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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올해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60주년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교육이 오늘날의 위치에 있기까지 그 역사적 시간을 함께 해온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우리의 교육은 역동적 소용돌이 속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해 왔다. 그러한 성장이 가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의 중심에는 교총이 있었다.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제 교총은 창립 60주년 및 33대 회장의 취임으로 또 한 번 새로운 도약을 시도할 시점에 있다. 현재 우리가 봉착한 여러 가지 교육 문제들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교육적으로 풀어나가며 교사, 학부모, 학생을 아우르는 국민적 단체로서 그 사회적 책무를 충실히 이행해 나가는 교총을 기대한다. 한국교총은 교원의 사회적·경제적 지위향상과 교직의 전문성 확립을 기함으로써 교육의 진흥에 기여하기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전문직 단체로서 우리 교육을 위하여 다각적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다. 교사들에게는 교권을 확립케 하고, 교육적으로는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공공선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우리 교육은 정치적 이념, 경제적 논리에 의하여 교육적 본질이 훼손되어가고 있고, 교사의 권위는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교총은 공교육을 정상화 시키고 교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교육적 시안의 정책결정, 교사의 교권회복, 교사 연수 등 총체적 교육 활동을 통하여 우리 교육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총은 이제 60주년을 맞이하여 한걸음 더 성숙한 교원단체로서 나아가야 할 때이다. 이에 교사 출신 이원희 회장의 취임은 그 의미가 크다. 교육 문제들은 학교 교실에서 시작되어 파생되어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문제의 해결도 학교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않은 졸속한 정책의 무리한 추진은 현재 우리 교육을 더욱 황폐화하는 데 기여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현장 교사의 대변자로서의 이원희 회장을 중심으로 교총은 보다 교육적이고, 실현 가능한 교육적 해법을 제시, 추진함으로써 교육전문직 단체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우리 교육 발전에도 앞장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교총의 힘은 바로 교사들의 단결과 화합에서 나온다. 교사 한 명 한 명이 현장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확실히 확보하고, 학부모, 교사, 학생 교육 주체들의 신뢰를 다져 공교육의 중심인 교실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써야 한다. 또한 교사도 이제 교육정책에 대한 전문가로서 교실 중심적인 교육적 혜안을 찾기에 함께 관심을 가지고 협력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우리 모두가 지향하는 우리 교육을 바로 세우는 첫걸음일 것이다. 교총은 지난 60년간 교사의 권익 옹호 및 교원이 반대하는 정책, 공교육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정책을 막는 바람막이 역할을 행하며 우리 교육의 유지, 발전시켜왔다. 소극적으로는 교권 신장에 기여하고, 궁극적으로는 온 국민의 교육권 보장 및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에 기여해 온 것이다. 앞으로도 교총은 교사, 학생, 학부모 즉 교육의 세 주체를 포괄하는 국민 교육권 확보를 위하여 공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 교원지위 확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길 바란다.
9월에 고창 선운사에 가면 진홍색의 꽃무릇이 한창임을 볼 수 있다. 백합목 수선화과 식물인 ‘꽃무릇’은 남부 지방의 절에서 심는 여러해살이풀로 ‘석산’이라고도 하고 ‘상사화’란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상사화란 이름말이 붙은 연유는 잎과 꽃이 나오는 시기가 달라 서로 그리워한다는 데서 나온 이름이다. 그런데 이 꽃무릇이 선운사에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필자가 근무하는 교무실 앞 화단에도 성글게나마 피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누가 심지 않았는데도 몇 년 전부터 하나 둘 피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점심을 먹고 난 나른한 오후, 가끔 동료들이나 아이들과 함께 가을 햇살을 받으며 꽃을 보며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꽃말을 가지고 사랑과 마주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길 주고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교육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나라에서 교육은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공교육과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교사들에 대한 비판의 정도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하다. 불신의 정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그 비판 속엔 애정이 담겨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교육에 대한 현실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비판이 아닌 비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헌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난의 원인 제공이 교육정책 입안자들의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사실 교육정책 입안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육가가 아니라 행정가들이다. 그들은 뭔가 끊임없이 만들어내길 좋아한다. 가끔 개혁이라는 이름도 들먹인다.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 낸 정책들을 무조건적으로 현장에 적용하려고 한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하에 추진되는 정책 속엔 교사와 학생 간의 인간관계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교육 행정가들의 일련의 정책들이 일면 나태함에 빠져있는 일선 현장의 교사들을 긴장하게 하는 효과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장의 목소리는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밀어 붙이려는 사고다. 아무리 그 정책과 이상이 좋을지라도 현장의 소리를 도외시하면 그 효과는 크지 않을 터인데도 말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교육은 꽃무릇처럼 잎과 꽃이 서로 떨어져서 언제까지 그리워만 하는 게 아니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는 기찻길 같은 것이라고. 기찻길은 서로 마주보며 그리워하면서도 언제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간다. 한쪽이 휘어가면 다른 한 쪽도 휘어 보조로 맞춘다. 상대가 지치면 팔을 뻗어 위안을 주기도 한다. 허면 기찻길의 철로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교육정책 입안자와 교사가 될 수도 있고, 학교현장에서 늘 얼굴을 부딪치는 교사와 학생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교총이나 전교조 같은 교원단체도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두는 함께 가야 할 대상이지 서로 비난하고 시기할 대상이 아니다. 또 상대를 굴복시키고 굴복당하는 대상도 아님은 자명하다. 올해는 한국교총이 60주년을 맞이한 해다. 60년이면 강산이 여섯 번은 변했다는 소리이다. 그 60년의 세월 동안 우리 교육현장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교육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교총이 이순(耳順)의 나이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교총이 단순히 교사의 권익을 위하기보단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연구하고 제시하며, 일반 서민이나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교육정책을 세워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는 한 교감 선생님의 말로 그 답을 대신하면 어떨까 한다.
