어야 할 컴퓨터 활용능력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하고, 자율학습 분위기 및 학습 동기를 촉진하여 학생의 컴퓨터 활용능력을 향상케 함으로써 정보화 교육 운영의 효율적인 질 관리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의지를 갖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컴퓨터 활용능력 인증제는 3월에 컴퓨터 활용능력 인증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방과 후 컴퓨터실 개방으로 컴퓨터 교육 활성화를 도모하며, 특기·적성교육으로 컴퓨터 학습을 실시하고 연 2회에 걸쳐 컴퓨터 활용능력 인증과 관련한 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인증 대상 학생에게 인증서를 수여하도록 하고 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이런 정보화 추세에 발맞춰 나갈 수 있도록 특수교육 정보화 모임 관련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어 자체 연수시간을 활용하여 새로운 정보화에 대한 내용 및 수업 활용 사례를 소개하고 있으며, CD-TOWER 구축을 통하여 교실에서도 접속 및 로그인을 통하여 쉽게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서버구축을 통하여 '쿨메신저'를 업무에 활용함으로써 보다 정보화에 열려 있는 분위기를 더욱 조성하게 되었다. 특성 고려한 차별화된 지원 계속돼야 특수교육 현장에서의 이러한 교육정보화 활용 노력은 장애학생들이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며, 학습수행능력을 향상시키고 동기유발이 더욱 가능하게 되어 학습 및 생활전반에 걸쳐 태도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긍정적인 변화를 통하여 장애학생들은 낮았던 자존감이 보다 긍정적인 자아상으로 형성이 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욱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모습을 지니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해 준다. 또한 일반학생들에 비하여 부족한 정보접근에의 기회를 교육정보화를 통하여 보다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장애로 인한 경험 부족을 보완하기 위한 체험학습과 같은 직접 경험이 간과되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많은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면서 사진이나 그림 혹은 평면적인 동영상 감상에서만 그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요즘 대두되고 있는 정보·통신 윤리교육의 필요성 또한 장애학생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정보화의 역기능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특수교육 정보화 활성화를 위하여 노력한다면 장애학생들의 교육 여건과 그들이 실제적으로 얻어갈 수 있는 지식의 양과 질이 더욱 향상되어질 것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특수교육의 정보화가 그동안 질적 혹은 양적으로 크게 성장했다고 보나 대상 장애학생이나 교육서비스 전달체계가 다양하기 때문에 아직도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양의 하드웨어나 교육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보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학생 당사자의 교육적 요구에 충실한 장애별 인터페이스 개발이나 접근성 문제를 보다 용이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일반교육 내에서 추진되는 같은 의미의 교육정보화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가기관이나 출연기관을 선정하여 지속적인 예산지원으로, 교육정보화의 대상인 장애학생의 특성을 고려하여 획일적인 예산 지원이 아닌 효율성에 관심을 기울여 차별화된 특수교육정보화 사업이 계획되고 추진되어야 한다. 또한 교사들이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용 콘텐츠 개발도 중요하지만 보조공학 기술 및 제품 개발 혹은 각종 특수교육 정보화 관련 행사 등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돼야 한다. 교사들이 지원 받기를 원하는 교육용 CD나 동영상 파일 등은 가능한 한 많이 제작하여 보급이 되야하며 특수교사들이 희망하는 장애인용 프로그램 사용 방법, 정보매체 활용 수업 방법, 학습용 자료 제작방법 등에 관한 연수가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대다수의 학교에 컴퓨터가 보급되어 있고, 컴퓨터 실습실 또한 장애 학생의 특성에 맞게 구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교육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보화 관련 교과 운영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장애학생들에게 알맞은 교육적 조치를 해줌으로써 교육정보화에 더 다가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 차원에서는 정보화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정보화 관련 잡지를 구독하거나 교사들에게 다양한 연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보화 관련 예산을 증액하는 등 다양한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또한 장애학생의 부모에 대한 정보화 교육을 학교나 장애인 복지관 혹은 연수기관에서 담당하여 장애학생들에게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현장에서 정보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돼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특수교육 정보화에 대한 지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이는 장애학생들에게 성취감과 자신감, 사회구성원으로서 충족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김진숙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교육정보화센터 교수학습팀장 에듀넷(www.edunet.net)은 교육정보의 효과적인 전달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국내외에 분산되어 있는 교육관련 정보를 상호 연계함으로써 학생, 교원 및 학부모 등 교육수요자에게 양질의 교육정보를 제공하는 교육정보전문서비스이다. 인터넷 보급 초기인 1996년 PC 통신을 기반으로 탄생한 이후 지난 10년 동안 에듀넷은 교육정보화의 방향과 목표를 함께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 환경 변화에 따른 교육 혁신 요구가 어느 때보다 높은 이때 에듀넷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고, 미래 발전적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국의 교육정보를 통합 활용 에듀넷은 초기 교육자료 DB 구축 및 제공에서 교수·학습 방법 개선 지원, 교육자원 공유 서비스로 발전되어 왔다. 초기의 에듀넷(1996년∼1999년)은 교육관련 공공 부문에서 유일한 디지털 콘텐츠 개발과 보급으로 교사, 학생의 교수·학습 활동은 물론 학부모, 일반인의 평생교육을 두루 지원했다. 이후 에듀넷(2000년∼2002년)은 교육정보화 정책의 ICT 활용을 통한 교수·학습 방법 개선과 맥을 같이하여 콘텐츠 중심에서 교수·학습 방법의 모델링을 목적으로 한 수업 자료 개발과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때 ICT 활용 수업을 실천하기 위한 그림, 사진, 소리, 애니메이션 등 교사와 학생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자원 라이브러리가 체계적으로 개발되고 ICT 교수·학습과정과 실천 사례에 관한 DB가 구축되었다. 현재의 에듀넷(2002년~2006년)은 인터넷의 전국적 확산과 디지털 정보의 생산, 보급, 관리 기술이 성숙하면서 전국 시·도교육청과의 연계 서비스로 확산되었다. 2002년 5월에는 에듀넷과 16개 시·도교육청의 협력을 기반으로 교육정보의 공동 활용을 위한 '전국 교육정보 공유체제'가 추진되었다. 이것은 에듀넷이 단순한 중앙 서비스가 아닌 전국의 교육정보를 통합, 활용하는 기반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교육정보공유를 시작으로 그 범위는 단순히 교육정보를 함께 활용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교육정보서비스가 다분히 공급자에 의해 제공되고 이용자는 활용하는 형태였다면, 이제 교육정보는 교육수요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교류되는 체제가 의미가 있는 바, 지식교류를 촉진하는 장으로서 에듀넷은 그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 가능성을 타진했던 서비스로는 교사들 간의 수업 노하우를 질의와 응답을 통해 서로 나누는 '수업컨설팅 서비스'가 있다. 학급 운영에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초임교사에게 선배교사가, 연구 수업을 처음하게 되는 교사에게 많은 경험이 있었던 교사가 조언을 해주는 모습에서, 수요자의 기대에 맞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아가 지역을 넘어서는 국가 단위 서비스로서 발전해 나가야 하는 에듀넷의 발전적 역할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서비스이기도 하다. 새로운 개편의 방향과 그 의미 1996년 에듀넷이 탄생된 이후 1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그 개편의 의미는 남다르다. 체계적인 자원 구축을 통해 교육정보화 정책의 현실화에 기여했고 그 결과 2006년 6월 현재, 40여만 건에 달하는 공유 자원의 구축으로 하루 평균 30여만 명이 방문하는 서비스로 발전했다. 그 역할에 있어서도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난 2004년 9월 초·중등 공교육내실화 사업에 선두 역할을 하는 '중앙교수학습센터'로 명명되었다. 이것은 에듀넷의 지원 범위가 교육정보화에서 공교육 내실화 정책 전반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하지만 외적인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에듀넷은 급변하는 정보 인프라 대응과 급증하는 정보 자료의 질 확보, 유사 교육정보서비스와의 차별화 등의 측면에서 중대한 변화의 갈림길에 서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0주년에 즈음한 에듀넷 개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첫째, 환경 변화 및 수요자들의 요구를 고려한 에듀넷의 정체성 확립이다. 10년 전과 대비해 본다면,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익숙한 신세대 사용자의 유입과 기존 사용자들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성숙 등의 상황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대의 이용자의 요구를 반영하는 서비스로 이끌기 위한 정체성 확립을 재고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에듀넷이 국가의 교육정보종합서비스로서 비전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역할 모델을 도출하여 '에듀넷다운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에듀넷의 주요 이용자인 일선 교사들로부터 에듀넷 정체성에 대한 리서치 자료를 수집하였고, 내부적으로는 브랜드 개성이라는 전략 도구를 활용하였다. 여러 논의와 연구를 통해 에듀넷은 '교육 지식 교류, 생성을 지원하는 포털 서비스'로써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둘째, 교육정보서비스에 대한 품질 향상, 고객 만족 지향 서비스이다. 기존 에듀넷 서비스는 모든 이용자에게 동일한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이용자는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관련 없는 정보들을 처리해야 하고, 복잡한 정보구조 속에서 헤매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개별 이용자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맞춤화 서비스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용자 맞춤화 서비스는 이용자별 요구에 따라 차별화된 전략으로 실천될 예정이다. 개편될 서비스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정보와 서비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학교급별, 담당교과별 등에 따라 즉시적이고, 현장 적용 가능성이 높은 정보와 서비스들이 선별되어 제공될 것이다. 셋째, 서비스 자체에 대한 사용성·접근성 향상을 꾀한다. 아무리 좋은 정보와 자료가 있어도 사용하거나 접근하기 어렵다면 무용지물일 것이다. 에듀넷은 일반 민간서비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질적으로 검증된 교육용 콘텐츠와 교수·학습 자료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용자들은 본인이 원하는 정보를 쉽게 찾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이번 개편 방향 중 하나로 기존의 정보구조를 사용자 멘탈 모델(mental model)에 부합될 수 있는 정보구조로 재구성하고, 원하는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탐색할 수 있도록 검색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검색 결과 활용이 판단된 정보들을 집이든, 학교이든 '나만의 자료 관리함'을 통해 어디서든지, 어떤 기기(핸드폰, 모바일 등)로도 접근 가능하도록 접근성을 대폭 향상시킬 계획이다. 지금까지의 에듀넷이 국가 유일의 또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기관의 독자적인 서비스로서 발전되어왔다면, 앞으로 에듀넷은 국가를 대표하는 글로벌서비스로서, 중앙유관기관을 비롯한 시·도, 학교를 연계시키는 지식 허브 서비스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10주년을 맞는 감회보다는 맡겨지는 역할과 책무에 더욱 마음을 다지게 된다.
