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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교육인적자원부는 경영전문대학원(MBA)을 신청한 8개 대학을 심사한 결과 동국대, 숙명여대, 전남대, 중앙대, 한국정보통신대 등 5개대가 예비인가를 받았다고 1일 밝혔다. 예비인가는 대학이 제출한 교원확보계획 등의 교원 및 시설 등 준비상태의 이행을 독려하기 위한 것으로 교육부는 12월까지 이행실적을 확인한 뒤 최종 인가할 계획이다. 이들 5개대 경영전문대학원(박사 10명 포함해 총정원 470명)은 내년 3월 개교 예정이다. 학교별 경영전문대학원 정원은 동국대 170명, 숙명여대 40명, 중앙대 120명, 전남대 100명, 한국정보통신대 40명이다. 특히 동국대는 이벤트 및 컨벤션 분야, 숙명여대는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분야, 중앙대는 BRICs(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분야, 한국정보통신대는 IT(정보기술)-경영 융합 분야를 틈새시장 공략을 위한 특화프로그램으로 제공하며 전남대는 지역(광주, 대전)에도 한국형 MBA 프로그램으로 질 높은 교육을 실시할 계획이다. 새로 예비 인가된 경영전문대학원의 등록금은 학기당 500만∼800만원 정도이고 수업연한은 2년이다. 교육부는 전문대학원의 학생정원의 경우 MBA 과정의 질 관리와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 기조를 고려, 기존의 특수대학원 폐지에 따른 정원과 일반대학원 정원 감축분 범위내에서만 인가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경영분야 대학원 정원은 오히려 514명에서 470명으로 44명 감소했다고 밝혔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번 설치인가 심사에서는 교원 및 시설, 관련 특수대학원 폐지 등의 기준을 충족시켰는지 여부는 물론 영어강의와 교수진 구성, 특화된 프로그램 타당성 등도 중점적으로 고려했다"고 말했다. 올 9월에는 고려대ㆍ서강대ㆍ서울대ㆍ연세대ㆍ이화여대ㆍ한양대ㆍ인하대(물류분야) 등 7곳이 경영전문대학원을 개설한 바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는 모두 12곳(총 정원 박사 60명 등 2천92명)에 경영전문대학원이 설치되게 된다.
지난 9월 11일 우리 학교에서는 「학교 폭력 추방의 날」 행사를 가졌다. 최근 학교 폭력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교육부가 학기 초에 학교 폭력이 많은 점을 감안해 매년 3월과 9월 셋째 주 월요일을 학교폭력 추방의 날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정 운동이나 캠페인이 지나치게 구호만 앞세운 ‘실적위주 전시행정’으로 치우쳐 오히려 그 본질이 퇴색될 우려를 낳고 있는 가운데 최근 한 지방교육청에서 ‘폭력 없는 학교 만들기’ 홍보대사로 영화배우 정준호 씨가 위촉된 것을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다. ‘홍보대사’는 그 인물이 지닌 상징적인 이미지가 특정 단체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위촉해서 홍보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아무 사명감이 없는 유명인사나 인기연예인들을 홍보대사로 삼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폭력 없는 학교 만들기’ 홍보대사는 당연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심각성을 일깨워 ‘폭력은 나쁜 것’ 이라는 홍보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궁극적으로 학교 폭력 근절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그가 우리 교육계의 특성에 비추어 학교폭력 근절의 역할에 어울리는 인물인지는 신중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는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영화 ‘두사부일체’에서 타고난 카리스마로 폭력조직의 중간보스 역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 영화는 중간보스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라는 보스의 명령에 따라 고등학교에 기부금 입학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조폭 코미디물이다. 한 마디로 ‘두목과 스승 그리고 아버지는 동격’이라는 내용으로 극 중에서조차 “조폭생활 10년, 이런 학교는 처음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영화 ‘공공의 적’에서도 비리 사학재단의 이사장으로 출연하여 ‘돈이 법보다 세다’라는 논리로 법을 집행하는 현직 검사와 대결하는 역을 맡았는가 하면 최근 개봉한 청소년 영화 ‘거룩한 계보’에서는 조직폭력 세계를 주름잡는 전설의 칼잡이로서 친구들과의 배신과 복수의 킬러로 열연했다. 이 외에도 ‘가문의 영광’, ‘역전의 명수’, ‘나두야 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투사부일체’ 등 폭력과 욕설, 외설 등이 난무하는 조폭코드 영화의 단골 주인공으로 돈과 주먹, 폭력의 상징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 폭력영화를 평정한 스타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다’, ‘폭력영화 주인공이어서 오히려 더 적합하다’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학교를 무대로 다룬 ‘학원영화’가 봇물을 이루면서 ‘창작의 자유’ 차원을 넘어 학교를 변태와 부정이 난무하는 집단으로 표현하고 있는 터다. 특히 학생과 교사의 비정함, 우정이 말살된 교우관계, 나아가 잔인한 학교폭력 등을 소재로 다루면서 조폭도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행동’할 만 하다는 정당성을 부여하는 등 교직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은 스타라 할지라도 학교폭력 근절을 외쳐야 할 홍보대사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더구나 그의 인기도나 상징성으로 미루어 앞으로도 계속 ‘폭력영화’의 주인공으로 활약할 것이 분명하다. 한편에서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외치면서 다른 편에선 폭력을 미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 ‘지나가던 소도 웃을 일’ 이다. 부디 의협심은 강한 반면 가치관 정립은 덜된 청소년들이 자칫 주먹세계를 우상시하고 폭력을 정당화, 희화화하는 역효과를 가져옴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생 교육에 악영향을 주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일요일 아침 산책길에 아파트 가까이에 있는 성균관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환경플랜트를 들렸습니다. 학교에서 나오는 오수를 정화하여 깨끗한 물로 배출하는 것을 보니 학교이미지가 달라집니다. 기업이윤만을 고집하지 않고 사회와 국가의 미래, 지구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잘 꾸며놓은 야생화 단지, 연못 분수대, 물레방아를 둘러보니 정서가 순화되고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무를 보니 꽃이 만발하였네요. 자연히 나무 표찰로 눈이 갑니다. '병꽃나무' "아니, 이건 병꽃나무 꽃이 아닌데?" 자세히 보니 환삼덩굴이 병꽃나무를 완전히 뒤덮었습니다. 그대로 두다간 병꽃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못하여 말라 줄을 것 같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근성이 나온 것이지요. 주위에서 나뭇가지를 가져다가 환삼덩굴을 걷어냅니다. 팔뚝이 가시에 긁히고 손에 가시가 박힙니다. 얼마나 덩굴줄기가 센지 나뭇가지가 꺾어집니다. 다시 쇠막대를 주워 작업을 계속합니다. 환삼덩굴로서는 날벼락이지요.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한참을 하다보니 병꽃나무를 괴롭히는 것이 또 있네요. 바로 며느리배꼽. 이것은 벌써 열매를 다 맺고 잎이 시들어져 있습니다. 이것도 마저 걷어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병꽃나무 살리기 작전에는 봐주기가 없습니다. 지나가는 직원이 "무엇을 하냐?"고 묻습니다. "보시다시피 덩굴을 걷어내고 있다"고 답하니 "나무가 필요하면 한 쪽 뿌리를 캐어가라"고 합니다. 나무에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죠. 나무를 살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한 30여분 간 하니 작업이 다 끝났습니다. 함께 동행을 한 아내가 사진을 찍고 거들어줍니다. 병꽃나무 한 쪽 가지를 보니 수줍게 연분홍꽃이 피어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덩굴을 걷어낸 병꽃나무는 이제 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자연의 모습입니다. 선생님이란 직업, 참 이상하죠. 속일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그 본성을 드러냅니다. 그냥 지나쳐도 되건만 그냥 가지 않습니다. 그냥 못 갑니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고 갑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립니다. 오늘, 一日一善을 실천했습니다. 일요일 아침, 출발이 가쁜합니다.
온 나라가 학력위조 신드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혜성같이 나타나서, 거칠 것 없이 잘 나가던 젊은 큐레이터. 그런데 알고 보니 학력과 학위는 물론이고 이름조차도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여기에 신정아 씨의 학력 위조가 알려진 이후에 경향(京鄕) 각지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남녀들의 커밍아웃까지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굿모닝 팝스’를 진행하던 이지영 씨, 공포의 외인구단의 만화가 이현세 씨가 사실은 고졸이라고 학력 위조를 커밍아웃했습니다. 여기에 심형래 감독의 학력 논란, ‘러브하우스’ 이창하 디자이너의 학력위조까지…. 그네들의 거짓말에 혀를 내두르게 됨은 뭐 더 말할 필요도 없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미대를 다니지 않아도 만화만 잘 그리고, 언어학 석사학위가 없어도 영어 강의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낸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옛 문학작품에서도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인정받는 사례들은 종종 발견이 되는데요. 옹고집전에서 욕심꾸러기 진(眞)고집은 원님에게 아무리 자신이 진짜라는 걸 증명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초기 소설 분신의 주인공인 골랴드킨의 직장 동료들도 진짜보다 가짜를 더 선호하지요. 이런 아이러니는 ‘나의 나다움’을 묻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가(假)고집이 진(眞)고집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허수아비로 변하든, 가짜 골랴드킨이 끝까지 진짜 골랴드킨을 궁지로 내몰든, 지금까지 나를 규정했던 요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나다움. ‘나’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나의 외모, 학력, 부모의 배경…. 이런 것 없이 진정한 나를 나 자신으로 보는 것은, 적어도 이 땅에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인플레이션이 지나치게 되어버린 ‘학력’은 언제인가부터 우리사회에서 그 사람의 품격과 동일시되어 버렸습니다. 일찍이 영화 타짜(2006)의 정 마담(김혜수 분)도 외치지 않았습니까. 학벌이 얼마나 쓸 만한 무기면, 경찰에 연행될 위기에 놓이자 정 마담 입에서 나온 마지막 한마디가 “나 이대 나온 여자야!”였겠습니까. 그녀가 도박판의 꽃이 되는 데는 ‘학벌’이 필요조건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신정아 씨가 리플리 병(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오히려 허구라고 믿는 병) 환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대단한 사기꾼이라고 비난할 자격 우리에겐 없지 않을까요. 이지영 씨나 이현세 씨의 커밍아웃을 두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입에 거품을 물 자격 역시 없지 않을까요. 잘못은 밉지만 사람은 가련한 경우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현세 씨는 20년 동안 목에 있던 것을 빼낸 것 같은 후련한 기분이라고 했고, 이지영 씨는 남들을 속여 온 세월을 친딸 행세를 하는 가짜 딸의 죄책감에 비유했습니다. 단 한번도 학벌을 이용하지 않거나 학벌에 주눅 들지 않은 자, 그들만이 저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있으니까요! | 한국교육신문 기자
고재학 | 저자 #사례 1. 얼마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교사 가 올린 사진 한 장이 화제가 됐다. 공부하는 책상 바닥에 작은 구멍이 하나씩 뚫린 두 개의 책상을 담은 사진이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교사의 감시를 피해 문자메시지를 보내려고 조각칼로 뚫은 구멍이었다. 교무실에 불려온 학생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책상에 구멍을 파고 음료수를 먹는 사진을 우연히 본 기억을 되살려 구멍을 팠어요”라고 고백했다. #사례 2. 초등학교 6학년 수정(12)이는 잠을 잘 때도 휴대폰을 안고 잔다. 잠에서 깨면 가장 먼저 문자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하거나, 친한 친구들에게 오늘 스케줄과 관련된 문자를 ‘날리기’ 시작한다. 만일 답(答) 문자가 금방 오지 않으면 ‘씹혔다’면서 안절부절 못한다. 수업시간에도 휴대폰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쉼 없이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는다. 하루 이용하는 문자메시지는 보통 200~300통. 웬만한 어른들이 한 달 동안 보내는 문자를 하루에 보내는 셈이다. 수정이는 “문자를 보내지 않으면 무료하기도 하고 왠지 불안해요. 선생님에게 들키면 1주일 동안 압수당하기 때문에 구형 휴대폰을 여분으로 갖고 다녀요”라고 말한다. 초·중·고생 휴대폰 가입자 478만명 ‘휴대폰 가입자 4000만 명 시대’를 맞은 우리의 현주소다.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현재 국내 이동통신 3사의 휴대폰 가입자 수는 3938만 명. 휴대폰을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10~69세 인구는 4002만 명이다. 단순 계산으로 9세 이하 어린이와 70세 이상 노인을 제외한 전체 인구의 98.2%가 휴대폰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전국의 초등학생과 중·고교생은 모두 779만 명. 이 중 휴대폰 가입자는 478만 명이다. 10명 중 6명 이상이 휴대폰을 사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엄마 아빠 명의로 가입한 경우가 30~40%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 비율은 훨씬 늘어난다. 90%가 넘는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휴대폰은 모 이동통신업체의 광고 문구처럼 ‘생활의 중심’이다. 단순한 이동전화 기능을 넘어 문자메시지, 카메라, MP3, 모바일 게임, 인터넷 동영상, 위성TV 등의 기능을 갖춘 만능 전자제품이자 생활필수품인 것이다. 특히 아이들에겐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끈’이요, 자신만의 ‘분신’이고 ‘비밀 공간’이며, 뗄레야 뗄 수 없는 신체 ‘옵션’이다. 그래서 24시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교실에서도 학원에서도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집에 두고 온 휴대폰을 가져오기 위해 조퇴를 불사하고 날렵한 맵시의 최신 휴대폰을 사기 위해 원조교제까지 하는 상황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아이들의 휴대폰 몰입이 중독 수준에 이른데다, 정서적·교육적 악영향이 어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이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지난해 청소년 1100명을 대상으로 휴대폰 이용실태를 조사한 결과, 청소년 3명 중 1명은 “휴대폰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응답했다. 응답자의 40%는 “수업 중에도 몰래 문자메시지를 주고 받는다”고 답했다. 올해 4월 광고회사 대홍기획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10대 청소년들의 문자 발송건수는 하루 평균 100건이며, 심지어 하루 1000통 이상을 보내는 경우도 3%에 육박했다. 휴대폰 중독은 단순한 중독을 넘어 폐해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수업 시간에도 모바일 동영상을 통해 음란물을 보고, 게임이나 드라마를 즐긴다. 휴대폰이 곁에 없으면 불안하기 때문에 늘 옆에 두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문자를 보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오거나 수업 중에 압수당하면 우울·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고교생 10명 중 1명은 쉴 새 없이 휴대폰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혈액순환장애가 생겨 어깨 통증으로 이어지는 ‘단순반복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휴대폰은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 비해 중독에 빠질 위험성이 훨씬 크다. 언제 어디서나 24시간 갖고 다니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게임기를 합쳐 놓은 것처럼 기능이 다양해 중독 현상도 문자메시지, 모바일 게임, 음란 콘텐츠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휴대폰은 돈 잡아먹는 하마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별나게 신기술에 민감하다. 지난해 각국에서 팔린 휴대폰 중 카메라 기능을 갖춘 휴대폰 비율은 한국이 89%로 미국(14%), 유럽(44%), 중국(39%)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휴대폰을 신형으로 교체하는 속도도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빠르다. 한국의 휴대폰 교체 주기는 평균 12개월로 미국(21개월) 캐나다(30개월)의 절반 수준이다. 10대 청소년들에게 휴대폰은 전화라기보다 패션 소품으로 활용되는 측면이 더 강하다. SK텔레텍의 조사에 따르면 10대 후반의 휴대폰 구매 고객 중 36.7%는 “디자인을 가장 먼저 고려한다”고 답해 “기능을 먼저 따진다”는 응답(11.7%)보다 훨씬 많았다. 반면 30대 후반 고객은 기능(25%)을 디자인(19.2%)보다 중시했다. 휴대폰 사용료는 저소득층의 허리를 휘게 하는 주원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 하위 20% 소득계층의 가계지출 항목 중 통신비 비중은 1995년 2.6%(1만 9040원)에서 2005년 8.2%(9만 7538원)로 급증했다. 식비와 교육비에 이어 3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가계지출 중 평균 통신비 비중(2.0%)에 비해 4배 이상 많다. 이 같은 통신비 과소비에는 국내의 불합리한 요금체계도 한몫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휴대폰으로 20분간 무선인터넷에 접속해 곡 당 500원의 정보이용료를 내고 3곡의 벨소리를 전송 받으면 요금이 얼마나 나올까? 소비자들은 1500원의 요금이 나올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실은 2만 원가량의 데이터요금이 부과된다. 휴대폰의 데이터요금은 건당 고정 요금이 나오는 ‘정보이용료’와 데이터 크기에 따라 부과되는 ‘데이터 통화료’로 나뉜다. 콘텐츠 제공업체(CP)가 가져가는 정보이용료는 몇백 원 수준이지만, 이동통신사의 몫인 데이터 통화료는 사용 시간과 데이터 용량에 따라 금액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이동통신사들은 정보이용료는 명확한 금액을 밝히면서 데이터 통화료는 용량 크기만 알려줄 뿐, 어느 정도의 요금이 부과된다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이용자는 정보이용료만 내면 되는 줄 알고 있다가 엄청난 요금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라 소비자보호원 등에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PAGE BREAK]손안의 움직이는 포르노 채널 서울 M중 1학년 김모(13)군은 지난겨울 음란물 이용사실을 알게 된 아빠에게 휴대폰을 빼앗겼다. 휴대폰 사용료가 70만 원 이상 나와 요금내역을 알아봤더니 김 군이 무선인터넷으로 연예인 누드사진과 음란 동영상을 수시로 다운 받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는 음란물을 이용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만, 아빠의 태도는 단호했다. 외아들인 김 군은 크게 절망해 가출을 단행했다. 친구 집에서 머물다 이틀 만에 아빠에게 붙잡혀 돌아왔지만, 예전의 다정했던 아빠와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청소년위원회가 2005년 10월 ‘19세 미만 구독 불가’라는 경고 문구를 붙여 국회에 제출한 ‘휴대폰 콘텐츠 모니터링 보고서’를 보면 쩍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모니터링 중에 만난 한 학생은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내가 휴대폰으로 보는 성인물을 실제로 보면 아마 기절할 것”이라고 말했고, 의원들도 “이럴 수가 있나,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실제 휴대폰을 열면 언제 어디서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에, 적나라한 성행위를 묘사한 사진과 동영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는 음란 콘텐츠가 고스란히 모바일로 옮겨왔다고 보면 된다. 휴대폰에 범람하는 유해 콘텐츠는 우리 아이들을 포르노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실제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 2005년 7월 휴대폰을 갖고 있는 수도권지역 중·고교생 1088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10명 중 1명꼴로 성(性)비행에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16.3%)하거나 심야시간에 번개팅(즉석 미팅·14.9%)을 해본 학생이 6~6.7명 중 1명꼴이었다. 