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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타난 처용 9월이나 10월이면 지역별로 각종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작물을 가을에 수확하듯 각 지역 축제도 이 시기에 특히 많이 개최되는데요, 필자가 살고 있는 울산에도 처용문화제가 개최됩니다. 처용문화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이 나타난 처용암이 울산 앞바다 개운포에 있다는 데 바탕합니다. 처용설화 중 처용가에 나타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 처용문화제의 취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와 달리 축제 이름에서 ‘처용’을 빼야 한다는 논란이 공개적으로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처용가의 내용이 외설적이기 때문에 처용문화제에서 주장하는 관용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과연 처용가가 외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에서 그의 이름을 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다만 축제 이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논란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용, 잊혀졌던 처용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처용,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그의 궤적을 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개운포 처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대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지요. 이 때 그는 울산 앞바다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헌강왕대는 신라 말기로 중앙 귀족들의 퇴폐와 향락이 극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당시의 어려웠던 형편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처용설화에 이어 기록되어 있는 헌강왕의 또다른 행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오직 왕에게만 그 모습이 보였다거나,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들이 곧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계하던 춤이었다고 보죠. 왕이 신하들과 함께 돌아가려는데 갑자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 어찌된 연유인지 신하들에게 물어본즉, 일관(日官)이 이르기를 이것은 동해 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헌강왕이 다녀갔던 그 울산 바닷가, 처용이 나타난 그 바닷가를 개운포(開雲浦)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용을 위해 지은 절은 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고 하여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습니다. 헌강왕이 왜 개운포로 내려갔을까요?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내려간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지방순시를 통해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 절을 창건함으로써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신라 말기에는 이렇게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하여 태화사라는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이 때 문수보살은 왕을 눈앞에 두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문수보살의 뜻으로 알고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긴다는 그런 류의 전설이지요. 망해사에서는 과연 바다가 보일까? 개운포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군이 머물렀던 영성(營城)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이야기대로라면 망해사는 개운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망해사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발돋움을 해봐도 공단에 가려져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절은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망해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제 망해사는 말 그대로 바로 앞이 서해 바다이니까요.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 자락에 위치한 절입니다. 지금 망해사에서 처용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보라면 근래 지어진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정도일 뿐입니다. 벽화에는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내려왔을 때 갑자기 운무가 자욱한 모습, 동해 용이 나타나는 모습, 망해사 절을 짓는 모습,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부도를 만드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둘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는 떨어져 나간 팔각 원당형의 부도탑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보기 드문 쌍둥이 부도로서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혹시 처용과 관련한 답사지로 이곳을 찾았다면 처용암이 있는 개운포 바다가 보이지 않음에 실망하지 마시고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었을 이 부도탑을 통해서 그를 떠올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동해용은 왕이 절을 지어준다는 그 말에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왕을 따라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습니다. 처용암은 처용이 등장한 바위를 말하죠. 앞서 언급한 처용문화제의 시작은 처용암 앞에서 펼쳐지는 처용에 대한 제의(祭儀)에서 시작합니다. 시장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인사들이 제의에 참여하며, 이 때 처용탈을 쓴 채 처용무가 한 판 벌어집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처용암을 한 바퀴 둘러봄으로써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용암에서 등장한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 후 미녀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라는 벼슬도 받게 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제 울산에서 경주로 바뀝니다. 처용은 왜 그 노래를 불렀을까? 처용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일까요?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처용이 없는 틈을 타 그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용을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을 보고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일반적으로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노라고 겁을 주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가 부른 처용가는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아내의 것이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 아내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겼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하는 말이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역신은 질병을 옮기는 신으로 대표되기도 하고, 왕과 대립되는 기득권 세력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또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환락과 타락을 나타낸다고도 보기도 합니다. 처용가의 내용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외설입니다. 처용이 외출한 사이 처용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 관용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에서는 역신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곤란하고 처용의 아내를 덮친 역병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용이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춤과 노래 등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관용정신과 화합정신을 본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말 그대로 유사(遺事)입니다. 짧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자로 적힌 그 글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은유의 의미를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은유와 과장의 표현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 처용설화에서 유래한 처용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실리고 이후 궁중의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춤입니다. 처용이 가지는 ‘벽사진경’, 즉 악귀를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정신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처용설화의 핵심이 외설이었다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그것도 신성한 왕실에서 행하는 행사 때 처용무가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나름대로의 판단이 궁금하네요. 괘릉에서 처용을 그리다 처용에 대해 나와 있는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처용이 누구냐에 대한 다양한 논란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그가 서역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의견은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악학궤범에 나타난 생김새가 우리네 얼굴과는 많이 다른 서역의 인물에 가깝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받는 곳이 바로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입니다. 괘릉에는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다른 신라의 왕릉과는 차별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을 닮아서 어떻게 신라시대 왕릉에 서역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중세 아랍 사람들에게 신라는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섬과 함께 동방의 이상향이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와 척박한 자연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 신라 땅은 산수 좋고 기름진 곳이었고 심지어 개 사슬도 금붙이로 만들어 다닌다는 소문이 날 만큼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아랍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남해의 바닷길로 무역을 거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처용은 바다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다분히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는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벼슬은 있으나 세력이 약한 귀화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속요 ‘쌍화점’은 서역에서 건너온 이슬람 사람들이 이 땅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도 괘릉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의 토용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귀화하여 하사받은 성씨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높다란 콧대에 우락부락한 서역인의 골격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실크로드 답사 중입니다. 서안을 출발해서 우루무치로 가는 여정에서 중국 내 박물관에서 만나는 토용으로, 양고기를 구워 파는 위구르인의 모습에서 괘릉의 무인석을 떠올리고 있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저더러 이쪽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혹시 제게도 처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좋은 가을에 가까운 축제에 참여해 보심이 어떨지요?
