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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교실 뒤에 붙일 독서감상화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간 줄만 알고 있었던 인재가 교실로 찾아왔다. 왼손을 움켜쥔 채 나를 찾아온 것이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손가락이 퉁퉁 부었다. 다행히 작은 부상이라서 마음이 놓였다. “어쩌다 그랬니?” “학교 놀이터에서 놀다가 그랬어요.”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여 보게 하고 물에 담가서 부은 것을 가라앉혀서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분무형 파스를 뿌려 주고 다독거려 주었다. “운동장에서 조금만 놀다가 들어와서 독서하자고 했는데 너무 많이 논 것 같구나. 내일부터는 학교 차가 가는 시간을 잘 보고 교실에서 책을 읽다 가면 참 좋겠다. 그렇게 하자. 응?” “예, 선생님.” 아이를 집에 보내고 집에 전화하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보기에는 뼈에 이상이 없어 보였는데 혹시 모르니 손가락을 엑스레이로 찍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우리 학교는 면소재지에 있는 소규모 학교이다 보니 보건 담당 교사도 없다. 의학적인 전문 소양이 없는 필자에게 학교에서 아이들이 다치는 일은 매우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안전한 학교생활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6학년을 가르치면서 보건 담당 교사까지 겸할 때였다. 학급에서 연 만들기 실습을 하면서 대나무를 잘게 만드는 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을 벤 아이가 생겼었다. 집게손가락을 다친 아이가 피를 흘린 채 찾아 와서 가까스로 지혈을 시킨 다음 선배 선생님들께 보여드리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응급 처방만 끝낸 아이를 데리고 읍내로 나갔다.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고 보니 손가락의 신경을 다쳐서 그대로 두었으면 손가락 한 마디를 제대로 쓸 수 없을 뻔 했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고 손가락에 깁스한 채 여러 날을 지낸 후 무사히 치료한 적이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학교에서 다치는 아이가 생기는 일이었다. 장난을 치다가 다리를 다치는 아이, 운동회를 하다가 다치는 아이, 수업 시간에 칼에 베는 아이, 점심시간에 친구들끼리 놀다가 다치는 일 등. 그때마다 마음을 졸이고 발을 동동거리며 애태우던 기억들이 새롭다. 왼손잡이인 인재가 왼손가락을 다쳐서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도 의젓하게 잘하는 모습이 참 대견하다. 새삼스럽게 왼손의 고마움을 느끼며 그동안 잘 쓰지 않던 오른손을 쓰면서 자기 몸의 소중함을 잘 깨달았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은 그렇게 커 간다. 아프면서 크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늦게야 연락이 된 인재 엄마는 아들의 장난이 심해서 걱정이라며 병원에 갈 생각도 안 하신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니 한 번 가보시라고 했더니 그러겠노라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며 오히려 필자를 안심시켰다.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커서 4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지만 아직은 잘 다치는 나이이다. 아이들이 이제 2학년이 된 지 겨우 두 달째이다. 아직도 1학년 티를 다 벗지 못했다. 그러니 책을 보는 것보다는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노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학생 수가 적으니 동네에 가더라도 같이 놀아줄 동무가 없는 요즘 아이들이다. 모름지기 어렸을 때는 많이 놀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최소한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같이 놀아줄 동무도 귀하고 놀 시간도 없다. 운동장에 있는 놀이 기구를 타다가 아래로 미끄러진 가벼운 실수에도 손가락이 부을 만큼 다친 걸 보면 노는 방법이 서툴거나 잘 놀아보지 못했다는 증거다. 운동량이 부족한 아이들은 다치기도 잘한다. 잘 노는 아이가 더 창의적이고 밝으며 행복함을 느낀다고 한다. 모름지기 아이들은 행복해야 한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희망사항이다. 명예를 얻고 물질을 추구하는 것, 장수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의 도착점은 결국 ‘행복’에 있다. 해인사 기둥에는 그 ‘행복’을 단적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고 한다. 해인사에는 부처님이 설법한 모든 가르침을 고스란히 모아 목판에 새겨 놓은 팔만대장경을 봉안해 놓고 있다.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되어 국가적인 보물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재이다. 그 글자 수가 5000만 자를 넘고 권수로는 7000권에 이른다고 한다. 2500년 전에 부처님이 설법한 그 많은 가르침을 콕 집어내 단 열두 자로 요약해서 해인사 두 기둥에 새겨놓았다고 한다. 평생 읽어도 다 알지 못할 내용을 단 열두 자로 표현한 것이 바로 ‘행복(극락정토, 깨달음)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물음인 ‘원각도량하처( )’이며 그 대답은 바로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 즉, ‘행복은 당신이 딛고 서 있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바로 이 자리’라고 새겨 놓았다고 한다. 어른이건, 아이들이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특히 아이들은 놀면서 행복을 느낀다. 아이들을 가리켜 놀이의 천재라고 하지 않은가? 행복하게 같이 놀아줄 동무가 많지 않은 우리 반 아이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귀한 시골이니 집에 돌아가도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게임과 동무하는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제대로 노는 방법을 가르쳐 볼까? 학교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학원 차를 기다리는 아이, 집에까지 태워다 줄 통학차에 맞추느라 마음 편하게 놀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른들은 눈만 뜨면 ‘경제’에 몰입하고 아이들은 그저 ‘공부’하는 일에 몰입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 같은 숨 막힘으로 세상이 흐릿하다. 진정한 ‘몰입’은 즐거움을 동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중할 때 자기 존재감과 성취감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찾아 좋아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탐색해야겠다. 벌써 봄기운이 월출산을 넘어 내려오는 모양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지닌 모두 다른 품성과 소질의 싹들이 보이기 시작한 요즘, 필자는 아이들마다 깊이와 넓이가 다른 밭이랑이 필요하다는 것과 칭찬의 강도와 격려 수준도 달라야 함을 깨닫는다. 예민한 준희에게는 조심스러운 접근을, 조용한 은비에게는 봄비처럼 조용한 속삭임이 효과적이다. 아직은 거칠고 메마른 현민이에게는 엄마 같은 손길과 눈빛이 더 필요하고 의젓하고 듬직한 인재에게는 경쟁심과 적극적인 칭찬으로 확실하게 표현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샘이 많고 매사에 관심의 안테나가 주렁주렁 열린 은지에게는 뚜렷한 목적지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5명의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원하는 행복의 조건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교실이라는 획일적인 공간, 똑같은 선생님이라는 물리적 조건에서 같은 공부를 하더라도 받아들임이 각기 다르니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일상성에 매몰되어 ‘깨달음’과 ‘몰입’의 시간이 줄어든다. 오늘부터 통학차를 기다리는 동안 숙제를 다 마치고 할머니 대신 나의 확인을 받아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현민이의 밝은 표정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집에 가서는 영암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열심히 읽고 오면 된다고 했더니 대답도 크게 잘한다. 이제야 그 아이가 왜 그렇게 다른 아이들보다 습관적으로 밥을 많이 먹고 음식을 탐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는 사랑을 음식으로나마 대리만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 시간에는 해찰하고 말장난을 하며 학습 분위기를 흐려놓으면서도 음식 먹는 시간에는 몰라보게 음식에 집착하는 모습이 걱정인 아이. 부모의 사랑 대신에 먹는 즐거움에 ‘몰입’하지 않도록, 모든 욕심의 근원이 ‘식탐’임을 가르치며 자제력을 길러 줄 ‘사랑’의 마술을 날마다 익혀야겠다. 그의 허전한 공간이 진정한 행복의 조건으로 채워져서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그날까지 앞으로 달려갈 동력을 안겨줄 ‘몰입의 즐거움’이 공부하는 일이기를! 아직은 스펀지 같은 흡인력을 자랑하는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꿈꾸며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기를! --------------------------------------------------------------------------------------------- 교원들이 참여하는 독자와 함께하는 새교육은 수필, 동화 등의 문학작품, 교단일기, 교육정책 제언, 색다른 수업 등 주제의 구분 없이 모두 소개 하는 코너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새교육 이메일 sae@kfta.or.kr로 원고를 보내주십시오. 관심 있는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학교 교육과정 중의 수련활동 행사 책임자로 설악산으로 수련활동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학년부장으로 480명 정도 학생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2박 3일을 가정과 학교를 잠시 잊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설레었다. 학교장에게 신고를 마치고 버스에 오르니 학생들은 그다지 신이 난 표정들이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출발을 했는데 그 이유를 수련회 마지막 날 알게 되었다. 수련회 활동 중에 마지막 날 ‘사제 통감’코너에서 학생은 교사에게 교사는 학생에게 원하거나 서운했던 것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시간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제발 선생님 그것만은 말아 주십시오’라는 타이틀로 외치기 시작했다. 1. 선생님 제발 수업시간 꽉 채워서 수업하지 마세요. 우리가 얼마나 답답한지 아세요? 5분이나 10분 정도 여유시간을 주세요. 선생님들도 꼼짝 않고 50분 수업 들어 보세요. 몸이 얼마나 뒤틀리는지 장난이 아니에요! 2. 선생님 제발 저희가 좀 졸더라도 내버려두세요. 조금만 졸게 해주세요. 밤 12시가 넘어 잠들고 새벽 일찍 일어나서 오잖아요. 피곤해 죽겠어요! 3. 선생님들! 너무 수업내용에 치중한 나머지 재미없게 하셔서 막 졸려요. 제발 졸리게 수업하지 말아 주세요. 특히 5교시는 졸려 미칠 것 같아요. 저희들 존다고 야단치지 마시고 조금씩은 웃겨주세요. 4. 쭛쭛쭛선생님!! 매번 수업시간마다 수업 열심히 하면 10분 일찍 끝내 준다고 하셔서 정말 열심히 했는데 수업 종치잖아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학생들의 외침이 끝날 때마다 쳐대는 박수소리와 학생들의 환호성은 설악산을 삼켜버릴 정도였다. 교사들도 함께 웃고 있었지만 “그래 너희들 두고 봐라”하는 마음이었다. 이제 교사 차례가 되었다. 1. 너희들 수업시간에 조금만 잔다고? 한 시간 내내 자서 깨우면 인상 쓰고 안 일어났잖아. 제발 그러지 마라. 진짜 기분 나쁘다. 그리고 자는 학생들 그냥 두라는 말이니 선생님이? 2. 너희들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애들만 예뻐하고 차별한다고 하는데 너희들도 선생님들 차별하잖아. 예쁜 선생님 처녀 총각 샘들만 좋아하고. 나 좋아하는 사람 손들어 봐!! 너 ○○○! 내가 오라니까 도망가고 ○○○ 선생님이 부르니까 쪼르륵 달려가고. 그럼 안 되지!! 3. 선생님들이 재미있게 수업하려고 노력하는지 아니? 선생님들도 밤낮 교재 연구에, 업무에, 힘들어! 니들이 그 맛을 알아? 그리고 수업과 상관없는 질문들을 그렇게 많이 하니? 그러니까 수업 분량 못 채워서 종 칠 때까지 수업한 거지!! 교사도 까르르, 학생들도 박장대소, 이렇게 수련활동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숙소로 돌아오며 출발하는 버스에서의 학생들의 밝지 않았던 얼굴의 이유를 알게 됐다. 학교 일정상, 수련원 예약 때문으로 어쩔 수 없이 중간고사 바로 직전에 잡았던 수련활동이 학생들에게 많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교사들의 가벼운 5월에 비해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은 학교를 옮겨 그때의 학생들을 만날 수 없고, 수련활동을 함께할 수는 없지만 5월이 되면 절규하던(물론 분위기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목소리가 쟁쟁 울린다. “얘들아 미안해!”
에피소드 하나. 오랜만에 고향에 들른 친구를 만나기 위해 네 명의 고등학교 동창이 모였습니다. 10여 년째 서울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의 '서울 예찬'이 이어집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울은 환상적인 곳이야. 늘 꿈을 찾아 움직이는 삶의 격렬함이 있다고 할까. 이곳은 문화적 혜택도 떨어지잖아. 훌륭한 공연 한 번 찾아보기 쉽지 않고 원하는 물건을 구하기도 쉽지 않아. 아이들을 위한 학원도 학교도 서울에 비하면 모두 시원치 않아." 고향에서만 지낸 친구가 대답합니다. "강남역의 번잡함이 꼭 삶의 역동성을 얘기하진 않지. 예술의 전당 공연스케줄은 꿰고 있지만 얼마나 자주 이용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물건을 구매할 수도 있고 훌륭한 대치동의 학원들도 많지만 네 수입에 이를 다 충족시킬 수 있을까?" 일 년에 한 두 번은 서울에 들르는 친구가 "내가 자주 가봤는데 정말 멋진 곳이야 서울은. 가보지도 않는 네가 그곳의 삶을 얘기할 수 있어?"라며 반격하자 다시 친구가 응수합니다. "가보지 않았지만 나는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고 그 곳의 삶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내겐 서울서 귀향한 상사와 매달 보는 잡지, 방송과 전화가 있어. 물론 서울이 멋진 곳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서울 무경험자의 견해에 긍정하시나요? 서울이라는 텍스트는 그대로 있는데 그 텍스트를 경험하는(읽는) 사람마다 그 견해는 다릅니다. 텍스트의 무게에 눌려 사는 사람도 있지만 그 반대도 있습니다. 가서 살지 않았지만 서울이라는 텍스트를 능수능란하게 논의하고, 그 텍스트의 장점을 흡수할 수 있다면, 고향의 떠나지 않은 친구도 훌륭한 것 아닐까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바로 이 점을 얘기하며 출발합니다. 책을 읽지 못했다면 주눅이 들어 얼굴을 들지 못하는 독자에게는 단비(?)와도 같다고 할까요. 저자는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지만 자신이 펼쳐보지도 않은 책을 수업에서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합니다. 그러면서 '비독서'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 대충 훑어보는 경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가 모두 '비독서'에 속하지만 "그 책의 내용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그 책을 꿈꾸거나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이를 위해 폴 발레리의 대충 읽어보는 책읽기 방식이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몽테뉴의 기억력 결함 등을 제시하며 독서의 허상을 들춰냅니다. 