번개팅을 통해 만난 이성과 성적 행동(키스, 애무, 성관계 등)을 해본 경험은 11.1%, 휴대폰을 이용해 원조교제를 한 비율이 10.4%, 휴대폰으로 성인용품을 구입해본 학생이 10.2%, 휴대폰으로 음란물을 웹에 올린 경험도 10.8%나 됐다. 10대 언어파괴·성적 저하의 주범 ‘츄릅’(음식 사진 등을 보고 침 흘린다는 표현), ‘훈남’(마음이 훈훈해지는 미남), ‘급질’(급한 질문), ‘미자’(중·고등학생들이 미성년자인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 ‘취뽀하다’(취직하다)’ ‘ㄱㄱㅁ’(개그맨이라는 단어의 자음만 사용한 것으로 어이없다는 뜻), ‘OTL’(O는 머리를, T는 팔을, L은 꿇은 다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좌절을 의미), ‘려차’(영어 욕설 fuck이라는 영어단어를 한글로 치면 ‘려차’가 된다), ‘KIN’(즐기다·짜증난다는 의미), ‘간지’(일본말 ‘칸지(感)’에서 온 것으로 느낌이 온다는 뜻), ‘갈비’(갈수록 비호감), ‘안습’(안구에 습기 차다의 줄임말로 슬퍼서 눈물이 난다는 의미). 요즘 학생들끼리 주고받는 문자를 제대로 해독하기란 쉽지 않다. 이상한 기호들을 활용한 이모티콘이나 축약어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풍토가 언어 파괴와 한글 변용에 따른 의사소통의 장애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이들의 잘못된 언어활동은 교실에서도 나타나고 글쓰기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실제 국어 교사들 사이에선 아이들의 글쓰기 방식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다. 7차 교육과정이 도입되면서 독창적인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강조되고 있지만, 자기감정을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단문 형태의 문자메시지에 길들여져 글쓰기 능력이 오히려 퇴보하기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논술의 주제는 갈수록 깊이를 더하고 있지만, 아이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감정만 토로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자 중독이 수업의 집중력을 현저히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수업 중에 칠판을 보거나 교사의 눈을 응시하면서도 책상 밑으로 문자를 날린다. 교사들은 수업 중에 휴대폰을 반드시 끄도록 지도하고 있지만, 문자 연락이 올까 봐 진동음이나 무음으로 바꿔놓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음으로 해둬도, 문자가 오면 궁금해서 선생님 눈치 봐서 잽싸게 확인한다”고 말한다. 진동음 역시 수업 분위기를 해치기는 마찬가지이다. 진동음이 울리면 모든 아이들이 시선이 그쪽으로 몰리고, 또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기 때문에 수업 흐름이 끊길 수밖에 없다. 휴대폰이 사라지면 교실이 살아난다 최근 몇 년 새 10대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으로 확산된 휴대폰이 요즘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다. 왜 그럴까? 휴대폰이 사라진 뒤 학교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경기도 안양시 귀인중학교는 2005년 3월 학생들이 교내에서 휴대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교칙을 바꿨다. 휴대폰 사용을 금지한 것은 물론, 학교에 가져와서도 안 된다. 이후 어느 교실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던 휴대폰 벨 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만일 휴대폰을 가져 왔다가 들키면 2주 동안 압수되고 벌점 1점이 부과된다. 한 학기 동안 벌점 20점을 넘으면 각종 시상에서 제외된다. 시험 때 규정은 더 가혹하다. 1교시 시작 전에 담임교사에게 휴대폰을 내놓지 않았다가 도중에 들킬 경우 무조건 부정행위로 간주된다. 학교는 대신 학생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수신자부담 전화 두 대를 설치했고, 학생들이 교무실 전화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휴대폰 퇴출운동을 주도한 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휴대폰은 공동체 의식의 마지막 보루인 학교까지 위협하는 존재였어요. 한 아이가 최신 휴대폰을 가져오면 교실 분위기가 금방 술렁거립니다. 힘이 약한 아이들의 전화를 빌려서 유료 인터넷서비스를 이용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지금은 어떻게 변했느냐고요? 남학생들은 먼지를 휘날리며 우당탕 뛰어다니고, 여학생들은 팔짱을 끼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수다를 떨어요. 교내 곳곳이 부쩍 시끄러워졌습니다. 학교다워진 거죠.” 처음엔 불만을 토로하던 학생들도 지금은 학교 방침을 적극 환영하고 있다. 기계에 종속돼 메말랐던 학교생활이 달라지면서 휴대폰이 애물단지였음을 실감하게 됐기 때문이다. 수업 중에 문자를 보내던 풍경이 사라지고, 친구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대화와 토론을 하는 등 수업 분위기가 훨씬 화기애애하게 변했다. 아예 휴대폰을 없애버린 학생도 여러 명이다. 충남 공주 한일고는 공주 외곽 농촌 마을에서도 1㎞가량 산길로 접어들어야 찾을 수 있는 농어촌 지역 자율학교다. 전교생 500여 명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골학교라고 만만하게 봤다간 큰 코 다친다. 2005학년 대학입시에서 전체 수험생(167명)의 62%가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등 이른바 ‘명문대학’에 합격했다. 시골 학교의 놀라운 학업성취의 비결은 뭘까? 이 학교 교사들이 학업 측면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학생들의 ‘집중력’이다. 집중력을 키우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학생들의 집중력을 방해하는 원인을 제거해주는 것이다. 이 학교는 1999년부터 학생들의 정신집중을 방해하는 휴대폰의 소지를 일절 금지하는 학칙을 운영하고 있다. 휴대폰이 수업 분위기를 방해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정신건강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학생들이 휴대폰을 갖고 있다 적발되면 ‘1차 경고, 2차 학부모 통보’ 등 엄한 학칙이 적용된다. 대신 기숙사와 교내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이용할 수 있지만, 공중전화 이용시간도 자유 시간 및 휴식시간, 새벽 1시까지로 엄격히 제한된다. 통화도 3분 이내로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한다. 컴퓨터 이용 역시 일주일에 두 시간 이내로 제한되며, 교과과정 이외의 인터넷 사용은 금지된다. 학생들은 “휴대폰이 없으니 절대적인 학습량이 늘어날뿐더러 생각하는 훈련이 절로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전북 부안여고는 고3 수험생을 중심으로 휴대폰 사용에 대한 자율 규정을 만들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가정 방문을 실시, 학부모에게 휴대폰 교육의 중요성을 홍보하고 학급회의를 통해 휴대폰 에티켓 교육도 실시했다. 그 결과 수업 중 휴대폰을 사용하는 학생이 급격히 줄었고 수업 집중도와 학습 분위기도 매우 좋아졌다. 학생들의 자제력이 높아지고 학생 간 대화시간도 크게 늘어났다. ‘휴대폰 안 가지고 다니기’ 운동을 벌이는 학교들의 공통점은 휴대폰 소지를 허용할 때보다 학교가 더 소란스러워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만 소란스러울 뿐, 수업 분위기는 훨씬 더 진지해졌다는 게 교사와 학생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수업 중에도 휴대폰으로 소통하던 아이들이 휴대폰이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수업에 집중하게 됐고, 반대로 쉬는 시간엔 친구들과 격의 없이 어울려 10대 나름의 건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연락이 잘 안 돼 고립감을 느끼던 학생들도 집중력이 향상되고 수업 분위기가 호전되자 휴대폰 없는 학교 정착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학교는 휴대폰 소지에 대해 엄격한 벌칙을 적용하는 대신, 공중전화 설치를 늘리고 교장실이나 교무실 전화도 학생들에게 개방하는 등 전화사용의 편의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다. 휴대폰 정화 활동 벌여야 고정된 공간에 배치돼 있는 TV나 컴퓨터는 휴대가 쉽지 않다. 가정에서 아이가 TV나 컴퓨터에 빠져 있으면, 금세 눈에 띄고 학부모가 잔소리를 함으로써 어느 정도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휴대폰은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보화 기기이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동하며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으면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음란물과 게임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실제 마음만 먹으면 학교나 도서관에서도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 동영상을 볼 수 있고, 몰래 음란 동영상을 보다가도 휴대폰을 닫아버리면 어떤 콘텐츠를 이용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런 만큼 학부모와 교사들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지도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의 휴대폰 중독을 막는 방법은 간단하다. 학부모와 교사부터 휴대폰 사용에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휴대폰 요금은 월 수십만 원씩 나오면서 아이들에겐 월 3만 원 이내로 쓰라고 닦달하는 부모들이 있다. 수업 중 학생들의 휴대폰 사용은 엄격히 통제하면서 정작 본인 휴대폰은 마음대로 사용하는 교사도 있다. 이런 부모와 교사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휴대폰을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중독에 빠질 위험이 그만큼 높아진다.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이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역할 모델’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는 자녀가 책임감 있게 휴대폰을 쓰도록 구입 때부터 사용목적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자녀에게 지나치게 비싼 휴대폰을 사줘서는 안 되며 정액형 요금제를 택해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녀가 주로 사용하는 휴대폰 콘텐츠와 사용시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사들도 학생들의 휴대폰 중독만 우려할 게 아니라, ‘수업 중에 휴대폰 안 받기’ 등 자체 정화활동을 동시에 펼쳐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가능하면 학교에서는 휴대폰 전원을 끄고 공중전화나 사무실 전화를 이용하는 등 모범을 보여야 한다. 학생들의 휴대폰 소지 금지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학부모와 교사들의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혜수 | 한국정보문화진흥원 미디어중독대응팀장 2006년 상반기 정보화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6년 6월 현재 만 6세 이상 인터넷 이용 인구는 약 3358만 명으로 약 73.5%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인터넷 이용률을 살펴보면 6~19세가 98.1%, 20대 98.1%, 30대 91.6%로 6세부터 40세 미만 연령층의 90% 이상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국인터넷진흥원, 2006). 특히 20대 이하의 인터넷 이용률이 95%를 상회하고 있다는 실태조사 결과는 이제 우리나라가 인터넷이 상용화됨에 따라 사이버 공간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맥락(context)으로 자리매김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인터넷 중독은 행동 장애 인터넷 이용이 확산됨에 따라 인터넷의 오·남용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으며, 청소년층의 가장 심각한 역기능 사례 중 하나로 인터넷중독을 꼽을 수 있다. 인터넷중독은 알코올 중독과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행동 장애로서 Young(1996)이 규정한 지 10년이 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학문적인 논의가 최근 5년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인터넷중독의 개념은 학자마다 다양하며, 아직 학문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는 아니나,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인터넷중독의 정의를 두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청택, 박중규, 이수진(2003)에 의하면, 인터넷 중독이란 ‘인터넷 사용에 대한 금단과 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일상생활의 장애가 유발되는 것’으로 정의되며, 박성길과 김창대(2003)에 의하면, ‘인터넷의 사용이 지나쳐 이용자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직업적, 사회 적응적 기능 손상을 초래하는 상태’라 정의된다. 전문가 상담 필요한 위험 사용자 많아져 2005년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전국 만 9세 이상 39세 이하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인터넷중독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약 2.4% 정도가 시급히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 고위험 사용자 군으로 조사되었으며, 방치할 경우 고위험 사용자 군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는 잠재적 위험 사용자 군이 10.2%로 나타났다. 2005년 인터넷중독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청소년 인터넷 중독 현황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청소년 응답자의 경우 전체 응답자보다 인터넷중독률이 다소 높은 경향을 보이며, 고위험 사용자 군은 전체의 2.6%, 잠재적 위험 사용자 군은 12.7%를 차지하고 있다. 학력별로 살펴보면 고등학생의 인터넷중독률은 고위험 사용자 군이 3.9%, 잠재적 위험 사용자 군이 13.6%를 차지하여 초등학생이나 중학생보다 인터넷 중독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인터넷 주이용 목적을 복수 응답하도록 하여 분석한 결과 전체 대상자 중에서 인터넷 주이용 목적이 1순위 기준으로 게임(34.7%)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특히 연령별 인터넷 주이용 목적을 1순위 기준으로 살펴보면, 만 9세~12세의 경우 게임이 57.4%, 만 13세~15세의 경우 게임이 46.8%, 만 16세~19세의 경우 31.8%를 차지하였으며, 저연령층 집단으로 갈수록 게임을 인터넷의 주이용 목적으로 사용하는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청소년의 주된 인터넷 이용 장소는 대부분 집(95.4%)이었으며, 그 외에는 PC방(4%), 학교(0.6%) 순으로 나타났다. 넷째, 청소년의 경우 인터넷중독 시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1순위 응답 기준으로 부모(67.9%)를 가장 먼저 떠올렸으며, 친구(17.4%), 학교(8.4%), 전문상담원(4.6%), 기타(1.7%) 순으로 응답하였다. 다섯째, 청소년의 경우 인터넷 이용에 대한 부모의 태도를 살펴 본 결과 아버지의 경우 상관하지 않는다(53.0%)가 가장 높았으며, 잔소리를 한다(27.9%), 싫어하지만 묵인해준다(12.0%), 심한 잔소리나 질책을 한다(7.5%), 격려하고 지원한다(2.9%),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0.9%)의 순으로 나타났다. 어머니의 경우 잔소리를 한다(37.7%)가 가장 높았으며, 근소한 차이로 상관하지 않는다(36.0%)가 세 번째, 싫어하지만 묵인해준다(14.3%), 심한 잔소리나 질책을 한다(7.5%), 격려하고 지원한다(3.9%),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0.4%)의 순으로 나타났다. 여섯째, 인터넷 이용을 통제할 때 청소년층에서 나타내는 정서적 반응으로는 분노(44.7%)가 가장 높았으며, 그 다음으로는 아쉬움(24.8%), 무감정(20.6%), 좌절(5.2%), 만족감(4.5%), 기타(0.2%)의 순으로 나타났다. 일곱째, 청소년의 경우 인터넷 이용의 통제에 대한 행동적 반응으로는 소극적 반항이 43.2%로 가장 많았으며, 순응하는 경우가 40.1%로 그다음으로 많았다. 여덟째, 인터넷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으로는 건강 악화(49.5%)가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학교생활 등에 지장을 주는 생활파괴(29.9%), 스트레스(7.3%), 성격변화(4.7%), 현실과 가상공간과의 혼동(3.1%), 사회생활 위축(2.1%), 경제적 궁핍(1.8%), 기타(0.7%)의 순으로 나타났다. 나이 어릴수록 정보검색보다는 오락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2005년 하반기 정보화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05년 12월 현재 만 6~19세가 97.8%이며, 만 3~5세의 이용률은 47.9%에 이르는 등 유아, 아동 및 청소년의 인터넷 이용률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한국인터넷진흥원, 2005). 그러나 아동 및 청소년 인터넷이용은 급증한 반면, 인터넷 사용 실태를 분석해보면 저연령층으로 갈수록 자료나 정보검색 및 학습활동보다는 게임 등과 같은 오락 위주로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터넷 중독 및 중독의 우려가 있는 청소년의 비율이 약 15.3% 정도로 추정되나, 인터넷중독에 관한 내용은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초·중등학교에서 창의적 재량학습시간 또는 특강을 활용하여 인터넷중독 예방교육이 일부 보급되고 있으나 사실 상당히 미흡한 실정이다. 초등학교의 경우 전산시간 또는 컴퓨터시간에 활용되고 있는 교재 3종을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분석해 보았으나1), 한 종의 초등학교 1학년 교재에 게임중독 예방에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초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전산(컴퓨터) 수업에서 인터넷중독 예방에 관한 내용을 교육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은 부족함이 있다. 또한 인터넷중독 예방특강은 학교에서 신청을 하는 경우에만 학생들이 특강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육혜택이 한정적이다. 그러므로 향후 초등 정규교과과정 또는 재량학습 교재에 인터넷중독예방교육 내용이 편성되어야 할 것이다. [PAGE BREAK] 교사, ‘인터넷 사용 요일제’ 활용해라 특히 학생들의 경우 방학이나 주말과 같이 여유 시간이 많은 경우 인터넷 사용이 과다하게 늘어나 인터넷중독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교사들의 경우 현재 한국정보문화진흥원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www.iapc.or.kr) 프로그램에서 활용하고 있는 인터넷 사용(또는 게임사용) 요일제 등을 활용하여 일주일 중 하루는 자율적으로 인터넷 사용을 절제하는 계획성 있는 생활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둘째, 부모를 대상으로 인터넷중독 예방, 나아가 올바른 미디어 사용을 위한 부모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넷중독 실태조사 결과 청소년의 95% 이상이 가정에서 주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있는바, 가정에서 부모의 적절한 인터넷 사용지도가 요구된다. 또 자녀들의 경우 인터넷중독 시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가장 많이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데 비해(67.9%), 일반적으로 부모의 경우 자녀의 인터넷 중독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도움을 주어야 할지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자녀가 인터넷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경우 금단과 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녀의 일상생활에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사회 적응적 기능 손상을 초래하게 되므로 부모교육을 통해 가정에서 올바른 컴퓨터 사용습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부모와 담임교사 그리고 상담교사 간에 원활한 정보 교환과 협력이 필요하며, 이 외에도 교육청의 학교보건원이나 청소년 상담기관, 인터넷중독예방상담센터 등과 긴밀한 상호 협력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인터넷을 과다 사용하여 전문적인 도움을 받기 원할 때 부모와 학생들이 상담 등 전문적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해 주거나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 시간관리 능력 키워줘라 인터넷중독 예방의 경우 부모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청소년의 대부분이 가정(95.4%)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때문에 부모가 담당해야 할 가정교육의 영역이 인터넷중독 예방교육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부모에게 제공할 수 있는 인터넷중독 예방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환경적인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청소년들은 핵가족화, 맞벌이 부부의 증가, 외동 아이의 증가 등 가족구조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적 참여의 증가 등의 사회적 변화로 인터넷을 과다 사용할 수 있는 환경적 유혹 하에 매일 생활하고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컴퓨터 매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컴퓨터라는 매체의 사용 목적이 게임을 하기 위한 오락기가 아니라 정보의 도서관, 생활도구, 문화도구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김현수, 2005). 