앞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더욱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게 되었다. 내년 하반기에 실시되는 2009학년도 초ㆍ중등 교원 임용시험부터 전형절차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고 논술과 면접 비중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한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경쟁 시험규칙이 개정, 공포되기 때문이다. 특히 눈에띠는 것은 영어 등 외국어 시험을 강화한 부분으로, 실용 외국어 교육 강화를 위해 중등 영어교사 응시자들의 경우 필기시험에 영어듣기 평가가 포함되고 중등 외국어교사 응시자들은 논술형 시험 및 면접, 수업능력 평가를 해당 외국어로 치러야 한다. 초등교사 응시자들 역시 면접 및 수업능력 평가의 일정부분을 영어로 봐야 한다. 이번의 교원임용시험규칙개정으로 한층더 신규교사의 질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규정을 개정한데에는 교원임용시험의 응시자가 매년 증가하면서 한동안은 교원수급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얼마전에는 사범대학이나 교직과정이 설치된 대학에서 교원자격증을 받기 위한 요건이 강화되었었다. 교원자격증을 받기가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임용시험강화에 따라 더욱더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은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교사의 질이 교육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환영할 만한 조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고 교사가 된 후의 사후관리도 중요하다. 사후관리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어렵게 관문을 통과했지만 교사가 된 후의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실망스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교사가 되기전에 생각했던 교직사회의 메리트가 기대보다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원자격증 취득부터 교원임용시험까지 어려운 관문을 거쳤지만 그 결과에 대해 초라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학교의 제반교육여건도 개선되어야 한다. 훌륭한 인재를 교사로 선발했다면 이들이 선발당시의 역량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여건으로는 신규임용교사들이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우고 익힌 다양한 교육방법을 적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몇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방치되는 교육여건하에서는 어떠한 역량도 발휘가 어렵게 된다. 시설이나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수년째 답보상태에 있는 교원의 보수를 현실적으로 인상해야 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면 그들에게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보수가 필요하다. 관문통과는 어렵게 했지만 현실적인 메리트가 없다면 향후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문통과후 특별한 우대없이 현재와 같이 일관한다면 훌륭한 인재들이 더이상 교직에 몸담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현재처럼 교원을 희망하는 재원이 풍부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부에서는 교원양성부터 임용까지의 요건을 대폭강화했으니 이제는 교직사회에 충분한 투자를 거쳐 교육환경개선과 시설개선, 그리고 교원의 보수를 현실화하여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여 신바람나게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여건조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훌륭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육부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한해 동안 유학을 목적으로 출국한 초중고생이 3만명에 육박하는 등 조기유학생 숫자가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26일 교육인적자원부가 한국교육개발원을 통해 집계한 2006학년도 초중고 유학생 출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1일부터 올해 2월28일까지 1년 동안 해외로 나간 유학생수는 총 2만9천511명으로 전학년도(2만400명)에 비해 44.6% 증가했다(한교닷컴, 9.26). 이렇게 조기유학에 오르는 이유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국내에서의 공교육불신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모든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기유학길에 오르기도 한다. 또한 유학후의 막연한 혜택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조기유학을 위한 출국은 지속적으로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 활성화 등의 특단의 대책이 나오기 전에는 인위적으로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선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 대부분이 불법유학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현행 규정상 초, 중학생의 조기유학은 원칙적으로 허가되지 않고 있다.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 제5조(자비유학자격)에서 ‘원칙적으로 자비유학의 자격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이 있거나 이와 동등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중학생의 해외 조기유학의 길은 막혀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비유학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학생이 자비로 유학을 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중학교 재학생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규정을 준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관계당국에서 조기유학을 묵인하거나 방치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규정을 철저히 적용한다면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증가폭이 크다는 것은 불법적인 유학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시대가 변해가는 시점에서 조기유학과 관련된 규정을 바꾸거나 기존규정을 철저히 적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현재처럼 묵인하에 방치해서는 안된다. 조기유학관련 규정을 완화하여 초등학교때부터 조기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위화감 조성등의 문제를 안고있다. 따라서 현재의 '중학교졸업이상'을 '초등학교졸업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방안이 어렵다면 규정을 철저히 적용해야 한다. 규정이 있으면 당연히 지켜야 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정은 있지만 그 규정이 사문화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조기유학 문제는 빠른시일내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매듭되더라도 조기유학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달이 바뀌는 날은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지난달을 되돌아보게 되고 새 달을 설계하게 된다. 10월의 행사계획표를 보니 결실의 풍성한 계절답게 눈에 띄는 게 많다. 종합학예대회, 영어체험행사, 추계소풍, 발명교실 참가, 동천축제, 발명교실 참가, 봉사활동, 환경정화활동 등 많은 계획이 잡혀 있다. 이 많은 것들이 풍성한 결실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오늘은 10월 첫날이고 월요일인데도 부담없이 잘 오게 된다. 많은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일까? 그렇게 썩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마음이 상쾌한 것은 10월 첫날이 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생님들도 10월을 맞이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정말 애먹이는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마다 몇 명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말을 잘 듣는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선생님이 말씀을 하면 아예 귀밖에 듣는 학생들도 있고 선생님 앞에서는 듣는 체하는 시늉을 하는 학생도 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님들은 울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고,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불면증을 앓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못해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도 보게 된다. 