얼핏 보면 쉬울 것 같으면서도, 막상 하려고 들면 어려운 일이, 세상에는 의외로 많다. 시험 공부하는 학생들이 크게 공감하는 것 중에는, ‘시험보기 일주일 전부터 열심히 공부하기’가 있다. 리모컨에 이미 충분히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리모컨 없이 텔레비전 채널 바꾸기’도 꽤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주식투자를 좀 해 본 사람들은 ‘주식으로 돈 벌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한다. 지적 재산권에 대한 의식이 희박한 풍토에서는 ‘컴퓨터 CD, 정품으로 구입하기’가 엄청 어려운 일에 속한다. 또 있다. 호사가(好事家)들에 따르면, ‘다리가 아름다운 여성의 각선미를 30초 동안 쳐다보기’란 여간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쉬울 것 같은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쉬울 것 같은 데 쉽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들이 상식의 습속(習俗)에서 벗어나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시험공부라는 것이 계획과 실천이 따로 논다. 당일 벼락치기가 되기 십상이다. 학생들에게는 이미 상식화 된 습관이 되었다. 또 리모컨 자체가 디지털 환경에서는 상식적 기구가 되어 버렸다. ‘주식으로 돈 벌기’는 남의 이야기일 때는 쉽지만 내 이야기일 때는 어렵다. 이 사실이 곧 상식인 것이다. ‘컴퓨터 CD를 정품으로 사기’는 교과서적 원리인지는 모르지만, 현실 삶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각선미(脚線美)에 정신을 잃는다고 해도, 아직은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의 윤리가 우리의 상식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백하기’는 쉬운 일일까, 어려운 일일까. 쉬운 듯 어려운 일일까, 어려운 듯 쉬운 일일까. 흔히 방송에서 보면, 사람들은 ‘고백하기’를 다반사로 한다. 특히 ‘이성에게 고백하기’ 같은 것은 아주 쉬운 과업으로도 비치는 것 같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로도 인식되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고백하기’를 만만히 보는 쪽으로 세태가 변화된다는 느낌이 든다. 고백이 변질되는 것일까. 가수 송창식이 불렀던 1970년대 노래 가운데 맨 처음 고백이라는 노래가 있다. 유행하던 그때는 잘 몰랐었는데, 지금 다시 웅얼거려 보니 다분히 그 때 그 무렵의 사회적 분위기와 정서가 느껴진다. 말을 해도 좋을까, 좋아하고 있다고 / 마음 한 번 먹는 데 하루 이틀 사흘 // 맨 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이 들어라 /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 무엇을 고백했다는, 고백의 내용을 문제 삼는 노래라기보다는, 고백하기가 너무 힘이 든다는, 고백 그 자체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노래이다. 이런 노래가 널리 소통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반인들도 고백하기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느끼고, 그러한 고백의 심리적 분위기에 동조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성에게 고백하기이든 아니면 다른 유형의 고백이든 고백은 어렵다. 고백하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으려니와, 설사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더라도 실제로 고백의 행위를 실현하기까지 가는 데는 다시 엄청난 갈등과 머뭇거림의 난관이 놓인다. 어찌 그것이 단순한 어려움이겠는가. 고백이란 가장 진정한 자리에서 하는 말이다. 진정한 자리에 나를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뜯어보면 ‘고백하기’에는 참으로 복합적인 어려움이 엉켜 있다. 고백은 어렵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고백은 스스로를 믿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고, 오로지 상대만을 믿는 행위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나도 남도 못 믿을 때, 최종적으로 나를 겸허하게 벼랑에 내세우는 행위가 바로 ‘고백하기’인지도 모른다. 고백은 스스로를 바로 세워 높이려는 행위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비판의 십자가 위에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백 자체는 사람의 일상의 상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고백을 어디까지 신뢰해 주어야 할 것인가. 오히려 고백은 특단의 그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고백은 고백이기 때문에 어렵다. 모든 고백은 본질적으로 부끄러움을 토양으로 가진다. 또한 모든 고백은 자기응시(自己凝視)의 과정을 수반한다. 자기응시를 통해서 ‘부끄러운 자아’를 발견해 가는 것이다. 숨어 있던 부끄러움은 ‘고백’을 투과함으로써 비로소 단단한 자기 다스림의 세계로 승화한다. 윤동주 시인은 시 참회록에서 말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이 순정한 내면의 언어를 읽는 순간, 우리는 해맑게 숙연해진다. 그런 점에서 모든 고백은 거룩하다. 아픈 마음으로 부끄러운 자아를 향하여 내 안의 눈을 뜨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모든 고백은 거룩하다. 고백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참회의 심정으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담은 양심의 고백일 때는 더욱 그러하고, 이성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라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한없이 자기를 낮추는 경지야말로 참회의 본령일진대, 참회에 가까운 사랑고백이 진짜 사랑고백인 것이다. 사랑을 고백한답시고 자기를 낮추기는커녕 돼먹지 않은 자존심을 앞세워, 돈이나 학벌이나 권력을 사랑고백 속에 담는다면, 그건 고백에 대한 모욕이다. 그런데 세간에는 그런 엉터리 사랑고백이 승리의 깃발처럼 세를 얻는다는데, 이는 고백의 타락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백이 타락하면 타락하지 않을 것이 없다. 고백의 타락은 타락의 끝이다. 일찍이 고백록을 쓴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첫 페이지에서 이렇게 다짐한다. 자신을 돋보이려고 없었던 일을 한 줄도 보태지 않을 것이며, 부끄러운 것을 숨기려고 있었던 것을 한 줄도 빠뜨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고백록의 서두에서 부끄러운 참회를 보여준다. 소년 시절, 그가 의지할 데 없어 한 백작의 집에 기거하던 중, 그는 백작이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훔치었음을 고백한다. 그뿐인가. 자신에 대한 백작의 신뢰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평소 자신에게 냉정했다는 이유로, 아무 죄 없는 한 소녀를 범인으로 덮어씌우고 일러바친다. 그 집에 고아처럼 의탁되어 있던 그 소녀는 루소의 무고(誣告)로 백작의 집에서 추방된다. 루소는 이 모두를 고백한다. 소년 루소가 질투하고, 주저하고, 후회하고, 번민했던 인간적 약점의 과정이 진솔하게 참회되어 있다. 루소의 고백록 서두에 나오는 이런 고백을 들으면서, 대부분의 독자는 고백록에 친화된다. 루소가 전하는 고백의 내용과 고백의 맥락에 대해서 한없는 신뢰를 가지게 된다. 비록 어떤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 하더라도, 고백록이 주는 고백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가슴을 열고 받아들이게 된다. 