따라서 부모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확한 사용 용도를 자녀에게 바르게 인식시켜주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청소년의 게임 주 이용시간대를 파악해야 한다. 부모는 자녀의 연령대별 게임이용시간의 분포를 잘 고려하여 자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부모는 자녀가 인터넷을 사용함에 따른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다섯째, 부모의 정보화능력과 부모 효능감이 요구된다. 부모가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아는 한 자녀의 인터넷 중독이 예방될 수 있으며, 각종 음란물 등으로부터 차단이 가능하다. 이는 나아가 전반적인 부모가 가정에서 부모-자녀 관계를 바람직하게 형성하고 건전하게 유지하면서 부모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확신인 부모 효능감(parent efficacy)을 향상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를 수반할 수 있다(신용주, 김혜수, 2003). 여섯째, 컴퓨터 사용에 대해 일관적인 양육태도가 중요하다. 특히 인터넷 사용에 대한 부모의 비일관적인 양육 방식은 자녀의 인터넷 통제에 대한 효과를 반감시킬 수 있을뿐더러 자녀가 인터넷을 좀 더 사용하고 싶을 경우 유혹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을 과다 사용하는 데 영향을 주기 쉽다. 일곱째, 시간관리 능력과 자기조절력을 키워주는 것이 필요하다. 인터넷중독의 경우 인터넷 사용에 대한 내성이 생기게 되고, 인터넷 사용에 강박적인 집착을 보이게 되며, 또 자신이 사용했던 인터넷 시간을 왜곡되게 지각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부모와 잦은 마찰을 유발하는 요인 중 하나가 자녀가 인터넷게임 이용 시 부모가 통제할 경우 ‘시간에 대한 지각의 왜곡’으로 말미암아 게임을 조금밖에 하지 않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중독인 자녀나 중독의 위험이 있는 자녀들에게 시간관리 능력을 키워주면 컴퓨터 사용조절능력이 향상된다. 여덟째, 자녀들이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스트레스에 강한 사람들은 시카고 대학의 Kobasa와 Maddi(구광현 외, 2002 재인용)가 제창한 3C가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3C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통제력(control), 스트레스를 개인의 성장과 발달의 기회로 변화시키는 도전력(challenge), 그리고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신과 가족, 일에 대한 확고한 책임감 및 수행능력(commitment)을 의미한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스트레스 극복에 반드시 필요한 이 세 가지 능력은 어린 시절에 스트레스를 다루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회피하기보다는 부모나 교사의 도움으로 스트레스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던 경험을 토대로 길러진다는 것이다. 대부분 청소년 자녀의 경우 스트레스 해소방안이 인터넷이 유일한 경우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의 취미, 성향 등을 고려하여, 자녀에게 맞는 스트레스를 극복 방법을 개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아홉째, 자녀의 연령이 낮을수록 보다 쉽고도 구체적인 인터넷 사용지침을 제시해 주고 실천을 격려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부모가 자녀의 게임 행위에 대해 무조건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통제하는 것보다는 자녀 연령에 적합한 게임을 잘 선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아울러 자녀와 함께 적절한 기준을 마련해놓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사실 위와 같은 인터넷중독 예방을 위한 부모교육이 학교에서 실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나, 최근에는 맞벌이 가정의 증가로 인해 부모교육에 참가하는 부모의 참여율이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중독 예방을 위한 부모활용지침을 가정통신문을 통해 각 가정에 배포하는 것도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예방과 조기 개입이 최선 이제 인터넷이 상용화되어 인터넷 오·남용으로 인한 인터넷중독이 사회문제로 확산되고 있다.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인터넷중독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가 ‘예방과 조기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교에서의 인터넷중독 예방교육이 필요하며, 부모, 담당교사 및 상담교사 간에 원활한 정보 교환과 협력이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일선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나고 있는 진로상담부, 교육정보부 교사들을 위한 상담 모델 보급과 교원직무연수를 실시해야 한다. 나아가 인터넷중독 예방 및 해소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청소년의 사회화를 담당하고 있는 학교와 가정의 기능을 보다 활성화하고 교사와 부모 및 전문가의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Usher와 Bryant(1989)의 주장과 같이 이론(theory)과 실제(practice), 그리고 연구(research)를 하나의 통합된 단위(unit)로 고려하여 전문성과 실천력이 함께 강화될 필요가 있다.
원일석 | 광운대 정보통신대학원 교수․교육용게임 쉽게 빠질 수 있는 게임의 유혹 A군은 고향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가 온라인 게임을 하게 된 것은 주변 친구들의 자연스러운 권유에 의해서였는데, 그 별 의미 없는 권유가 A군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켜 버릴 것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온라인 게임의 전투와 커뮤니티의 재미에 푹 빠져버린 A군은 강의가 없는 낮에는 대학가의 PC방에서, 밤에는 자취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게 되었다. 점차 온라인 게임에 접속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그것에 비례해 학업에 쏟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과제물도 제출하지 않고, 강의에도 잘 나가지 않던 A군은 더 이상 출석점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휴학을 해버렸다. 그리고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온라인 게임의 무한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A군의 말에 의하면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자취방에서 일 년 동안 온라인 게임만 하다가 초췌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현실에 눈을 뜬 것이다. 현실은 더 참혹했다. 휴학상태로 두 학기를 허송세월하고, 등록금은 게임 아이템을 사는데 모두 탕진해 버렸다. A군은 더 늦기 전에 다시 복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힘든 결정이었다고 한다. 후배들과 함께 재수강하기도 창피하고, 무엇보다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일 년 동안 게임만 하며 시간을 보냈으며 등록금을 더 달라고 말할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A군으로부터 필자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다행이도 A군은 복학하여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간 뒤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대학생활에서 잃어버린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어떻게 만회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었고, 자신을 이런 상태로 몰고 간 온라인 게임은 다시는 보기 싫다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A군이 이런 일을 겪기 전에 필자나 다른 전문가들이 상황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대학생인) A군이 어느 순간 자신이 스스로 정신을 차렸다는 점, 그리고 빨리 잘못된 상황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그 노력이 성과를 보였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게임중독 상황에서 스스로 정신을 차리는 행운은 정말 찾아오기 힘들다. 특히 혼자서 살며 주변 사람과 격리된 상태에서는 더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학생들의 주변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알리도록 당부해두는 것이 좋다. 집에서는 밤새고, 학교에서는 자고 초등학교 고학년인 B군은 활발하고 성적도 비교적 좋은 아이다. B군의 부모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 날 B군의 부모가 B군이 게임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하며 필자에게 상담을 요청해왔다. B군의 부모는 가게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침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아침에 나가는 사이클이 반복되어 B군이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B군과도 구면이고 집에도 방문한 적이 있어 B군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B군은 집에 와서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B군은 집에 오면 곧장 게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부모가 올 때쯤 되어 컴퓨터를 끄고 자는 척하다가 부모가 잠자리에 들면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외아들인 B군은 자기 공부방 안에 컴퓨터를 가지고 있었는데, 방문을 닫으면 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구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상태로 게임을 하다가 새벽에 잠들고, 아침에 엄마의 성화에 깨어나 등교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쉬는 시간에 자고, 수업시간에는 조는 등 학교에서 수업이 잘될 리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생체리듬이 고정되어 밤에는 정신이 또렷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므로, 성적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우 중독적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한 조치가 우선되어야 하고, 폭력적이거나 강제적 방법보다는 스스로의 조절력을 높이는 방법을 유도하여 B군의 현실 생활 복귀를 찾아야만 했다. 일단 B군의 컴퓨터는 방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도 써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컴퓨터를 거실의 공개된 장소로 내놓았고, 또한 담임선생님과 B군의 학습문제에 대해 상의하도록 하였다. B군은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스스로 문제를 파악하고 시간조절을 하게 되었으며, 지면에 다 쓸 수 없을 정도의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지만 이제는 일상생활과 학업에 있어 큰 문제없이 적응하고 있다. 그러나 B군의 경우는 가정환경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켜봐야만 한다. 맞벌이나 부모의 갈등 문제 등으로 자녀에게 관심을 덜 기울이는 가정의 경우 게임중독문제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일단 일어나면 심각한 수준으로 빠져버려 회복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가정환경을 살펴보자. 가족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환경의 아이들은 일단 게임중독을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그만큼이나 게임은 아이들의 일상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새로운 도피처이자 안식처가 되었다. B군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발견한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게임에 몰입하자 B군도 모르게 다리 한쪽이 의자로 올라가더니 화면을 향해 목을 쭉 뺀 자세가 게임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성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컴퓨터 직업병 자세를 초등학생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아이들의 게임중독과 함께 반드시 확인해보도록 당부하고 싶다. 청소년 10명에 3명이 게임중독 21세기형 지식산업이며 정서서비스산업 및 감성산업인 게임산업. 집중적으로 육성해야 할 중요한 국가전략산업이며, 종합예술산업이며, 멀티미디어 데이터의 보고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불리는 신규산업이다. 국내 규모는 4조 이상, 세계적 규모는 1200억 불(약 140조 원)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의 시장이며 매년 30% 이상의 경이적인 성장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화려한 게임시장에서 파생되는 게임중독 문제는 그냥 지나칠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달의 밝은 앞면을 보면서 달의 어두운 뒷면은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달의 뒷면이 실재하는 것처럼 청소년 10명 가운데 3명이 게임중독 증세를 보이는 것으로 추산되는 현실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과연 청소년들은 얼마나 게임을 할까? 청소년들이 한 달에 얼마나 온라인게임을 하는지에 대한 조사에서 거의 전 연령의 30% 정도가 하루에 한 번 이상 온라인게임을 한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거의 ‘일상’이라고 해도 될 정도이다. 게임 시간대를 조사한 것에서는 초등학생 연령대는 반수 이상이 정오부터 저녁 6시 사이의 시간에 게임을 한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이나 PC방에서 게임을 하는 인원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녁 6시 이후에는 집에서 부모님들과 함께 있으므로 게임을 하기에는 다소 곤란해지고, 수면시간이 시작되는 10시 이후에는 게임이 더욱 곤란해진다.이에 비해서 중학생 이상 연령대를 보면 학교가 끝난 뒤부터 새벽 2시까지의 분포가 고른 편이다. 이 연령대는 비교적 시간에 자유롭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0.7%(새벽 2시부터 아침 6시까지)의 초등학생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일상을 보내는 것일까?[PAGE BREAK] 아직도 해결은 가정 내에서만 게임중독 문제가 맨 처음 발견되는 장소는 대부분 가정이다. 자녀의 게임중독 증상을 인지한 뒤 부모들의 대응방법을 보면 자녀의 게임중독 문제는 부모가 스스로 해결하거나 강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답변이 상당히 많다. 전문 상담기관이나 교사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답변은 상대적으로 적다. 만약 자녀의 게임중독이 심각한 상황이라면 전문가와 상담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자칫 놓칠 수도 있다. 교사와 부모와의 긴밀한 교류는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믿음직한 방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경험에 의하면, 컴퓨터를 없애버린다거나 전원케이블을 숨긴다거나 하는 강제적인 방법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게임에 일단 빠진 사람은 게임이 가능한 곳을 찾아 이동한다. 더구나 지금 우리나라는 온라인 게임 최적의 환경이다. 학교와 공공시설의 컴퓨터는 개방되어 있으며 PC방 사용요금은 초등학생의 용돈으로도 충분히 밤을 샐 수 있을 정도로 저렴해졌다. 게임중독 알고, 대처하자 그렇다면 교사는 어떻게 학생들의 게임중독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학부모와의 연락이 제일 효율적인 방법이겠지만, 몇 가지 요령을 통해 학생들을 살펴보면 게임중독의 전조 또는 심화증세를 눈치 챌 수 있다. 첫 번째로 학생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다. 만성적 피로, 수면부족, 교우관계의 변화, 언어의 변화, 잦은 지각 등이 있다면 게임몰입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쉬는 시간에 책상에 팔을 포개고 자는 학생을 살펴보라. 두 번째로 학급의 유행 게임을 주시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의 경우 학급 내 친구들이 게임에서도 다시 모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단 학급 내 일정 비율 이상의 인원이 하는 게임은 유행이 되어 버린다. 이때, 몇몇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중독 상태에 빠져 오랜 시간 게임을 하는 학생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특히 해당 게임의 ‘고렙(높은 레벨의 게이머)’은 그만큼 투자한 시간이 많다는 뜻이므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가정환경을 살펴보는 것이다. B군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게임에 중독되기 쉬운 환경을 가지고 있는 학생은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다. 상담기법에 대해 배우고 싶어 하는 교사라면 국내 여러 기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인터넷 게임 중독관련 상담교육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인터넷 중독 전문상담사 교육과정’의 경우 인터넷과 청소년의 디지털 문화 및 신체건강, 그리고 온라인 게임중독에 대한 개인 및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소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한국 청소년상담원의 ‘청소년 온라인게임중독 예방프로그램 지도자 양성교육’ 또한 각 급 학교 교사들이 온라인 게임중독에 대한 강의와 실습을 통해 학교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한국교총 원격교육연수원(www.educa-tion.or.kr)에서 운영하는 ‘학생지도를 위한 인터넷 중독 상담과정’은 6주간의 온라인 강의 프로그램을 통해 온라인 게임, 채팅, 사이버섹스 등의 다양한 문제와 실제 사례와 상담내용을 중심으로 36강좌가 구성되어 있으므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경우 상담에 대한 정보 습득이 가능하다. ‘직무연수’ 메뉴를 선택하면 손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학교에서 지도할 수 있는 중독 예방법 그렇다면 교사가 지금 당장 시행할 수 있는 간단한 게임중독 예방법은 무엇일까? 첫 번째, 컴퓨터는 게임기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컴퓨터는 최소한 한대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하는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렸다. 성인은 그 컴퓨터를 이용하여 문서를 작성하고 정보를 검색하거나 프로그램을 만들겠지만 그런 작업을 할 필요가 없는 청소년들에게는 컴퓨터는 단지 게임기 아니면 채팅용 단말기일 뿐이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알려주어야 할 것은 바로 컴퓨터와 인터넷의 용도인 것이다. 정보검색과 자료작성이라는 컴퓨터의 기본적인 용도를 이해하고 학습에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 인터넷과 게임중독을 예방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 학생 스스로가 인터넷과 게임 사용규칙을 만들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지도를 통해 학생들이 자신이 컴퓨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스스로 규칙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스스로 정한 시간에 게임을 끝낼 수 있다면 최소한 게임 중독을 예방하는 기본적인 한 단계를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인터넷과 게임 사용규칙에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항목이 들어가도록 한다. * 하루 중 (집과 학교, 게임방에서도) 언제부터 몇 시간 동안 인터넷과 게임을 한다. * 부모님의 허락 없이 나와 가족의 개인정보와 비밀번호를 공개하지 않는다. * 부모님의 허락 없이 휴대폰/카드 결제하지 않는다. * 부모님의 허락 없이 게임에서 친하게 된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지 않는다. 이것은 최소한의 목록이며, 여러 중독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참고하면 다양한 규칙 목록을 연령대에 맞게 만들 수 있다. 