그리고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평해야 할 의무에 가장 자주 직면하게 되는 직업, 즉 '선생'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방법(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을 들려줍니다. 그렇다면 단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일까요? 언뜻 '독서 불량자'들에게 항변의 근거만 마련해주는 듯하지만 그렇진 않습니다. 저자는 오히려 독서 행위 자체에 질식당하고 마는 수동적 독서를 벗어나 능동적 읽기를 권유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은 책들 속에 침몰당하지 않기"위한 것이며 "독서가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두려움을 갖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책이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하라고 합니다. 또 "각각의 책에 대해, 지나치게 분명한 단언들로 축소시키는 것보다는 그것이 내는 다양한 소리를 모두 받아들여 그 잠재적 가능성들을 하나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책을 깊이 탐독하되 그 책의 위치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떤 책 속으로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모든 책 속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독자인지" 자문하도록 요구합니다. 결국 저자는 "자기 자신이 창조자가 되는 것이 이 책의 귀착점"이라고 설명합니다. "모든 독자는 다른 사람의 책에 빠져 자기 자신의 세계로부터 멀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읽지 않은 책이건 읽은 책이건 책에 대해 거리를 두도록 요구"하고 "책을 꾸며낼 권리"를 가지라는 것이지요. 나아가 책의 문제를 교양의 문제로 확대합니다. "교양이라는 것은 개인의 무지와 지식의 파편화를 감추는 역할을 하는 하나의 연극"이며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만이 진실에 이를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내가 미처 갖추지 못한 교양에 진실해 지자고 하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인 것 같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읽지 않은 책'에 대해 훌륭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신가요? * 이 책의 주어진 명제와는 달리 이 책을 '읽고 말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다소 힘겨운 번역글임은 분명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방법 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소설과 영화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못 흥미롭고 생각의 틀을 확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듯합니다.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2008년 2월 29일자 한국일보에는 ‘학부모의 학년말 소망’이라는, 한국에서 자녀를 기르는 외국인 로버트 진스의 글이 게재됐다. 그는 외국인 부모로서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향상시키기 위한 제안을 했는데 그 첫째로 ‘뇌물 근절’을 들었다. 한국인 아내가 담임에 따라 선물을 주어야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 많은 걱정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교육과 같이 중요한 일에 뇌물이 끼어든다는 것이 얼마나 불경스럽고 후진적인 일인가"라며 아이들 교육을 빌미로 돈이나 선물을 바라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이런 교사들은 당연히 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오해와 뇌물 운운하는 학부모의 눈총을 받으며 꿋꿋하고 성실하게 교직을 지켜가는 많은 선생님께 경의를 표해야 함에도 교사를 둘러싼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씁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침소봉대한 면이 있지만 소수의 잘못된 행동은 많은 일반인으로부터 교육자의 윤리의식을 의심하게 하는 구실로 작용하고 있다. 교육자의 품성과 언행은 학생의 인격형성을 좌우할 뿐 아니라 사회전반의 윤리적 지표가 된다. 이미 한국교총은 몇 해 전 교육자 스스로 윤리의식을 강화하고 책무를 다하기 위한 교직윤리헌장과 실천 강령을 제정해 선포한 바 있다. 2004년 수능 부정과 교사의 답안지 조작 사건 등 비교육적 사건들이 빈발하면서 교육계 내 자정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1982년 교총이 제정한 사도헌장과 사도강령으로는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각계가 참여하는 교직윤리헌장제정기초위원회가 구성됐고 교직윤리헌장을 선포하게 된 것이었다. 이 같은 현장 제정의 의미는 그 당시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사안이다. 그렇다면 사랑과 정직과 성실에 바탕을 두어 살아가는 교육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학생과 학부모를 대하며, 교육공동체를 이루어야할지 생각해보자. 첫째, 학생의 인권과 인격을 존중하며, 개성과 가치관을 존중하여야 한다. 루소는 에밀에서 "어린이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느낀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성인의 사고방식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그들 자체를 존중해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학생은 단순히 자신으로부터 특정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다. 학생 이전에 한 인간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며 생을 예속된 존재가 아니라 나름대로 개성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성을 인정하고 이를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인정하고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교사가 학생의 인권을 존중할 때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이나 학생에 대한 신체적 폭력행위는 없어질 것이며, 이로 인해 파면 해임된 자는 영원히 교단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학생의 개성과 가치관 존중 당나라 덕종 때 학자로 유명한 한문공(韓文公)이 말하기를 “인불통고금(人不通古今)이면 마우이금거(馬牛而襟裾)니라”고 했다. 즉, 사람이 옛날에서 오늘에 이르도록 사람으로서 통하지 않으면 말이나 소에 옷을 입혀놓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면 분명히 사람이 자격이 보장되어야하는 인격(사람의 자격)을 지녀야한다는 이야기이다. 또 조선 중기의 학자 노경임은 "남이 비록 나에게 거만하게 하더라도 내가 너그럽게 대할 수 있다면 거만한 사람도 공손해지고, 남이 비록 나에게 야박하게 대하더라도 내가 너그럽게 할 수 있다면 야박한 사람도 후해지며, 남이 비록 나를 화나게 하더라도 내가 너그럽게 대하고 말을 부드럽게 한다면 반드시 감탄하여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교사로서 학생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일러주고 있다. 둘째, 학생을 차별하지 않으며 부적응아와 약자를 배려해야 할 것이다. 딥스라는 여섯 살 난 아이가 있었는데 두 살 때 이미 글을 깨우칠 만큼 영리한 아이였지만 괴팍하고 이해하기 힘든 행동 때문에 정신박약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놀이치료 전문가인 액슬린 박사는 딥스에게는 "고유한 정신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내면세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딥스의 내면세계를 그 세계에 드러나게 하는 기술을 발휘했으며 그렇게 드러난 세계를 통해서 딥스가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얻게 해주었다. 딥스는 자기 만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비극의 긴 터널을 벗어나게 되었으며 이는 딥스의 눈높이로 보며 이해하고 사랑하여 얻은 결과라고 할 것이다. 액슬린 박사의 교육결과는 딥스라는 책으로 출간되어 많은 교사들에게 학생이해를 실천하는 방법을 보여준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셋째,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으며 학생의 성적평가를 투명하고 엄정하게 처리하며 각종 기록물을 정확하게 작성해야 한다. 조선 세종 때 청백리였던 정갑손은 자신의 아들이 향시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의 실력을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이 어려서 향시에 합격할 정도가 되지 못함을 인지한 함경도 감찰사 정갑손은 아무래도 감사의 아들이라고 점수를 후하게 주어 합격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시험을 공정하게 치루지 못한 책임을 물어 아들을 합격자 명단에서 빼어버린 뒤 그 시험관의 벼슬을 빼앗고 내어 쫓았다. 자식의 좋은 학교 진학을 위해 물불가리지 않고 교사에게 청탁하였던 어느 학부모의 행태를 생각하게 하는 일화이다. 누구에게나 엄정한 원칙 가져야 금품수수, 학생 성적 조작으로 인하여 파면 해임된 자는 원칙적으로 교원으로 채용할 수 없도록 영구 축출하기로 한 교육부의 교육공무원법 개정안이 2008년 2월 19일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교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높이고 깨끗한 교직 풍토를 조성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으로 청렴도를 높일 수 있게 된 계기로 볼 수 있다. 세상에 많은 동물 중에서 오직 사람만이 걸어가야 할 인도(仁道)는 바로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의 길이다. 전남 순천에는 ‘팔마비’라는 비석이 있는데 고려시대 순천부사 최석의 청렴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당시 순천에는 부사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게 되면 백성들이 말 여덟 필을 준비하여 선물로 바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임기를 마친 최석 부사에게 백성들이 말 여덟 필을 고르라고 하자 개경까지 가는 데 한 마리면 족하다하며 한 마리만을 골라 개경에 갈 때 타고 갔다가 그 한 마리마저 순천으로 되돌려 보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마리는 우리 주민의 정성이니 다시 돌려드려야 한다고 회의를 하여 최석 부사에게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사이 말이 새끼를 낳아 두 마리가 되었다. 최석 부사가 다시 말과 망아지 모두를 돌려보내자 순천 백성들은 최석의 깨끗하고 높은 뜻을 헤아려 공덕을 기리는 비석 ‘팔마비’를 세웠다고 한다. 동물들은 깨끗하고 바른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것은 사람만이 알고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다.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것은 참으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무리 이익이 되는 일이라도 바르지 못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약용은 "청렴은 아주 큰 장사이다. 큰 욕심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게 생활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정말로 열정과 사력을 다해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교사들의 이미지가 몇몇 교사들 때문에 흐려지지 않도록, 어려운 임용고시를 거쳐 임용된 교사들이 그저 편한 직장생활을 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교직 윤리를 바로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넷째, 학부모와 지역사회를 동반자로 삼아 바람직한 공동체를 형성해야할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가득 차린 상 앞에서 긴 숟가락으로 자신만이 먹겠다고 고집하다 여위어간 지옥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한다. 서로 떠주어 남을 먹임으로 서로 도와 웃으며 음식을 주고받는 천국의 사람들처럼 서로 이해하고 협조하여 바람직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학부모와 지역사회는 동반자 교원들끼리는 존경하고 신뢰하는 교직문화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협력하는 교직문화 형성을 위해 민주적인 풍토를 만들어 가야 한다. 맹자는 "하늘이 준 기회도 지형의 이로움만 못하고 지형의 이로움도 인심의 화합만 못하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은 같이 살면서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통해야 한다. 이웃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모두가 나를 도와주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항시 남에게 존경하는 마음이 서 있어야할 것이다. 다섯째, 교육전문가로서 질 높은 수업과 자기개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쩌면 교사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라 볼 수 있다. "작은 물방울이 굳은 돌에 구멍을 뚫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처마 밑의 낙숫물도 돌을 뚫는 것처럼 자기개발이 스스로의 연찬이 어려운 일일지라도 성실하게 인내를 가지고 노력을 기울이면 충분히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공든 탑은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교육은 교육받는 자에 대한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교육의 현장인 생활 속에 더불어 있는 것이고 또한 단순히 미래의 직업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이므로 교사는 더 많은 준비와 연찬으로 학생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이다. 동학년 협의회나 교과연구회 활성화를 위한 노력, 학년 협의회 및 교과 연구회 제도 활성화 방안을 개발하여야 할 것이며, 교내 자율 장학, 연수 활성화 프로그램 개발, 신규 교사 또는 저경력 교사 전문성 신장 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으로 질 높은 수업을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사는 누구보다도 자기가 하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열심히 하여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품격 높은 교직문화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전문성있는 교원단체, 각종 연수원에서 많은 지원을 받아야 한다. 이같은 교사의 노력이 있어야만 교육전문가로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아픔이 있어야 진주가 된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품기 위해서는 많은 아픔을 견디어 내야한다고 한다. 가슴에서 욕심을 말끔히 지워야하며 자기가 애써 만든 진주를 남을 위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진주조개가 진주를 갖지 않는다면 다른 조개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진주를 갖는 아픔보다 편안한 생활을 택한다면 아름다운 진주는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 진주를 품는 아픔을 겪어낸 교사의 노력과 배려가 있을 때 학교보다는 학생이, 가르치는 사람보다는 배우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학교가 만들어 질 것이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아무 도움도 없이 우뚝 솟아 나와서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진흙물이 들지 않고 깨끗이 홀로 서서 꽃을 자랑하며 향기를 풍긴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여, 퇴임하는 날 내 안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는 느낌이 들도록 정성을 다할 때 학생들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교원이 교육열정을 되살려 학교현장에서 노력할 때 선진교육강국은 실현될 것이다.