성 어거스틴(San Augstin)의 고백록 또한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토로하는 데서 고백의 떨림이 진솔하게 와 닿는다. 루소나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들의 고백은 쉬운 것이었을까.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것이었을까.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그의 반성적 인식을 그의 삶에서 참회하듯 소명하겠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웠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웬만한 고백은 만만하고 호락호락한 것처럼 보이게도 되었다. 그래서 ‘그까짓 고백쯤이야 나도 해치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도 되었다. 고백하기는 밝은 조명과 잘 치장된 꽃다발과 막강한 미디어 매개에 의하여 찬란한 이벤트로 재탄생한다. 사랑고백만을 전문으로 해주는 이벤트 회사도 있단다. 최소한의 의지와 충분한 경비만 있으면 고백은 그 어떤 의전보다도 빛나고 당당한 이벤트로 재탄생한다. 고백의 주체인 ‘나’는 한낱 기표(記標)의 조각으로 고백하기의 껍질에 노출될 뿐이다. 이벤트로서의 고백은 한 장면의 가장무도회처럼 연출될 뿐이다. 참회의 마음[心田]이 없어도, 고백은 조명으로 빛난다. 아니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진솔한 떨림을 안으로 배태하지 못하여도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 선거가 무지개처럼 걸려 있는 정치의 계절이다. 이 시간에도 고백의 자서전이 넘쳐 나지만 그 고백 속에 감동이 없다. 자기 자랑으로 일관하는 자서전에는 ‘고백’이 숨쉴 공간이 없다. 더러는 전지적 통찰자의 모양으로 과거의 시간을 재단하기도 하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는 표정을 지으며 숨은 역사의 주인공인 양 당당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있어야 할 참회의 자리에 노회한 욕망들이 비집고 들어 와 있다. 지나간 스캔들을 덧칠하여서 괜찮은 로맨스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욕망을 향해 일로매진할 뿐, 희미한 회의(懷疑)조차도 머물지 않는다. 회의(懷疑)야말로 반성을 싹 틔우는 씨앗이 아니던가. 그래서 손바닥 뒤집기처럼 쉬운 고백들이, 사이비(似而非) 고백들이 천지에 난무한다. 참으로 고백은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 헤쳐 나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 왔을까? 필자는 여기에 대한 해답으로 우리 국민들의 근면성과 교육에 대한 열정, 즉 교육의 힘이었다고 단언하고 싶다. UN의 발표자료에 의하면 1953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3달러였으며 우리나라는 132달러였다. 우리의 경제수준은 1960년대까지 필리핀보다 뒤졌다. 그러나 지금 필리핀과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많은 차이가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는 1960년대 1인당 GNP 규모가 가나(Ghana)와 동일한 230달러였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격차가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두 나라는 모두 주로 농업경제에 의존해 왔고 반세기 가까이 식민통치 하에 살았었다.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가나를 포함한 서아프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국가의 부류에 속해 있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거의 없는 국가에서 현재는 무역대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이제 선진국 진입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회고해 보면 1960년대, 수출입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모든 국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밤낮없이 일해 1964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였다. 그 당시의 주요 수출상품으로는 외화벌이의 효자였던 가발을 비롯하여 합판, 면직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들이었으며 세계 국가 중 수출 순위는 90위였다. 하지만 40여 년이 지난 우리나라의 수출액은 3260억 달러(2006년 통계)로 2700배 증가하였으며 세계 수출 순위는 11위다. 최근 수출 주요상품으로는 반도체, 자동차, 휴대폰, 선박 등으로 60년대의 수출상품과 비교해보면 엄청난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주요 수입상품으로는 원유, 반도체, 천연가스, 석유제품, 컴퓨터, 철강판 등으로 경제적으로 몇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 더구나 과거 우리나라와 생활수준이 비슷했던 아프리카의 가나, 우리보다 수준이 높았던 필리핀은 우리나라의 발전에 대해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이와 같은 결과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국민들의 근면성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가장 크게 작용되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1% 미만이며, ‘도이치뱅크의 연구보고서’(2005년 8월)에서 한국의 인적자본 수준이 세계 6위라고 발표한 것은 지식기반사회인 오늘날 우리의 인적자원이 이러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최근 우리의 이웃국가인 중국이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음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시아 경제대국인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침체기에서 빠져 나와 새로운 도약을 하고 있다. 요즘 세계 경제 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발전을 유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치는 경우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남미의 아르헨티나, 온두라스 등의 국가들은 1900년대에는 선진국의 생활 경제 수준이었으며 특히 아르헨티나는 세계 7대 부국에 속해 있었다. 하지만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폴 케네디는 ‘21세기 준비’라는 글에서 “아르헨티나의 몰락은 한 세기 이상 문맹률을 저하시켜온 교육이 파멸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대학은 난방이 없고 많은 공립학교 창틀에는 유리가 없다. 경력 10년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지난 여름(1990년) 월 소득은 110달러가 채 못 됐다. 주 10시간을 강의하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학의 부교수는 월 37달러를 받았다. 시립병원의 의사 월급은 120달러였다. 교사들은 교대로 남의 강의를 떠맡고 단축수업을 했는데 그것은 선생과 학생 모두가 교통수단이 여의치 못하기 때문이다”라며 아르헨티나가 몰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1980년대에 실질소득이 감소하여 오늘날 대다수 남미 국가들은 10년 또는 20년 전보다 낮은 국민소득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을 볼 때 아프리카, 남미의 여러 나라들, 중동 및 동아시아 국가들은 천연자원이 풍부함에도 불구하고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가 적어 발전 속도가 느리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거대한 석유매장량의 보유나 많은 석유 외의 천연자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 없이는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이제,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근면성과 교육의 열정으로 해방 후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왔던 경험을 살려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때다. 우리의 인적자원으로 다시 도약해 보자. 그리고 세계를 한 번 더 놀라게 해주자. 