세 번째, 자녀에 의해서 가정의 분위기가 변화되도록 유도한다. 예를 들자면 컴퓨터를 가족들이 모두 볼 수 있는 거실로 꺼내도록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일부 가정은 부모가 사용하기 위해 골방에 컴퓨터를 넣은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부모의 채팅과 게임 등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을 자녀가 지켜보면서 따라하게 된다. 교사와 학생의 주도로 부모로 하여금 은밀한 작업을 하던 컴퓨터를 가족 공동 소유물로 만들게 하자. 그것이 안 된다면 최소한 컴퓨터를 쓰는 동안에는 문을 활짝 열어놓도록 지도하자. 게임중독 문제는 모두의 책임 게임중독 예방과 치료의 최일선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의 대화와 관심이 게임중독을 예방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 교사의 도움이 함께 한다면 더욱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교사가 자녀의 게임사용량에 대해 학부모와 의견을 나누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의 사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온라인게임개발업체가 이 문제에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태국의 온라인 게임에는 ‘셧다운 제도’라는 것이 있다. 오후 10시가 넘으면 모든 온라인게임에 경고메시지가 출력된 뒤 미성년자의 계정은 모두 접속을 끊어버리는 제도이다. 게임 산업의 위축 가능성이나 실행 방법 자체를 고려해 볼 때 다소 심함이 느껴지지만, 청소년들의 수면시간 보장을 위해서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한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활동과 제도들은 청소년들이 건강하고 훌륭히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에게 주어진 시급한 과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장근영 | 한국청소년개발원 부연구위원 나에게 축구는 생활이 아니라 ‘밀리면 끝나는 전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두리는 확실히 다르다. … 본인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축구선수이면서 베컴의 자서전을 머리맡에 놓고 잠들거나 지단에게 가서 공에 사인을 받고는 즐거워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였어도 나에게는 한번 붙어 보고 싶은 경쟁자일 뿐이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성공’에 모든 것을 두었다. 그러나 두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행복과 즐거움’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이 글은 2006년 6월 차범근 감독이 자기 아들과 함께 월드컵 해설을 하면서 느낀 바를 담백하게 적은 칼럼이다. 그는 이 글에서 아들과 자신의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명확히 지적한다. 차범근과 차두리는 같은 축구를 하지만 그 둘에게 축구의 의미는 달랐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는 같은 단어를 말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이것은 모두 새로운 정보화 시대의 도래와 그 속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화 과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시공간의 제약을 적게 받는, 저렴하고 즉각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즉, 인터넷은 새로운 매체(media)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간격을 좁혀주는 역할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전자우편(e-mail)이나 MSN 채팅 서비스와 같은 인터넷의 의사소통 기능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의 방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예전에는 오고 가는데 최소한 2~3일은 걸렸어야 할 공식적인 의사소통조차도 전자우편으로 대체함으로써 거의 실시간으로 교환이 가능해졌고, 채팅이나 네트워크를 통한 의사소통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과는 언제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더구나 무선 인터넷 혹은 모바일 인터넷과 같은 서비스는 우리들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든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터넷 서비스는 이제 어디에나 존재함으로써 그 존재의 특이성을 인식하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고 있다. 그 결과 N 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청소년문화가 등장했다. 차범근 감독이 아들의 행동을 보며 느낀 생경함은 지금 우리나라 기성세대 모두의 경험이다. 그렇다면 실제 인터넷의 어떤 특성이 청소년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청소년들은 이 공간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배우고 발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청소년기 심리적 특성이 ‘몰입’ 배경 분명히 우리나라에서 인터넷과 컴퓨터와 게임은 청소년들이 주류를 이루는 영역이다. 인터넷 통계정보 시스템(isis.nic.or.kr)에 의하면 2006년 1월 현재 6세에서 19세 사이의 청소년들은 97% 이상이 최근 한 달간 한번 이상 인터넷을 사용했으나, 이용률은 연령이 높아질수록 줄어들어서 50세 이후부터는 60% 이하로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용시간은 중학생일 때 보다 고등학생 시기에 더 높아졌으며, 이메일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여자청소년들은 모바일 통신의 문자메시지를 더 많이 의존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이 이렇게 인터넷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배경에는 청소년기의 심리적인 특성이 있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son)에 의하면, 자아정체감의 문제는 청소년기에 이르러 차츰 의식적 수준으로 떠오른다. 청소년기를 심리적 유예기(psycholog-ical moratorium)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심리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청년기의 신체성숙과 성적 발달은 신체에 대한 강한 자의식을 불러 일으켜서 신체적 변화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자아개념의 혼란이 일어난다. 둘째, 청년기의 인지 능력의 성숙은 추상적 개념을 사고할 수 있게 하는데, 이는 자신의 내면세계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여 개인의 역할, 성격, 능력, 그리고 가능성 등을 탐색하고 가치관이나 도덕, 신념 등에 대한 탐색을 가능하게 하여 현실적인 자신과 이상 간의 괴리를 발견하고 고민하게 된다. 셋째, 사회적 관계망이 확대되어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세상과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게 되는데, 이는 동시에 청년들에게 요구되는 역할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들을 ‘주변인(marginal man)’ 이라고 하듯이 상충된 역할 요구에 직면하고 자신에 대한 모호성에 빠진다. 넷째,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판단기준에 참조가 되어왔던 아동기 때의 동일시 대상의 가치가 그 효용성을 상실하면서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고뇌하게 된다. 다섯째, 현대사회는 예전과는 달리 다양한 삶의 방법을 보여주며, 유한한 기회를 가진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정체감의 위기가 심화된다. 특히 자신이 앞으로 어른이 되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두려움, 다시 말해 ‘역할전망’에 대한 두려움은 청소년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게 만든다. 일단 현재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도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한 정체감의 위기는 인생살이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각되는데, 현대사회는 너무나도 다양한 인생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고 그래서 갈등도 더 심해진다. 이런 이유로 청소년들은 어떻게든 현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해야 한다. 자신들만의 세계 만드는 집단정체성 정체감을 확립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은 바로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을 형성하는 것이다. 집단정체성이란 심리 / 사회적 정체감(psychoso-cial identity)으로 개인이 속한 집단에 대한 소속감 또는 일체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나는 연대생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등과 같이 집단 단위로 유지되는 ‘집단적 정체의식’이다. 언제나 청소년들은 부모세대와는 분리된 공간에서 자기들만의 집단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다. 이때 기성세대가 잘 모르거나 불온시하거나 금지하려고 하는 대상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기성세대가 이런 거부감을 보이는 대상은 바로 청소년들에게는 자신들의 집단정체성을 경계 지을 수 있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헤비메탈, 록음악이 이런 집단정체성의 경계선 역할을 했다. 청소년들이 즐기는 음악이 갈수록 험악하고 선정적이 되어갔던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기성세대가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Lull, 1987). 그리고 21세기인 현재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의 집단정체성을 경계 짓는 역할은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이 담당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인터넷에 접속해 들어가 부모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기성세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통신어나 외계어를 이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만의 집단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이버 공간 집단정체성의 세계에서도 다양한 갈등과 공격행동이 나타난다. 특히 사이버공간은 물리적인 위협이 없는 상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현실공간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극단적인 행동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아직까지도 이 사이버 공간의 공동체를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타인 비방이나 공격 행동, 음란물의 유통, 그리고 자살 사이트와 폭탄 사이트 등으로 대표되는 위험한 무엇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같은 이유로 일부에서는 청소년들의 가상공동체 형성과 자기들만의 사이버 문화 형성을 어떻게든 규제하거나 금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단지 인터넷이나 컴퓨터게임이 청소년들과 기성세대 간의 세대격차를 뚜렷하게 드러내고, 기성세대로 하여금 청소년들의 행동과 심리에 대해서 새로운 걱정을 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 걱정은 보통 인터넷 중독, 혹은 게임중독으로 불린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새로운 기술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 전문가의 위치와 통제력을 상실한 기성세대와 오히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주도권을 잡은 청소년들의 역할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제 부모는 자녀가 켜고 들여다보고 있는 컴퓨터의 모니터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두렵다. 비명과 선혈이 낭자한 화면 앞에서 격렬하게 게임에 몰입하던 자녀 때문에 걱정하는 부모도 많다. 게임하면서는 화를 내던 자녀가 다음 순간에 누군가와 채팅을 하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볼 때는 안심이 되다가도 더욱더 불안해진다. 도대체 그 안에 뭐가 있기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화내다가 웃기도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말로 내 자녀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된다. 그리고 이런 걱정은 자녀가 지금 당장 완수해야 하는 학업 문제와 만나면서 냉엄한 현실이 된다. 컴퓨터로 무엇인가를 하느라고 공부를 못하게 된 자녀들을 데리고 인터넷 중독 상담센터에 찾아오는 부모들은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PAGE BREAK] 충분한 이해 없는 개입은 부작용 낳아 좀 더 구체적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범한 청소년들이 인터넷과 컴퓨터게임에 몰입하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또래 문화 : 모든 인간에게는 남이 한 일을 따라하려는 동조경향이 있다. 그런데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이 경향이 특히나 더 심하다. 주변 친구들이 하는 활동에 함께 참여하려는 욕구는 결국 또래문화에 동조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또래 문화가 바뀌면 놀이도 바뀐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2) 역할놀이의 본능 : 고프만 등에 의하면 우리는 일종의 배우들이다. 우리가 일하거나 공부하는 배경은 심리적으로는 연극 무대에 가깝다. 현재 나의 무대와 무대, 대본과 대본을 구분하는 능력은 기본이고 말이다. N 세대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역할놀이를 통해서 이런 무대와 대본, 그리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한다. 3) 암묵적인 사회적 암시 : 해리스(Harris)의 연구에 의하면 청소년들은 언제나 자기가 접하는 것들 중에서 첨단의 활동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런 활동일수록 앞으로 자신이 성인이 되었을 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활동일수록 기성세대가 잘 모르거나 두려워할 가능성이 높으며 청년들에게는 집단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만드는 뚜렷한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소년들이 기성세대와 다른 사고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문화를 형성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있었던 정상적인 발달과정임을 알 수 있다. 단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인터넷과 게임이라는 최첨단 기술영역을 배경으로 일어나면서 더 눈에 많이 띄고 있을 뿐이다. 사이버 공간의 청소년문화를 충분히 이해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입은 충분한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게시판에서의 욕설사용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욕설 금지장치를 피하기 위해서 청소년들은 욕설의 철자를 변형했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통신어를 만들게 되었다. 즉, 사이버 공간을 정화하기 위한 개입이 오히려 사이버 공간을 예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시킨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인터넷, 게임은 청소년 이해의 열쇠 내가 두리에게 배우는 게 하나 있다. 언젠가 자전적인 글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남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는 나에 비해 두리는 동료를 인정하는 여유가 있다. 부럽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 - 앞의 칼럼에서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청소년들은 부모세대와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해왔다. 부모가 자녀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하고 원하는 대로 길러낼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상 환상이었다. 부모는 언제나 자녀가 자신의 일부이며 어느 누구보다도 자기 자녀를 가장 잘 알고 통제한다고 오해해왔고, 뒤늦게 달라진 자녀의 몸과 마음을 발견하고는 놀라곤 했다. 컴퓨터가 없던 필자의 청소년 시절에도 우리 또래 친구들은 독서실 간다고 하고는 오락실에 가는 것처럼 언제나 부모나 선생님 몰래 자기들만의 활동을 해왔다. 발달심리학자 해리스(J.R. Harris)는 이러한 또래 문화야 말로 새로운 세대가 변화하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만약에 일반적으로 부모가 꿈꾸는 것처럼 친구들보다는 자기 부모와 더 말이 잘 통하고 자기 부모와 일치하는 가치와 행동방식을 습득한 자녀가 있다고 치자. 그 아이가 과연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마주친 세계는 부모가 살았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의 가치와 행동방식은 그들이 살아야 했던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자녀들이 살아야 하는 세계가 기성세대의 그것과 같지 않다면, 자녀들은 부모보다는 자기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자기 또래에 더 주목을 하고 그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사이버 공간은 청소년들을 더 안전한 곳에서 더 쉽게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예전에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서 분리된 공간을 필요로 했다. 그것은 으슥한 공터나 폐건물이거나 산 속이 되기도 했다. 이런 공간에서 이들은 실제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꿈을 검증했고 그 결과 매우 많은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중요한 타인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된 지금, 청소년들은 자기들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으슥한 공터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인터넷 속의 게시판이나 온라인 게임이 바로 그 공간이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안전한 자기 방에 앉아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자기들만의 문화를 만들고 자기 신체를 사용할 필요 없이 아바타를 통해서 안전하게 자신의 꿈을 실험할 수 있다.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해서 청소년들은 안전해졌지만 부모가 체감하는 자녀의 위험은 더 커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예전에 부모가 자녀의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공간을 찾아가야 했다. 실제로 자기 자녀가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무슨 일을 하는 지를 볼 수 있었던 부모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그 결과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어디서든 집에서와 똑같이 조용하고 얌전할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오해에 기반을 둔 안심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인터넷을 통해서 앉은 자리에서 자기들의 공간을 경험하는 청소년들은 부모에게 예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부모는 자기 자녀가 자기가 아는 익숙한 모습뿐만 아니라 더 다양하고 극단적인 모습까지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습은 컴퓨터와 인터넷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제 드러난 것일 뿐, 예전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청소년들의 행동방식은 기성세대와 다르고 그들이 활동하는 공간도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이다. 변하지 않은 것은 또 있다. 기성세대와 다른 자기를 만들고자 하면서도 기성세대로부터 충고와 조언을 필요로 하고, 기성세대가 제공하는 언제든 돌아갈 곳을 믿고서 자유롭게 탐색할 수 있는 청소년의 심리는 변하지 않았다.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분명하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결과 소통의 가능성은 더 높아졌다고 할 수도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 청소년 자녀가 무슨 게임을 좋아하는지 주로 어떤 사이트에서 활동하는지만 알면 자녀와 소통할 수 있는 확고한 통로를 마련할 수 있다는 얘기다.