선생님을 괴롭히고 선생님의 말을 아예 말을 듣지 않는 막무가내의 학생들은 행동이 마음대로다. 말도 마음대로다. 태도가 엉망이다. 너무나 고집이 세다.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다. 너무나 거칠다. 너무나 난폭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다. 이러니 선생님들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속으로야 말을 듣지 않지만 겉으로는 듣는 체하고 행동을 옮기는 체라도 하는 학생들은 좀 낫다.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은 사고를 치지도 않는다. 다투지도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만약 다투고 싸우고 하다가도 잘못을 뉘우치고 빨리 정상적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고 이런 학생들을 너무 오래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체하는 학생들을 두둔하면 계속해서 더욱 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 계시면 공부하는 체 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청소하는 체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얌전한 체하지만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공부도, 청소도, 해야 할 무엇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이런 학생들을 방치하면 나중에 가식적인 사람 만들고 만다. 거짓된 사람 만들고 만다. 이런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생님과 진정으로 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진정 통하지 못하고 대화가 되지 않으니 그 학생과 선생님과의 관계는 발전이 없다. 믿음이 없다. 희망이 없다. 그러니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 학생, 선생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는 학생, 무엇이든 하는 체, 무엇이든 듣는 체하는 학생들과의 필수적인 것은 대화다. 다시 말하면 통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가 올 수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고치게 되고 바르게 행하게 된다. 선생님과 학생과의 막힘이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막힘을 뚫어야 한다. 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먼저 꼬리를 내려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문을 열 수 있다. 그래야 막힌 담을 헐 수 있다. 10월의 달, 결실의 달에 힘들어하는 학생들로 인해 좋은 수확을 거두었으면 한다. 그 비결은 통함이다. 그 비결은 대화이다. 그 비결은 겸손함이다. 그 비결은 꼬리를 먼저 내림이다. 교육은 통함이다.
“따르르릉~~” “안녕하세요? ○○○입니다. 아시겠어요?” 갑자기 나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떨려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대학 때 몇 번 만나다가 멀어진 지 삼십 년이 지나 그의 이름 석 자도 지워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나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예비고사란 것을 치르고 발표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그 남자애가 나에게 슬그머니 쪽지를 내밀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 입구에 잠깐 나오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 만나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만 하여도 남녀가 분리된 도서관이어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내내 가슴을 설레며 그를 생각하면서 시계만 들여다보곤 하였다. 입시가 끝나고 우린 사진을 교환하면서 평생 간직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누나와 형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인사도 시켰다. 나도 언니에게 사진을 보여 주면서 착하고 모범생인 그의 자랑도 조금씩 늘어놓곤 했다. 언니는 피식 웃으며 ‘잘 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어떤 방법으로 만나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냥 즐거웠고 많이 웃었다는 것, 분식집과 음악 감상실도 갔었고 단발머리에서 생전 처음 커트를 치고 어색해 했던 기억들... 갓 스무 살의 우린 그렇게 하면서 각자 대학에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대부분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되던 때에 새내기 1학년들이 소식을 통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그의 전화가 와서는 “듣기만 해, 내일 네 시에 시민회관 앞으로 나와라”는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그는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날을 정해 두고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계모임도 아니고 정한 날에 만나자니...’ 하는 듯한 나의 말에 머쓱했던지 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사실 입학하기 전에는 시간도 많았고 할 일도 없어서인지 무척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만나면 될 것이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솔직히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만난다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었다. 그 때 그의 말대로 했었더라면... 그렇게 몇 번을 만나다가 미팅이다, 서클활동이다 하는 대학 생활에 젖어들면서 우리의 만남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뚜렷한 감정 표현도 없이 미지근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나는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었다. 만나면 어쩔 것인가? 만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잘 살고 있구나’ 하면서 자기의 얘기도 해 주었다. 나는 한 살 위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는 부인이 두 살 아래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른에,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고 맏이가 우리 아이보다 두 살 적었다. 평소 직장일로 무척 바빴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잦은 야근 탓으로 가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때는 도대체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단다. 내가 생각해도 그는 성실하고 순수한 사람인데 아무리 부부라도 마음까지 다스릴 수 없으니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듯 싶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남남이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각자가 채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날 잊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왜 연락이 안 올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우리 사귀자’ 로 시작해서 쿨하게 헤어지는 남녀를 보면 그 때의 우리는 참으로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전화를 안 했냐고 뒤늦게나마 따져 보니 오히려 나더러 연락 없었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싱거운 옛날 이야기였다. 한참 동안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것은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다함을 슬퍼하며 물처럼 담담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철없던 시절, 모든 것이 서툴었던 우린 좋으면서 손 한 번 못 잡고 억울하게 헤어졌었다. 만약 나의 청춘에 휴대전화가 있었더라면 이러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나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첫사랑은 보란 듯이 이루어져 자랑스런 휴대전화의 수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속한 휴대전화여~ 나의 운명이여!