이를 위해서는 교육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교육재정을 GDP 대비 6%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에 힘쓰지 않는 국가, 교육에 투자하지 않는 국가가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 교육자 모두는 한마음이 되어 다시 한 번 도약하는 계기의 선두에 서서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교육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자! ‘교육은 百年大計’라고 하지 않던가. 우리 모두 앞으로 다가올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그려보면서 노력하자. 스피노자의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말과 같이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우뚝 서는 그날까지 교육경쟁력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문명은 위생을 먹고 자란다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은 ‘치도약론’이란 글을 쓴다. 이 글은 일종의 시정개혁서였다. 여기서 김옥균은 서양의 중요한 정책을 위생(衛生)과 농상(農桑)과 치도(治道)라고 말한다. 이 중에서 그는 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치도는 단순히 도로 개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김옥균은 수십 년 이래로 괴질(怪疾)과 역질(疫疾)이 가을과 여름 사이에 성행해서, 한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그 병이 전염(傳染)되어 백 명, 천 명에 이르고, 죽는 자가 계속해서 늘어난 이유를 “거처(居處)가 깨끗지 못하고 음식물에 절제가 없는 것뿐만 아니라, 더러운 물건이 거리에 쌓여 있어 그 독한 기운이 사람의 몸에 침입하는 까닭”이라고 판단했다. 더욱이 김옥균은 외국 사람들이 조선에 대해서 논평한 말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조선에 다녀간 외국 사람들은 “조선은 산천이 비록 아름다우나 사람이 적어서 부강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도 사람과 짐승의 똥오줌이 길에 가득하니 이것이 더 두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외국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김옥균은 “더러운 냄새가 사람을 핍박하여 코를 막아도 견디기 어려움의 탄식이 있으니, 실로 외국의 조소를 받을 일이다”라며 개탄하였다. ‘외국의 비웃음’을 받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는 먼저 위생 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옥균의 생각이었다.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환경이야말로 야만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위생이 곧 국가의 부강과 문명의 첩경이라는 인식이 근대 초기 조선을 휩쓸었다. 오리엔탈리즘은 야만을 낳고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은 조선의 첫 인상을 말하면서 대부분 불결하다는 표현을 썼다. 1897년 일본의 나가사키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영국 해군들과 상인 그리고 각국 사람들이 모여 음악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때 영국군의 장교가 조선에 대한 노래를 지었고, 이를 백여 명의 어린이들이 따라 불렀다. 저 바다 건너 나라 하나 있으니/ 세상에서 이 나라를 조선이라 하더라/ 그 나라 안에는 사람을 즐겁게 하고/ 정결하다는 말은 참 뜻을 모르더라/ 그 나라 사람들과 그 나라 사정을 말하려면/ 제일가는 문장이라도 이루 기록할 수 없더라/ 저 멀리 있는 조선 땅을 노래하려면/ 조선 생각이 시객의 비위를 역하더라/ 조선 갓은 확이 머리보다 적고/ 갓 도래는 어깨보다 더 넓더라/ 방에 불은 침상 밑에 피고/ 굴뚝은 땅에다가 구멍을 뚫었더라/ 모군군은 소리를 질러야 일을 하고/ 쉬는 시간은 일 하는 시간보다 더 하더라/ 담뱃대는 석자 기럭지를/ 저 먼 조선 땅에서 먹더라/ 군함들이 정한 나라에서/ 혹 며칠 동안 식 거기 가는데/ 영국 군함 피칵은 무슨 일인지/ 제물포에 가서 세월을 허비 하더라/ 다행히 제물포서 도망질 하야/ 한 번 나오면 다시 가기는 다 싫어하더라/ 아침이면 밝다고 하는 나라에/ 아무것도 사람을 즐겁게 할 건 없더라/ 원컨대 우리는 다시 동양에 있을 때에/ 그 흉악한 나라에는 가지 않게 하여 주오/ 이 넓은 세계에 사람을 즐겁게 할 것은/ 저 멀고 먼 조선 안에는 업더라. (독립신문 ‘외국통신’, 1897. 4 .6) 영국군이 지은 노래를 열심히 부른 일본 어린이들에게 조선이 어떻게 비춰질지는 명약관화하다. 노래 속에 투영된 조선의 모습은 철저하게 서양의 시선을 전제로 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이(異)문화권의 영국인에게는 하나같이 비난의 대상으로 지적된다. 영국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제는 서양의 근대 문명이다. 도로, 복장, 위생, 시간, 기호품 등 서양에서 새롭게 만들어낸 사회적·문화적 제도의 틀로써 조선의 실상을 재단한 결과인 셈이다. 영국인은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다른 문화권에 대한 ‘차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게 아니라 근대적 서구 문명이라는 단일한 관점에서 조선의 문화와 풍속을 바라본 것이며, 그 시선으로 투사된 조선의 표상은 ‘야만’인 것이다. 근대 초기 외국인들이 바라본 조선은 이렇듯 야만의 온상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때 독립신문 편집인의 반응은 영국인의 비난보다 더욱 주목할 만하다. 독립신문의 편집인은 앞의 노래를 게재한 후, “우리가 기록하니 조선 사람들은 이런 걸 보면 외국 사람들이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는 줄을 알고 분히 여겨 아무쪼록 남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었다. 타자의 시선에 비친 조선의 모습에 대해서 독립신문의 편집인은 ‘분하게’ 여긴다고 말했지만, 그들에게 욕먹지 않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남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은 결국 서양인들처럼 되라는 명령인 셈이다. 서양이라는 타자(他者)의 거울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풍속은 철저하게 비판되었다. ‘서양인처럼 된다’는 말 속에는 서양인들이 지적한 조선의 문화와 풍속의 특성들을 모두 서양의 표준에 맞춰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서양의 표준이란 근대적 문명이며, 이 표준에 따라 조선인들의 모든 삶의 습속들은 ‘개량’되어야 한다. 결국 독립신문의 논조는 서양과 동일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독립신문의 편집인들에게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의 역투사가 녹아 있었다. 특히, ‘외국통신’은 세계사적 지형에서 조선을 상대화하기 위한 객관적 역할보다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비참하며 또한 우리는 얼마나 열등한가’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수사학적 전략으로 가득하다. 이는 독립신문뿐만 아니라 근대 초기 개화사상가였던 윤치호의 1887년 6월 26일자 일기에서도 발견된다. 윤치호는 중국 상하이의 거리를 묘사하면서, 중국인들이 “거처하는 방안의 더러운 냄새, 똥오줌 냄새는 사람으로 하여금 코를 가리게 한다. 그리고 식당 안에는 한 자리의 똥통을 놓아 더러운 냄새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 맡을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그 비판의 화살을 조선으로 되돌린다. “우리나라 사람의 도로, 거처, 음식의 더러움이 지나인과 다를 바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떨리고, 기가 막힌다”고 하였다. 서양인들은 이문화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철저하게 서양의 문명화 담론을 통해 조선의 풍경을 재단하였다. 선교사 알렌은 조선의 고유 풍속인 석전(石戰)을 “가장 야만스런 의식”이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서양인들에게는 조선의 한의학, 무당, 복장, 음식, 예절 등이 모두 야만의 표상으로 비춰졌고,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그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비하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었다. 