교육정보종합사이트인 에듀넷이 9월로 개통 10년을 맞는다. 전국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교수·학습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서비스를 시작한 에듀넷은 우리나라 교육정보화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에듀넷은 8월 현재 회원 543만 명, 1일 이용자 34만여 명 등 국내 최대의 교육정보 사이트로 발전했다. 에듀넷 개통 10주년을 맞이해 황대준 한국교육학술정보원장을 만나 에듀넷의 성과와 e-러닝의 현안에 대해 들었다. - 에듀넷이 개통 10년을 맞았습니다. 그간의 성과를 짚어볼 시점인 것 같습니다. "에듀넷은 초·중등 교육수요자를 대상으로 교수·학습 자료, 학습 커뮤니티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는 국가 단위의 교육정보종합서비스입니다. 1990년대 중반, 교실망과 상용 네트워크망의 보급으로 학교의 인터넷 활용 환경이 구축됨에 따라 교육정보 제공 서비스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습니다. 그 결과물이 에듀넷입니다. 현재 교사용 자료가 46만 건, 학생용 자료가 71만 건 정도 등록되어 있으며, 온라인 커뮤니티 개설 건수도 2만 건에 이릅니다. 그동안 새롭게 e-러닝 체제도 도입됐고 시·도교육청과 연계된 교육정보 통합 포털 서비스로 발전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 양적 성장에 비해 활용률이 저조하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사용자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했지만 모든 교육수요자를 충족시키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를 보완하기위해 서비스 대상별 맞춤서비스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기술의 부족으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시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제까지 양적 서비스에 집중해왔다면 지금부터는 질적 서비스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서비스들을 통해 수요자가 원하는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는 맞춤형 서비스로 발전시킨다면 에듀넷의 활용도는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 교육정보화는 그간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또 현장의 변화도 컸는데요. "그렇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정보화 인프라가 구축됐습니다. 모든 학교에 인터넷이 연결됐고 교사 개인당 1PC, 학생 5.8명당 1PC가 보급됐습니다. 무엇보다 교육 격차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풀어야할 문제도 남아있습니다. 특히 특정 사업 및 서비스가 현장에 체화되기도 전에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그에 따라 발생하는 괴리감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각 교육행정기관의 적극적인 장학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교육정보화의 방향이 기술 중심의 교육전달 체계가 아닌, 기술을 활용한 교육으로 현장에서 인식되고 활용돼야 할 것입니다." - 최근 확산되고 있는 e-러닝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e-러닝 역시 학교 현장과 유리되어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들이 어려움 없이 e-러닝을 활용할 수 있도록 각종 교수·학습과정안을 지속적으로 보급하고 있으며, 현장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에듀넷 역시 학부모와 학생들이 주축이 된 모니터단인 '에듀리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e-러닝이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음에도 아직 일부 교사나 학부모들은 e-러닝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사나 학부모님들께서도 e-러닝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새롭게 해주셔야 합니다. 능동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또한 콘텐츠 확충에 대한 목소리도 적극적으로 제기해주셔야 합니다." - 에듀넷 외에도 교육학술정보원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사이버교육 및 평생학습체제 구현을 지원해왔으며, 시·도교육청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사이버가정학습의 중앙센터인 사이버가정학습중앙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학술연구정보서비스인 'RISS'를 통해 전국 모든 대학 및 연구소 도서관, 전 세계 유수의 대학 도서관 등의 소장 자료 및 해외학술정보를 검색하고 공유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도 운영 중에 있습니다. 이 외에도 교육용 콘텐츠 수집·제작, e-러닝 표준화 연구, 학교도서관의 도서관리 및 공동 활용 기반조성을 위한 디지털자료실지원센터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최근 국제 교류와 개발도상국 지원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세계 e-러닝 시장의 선점과 e-러닝 선진국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한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개발도상국에서는 10여 년 전 우리나라와 유사한 교육정보화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 중에 있습니다. e-러닝 선진국과의 정보화 학술교류와 병행해 개발도상국과는 그간 이루어온 교육정보화 노하우를 'Knowledge Package'로 집대성해 지원하고 있습니다. 지원 대상은 중남미 도미니카, 과테말라 등을 비롯해 동남아 및 아프리카 등 총 16개국 정도입니다." - 2004년, 2005년 경영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했는데 기관 혁신을 위한 노력을 소개해주시죠. "저희는 교육 및 기술의 변화를 주도하는 혁신기관, 세계적인 교육정보화 전담기관 및 연구소의 벤치마킹 대상기관, 최고의 인재와 탁월한 성과를 지닌 글로벌 리딩 기관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PLOT(Passion, Leadership, Openness, Trust)라는 핵심가치를 설정해 실천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입니다. 저희는 교육수요자의 만족도 증대를 위해 임직원 간의 혁신 마인드 공유, 학습과 실행의 유기체 조직으로의 탈바꿈이라는 두 가지 큰 축을 설정하고, 이를 위한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학술정보서비스와 정보시스템 운영 업무에 국제표준 품질경영시스템을 도입해 영국표준협회로부터 ISO 9001 인증을 획득했습니다. 끊임없는 혁신 활동을 통해 교육수요자에게 보다 더 친밀하게 다가가는 기관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 임형준 한국교육신문 기자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늪이란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이다. 축축하게 젖은 땅을 습지(wet land)라고 하는데, 습지는 작은 물웅덩이에서부터 늪, 호수, 강, 갯벌 등을 포함한다. 작은 물웅덩이는 비가 오면 쉽게 만들어 지지만, 늪이 만들어지기 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늪이 훼손을 입거나 파괴된다면 처음의 모습으로 회복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런데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많은 생물체의 보금자리인 늪이 사라지고 있다. 수백 종의 생물 서식하는 유산 우포늪은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토평천이 범람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우포늪이라고 하지만, 우포(창녕군 유어면)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목포와 쪽지벌(이방면), 사지포(대합면) 등을 합친 우포지역 전체를 뜻한다. 우포늪 북쪽에 위치한 산이 소의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목덜미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산을 우항산이라고 한다. 이 산 밑에 있는 마을을 소목이라고 하고, 소목 앞에 있는 호수를 소벌, 즉 우포늪이라 한다. 목포(나무벌)는 홍수에 많은 나무들이 떠 내려왔기에 붙여진 이름이고, 사지포(모래벌)는 모래가 잘 쌓이는 지역이라 붙여진 이름이며, 쪽지벌이 위치한 곳은 처음에 고포라는 큰 늪이 있었지만 개간으로 사라지면서 아주 작게 남아 마치 국을 뜰 때 쓰는 국자 모양이라서 쪽지벌이 되었다. 경상도에서는 국자를 쪽이라고 한다. 우포늪은 오랜 세월 동안에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아 여러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는 정말 귀중한 자원으로 홍수 시에 낙동강 물이 불어나 범람하면 떠내려 오는 흙 알갱이와 각종 떠다니는 물질을 가라 앉혀 흙이 쓸려 내려가는 것을 막고, 물을 오랫동안 보관하여 물의 흐름을 줄여 둑이 무너지거나 하류 지역의 홍수를 막는 일을 한다. 총 342종의 생물이 나타나는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서 1997년 7월 26일자로 8.54㎢를 생태계 보전 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고시하였고, 1998년 3월 2일에 람사협약(국제습지조약)에 가입되어 람사협약 보존습지로 되었다. 우리나라는 1997년 7월 29일 101번째로 회원에 가입하였고, 우리나라의 습지 중 람사협약에 가입된 습지는 대암산 용늪, 우포늪, 장도습지, 순천만 갯벌 등이 있다. 우포늪에 살고 있는 특징적인 식물에는 가시연꽃, 자라풀, 물여뀌, 왕버들 등이 있다. 물여뀌는 여뀌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늪이나 도랑가의 습지에 자라는데, 물에서 자라기 때문에 물여뀌라고 한다. 지금까지 제주도와 경남의 일부 습지에 자라는 아주 희귀한 식물이다. 목포늪에 숲을 이루고 자라는 왕버들은 경기도 이남의 하천과 늪에서 자란다. 봄에 잎이 나올 때 붉은 빛을 나타내고,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버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 수 있고, 나무의 모양이 웅장하기에 왕버들이 되었다. 돌고 돌아 우포늪 둘러보기 우포늪 둘러보기는 주변에 만들어진 탐방로를 이용하여야 한다. 전체를 걸어서 구경한다면 며칠이 걸리겠지만,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만날 수 있는 곳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주매에서 사지동 마을로 가면 우포와 사지포를 가르는 둑을 만날 수 있다. 둑 옆에 작은 동산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가슴이 확 트이면서 우포늪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지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늪의 가운데에 은수원사시나무 밭이 있는데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토평천과 우포늪이 만나는 곳에서는 안개 낀 버들숲을 만날 수 있다. 주매에서 장재골로 가는 길은 다양한 수생식물들과 나무배와 어울린 아름다운 경관을 만날 수 있다. 장재 마을 부근에는 '푸른우포사람들'이 이용하는 교육장이 있는데, 약 200평의 논이나 인공 연못에 여러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실제 관찰의 기회를 준다. 푸른우포사람들 앞에 위치한 목포늪은 해마다 가시연꽃이 싹을 틔우는 곳인데, 이곳에 나무배가 있어 버들밭 사이로 배를 탈 수 있다. 나무로 만든 배에 함석을 붙여 만든 배인데, 늪을 이용해서 생활하는 주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생활 도구이다. 긴 장대를 늪 속에 박으면서 노를 저어 가는 모습은 늪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또 목포늪의 상류에는 왕버들 밭이 원시림을 이루고 있어 열대의 망그로브 숲을 연상시키는데, 이 왕버들의 어미로 추정되는 왕버들 보호수가 도로 옆에 자라고 있다. 목포늪에서 우포늪을 거쳐 쪽지벌로 가보자. 이 길의 도로 변에는 가로수로 선버들이 쭉 서 있다. 우포늪의 하류에는 넓은 습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지금은 자연 상태로 두어 많은 종류의 사초과 식물이 자라고 있다. 쪽지벌에 자라는 특별한 식물로서 자라풀과 물여뀌가 있다. 특히 쪽지벌이 끝나는 부근에 있는 동산에 올라서면 우포늪과 쪽지벌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유어면 세진리와 대대리에는 우포생태학습원과 우포전망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다. 