수업 연구 후 평가반성회 시간. 수업자는 긴장도 되지만 사실 이런 기회를 갖지 않으면 전문성은 신장되지 않는다.자기 수업을 참관자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수업 준비,공개 수업도 중요하지만평가회를 통해 교직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수업 평가반성회는 연구부장 주관하에수업자 자평, 질의 응답, 참관자 소감, 교감의 수업지도, 교장 총평 순으로 진행된다. 과거엔 교감과 교장의 질책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잘한 점은 칭찬하고 개선할 점을 제언한다. 물론 수업자의 이해와 동의가 전제다. "수업 당일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이 없었는데 썬그라스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생들에게 긴장을 주려고요." "……." "썬그라스를 쓰면 학생들이 교사의 눈을 볼 수 없어 함부로 장난을 치지않습니다." 학생들을 수업에 집중시키고 밀도있는 수업을 위해 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수업자가썬그라스를 착용했다는 이유인데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인간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교육은 눈과 눈이 마주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사의 눈빛을 보고 학생이 그 의미를 읽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눈높이라는 말도 있다. 교사와 학생이 가까와지려면 맨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교사의 언어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교육인 것이다. 어찌보면 잠재적 교육과정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가장 잘 된 교육은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신규교사에게 학생들은 감시와 감독의 대상이며 심지어 통제의 대상이라고인식시켜 준 사람은 누구일까? 대학에서? 임용고사 교육학에서? 아니면 험한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현 세태가 학생들은 순수함을 잃었다고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교사는 법규위반 운전사를 단속하는 싸이카 경찰관이 아니다. 교육의 안내자요 인도자인 것이다.학생들이 배움의 기쁨을 느끼도록 학습에 빠져들게 하는 학습촉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교사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을 하고 선생님이 좋아서 그 교과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햇빛이 강하더라도 학생들 앞에서는 자주 썬그라스를 벗겠습니다." 체육교사의수용적인 태도다. 반쯤은 양보한 것이다. 신규 체육교사의 수업을 꾸짖는 것이 아니다. 남녀 혼성반의 체육수업 '축구' 단원을 넷볼 규칙을 이용하여 여학생을 적극적으로 수업에 끌어들였다. 남녀가 협동하여 서로 도와주고 협동하며 가르쳐주며 학습목표에 도달하였다. 성공된 수업이었다. 20대 신규교사의 학생관, 수업관을 보고 교육과 수업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소중한 평가회 시간이었다.수업연구가 필요하고 평가 반성회를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 비오리가 희푸른 파도를 밟으며 날아오르는 곳.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로 지내다가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 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300년 전 조선 영조 때, 한양에서 이조참의(현 내무부 국장급, 문관의 선임과 공훈봉작을 맡았음)란 벼슬을 지내다가 졸지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된 권적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임금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고 말았다고 한다.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생활을 하다가 동해 남단의 보잘 것 없는 마을에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울분과 서러움에 휩싸였겠는가. 권적은 기장 현감으로 좌천된 후, 답답한 소회를 달래기 위해 원앙대라는 빼어난 절경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원앙대는 기장군 동암리 남쪽해변에 있는 암석지대를 말하는데, 당시 그는 기장읍 교리 출신의 신오라는 사람과 사귀면서 늘 이곳에 놀러 왔다고 한다. 요새말로 하면 서울의 중앙관서에서 잘 나가는 고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촌구석으로 발령받자 공무는 제쳐놓고 친구와 더불어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때웠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 또한 무척 낭만적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비오리가 많았다고 하는데, 높직한 암대 위에 서서 멀리 바다를 쳐다보면 비오리들이 대 아래 출렁이는 희푸른 파도를 탈듯 말듯 하다가 일시에 큰 무리를 지어 까마귀 떼처럼 날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비오포(飛烏浦)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 ‘비오리’라는 오리과의 물새는 자줏빛이 찬란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암수가 함께 노는 새라고 한다. 