조선을 여행했지만, 조선은 없었다? 서양인들의 조선 기행의 하이라이트는 어쩌면 다른 곳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조선에 왔으나 조선을 보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94년 그녀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 그녀의 눈에 처음 들어 온 것은 조선이 아니었다. “부산에 닻을 내리며 만나게 되는 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비숍뿐만 아니라 다수의 서양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비숍을 비롯한 다수의 서양인들은 조선의 풍경을 세세하기 기록하려고 애써 노력하였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글 속에는 조선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풍경도 녹아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의 중심은 어떤 면에서는 조선에 있지 않았다. 조선을 판단하는 근거는 조선 그 자체가 아니었다. 조선은 일본과 중국과 비교대상이 되었다. 서양인들이 조선인을 일본인과 중국인보다 우수하다고 말할 때조차도, 그들의 인식 속에는 이미 일본과 중국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다. 일례로 오페라의 유령을 쓴 가스통 르루는 1904년 제물포의 영웅들이란 르포르타주를 출간했다. 여기서도 짝퉁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문명화에 성공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똑같은 동양이지만 조선은 지지리 궁상맞은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처럼 조선의 풍경은 언제나 제국 사이에 존재했다. 서양인들은 일본과 중국, 즉 떠오르는 제국 일본과 몰락해 가는 구(舊)제국 중국을 프리즘으로 조선을 보았던 것은 아닌지. 그런데 더욱 문제적인 것은 서양인들이 만들어낸 조선에 대한 인식을 조선인이 조선을 바라볼 때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안에서 우루무치까지 중국 실크로드를 다녀왔습니다. 시안[西安] 일대-천수-난주-가욕관-주천-둔황-투루판-우루무치를 거치는 일정이었습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볼 때 이 일정은 실크로드 전체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하지만 서쪽으로 달려 갈수록 눈에 띄게 달라지는 자연환경이나 사람들의 생김새는 ‘역시 실크로드다!’하고 감탄하게 합니다. ‘사막에서도 흰 눈이 덮인 산맥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수차례 듣고 사진으로 확인도 했지만 정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집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렇게 뻣뻣했던 나그네에게, 감탄에 익숙지 않은 내게 실크로드는 말로 못할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새벽을 종착지로 해서 밤새 서쪽으로만 달리던 기차는 종착지에 다다를 무렵 드디어 저 멀리서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나를 향해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코 앞에는 누렇고 메마른 사막인데도 말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아,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넓단다’하는 가르침을 던져주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에어컨이 설치된 버스를 타고 편안한 숙소에서 머물며 실크로드를 다닐 수 있다지만 그 옛날 척박한 이 땅에서 생활했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아찔합니다.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열사의 사막에서, 훼방꾼의 침입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이제 한 해를 한 달여 남겨 놓은 이즈음에 순례자의 마음으로 실크로드로 다시 떠납니다. 그 속에서 우리 것, 우리 역사, 우리 문화와 관련한 것들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실크로드의 시작 시안은 중국 고도의 한 곳으로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서역으로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중국의 절세의 미인이었다는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과 병마용갱 등 볼 것 많고 들을 것 많은 곳이라 이곳 가이드는 중국에서도 1급에 속한답니다. 시안에서는 몇 인물을 떠올립니다. 먼저 진시황.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짓고 불로초를 찾아 영원한 삶을 누리고 싶었던 그였지만 정작 불로초를 찾아 떠난 신하들은 함흥차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또한 불로초를 얻을 수 없음을 미리 감지했을까요? 생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었지요. 병마용의 호위 속에 그 무덤 속에서 영생을 누리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거대한 무덤 바닥에는 수은이 흐르는 강이 있고 행여 침입자가 있을까 독묻은 화살을 설치해두고 자동 발사 장치까지 해놓았답니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이미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무모하리만큼 파격적이었던 그의 스케일답게 그의 사후에도 그가 남긴 유적은 시안을 먹여 살리는 대표적인 관광지로 남아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으니 사후까지도 그 영향력이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진시황이 중국 역사상 황제의 시발에 해당하는 위상을 갖는 과거의 인물이라면 양지발이라는 사람은 어쩌면 시안에서만큼은 진시황에 견줄 만한 현존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진시황릉을 지키는 거대한 지하군단인 병마용을 처음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1974년 극심한 가뭄 끝에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병마용갱,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지금껏 박물관에서 자신의 책을 팔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의 출근지는 박물관, 하는 일은 책에 사인하기. 병마용갱의 위력에 놀란 사람들은 병마용갱을 처음 발견했다는 이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의 책은 윤전기에서 쉴 새 없이 신문을 찍어내듯 팔립니다. 매일 매일 사인만 해주고 돈을 버는 사람, 그와 진시황과의 인연이 부럽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사랑이라는 현종과 양귀비의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는 지금껏 회자되고 있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즘의 기준이라면 양귀비는 미인 축에 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녀는 시대를 잘 타고 난 것 같습니다. 중국 절세미인으로 잊혀지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비극적인 그녀의 죽음, 그래서 파격적인 러브스토리는 결국 윤리를 넘지 못했나 봅니다. 시안은 현장스님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인도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이 그가 가져온 수백 권의 불경을 모셔두었던 탑이 시안 시내 자은사라는 사찰에 있는 대안탑입니다.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잘 알려진 현장에게는 신라승인 원측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원측에 대한 논의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고 하네요. 대웅전 뒤 위패를 모신 사당에는 원측의 위패도 볼 수 있으며 그의 사리는 흥교사라는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역시 인도를 다녀온 신라승 혜초 또한 이곳 장안에서 머물렀습니다. 