우포전망대 일원의 도로는 차량을 통제하여 우포늪이 끝나는 위치까지 걸어서 조용한 사색을 할 수 있고, 여름철에는 논고둥을 잡는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겨울에는 철새를 관찰하기에 좋고, 부근의 농경지와 우포늪을 구분하는 둑에서는 일몰과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이다. 가까이에 있는 우포늪생태학습원은 영남 지역 환경 단체들이 1999년 8월 초 창녕군 유어면 대대리에 있는 옛 회룡초등학교에 문을 연 환경학교이다. 우포늪에 관련된 각종 자료와 정보를 모아 두고 있으며, 교실을 개조해 단체 방문객들이 숙박할 있는 시설도 해 놓았다. ▶ 창녕의 역사와 문화 지석묘가 다수 있어 예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는 창녕군은 가야시대에는 불사국[不斯] 또는 비화(非火)가야가 있었든 곳이다. 신라 경덕왕 16년에 화왕(火王)군이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창녕군이 되었다. 비화가야의 고도인 창녕읍 일원과 계성에는 다수의 고분군이 남아 있다. 창녕에 열리는 문화제로는 3·1민속 문화제, 화왕산갈대제와 억새 태우기, 부곡 온천제, 비사벌 문화제가 있다. 3·1문화제는 경상남도 최초의 독립운동 발상지인 영산에서 매년 2월 28일에 시작되는데, 쇠머리대기 행사가 특이하다. 화왕산 정상에서 이루어지는 갈대제는 10월 둘째 주에 비사벌 문화제와 같이 이루어지고, 매년 정월대보름에 억새 태우기 행사를 한다. ▶ 늪과 관련된 전설 풍수지리상으로 화왕산은 예부터 불의 뫼라고 하였다. 특히 이곳에서 불이 나야만 풍년이 깃들고 평안하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또는 불이 많이 나는 산이라 우포늪의 물이 불을 식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창녕에 화왕산과 우포늪은 같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 외에도 장척늪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화왕산 정상에 있는 산지늪인 용지늪에서 창녕 조(曺)씨 시조의 탄생 이야기가 있다. 우포늪 주변에 장척호(장척늪)가 있다. 장척호에는 원래 마을이 있었는데, 늪이 되었다고 한다. 옛날 장척마을에 욕심 많은 부자가 살았다. 어느 여름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청했는데, 마침 두엄을 내던 중이라 두엄을 한 바가지 주었다. 이때 며느리가 시아버지 몰래 쌀을 담아 주자 스님이 며느리만 따라 오라고 하는데, 갑자기 비가 내려 마을이 넓은 늪으로 변하게 된다. 부자는 죽어 구렁이가 되고, 며느리는 스님의 말을 어기고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돌부처가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늪을 장자(장제, 부자를 일컫는 말)가 살았던 곳이라 장자(장제, 장척)늪이 되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늪의 모습을 새교육 9월호에서 만나보세요*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신선한 충격 주는 특별한 만남 태국 북부의 중심지인 '치앙마이'를 가보지 않고는 태국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역사의 고도(古都) 치앙마이가 주는 어떤 아늑함이나 빼어난 풍경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럼 치앙마이의 매력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다른 견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근교의 산악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아주 독특한 산악부족들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의 번잡함을 벗어나 가벼운 마음으로 열대의 대자연 속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그곳에는 이미 우리에게서 떠나간 옛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유인처럼 살아가는 여러 부족들의 독특한 외모와 생활양식은 현대문명에 잔뜩 찌들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도 남는다. 화려한 색체 뽐내는 '메오족' 치앙마이 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부족은 '메오족'이다. 일명 '흐몽족'이라고도 하는데, 이들은 중국에서 아편의 재료인 양귀비의 재배 기술을 가져온 부족으로 치앙마이 주변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특히 근교의 '도이푸이'라고 하는 마을이 가장 잘 알려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검정색에 화려한 수를 놓은 여성들의 민속의상이 주름치마와 함께 돋보이고, 어린이들의 옷에 수십 개의 동전을 장식으로 매달고 있는 것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좀 더 멀리 배낭을 짊어지고 야산들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트랙킹을 하다보면, 덥기는 해도 이따금씩 펼쳐지는 산악마을들이 정겹고, 화전민들이 불을 질러 밭을 일구는 모습도 눈에 띈다. 마을과 마을 사이가 그리 멀지도 않기 때문에 지루한지 모르고 걷다보면 그때마다 새로운 부족들을 대하게 되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그야말로 소수민족들의 전시장처럼 느껴지는 것은 비단 한두 사람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부족마다 서로 다른 전통 유지 이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부족을 '카렌족'이라고 하는데, 태국 서북부에서 미얀마에 걸쳐 폭넓게 펼쳐 있다고 한다. 이들은 한편으로 우리 민족과 닮은 점이 많다고 해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사실 마을 앞에 세워 둔 솟대, 추석맞이, 디딜방아 등등의 비슷한 것들이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이들은 코끼리 길들이기로 유명하며, 처녀는 흰 바탕에 빨간 줄이 들어가 있는 긴 드레스를 입고, 결혼한 여자들은 빨간 색상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다. 카렌족 사이에서는 혼전 교제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만일 혼전 이성 교제가 발견될 경우에 두 사람은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곳을 방문하는 이방인들은 자신을 유혹하는 젊은 여자들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차 실수하면 영락없이 그곳에서 붙잡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옆 동네에 사는 '아카족'은 사정이 좀 다르다. 금세기에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이들은 비교적 성에 대해 자유로우며, 남녀 모두가 담배를 좋아한다. 흑색을 기조로 한 스커트, 오픈 재킷에 은화, 단추, 방울, 양털 등으로 장식되어 있는 원추형 모자가 여성들의 평상시 복장이다. 독특한 외모가 이방인들의 시선을 집중 시키게 되는데, 그것을 노려서인지 이따금씩 보내온 여성들의 추파가 이방인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기도 한다. 잔인한 풍습 이어지는 '파동족' 불볕 같은 더위 속에서 트랙킹을 하다보면 비가 오듯 땀을 흘리기 때문에 물통이 입에서 떨어질 새가 없다. 한적한 산길을 지나고 밭고랑을 지나 다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산악부족의 원두막 같은 고상식(高床式) 집에 앉아 쉬어가도 좋다. 아니 낮잠을 한숨 진하게 자도 누가 뭐라 시비하지 않는다. 어릴 적 시골에서 참외밭 지키던 일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달콤한 시간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마을과 마을이 지척이면서도 다른 문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사이에 높은 산이나 강, 또는 특별한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만나게 되는 '리수족', '라후족', '팔롱족' 등의 모든 부족들이 그렇다. 많은 부족들 가운데 가장 특이한 부족은 미얀마 접경 쪽의 '파동족'이다. 어느 부족이나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별 특색이 없지만, 목에 쇠로 만든 여러 개의 금빛 고리를 걸고 마치 기린처럼 긴 목을 하고 있는 여인네들은 이 세상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영화 속의 'E.T.' 같다고나 할까? 이들은 이방인들의 접근에도 별다른 난색을 보이지 않고 사진 촬영의 모델이 되어 주는 등 많은 것을 협조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이 마을을 방문 할 때 이방인들이 지불하는 상당액의 입장료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보통 사람보다 3~4배쯤이나 긴 목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별난 부족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또 다른 부족들을 찾아간다.
박인기 | 경인교대 교수 사람들은 대화하고 소통하며 산다. 산다는 것이 곧 소통의 현존(現存)을 증명하는 것이지 달리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소통이 끊어진 곳에 삶의 좌절이 있고, 소통이 왜곡되는 곳에 배신의 분노가 있고, 소통이 실종되는 곳에 관계의 파탄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소통이 거창한 그 무엇인 것 같지만, 실상 소통은 소박한 것이다. 소통이란 것의 반은 내가 누구에겐가 말하는 것이고, 나머지 반은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다. 모든 소통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잘 안 되면 소통은 잘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소통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고통을 가져다준다.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으로 다스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소통의 문제를 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소통을 주로 말하기의 문제로 본다. 내가 말을 잘못 해서 소통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듯이, 말하는 것은 듣는 것에 의존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말하기의 실패는 듣기의 실패에 반드시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듣기의 지혜가 중요하다. 그런데 잘 듣는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소백산맥 자락 시골 마을에 사는 K씨는 50대 후반의 성실한 농사꾼이다. K씨는 지난 5월 어버이날을 맞아 이른바 효도관광이란 걸 다녀왔다. 자식들이 부모님 노고를 위로한다고 돈을 모아, 경치가 뛰어나다는 중국 장가계 관광여행을 보내 드렸단다. 생전 처음 해외여행에 나선 K씨 내외는 자식들의 정성이 고마웠다. 그만큼 소중한 여행으로 생각하고, 장가계의 절경들을 감탄하고 또 감탄하며 구경하였다. 그야말로 신선의 영토를 보는 듯했다. 효도관광을 마치고 돌아 온 K씨는 장가계 다녀 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곁들여 자식들 효성도 자랑하고 싶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듯 강한 소통의 욕구가 있기에 자기 존재의 근거가 비로소 확인되는 것 같았다. 이렇듯 소통은 삶을 활기 있게 추동시키는 원천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 모두도 이와 비슷한 유형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마을회관에서 모임이 있던 날, K씨는 장가계 다녀 온 일을 은근 슬쩍 꺼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별 자랑거리가 아닌듯한 말투로 시작했다. ‘애들이 이번 봄에 쓸데없는 신경을 써서 팔자에 없는 구경을 하고 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장가계에서 현지 가이드가 전해 준 이야기들을 보태어 가며, 세상에 그런 절경은 없을 것이라고 소감을 펴 나갔다. 이웃들이 부러운 듯 경청하자 K씨의 이야기는 소통의 신명을 얻는 듯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나섰다. 농협인가 어딘가에 있다가 작년엔가 퇴직한 L씨가 장가계 이야기를 그냥 죽 듣고 있지 못한다.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나섰다. “장가계 경치, 그 참 일품이지. 내가 3년 전에 다녀왔는데, 한국 사람들 몰라서도 못 갈 때야. 나는 장가계 들러 원가계까지 둘러보고 왔었는데. 하여튼 관광 상품 중에서도 제일로 비싼 걸루 다녀왔지. 내 작년에도 자식들이 하도 다녀오라고 해서 말이야, 중국 황산이라는 데도 갔다 왔는데 말이야, 황산은 장가계하고는 또 다른 맛이야. 그 케이블카로 올라가면서 단풍 보는 맛이 끝내주더라고!” 물론 처음 장가계 이야기를 꺼내었던 K씨의 말은 이미 끝나 있었다. L씨가 무어라 이야기 마당으로 K씨를 다시 끌어 들였으나 그는 더 이상 소통 의욕을 잃은 듯했다. 얄미웠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일컫는 용어 중에 ‘I-knew-it-all-along’ 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굳이 우리말로 옮기자면 ‘나도 그거 죽 다 알고 있어’ 쯤의 뜻이 되는 말이다. 남의 이야기를 그 사람의 마음 형편이 되어서 들어 주지 못하는 마음 상태를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심리적 현상은 일종의 권력 부리기(powering)에 해당한다.