흔히 교육의 참여자로서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를 들곤 한다. 그러나 교육의 중요한 참여자로서 교육행정가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교육행정은 교육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한 지원체제를 의미하며 교육행정은 곧 교육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육행정의 정의는 어디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교육행정의 개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교육행정의 성격이나 영역, 기능 등도 달리 규정될 수 있다. 교육행정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는 교육행정이란 교육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인적·물적 제 조건을 정비·확립하는 수단적·봉사적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교육행정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기본목표를 보다 능률적으로 달성토록 하기 위한 일련의 봉사활동이며 작용이다. 교육행정가는 이러한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교육행정가가 없으면 교육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교사들의 봉급이 제때 지불되지 않고, 학생 배정이 적절한 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냉난방이 전혀 되지 않음은 물론 교과서 조차 제때 공급되지 않는 상황에서 교육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 간혹 윤리문제와 부패를 혼용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양 개념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윤리에 어긋난 것이 바로 부패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윤리에서 어긋나는 형태 중에 일부가 부패의 모습을 취하기도 한다. 특히 교육행정가를 비롯한 공직자의 경우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의 상당부분은 바로 부패에 연결된다. 윤리는 동기에 초점을 둔다면, 부패는 결과에 더 초점을 둔다. 따라서 윤리문제를 논의할 때 교육이 보다 강조되며, 부패문제를 논의할 때는 적발과 처벌이 보다 강조된다. 그러나 양자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공직자로서 교육행정가의 윤리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부패문제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공직자로서의 교육행정가가 빠지기 쉬운 부패 문제를 간단하게 언급한 후 교육행정가에게 기대되는 윤리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공직자의 윤리와 부패문제 공직자의 윤리는 청렴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부패 없는 공직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부패(corruption)의 영어 어원은 라틴어 'cor(함께)'와 'rupt(파멸하다)'의 합성어이다.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함께 파멸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방지법(제2조)에서는 부패행위를 “공직자가 직무와 관련하여 그 지위 또는 권한을 남용하거나 법령을 위반하여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오스까르 아리아스(Oscar Arias) 코스타리카 대통령이 말했듯이 “부패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착취이며, 소외 계층에 대한 절도 행위”이다. 교육행정가의 비윤리와 부패는 곧 학생들에 대한 착취로 연결될 수 있다. 부패는 사회의 신뢰관계를 훼손한다. 사회의 신뢰관계가 훼손되면 사회자본이 붕괴되고, 국가 정통성이 상실되어 결국엔 패망하고 만다. 부유하던 필리핀을 추락시킨 것은 1986년 물러난 마르코스정권의 부패였고, 중국 국민당 멸망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관료의 부패와 상호 불신이었다. 조선 왕조 멸망의 주요 원인은 3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과 부정부패였다. 공정한 ‘경쟁의 룰’을 확립하고 지속적인 사회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패방지와 윤리의식의 확립이 필요하다. 부패방지위원회(이하 부방위)가 지난 2003년 부패에 대한 국민 여론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국민들의 65%가 ‘공무원이 부패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가장 시급히 척결되어야 할 분야는 정치(90%), 행정(30%), 공기업(21), 사법(20%), 언론(18%) 순이었다. 행정기능별로는 건축/건설(73%), 세무(58%), 법무(57%), 국방(55), 경찰(51%), 교육(45%) 순이었다. 교육이 6번째로 높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자라나는 청소년의 윤리의식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2002년 반부패국민연대가 중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부패인식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92%가 한국사회는 부패했다고 응답하였다. 설문조사의 중복 응답에서 중고생의 49%가 교육계를 부패한 집단으로 대답하였다. 중고생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7%는 ‘보는 사람이 없으면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27%의 학생들은 ‘뇌물을 써서라도 문제를 기꺼이 해결할 것’이라고 응답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학생들이 ‘감옥에서 10년을 살아도 10억원을 번다면 부정행위를 하겠다’고 응답하는 등 반부패 윤리의식이 박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장차 국가의 동량이 될 청소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직접 부딪치는 교육 분야의 부패를 방지하려는 노력이 교육적으로 얼마나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이 인식하는 부패는 학생의 의식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이러한 부패에 대한 인식은 도덕적 불감증을 낳는다. 교육 분야의 부패는 교육 그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 TI)의 부패인식지수(Corruption Perception Index: CPI) 발표에 따르면, 2005년 CPI 1위의 국가는 아이슬란드(9.7)이며, 핀란드(9.6), 뉴질랜드(9.6), 덴마크(9.5), 싱가포르(9.4), 스웨덴, 스위스, 노르웨이, 호주, 오스트리아 등이 10위권 국가이다. 우리나라는 5.0점으로 159개국 중 40위를 차지하였다. 이는 국민소득이 5000 달러 이하인 칠레(7.3, 21위)나 보츠와나(5.9, 32위)보다 뒤지는 것이며, 아시아 국가 중 싱가포르이외에 홍콩(8.3, 15위), 일본(7.3, 21위), 오만(6.3, 28위), 아랍에미리트(6.2, 30위), 카타르(5.9, 32위), 대만(5.9, 32위), 바레인(5.8, 36위), 요르단(5.7, 37), 말레이시아(39위) 등이 한국보다 청렴하다. 대체로 국가별 부패수준과 1인당 국민소득 간에는 강한 상관관계를 보인다. 2003년 132개 국가의 CPI와 1인당 GDP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CPI가 7.0 이상인 22개 국가의 1인당 GDP는 평균 31,421 달러로 나타났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나라들은 대부분 CPI 순위가 22위 이상인 나라들이었다. CPI가 5.0이상 7.0 미만인 16개 국가의 1인당 GDP는 15,029 달러로 CPI가 높은 22개국에 비하여 절반에도 못 미치고 있다. 한국이 포함된 부패지수 4.0이상 5.0 미만인 15개 국가의 1인당 GDP는 평균 5,560 달러로 제일 높은 국가들의 1인당 GDP 평균의 1/6, 두 번째로 높은 국가들의 1인당 GDP 평균의 1/3 수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부패수준은 국민소득 5,560달러 수준의 나라들과 같은 정도로서 실제 국민소득 1만4000 달러(2005년)로 세계40위, 경제규모 6050억 달러(2004년)로 세계11위인 점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임을 알 수 있다(부방위, 2005). TI는 또 뇌물성향지수(Bribe Payers Index : BPI)를 발표하였다. 이는 주요 수출국의 기업들이 신흥개도국에서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공여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지수이다. 한국은 2002년 조사에서 10점 만점(뇌물을 지불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에 3.9점을 얻어 21개국 중 18위였다. 이는 러시아, 중국, 대만 다음으로 뇌물 제공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꼽힌 것이다. TI의 부패인식지수의 산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부패수준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지난 10년 동안의 추이를 보면, 가장 깨끗한 수준이라는 10점을 기준으로 할 경우 5점을 상회한 경우는 단 한번이며, 모두 5점 이하로 나타나고 있다. 행정가가 빠지기 쉬운 비윤리 문제 교육인적자원부가 2000년 2월부터 12월까지 전국 16개 시․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 공사립학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감사에서는 전체 지적사항의 절반 이상이 시설공사(20.7%)와 예산·회계 관리(16.7%), 그리고 물품 구매(13.1%)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로 금전 거래와 관련이 있는 부분에서 감사 지적사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비윤리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반증한다. 교육행정분야 비윤리적 행동 혹은 부패의 사례는 크게 3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는데, 계약 및 물품구매, 시설공사, 인사비리가 그것이다. 첫째, 학교에서 교육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물품이 필요하다. 각종 교구와 운동기구, 문구는 물론 일상적인 소모품에서 학생들의 졸업 앨범, 구내식당 식자재의 구매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또한 이러한 물품 수요는 지속적일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숫자가 많고, 안정적인 결제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물품 공급권한은 적지 않은 이권으로 인식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비록 그 액수가 크지는 않더라도 관련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물품공급 권한을 확보하려고 하며, 이 과정에서 금품수수나 향응 등의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부방위, 2004). 둘째, 시설 예산과 관련해서는 업자가 시설예산의 확보를 위해 관련 기관에 대한 로비 자금을 지원하고, 이 자금으로 관계자에게 예산 확보를 위한 금품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획득한 예산을 집행하면서 업자와 다시 금품이 오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같은 현상은 빠르게 개선되고는 있지만, 시설예산 집행은 여전히 비윤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남아 있다(부방위, 2004). 셋째, 인사 제도는 본질적으로 인사권자의 재량이 개입될 소지가 많기 때문에 비윤리의 개연성이 높다. 아무리 제도를 개선하더라도 사람에 대한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유교문화의 전통으로 혈연, 지연, 친분관계 등을 무시하기 어렵고,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 평가결과를 수용하는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항상 비윤리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행정직의 승진, 전보, 보직 등의 인사가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보다도 금품이나 청탁과 결부되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인사 관련 비리의 최대 온상은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수직적 승진구조이며, 아울러 ‘좋은 자리’와 ‘나쁜 자리’의 차별이 심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좁은 문을 통과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유혹이 상존한다. 비윤리 극복을 위한 제안 교육행정분야의 비윤리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비윤리의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이다. 첫째, 물품구매, 각종 계약, 업체선정과 관련된 정보의 공개가 필요하다. 학교나 교육청에 물품구매계획, 업체선정계획이 사전에 공개되고, 경쟁에 의한 납품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구매 계획이 있는 물품의 수량과 품질 등을 교육청 홈페이지에 공개하여 공급업자들로 하여금 입찰토록 하며, 이러한 정보공개를 통해서 학부모와 교사들이 물품구매현황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둘째, 교육청 인사 관련 정보들이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각종 인사 관련 비리가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교육청 인사 관련 모든 정보와 절차가 내외에 공개되어야 한다. 교육청 인사위원회 위원 명단 및 선정과정, 선정기준, 교육국장 및 교육장 공모제 심사위원 명단 및 선정과정, 선정기준, 도교육청 전문직 임용시험 출제위원 명단, 도교육청 전문직 임용면접심사위원 명단, 교육전문직 임용예정 직무연수 대상자 선정과정 등이 공개되어야 할 인사 관련 정보이다. 셋째, 공직자들은 상시적으로 비윤리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위험한 근무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국가청렴위, 2005). 공무원을 유혹하는 외부 시도의 강도와 제도적 허술함의 정도, 보수수준 등은 보통의 공무원들이 개인적 양심의 힘만으로 비윤리의 위험을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사후약방문보다는 사전에 비윤리적 행동을 막는 이익충돌을 방지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익충돌의 방지는 이익충돌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비윤리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전예방적인 접근방법이다. 