김철수 | 경남 거제중앙고 교사, 사진작가 늪을 나누는 기준은 늪 주변 지하수 높이와 늪의 수위와의 상관관계에 따른다. 늪의 수위가 낮으면 저층늪, 늪과 주변의 수위가 같으면 중층늪, 늪의 수위가 주변보다 높아지면 고층늪이라고 한다. 보통 저층늪은 강이나 하천 주변에서 형성되어 있고, 중·고층늪은 높은 산에 분포하고 있다. 산에서 늪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반드시 지하수가 분출되어야 하고, 이곳에 사초류와 벼과 식물이 자란다. 이들은 높은 산에 분포하므로 밤에 기온이 내려가서 풀들의 죽은 찌꺼기가 완전히 분해되지 않고 이탄층이 된다. 이때 늪의 수위가 주변의 높이와 같아지면 삿갓사초류, 진퍼리새 따위가 밭을 이루는 중층늪이 된다. 여기에서 더 진행되어 물이끼층이 발달되어 이탄의 퇴적층이 볼록하게 되어 늪의 수위가 주변보다 높아지면 고층늪이 된다. 산위에서 다양한 동식물 품고 있어 둔철(屯鐵)산은 황매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이 정수산을 거쳐 경호강에 몸을 풀기 전 811.7m의 높이로 우뚝 솟아 있다. 경호강 건너편에는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인 웅석봉이 마주하고 있다. 둔철늪이 위치한 경남 산청군 신안면 안봉리를 이루는 흙은 검은색을 보여 철 성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철을 생산하였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산 전체에 철이 쌓여 둔철이다. 늪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울산의 뻔지늪과 무제치늪이 4천~6천 년 전에 만들어졌으므로 대략 이 정도로 추정된다. 둔철분지는 둔철산과 대성산이 서로 가슴을 펼쳐 만들었는데, 대략 6백만㎡로 추정된다. 둔철분지를 이루는 골짜기는 모두 골이 깊고 물이 풍부하였기에 예전부터 많은 사람들을 가슴에 안아줄 수 있었다. 사람이 영향을 주기 전에는 둔철분지의 대부분이 늪을 이루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일부분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둔철늪 주변에는 작은 호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 얼마 전까지 경작지로 이용하였던 논들이 늪 면적보다 넓게 펼쳐져 있다. 둔철늪은 지리산 인근에 위치한 왕등재늪, 외고개늪, 황매산늪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천연기념물 330호인 수달 및 환경부 보호종인 꼬마잠자리의 최대 서식지이다. 2003년에 발견된 이 늪은 해발 640m 지점에 위치하며, 2만여 평의 면적을 나타낸다. 이 중 자연습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부분은 약 2천5백 평 정도이다. 습지 가운데 일부는 고층습원인 대암산 용늪처럼 식물체가 완전히 분해되지 않아 만들어지는 이탄층이 발달되어 있어 발로 밟으면 10~20㎝ 높이로 울렁거린다. 한때 논으로 이용된 이곳은 20년 전부터 경작을 포기함에 따라 점차 원래의 습지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 수령 30~50년의 오리나무가 자라고 있는 자연습지는 습지 사이에 암석이 많아 개발이 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 주변의 지역은 논으로 경작되다가 지금은 자연습지로 회복되고 있다. 습지로 회복되는 과정에 진퍼리새와 삿갓사초 및 도깨비사초가 넓게 자라고 있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붓꽃, 꽃창포, 민솜방망이, 큰방울새란, 통발, 도롱뇽, 무자치 등 170여 종의 동식물과 장수하늘소 등 26종류의 곤충류가 서식하여 국내 산지늪 중 동식물 분포가 가장 높고 다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지 늪 안에서만 조사한 결과이지, 둔철분지 전체를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그 외에도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매류와 환경부보호종인 삵의 흔적이 다수 발견되었다. 특히 이곳에는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잠자리 중 가장 크기가 작은 꼬마잠자리가 국내 산지늪 중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크기는 100원 동전보다 작은 2센티미터 정도이며, 암컷과 수컷의 색깔이 다르다. 수컷의 몸은 처음에는 황색이다가 나중에 붉은색으로 변하고, 암컷은 황색 바탕에 갈색과 흑색의 반점이 섞여 있다. 넓은 가슴으로 많은 사람들 포용 둔철늪을 가는 길은 두 갈래다. 산청읍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단성으로 가는 중간에 외송마을이 나온다. 외송마을에서 산길로 들어서면 내송마을이 나오고, 이곳에서 3㎞를 올라가면 둔철마을이 나온다. 지도상에는 외송과 내송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바깥솔기와 안솔기로 부르기를 좋아한다. 둔철마을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농사를 짓고, 오골계를 기르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단성에서 합천댐으로 가는 길에는 2006년 담장이 등록문화재(260호)로 지정된 단계마을이 나온다. 단계마을에서 사계마을을 지나면 정취암 가는 산길이 나온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2㎞ 정도 오르면 둔철늪에 인접한 경작지가 바로 눈앞에 나타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둔철마을로 연결되는데, 바퀴가 낮은 자가용차는 지나가기가 힘이 든다. 도로 주변의 적당한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작은 연못을 찾으면 그 주변과 아래쪽이 둔철늪이다. 평지늪과는 달리 사람이 다니는 길이 없으므로 조심해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둔철늪 서쪽 편에는 3백m 길이의 암괴류가 넓게 분포하고 있어 웅장함을 더한다. 둔철분지는 많은 사람들을 감싸왔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화전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였고, 자주 산불이 났기에 분지의 많은 부분에는 억새와 키 작은 나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사리, 참취, 미역취, 원추리, 비비추, 삽주 등의 산나물들이 해마다 가득 싹을 틔운다. 지금도 둔철분지 주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의 진주와 거창에서 온 사람들은 봄이면 삼삼오오 모여들어 많은 양의 나물을 채취하고 있다. 산청군과 산림청은 2011년까지 둔철늪을 포함한 둔철분지 약 18만 평에 둔철생태숲을 조성할 계획이다. 생태숲은 생물다양성 유지를 위해 생태적 기능보전을 강화하고, 생태계의 교란과 훼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생태숲은 지리산 모델숲, 활엽수원, 야생화단지, 약초테마원, 고원습지원, 생태연못, 습지관찰 덱 등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또 도시 생활에 싫증을 내고 유기농을 통한 전원생활을 꿈꾼 사람들에게 가슴 한 부분을 내주어 안솔기공동체를 꾸리게 해 주었다. ▶ 둔철늪 옆 정취암 전설 둔철늪 가까이에 있는 정취암은 대성산 동쪽 아래의 큰 암벽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암벽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문가학이라는 사람이 정취암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정월 초하루에 스님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였다. 이유인즉 설날 밤에 요괴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가학은 술 한 동이와 안주를 준비한 다음 기다렸는데, 밤이 되자 한 여인이 나타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게 된다. 여인이 술에 취한 후 가만히 보니 늙은 여우였다. 여우를 묶자 여우는 자신에게 둔갑하는 법을 적은 비술책이 있다고 살려 달려고 한다. 끈으로 묶인 여우는 문가학을 벼랑으로 데려가 입으로 책을 물고 내려오게 된다. 책을 보는 동안 여우는 책의 끝장을 물고 벼랑을 올라가 버린다. 문가학은 비술을 익혔지만 옷고름만은 감추지 못하였다고 한다. 벼슬을 하면서 비술을 사용하다가 잘못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 생태계의 의미와 산지늪의 중요성 생태계(生態系, Ecosystem)는 생물과 환경에 의해 이루어진 모임이다. 환경은 생물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모태로서 토양, 공기, 물, 빛, 온도 등이다. 생물은 역할에 따라 생산자, 소비자, 분해자를 말하는데, 생산자는 다른 생물이 먹을 것을 빛을 이용해 만들고, 소비자는 이를 이용하고, 분해자는 동식물의 사체를 분해하여 흙의 성분을 만든다. 즉, 생태계는 생물과 환경의 어울려짐을 이야기하는데, 생물은 환경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생물이 잘 살지 못하는 환경(예를 들면 사막이나 빙하)은 삭막하다. 서로가 도움이 되는 살기 좋은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사람이 자연(인간을 제외한 생물과 환경)에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중·고층늪은 특수한 환경에 적응된 생물들이 살고 있는 특별한 생태계로 전국적으로 손꼽을 정도로 희소하다. 따라서 이 생태계가 파괴되거나 훼손되면 이곳에 적응하여 살아가던 생물들은 멸종하여 다른 어떤 장소에서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희귀한 자원을 무작정 보존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며, 멸종된 자원을 복원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기 위해서 멸종되어가는 자원의 종 다양성 유지, 천이 계열과 습원 생태계의 보존 연구, 화분학을 통한 고생태학과 고기후학 연구 등이 필요하다.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무덤의 주인인 안티오크 두상* 박하선 | 사진작가, 여행칼럼니스트 산 정상에 남아있는 왕국의 자취 터키의 드넓은 아나톨리아 평원을 지나 동부로 향하다 보면 건조한 스텝 지대가 펼쳐지면서 군데군데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앞길을 막기 시작한다. 이러한 산들은 거의가 석회암 질이어서 키가 작은 나무들만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곳에는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들고 크고 작은 바위들만 뒹굴고 있어 삭막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것들도 있다. 이렇듯 이 모두가 한눈엔 별 볼일 없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산들 중에서 그냥 지나치지 못할 산이 하나 있다. 그게 바로 '넴루트 다이'다. '다이'라는 말은 이곳 말로 '산'을 뜻하기 때문에 '넴루트 산'이라고 해야겠다. 이 넴루트 산은 해발 2150m로 역시 삭막한 바위투성이의 산이다. 이 정도 이상의 높이를 갖은 산은 동부 터키에는 많다. 그렇다면 만년설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높은 것도 아니고, 또 수려한 계곡이나 숲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이 넴루트 산의 매력이어서 뭇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산 정상에는 수수께끼의 고분과 거대한 석상들이 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기원 전 150년경부터 이 일대에 '코마제네(Commagene)'라는 왕국이 자리하고 번영을 누리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왕 '안티오크 1세'의 무덤이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왕의 무덤 지키는 거대한 석상들 심하게 가파른 산도 아니고 또 어느 정도까지는 차로 올라왔기 때문에 등산을 하기 시작한지 30여분 만에 정상에 닿을 수 있었다. 제법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는 가운데 저 멀리서 어둠을 가르고 서서히 동이 터 오기 시작한다. '신의 발자욱'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정상이라고 하는데 아직도 눈앞에서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 있다.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거대한 자갈무더기다. 그리고 주변에는 바윗덩이들이 제 멋대로 뒹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수수께끼의 석상들과 안티오크의 무덤이다. 이윽고 이 안티오크의 무덤에 오늘의 첫 번째 태양빛이 비추었다. 그리고 이 태양빛과 함께 찾아온 여러 신들이 거대한 석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우스', '헤라클레스', '아폴론', 독수리 형상인 '카라쿠스', 사자 모습인 '아슬란', 그리고 코마제네의 여신인 '포르토나'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2000년 동안 이곳에서 코마제네 최고의 왕이었던 안티오크의 무덤을 지켜 왔다. 그러니까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바윗덩이들이 바로 이러한 신들의 두상이었던 것이다. 개중에는 안티오크 자신의 모습도 끼어 있다. 이러한 신상들은 애초에는 무덤 앞에 20여개의 바위들로 조합한 거대한 모습으로 가지런히 서 있었는데 언제인가 있었던 지진으로 인해 이렇게 두상들만 떨어져 나와 땅바닥에 뒹굴게 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아직도 무덤 앞에 가지런히 남아 있는 몸체들이 그걸 잘 말해 주고 있다. 두상들의 크기만 해도 2m 정도이고, 가장 큰 신상은 제우스상인데 전체 무게가 91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러한 신상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뿐만 아니라 무덤의 뒤편, 즉 태양이 지는 서쪽에도 비슷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아침에는 동쪽을, 늦은 오후에는 석상들이 석양빛에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서쪽에서 여러 신들로부터 코마제네 왕국 시절의 전설을 듣게 된다면 이 넴루트 산 등정의 최고의 맛을 느끼게 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는 수수께끼 사실 이 넴루트 산정에 이토록 엄청난 석상들이 나뒹굴고 있는 고분이 있다는 것을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1881년 오스만투르크 시절의 지질학자들이 이 넴루트 산의 지질조사에 나섰다가 우연하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계속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가, 1953년 미국 고고학계에 의하여 어느 정도 그 수수께끼는 풀렸다.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대 코마제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명과 비문을 남기려고 해 왔다. 그래서 이 안티오크의 자갈 무덤과 석상들을 만드는데 대략 12년이 걸렸으며, 동원된 인원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수천 명이 공사 중 죽었다는 사실이다. 자갈 무덤의 높이가 75m였으나 계속 흘러내려 현재는 50m정도다. 또 각 두상이나 발판 등에 한 변의 길이가 5cm정도의 네모난 구멍이 깊이 7cm 정도로 뚫려 있는 것으로 봐서 이곳에 바를 끼어서 들어 올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자갈 무덤 또한 처음에는 모래로 봉분을 만드는 것에서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코마제네 왕가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어 거대한 조각상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것들은 많다. 특히 이 고분의 주인공인 안티오크에 대한 것은 고분 동쪽 비문의 기록에 의해서 코마제네 최고의 왕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페르시안, 어머니는 마케도니아 사람이었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당시 코마제네 왕국은 동으로는 페르시아, 서로는 마케도니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의 딸들을 양쪽으로 결혼시켜 가면서 평화를 유지해 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지만 안티오크가 언제 태어났고, 얼마동안 왕위에 머물렀으며,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렇다 보니 많은 고고학자들이 이 무덤 속을 궁금해 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실시한 것이 전자탐사다. 이 전자탐사는 이곳뿐만 아니라 코마제네 왕국의 두 번째 수도였던 '에스키 칼레'에 있는 안티오크의 아들 '카라쿠스'의 무덤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의외다. 카라쿠스의 무덤 속에는 뭔가 들어있는 것으로 나왔으나 정작 이 안티오크의 무덤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도굴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공식적으로 발굴하기 위해 자갈을 퍼내기 시작한 적이 있었는데 퍼낼수록 계속 위쪽에서 자갈들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중도 포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 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지난 호에서는 변강쇠와 옹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함양과 남원 지역의 장승을 찾아갔었지요? 이번 호에서는 돌장승을 중심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돌은 나무에 비해 내구성이 뛰어나기에 처음 조성 당시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장승은 조성했을 당시의 날짜를 기록해 두어 장승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하지요. 그에 반해 나무장승은 일정한 시간을 두어 교체를 해야 하기에 장승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저마다 개성을 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장승에 대한 자료를 뒤지다가 다음 ‘장승코’라는 시를 찾아내곤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소개하고자 합니다. 예로부터 코는 남성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돌부처의 코를 갉아 마시면 득남한다는 속신(俗信)을 갖고 있었지요. 그런데 1931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문예란에 박 금이라는 사람이 쓴 시에서 장승의 코는 다른 용도로도 사용이 된 듯합니다. 장승코 - 洪原아리랑 朴 錦 낙태약 된다고 저 장승코를 어제 밤 비온 뒤 또 글거갔소 오목오목 들어간 고무신 자국 키 작은 여자가 발버팀쳤소 우뚝하던 그 코가 없어지고도 그 자리가 한 치나 패어드러났네 캄캄한 밤중타서 찬칼을 품고 저 장승 코 베려 달려들 때에 약한 맘 얼마나 발발 떨었노 아니다 대답하지 그 처녀아기 야심한 밤, 두려운 맘으로 장승 곁으로 가 작은 키로 발돋움하며 장승코를 긁어댔을 그 상황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오죽했으면 장승에게 달려들었을까요. 장승이란 산신, 성황당, 당수나무, 돌탑, 솟대 등과 함께 당당한 마을 지킴이인데, 그 장승코를 베고 긁고 하다니요. 키 작은 그 여자는 그의 저주에 겁먹으면서 얼마나 몸서리쳤을까요. 하지만 그는 주먹만 한 자신의 코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왕방울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그녀를 보듬고자 했을 겁니다. 발악 한 번 하지 못하고 벅수같이 그냥 그 자리에 우두커니 그 자세로 서서 ‘그려, 그러면 내 몸뚱이라도 주마’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코를 베이고도 모른 척하는 그 녀석의 넉넉함에 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돌장승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벅수 같다’는 표현처럼 푼수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석공이 장승을 만들 때 더 무섭게 표현하기 위해서 애쓴 흔적이 역력하지만 결국 그 석공 또한 민초의 여리고 착한 마음을 가졌을 터인데 그 심성에서 만들어진 무서움의 정도가 과연 얼마만큼이나 표현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네 장승은 무섭고 화난 모습이 오히려 어색해 보일 정도로 친근할 때가 많습니다. 저래 가지고 어떻게 잡귀니 재액을 쫓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까지 합니다. 그런 느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장승의 모습이 마치 우리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닮아서 그렇다고들 이야기하고, 어떤 이들은 농사만 짓고 살던 순박한 민초들이 아무리 매섭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한들 결국 드러내지 않는 웃음을 띠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서양의 악마는 근본적으로 악에 가득 찬 존재입니다만 우리에게 있어서 잡귀나 재액은 어쩌면 적당히 잘 대접하여 원한을 풀어주어 타협점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융통성이 있기에 악의 근원인 서양의 악마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장승을 영문으로 ‘Devil Post'라고 표현하는 것은 서양식 악마의 개념이 강조된 것 같아 적절치 않다고 보아집니다. 하여튼 얼굴을 제아무리 무섭게 조각하고 몸집에 칼을 채우고 한들 장승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장승의 주된 기능을 알리면서 그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몸뚱이에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호법선신(護法仙神),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등이 적힌 명문(銘文)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이 명문을 통해 하늘에서나 땅속,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나 빈틈없이 한 공동체를 지키는 늠름한 장군이나 역사(力士)로서의 지위를 부여받게 되지 않았을까요? 