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I-knew-it-all-along’ 현상은 곧 ‘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정치권력이든 지식 권력이든 부의 권력이든 가진 사람이 듣기를 잘 할 수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L씨가 그렇게 끼어들 듯이 말하지 않고, K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참으로 좋은 구경했다. 효자 자식 두어서 참 좋겠다”고 말해 주었다면 어떠했을까. 두 사람의 소통은 아름다운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 내며 꾸준히 발전해 갔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K씨는 알 것이다. 아니 동네 사람들 모두 알 것이다. L씨는 이미 그 이전에 중국 여행 경험이 많았다는 것을…. 그러함에도 전혀 아는 티 내지 않고, K씨의 장가계 이야기를 한없는 공감적 이해의 마음으로 들어 준, L씨의 인격을 우러러 볼 것이다. 그런데 그날 L씨는 좌중으로부터 얄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L씨가 가진 듣기 능력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보통 듣기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눈다. 처음 단계는 ‘들리기(Hearing)’의 단계이다. 말소리가 그냥 귀에 들려오는 수준을 말한다. 청각 기관에 장애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본 청각 능력의 수준을 ‘들리기’의 단계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듣기(Listening)’의 단계이다. 말소리를 식별하고 단어의 소리와 의미를 알아차리며 들을 수 있는 능력의 단계이다. 주의와 집중에 의해서 듣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냥 들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단어나 문장의 소리와 더불어 그 의미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따라서 이 ‘듣기’의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훈련과 학습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는 ‘총체적 이해로서의 듣기(Auding)’이다. 이 단계에서 듣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경험과 배경 지식이 모두 동원되어서 말하는 사람의 메시지를 감상하고 평가하여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듣기 능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이다. 듣는 메시지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가 지닌 다양한 맥락을 모두 고려하여 그야말로 총체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K씨와 L씨의 사례를 보면, 참으로 ‘듣기 능력’의 최상은 끝이 없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인지적 측면에서 한껏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총체적 이해로서의 듣기’를 넘어서는 능력임이 틀림없다. 아니 그것은 그냥 능력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성숙성이 잘 우러난 인격의 경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잘 듣는 사람’이 보여주는 최선의 경지란 ‘잘 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더 부연하여 말하면, 들어 준다는 표도 내지 않고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향한 겸손과 존중이 내면의 덕성으로 배어들어서 그것이 듣기의 장면에 자연스럽게 비치는 것이다. 잘 듣는 능력 속에 이런 도덕적 자질이 숨어 있다니. 그런데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남의 말을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흔한 말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든 몸의 노역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귀가 닳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듣는 일의 쉽고 어려움을 눈에 보이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기준으로만 파악하려는 속 좁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듣기의 지혜에 가 닿을 수 없다. 마땅히 훌륭한 듣기란 마음의 다스림과 내면의 수양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가장 저급한 듣기의 수준이 무엇인지를 눈치 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I-knew-it-all-along’에 빠져 있는 듣기 심리라 할 수 있다. 나는 가르치는 선생이다. 수업도 소통의 일종이라고 한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발신자의 자리에 선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한다. 수업시간에도 주로 내가 말을 하고, 학생들과의 대화 시간에도 주로 내가 말을 하고 있다. 누군가 풋풋한 의견이라도 내려고 하면, 누군가 득의양양한 경험이라도 자랑할라치면, 그걸 열심히 경청하려고 하기보다는, 나는 금방 노련한 경험자인양 ‘I-knew-it-all-along’의 심리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어 보인다. 참으로 많이 그러했었다. 미명(未明)의 한복판에서 갇혀 있었다고나 할까. 잘 듣는 능력이란 기능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덕성의 영역에 있음을 이렇게 무디게라도 깨달아 가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소치가 세운 화실 '운림산방'의 전경. 최효찬 | 자녀교육 컨설턴트, 저자 유대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모범 극성스러운 자녀교육 때문에 '유대인 엄마(Jewish Mom)'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낸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에서 아버지가 주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먼저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고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가려 노력한다. 랍비 토케이어는 한가한 시간이면 언제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데, 이제 겨우 다섯 살인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흉내를 내면서 '공부하는 척'을 한다고 한다. 아이는 서재에서 가장 두꺼운 책을 꺼낸 다음 의젓하게 앉아 페이지를 넘기면서 눈을 치켜뜨는 아버지의 폼을 흉내 낸다. 물론 아직 글자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을 알 리가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관념이 어린 그의 가슴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그의 정신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책 읽는 모습을 흉내 내면서 성장한 어린이 중에 세계적인 명사가 된 사람이 유대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의 직위에까지 오른 헨리 키신저 박사이다. 그는 어렸을 때 매일 아버지와 함께 공부를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독일 여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일가가 살던 아파트는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닉슨의 중국방문 등을 일구어냈고 중동평화에 앞장서는 등의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키신저는 외교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 이면에는 19세기 유럽 외교사에 대한 그의 넓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가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모습이 그를 깊은 학문 속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재능은 억지로 이어지지 않는다 진도 운림산방의 소치 허련(1808~1893)에서 시작된 화계도(畵係圖)는 5대째 이어지고 있다. 소치에 이어 2대는 4남 미산 허형이 이었고 3대는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 임인 허림으로, 4대는 허림의 아들 임전 허문으로, 5대는 남농의 손자 허진(전남대 미대 교수)과 4촌 간인 허은, 허청규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 허재, 허준, 허윤정, 허윤선 등 10여명이 줄줄이 예비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한 가문에서 한 사람의 인재를 키우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5대째 화계도를 이어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소치와 남농으로 대표되는 이 집안이 5대 200년에 걸쳐 30여명에 이르는 걸출한 화가를 배출하고 있는 비결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냉정한 대물림'에 있었다. 아이가 부모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결코 대물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냉정한 대물림을 하지 않으면 결코 아버지의 벽을 넘어 더 나은 경지에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를 마지막으로 꽃피운 소치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제자로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될 때에도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그림을 좀 그린다 하면 추사 휘하에 들어갈 정도로 그의 명성은 절대적이었다. 소치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자 자칫 높은 파도에 밀려 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제주행 배에 올랐다. 추사와 소치의 목숨을 건 사제지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추사는 소치가 재능을 펼 수 있도록 당대의 권력자들을 소개해주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추사는 외척(영조의 장녀 화순옹주가 증조모)이자 고조부 김흥경이 영의정을 지낸 전통 명가의 후예다. 소치가 구현해낸 이상적인 화풍은 다름 아닌 추사가 추구했던 품격 있는 문인화인 남(종)화였다. 추사는 시·서·화가 일치하는 격조 높은 문인화를 원했는데, 이를 소치가 구현해냈다는 것이다. 소치는 42세 때에는 헌종 앞에서 어연(御硯, 임금이 쓰는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영예를 얻으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구축했다. 조선시대의 화가는 크게 '화원화가'와 '사대부화가'로 나뉜다. 화원화가는 직업화가로서 주로 왕실에 소속된 화가들이다. 사대부화가는 정치적 탄압이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길이 막혔을 경우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양반출신들이다. 겸재 정선의 경우도 과거를 몇 번 보다 떨어져 결국 화가의 길을 걸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사대부 화가들이 주로 그리는 그림이 문인화(남화)였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화단의 권력은 직업화가(왕실소속 화원화가)들에게 있지 않고 사대부화가들에게 있었다. 그리고 사대부화가들이 그리는 격조 높은 문인화가 이상적인 것으로 평가받았다. 반면 직업화가가 그리는 그림이 북(종)화였는데, 여기서 양반이나 사대부가 그리는 남화를 숭상하는 '상남폄북(尙男貶北)'의 풍토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고 한다. 상남폄북이란 남종화를 숭상하고 북종화를 배척하는 중국의 회화 이론으로 동기창(董其昌), 막시룡(莫是龍) 등이 제기한 남북종론(南北宗論)에 기초한다. 남북종론이란 역대의 화가들을 문인화가와 직업화가로 나누고, 그 작품을 각각 남종화와 북종화로 나눈 것이다. 문인화가들이 그린 남종화는 고아하고 미적 가치가 높으며, 직업화가들이 그린 북종화는 천박하고 미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였다. 상남폄북론은 중국의 근·현대 회화사는 물론 한국의 회화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추사에 의해 자신의 이상적인 문인화를 그리는 화가로 신임을 받은 소치는 50세 때 귀향해 진도에 '운림산방'이라는 화실을 세웠다. 학문이 짧으면 붓을 들지 말라 이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후손들과 제자들이 대거 배출되었고 남농과 의제에 의해 한국 남화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다. 소치는 4남을 두었는데 미산 허형이 그 뒤를 이었다. 시·서·화에 뛰어나 소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장남 허은은 18세에 요절했다. 소치는 이를 애석하게 여겨 허은에게 주었던 호(미산)를 막내아들 허형에게 물려주면서 대를 잇게 했다. 