원측과 혜초 스님을 비롯한 신라의 학승과 유학생들이 머나먼 장안까지 와서 국제화교육을 받았을 터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인들이 이곳을 찾아왔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생각하며 고개를 조아려 봅니다. 시안 회족거리는 야시장으로 유명합니다. 이곳에는 서부 지역의 건조한 지대에서 많이 생산되는 견과류를 파는 가게가 가득합니다. 그 야시장에서 한글로 쓴 글귀를 봅니다. ‘고급곶감’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옛날 이 당에 있었을 신라 사람들을 발견한 듯 반갑기 그지없네요. 경주에서 찾아낸 서역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유명합니다. 금관, 금 허리띠, 드리개, 귀걸이 등을 비롯한 신라의 황금문화는 북방 유목민족의 황금문화가 신라에 유입된 것입니다. 특히, 관모와 같이 사용했던 관식의 형태로 볼 때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도 나타나듯 신라와 고구려가 깃털이나 새 날개 모양의 장식을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장회태자묘 출토 사신도에 등장하는 조우관을 쓴 인물이 신라인이냐, 고구려이이냐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시안에 있는 산시성[陝西省] 역사박물관에는 이 사신도를 크게 확대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마침 사신도 앞에 신라에서 발견된 서역인의 토용과 무척 닮은 토용이 자리하고 있어 심정적으로는 신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황금문화와 함께 유리제품이나 장식보검 등도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에 직접 전래되었습니다.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장식보검은 철제 칼집과 칼은 썩어 없어져 버리고 금으로 된 장식만이 남아있던 것입니다. 이 유물은 시신의 허리 부분에서 발견되었는데, 자루의 끝부분이 골무형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붉은 마노를 박았으며 칼집에 해당되는 부분 위쪽에 둥근 무늬를 넣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동양에서는 발견되는 일이 없어 신라의 대외교류를 짐작하게 하는 대표적인 유물입니다. 그 밖에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리잔,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 및 유리잔 등 로만글라스라고 불리는 유리제품은 지중해 연안에서 출발하여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신라에 전해진 서역물품들입니다. 특히,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의 경우 페르시아계 제품과 흡사하고 유사한 물품이 없어 서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당시 신라와 활발하게 교역했던 서역계의 인물상도 남아 있습니다. 지난 호에 말씀 드린 괘릉의 석상과 함께 용강동에서 발견된 문관 토용(土俑), 미추왕릉에서 출토된 상감유리구슬 목걸이 등에서 신라인인 아닌 외국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주 천마총은 천마도가 발견되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천마도 또한 북방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이 천마를 간쑤성[甘肅省]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간쑤성 무위라는 곳에서 출토된 청동분마는 천마총의 천마와 매우 흡사합니다. 이 청동분마는 한쪽 발아래 제비를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천마가 얼마나 속도감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나라 무제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천마로 한혈마(汗血馬)라고도 부르지요. 경북 칠곡에 있는 송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오층전탑이 있습니다.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많은 유물들이 나왔는데 특히 사리장치는 신라의 황금문화와 서역의 유리가 만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막고굴에서 생각해 보는 침탈의 역사 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과도로서 대상(隊商)들이 만들어낸 길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만든 길인 것입니다. 당시 로마를 비롯한 서양에서는 동양에서 넘어온 비단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대상들은 그 물건을 팔기 위해 위험을 마다하며 떠났던 것이죠. 실크로드를 통해 비단, 자기, 종이 등을 서쪽으로 전파시키고 동쪽으로는 향신료, 유리, 보석이 오갔습니다. 대상들은 곳곳에 있는 오아시스에 의지하여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낙타를 이용해서 그 길을 오갔습니다. 이렇게 장사에 나섰던 캐러밴은 그 후 약탈한 문화재를 싣고 가는 낙타의 행렬로 이어지다 요즘은 관광객을 싣고 나르는 낙타의 행렬로 이어져 왔습니다. 실크로드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겨 두었습니다. 생활용품과 무역품 외에 신앙과 관련한 유적지가 많습니다. 그 험로를 움직이는 일정 자체가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교가 들어오면서 곳곳에 불교사원을 많이 남겨 두었지요. 하지만 실상 제자리에 남아 있어야 할 문화재가 제자리를 잃고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크로드에 불어 닥친 문화적 침탈의 여파입니다. 실크로드 문화유산에 대한 침탈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절정을 이루게 되는데 스웨덴의 헤딘,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와 같은 이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의 석굴 등을 뒤져가며 각종 문서 및 공예품 등을 수집해 본국으로 가져가기에 혈안이었습니다. 막고굴(莫高窟·둔황 석굴)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막고굴은 모래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명사산(鳴砂山) 동쪽 절벽에 석굴사원으로 천불동이라고 불립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린 석굴은 무려 천 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막고굴이 있는 둔황[敦煌]은 수많은 장사꾼들이, 순례자들이 이곳에 휴식하며 재충전하던 오아시스 도시였습니다. 동서양을 잇는 통로로 한창 번성을 했던 실크로드는 점차 동양과 서양을 잇는 바닷길이 개척되어 가면서 그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생존보장조차 없는 험난한 육로보다는 비교적 안전한 바닷길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청나라가 기울어가는 혼란기였습니다. 막고굴에 머물고 있었던 왕원록이란 자는 이곳을 찾아온 각국의 탐험대에게 수많은 문물을 팔아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중한 문서와 유물이 세계 곳곳으로 나눠지게 된 것입니다. 또 이곳에 머물렀던 백러시아 군인들이 동굴에서 숨어 지내면서 둔황문서를 불태워 추위를 막기도 하고 벽화에 조성된 금박을 떼어 내어 팔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막고굴의 역사는 번성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급기야 문화적 침탈을 받다 지금은 다시 세계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으며 번성하고 있지요. 막고굴 17번 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인도로, 중앙아시아로 험한 여정을 끝낸 그는 분명 앞선 국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고향은 항상 아른거렸나 봅니다. 그가 남긴 망향가가 그의 심정을 대신해 주고 있습니다. 달 밝은 밤에 고향 길을 바라보니 / 뜬 구름은 너울너울 고향으로 돌아가네 / 편지를 봉하여 구름 편에 보내려 하나 / 바람은 빨라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에 있고 / 다른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 해가 뜨거운 남쪽에는 기러기가 없으니 / 누가 내 고향 계림으로 소식 전해줄까 국제화시대라며 외국어 열풍이 식을 줄 모릅니다. 