공무원도 사람인지라 감정이 있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이해충돌의 방지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예방적인 제도적 조치이다. 공직자는 자신이 수행하는 특정직무가 자신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거나, 자신의 친족 등이 직무관련자가 되는 경우에는 그 직무로부터 회피해야 한다. 넷째, 아무리 강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조직의 구성원들이 비윤리 문제에 둔감하고 이에 쉽게 빠져든다면, 수시로 찾아오는 비윤리의 유혹을 떨치기 어렵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접대문화가 뿌리 깊은 환경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비윤리행위와 연관될 수 있는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럴 경우에는 자신의 비윤리행위 연루 사실이 적발되더라도 쉽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들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건전한 조직문화를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즈주의 반부패독립위원회(ICAC)의 연구에 따르면 공무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부패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합리화를 시도하고 있었다(부방위, 2004). 이는 비록 다른 나라의 사례이지만, 우리와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 남들도 모두 이 정도는 한다. ○ 상대방의 동기는 친절이나 우정의 표시로서 순수한 것이었다. ○ 선물의 제공은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 선물은 우호적인 관계에 도움이 되고, 번거로운 형식을 없앨 수 있어서 능률 향상에 도움된다. ○ 선물의 제공은 문화적 관행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거절하는 것은 적개심을 조장할 뿐이다. ○ 공무원은 봉급이 적기 때문에 그 정도 성의는 받아도 무방하다. 대다수의 공직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비윤리 척결은 요원하다. 만일 누군가가 비윤리 행위로 처벌을 받게 되더라도 그는 반성보다는 그저 재수가 없어 나만 피해를 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비윤리 예방을 위한 노력에 앞서서 해야 할 중요한 작업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조직 문화를 건전하게 개량하는 것이다. 교육행정가의 윤리 확립을 위해 교육 분야의 비윤리는 규모는 작지만 국민의 체감도가 높다. 교육의 본질에 비추어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며, 사람들이 교육 분야 종사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더높은 윤리와 투명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교육행정가도 교육의 참여자로서 높은 윤리가 요구된다. 교육행정가가 지녀야 할 윤리적 기준을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제시해 본다. 첫째, 모든 결정과 행위는 교육의 일반적인 원리에 부합하고 학생들의 진로와 성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모든 전문직적 직무와 책임을 정직과 성실로서 완수한다. 셋째, 계속적인 연구와 전문직적 발전을 통해서 전문직의 효과성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고 그 기준을 유지한다. 넷째,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정책을 집행하든 그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그 정책을 통하여 이익 혹은 손실을 보게 될 학생 혹은 교사를 먼저 생각한다. 다섯째, 교육에 관련되어 있는 모든 법령과 조례, 규칙을 준수한다. 여섯째, 교육행정의 윤리적 문화와 분위기 형성에 앞장선다. 일곱째, 관련 정책이나 또는 다른 영향력을 통해 개인적 이익을 얻고자 직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여덟째, 이익 충돌 가능성이 있는 상황을 스스로 회피한다. 참고로 거창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제안하는 직업선택의 십계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이는 교육행정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잘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하는 것으로서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1. 월급이 적은 곳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광야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으로 절대 가지 않도록 하라. 6. 장래성이 전혀 없어보이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끝)로 가라. 9. 양친과 아내, 또는 약혼자나 연인이 필사코 반대하는 곳이라면 틀림없으므로 의심하지 말고 그곳으로 가라. 10. 왕관이 아닌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양날의 검인 디지털 정보 지식정보사회를 흔히 정보의 홍수시대라고 말하듯이, 사이버공간에는 수많은 정보나 지식이 생성, 유통, 공유, 관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정보들은 우리의 삶에 있어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의 사진을 찾아보는 것은 청와대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쉽게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직접 학교를 방문하지 않더라도 학교홈페이지나 메일, 문자서비스를 통해 학교활동이나 자녀의 학교생활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학교홈페이지는 학생, 학부모, 지역주민들과 학교와의 정보공유와 의사소통을 위한 새로운 창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정보화를 통해 다양한 목적에 적합한 정보를 쉽고 빠르며 저렴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사이버공간의 많은 교육정보는 때론 큰 피해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학교홈페이지를 통해 학기 초 신입생의 반 편성을 공지할 목적의 정보에 학생이나 학부모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경우도 있으며, 학교가 관리하는 학생의 개인정보들의 정보가 학원가에 유출되어 개인정보가 남용되는 사례들도 속속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다. 또한, 어느 한 학교의 교사가 저작권법 위반을 우려하여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으며, 학교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의 시험문제를 학원이나 학교인근서점 등에서 판매하는 것과 관련하여 저작권소송이 발생한 바도 있다. 특히, 수해 전 자신의 미술수업을 위해 교사부부의 알몸사진을 탑재하여 교육에 활용한 사건이나, 올해 초 특목고의 시험문제 유출사건은 교육정보 관리자로서의 윤리의식을 망각한 대표적인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대개의 학교에는 여러 종류의 서버들을 보유하고, 이를 통해 정보의 축적과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해킹, 바이러스 유포 등 보안사고가 발생할 위험도 산적해 있다. 2006년 국가사이버안전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교육기관에 대한 보안사고의 발생률이 매우 높다는 것도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식정보사회에는 무한한 교육정보가 개발되고 생성되고, 다양한 교수학습활동과 학생들의 행동발달상황을 분석하는 등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해 활용하고 있으며, 교육행정업무의 공공성, 객관성, 투명성 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또한 학교는 이들 교육정보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교육정보를 어떻게 관리하고 유통할 것이냐에 따라 교육을 질을 향상시킬 수도 있으며, 교육정보의 오․남용은 때론 다양한 법제 문제로 민․형사적 책임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으며, 심지어 생명에 위협을 받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교육정보의 개념과 관리 유형 교육정보란 개념이 사회적으로 크게 인식된 것은 아마도 2003년에 정부 정책으로 개발된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 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과 교육정보 유출을 우려한 학계, 학부모단체, 교원단체와 정부와의 많은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교육정보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리 명확하게 답변하기 어려우며, 이를 정의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교육이란 정의가 그러하듯이 교육정보를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는가 하면, 지식정보사회에는 그 만큼 많은 종류와 다양한 교육정보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교육정보는 다음과 같이 크게 3가지의 구분을 통해 정의해 볼 수 있겠다. 첫째, 학교의 학생들과 관련된 정보를 말한다. 이를 흔히 학생정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컨대, 학교생활에 필요한 학생에 대한 개인정보와 학부모에 대한 정보, 학교 교육활동에서 발생하는 성적이나 건강기록, 방과후 활동기록, 각종 수상기록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학교이나 교육행정기관 등이 교육행정업무를 수행하면서 생성․관리하는 정보들이다. 여기에는 각종 학교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는데, 예컨대, 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기자재에 대한 정보, 해당 학교의 교원에 대한 정보, 학교회계에 관한 사항 등을 포함하여, 교육행정기관 등의 법규, 인사정보, 각종 정책 정보 등을 포함하는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셋째, 학교 교수학습활동에 활용되는 각종 정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교수학습을 목적으로 개발된 각종 교육용 콘텐츠(소프트웨어, 온라인디지털콘텐츠, e-러닝콘텐츠 등)나 교수․학습자료 이외에도 교육목적에 필요한 모든 저작물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보는 학교(교사 포함)나 교육행정기관이나 직속기관에서 개발한 정보도 있을 수 있으며, 그 외의 개인이나 단체에서 개발된 정보도 있을 것이다. 한편, 교육정보를 관리한다는 것은 온라인상이든 오프라인상이든 교육정보를 개발, 유통, 공유, 축적하는 것이며, 또한 축적된 정보를 공개하거나 공시하는 경우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교육정보를 관리하는 유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교는 홈페이지를 통해 학교에서 개발한 다양한 정보를 공시하게 된다. 이 때 개발된 자료들은 학교의 규칙, 학교의 교직원에 대한 사항, 학교의 시설․설비에 관한 사항 등 학교 전반에 대한 정보와 학생들의 교수학습활동에 관한 정보, 학부모 게시판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유통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학교홈페이지에 대한 관리가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로그인을 통제함으로써 불법정보나 유해정보에 대한 유통을 근절하고 있는가 하며, 욕설이나 타인에 대한 명예훼손 등을 포함한 정보가 학교홈페이지에 탑재되거나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차단하고, 다양한 불법정보나 유해정보가 주로 메일링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는 점에서 학교 이메일링 서비스는 거의 제공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정보 공개는 학교의 의무 둘째,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을 통해 교육행정업무나 학생들의 학교활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축적․관리하는 경우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2003년 교육행정정보시스템(교육정보시스템)이 도입되었다가, 개인정보 유출 등에 대한 이해관계자들의 갈등을 통해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은 진일보 하였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갈등으로 교무, 학사, 보건 영역에 대한 교육정보시스템에 대한 보안을 한층 강화하게 되었고, 2006년 3월부터 전국 모든 학교에서 교육정보시스템을 활용하여 교육정보를 수집, 축적, 관리하고 있다. 즉, 교육정보시스템을 통해 학급을 단위로 하여 교육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경우도 있으며, 학교차원의 교육정보를 수집,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인증서를 통해 관리자 마다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의 범위 내에서 이들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되고 있고, 학교, 교육청, 교육과학기술부 차원에서 매년 교육정보에 대한 보호와 관리를 위한 각종 지침이 제정되고, 이에 근거하여 각종 교육정보의 일련의 생명주기와 단계에 따른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교육정보의 관리자는 대개 모든 교사와 직원을 포함하여, 교육행정기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셋째, 최근 교육정보와 관련하여 교육정보에 대한 정보의 공개와 공시를 학교의 의무로 규정한 바 있다. 여기에서 정보를 공개한다는 것은 국민이 학교나 교육행정기관에 특정 정보에 대한 정보의 공개를 요청한 때, 해당기관은 정보공개여부를 결정하며, 이에 따라 요구한 정보의 열람하게 하거나 복사하여 제공하는 경우를 말한다. 또한, 정보를 공시한다는 것은 국민의 요청이 있든지 여부에 상관없이, 법률이나 방침 등에 의해 공개하도록 한 정보를 일반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고시하는 것을 말한다. 전자에 대해서는 정보의 보안등급에 따라 공개 여부가 결정된다고 볼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관련 법률에 의해 정보공시의 시기, 내용, 방법 등이 결정되어 있다. 예컨대, 학교는 매년 4월에 학교 규칙 전반에 관한 사항을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공시하여야 하며, 이와 같은 사실을 해당 교육청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정보공시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관리기구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넷째, 교육정보와 관련 관리가 가장 소홀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교육정보에 대한 저작권이다. 