결국 비오리는 바다의 원앙새라고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적이 이곳의 큰 바위에다 ‘시랑대’란 글씨와 위의 시조를 각자한 후로, 이곳은 원앙대가 아닌 시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랑’이란 판서에 버금가는 벼슬로서 권적은 그의 예전 벼슬인 이조참의를 판서 직에 버금가는 계급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자신의 노골적인 출세 욕구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어쨌든 권적의 엘리트주의적인 개명이 눈에 거슬리긴 하나, 시랑대는 동해남단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경치를 가진 곳임에 틀림없었다. 파도가 흰 거품을 내며 밀려와서 암대의 칼 같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오색무지개 색깔을 띤 비오리가 춤추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이었겠는가. 또한 노송 우거진 절벽과 고요한 바다를 비추는 달빛을 보면 이곳이 과연 인간세상인가 절로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면, 멀리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해동국의 시랑대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다고 했을까. 권적의 시조 각자 후로, 시랑대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랑대를 운자로 한 시조가 수도 없이 새겨졌다고 하였다. 기장현감 윤학동의 시와 김후 육천민의 시도 각자되어 있었고, 차성가라는 시조도 있었으며, 고종 연간에는 홍문관 교리 손경현이 남긴 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월천선생(1714∼1786)은 라는 글에서 시랑대의 절경을 구구절절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시랑대에는 어느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동해 용왕의 딸과 스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설과 빼어난 풍광을 지닌 시랑대는 지난 1960년대만 해도 수많은 한시 가 새겨진 절경의 바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세월의 풍파에 못 이겨 이 절경의 바위들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또한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이 바위들이 발파를 당해, 지금은 그 예전의 풍광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라고 하니 그 서글픈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
사범학교, 교원임시 양성소 수료자 임용 국공립 사범대 졸업자 우선 채용 -대학 소재 지역 교원으로 우선 발령 -부족 교원은 교직 과정 출신 등을 대상으로 순위고사를 통해 임용(1973년) ‘국립사대 우선 임용’ 위헌 결정(1990년)으로 공개경쟁 전형으로 전환 -위헌 결정에 앞선 1989년, 교육부는 미발령자 적체 개선 대책으로 국립사대 졸업생 우선 임용 제도를 공개 전형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음. -91~93년간 한시적으로 국립대 졸업생 70%, 사립 졸업생 30% 할당 선발 -1994년부터 완전 공개 전형 체제로 전환 사범계 대학 지역 가산점 위헌 결정 -위헌 결정(3월)에 따른 후속 조치로 2004년 9월 교육공무원법 개정해 2005학년도 입학생까지만 2010년 공고 임용 시험까지 한시적으로 가산점 적용키로 결정.
내년 후반기에 치르는 2009학년도 교사 임용 시험부터 전형 절차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고 논술과 면접, 영어 비중이 강화된다. 교육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 경쟁시험 규칙을 개정해 10월 1일 공포한다고 30일 밝혔다. 그동안 임용 시험이 단편적인 암기 위주의 1차 필기시험 비중이 지나치게 커 교사로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르면 현행 1차 필기시험(단답형 및 4지선다형), 2차 논술 및 면접ㆍ실기시험으로 돼 있는 시험방식이 2009학년도부터 1차 선택형 필기시험(5지선다형), 2차 논술형 필기시험, 3차 교직적성 심층면접과 수업능력 및 실기ㆍ실험평가로 바뀐다. 현행 1차 시험에서는 전공·교육학 100점, 대학 재학 성적 20점, 가산점 10점이지만 개정 규칙에서는 선택형 필기시험 100점, 대학 성적 20~40점, 가산점 5~10점으로 하고, 영역별 배점 비율은 각 시도교육청이 정한다. 외국어 구사력과 수업능력을 지닌 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중등 영어교사는 1차 시험에 영어듣기 평가를, 중등 외국어 교사는 2차 논술형 시험, 3차 면접 및 수업 능력 평가를 해당 외국어로 실시한다. 초등교사도 3차 면접 및 수업능력 평가에서 일정 부분을 영어로 실시한다. 1차 시험에서는 임용예정 인원의 2배수 이상을, 2차 시험에서는 1.5배수 이상을 뽑고 1차 및 2차, 3차 시험 성적을 각각 100점 만점으로 환산해 합산한 성적순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도록 했다.