사찰의 돌장승 남원 만복사터는 김시습의 금오신화 중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절터에 가면 마치 목을 옥죄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얼굴과 목, 어깨 일부만 드러내고 나머지 몸통이 땅에 묻힌 채 길가에 방치되다시피 한 돌장승이 한 점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 부분만으로 보아서는 사찰의 금강역사로 볼 수도 있지만 발굴 결과 드러난 일자형 몸통으로 보아 장승으로 보는 시각이 합당할 듯합니다. 땅에 묻힌 채 하루 종일 자동차 매연을 마셔야 하는 그를 바라보고 애틋함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비록 그런 열악함에도 볼에 탄력이 넘치고 퉁방울을 치켜떠서 응시하는 그 당당함은 만복사 넓은 절터를 수호했을 과거의 영화를 떠올려 주기에 충분합니다. 곶감과 자전거로 유명한 상주 남장사 석장승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임진구월립(壬辰九月立)’이라는 명문이 남아 있어 남장사 극락보전의 현판과 대조하여 조선 순조 32년(1832) 혹은 고종 29년(1892)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코에 비뚤어진 입, 가분수 머리에 좌우에 귀, 쭉 삐져나온 이빨 두 놈까지 달린 이 장승을 보면 누구나 투박하고 친근한 정감을 갖게 됩니다. 그와 나란히 서 있었을 ‘상원주장군’은 어디에 있을까요? 서울 안국 전철역에서 내려 인사동으로 오다 보면 인사동 거리 입구에 장승 두 기가 서 있습니다. 서울 한 복판에 서 있는 이 장승은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와 인사동과 관훈동 지역주민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1988년 6월 18일에 세운 것으로 나주 불회사 입구 돌장승을 모델로 제작한 것입니다. 불회사는 절집으로 들어가는 숲길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불회사 석장승은 중요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른쪽 남장승에 하원당장군이라 적혀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또한 누군가 ‘下’ 자를 ‘正’ 자로 바꾸어 놓은 흔적도 보입니다. 왼쪽 여장승에는 주장군이라는 명문이 남아있는데 이는 상원주장군을 줄여 이름붙인 것입니다. 콧등과 미간에 주름이 가득하고 잇몸이 쭈글쭈글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는 장승입니다. 불회사 돌장승을 만나기 전 근래 새로 지은 일주문 근처에도 수많은 나무장승이 각양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회사 돌장승과 가까운 운흥사 터에도 돌장승 두 기가 남아 있습니다. 불회사 돌장승과 비교해 봅시다. 대개 장승은 오른쪽이 남자 장승이 왼쪽이 여자 장승입니다만 이곳은 남녀장승의 위치가 반대입니다. 또한 불회사와는 달리 남장승은 상원주장군으로, 여장승은 하원당장군으로 불립니다.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은 것입니다. 불회사 남장승의 수염이 한 줄기로 길게 늘어서 있는 반면 이곳의 남장승은 수염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여장승인 하원당장군의 뒷면에 강희 58년(1719년)이라는 명문이 있어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두 장승 모두 안경을 쓴 듯 굵은 테를 둘렀고 특히, 턱과 입 부분이 움푹 들어가 불회사 장승, 정읍 원백암 마을 장승과 함께 대표적인 할머니, 할아버지 형 장승이라 하겠습니다. 장승 바로 앞에는 성혈바위가 자리하고 있어 장승과 함께 기자(祈子)를 향한 민초들의 염원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경남 창녕 관룡사 돌장승은 단정하고 투박한 멋이 우리나라 돌장승 중에서도 최고로 꼽을 만합니다. 왼쪽의 장승은 벙거지 모자를 쓴 듯한 형태에 얼굴만으로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돌하르방의 이미지가 느껴지고 오른쪽 장승은 눈도 동글, 코도 동글, 얼굴도 동글동글합니다. 모두 명문은 없으며 다문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장승은 지난 2003년 태풍 매미로 쓰러져 있던 것을 군청에서 흙으로 덮어두었는데 누군가가 훔쳐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한 달 가까이 노력한 끝에 절도범들이 군청에 전화를 해 충남 홍성군 폐 공장에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원래 위치보다 더 위에 옮겨 세웠습니다.[PAGE BREAK] 미륵, 裨補神으로 다가온 그들 장승은 미륵신앙으로도 발전하고 나아가 문무인석과 닮은 형태도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장승신앙과 불교신앙이 결부되어 미륵으로 불리는 곳이 많습니다. 절집에서 볼 수 있는 미래불인 미륵불과 달리 장승형 미륵은 질박하며 자비스럽고 친근하게 우리를 맞이합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강댕이미륵불은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원래 위치에서 상류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이 장승은 서해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로에 위치하여 안전운행을 위한 의도로 세웠다고 보기도 하고 보원사의 비보장승으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오른쪽 팔은 가슴까지 올리고 왼쪽 팔은 배까지 올리고 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습니다. 전북 익산 동고도리에 있는 보물 제46호인 고도리 석불입상은 명칭은 석불이지만 흔히 수구막이라고 불리는 장승에 속한다고 봅니다. 중건비석의 내용에 ‘그 형(形)이 불(佛)과 같고’, ‘옛 사람들이 처음 세울 때에 수문(水門)의 허(虛)를 막기 위함이었다’는 내용이 있어 풍수지리상 세워진 비보장승으로 분류됩니다. 100m정도 거리를 두고 사다리꼴 모양의 돌기둥에 2구의 석상이 서로 마주보고 있습니다. 전남 화순군 화순읍 대리 석불입상은 높이 350㎝의 돌기둥을 사각형으로 다듬어서 전면에 얼굴 부분만 돋을새김 하고 나머지 신체부분은 선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육계나 삼도와 같은 불상의 특징은 볼 수 없고 대신 넓적한 코, 부라린 눈 등 석장승의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의 혼합된 유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합천군 삼가면 원금마을 미륵불은 마을 입구 냇가에 자리해 있는데 아들을 낳고자 하는 강씨 집안에서 치성을 드렸더니 소원을 잘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수년 전 이 미륵불 앞으로 도로가 나면서 사람들이 미륵불 앞 돌탑을 없애버렸다는데 그 해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합천 묘산면 가산리 장승은 마을 입구에 한 쌍, 고갯마루에 한 쌍이 자리하고 있어 한 곳에서 네 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요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통영 문화동 벅수는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빌기 위한 비보장승으로서,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1906년(고종 10년) 세워졌습니다. 토지대장군이라는 명문은 비보장승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나라 돌장승 중에서 유일한 채색 장승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U자형으로 벌린 입과 입 밖으로 솟아난 두 개의 송곳니가 요물스러운 귀신을 막아내는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벅수를 보면 다른 돌장승과는 달리 왠지 음습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장승의 색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관모와 눈썹, 귀, 세 갈래로 갈라진 턱수염은 검은색으로 치장되었고 얼굴과 몸통 뒷부분은 붉은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다른 돌장승들이 육안으로 형체가 잘 구별되지 않지만 이곳은 눈, 코, 이빨, 잔주름까지 훤하게 드러나는지라 그런 기분이 더 강하게 드는 듯합니다. 양쪽의 송곳니도 유달리 커 보이고 붉은빛의 얼굴은 처용설화에 나오듯이 귀신을 쫓기에 충분하리라 생각됩니다. 대개의 장승이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울산 언양벅수의 경우는 색다릅니다. 한 마디로 부라린 눈, 우뚝한 코, 큰 입에 튀어나온 이빨 등 돌출된 형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수줍은 새색시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입도 있는 둥 마는 둥 육안으로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윤곽으로나마 눈과 코를 구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원래 이 벅수는 돌다리로 쓰였었는데 뒤늦게 벅수임이 밝혀진 것입니다. 중원고구려비가 빨래판으로 쓰였던 것처럼, 이 벅수도 기묘한 과거사를 갖고 있습니다. 한편, 대전 동구 비룡동 지하여장군은 하트형의 얼굴에 여느 장승과 다른 자그마한 코에 살풋 웃음 띤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충북 음성 원남면 마송리 정계대장군(淨界大將軍)은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염원을 명문으로 담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방학에 광화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최한 교원직무연수를 5일간 받았습니다. 연수기간 민속박물관을 쉼 없이 돌아다니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외국인이 눈에 띄게 많이 찾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제로 박물관 측의 안내에 의하면 용산에 재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경복궁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외국인이 민속박물관을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양인들이 처음 우리나라를 찾았을 때 그들은 장승을 일컬어 ‘조선의 우매한 민중들의 우상숭배’로 폄하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서 있는 장승을 보며 그 속에서 한국인을 찾고,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느끼고자 합니다. 한 나라의 문화가 경쟁력이 되는 이 시대에 박물관에서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장승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다음 호에도 장승답사는 계속됩니다. | 울산 옥현초 교사
서울지역 초․중․고생 가운데 35.9%가 정신장애를 겪고 있으며 13.2%는 2가지 이상의 정신장애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는 최근의 보도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3명중 1명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문제치고는 간단치 않다. 이 같은 결과는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와 서울시가 지난해 9~12월 초․중․고교 19개를 무작위로 선정해 2672명을 대상으로 한 역학조사에 따른 것이다. 학생들의 정신장애는 특정공포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적대적반항장애, 틱장애 순이었다. 특정공포증은 천둥․어두움․벌레 등 특정 대상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이고, ADHD는 지나치게 부주의 하고 학업에 몰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어른에게 사사건건 반항하는 것을 적대적반항장애라고 하며, 끊임없이 눈을 깜빡거리거나 이상한 소리를 계속 내는 것이 틱장애다. 남학생의 정신장애는 ADHD, 여학생의 정신장애는 특정공포증이 많았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학생은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ADHD, 적대적반항장애, 품행장애(절도․가출․결석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애), 조증(지나치게 즐거워하는 장애) 등이 더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교사들이 흔히 ‘골치 아픈 녀석’으로 치부(置簿)하는 그 녀석들의 ‘골치 아픈 행동’을 전문가들은 정신장애라 한다. 멀리 있는 강아지를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거나, 공부를 하면서 계속 다리를 떨어대는 것도 일종의 정신장애다. 서울대병원 조수철 교수는 “ADHD에 적대적반항장애, 품행장애가 병행되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도 있다”면서 “대부분의 부모나 교사가 학생들이 심각한 정신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고 걱정했다. 학생들에게 많은 ADHD는 충동적․무절제․과다행동이 나타나면서 소근육 협응이 안 되고, 학습장애와 정서불안이 나타나는 질병이다. 발병 원인은 전두엽(frontal lobe) 기능상실 정도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학령기 아동의 5% 정도가 ADHD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는 한 반에 두 명꼴이다. 약물치료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뇌파훈련과 함께 식이요법 등의 비약물치료도 받게 된다. 전문가들은 ADHD를 앓고 있는 학생들은 교사가 쉽게 구분할 수 있으므로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돕고자 하면 상태가 크게 호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난달부터 본지에 ‘뇌 이야기’를 연재하기 시작한 정신과 전문의 박형배 박사(마인드메디 원장)는 “되도록이면 교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하고 수업 중에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ADHD 학생들이 증가하는 만큼 교사들의 역할도 커지게 됐다.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하는 한두 명의 골치 아픈 아이, 바로 치료가 필요한 아이다. 가장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교사들의 관심과 사랑이 1차적인 치료가 될 것이다. | 이낙진 leenj@kfta.or.kr
전제상 | 경주대 교수 평가는 인간이 조직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한 어디서나 수시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활동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가치를 판단하는 것을 뜻한다. 교원평가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사람에 대한 평가, 즉 주관적 가치를 전제로 판단하는 것이므로 아무리 타당한 평가기준을 새롭게 설정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름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원평가를 둘러싼 공정성, 객관성, 신뢰성 을 확보하기 위한 논의와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어 왔다. 지난 8월 11일 대통령자문 교육혁신위원회는 교장(50%)과 교감(50%)이 교사를 평가하는 현행 시스템을 교장(40%), 교감(30%), 동료교사(30%)가 교사를 평가하는 개선방안을 확정․발표하였다. 당초 교육혁신위원회가 교사평가에 학생 및 학부모(10%)를 참여시키는 개선방안을 제안하였다가 교육계의 거센 반발 등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철회하였다. 현행 교사근무성적평정은 1964년부터 지금까지 교장과 교감만이 참여할 뿐 다른 이들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폐쇄적 운영시스템 때문에 교사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평가시스템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이 줄기차게 진행되었지만 교육공동체간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교사평가과정에 교육공동체, 특히 학생 및 학부모가 참여함으로써 평가의 공정성과 객관성이 일정 부분 향상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평가의 신뢰성마저 완전하게 담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사평가는 교사의 자질과 태도를 비롯한 직무수행 능력과 과정, 그리고 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고도의 가치판단 활동이다. 교육공동체가 교사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교사에 대한 정보를 함께 공유하면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육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식견을 갖췄을 때 평가하는 사람이나 평가받는 사람이 평가의 공정성, 객관성, 신뢰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다. 물론 교육공동체의 일원인 학생 및 학부모가 교사평가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교육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가진다. 특히 학부모는 학생 교육을 위임한 자로 학생의 학습권이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 지를 확인할 권리가 있으며, 학생은 교사 교육의 직접적인 수혜자로 교사평가에 참여하는 것이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교사평가에 있어서 누가 평가자로 설정할 것인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사평가의 결과는 특정 교사의 현재와 미래 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이 교사평가의 결과가 주로 승진에만 활용되는 시스템 속에서는 동료평가, 학부모 및 학생평가의 결과가 일정 비율로 승진점수에 반영된다면, 해당교사들의 평가결과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 담보장치에 대한 요구가 빗발칠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러한 교사평가결과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으면 학교현장은 교원승진을 둘러싼 막심한 갈등과 혼란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 물론 교사평가에 대한 교감과 교장에 의한 폐쇄적인 평가방식에서 벗어나 동료교사, 학생 및 학부모에게 평가참여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나, 교사근평의 결과가 승진에 반영된다는 현실적인 점들을 고려한다면 학생 및 학부모의 교원평가는 참고자료로 활용되는 수준에 국한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선진국의 경우에도 평가자는 평가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역량을 가진 자로 평가결과에 대한 책임도 동시에 질 수 있는 사람에 국한하여 참여하고 있다. 미국교육연구소(Educational Research Service)가 909개 교육구의 교원평가방식에 대해 조사한 결과, 관리자 평가 99.8%, 동료평가 6.0%, 학생평가 3.0%, 학부모 평가 1.0% 등을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 결과는 미국의 경우에 교사평가의 결과가 교사의 재임용과 보수 및 승진 등에 직결되는 민감한 문제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교사평가시 평가자가 잘못된 정보와 판단에 의해 특정 교사에 대한 평가점수가 낮아 해고되거나 연봉 등이 삭감될 경우에 해당 교사는 평가자 및 교사평가위원회를 대상으로 각종 소송으로 이어지게 된다. 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법정의 판결은 일차적으로 평가자 등이 특정 교사의 학생교육 과실에 대한 책임을 입증을 해야 하는 등의 절차를 가지며, 이 과정에서 교사의 교육활동 과실에 대한 인과관계 불명료성을 인하여 교사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선진국들이 학생 및 학부모의 교사평가에 참여하는 방식은 대부분 교사에 대한 만족도 정도를 알아보고 이것을 교사의 교육활동에 참고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평가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지적인 가치판단의 활동으로 평가의 공정성과 신뢰성 등의 중요성을 고려한 결과이다. 평가에 있어서 공정성과 신뢰성을 상실한다면 평가로서의 존재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평가는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전문적인 방식으로 평가할 때 평가 존립의 의의를 가진다는 기본을 인식한 결과이다. 따라서 새로운 교사평가시스템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외국의 사례를 무분별하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장 교육실정에 어느 것이 부합되는 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요구된다. 즉, 교사다면평가시스템의 장․단점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더불어 교사다면평가 설계시 고려사항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 지, 그리고 평가자를 어떻게 구성하고 평가자의 비중은 어떠한 방식으로 할 것인지, 또한 평가요소와 평가척도는 무엇으로 할 것인지, 평가결과의 활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가 뒤따라야 한다.