교육정보를 생산하거나 소비하는 입장에서 타인의 저작물을 활용하게 되는데, 이들 정보의 이용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하여, 때론 막연하게 이해함으로써 잘못된 상식을 보유하게 되고 이로 인해 학생 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다양한 피해가 양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타인의 저작물을 이용함에 있어 허락을 얻어야 하는지, 이용료를 지불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어떻게 확보하고 유지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타인의 저작물을 유통하거나 저장하여 보관하는 경우에는 DRM(Digital Right Management) 등 저작물에 대한 기술적 보호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교육정보관리의 윤리 문제 여러 형태의 교육정보 관리가 자칫 소홀히 될 경우 민․형사적 문제 뿐 아니라, 관리자로서의 책임을 물어 행정적인 처벌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강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육자로서의 책임이 더욱 무겁게 작용한다고 할 것이다. 우선 교육정보에 대한 관리는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질 수 있다. 이때에는 어떤 정보가 수집되고 관리되는지 여부에 대해 사전에 정확히 파악되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정보가 정확하지 않거나 부당히 사용되는데 대해, 잘못된 정보의 정정할 것을 요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동의 없이 제3자에 의해 부당하게 이용되는 것의 유통 금지를 요청할 수 있다. 따라서 학교차원에서 교육정보를 관리함에 있어서는 정보의 최신성이나 정확성을 요해야 한다. 즉, 생성되어 관리되는 정보는 최신의 정보여야 하며, 이들 정보는 정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학생의 정보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상의 정보로서 때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육정보의 최신성과 정확성은 더욱 요구된다. 이를 위해 정보주체에게 수집, 관리하고자 하는 정보의 양과 종류에 대해서는 사전에 철저하게 알려야 하며, 제3자에게 이들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면 사전에 동의를 얻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필요한 교육정보를 수집, 관리함에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수집, 관리해야 한다. 특히, 공개되거나 공시해야 하는 정보의 경우, 학생이나 학부모의 개인정보와 관련이 있는지 사전에 꼼꼼히 검토된 후 이루어져야 하며, 개인정보인지 여부가 불분명한 경우 교육행정기관이나 관련 전문 기관에 문의하여 확인 후 공시, 혹은 공지되어야 한다. 그 외에도 방학기간 동안 홈페이지 등이 관리되지 못해 악용되는 경우에 대처해야 한다. 방학 전 학부모게시판에는 온갖 학원에 대한 정보가 난무하게 되어 학교가 특정 학원을 홍보하는 듯한 오해를 발생시키고 있으며, 방학기간동안 홈페이지나 서버 등이 적절히 관리되지 못한다면 불법정보가 유해정보가 그대로 방지하게 되거나, 해킹 등을 위한 이용도구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좋은 수업을 위해 교사들은 다양한 교육용 소프트웨어나 교육용콘텐츠, 인터넷 자료 등을 이용하게 된다. 물론 교실 수업 시 이들 자료를 활용하는데 저작권 문제는 크게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실 수업만이 교사의 직무가 아니다 보니, 그 외 교육활동에 있어서도 타인의 저작물을 사용하는 예는 다양하다. 즉, 학급이나 학교 게시판을 꾸민다거나, 교사의 연구 활동 등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다양한 학습자료를 학교홈페이지나 교사 개인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는 경우 등이다. 교실수업 이외의 활동에 있어서는 타인의 저작물을 이용함에 있어 사전에 허락을 얻는 노력이나 타인에 의해 불법복제하지 않도록 필요한 조치를 위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창작물로서 저작권에 대한 부당한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저작권심의위원회를 통해 사전에 등록하는 절차를 통해 자신의 저작물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직자 윤리의 연장선상 사회의 변화에 따라 기존의 산업사회에 비해 학교는 매우 다양한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보육활동이며, 하나는 정보활동이다. 이는 학교라는 공공서비스의 역할과 기능이 더욱 확대되고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육활동이란 수업 전․후의 보호와 교육활동, 점심급식, 방과 후 활동 등 부모의 보육기능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정보활동이란 다양한 교육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면서 동시에 정보를 공개하고 공시함으로써 맞춤형 정보제공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이는 학교의 책무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며 동시에 학교행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지식정보사회에서 정보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 해당 정보의 빠른 확산성, 무한 시공간성 등으로 인해 한 번 공개된 정보는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산업사회에 비해 정보의 유통으로 인한 파급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에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교육정보 관리자로서의 한순간의 실수나 오류로 인한 피해의 정도가 매우 막대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를 중심으로 생성되거나 수집, 관리되는 수많은 교육정보는 학교차원에서 교육정보의 수집, 관리, 유통 등에 관한 원칙을 수립하여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관리될 필요가 있으며, 교사 연수를 통해 관리자로서의 보호원칙과 윤리의식 함양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윤리는 교직자로서의 윤리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학부모의 윤리’라는 반가운 표현 어떤 사회이건 그 사회에서 빈번히 이야기의 주제가 되는 말이 있다면, 필시 그것은 그 사회 혹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일상적으로 만족스러운 수준보다는 희소하거나 희박하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윤리’라는 말은 대단히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며, ‘공직자의 윤리’, ‘교사의 윤리’, ‘전문직의 윤리’ 등 모든 직업, 모든 사람들의 윤리가 문제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는 참으로 윤리에 목마른 사회인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되기 시작한 것은 다른 교육 주체들에 비하여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교사나 교육 행정가들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그들의 역할에 대하여 윤리가 기대되고 요구되어 왔지만, 학부모들에 대하여 윤리를 기대하기 시작한 저간의 변화는 교육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지각변동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회가 어떤 사람들에게 윤리를 기대하는가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우리는 이성적 사유가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윤리를 기대하지 않는다. 동시에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력이 없을 때, 그들에게 기대되는 윤리는 최소한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 때, 그들의 행동이 결정적이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정도로 파괴력이 커질 때, 그들의 전문성이 일정한 수준 이상이 되어 자기재생산 능력을 가질 때 우리는 특정한 사람이나 사회에 대하여 보다 윤리적이 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면,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된다는 것은 학부모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럽고 번거로운 일일 수 있으나, 동시에 그만큼 학부모들이 교육현장과 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영향력이 커졌다는 것과 학부모가 명실상부한 교육현장의 주체로 여겨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부모는 더 이상 학교와 교사, 교육 행정가들에게 교육에 대한 결정권을 위임하고 그 결정에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육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고, 학부모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이제는 이러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윤리가 부재한 사회가 개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학부모들에게 윤리가 요구된다는 사실은 필자 자신 학부모로서 매우 자긍심이 느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윤리적 요구에 대하여 기꺼이 고민할 수 있는 것이며, 즐거운 마음으로 ‘학부모의 윤리’라는 짐을 질 수 있는 것이다. 학부모가 지녀야 할 윤리적 역량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커질수록 윤리에 대한 기대도 커진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능력과 윤리가 분리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윤리보다는 능력을 갖추는 것을 강조하는 참으로 근시안적인 담론이 성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능력과 윤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윤리보다 앞선 능력이 결국 누구를 이롭게 하는 일에 쓰인단 말인가? 따라서 필자는 윤리가 역량(competency)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학부모의 윤리를 논의할 것이다. 학부모는 상생과 소통, 사유의 윤리를 교육현장에 대한 참여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와 같은 학부모의 윤리적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학부모 스스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지원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1) 보편적 권리 의식을 통한 상생의 윤리 학부모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는 상생(相生)의 윤리이다. 무한경쟁주의가 주도하는 한국의 학교에서 ‘서로를 살린다’는 것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윤리는 바로 이 서로를 살림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상생’이라는 출발점 없이 윤리를 논의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상생이 왜 윤리의 출발점인가 하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공동체 속에서 태어나서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자기를 실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생존이 불가능해지면 결국은 개인 모두가 존재의 터 자체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는 항상 개인의 무한대의 자유를 규제하면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만든 약속과 규약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것이 윤리이다. 이렇기 때문에 설령 도적떼의 무리라고 하더라도(도적떼의 공동체가 지속되어야하는가 아닌가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안에서 개인이 자기만을 살리는 일에 몰두하여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조직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만다. 공동체가 와해되면 그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개인의 존립 근거 자체가 없어지며 이는 결국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도 손해가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어떠한 공동체이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동체 속에서 서로를 살려야만 하는 것이 모든 윤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보면,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내 아이에게만 향하던 관심을 학급으로, 학교로, 지역사회로, 사회 전체의 교육 문제로 확대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학부모는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이 행동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억누르게 되는가?”라는 관점에서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내가 이 책을 학급문고로 기증하는 것은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가?”, “내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는 것은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억누르게 되는 일인가?”와 같이 자신의 행동이 주게 될 긍정적 영향력과 부정적 영향력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양서를 학급문고에 기증하는 것은 모두를 살리는 일이 된다. 그러나 교사에게 촌지를 전달하는 것은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암묵적인 불신을 형성하게 만들고, 학부모들 사이의 경쟁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불안감이 팽배하도록 만든다. 결국 이로 인하여 학부모 자신과 자녀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학부모는 나의 행동이 내 자녀가 포함된 교육공동체를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를 엄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부모의 상생의 윤리는 자신의 자녀만 특권을 누리게 하려는 특권의식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의 보편적 권리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하며, 학부모의 역할은 자신의 자녀의 특권이 아닌 모든 학생들의 보편적 권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즉 나의 자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이들을 함께 키운다는 태도로 나의 자녀가 속한 교육의 현실을 개선시키는데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2) 경청과 참여를 통한 소통의 윤리 학부모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윤리는 소통의 윤리이다. 학부모는 교육현장에서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교사나 학생과는 달리 그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존재 의미가 성립되는 독특한 성격을 지닌 교육주체이다. 따라서 관계성을 통하여 존재하는 학부모에게는 소통의 윤리가 그들의 존재 이유이며, 동시에 그들이 가장 잘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관계망들 사이에서의 소통일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학부모가 관련된 교육현장의 갈등 사례가 대폭 증가하였다. 