-14개 취미·건강·문해교실 3년간 운영- 전라북도교육청 지정 평생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한 김제 원평초등학교(교장 유주영)는 9월28일(금) 활동 공개 및 보고회를 가졌다. 원평초는 지역주민 대상 평생교육프로그램 14개 취미·건강·문해교실을 3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시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매년 250여 명의 수강생들이 주2회씩 학교를 찾아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간의 성과 및 운영사례를 100여 명의 도내 각급학교 교사 및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공개 보고한 것이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수영반, 우리글교육반, 생활영어반, 어머니배구반, 사물놀이반 등 8개 반에서는 실증수업을 전개하였고, 생활도예반, 한지공예반, 사물놀이반, 사군자반, 서예반 등은 그동안 갈고 닦은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유주영 교장은 재정 부족으로 전문 외부 강사에 의한 수준 높은 교육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본교 교사들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전문학원 연수와 적극적인 열성으로 시골 학교에서의 평생교육의 붐을 조성할 수 있었으며, 특히 할머니들의 건강수영(92명)이나 우리글교육반(35명) 활동에 대해서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규호 전라북도교육감은 김범재 초등교육과장이 대신 읽은 격려사를 통해 원평초등학교의 평생교육 운영사례는 다른 학교에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며 평생교육, 방과후학교 등 지역과 함께하는 교육공동체의 견고한 구축으로 공교육 활성화를 당부하기도 했다. 박공우 김제교육장은 인사말에서 시골학교에서도 교육시설 및 교육인적 자원을 학생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활용하여 학교가 농어촌 지역 교육문화센터의 중추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참관 교사들은 시골학교의 특성상 수강생들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텐데 250여 명의 수강생들이 등교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라고 칭찬을 하였다.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한국인 남자와 외국인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흔히 코시안이라고 하여 한국인과 아세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지칭한다. 지난 1980년대부터 농촌 총각의 결혼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외국 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을 강조한바 있다. 실제로 최근 수년 사이에 이러한 형태의 국제결혼이 증가하고 이러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적지 않다. ’05년 우리나라의 국제결혼 건수는 4만3,122건으로 전체 결혼신고 건수의 13.6%가 국제결혼이다(통계청).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여 ‘90년 1.2% → ’00년 3.7% → ‘04년 11.4%→ ‘05년 13.6%이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외국여성과 한국남성 결혼 비율이 급증하는데 농어촌 지역은 전체 결혼의 35.9%가 외국인 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농촌 총각 3명 중 1명은 국제결혼이다(06.3. 통계청). 국적별로는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이 47.5%, 중국 17.3%, 일본 10.6%, 필리핀 8.2%, 베트남 7.0% 순으로 나타났다. 현재 초・중・고 재학 중인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총 7,998명이다. 이 중 초등학생이 85%로 대부분을 차지(중 11.6%, 고 3.5%)하고 있다. 즉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초등학교가 6,795명, 중학교가 924명, 고등학교가 279명이다.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여성 결혼이민자 자녀 중 3세 이하 비중이 27%, 4~5세가 16.4%로 나타나 향후 학교에 입학하는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복지부 2005년 여성결혼이민자 가정 945쌍 표본조사). 국제결혼가정 자녀 중 어머니가 외국인인 경우가 전체의 83.7%(6,695명)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초등학생 5,854명, 중학생 682명, 고등학생 159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1,852명(23.1%)으로 가장 많고, 서울 12.2%, 전남 11.8%, 전북 9.1%, 경북 6.0%의 순으로 나타났다. 최근 언론에서도 이들 외국인 어머니에게서 자라온 아이들의 문제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들의 언어능력 부족, 정체성 혼란 및 이들에 대한 집단 따돌림현상이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한글을 터득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가서 학력이 떨어지고 있다. 특히 농촌에 사는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로 구성된 가정의 경우 한국인 아버지가 자녀의 교육에 무관심한 사례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농촌 총각이 결혼하여 다문화 가정을 이룬 다음 아빠는 교육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학생의 받아쓰기와 같은 것은 한국인 아빠가 지도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받아쓰기 지도마저도 아빠가 돌보지 않고 있다. 