몽골에 갔었다. 남(南) 고비 사막의 대평원을 가서, 몽골 원주민들의 전통 주거인 겔(GER)에서 머물렀다. 겔은 중국식 이름으로는 ‘파오’라고 불린다. 원통형 본채에 원추형 지붕으로 된 몽골 유목민의 전통 가옥이다. 겔에서 지내다보니 어린 시절 살던 초가집 생각이 난다. 자연 그 자체를 두르고 살았던 점에서 겔과 초가집은 통한다. 몽골 평원의 대자연은 외경스러웠다. 우러러보면 밤하늘에는 살찐 별들이 보석 밭을 이루고 있었다. 별들은 제 광채를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대지에 총총 쏟아져 내릴 듯 했다. 다음 날에는 저물 무렵 대평원의 아득한 지평 저쪽으로 거대한 비구름의 기둥이 옮겨가는 모습을 보았다. 땅과 하늘을 수직으로 잇는 거대한 구름 기둥이 서서히 옮아간다. 백리 밖 비 내리는 모습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장관이다. 어둠이 내리자 구름 속에서 번개가 쳤다. 그러자 구름 기둥은 이내 장엄한 불기둥이 되었다. 먼 천둥소리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소년처럼 감흥이 일었다. 나의 감관이 경험한 대자연이 너무 황홀하였다. 주체하기 어려웠다. 보들레르의 말이었던가. ‘자연은 하나의 신전(神殿)이다.’는 말이 실감났다. 겔(GER) 안으로 들어 와 나는 엽서를 썼다. 젊은 한 시절 같은 직장에서 친했지만 어느새 무심하게 된 친구에게 엽서를 썼다. 자주 대하지만 이미 황홀한 대화가 증발된 일상의 친구들에게도 엽서를 썼다. 이럴 때 편지쓰기는 주체할 수 없는 진실의 황홀경을 나의 일상 속으로 잡아두는 과정이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먼 곳에서 편지쓰기’만한 것이 또 있을까. 겔의 지붕 위로 어느새 가느단 빗방울 소리가 듣는다. 사춘기 어느 해 가을, 가슴 설레며 그 누구에게 편지를 썼다. 사랑의 마음을 어렵사리 한 장의 편지로 담으며, 그런 마음조차도 차마 부끄러워, 내 감정을 직접은 토로하지 못하고, 내 마음을 남의 시에 의탁하여 전하고자, 온갖 시집을 다 뒤져, 정지용선생의 시 하나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 정성스레 이 시를 적어 넣었다.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 영혼 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 사람 바다에서 솟아올라 나래 떠는 샛별 쪽빛 하늘에 흰 꽃을 달은 고산식물(高山植物) (그대는)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그대는)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그대는) 홀로 어여삐 스스로 한가로워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 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며지며 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 길 위 나는 바다 이 편에 남겨진 그의 반임을 고히 지니고 걷노라. (정지용, ‘그의 반’ 1935) 연애편지 쓰기는, 학교가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활동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개인이 경험하는 총체를 교육과정으로 보는 경험주의 교육철학자들의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교육과정이다. 쓰는 동안, 나의 모든 지식이 순종하고, 나의 모든 열정이 다 무릎 꿇고, 나의 모든 감정이 길들여지는, 그리고 나의 모든 도덕이 아름답게 자극받는, 그런 총체적 경험의 마당이 곧 연애편지 쓰기의 마당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메아리 없는 편지이기 십상이다. 상대의 무심함에 쓰린 상처를 감내하며, 세상에 대한 면역을 키우던 첫 계절이 연애편지 쓰던 학창시절 아니었던가. 휴대폰이니 채팅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속 깊고 은근한 편지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사람들 가슴의 진정성도 사라져 버렸다. 그 진정성 때문에 아름답기까지 하던 사람들의 부끄러움도 사라져 버렸다. 요즘의 사귐과 사랑은 그저 무수한 휴대폰의 수다와 부질없는 감정 확인으로, 쉽사리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도처에 소통이 과잉이지만, 오히려 진정한 소통은 빈곤해지는, 이 ‘가벼움의 시대’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소외(疏外)가 걸려 있다. 말없이 전해 받고 오래도록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던 편지글의 여운과 감촉을 추억해 보자. 우리들은 안다. 드러내자니 부끄럽고 안으로 감추어 두자니 안타깝기 그지없던 ‘진정한 내 마음’이 마지막 인내하는 그 끝자락에서 우리는 마침내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편지는 그런 웅숭 깊은 삶의 맛을 우러나게 한다.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펜팔(pen pal)’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모던(modern)하고 매력 있게 들리는 말이었던가. 1970년대 당시 유명한 잡지나, 농촌 계몽용 잡지, 대중잡지 등에는 펜팔 난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실제로 펜팔을 하는 친구들을 발견할 때면 부럽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펜팔에는 늘 전설이 따라 다녔다. 내용은 이러하다. 참으로 순정하고 순진하여 오히려 통속성이 드러나는 이야기이다. 어떤 청년이 마음 고운 아가씨와 펜팔을 하였다. 얼굴도 모른 채 여러 해를 펜팔로 사귀며 그 고운 마음씨와 성격에 깊은 흠모의 정을 쏟아 장래를 약속하자고 하게까지 되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상대 아가씨로부터 자기를 이제 그만 잊어달라는 편지가 왔다. 그 간 자기에게 사랑과 정을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 왔더란다. 그런데 자기를 잊어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청년이 너무 당혹스러워 그 아가씨의 펜팔 주소지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 아가씨의 마을에 가서 알아보니 그 아가씨는 신체마비로 운신이 어려운 몸이었다는데, 얼마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유서에는 한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나의 청춘은 행복했었다.”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펜팔이란 것이 더 멋있고 고상해 보였다. 생각하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으로 삭막한 일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 앞에서도 고상한 감동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야기의 상투성을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황홀한 정서를 담은 편지를 쓰기란 점점 어려운 일인가. 편지쓰기가 가지는 원형의 이미지 가운데는 진정성의 이미지가 스며 있다. 편지는 전화로 불쑥 하는 말과는 다르다. 격을 갖추는 글이어야 한다는 데서 오랜 생각의 축적과 시간의 준비를 요한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심사숙고’의 과정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 누구를 향하여 심사숙고한다는 것이 주는 진정성, 누군가 나를 향하여 자신의 감정과 정신 전체를 모아 심사숙고해 준다는 것, 이것이 편지쓰기의 숨어 있는 메커니즘이다. 누구나 사춘기 시절, 마음에 살아 있는 편지 한 장이 있을 것이다. 심각한 오해의 끝자락에서 친구가 보내오던 편지 한 장, 세상과의 불화를 온통 혼자 걸머진 듯 저항의 표정으로 길을 떠나며 불쑥 던져 놓던 편지 한 장, 토스토에프스키의 무거운 독서에 심취하며 온갖 지적 허영과 오만으로 난해한 의식에 스스로를 분열시키던 편지 한 장, 밤이 하얗게 새도록 갈증 속에서 사랑의 마음을 써 놓고는 마침내 아침에는 부치지 못하는 편지! 우리는 편지쓰기의 공간을 통해서 모순의 현실에 대한 고뇌를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그 고뇌를 통해서 우리의 생을 성숙시킨다. 그런 편지를 떠올리노라면 지금도 감회가 아득하게 어리어 온다. 진정을 다하는 편지의 언어는 늘 미더웠고 관용이 넘쳤다. 눈앞에 현존(現存)하지 않는 상대를 향하여 마음의 눈으로 끝없는 응시를 함으로써 비로소 얻어내는 한 구절의 메시지! 아,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에 대한 믿음’과 통하는 것이었다. 한 세대 전만해도 그렇게 모던(modern)해 보이던 ‘펜팔’이란 말이 이제는 구시대의 문화 유물처럼 되어간다. ‘일선에 계신 국군 아저씨들에게’ 쓰는 그 형식적인 편지쓰기마저도 이제는 사라졌다. 새로운 의사소통의 습관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겠지만, 편지 문화의 한 가운데서 우정과 사랑을 쌓았던 우리들에게는 아쉬운 감회가 아니 일어날 수 없다. 기성의 세대라면 누구에게나 가슴 아린 옛 편지의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때 못 보낸 편지들을 정갈하게 다시 써 봄이 어떠하겠는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보내지 못한 마음의 편지들이 있을 것이다. 상대가 너무 소중해서, 내 마음의 풍경이 오묘해서, 그 밖에도 내 안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해서 보내지 못한 편지들을 이 가을에 어찌 할 것인가. 세월이 곰삭을수록 옛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왜 그런 노래도 있지 않던가. 나의 몽골 여행은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몽골 대평원에서 쓴 편지보다 내가 먼저 귀국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슴지 않고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나의 감회가 황홀하였고, 그것을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소중하였으므로, 시간 형편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몽골에서 그 편지들을 부쳤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가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릴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편지보다 내가 한국에 먼저 돌아갈 텐데. 뭐.’ 이 고정관념이 편지쓰기를 방해한다. 한국에 먼저 돌아오는 것과 편지를 부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같은 공간에 같이 있어도 황홀경의 소통은커녕 대화 한 마디 없는 것이 우리들 삶의 면모이다. 하기야 진정성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잘난 현대인들도 없지 않은 세태이니까. 귀국하여 여러 날이 지났을 때, 나의 수신인들은 편지 받은 즐거움을 내게 반갑게 전해 주었다. 그 전언들로 인하여 나는 몽골에서의 편지쓰기보다 더 황홀한 경험을 누릴 수 있었다. “이 디지털 시대에 무슨 아날로그 원조(元祖)같은 육필 엽서를 받다니.” “무슨 과거로부터 받은 편지 같아서 충격이 참신했다네.” 얼굴 못 본 지가 족히 2년도 넘은, 후덕하고 마음씨 좋은, 나의 옛날 직장 친구, K여사는 이렇게 말한다. “몽골서 보낸 엽서 받으니, 뭐랄까, 하여튼 내 일상이 확 깨어나더라. 마치 늘 무덤덤하게 지내던 이웃집 총각에게 느닷없이 프로포즈라도 받는 듯한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 분위기 한 사흘은 가더라. 고맙다. 난 그런 생각도 못했는데. 우리들 일상이란 것이 참 빤한 것인가 봐.” 가을이 깊어간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옛날 노래 가사가 와 닿는다. 순진하여 통속하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으리라. 그냥 영악하다는 평판에 갇히는 것보다야 낫겠다. 또 통속적이어서 순진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나쁘지만은 않으리라. 이 깊어가는 가을에 조용히 스스로에게 권유해 보기로 하자.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경인교대 교수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충돌할 수밖에 없는 두 세력 문제(文帝)는 북주(北周)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면서 국호를 수(隋)로 삼았다. 이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국호였다. 서기 589년 문제는 마지막 남조 국가인 진(陳)을 멸망시키고 무려 37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했으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진나라의 시황제와 거의 비슷한 길을 걸었다. 문제는 짧은 기간에 통일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지는데 주력하여 관료의 등용문인 과거제를 비롯하여 본격적인 율령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 중국에서 과거제도는 청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약 1300년 간 지속되었다. 604년 양제(煬帝)도 부황(문제)의 국가건설 의욕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규모 건설 사업을 강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전체 길이 1800㎞에 달하는 대운하를 비롯한 여러 가지 토목사업이었다. 610년에 완공된 대운하 덕분에 중국에서는 물류혁명이 일어났다. 즉, 항저우[杭州]에서 베이징[北京]까지 선박수송이 가능해졌으며 강남의 풍부한 쌀을 비롯한 곡물을 화북지방까지 수송할 수 있어 중국을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로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대규모 토목사업은 백성들의 고통을 수반하므로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공사장에 나가서 노역을 해야지, 세금은 세금대로 내야지, 정말 죽을 맛이었다. 모두 양제를 비난하여 결국 수나라를 단명에 그치게 하고 정작 이익은 당나라가 보았다. 대운하를 건설하는 양제에게는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왜냐하면 동북방민족(한민족과 같은 계열)이 중국의 분열시대에 힘을 쌓아 강성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나라도 전신이 같은 계열인 북주가 아닌가! 한 무제 이후 역대 중국 정권은 토벌작전과 동화정책으로 흉노는 사라졌으나 그 대신 돌궐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부황인 문제는 고단수 이간책을 써서 돌궐족을 동 돌궐과 서 돌궐로 분리시켜 세력을 약화시켜 놓았지만 이번에는 소수림왕 이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영토 확장으로 동북아시아 강대국으로 떠오른 고구려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먹지 않으면 먹힌다!' 양제는 위기감을 느꼈다. 고구려가 수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 서진하여 중국을 도모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였다. 더욱이 문제 때에도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혼쭐이 난 바 있었으므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했는지, 결코 만만치 않는 고구려를 상대로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무모하게 끝난 양제의 도전 양제는 나름대로 정복 시나리오를 짰다. 즉, 대군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결판을 내되, 만약 장기전으로 이어지게 되면 대운하를 통해서 원정군의 보급을 확보하여 지속적인 작전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대륙과 해상을 봉쇄하여 고구려를 말려 죽이겠다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대운하를 너무 믿었다. 611년 양제는 무모한 군사도발을 감행하였다. 중국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동원하여 침략전쟁에 나섰으나 고구려도 이미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하면 그 다음 순서는 이민족 정리였기 때문이다. 양제는 고구려가 곧 무너질 줄 알았지만, 처음부터 무리였다. 엄청난 병력의 수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을지문덕을 중심으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 고구려의 전략은 첫째, 대규모의 군대를 맞이해서 정면승부를 건다는 것은 무모하니 성을 중심으로 수비에 들어가서 적과 말을 배고프게 만들고 둘째, 시간이 갈수록 적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적의 염탐꾼에게 아군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히 유의하며 치고 빠지는 유격전술을 적절히 구사한다는 것이었다. 고구려의 작전계획은 들어맞았다. 양제가 몸소 친정을 하여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을 공략했으나 4개월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고 들판에서 이슬을 맞으며 자야 했다. 초조해진 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병력 30만을 내어주면서 평양을 신속하게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우중문 군대 이외에 수나라 병사들은 수륙양면으로 평양을 공격하는데, 손발이 맞지 않아 수군이 단독으로 공격하다가 나중에 영류왕이 되는 건무에게 전멸을 당하다시피 하였다. 수나라 육군은 당황하였다. 평양에 먼저 도착한 수나라 군대가 보급물자를 받을 수 없는 난감한 입장에 빠진 것이다. 적을 눈앞에 두고 수나라 병사들은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을지문덕 장군의 차례다. 아무리 적군의 숫자가 줄었어도 대군은 대군이다. 그는 우중문의 군대를 상대로 전선을 축소하는 작전을 썼다. 넓은 들판에서 싸우면 적군에게 포위되기 십상이지만 협곡 등 좁은 장소에서 싸우면 아무리 대군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앞뒤가 생기기 마련이다. 넓은 장소에 많은 사람을 풀어놓으면 '옆으로 나란히'가 가능하여 포위망을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좁은 곳에서는 '앞으로 나란히'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에 제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차례차례 맞서 싸우면 된다. 을지문덕은 적의 대군을 유인하여 치고 빠지면서 심리적으로 지치게 만들고 길목마다 병사들을 매복시키는 한편, 백성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양식을 감추고 우물까지 메워버렸다. 흥분한 우중문은 숨을 몰아쉬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여 을지문덕을 추격하였으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중문의 퇴각명령과 함께 을지문덕의 공격명령이 동시에 내려졌기 때문이다. 때를 기다리며 전투다운 전투를 못해 스트레스가 쌓은 고구려군은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몰살시켜 버렸다. 왕조는 바뀌어도 고구려만은 양제의 도전정신은 대단했다. 그 뒤로도 두 차례의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백성들의 반응이 냉담했다. '정말 속없는 황상폐하, 못 말리는 황제폐하, 언제나 철이 드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운하 건설에 불만이었던 백성들은 무모한 전쟁준비에 반기를 들고 말았다. '사지(死地)에 들어가 고구려군의 칼에 맞아 죽거나 물귀신이 되기보다는 폭군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죽더라도 죽자'면서 '양현감(楊玄感)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618년 양제로부터 모반의 위험인물로 몰려서 지방으로 쫓겨났던 이연(李淵)이 수나라의 수도인 장안을 점령하여 당나라를 세웠다. 시황제의 진나라보다는 조금 나아도 명이 짧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수나라를 보면 '죽 쑤어서 개준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당 고조 이연은 수나라의 제도를 고스란히 이어 받았다. 문제와 양제가 나라의 기초를 너무 잘 정비해준 덕분에 손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당 시대'가 여러 면에서 '진·한 시대'와 비슷하지만 성격은 크게 다르다. 