그러나 그림에 재능을 지녔던 미산은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에야 끝에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소치는 장남에게만 그림 공부를 시키려고 하였다. 4남 중 막내인 미산은 서당에 가기가 싫어 지게를 지고 산에서 나무를 해 날랐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산에서 나무나 하자, 소치는 글공부를 싫어하는 막내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글공부를 게을리 하면 결코 화가로 대성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글공부가 싫었던 미산은 늘 아버지 몰래 사랑방에 숨어들어 형이 그림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들키고 말았다. 문순태가 쓴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에는 이에 대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놈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산으로 쏘다니더니 이제는 네 형 그림 공부까지 방해하는구나!" 아버지의 호통은 대단했다. "아버님, 아우의 그림 솜씨도 대단합니다. 얘, 아버님께 한번 보여드려라!" 미산의 맏형은 가끔 아우가 붓장난하는 것을 훔쳐보았으며 그 솜씨가 대단한 데 놀란 터라 아버지께 보이기를 권하였다. "이깐 놈이 무슨!" 소치는 아예 미산을 무시해버렸다. 은근히 부아가 난 미산은 먹을 갈아 탐스러운 묵모란(墨牡丹) 한 그루를 그렸다. 소치는 아들의 솜씨에 놀랐다. 농담(濃淡)을 비끼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러나 소치는 아들의 솜씨를 칭찬해주기는커녕, "이것도 그림이라고 그렸느냐?" 하고 꾸짖으며, 미산이 그린 묵모란을 꾸적꾸적해서 휙 던져버렸다. 미산이 그린 묵모란을 처음 본 소치는 붓 솜씨는 놀랍지만 결코 성가(成家)하지는 못할 것으로 헤아림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산의 글공부가 너무 얕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치의 예견대로 미산은 끝내 아버지가 바라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한다. 5대째 화통 잇는 5가지 비결 자칫 대를 이어야 한다는 집착이 강할 경우 가족의 정에 이끌려 분별력을 잃을 수 있지만, 소치가는 그렇지 않았다. 후계를 뽑는 대물림 과정은 핏줄의 정을 훨씬 뛰어넘는 엄격한 것이었다. 허진은 5대째 화가로 내려올 수 있었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붓 재주 하나로는 결코 화가로 이름을 남길 생각을 말라. 우리나라 예체능교육의 문제점은 기능이나 기교 위주의 교육에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예체능에서도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소양을 중요시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화가나 음악가로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단지 기교만 가지고 대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넓은 지식과 인성이 뒷받침될 때 예술의 거장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나라도 화가로 대성한 인물들을 보면 시·서·화의 어느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에 고루 바탕을 두고 있었다. 소치의 후계자는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되었기에 글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소치는 훌륭한 화가로 성장하자면 붓 재주보다는 사람의 됨됨이와 높은 학덕이 앞서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먹을 항상 입에 달고 다녀라. 허진은 법대를 목표로 공부하다 고1 때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미대에 가기로 마음을 먹고 그림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남농이나 그의 부친도 화가로서 대를 이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게 자신의 천직임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강요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던 것이다.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끼'를 느끼고 재능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허진은 자신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고3 여름방학 때 목포에 내려가 할아버지 밑에서 사군자를 치며 처음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남농은 손자가 그림을 그려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반응이 없었다. 남농이 아무 말 없이 난을 하나 쳐주면 일주일이건 열흘이건 잘 그릴 때까지 그것만 그려야 했다. 할아버지는 늘 먹을 입에 달고 살 생각이 없으면 당장 그림을 그만두라고 늘 강조했다고 한다. 또 남농은 손자가 서울대 미대에 합격해도 손자에게 축하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할아버지가 무척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 사후에야 친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자만심을 경계해 손자에게 직접 칭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인연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 진도의 가난한 청년 소치가 조선 화단의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 사는 녹우당1)과의 인연과 함께 초의선사, 추사 김정희로 이어지는 큰 스승을 만났기 때문이다. 녹우당에서는 그림에 대한 기본지식을 공부할 수 있었고 초의선사는 또 추사에게 소치를 소개해주었던 것이다. 소치의 명성은 두 스승의 입을 통해 번져나갔고 마침내 임금(헌종)이 그를 불렀다. 허진은 "요즘도 가끔 소치 할아버지의 이런 행로를 따라 녹우당을 찾아 소치로부터 시작된 인연을 되새겨보곤 한다"고 말한다. 넷째,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운림산방의 최고 스승은 다름 아닌 가문 자체였다. 후손들은 소치, 남농 등 그 이름만으로도 존경이 우러나왔고 닮으려 노력했으며 뛰어넘기 위해 도전했다. 그래서 그들을 뒤쫓은 후손들은 가난마저도 대물림했다. 허진은 서울대 미대를 거쳐 남농의 대를 이으면서 남농의 묵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화의 경지를 열고 있다. 허진의 그림에는 고답적인 산수의 묵향보다 현실이 살아있는 에너지가 묵향보다 더 강렬하게 전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형편이 어렵더라도 항상 베풀며 살아라. 인연의 소중함 때문에 남농 생전의 목포집은 이 고향의 사랑방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허진에 따르면 할아버지 화실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린 시절 사촌들과 함께 놀다가 화실에 가보면 커다란 책상을 놓고 작업하시는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무릎 꿇고 먹을 가는 제자들, 바둑 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등의 모습이 마치 한 폭의 풍속화를 보는 듯 했다고 한다. 집안의 명성에 기대지 않는 노력 남농의 며느리이자 허진의 어머니 역시 생전에 베푸는 삶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허진의 어머니는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기꺼이 베풀었다고 한다. 허진의 친구들도 "어머니 때문에 허진을 미워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라고 한다. "어머니는 늘 '인사를 잘해라', '겸손할 줄 알아라'를 반복해서 들려주셨어요. 특히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또 천성적으로 남에게 항상 베풀기를 즐겼습니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가면 어머니는 항상 진수성찬을 마련해 친구들을 대접해주곤 하셨어요. 제 친구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허진의 모친은 자녀교육에 정성을 기울여 미술계에서는 모범적인 자녀교육을 한 어머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문화관광부가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1999)'을 수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허진의 어머니는 생전에 허진에게 엄격한 교육을 했다. 특히 허진에게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노력을 하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주었다. 혹 허진이 할아버지인 남농의 명성에 의지해 자기계발에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언은 허진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다. 허진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기 전에는 결코 남농의 손자임을 내세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허진은 문화관광부장관이 수여하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은혜에 답했다. 이에 앞서 남농이 대한민국문화예술상을 수상(1976)했는데, 이로써 3대에 걸쳐 정부로부터 상을 받은 것이다. 소치가는 그림 재주 하나에만 집착하지 않았다. 소치는 재능 하나만으로는 결코 대가의 경지에 오를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소치가 "학문이 얕으면 절대로 붓을 들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진정한 교육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붓끝 하나의 재능으로는 화가로 우뚝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때로 부모들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게 평범한 사람들의 인지상정인 것이다. 소치 가문에서는 이러한 얕은꾀가 결코 통하지 않았다. 소치가가 5대째 화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화가가 되기에 앞서 인간이 되고, 학문에 힘쓰도록 가르친 철저한 인성교육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daum.cafe.net/parque) 거대한 군사종교세력의 등장 이슬람교의 창시자는 물론 마호메트이다. 그가 탁월한 종교적, 정치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아라비아 전체를 통일하고 그의 후계자들이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건설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가 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은 이란의 사산 조(朝) 페르시아와 오랜 싸움을 계속하는 바람에 6세기 후반에 들어와 '비단길'과 '바다길'이 거의 막혀 아시아에서 오는 상품이 아라비아 반도로 집중될 수밖에 없없다. 자연히 그 중심지인 메카가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크게 번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호메트는 610년에 이슬람교를 창시했다. '이슬람'이란 아라비아말로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부와 권력이 대상인(大商人)에게 편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알라 앞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사회변혁을 통한 일종의 계급투쟁이었기 때문에 결국 메카에서 메디나(현재의 야슬리브)로 추방을 당하였다. 서기 622년 7월 16일의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것이 이슬람력(태음력)의 기원이다. 마호메트 사후, 이슬람은 마호메트의 후계자이며 신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하고 그들의 지도하에서 대 정복사업을 하였는데 이를 지하드[聖戰]라 한다. 이슬람은 정복사업을 통해 급속한 속도로 세계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다. 상권 확대를 위한 정복전쟁 이슬람 군대가 동방에서 이란의 사산 조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서방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인 이집트와 시리아를 점령함으로써 본격적인 지하드의 막이 올랐다. 