갈등이 발생한다고 해서 무조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겠지만, 이와 같이 교육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중의 대부분이 소통의 부족이나 미숙함으로부터 발생한다.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교육주체들 간에는 오해가 증폭되기 쉽고 이로 인하여 갈등이나 폭력사태까지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많다. 학부모가 교육현장에서 소통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경청과 참여의 태도가 필요하다. 학부모는 자녀를 비롯한 학생들, 교사, 다른 학부모들, 교육 행정가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여 교육현장을 중심으로 한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소통이라는 것은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생각, 감정, 정보, 자원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한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살기’를 통해 인식의 향상과 최선의 문제해결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학교나 학급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경우도 많고, 학부모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원봉사의 통로도 다양하게 열려있으며, 학교운영위원회와 같은 공식적인 기구도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학부모 역할이 한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고 자녀가 교육현장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학부모가 한 개인으로서 소통하기에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주변의 학부모들과 의견을 모으거나 학부모 단체 등을 통하여 합리적이고 제도적인 문제해결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학부모는 다양한 소통의 통로를 통하여 의사표현과 의사결정에 참여함으로써 교육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3) 맹목성을 넘어서는 사유의 윤리 이제는 학부모들의 평균적인 학력도 매우 높아지고, 학부모들이 교육에 대한 준전문가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대학입시에 관한한 학부모들은 교사들보다 훨씬 전문가인 경우가 많아서, 학부모들이 가진 ‘정보력’에 대한 신화들은 그 중심에 서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가지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력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이 가진 전문성에는 무언가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학부모들의 무서운 정보력이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보통의 학부모라면 당연히 자녀의 최선의 행복을 지향하고 있을 터인데, 그러한 목적을 찾는 과정과 방법이 목적에 부합한가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교육소설 『에밀』을 쓴 루소(J. J. Rousseau)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우리 사회의 학부모들은 너무나 ‘적극적’이다. 적극적인 것이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학부모의 계획과 바램이 주도하는 적극성은 때로 맹목성을 불러일으키기도 해서, 자녀의 행복을 구하면서도 실은 자녀의 행복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즉 자녀가 행복하게 자아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모든 적극적인 노력 이전에, 자녀를 ‘관찰’하고 자녀가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자녀의 성장가능성을 신뢰하며 자녀의 고유한 성장발달의 속도에 따라 이를 조력하는 ‘소극적 교육’(negative education)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깊은 생각이 학부모의 윤리인 까닭은, 학부모가 ‘정보력의 신화’, 무한경쟁의 논리에 파묻혀, 자녀를 ‘한줄세우기’에 바쁠 때 학부모는 학부모 역할을 가능하게 하는 본연인 부모로서의 책무를 잊게 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의 대상이 아닌 ‘존재’하는 주체이며, 부모는 ‘…하기 때문에’의 사랑이 아닌 ‘…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통하여 다음 세대의 생명을 길러내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부모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정보’에 휘둘리기보다는 자녀라는 확고한 중심점을 통하여 자녀를 관찰하고 그들의 소질을 찾아내고, 특성을 발견해 내며, 그 중심으로부터 잠재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민감성과 판단력을 갖추어야 한다. 윤리적인 학부모가 가장 힘 있는 자 참으로 공교육을 살릴 수 있고, 교육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량 있는 학부모는 바로 학부모로서의 윤리를 ‘머리-가슴-손’을 통하여 생각하고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학부모이다. 그렇지만 학부모의 윤리가 반드시 교육현장에 관련된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학부모는 그 자신이 한 인간이며, 사회의 시민이다. 따라서 학부모의 윤리는 한 인간으로서의 윤리와 시민으로서의 윤리와의 통합성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학부모 역할은 교육현장을 변화시키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를 향상시키는 일에도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변화 없이 교육이 변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학부모의 윤리에 대한 사회적 지지가 없으면 윤리적 학부모가 되는 것이 학부모의 삶을 풍요롭고 품위 있게 하는 일이 아니라, 보상도 없는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학부모의 윤리는 삶의 영역의 다양한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학부모의 윤리 뿐 아니라 모든 윤리의 본질이 그렇지만, 윤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것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잣대’가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거울’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학부모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시켜 교육현실에 참여할 수 있을 때 학부모의 윤리는 참다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발트함대, 1905년 대한-쓰시마해협에서 일본 함대를 완패시키다.” 물론 사실은 전혀 달랐다. 발트함대는 일본해군에 완패했고, 더불어 러․일전쟁도 끝났다. 그리고 대한제국도 곧 숨을 거두었다. 1905년 5월 27~29일의 진해부근 해전에서 발트함대는 전함의 3분의 2가 침몰하고 6척이 나포되는 등 문자 그대로 참패했다. 겨우 4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도주해 침몰을 면했다. 세계 최강으로 소문난 발트함대였지만 7개월의 지루한 항해로 함선도 수병도 지칠 데로 지친 상태에서 기동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데다 하늘을 찌를 듯한 상하 병사들의 사기를 자랑한 일본 함대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청일전쟁(1894~95)에서의 승리로 조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게 된 위에 랴오뚱반도와 타이완 등을 얻어 욱일승천의 기세에 들떠있던 일본은 뜻하지 않게 삼국간섭에 부딪쳤다. 독일․러시아․프랑스의 위세에 눌린 일본이 결국 1895년에 랴오뚱을 청에 반환했지만 이후 한반도는 청․일 대신에 러․일의 각축장이 되었다. 삼국간섭을 주도해 해 일본의 랴오뚱 반환을 이끌어낸 러시아는 청과 비밀협약을 맺고 시베리아철도의 남만주 통과권을 얻었다. 그리고 랴오뚱반도의 전략적 요충지 뤼순을 따련과 함께 25년간 조차하는데 성공했다. 그처럼 만주를 자국 세력권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러시아는 다시 한반도에 눈독을 들였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을 연결하기 위해 마산의 조차를 기도하는가(1900) 하면 190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와 용암포의 조차를 요구했다. 한반도와 만주를 먹기 위해 청일전쟁까지 치른 일본은, 완강히 항의해 용암포를 개항케 했을 뿐 조차하는 것은 막았으나, 새로운 장애 러시아를 제거하지 않고는 목적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발트해와 지중해 등지를 통해 대해로 나오려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줄곧 견제해온 영국과 동맹을 맺는(1902) 등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일방 러시아와의 협상에 나섰다. 1903년 10월부터 다음해 1월 6일까지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놓고 협상했지만 서로의 주장이 팽팽히 맞설 뿐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은 최종적으로 한국에서의 일본의 최우등의 이익을 인정할 것과 러시아의 특수이익을 인정하되 일본 상인의 만주진출을 허용할 것을 요구한 반면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 것과 북위 39도를 경계로 북쪽에는 러시아군이 진주하고 남쪽에는 일본군이 진주할 것을 제의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열강은 그때부터 38선이니 39선이니 하면서 한반도를 자기들 구미에 맞게 요리하려 했다.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연합함대를 편성하는 등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1904년 1월 12일에 어전회의를 열고 2월 2일까지 답을 요구하는 최종안을 러시아에 보냈다. 러시아가 회답을 보내는 대신 만주의 군대를 재편성하자 일본은 러시아와 단교한 다음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하지만 일본함대는 그 이전인 2월 8일에 이미 인천 앞 바다에서 러시아함대를 포격해 2척을 침몰시켰다(러시아는 러․일전쟁 100주년인 2004년에 제물포해전에서 포함 카레예츠호와 함께 14척의 일본함대에 포위되어 힘겹게 싸우다 자폭을 택해 장렬한 최후를 마친 순양함 바략호의 영웅적 활약을 기렸다). 8일 밤과 9일에는 아래에서 보듯이 뤼순에 숨어든 일본의 구축함이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고 뤼순을 봉쇄했다. 태평양전쟁 때 진주만을 기습공격 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후 미국에 선전포고한 것을 연상케 한다. 시베리아철도를 남만주까지 연장하는 등 만주진출을 서둘렀지만 만주 일대의 러시아 군사력은 미미했던데 비해 일본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꾸준히 군사력을 증강시켰었다. 전술했듯이 도고 헤이하치로 휘하의 일본해군은 선전포고를 발하기 전인 1904년 2월 8/9일 밤 선전포고 없이 뤼순의 러시아군을 기습공격 해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경계를 소홀히 하던 가운데 예기치 못한 일격을 받은 러시아해군은 두 달도 더 지난 4월 13일에야 공세에 나섰지만 오히려 마카로프제독이 전사하는 등 큰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한편 제물포와 남포에 상륙한 4만의 일본군은 5월 1일 신의주 부근의 전투에서 러시아군 2200명을 사살했다. 다시 5월 26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러시아의 뤼순 주둔 해군과 랴오뚱 주둔 육군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한 일본은 6월 14일과 8월 25일의 전투에서도 이겼다. 그러나 일본은 뤼순을 쉽게 함락하지는 못했다. 일본은 1주일이면 함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1904년 여름 이후 뤼순을 포위하고 수차례 값비싼 공격을 감행했으나 1905년 1월 2일에야 러시아군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러시아의 뤼순 주둔군 사령관운 3개월의 식량 외에 적절한 보급품을 약속받고 뤼순을 일본 해군에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그 2개월 후 뤼순을 탈환하고 랴오뚱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러일전쟁 중 최대의 육전인 선양회전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선양으로 후퇴해 건곤일척의 결전을 벼루든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파트킨은 1905년 2월말에서 5월초의 전투에 33만 병력을 투입했으나 27만의 일본군에 참패했다. 8만 9000의 러시아군과 7만 1000의 일본군이 전사했다. 선양회전 후 프랑스는 러시아 주재 대사를 통해 강화회의를 주선하려 했지만 러시아 황실의 결전의지가 워낙 확고해 포기했다. 여하간 만주에서의 육전에 완패한 러시아로선 발트함대가 펼칠 해전에 최후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정비하느라 여름을 보낸 발트함대는 1904년 10월에 발트해의 리에피를 떠났다. 하지만 북해에서 영국 트롤어선을 일본 어뢰정으로 오인해 침몰시켜 영국에 사죄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해야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은 수에즈운하 통과를 거부해 발트함대는 희망봉을 경유하는 긴 항로를 택해야 했다. 마다카스카르 부근을 항해하던 중 뤼순항 함락소식에 접한 사령관 Z. P. 로제스트벤스키는 회항을 건의했으나 증원군을 약속받고 항해를 계속했다. 그리고 수에즈를 경유해 달려온 증원함대와 베트남의 캄란만에서 합류한 발트함대는 7개월 여 만인 5월 27일에 대한-쓰시마해협으로 접어들었다. 발트함대의 항로를 예측할 수 없던, 그렇다고 일본 앞의 넓은 태평양 여기저기에 전선을 흩어 작전을 펼 수도 없던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는 쓰시마해협에 국운을 걸기로 하고 함대를 집결시켰다. 오랜 항해에 기진맥진한 발트함대는 그의 소원대로 블라디보스토크 행 지름길인 대한-쓰시마해협 항로를 택했고, 그곳에 포진하고 호시탐탐 발트함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전의를 불태우던 일본함대에 그처럼 완패했다. 도고는 심각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과 명량해전 등에서 왜의 수군을 연파한 이순신장군의 작전과 전략 등을 주도면밀하게 연구했다던가. 발트함대에 완승을 거둔 일본은 그러나 5월 31일 미국 대통령 D. 루스벨트에게 휴전교섭의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일본은 장기전으로 초래될 전력의 고갈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강대국 러시아와 장기전을 벌리는 것을 가능하면 피하려 했던 것이다. 거기다 러일전쟁 중 런던과 뉴욕에서 거액의 국채를 발행한 일본은 그것의 상환을 위해 새로운 외채를 발행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미국의 포츠머드에서 강화회의가 열렸지만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영토와 배상금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채 한국에서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우월권을 인정받는 외에 남만주철도와 남사할린을 얻었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어 가자 1904년 1월에 대외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울로 침입해 각종 건물을 점탈했다. 그리고 이어 무력으로 위협하여 일본이 한국의 영토와 독립을 보전해 준다는 한일의정서를 맺어(1904, 2) 한국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아울러 한국이 러시아와 맺은 일체의 조약은 폐기되었다. 