교통수단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이제 전 세계가 성큼 가까워진 만큼 국제화에 대한 대비는 필수적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국제화시대를 살았던 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앞선 국제인, 선구자였던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습니다. 국적기를 타고 며칠 만에 받아본 우리나라 신문 1면에는 아직도 여행오기 전 읽었던 기사가 그대로입니다. 온통 책임론 타령이었습니다. 누가 잘 했고, 누가 못 했고….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왔다는 증거입니다. 이 시대에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세계를 상대로 정치를 펼치고, 물건을 팔고, 우리 문화를 알려야 할 때인데…. 다음 호까지 실크로드 기행이 이어집니다. 독자 여러분,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토론을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이든, 토론 지도를 잘 하려고 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우선은 토론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면 좋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무슨 일이든 알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법이지요. 더 잘 보이고 많은 것을 보게 되며 비로소 이해가 가능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먼저 토론의 정의부터 한 번 알아볼까요? 토론이란? 토론에 대한 정의는 조금씩 차이가 있고 학자들마다 주장이 다양한 것 같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정의를 모아 나름대로 정리를 해보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보았을 때 가장 쉽게 이해하는 수준에서 정리해 보면, 토론이란, ‘토론이 가능한 하나의 주제’를 두고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동등한 의견 진술의 기회와 일정한 규칙에 따라 관련된 정보와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조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하는 말하기입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한 자신의 의견을 조리 있게 말하고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이 목적인 토의와는 달리 토론은 궁극적으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충분히 배려해서 말해야 하고 또 보다 논리적으로 말해야 합니다. 토론을 잘 하려면? 토론의 정의에 잇대어 생각해보면 토론을 잘 한다는 것은 결국 찬성이든 반대든 자신이 맡은 입장에서 누가 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전개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주장을 전개하는 사람은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될 것이고 나아가 생각이 달랐던 사람까지 변화시킬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토론을 지도할 때 아이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펴야 한다고 강조는 하였지만 구체적으로는 어떤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으시는지요. 뚜렷한 기준이 없었으니 주장을 놓고 어떤 평가를 하는 것도 물론 어려울 것입니다. 당연히 조언을 해주거나 더 나은 수준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부족할 것입니다. 이럴 때 만약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는 원칙과 기준이 있어 분명하게 제시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토론하자고 하면 처음에는 좋아하던 아이들도 몇 번 해보고 나면 재미없어 합니다. 늘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큰 소득이랄 것도 없이 서로 의견만 주고받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교과서와 선생님의 정리에 따라 결론을 내리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그만 시들해지는 것을 보아 왔던 저는 이 토론의 원칙과 규칙이 매우 분명하여 가르치기 위해 배우는 동안 우선 제가 즐거웠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자연히 자신 있게, 재미있게 설명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얼른 배우고 싶어 토론에 빨려들어 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배우고 싶어 눈을 빛내게 되는 공부! 이 정도면 토론학습을 위한 동기유발은 충분하겠지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주장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는지 누구나 알게 되는 것!’ 이것은 재미있고 신나는 저의 지도 목표였고 아이들의 학습목표였습니다.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는 6가지 원칙] (1) 토론 가능한 주제의 안건에 대해 (2) 자신의 결론을 내리고 (3) 그 결론에 이르게 된 이유를 찾아 그것을 제시하고 (4) 이유의 옳음을 설명하고, 즉 논증을 하고 (5) 나의 결론에 반대 또는 대조되는 의견(반론)이나 생각을 고려하여 내 생각과 견주어 그것이 비논리적임을 보여주거나 부족함을 지적하고 (6) 예외를 정리하여 보여 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이 되는 6가지 원칙’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하여 안내를 하면 아이들은 반신반의합니다. ‘설명을 들으니 잘 될 것 같기는 한데 실제로 저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여섯 단계의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먼저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 보여 주면 아이들은 좀 더 쉽게 받아들이고 해보겠다는 용기를 내는 것 같습니다. 토론은 ♠ 이러한 원칙을 기억하며 찬성과 반대 팀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한 주장을 가지고, ♠ 공정한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약속한 규칙에 따라, ♠ 중립적인 사회자의 진행에 맞추어 토론을 전개하고, ♠ 판정을 통해 승패를 가리는 것. ---------------------------------- [예문] ----------------------------------- 혜진이에게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꼭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토요일 담임선생님께서는 주말 동안 ‘착한 일 한 가지 하고 오기’라는 숙제를 내셨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이런 숙제를 내셔서 우리들이 기분 좋게 용돈도 받게 해주시고 또 모아서 보고 싶던 책을 사게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번에 ‘착한 일 하기 숙제’를 내신 것은 좀 다른 뜻이 있었습니다. 이웃 학교의 3학년에 이현수라는 학생이 백혈병을 앓고 있는데 오랜 투병으로 생활도 어려워지고 또 이번에 큰 수술을 하게 되어 우리 동네의 모든 학교 아이들이 다 돕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냥 모금을 할 수도 있지만 착한 일을 한 가지 이상 하고 부모님으로부터 상으로 받은 돈을 내는 것은 더 큰 의미가 있겠다고 하시며 꼭 하고 받아 오라고 하셨는데 하필이면 주말 동안 혜진이가 다니는 학원에서 단체로 시험을 치러 가는 바람에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혜진이는 현수를 돕는 일에 꼭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현수는 같은 아파트의 옆 동에 사는 아이이기도 하고 또 전부터 알던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딱히 착한 일을 할 거리도 없고 억지로 하자니 그렇고 시간도 없어서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하다가 어머니께 말씀드려 그냥 받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크게 걱정하시며 보통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혜진이는 모금함에 돈을 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특별히 숙제를 하고 받은 돈이었는지 묻지 않으셨고 또 누가 얼마를 냈는지 따로 기록을 하지도 않았으며 아이들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내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혜진이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또 그 사실을 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혜진이는 자신이 정말 비겁하고 나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렇게 정리를 하고 나면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어 하고 얼른 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가며 토론의 세계로 빠져볼까요? 