이들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의 문제는 언어 능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학습부진의 정도가 심각하며, 일상대화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독해와 어휘력, 쓰기, 작문 능력이 부족하며, 정체성의 혼란과 건강하지 못한 정서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는 10명 중 2명 정도가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집단따돌림을 당한 이유는 엄마가 외국인이기 때문에가 34.1%,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서 20.7%, 특별한 이유 없이 15.9%, 태도와 행동이 달라서 13.4%, 외모가 달라서 4.9%, 기타 22.0%로 나타나고 있었다. 현재 자녀와 동거하고 있는 응답자들 중 그들 자녀가 또래 아이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경험했다는 비율은 17.6%이다. 도시보다는 농촌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자의 자녀가 집단 따돌림을 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 미취학자녀를 두고 있는 결혼이민자 중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낸다는 사람은 14.5%로 우리나라 미취학 자녀의 보육시설 이용률 56.8%보다 현저히 낮았다. 결혼이민자가 자녀를 양육하면서 겪는 어려움으로 높은 양육비용과 사교육비를 들고 있다. 자녀의 숙제를 거의 못 봐준다는 비율도 55%나 되고 있다. 국제결혼가정에 대한 민・관 지원은 이제 태동 수준으로, 체계적인 지원은 미흡한 실정이며 특히 그동안 그 자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크지 않았다. 다행히 각 지자체 및 교육청에 전담 부서 신설하고, 다문화 가정 학습자를 위한 교재를 개발, 다문화 가정 이해를 위한 교사 연수 및 자료 개발을 추진중이다. 우리 교사들도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를 증대하고 이들 학생지도방안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특히 농촌지역의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이들 코시안 학생에 대하여 특별한 지도를 하여야 하겠다. 자녀교육을 위하여 한국인 아버지들이 더욱 관심을 갖고 자녀의 언어교육을 하도록 윧ㅎ하여야 하겠다. 아울러 초등학생들이 코시안 학생을 따돌림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
교육부의 일제 청산방침에 따라 기존의 교실에 걸려있던액자형 태극기가 족자형 태극기(사진 위)로바뀌었다. 민족정기 회복과 학생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전국의 초·중·고 교실에 게시되었던 태극기가 이번에 전격 교체되었다. 종전의 액자형 태극기는 일제의 잔재로서,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한민족 말살과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나라 교실에 강제로 일장기를 게시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시행되어왔다. 따라서 우리 서령고에서는 이번 교육부의 일제 잔재 청산 방침에 따라 액자형 태극기를 정부 권장용인 족자형 태극기로 교체하게 된 것이다. 족자형 태극기는 원목으로 만든 판에 태극기를 부착한 것으로 액자형 태극기보다 훨씬 고풍스런 맛이 있으며, 크기 또한 황금비율인 3대2로 맞추어 예전의 액자형보다 아름답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실시된 정부의 액자형태극기 교체 정책은 일제식민지배의 잔재를 하나씩 없애고 우리 민족의 정기와 얼을 새롭게 회복해가려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9월 28일 8교시, 1, 2학년 학생들 모두가 교실 앞 화단에 모여 학교의 미관을 해치는 잡초들을 제거했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은 리포터의 무릎에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있었다. 또한 뿌리도 깊이 박혀서 뽑기에도 많은 힘이 들었다. 학생들은 옆 친구와 장난도 치고, 때로는 사마귀를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한 시간 여 동안 열심히 잡초를 제거했다. 그동안 교정을 지나면서 잡초가 이렇게 무성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학생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맡은 일을 수행했다. 가벼운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벌어진 이날의 작업으로 학생들은 친목도 도모하고 깨끗한 화단도 만드는 등 일석이조의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작업이 끝난 후, 각자가 뽑은 잡초들을 퇴비로 만들기 위해 모두 한 군데로 쌓아올렸더니 그 무더기가 사람 키만큼이나 되었다. 학생들의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교정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학생들
교정 등나무 격자시렁 위에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올해, 하루걸러 내리던 비에도 용케 상하지 않고 무럭무럭 영글어가는 조롱박이 대견하기만 합니다. 조롱박은 손톱으로 꾹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딱딱해졌을 때 수확해야 합니다. 수확한 조롱박은 겉껍질을 잘 드는 칼로살짝 긁어낸 다음, 통째로그늘에 한 달 정도 말리면 노란색의 앙증맞은 조롱박이 됩니다. 아니면 둘로 쪼개어 막걸리를 마시는표주박으로 쓰거나 벽에 걸어 놓으면 훌륭한 장식품이 되기도 하구요. 시원한 그늘과 풍성한 가을의 느낌을 물씬 전해주는 조롱박은 아이들의 학습 자료로도 손색이 없답니다. 한교닷컴 독자여러분, 올 가을 우리 학교로 조롱박 구경오셔요.