한편 제4대 칼리프인 알리가 내분으로 암살을 당하니 서기 661년 무아위야(Muawiya)가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를 세우고 인도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걸치는 땅을 정복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4대 칼리프 알리의 암살을 계기로 이슬람 세계는 크게 시아파와 수니파로 분열되어 두 종파 사이의 갈등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아파는 알리와 그의 자손만이 마호메트의 후계자로서의 정통 칼리프로 인정하는 반면에, 수니파는 이슬람교의 신도 누구나 자격만 갖추면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정복사업 이면에는 포교보다는 경제적 이익확대, 다시 말해서 상권 확대가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마호메트 시대의 아라비아 반도는 척박한 불모의 땅이었고, 북부를 지나는 풍요로운 실크로드 지역은 그리스도교의 비잔틴 제국과 조로아스터교의 사산 조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어 아랍상인들이 그 지역을 통과하려면 통행세 또는 높은 세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아라비아를 통일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생각하면 화도 나고 지금까지 바친 세금이 아까워지기 시작하였다. 자기들이 직접 무력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지배하면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통행세라는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권 확대를 위한 정복사업 결과, 이슬람은 서방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 하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원주민을 해방시키는 존재가 되었으나 반면에 그 땅에 군림하고 있었던 그리스도교를 배척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나중에 십자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8세기 전반에 이슬람 제국(사라센 제국)은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우마이야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이슬람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에 역대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들은 이슬람으로부터의 국토회복 전쟁에 매달려야 했다. 이슬람 제국의 갈등과 분열 이슬람교는 아랍인에서 시작하여 조로아스터교의 이란인을 개종시키더니 투르크인(터키인) 등 많은 민족으로 확산되어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고 중세의 문명을 이끌어 나갔다. 661년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 왕국은 근 1세기 동안 세습적으로 칼리프를 계승하면서 활발한 통상과 문화적 융성시대를 맞이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인도에서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슬람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반대파가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마호메트 가문이 가장 불만이 많았다(암살당한 알리는 마호메트의 사위). 그들은 남 이라크를 거점으로 하여 마호메트의 조카인 아바스의 혈통을 이은 아바스가 중심이 되어 8세기 중반에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시키고 아바스 왕조를 세웠다. 또한 수도를 바빌론이 융성하였던 메소포타미아에 '평안의 도읍지'라는 뜻인 바그다드로 옮기고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로 키워가면서 약 75년간에 걸쳐서 크게 번창하였다. 예를 들어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설화와 민담을 모은 아라비안나이트(아라비아 야화)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시드는 역대 칼리프 가운데 가장 걸출한 군주였다. 아무튼 당시 바그다드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였고 사라센 대제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전 대통령의 중동패권주의와도 연관이 있다. 비록 지금은 미군의 포로가 되어 재판을 받는 신세지만…. 8세기 초에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를 정복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인도 북서부까지 그들의 영향권 내에 두었다. 732년 이슬람 군대는 이베리아 반도의 게르만 국가인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계속 북상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을 침략하였으나 메로빙가의 궁재였던 샤를 마르텔에 의해서 격퇴되고 말았다. 패배한 이슬람군은 피레네 산맥의 남쪽으로 후퇴하였지만 서유럽의 세계는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유럽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아직 유럽 국가의 틀이 잡히지 않은데다가 프랑크 왕국도 국가로서의 틀이 완전히 여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우마이야 왕조가 망하고 아바스 왕조로 교체되자,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던 잔존세력들은 코르도바 칼리프국을 세우고 이집트에는 카이로 칼리프국이 성립되어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예인 파티마 왕조가 통치하였다. 한편 바그다드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도 10세기에서 11세기 중반까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는데, 아랍인들은 11세기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온 셀주크 투르크인에 의해서 페르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듯하였으나 지배주체만 바뀌었을 뿐이다. 우마이야 왕조는 점령지의 주민들에게 일정한 토지세와 인두세를 부과하였다. 설령 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더라도 면제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코란이냐, 칼이냐' 즉 '이슬람교를 믿지 않으면 죽는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사실 왜곡 과장된 말이다. 이슬람 군대가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서방 그리스교 국가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한 말이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 다시 말해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 신도들도 다 같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대우를 받아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의 토대 위에서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기반으로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로아스터교에서 개종을 한 이란 민족(페르시아)은 '세금도 내고 개종도 했는데 그럼 우린 뭐냐'면서 불만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란인들의 불평불만을 선동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세력이 다름 아닌 우마이야 왕조에 비판적인 집단이었다. 특히 마호메트의 조카인 아바스의 혈통을 이은 아바스가(家)가 정권을 탈취하여 아바스 왕조가 세워졌는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잔존세력들은 코르도바를 수도로 하는 후(後)우마이야 조를 세움에 따라 756년 이슬람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새로운 지배자, 셀주크 투르크족 서기 751년에 세계사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바스 왕조의 군대가 중앙아시아의 탈라스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이 때 포로로 잡힌 당나라 병사 가운데 제지술(製紙術)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곧 사마르칸트에 연행되어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해주었다. 중국으로부터 배운 제지기술은 훗날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서양인들도 동양의 선진문명에 감탄하여 사막을 가로지르는 동쪽 땅을 동경하게 되어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 이후 동양과의 교역에 더욱 열을 올리는 요인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지리상의 대발견과 대항해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아바스 왕조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10세기에 들어와 이집트는 마호메트의 딸 파티마의 후예가 통치하였는데 파티마 왕조는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신도시 카이로로 옮김으로써 오늘날 이집트 공화국의 수도가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서기 946년에 이르자 이란의 시아파 군사정권인 부와이흐 조가 동 칼리프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아라비아인의 아바스 왕조로부터 정교일치의 대권을 넘겨받았다. 이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옛 조국(사산 조 페르시아)을 멸망시킨 이슬람 세력에게 조상대대로 믿어오던 신앙(조로아스터교)까지 버리면서 개종했지만 찬밥신세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라는 불만이 쌓여있던 터라 아바스 왕조의 쇠퇴를 틈타서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전체 이슬람인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기존 아랍인 칼리프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남겨 두었다. 하지만 이란인 정권(부와이흐 조)도 11세기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바그다드를 지배함으로써 십자군 전쟁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스승의 날과 관련하여 많은 부정적인 논의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스승의 날인 5월 15일에 집단적으로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스승의 날을 아예 없애자든가, 학년 말인 2월로 옮기자는 의견 등이 집중적으로 제기되면서 교사들이나 학부모들에게 스승의 날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스승의 날이 기타 여러 원인들로 인해 본질이 왜곡되면서 스승의 날의 존속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중국에서는 스승의 날이 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이 날만큼은 전국적으로 학생 교육에 전념하는 교사들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국가적으로 기념하는 명실상부한 교사를 생각하는 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중국에서는 9월 10일을 우리의 스승의 날에 해당하는 ‘교사절(敎師節)’로 정해놓고 있다. 교사절은 중국의 교사법(敎師法) 6조에 명시되어 있는데, 교사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한층 더 높이고, 교사의 업무를 사회에서 최고로 존경받고, 흠모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직업으로 만들며, 스승을 존중하고 가르침을 중시하며 지식을 존중하는 동시에 인재를 존중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자 법률에 교사절을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스승의 날, 법에 명시 중국의 교사절은 1985년 제정된 것으로 1985년 1월 11일 국무원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심의를 제청하여 교사절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1985년 1월 21일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9차 회의에서 동의를 얻어 매년 9월 10일을 교사절로 기념하도록 하였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교사절이 되면 그동안 사회적인 관심이 소홀했던 교사들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이 이루어진다. 정부차원에서 모범교사들을 발굴하여 표창하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묵묵히 사도의 길을 실천하고 있는 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등의 국가적인 행사들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개인적으로는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선생님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축하카드와 함께 꽃이나 정성이 담긴 선물 등을 선생님들에게 전하기도 하며, 국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옛 스승을 찾아 스승의 은혜에 감사를 표시하기도 한다. 