오늘날의 국가적 의미는 수·당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한 시대에는 봉건적 잔재가 남아있었지만, 수·당 제국은 율령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율령은 오늘날의 모법, 즉 헌법에 해당되며 북조시대에 싹이 터서 수나라를 거치면서 당나라에 이르러 통치의 근간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정관(貞觀)은 당 태종의 연호이다. 그가 통치한 23년을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貞觀의 治)'라 하며 당나라의 번영을 표현하고 있는데, 당 태종은 내치만이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당의 세력판도를 크게 넓히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나쁜 인연을 맺었다. 당이 건국되자 고조(高祖)는 백성들의 여론을 감안하여 고구려에 대해서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냈으며 고구려 역시 당나라와 싸움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 긴장감을 풀기 위해서 포로도 교환하고 이때 당으로부터 도교가 들어오기도 했다. 하지만 야심만만한 태종이 제위에 오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국내정치가 안정되자 고구려에 대해서 압력을 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바람에 고구려가 반발하였고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요동지방에 천리장성을 쌓는 등 철통같은 경계태세로 맞섰다. 이때 고구려의 영류왕은 당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북수남진(北守南進)을 대외정책으로 삼았다. 이는 북으로 당나라와 평화를 유지하고(北守), 남으로는 신라를 친다(南進)는 정책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서기 642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당에 대해서 강경책을 썼던 것인데 당 태종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임금(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을 벌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패배 이후 장기 전략으로 전환 서기 644년 당 태종은 대군을 이끌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는 요동성을 공략하여 고전 끝에 함락에 성공하였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백성들과 병사들이 목숨을 건 총력전을 전개하는 바람에 두 달간의 공격을 포기하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그 후 두 차례나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에 의해서 격퇴당하는 수모 때문에 당 태종은 깊은 마음의 병을 얻어 서기 649년 '고구려'라는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눈도 감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 태종의 죽음을 계기로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전략이 수정되어 속전속결의 단기전을 버리고 장기전의 우회공격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당은 고구려의 남쪽 백제를 먼저 치는 전략을 세우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북수남진(北守南進) 정책에다 백제의 측면공격으로 신라는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당에 접근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나·당 연합군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포괄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 국사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세기에 이르러 한반도의 상황은 복잡한 삼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수 양제나 당 태종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한반도의 허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세기를 기준으로 이미 삼국은 전쟁과 평화, 동맹과 적대 관계를 복잡하게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원의 통일제국으로서 삼분된 한반도를 공략한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을 것이며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정리를 해야 한다는 절실한 시대적 요청도 작용했을 것이다. 7세기에 벌어졌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종전의 산발적인 전투가 아닌 삼국의 총력전에 당나라와 왜국(일본)까지 개입된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고 결국 신라의 불완전한 승리로 삼국시대가 마감되었다. 요동과 만주, 한반도를 잇는 옛 조선(고조선), 그리고 조선의 실지회복을 국시로 삼았던 고구려는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된 한민족의 역사이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전제한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도 민족의 역량을 모아 선조의 영광을 되살리겠다고….
김정호 | 서울 양화초 교사 사건은 상하이시의 한 지역에 설립된 ‘맹모당(孟母堂)’이라는 사설교육시설에서 발단이 되었다. ‘맹모당’은 의무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아야 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국가의 의무교육이 아닌 사설교육을 실시하는 전일제 사설교육시설로,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의 고전인 공자와 맹자의 경서 암송을 위주로 하는 과거의 전통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시작되어 현재 12명의 학생을 상대로 학부모를 포함한 4명이 교사가 운영하는 이 교육시설이 문제가 된 것은 최근 맹모당의 독특한 교육방법이 언론에 보도되고, 상하이시 교육위원회의 감사가 시작되고 난 후부터이다. 언론에 맹모당의 특별한 교육방법이 보도된 후 상하이 교육위원회는 즉각적인 감사를 실시하여 맹모당의 교육방법은 일반적인 부모가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가정교육의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순수한 가정교육(Home Education)도 아니고, 중국의 의무교육법의 규정을 위배하였으며, 학교설립과 관련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채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불법임을 지적하고, 맹모당을 즉각 폐쇄할 것을 명하였다. 하지만 상하이시의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맹모당의 설립자 및 학부모들은 강력히 반발하며, 상하이시 교육위원회를 기소하는 동시에 가정교육(Home Education)의 권리에 대한 토론을 요청하였다. 이들 학부모 및 설립자는 맹모당의 교육방식은 의무교육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부모들이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이 교육시설은 단지 가정의 자주적인 학습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국가가 규정한 학교설립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교육기관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이유로 정부에 학교설립을 허가받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맹모당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와 학생들은 서로 아는 사이로 서로 자기의 교육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자식들을 교육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식 학교 교육은 아니라는 것이다. 中 정부, 맹모당 정식 교육 아니다 이와 같은 쌍방의 논쟁은 의무교육논쟁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상하이시 교육위원회 측이 주장하는 맹모당 측의 의무교육 위반 사실은 의무교육 단계에 있는 학생들의 교재와 관련해서는 국가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의무교육단계의 사립학교들은 반드시 자금, 교실, 교사와 학생의 수에 있어 정부의 규정에 따라야 하는데, 현재 맹모당의 교육내용이나 시설, 교사 등의 질이 이러한 의무교육법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맹모당 측은 이들이 현재 받고 있는 수업의 질이 의무교육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의 요구에 도달하고 있으며, 중국 의무교육법에는 적령아동들은 반드시 교육부문이 인가한 교육기관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고, 가정교육을 불허한다는 규정 역시 없기 때문에 이는 의무교육법 위반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의무교육법 제정의 목적이 적령기 아동들에 대한 교육의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행 학교교육에 만족을 못하는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은 의무교육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상하이시 방송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과반수의 학부모들은 맹모당의 교육방식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세상에서 부모보다 더 자기의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자녀들의 교육적 요구에 대해 이해를 많이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학부모들에게는 마땅히 자녀의 교육을 책임져야 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학부모들은 현행 교육의 문제, 즉 현행 의무교육체계는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아이들을 몰아가고, 교육 본래의 책임을 홀시하고 있기 때문에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더 좋은 교육방법을 갈망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교육전문가들은 학부모들이 주장하는 중국의 현행 의무교육제도의 문제점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입시교육의 문제는 정부의 교육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의무교육법률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실제로 의무교육법 제1조에 의무교육과 관련하여 ‘적령기 아동, 소년의 의무교육 받을 권리의 보장, 의무교육의 실시의 보증, 국민의 소질 제고를 위하여 헌법과 교육법에 근거하여 본 법을 제정한다’고 그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맹모당 사건은 이러한 교육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안학교인가, 사교육인가 결국 교육당국의 공통된 의견은 맹모당 식의 교육방법은 현행 교육기관에 의한 교육을 보충하는 교육으로 실시되어야할 것이지 그 자체가 주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맹모당 측이 그들의 교육사상대로 이 교육을 실시하려면 반드시 국가의 의무교육법과 상하이시의 유관 규정에 따라 교육부문의 학교설립조건, 교사, 학교설비, 수업의 질량 등의 방면에서 비준을 획득한 후 허가증을 받게 되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맹모당 측과 상하이 교육위원회 측의 논쟁은 상하이 교육계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관심거리로 등장하였다. 실제로 맹모당과 같은 국가의 교육기관을 대체하는 사설교육기관들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란조우[蘭州], 시아먼[厦門], 광조우[廣州] 등에는 이와 유사한 전일제 사설교육기관들이 있으며 이들 역시 아직 합법적인 지위 및 신분을 취득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이번 맹모당과 상하이시 교육위원회 간의 분쟁의 해결 결과에 따라 전국적으로 사설교육기관의 설립을 부추길 것인지 아니면, 의무교육법에 따른 보조적인 학원으로 전락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신아연 | 호주 칼럼니스트 ‘우리 가족은 엄마 둘, 그리고 나와 동생 이렇게 네 명입니다.’ ‘우리 집에는 엄마는 없지만 아빠는 두 명입니다.’ 호주의 초등학교와 유치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재나 동화책 가운데는 이처럼 알쏭달쏭한 표현이나 문구가 이따금 등장한다. 이른바 ‘동성애 부모’를 가진 아동들의 가족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란 말 그대로 ‘어머니’와 ‘아버지’ 양친을 일컫지만 호주에서는 반드시 그런 개념만도 아니다. 즉, 부모란 양성을 가진 두 사람일 수도 있고, 어머니 두 분을 나타내거나 혹 아버지 두 분을 뜻하는 단어도 될 수 있다. 동성애 부부 사이에서 양육되는 자녀의 처지에서는 부모의 정의가 일반 가정의 자녀와는 분명히 구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호주의 가족법은 동성애자들의 혼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의 자녀 양육권 또한 법적으로 어떠한 보호도 받을 수 없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동성애 커플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둘 만의 관계에 만족하는 단계를 넘어 자녀를 갖기 원하는 경우도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어쩌면 동성애 커플일수록 입양, 혹은 정자 기증이나 대리임신 등을 통해 둘 사이에 자녀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욕망이 이성애자들보다 더욱 강할지도 모른다. 지난해 호주 서부의 한 여성 동성애 커플은 약 3년간 3만 호주 달러 (한화 약 2400만 원)라는 거금을 들여 지난한 노력 끝에 정자를 기증받아 인공수정에 성공했다. 이 커플은 보통의 이성애 부부나 사실혼 관계, 심지어 미혼모조차 적용되는 의료 보조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재정적으로 큰 곤란을 겪었음에도 자신들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 같은 사회 분위기로 미루어 볼 때 머지않은 미래에 호주 사회는 동성애자들의 가족 관계를 수용하고 가족 구성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예단도 나오고 있다. 차제에 동성 부모와 그 가족들을 싸안기 위한 교육 차원의 움직임도 이를 뒷받침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호주 빅토리아 주의 수십 개에 달하는 초등학교에서는 동성 부모 가정을 배려한다는 취지 하에 학생들에게 ‘엄마, 아빠’란 말 대신 ‘돌봐주시는 분들(parent)’ 이나 ‘보호자 (carer)’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소수나 상대적 약자 그룹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포용과 관용을 실천한다는 명분으로 동성애 관련 명사들을 모은 포스터도 제작됐다. 또 여성이나 남성을 상징적으로 부각시키는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도 되도록이면 배제할 것을 아동들에게 권장하고 있다. 사회적 소수 인정하도록 아동기부터 교육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여 초등학교 저학년 교사들이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때 동성애 부모에 대한 차별의식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둔 일련의 교육방침이 일선교사들에게 전달됐다. 이 가운데는 동성 부모를 둔 어린이들의 현실을 묘사한 가상 시나리오를 실연케 하고, 그랬을 경우 발생할 주위 사람들의 차별에 대해서 학생들 간에 토론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초등학교뿐 아니라 동성애 가정을 모델로 한 그림책을 학습 교재로 사용하는 유치원도 등장했다. 물론 이 같은 가이드라인은 교육부의 공식 승인에 의해 정식으로 교과과정에 뿌리내린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학교 재량에 따라 채택 여부가 결정될 뿐이지만 사회적 소수인 동성애자들을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도록 아동기부터 교육을 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상 호주는 ‘동성애자들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나 비난이 그다지 심하지 않은 나라에 속한다. 더군다나 최근 들어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생들을 대상으로 동성애 가정 또한 이성애의 그것과 다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주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권익이 보다 가시적인 형태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호주는 지난 1993년부터 동성애자들에 관한 관용이 사회적으로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동성애는 비정상적 성적 기호나 이른바 변태가 아닌 유전자적 특성에 기인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이 많이 거두어진 후 이제는 ‘동성혼’을 인정하고 자녀양육을 허용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차원으로 한 걸음을 더 내딛고 있는 상황이다. 양성 학부모 “게이 교사 용납 못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실의 벽은 그리 만만치 않다. 동성애 부모들과 그 가정의 자녀를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교육 분위기와는 모순되게도 얼마 전, 일선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하던 동성애 교사에 대한 해고조치가 내려진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5, 6학년생들을 대상으로 성에 관한 교육을 하던 이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밝혔다는 이유로 한창 예민한 나이의 학생들에게 성 윤리에 관한 그릇된 정보와 의식을 주입했다며 학교 측으로부터 교직을 박탈당한 것. 동성애자들의 권익보호와 기회균등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인권단체들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교사직을 그만두게 한 것은 명백한 인권 탄압이라며 강력히 맞섰지만 자녀에게 유해한 교육환경을 제공할 수 없다는 ‘양성 학부모’들의 반발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학부모들은 어린이들에게 동성 부모와 그들 가정의 존재를 인식시키기 위한 학교교육과정 변화에 절대 동의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드러낸 교사를 교단에 계속 세월 둘 수는 없다며 강한 분노를 드러내고 있다. ‘교실에서 이런 것까지 가르치길 기대하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는 않았다’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끼리 모이면 뼈 있는 우스갯소리로 ‘자식이 이성 친구를 사귀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나중에 커서 이성 신부감이나 신랑감만 데려오면 무조건 고맙겠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동성애자들의 증가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학교 교과과정에까지 이 같은 분위기를 옹호하고 부추기는 수업내용을 끼워 넣는 것에 자식 가진 사람들이 격한 항의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