먼저 ‘토론이 가능한 주제의 안건’이라는 것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자, 토론이 가능한 주제란 어떤 주제일까요? ‘정답이 없는 주제’, ‘입장에 따라 찬성 반대의 의견 대립이 팽팽한 주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는 주제’, ‘실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 중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는 주제’ 정도를 안내하면 어떨까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이런 기준을 알게 하면 수시로 와서 ‘이런 주제로 토론 해봐요!’라고 말하게 되어 좋겠지요. 그런 제안을 통해 아이들만의 관심사도 알게 되고 아이들이 제시한 주제로 토론을 하게 되면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열기도 확실히 차이 나게 달라지니까요. 우리 교실에서 해보니 토론에서 제시되는 주제를 토론에서는 특별히 ‘안건’이라고 한다고 정리해 주는 것도 아이들에게는 재미있는 구분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안건에 대해 설명이 되었으면 이제 제시하는 방법도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안건은 아이들의 수준이나 흥미에 따라 다르게 선택하고 제시해야 하겠지요. 토론을 처음 시작할 때는 다양한 접근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주로 아이들이 주변에서 흔히 경험하는 주제 중에서 선택하였습니다. 이 때 가능하면 안건만 달랑 제시하는 것보다 글 속에 주제가 녹아 있어 읽고 난 뒤 그 안에서 안건을 추출해 낼 수 있는 읽을거리로 만들어 제시하면 어떨까 합니다. 위의 예문을 읽고 토론을 해보자고 하면 어떨까요?
별도 직급이 없는 일선학교 교장이 일반공무원 직급상 4급(서기관)에 해당하는지 5급(사무관)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이 다른 의견을 개진해 주목된다. 1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교육부는 최근 사립학교법상 임원 결격사유 대상인 '4급 상당 이상의 교육공무원' 범위를 정하면서 초ㆍ중ㆍ고등학교 교장을 포함하는 '4급 상당 교육공무원의 범위 지정(안)'을 마련했다. 사립학교법(제22조 제5호)은 학교법인 임원 결격대상의 하나로 '4급 이상의 교육행정공무원 또는 4급 상당 이상의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한 지 2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를 규정하고 있어 교장을 이 범위에 포함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학법인과 직ㆍ간접적으로 관련있는 전ㆍ현직 교장이 임기 도중 혹은 퇴직 직후에도 곧바로 자신이 소속됐던 사학법인의 이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교육부가 대통합민주신당 안민석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해 전국 초ㆍ중ㆍ고 학교법인에서 선임한 개방형 이사 467명 중 전ㆍ현직 법인 소속 학교장(감)이 182명이나 됐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의 생각은 달라 최근 교육부에 '4급 상당' 교육공무원의 범위에서 초ㆍ중ㆍ고교 교장은 제외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검토 의견을 냈다. 시교육청은 실무적으로 초ㆍ중학교 교장이 교육청으로 전보되는 경우 5급 상당의 지역교육청 과장이나 5급 상당의 본청 장학관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4급 상당'보다는 '5급 상당'으로 해석했다. 또 올해 초 교육부에 관련 내용에 대해 질의했을 당시만 해도 '학교장은 제외'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시교육청은 설명했다. 일반공무원과 비교하면 4급은 교육부 등 중앙부처 과장, 지방자치단체 부군수, 경찰 서장(총경) 등이 해당하고 5급은 지방자치단체 동장ㆍ읍장, 경찰서 과장(경정) 등에 해당한다. 하지만 장학관 출신 교장 중에는 교육부와 교육청에 1급(관리관) 자리부터 5급(사무관) 자리까지 폭넓게 맡는 경우도 있어 '4급 상당' 혹은 '5급 상당'으로 직급을 매기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학교 교장이 4급 상당인지 5급 상당인지 기분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사학 임원 결격 대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영국 중등과정 공립학교들은 앞으로 학생들의 GCSE(중등교육자격시험) 성적이 나쁠 경우 학교 문을 닫게 생겼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31일 취임 후 첫 교육정책 연설에서 공립 중등학교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기 위해 GCSE 성적이 떨어지는 학교는 폐교하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GCSE는 한국의 수능시험처럼 학생들이 중등과정 교육을 제대로 이수했는지 평가하는 국가 검정 시험이다. 취임 연설에서 교육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겠다고 밝힌 브라운 총리는 잉글랜드 내 670개 중등학교가 납득할만한 교육 수준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 같은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브라운 총리는 졸업생 중 3분1도 못되는 소수만이 영어, 수학을 포함한 GCSE 5개 시험과목에서 평균 이상 성적을 거두는 학교들은 앞으로 6년 내에 성적을 끌어올리거나 그렇지 못하면 문을 닫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현재 30% 못되는 소수 학생들만이 GCSE 5개 시험과목에서 평균 이상 성적을 거두는 중등학교들은 전체 잉글랜드 공립학교 중 5분의 1인 670여개에 달한다. 이런 학교들은 연간 성적 개선 목표치를 할당받고, 주변 좋은 학교들로부터 지원을 받게 된다. 해당 학교 교사들은 좀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제공받는다. 그 후에도 이 학교들이 30% 이상 우수 학생을 배출하는 데 실패할 경우 지역 교육당국은 해당 학교를 민간이 후원하는 아카데미로 전환하거나 폐교조치를 해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 시험 성적에 아무런 개선이 없을 경우 중등학교 5개 중 하나는 문을 닫거나 다른 학교에 흡수 통합되게 됐다고 텔레그래프 신문은 지적했다. 앞서 교육기준청(Ofsted)은 지난 1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집권 노동당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립 중등학교 10개 중 한 곳이 교육에 실패하고 있거나 실패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또 중등학교 중 절반 정도가 부모의 기대 수준에 맞는 양질의 교육을 학생에게 제공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브라운 총리는 "이제 우리는 높은 목표를 세웠으며, 더 이상 실패를 내버려둘 수 없고, 우리 아이들이 뒤에 처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가 왔다"며 "실패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브라운 총리는 또 중등학교 졸업 후 모든 학생들이 대학을 가거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며 18세 청소년들을 견습생으로 고용하는 기업들에 대해 직업 훈련비용으로 3천파운드에서 최대 1만5천파운드까지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