교사절에는 중국 교육에 공헌이 있는 교사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표창이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교사들에 대한 장려제도는 ‘교사와 교육종사자 장려 규정’에 명시되어 있는데, 1998년에 제정된 이 규정에 의하면 오랜 기간 교육에 종사해 오면서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교사나 교육종사자들에게 ‘전국우수교사’와 ‘전국우수교육종사자’의 칭호를 수여하며, 이들 중 특별한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국모범교사’와 ‘전국교육계통 선진종사자’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전국모범교사’, ‘전국교육계통 선진종사자’와 ‘전국우수교사’, ‘전국우수교육종사자’는 3년마다 선발하여 교사절에 표창한다. 이들 교사들의 선발 정원은 해당 지역 교직원 총수의 1만분의 2 이내로 제한하며, 그 중 ‘전국모범교사’, ‘전국교육계통 선진종사자’는 해당 지역 교직원 총수의 10만분의 6 이내로 제한하도록 되어있다. 이렇게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영예의 상을 수상하게 되는 교사들은 국무원 및 중국 중소학유아교사장려기금에서 제공하는 상금을 받게 되며, ‘전국모범교사’ 및 ‘전국교육계통 선진종사자’의 칭호를 받게 되는 사람들은 국가의 규정에 의해 성(省)급 노동 모범의 대우를 받게 된다. 특히 사립학교 교원으로서 모범교사에 선정된 사람들은 월급에서 우대를 받게 된다. 스승의 날에 대대적으로 표창하는 ‘전국모범교사’, ‘전국교육계통선진종사자’ 표창 이외에도 중국에서는 수업을 잘하는 교사나 집단에게 ‘교학성과표창’을 수여하여 교육종사자들로 하여금 교수·학습에 매진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이 표창은 ‘교학성과장려조례’에 근거하여 수여되는 데 국가급과 성(省)급 표창으로 나뉘어 진다. 이 조례에 의하면 국가급 표창은 특등, 일등, 이등의 세 등급으로 나뉘며, 이들 수상자들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증서와 장려금이 지급된다. 교학성과표창을 받는 교사들은 직급 상승 및 봉급 인상에 있어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수업을 특별히 잘하는 교사들에 주어지는 이 표창은 4년에 한 번씩 평가가 이루어진다. 국가가 스승존경 풍토 조성에 앞장 현재 중국에서는 9월 10일 교사절에 교사들에 대한 국가차원의 표창 외에도 국가차원에서 교사들의 사기 진작과 국민들에 대한 스승존경의 풍토 조성을 위한 홍보활동도 이루어지고 있다. 일례로 작년 교사절의 경우 중국 국영방송인 CCTV에서는 ‘2005-중국의 초석’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인 스승의 날 특집 방송을 했다. 교육부와 CCTV가 공동으로 마련한 이 날 프로그램은 전국 1200만 명의 교사들에게 존경과 축복을 헌사하기 위해 이브닝 파티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다양한 공연과 더불어 교사 탐방, 11명의 일선 교사들의 우수한 행적에 관한 이야기, 각종 기념행사 상황 등을 방송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교육과 교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중국에서 해가 갈수록 높아지는 교사절의 열기와 정부의 교사에 대한 관심은 중국 정부의 교육 중시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 20여 년간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중국정부는 향후 세계와의 경쟁 속에서 교육만이 중국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교육개혁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교육개혁정책은 최근 들어 의무교육법 개정, 교육과정개혁, 교사자격제도 개혁, 빈곤지역 학생들에 대한 지원 강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 같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중국교육은 한 단계 발전하고 있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최근 호주 10대들의 가장 위험한 환경요소 가운데 ‘마약’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높다. 즉, 학원폭력이나 학업 스트레스, 가정 문제, 이성 관계 고민 등 청소년들을 둘러싼 직간접적인 부정적 영향 가운데 약물 사용에 따른 것이 단연 으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마약에 중독된 10대들의 연령층도 점차 낮아지고 있고 심지어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마약에 손을 대는 일이 보도되는 지경이다. 호주 청소년들의 마약 복용률은 16~17세의 경우 약 20%, 18~19세의 경우 30% 선을 웃돌고 있어 이 수치는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선 것이라는 지적이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특히 12~15세 연령층에서는 14명당 한 명꼴로 불법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주위에서 보아도 자식이 마약을 하다가 죽었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마치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사례처럼 흔하게 나돌고, 마약으로 인해 정상적인 생활과 학업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른 자녀 문제로 속을 끓이는 부모들이 한둘이 아니다. 자식 가진 부모들은 모이기만 하면 ‘마약만 안 해도 효도’라는 말을 할 정도로 호주 청소년들의 마약 복용문제는 가장 가까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와도 같은 요소이다. 그런 중에 지난달 초순 경, 10학년인 작은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들려온 소식은 말 그대로 충격, 그 자체였다. 같은 학교 11학년(고 2) 여학생 세 명이 생일 파티를 하면서 마약을 복용하다가 한 학생이 절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접촉한 마약이 치사량에 이르렀는지, 아니면 그 학생의 체질로 인해 특별히 약물 부작용이 있었는지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지만, 말로만 들어오다 아이들이 그렇게 쉽사리 마약을 접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 사건 전에도 학생들이 수업 중에 소위 ‘땡땡이’를 쳤을 경우 일차적으로 마약을 했는지 안 했는지부터 조사한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점에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호주에서는 또래들 몇이 모이기만 하면 ‘마약을 하거나 적어도 한 번 정도는 해 봤다고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매스컴이나 학부형들, 심지어 당사자 아이들의 입을 통해 자연스레 들어왔지만 그래도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새삼 두려웠던 탓이다. 통계가 보여주듯이 호주 10대들 사이에는 그 나이에 보통 해보는 흡연 경험과 맞먹는 정도로 마약이 흔하게 돌고 우리 돈으로 3~4천 원 정도면 큰 어려움 없이 일정량의 약물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마약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부모와 학교 측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마약거래 또한 학생들끼리 음성적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비밀스런 장소에서 직접 재배를 하거나 조제를 하는 일도 있어 그만큼 적발에 한계가 있다. 호주의 중·고등학생들 가운데는 약물 복용이 사유가 되어 정학을 맞거나 심지어 퇴학을 당하는 경우가 다른 사유에 비해 월등히 많고,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후에도 옛 급우들과 접촉하면서 심할 경우 마약 거래 책으로 나서는 일까지 있어 우려를 더욱 증폭시킨다. 몇 주 전만 해도 뉴사우스 웨일즈 주의 한 중·고등학교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학생 20명에게 무더기로 정학처분을 내리고 이들 중 상습 복용 여부에 따라 퇴학도 고려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학교마다 학생들의 마약 접촉에 대해 강경대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단속은 어디까지나 ‘학내 마약 불용인’에 근거할 뿐, 앞서도 말했듯이 마약 사용과 관련하여 제적된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계속 하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형편이다. 실상 뉴사우스웨일스 주는 공립학교를 중심으로 교과과정 중에 마약 방지 프로그램이 운용되고 있고 정기적으로 외부 전문가를 초빙, 학생들에게 마약과 관련한 폐해를 경고하고 있지만 실상 학내 마약 반입 근절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4월 퀸즐랜드 주에서는 점심시간에 환각작용을 불러일으키는 향정신성 약물을 집단으로 과다 복용한 남녀 중학생들 15명이 구역질과 심장박동 증가 등의 부작용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학교 측과 학부모들은 의사의 처방전을 통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치료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약물이 교정에서 다량 유통되고 있었던 사실에 충격과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퀸즐랜드주 교육부는 이후 모든 학교에 학생들이 가지고 등교하는 약품에 대한 관리 정책을 도입했지만 실효성 여부에 대해서는 역시 미지수이다. 이처럼 학교 측과 학부모들의 염려가 극에 달해있는 상황에서 지난달 시드니에서는 어처구니없게도 공립 고등학교의 한 임시 교사가 학생에게 마약을 공급한 사실이 드러나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마치 내부 소행자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처럼, 학부모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으며 학내 마약퇴치에 전력을 쏟고 있던 교육부 또한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하면 더욱 믿기지 않는 일은 부모들 중에 자식에게 아예 마약을 대주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자식의 마약 중독 상태가 심각해지면서 마약을 구하기 위해 절도까지 행하게 될까봐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부모가 나서서 마약을 구입해 준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마약 중독 자녀에 대한 그런 식의 대응이 더욱 깊은 중독으로 몰고 갈 것은 자명하다. 오죽하면 그러겠느냐는 부모들의 무기력한 항변에 연민이 느껴진다는 반응도 있지만 자식들이 마약에 손을 대고 중독 지경에 이른 암울한 현실을 통과해 본 경험자들은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손을 내젓는다. 이들에 따르면 아이들이 마약을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시점에서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하며, 꾸준한 재활치료를 통해 다시 정상생활을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자녀들이 한번 마약을 접한 것에 대해 지나친 반응을 하는 것을 자제할 것도 권하고 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때에 부모들의 호된 질책을 받게 되면 수치심과 죄의식이 깊어져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더욱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조기 영어교육 열풍이 불고 있다. 한 달 수업료 100만 원이 넘는 영어 유치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어린이 영어 과외, 해외연수가 유행이다. 아이의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초등학생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발음을 잘하게 하려고 혀 수술까지 한다고 한다. 조기 영어교육은 언어 습득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려서 말을 배워야지, 이 시기가 지나면 '기회의 창'이 닫혀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어른이 된 뒤에도 영어에 많이 노출되고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얼마든지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뇌의 불균등 성장이 '결정적 시기' 좌우 언어 학습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가설은 1967년 미국의 언어학자 에릭 레너버그 교수가 〈언어의 생물학적 기초〉란 책에서 처음 내놓았다. 그는 인간의 언어 습득은 뇌나 발성 기관의 발달 특성 때문에 사춘기가 지나면 어렵다고 주장했다. 유명한 언어학자인 매사추세츠 공대의 스티븐 핑커 교수는 6세부터 사춘기까지가 언어를 배울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언어 본능〉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왜 언어 학습에 결정적 시기가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뇌가 불균등 성장을 한다는 데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폴 톰슨 교수는 핵자기공명영상장치를 이용해 3살부터 15살까지 어린이 뇌의 성장 과정을 4년 동안 추적해 뇌 성장 지도를 2000년 네이처에 발표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는 3~6세 사이에는 전두엽이 발달하고 6~13세까지는 두뇌의 성장이 앞부분에서 점차 언어를 관장하는 뒷부분으로 옮겨간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두뇌의 각 부분이 골고루 균등하게 성장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톰슨 교수는 6∼13세가 외국어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뇌 언어 영역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시작되는 13세 이후에는 뇌 언어 영역의 발달이 급속히 둔화된다. 