일본은 1904년 8월 다시 한일협정서를 체결하고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을 외교고문으로 초빙하며 외국과의 조약체결도 일본과 협의하게 했다. 러․일전쟁은 ‘격량에 나부끼는 일엽편주’ 한반도를 국제뉴스에 자주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것 뿐 청과 러시아를 따돌린 일본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점유를 러시아 견제를 위해 바람직한 일로 보았는가 하면 미국이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고자 했다. 그 결과 맺어진 것이 1905년 7월의 테프트-가쯔라 비밀협약이었다. 영국 또한 러일전쟁 이전에 맺은 영일동맹을 개정해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을 인정했다(1905.8). 그리고 1905년 11월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지 않았는가. 주지하듯이 러․일전쟁은 조선과 일본은 물론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 니콜라이 2세는 입헌체제를 약속했지만 짜르체제의 내적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러시아정국은 결국 볼셰비키혁명으로 치달았다. 러시아의 대외정책도 크게 바뀌었다.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을 대신해 발칸반도가 러시아 대외정책의 중심자리를 차지했고, 이후 발칸반도를 둘러싼 범게르만주의 독일과 범슬라브주의 러시아의 과도한 제국주의적 대립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발트함대가 승리했더라면.” 적어도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국이 미얀마까지 진출한 영국과 인도차이나를 장악한 프랑스 사이의 완충국으로 독립을 지킬 수 있었듯이 우리 또한 혹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주권을 보전하지 않았을까? “발트함대가 승리했더라면.” 러시아는 물론 유럽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도 볼셰비키혁명도 없었을지 모른다. 일본에 패한 후 러시아가 발칸반도로 눈을 돌림으로서 발칸반도에서의 제국주의 세력 간의 충돌을 격화시켰고, 또한 러시아의 패전은 ‘비효율적 정부․상층시민의 봉건성․근대적 산업의 부재․지식층의 이데올로기적 무기력․대중의 무지 등 러시아의 후진성이 치유되지 못하는 중에 정치적 불만과 경제적 악화를 심화시켜 저항과 소요를 불러왔고 급기야 볼셰비키혁명으로 치달았기 때문이다.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패배와 일본의 승리로 끝난 이후 세계의 역사, 특히 극동과 동유럽의 역사는 그처럼 마치 예정된 길을 따라가듯이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꺾었거나 혹은 러․일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를 가정해보는 것이다.
학교사회복지는 세계적 추세 환경 속의 인간(PIE)학교사회복지란 학교를 주 활동의 장으로 하여 학생의 문제를 해결, 예방하기 위해 사회복지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 방법론을 적용하는 사회복지 실천의 한 영역을 말한다. 사회복지에서는 개인이 살아가면서 겪는 고민이나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심리적인 결함이나 병리적 현상으로 한하지 않고 가족, 또래 친구, 교사, 기타 여러 개인 및 집단과의 관계와 더 큰 사회적인 역동 속에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은 ‘환경 속의 인간(Person-in-environment : PIE)’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따라서 학생문제의 해결과 예방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상담이나 교육적 개입뿐 아니라 가정과 학교생활에 대한 종합적인 진단에 근거하여 가정 - 학교 - 지역사회의 연계 속에서 함께 풀어가야 한다고 본다. 또한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여 펼쳐나갈 수 있도록 개인의 강점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고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연계하는 것이 사회복지사의 직무이다. 그러기 위해서 학교 안에서는 교사를 기본으로 하여 지역사회의 의료계, 정신보건 전문가, 복지기관, 방과후보육(교육)기관, 법률가나 경찰, 가족지원시스템 등과 같은 전문가 및 관련기관들과 지역사회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학교를 중심(school based or school linked)으로 아동의 개별적인 욕구에 기반한 one stop full service가 지원되도록 조정하고 연계하는 역할을 한다. 궁극적으로 지금 학교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은 학교사회복지사라는 자격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교육부 사업이든 복지부나 지자체, 민간기금 사업이든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학생 복지를 위한 실천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교사회복지는 미국에서는 100년이 넘는 실천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주에 따라서 학교사회복지사가 상담사, 심리학자와 함께 팀을 이루어 학생의 인성과 복지를 담당하는 지원 체계를 구성하여 가동되고 있다. 1900년대 이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의무교육제도가 시행되면서 교육기회의 보장, 학생 인권 및 복지 지원을 통해 학교사회복지 제도가 퍼지기 시작하여 현재 서구 선진국을 비롯하여 대만, 홍콩, 일본, 몽골 등 아시아와 사회주의권 국가에서까지도 시행되고 있다. 계층의 대물림과 빈곤의 다면성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1990년대 들어서면서 교실에서 공부 못하는 말썽꾸러기를 불러 보면 외모도 왜소하거나 피부가 꺼칠하고 성적만 부족한 게 아니라 다른 재주도 없고 성격도 모나는 아이들을 많이 보게 되었다. 게다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가정형편이 가난하고 부모님은 이혼하셨거나 재혼가정이고 부모님의 교육 정도도 낮아서 가정교육도 기대하기 힘들고 친구들도 다 그만그만한 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방과 후에도 동네를 배회하며 해지기를 기다려 귀가하곤 하는 것을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가난해도 학교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학도 가고 ‘사’자 붙은 전문직도 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는 먼 옛날 이야기가 된 것이다. 반면 공부 잘하는 학생은 가정형편도 좋고 부모님도 교양있는 분들이고 여러모로 칭찬할 만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공부 못한다고, 생활태도가 바르지 못하다고 야단치고 벌주는 것은 전혀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학교는 여전히 성적으로 아이들을 판단하고 줄세우고 경쟁시키는 구조를 깨뜨리지 못하고 있고, 교사들은 그저 ‘문제 학생 뒤에는 문제부모(가정)가 있다’는 힐난조의 말만 할 뿐 정작 그런 ‘문제부모’나 ‘문제가정’이 ‘문제’를 해결하고 아이들의 삶의 여건이 개선되도록 고민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가정환경은 아이들의 성격과 태도, 성적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관점과 철학을 가진 것이 학교사회복지라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교사가 아닌 학교사회복지사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제는 피교육자인 학생을 교육하는 교육자로서가 아니라 학생의 행복을 위해 그들의 눈높이에서 학생을 만나고 이들의 가장 중요한 삶의 현장인 학교를 중심으로 학생의 복지를 위해 발로 뛰며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를 넘나드는 일꾼이며 정책의 제안자가 되었다. 아직도 “공부해라, 공부해야 잘 살 수 있다”, “이 담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니? 도대체 넌 장래에 대한 꿈도 없니?”라고 다그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공부하고 싶은 마음, 동기는 매슬로우의 욕구단계 피라미드를 적용한다면 ‘지적욕구’나 ‘자아성취의 욕구’에 속한다. 그런데 요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인 의식주와 안전,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부터 충족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외롭고 힘겹게 살아가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빈곤의 여러 얼굴이기도 하다. 이처럼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아이들은 지적욕구나 심미적 욕구, 나아가 자아성취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어렵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다. 따라서 방과 후 교실에 남아서 공부하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신체적 발달과 건강의 지원, 가정환경의 개선을 위한 자원연계, 가족기능의 회복을 위한 서비스, 정서적 지지와 애정, 풍부한 문화체험과 같은 서비스가 있어야 공부도 하고 아름다움도 알고 미래의 꿈도 갖게 될 것이다. 학교사회복지사업의 어제와 오늘 1996년 이후 우리 사회와 교육계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연일 ‘교실붕괴’라는 단어가 신문에 등장했고 공교육에 대한 불안과 불신을 낳게 하는 보도들이 TV에 고발되었다. 게다가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기업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급증하고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빈곤층은 더 가난해지고 중산층조차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이혼의 증가와 핸드폰의 보급, 인터넷과 케이블TV 등 대중매체에 대한 무한노출 등과 같은 환경변화는 아동과 청소년들의 성장환경을 어지럽혔다. 이런 가운데 학생들의 문제행동과 중퇴 등 학교부적응 현상이 증가하여 교육계뿐 아니라 상담, 복지 등 여러 분야에서 학교를 지원하여 학생문제를 해결하고 예방하기 위한 연구·시범사업들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1996년 교육부의 학교사회복지 시범사업과 1997년 서울시교육청의 사회복지사를 배치하여 운영한 생활지도시범사업이었다. 이 가운데 서울시교육청의 생활지도시범사업은 2006년까지 지역사회 여건이 열악한 학교들을 지정하여 시행하는 동안 계속 긍정적인 성과가 보고되었다. 이에 이 사업의 일반화, 제도화를 위하여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2002년 3월부터 2006년 2월까지 기획사업으로 서울, 대전, 부산에서 약 15개 학교를 협력학교로 선정하여 학교사회복지사업을 시행하였다. 한편 교육부는 연구사업이후 중단되었던 학교사회복지사업을 2004년에 다시 시작하여 전국 16개 시도 총 96개 초·중·고교에서 ‘학교폭력예방 및 교육복지증진을 위한 사회복지사활용 연구학교’를 운영하였다. 이 사업 역시 사업시행학교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제도화되지 못한 채 2007년부터는 복지부에서 사회복지사를 파견하는 형식으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또한 위스타트사업과 희망스타트사업 내 학교사회복지, 몇몇 지방자치단체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민간기금으로 지원되는 학교사회복지사업 등에서도 같은 모형으로 학교사회복지사업이 운영되고 있어 2007년 말 현재 전국 약 150여 학교에서 사회복지사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 사업의 공통적인 틀은 1개 학교에 1명의 사회복지사가 상주하면서 취약계층 학생(빈곤, 신체 및 정신적 질병과 장애, 가정 내 방임이나 학대, 다문화, 폭력 가해 및 피해, 정서심리적 문제 등으로 건강한 발달 및 학교적응에 어려움을 가진 학생들)의 발굴 하고 생태체계적 사정(assessment)을 통한 통합적 지원, 공동체적인 학교문화 형성을 위한 폭력예방교육, 자원봉사프로그램, 멘토링프로그램 운영, 지역사회 자원의 개발 및 활용, 가정 - 학교 - 지역사회를 연계한 집중서비스 관리와 같은 일들을 하고 있다. 한편 사회의 양극화와 빈곤의 대물림, 그리고 그 속에서의 교육불평등과 교육격차에 대한 문제인식이 보편화되면서 교육부는 2003년부터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지원사업(이하 교복투사업)을 시작하였다. 도시 빈곤밀집지역에 학교와 지역 기관을 연계하여 학교를 중심으로 교육, 보건, 문화, 복지서비스를 종합적으로 개발, 지원하는 체계인 교복투사업은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이제는 전국 60개 지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에서 일하는 교육청의 프로젝트 조정자와 학교의 지역사회교육전문가들 중에는 서두에 소개한 학생복지의 비전을 가지고 그동안 학교사회복지 연구·시범사업을 경험한 학교사회복지사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제도화를 논의할 시점 학교사회복지라는 분야와 학교사회복지사업의 현황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일면 많은 학교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모두가 시범사업일 뿐 체계적인 제도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몇 가지 사항을 지적, 제안하고자 한다. 1) 통합적인 사정과 개입 필요 교육은 보건, 노동, 주택과 함께 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여건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개인과 시장에만 맡기기보다는 많은 부분 사회 또는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영역으로 다루어져 왔다. 또한 교육은 산업혁명 이후 아동의 권리이자 국민적인 기본권으로 추구되어 왔으며 우리나라 헌법 및 교육기본법에서도 ‘능력과 적성에 맞는, 평생 동안의 기회 균등한’ 교육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교육은 새로운 계층 재생산의 합법적인 기제로 자리잡게 되었고 사회경제적으로 지위가 낮거나 상대적으로 소외계층에 속하는 가정배경을 가진 아동·청소년들은 발달과정과 학교생활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것이 학습부진과 문제행동, 사회적 부적응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학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전인적인 진단 평가 위에 교육, 건강, 복지 등의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서비스들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제공하고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일관된 가치와 철학, 지식과 기술로 축적된 분야가 바로 학교사회복지이다. 2) 학교중심의 서비스 체계화 한편 학교 내에는 보건교사 외에 전문상담교사가 배치되기 시작했으며 방과 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고 학교 밖에는 지역아동센터, 방과 후 공부방, 종합사회복지관, 청소년쉼터와 대안학교, 청소년수련관, 그룹홈 등 다양한 학생복지 프로그램과 시설, 기관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많은 복지적인 서비스들이 과연 꼭 필요한 아이에게 지원되고 있는지, 소외는 없는지, 모자라거나 넘치지는 않는지, 아이나 가정의 욕구와 서비스가 일치하는지, 사업 주관처들이 다른 부처이거나 관 - 민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협력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서비스 제공 후에도 더 필요한 것이나 부작용은 없는지와 같은 점들이 세밀하게 점검되고 보완되어야 한다. 