예전에 누군가가 시는 어떻게 읽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시의 언저리에 한두 번 맴돌았던 필자에게 시를 어떻게 읽느냐 하는 질문은 시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다름없이 막연한 물음이었다. 그때 그 친구에게 뭐라 대답했는지 기억은 없지만 요즘은 있는 그대로 읽으라고 말한다. 자신이 시인이 되어보기도 하고, 시적화자가 되어 보기도 하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읽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시 읽기가 어찌 쉬운 일인가. 자연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 읽기는 그런대로 편안하지만 어떤 대상에 대한 역발상의 표현과 인간의 내면을 다양한 표현을 통해 노래하고 있는 시를 읽기는 그리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필자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허나 이러한 시도 천천히 한두 번 읽으며 음미하다 보면 새로운 맛이 새록새록 나옴을 알 수 있다. 이따금 시인에게 시적 사유란 어디까지일까 생각해 본적이 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 그에 따른 표현의 발상은 역설과 반어 때론 해학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내면엔 사물에 대한 애정과 폭넓은 관심이 깔려 있다. 그것이 때론 사랑의 모습으로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장인수의 시도 그 하나이다. 물 속에 처박힌 세발 자전거를 수초가 핥고 있다 잠자리 유충의 놀이터가 되고 물고기의 식당이 되고 있다 핸들과 바퀴의 제어를 벗어나서 강물이 마련해 준 개흙 신방新房에서 새살림을 꾸린다 개흙에 반쯤 파묻힌 세발 자전거 붕어 새끼들의 유치원이 된다 - '자전거' 전문 - 물 속에 처박힌 자전거는 어느 새 시인에게 유충의 놀이터로, 물고기의 식당으로 변한다. 그리고 개흙과 신방을 차리면서 다른 생명체들의 도우미가 된다. 쓸모없이 버려진 세발 자전거는 다른 생명체들과 어울리면서 또 다른 존재성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의 기저에는 버려진 것에 대한 사랑이 깔려있다. 그의 다른 시를 한 번 보자. 이불 속에서 내 발가락이 잠결에 아내의 발가락을 살짝 만난다 문득, 발가락 끝에서 귤 같은 느낌이 밀려온다 손을 더듬어 아내의 가슴을 만진다 귤의 꼭지를 만진다 아내는 나의 손길을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다 아내의 과일을 만진다 말랑말랑 슬픔의 감촉 생명의 감촉 푸릇한 별빛과 햇살을 과즙으로 담아 낸 아내의 과일 내 손에 귤물이 스며든다 -'귤' 전문 - 잠결에 만져진 발가락을 통해 시인은 '귤'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귤은 아내의 가슴이 되고, 슬픔과 생명의 감촉이 되어 나에게 귤물이 되어 돌아온다. 아내는 시인에게 슬픔이면서 생명이다. 왜 그럴까? 누구나 촉촉하고 부드러운 아내의 과일을 만지다 보면 아내의 고달픈 삶이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식들을 잉태하고 기르는 아내의 깊은 생명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아내에 대한 사랑을 감각적인 표현을 빌려 표현한다. 발가락에서 귤을 연상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이 가슴으로 이동하고 내 손으로 옮겨온다는 시적 사유는 장인수 시가 갖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평론가 권혁웅의 말을 빌리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이 마주하는 자리에서 반짝이는 그의 시안이라 할 수 있다. 시를 읽다보면 얼핏 시인의 시가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한 켠 더 들어가면 해학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웃음도 주고 그 웃음 속에 숨어있는 슬픔도 준다. 이는 시인의 말처럼 '자신의 몸에 스며들어 정액이 되고, 피가 되고, 웃음이 되고, 갈증이 되는….' 그 무엇이다. 가을이다. 가을에 맞는 게 있다면 한 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노랗게 익어가는 감나무의 감과 조금씩 자신의 몸을 바꾸어 가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차 한 잔 옆에 두고 한 권의 아니 한 편의 시를 읽는 여유를 가졌으면 어떨까 싶다.
내년 하반기 실시되는 2009학년도 초ㆍ중등 교원 임용시험부터 전형절차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고 논술과 면접 비중이 높아진다. 교육인적자원부는 30일 이같은 내용으로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경쟁 시험규칙을 개정, 다음달 1일 공포한다고 밝혔다. 개정규칙에 따르면 현재 1차 필기시험(단답형 및 4지선다형), 2차 논술 및 면접ㆍ실기시험으로 돼 있는 시험방식이 2009학년도부터 1차 선택형 필기시험(5지선다형), 2차 논술형 필기시험, 3차 교직적성 심층면접과 수업능력 및 실기ㆍ실험평가로 바뀐다. 교직적성 심층면접은 지금까지의 교원 임용시험이 교원으로서의 자질, 인격 등을 평가하기에 미흡했다는 지적에 따라 도입된 것으로 적성, 교직관, 인격, 소양 등을 집중 평가해 교직 부적격자를 가려내게 된다. 또 실용 외국어 교육 강화를 위해 중등 영어교사 응시자들의 경우 필기시험에 영어듣기 평가가 포함되고 중등 외국어교사 응시자들은 논술형 시험 및 면접, 수업능력 평가를 해당 외국어로 치러야 한다. 초등교사 응시자들 역시 면접 및 수업능력 평가의 일정부분을 영어로 봐야 한다. 1차 시험에서는 임용예정 인원의 2배수 이상을, 2차 시험에서는 1.5배수 이상을 뽑고 최종 합격자는 1차 및 2차, 3차 시험 성적을 각각 100점 만점으로 환산해 합산한 성적순으로 선발하도록 했다. 개정된 규칙은 내년 9월 1일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개정규칙이 적용되는 첫 교원 임용시험은 내년 10월 말~11월 초 공고 후 내년 12월께 실시되며 올해 11월(초등) 및 12월(중등)로 예정된 2008학년도 임용시험은 기존 방식대로 치러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