그렇다고 톰슨 교수가 사춘기 이후에는 외국어를 배울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춘기 이전에 배워야 쉽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춘기 이전에 언어 영역을 담당하는 뇌에 손상을 입은 경우 이를 다른 영역이 메워 말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사춘기 이후에 언어 영역을 다치면 말을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톰슨 교수는 또한 13~15세까지 운동신경을 담당하는 뇌 회로가 50% 가량 삭제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따라서 운동신경의 훈련을 필요로 하는 악기나 운동도 그 이전에 교육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선천적으로 귀머거리가 돼 말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사인 언어인 수화도 배우지 못한다는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캐나다 맥길 대학 레이첼 메이베리 교수는 나이가 어렸을 적에 귀머거리가 된 사람일수록 나중에 수화를 배우는 능력도 떨어진다고 2002년에 발표했다. 어렸을 적에 언어를 배우면 언어중추가 발달하지만 귀머거리여서 말을 배우지 못하면 언어 학습과 관련된 뇌 영역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나중에 다른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언어 습득은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져 결정적 가설을 반박하는 연구 결과도 심리학, 언어학, 교육학 분야에서 만만치 않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 신경과학자인 앙겔라 프리데리치 박사는 2001년에 결정적 시기 가설을 부정하는 연구 결과를 '미국과학아카데미 회보'에 발표했다. 그는 객관적 분석을 위해 '브론칸토'라는 인공 언어를 가르치고 뇌의 활동을 관찰했다. 그 결과 뇌는 인공 언어를 처리할 때나 모국어를 할 때나 똑같은 활동 패턴을 보였다. 이는 '결정적 시기 가설'을 신봉하는 학자들이 모국어와 나중에 배우는 외국어는 뇌에서 다른 방식으로 처리된다고 주장해 왔던 것과는 다른 결과였다. 나이가 들면 외국어를 배우기 어렵다는 주장은 외국어와 모국어는 뇌에서 서로 다르게 처리된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 스탠포드 대학 교육학자 겐지 하쿠다 교수는 인구 센서스를 활용해 중국과 스페인계 이민자의 이민 시기별 영어 능력을 조사했다. 그의 논문에 따르면 일정 나이가 지나 영어 능력이 뚝 떨어지는 현상은 없었다. 그는 "결정적 시기 가설은 근거가 희박하며, 단지 나이가 들수록 완만하게 언어 습득 능력이 떨어지는 것일 뿐이다"고 말한다. 캐나다 맥길 대학 프레드 기니시 교수가 다른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도 결과는 비슷했다. 이 조사에서는 놀랍게도 어른이 된 뒤 이민한 사람의 3분의 1은 어려서 이민한 사람 또는 미국 본토인과 같은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다. 그는 외국어 습득 능력은 나이 외에도 가정의 경제력, 인지 능력, 교육 정도 등 사회적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고 밝혔다. 뉴욕 시립대학 지셀라 시아 교수는 아예 '결정적 시기 가설' 대신에 '주요 사용 언어 교체 가설'을 주장한다. 이민 온 어린이가 어른보다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어린이의 경우 학교에서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노출되는 반면 어른은 가정에서 모국어를 계속 쓰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다. 꾸준한 노력만이 외국어 익히는 첩경 〈느림보 학습법〉을 펴낸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신의진 교수는 언어 능력은 듣기, 쓰기, 말하기, 독해, 문법 등 여러 영역에 걸친 종합적인 능력으로, 각 영역의 발달 시기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발음 능력은 어려서 발달한다. 성인이 된 한국인 또는 일본인이 영어의 'L'과 'R' 발음을 구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반면, 어려서 영어를 배운 어린이들은 발음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잘 구별한다. 이에 반해 단어 능력은 뇌의 측두엽이 발달하는 초등학교 때, 언어의 논리성은 초등학교 2∼3학년이 넘어야 터득한다고 한다. 특히 6세 미만에 아이의 인성과 사회성 발달이 대부분 이루어지는데, 이때 아이에게 영어만 강요하면 주체성에 혼란이 생겨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신 교수의 경고다. 외국에 가지 않고 순수하게 국내에서만 영어를 배운 토종 영어 프로그램 진행자 이보영 씨도 영어를 어려서 가르치면 노력하지 않고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은 망상이라고 단언한다. 이씨는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분명해야 잘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른들 가운데서도 해외 근무 등 뚜렷한 목적이 생겨 나중에 공부를 한 사람 가운데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많음을 그 사례로 든다. 특히 어른은 단어, 정보처리 능력 등 선행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한다. 어른은 CNN 방송의 문장을 몇 개의 키워드만 들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못하다고 이 씨는 설명한다. 물론 언어는 조기 교육이 좋은 것이 사실이다. 사춘기 이전에 외국어를 배워야 말을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일찍 영어를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난 포기했어"하고 그만두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때가 되면 그리고 필요하면 외국어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충분히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뇌가 가진 능력의 대부분을 활용하지 못하고 무덤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커서 영어를 배우는 데 있어 정작 가장 큰 장애물은 '꾸준히' 노력하지도 않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서울 J초의 A교사는 학교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온다. 칭찬도 해보고 야단도 쳐봤지만 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반의 권동윤(12·가명) 학생 때문이다. 주의가 산만하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권 군은 A교사 반의 골칫거리. 본인도 수업에 집중을 못할뿐더러 시도 때도 없이 앞 뒤 학생들까지 방해해 수업 분위기를 흐려놓기 일쑤다. A 교사는 “매년 반에 말 안 듣는 아이들이 꼭 있지만 동윤이한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면서 “도무지 주의가 산만해서 알아듣게 얘길 해도 그때 뿐”이라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수업 한 시간을 진행하면서 보통 7~8번이 넘게 주의를 줘야할 만큼 신경을 쓰다 보니 이제는 그냥 내버려두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ADHD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중학교 1학년 이한성(14·가명)군은 초등학생 때부터 왕따였고 학교생활이 힘들었다. 이 군의 가장 큰 문제는 분노조절이 안 되는 것. 친구들의 사소한 장난에도 화 조절을 못해 손이 돌아갈 정도였고, 한 단계 더 나아가 공격적으로 변하게 됐다. 이 군은 담임교사의 권유로 최근 ADHD 치료를 시작했다. 학기 초부터 이 군을 유심히 지켜본 담임교사가 학부모에게 치료를 권유한 것. 이 군의 경우 병원에서 약물과 뇌파 훈련 치료를 받은 후 현재는 심리적인 안정을 찾았고 성적까지 오른 상태. 이 군에게 치료를 권한 담임교사는 자신의 자녀가 ADHD를 갖고 있어 쉽게 학생을 관찰한 후 증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뇌에 악영향 미치는 환경 늘어나 ADHD 증가 교사들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 학생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는 모든 뇌를 통제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기능을 상실해 충동적·무절제·과다행동이 나타나면서 소근육 협응이 안 되고, 학습장애, 정서가 불안정한 질병이다. 한마디로 자기조절력을 상실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증상이 있는 학생들은 대개 학교 성적이 떨어지고, 특정한 학습의 장애가 심하며, 성적을 올리는 능력이 부족하고, 언어 및 회화의 문제가 있으며, 운동을 조절하는 타이밍이 늦다. 이런 학생들은 교실에서 말썽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정학 또는 퇴학을 당하기도 한다. 문제는 ADHD 아동이 점차 증가 하고 있다는 것. 우리나라 학령기 아동의 5%정도가 ADHD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한 반에 두 명 정도가 ADHD를 앓고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 등 집중력을 떨어트리고, 환경오염과 중금속, 화학성분 등 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ADHD가 발생하는 원인으로는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대부분이 선천적으로 발생한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여학생 보다는 남학생에게 더 많이 나타난다. 여자아이들은 ADHD라기 보다는 주의력이나 집중조절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전문가의 설명이다. ADHD 발견의 적기는 초등학교 1학년(7세) 때. 그 이전에는 발달단계 불균형으로 ADHD 진단이 잘못 판단될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의 5%, 한 반에 2~3명 전문가들은 ADHD를 앓고 있는 학생들은 교사가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ADHD는 주로 단체생활에서 구분될 수 있는데 10분만 지나도 자세가 흐트러진다거나, 다른 수업에 방해가 되는 등 또래에 비해 현저히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등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일단 집중력이 떨어지는 등 증상이 의심되면 병원 치료를 권유하는 것이 가장 좋다. 대부분의 경우 약물치료만으로도 상태가 크게 호전될 수 있으며 여기에 상태에 따라 뇌파훈련과 함께 식이요법 등의 비약물 치료도 받게 된다. 또 교사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마인드메디클리닉의 박형배 박사(정신과 전문의)는 교사의 행동에 따라 ADHD 성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의 생활환경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고 강조한다. 박 박사는 “교사가 적극적으로 돕고자 한다면 상태도 호전되고, 자연스럽게 반에서 생활을 할 수 있지만, ADHD인 것을 알게 되면 바로 낙인찍어 버리는 교사도 있다. 아이에게 선입관을 가지고 바로 그 아이를 고립시켜 버리는 것인데 이것은 아이의 상태를 훨씬 악화시킨다”고 말했다. 교사 가까이에 앉히고 자주 시선 마주쳐 줘야 교사는 일단 그 학생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인식해야한다. ADHD를 가지고 있는 학생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자신이 혼란 속에 빠져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도와주려고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 박사는 “되도록이면 교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하고 수업 중에 시선을 자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바로 잡을 수 있다”면서 “될 수 있는 대로 학교에서는 나쁜 행동이 나타나지 않게 조절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아도 단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꼼꼼하고 섬세하게 따지지 않기 때문에 이기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다.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열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창조적이며 헌신적이다. 나쁜 아이로만 보지 않고 관심을 가지고 비생산적인 과잉행동을 생산적인 과잉행동으로 바꿔준다면 또 훌륭한 인재로 자라날 것이라는 것이 전문의의 설명이다. | 이상미 smlee24@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