또한 학령기 아동·청소년의 취학률이 90%가 넘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가장 많은 것으로 유명한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를 중심으로 학교 안팎의 여러 가지 아동·청소년 대상 복지서비스들이 체계화되며 아울러 가정에 대한 지원이 함께 연계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 내에 이러한 자원 연계조정자(resource coordinator)가 꼭 필요하다. 현재 연구·시범사업이나 스타트사업의 학교사회복지사, 교복투의 지역사회교육전문가들이 이러한 학교 안팎의 자원이 연계되는 고리 또는 다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제도적·보편적 틀 필요 현재 보건복지가족부가 지원하는 사회복지사파견사업, 지자체나 민간기금으로 운영되는 각종 기획/시범사업, 스타트사업 등에 포함된 학교사회복지사 배치학교와 교복투사업 시행학교들을 모두 합하면 거의 500개교를 육박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전국의 초·중·고교 수 1만여 개의 5%에도 못 미치는 숫자이다. 꼭 도시 빈곤층 밀집지역이 아니더라도 빈곤하거나 취약한 계층,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은 어디나 있다. 오히려 이들이 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도 하고 지역사회 내에 복지프로그램이 없어서 힘들어하기도 한다. 또,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학교사회복지 서비스를 받거나 교복투 학교에서 집중지원을 받던 학생이 졸업 후 그런 사업이 없는 학교에 진학하면서 서비스가 지속되지 못해 다시 학생의 부적응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도시빈민지역에 집중 투자하는 교복투 모델과 별도로 기본적으로 어느 학교나 자율적으로 학교사회복지사를 고용하고 학교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보편적 제도의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동안 연구·시범사업과 위스타트사업의 학교사회복지사업을 통해 교복투처럼 큰 예산을 투입하지 않더라도 학교당 연간 5000만 원 정도의 예산으로 얼마든지 학생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학교의 교육적 여건이 개선시킨 경험들이 있다. 그렇다면 단위 학교특성상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이런 사업을 운영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학생복지를 위한 학교사회복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중앙정부나 지자체가 지원하도록 하는 법적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4) 법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 대규모 전국사업인 교복투사업이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상 학생들을 만나고 가정방문을 하며 교사에게 복지서비스의 필요성과 개입계획을 설명하고 지역사회 기관들과 협의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실무자인 지역사회교육전문가에 대한 전문적 역할과 직무에 대한 규정 및 보수체계도 마련되지 못했다. 서비스의 대상인 학생과 가족들은 사회구조적이고 골 깊은 문제들로 어려워하고 있으며 그래서 지속적이고 안정된 기반에서의 개입과 지원이 필요한데 계약직의 신분에 5년차와 1년차의 보수구분이 전혀 없고, 인력의 전문성에 대한 뚜렷한 규정이 없으며 능력개발을 위한 연수도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면 이 사업의 성공은 그저 대규모의 예산지원과 산발적인 프로그램 세례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육이나 의료와 마찬가지로 학생복지 서비스도 실무책임자의 전문성이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모든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개천 새 정부의 교육과학기술부 내에 학생복지지원국이 신설되었으나 일찍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내놓은 교육복지정책안을 보면 장학금 지급 외에 교육복지정책의 내용이 거의 없는데 이것이 현 정부의 교육복지정책의 전부라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개천에서 용 나면 장학금 주겠다가 아닌가. 지금은 제 아무리 용이라도 개천에 빠지면 다시는 살아나오지 못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모든 개천의 물을 맑게 하고 용이 아닌 모든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제각각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학생복지를 지원하는 학교사회복지 제도가 하루빨리 우리나라에도 실시되기를 기대한다.
한때 장안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던 영화 가운데, ‘장군의 아들’이란 작품이 있었다.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독립군 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었던 ‘김두한’의 풍운아적인 젊음과 의협의 이야기를 얼마간은 허구적 픽션을 가미하여 만든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었던 억압과 울분을 배경으로, 종로 일대 일본 경찰의 끄나풀 패거리들을 김두한의 주먹이 통쾌하게 짓누르는 이야기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만했다. 범상한 사람들이 감히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주먹의 힘과, 불의를 용서하지 못하는 의협심, 그리고 따르는 무리들을 인간적으로 감동시키는 특유의 카리스마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장군의 아들에 매료된다. 게다가 사랑 앞에서는 한없는 순정의 화신이 되는 멜로의 요소까지 흠뻑 곁들였으니 이런 캐릭터가 대중의 우상이 아니 될 수 없다. 사람들은 과연 장군의 아들답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김두한은 해방 이후에도 ‘장군의 아들’로서 대중적 프리미엄을 누렸고, 이러한 인기를 정치적으로 반영하여, 그는 한때 국회의원의 자리에 나아가기도 하였다. 이 세상에는 실제로 많은 장군들이 있다. 현실적으로 군인은 계급장에 별을 달면 장군으로 칭함을 받는다. 준장에서 대장에 이르는 계급이 모두 장군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현직 장군만도 수백 명에 이르고, 장군 경력을 가졌던 사람까지 치면 이 세상에는 실제로 많은 장군이 있다. 그리고 그 장군의 집마다 ‘장군의 아들’이 있을 것이다. 장군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장군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어떤 정체성을 형성해 가며 살아갈까. 영화 ‘장군의 아들’처럼, 빼앗긴 시대와 민족을 되찾기 위해 어떤 반역의 무리와도 싸움을 수행해야 할 것 같은 의식을 가질까. 은연중에 장군인 아버지가 가졌던 명예와 훌륭한 리더십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내면의 심리를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장군의 아들들에게도, 그 장군 아버지로 인한 고충이 있을 수도 있다. 아버지만한 장군감이 되지 못하여 열등의식에 노출될 수도 있고, 장군 가문의 체통을 살려야 한다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을 수도 있다. 장군의 아들들이 평범한 병사로 군대에 가서 지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은 그런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일 수도 있다. 이번엔 ‘광부의 아들’들을 이야기해 보자. 1980년대 초 강원도 사북 탄광촌 아이들을 따뜻한 정성으로 가르쳤던 고 임길택 선생의 이야기가 근자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은 아마도 KBS가 매우 공들여 제작한 2007년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 ‘길택씨의 아이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고 코끝이 찡한 감동을 몇 번이고 느꼈다. 컴퓨터도 없던 시절, 그가 직접 써서 등사지로 밀어서 만든 그 시절의 학급문집들의 외양은 지극히 조촐하다. 그러나 그 사연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면, 목이 메고 마음을 울리는 대목들이 많다. ‘길택씨의 아이들’ 프로그램 기획 PD는 27년 전, 그 때 그 학급문집에 글을 썼던 임길택 선생의 아이들을, 지금은 모두 마흔이 다 된 그 아이들을 하나하나 모두 다시 찾아가면서, 그때 그 시절 광부의 아이들로서 살았던 삶과 꿈을 지금의 자리에서 의미화 하도록 만든다. 아무튼 나는 ‘길택씨의 아이들’을 보면서 광부 아버지들과 그 광부의 아들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이들의 글에서 아버지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길택씨의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은 대체로 ‘광부의 아들’들이다. 광부의 아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동어반복으로 강조하자면, 그들은 광부이다. 인생의 막장이라 할 수 있는 석탄 광산의 막장까지 오게 된,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는 광부이다. 아이들의 글에서 등장하는 광부 아버지들은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몸이 늘 아프거나, 술에 취해 있거나, 화투장을 들고 노름을 하거나, 긴 한숨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엄마와 심하게 싸움을 하는 그런 아버지들이다. 아니 또 있다. 술만 먹으면 하는 말, 이 아비처럼 되지 말라는 체념조의 당부를 하는 아버지. 광부의 아이들은 무수히 자기 다짐을 하며 자랄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 같은 광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의 사회적 정체를 존중할 수 없는 아이들이 마음에 가지는 응어리는 ‘아버지 넘어서기’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인자가 된다. 그 응어리가 곧 아이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일단이 되는 것이다. 장년이 다 되어 그 시절을 술회하는, 그 옛날 ‘길택씨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의 현실, 아버지의 삶을 넘어서기를 추구하면서 살아 왔음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절망의 끝자리에서 희망이 싹을 피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버지의 절망을 매우 솔직하게 보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새로운 가능성은 물론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나를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길택씨의 아이들’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삶을 증언하는, 불혹에 가까운 광부의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를 사랑으로 승인한다. 아버지를 극복하여 마침내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아이들이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출세를 했건, 그렇지 못하건 이들은 모두 자신이 ‘광부의 아들’임을 의미 있게 승인한다. 그것이 증거이다. 어린 아들들에게 비쳐진 아버지 광부들의 모습은 조금도 숨김이 없다. 아니 숨김을 아들에게 연출해 보일 최소한의 돈도 시간도 공간도 없었으리라.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바깥으로 연출해 보이는 아버지와, 안에서 꾸밈없는 실체로 가지고 있는 아버지 사이에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즉, 가면으로서의 자아[페르소나 persona]와 자신의 인격적 실체 사이에 달리 틈이 없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여주는 아버지가 더없이 솔직하기는 하나, 자랑스러울 것이 없는, 아니 오히려 보여주기 싫은 것까지도 속절없이 보여 주어야 하는 이 당혹함의 현실을 잔뜩 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심한 곤궁과 심리적 열등과 사회적 약자의 위상에서 광부 아버지는 노상 울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들에게 사회적 문화적 자아가 고상하게 형성되지는 못한다. 아들들 또한 출세한 아버지의 아름답고 멋있는 허세들을 한번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자아를 연출하는 데 솔직하였다는 것은, 달리 보여 줄 것이 없었다는 말과 다름없으니 서글프기는 매양 한 가지이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고,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는 아버지라는 것까지도 철 이른 나이에 볼 수 있었던 광부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버지에 대해서 어찌 달리 접근할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 ‘선생의 아들’은 ‘장군의 아들’에 기울지도 않고, ‘광부의 아들’에는 더욱 기울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이 두 아들 유형의 틈바구니에서 뚜렷한 자기 모델을 구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오늘날 선생의 아들들에게는 선생인 아버지의 긍정적 정체성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퍼스내리티를 의미 있게 강화하는 데에 아버지의 선생 역할이 크게 도움이 되지를 않는 것 같다. 그렇다고 광부의 아들처럼 아버지의 정체성을 핍진한 현실 속에서 아프게 경험하며, 아버지의 실존적 정체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것 같다. 전통사회의 잔영이 남아 있던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선생의 아들은 그 역할을 하느라고 고생을 한 셈이다. 작은 실수라도 선생의 아들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증폭되어 돌아왔고, 아들 스스로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자식이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는 자기 견제의 끈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라고 일일이 아비가 일러주지 않아도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자세를 취하면서 생활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문화이었다 할 수 있다. 선생을 인식하는 문화의 힘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는 선생의 익명성을 주변이 허용해 주지 않으려던 때이었다. 이런 부담은 ‘선생의 아들’이 아닌 ‘아비 된 선생’도 마찬가지이었다. 아들이 잘못하면 자기 자식 하나 제대로 못 가르치는 사람이 무슨 학교 선생이냐는 힐문이 금방 따른다. 도덕적 연좌의 묶임에서 ‘선생의 아들’과 ‘아비 된 선생’은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이다. 이제 익명성이 넘실거리는 자유로운 개성과 열린 소통의 시대에는 이런 부담이 사라졌는가. 내가 선생으로 살아도 대중사회의 흐름에 묻히면 내가 선생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교조적 규범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나를 안으로 규제하는 규찰의 내적 코드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영락없는 선생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세상이 바뀌었어도 선생의 본질은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아무리 곤궁하고 열등해도 인생 막장에 다다른 사람처럼 자아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장군 같은 기개와 이상으로 자아를 추스르며, 가르치는 제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들들이 그것을 위선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별히 아들에 대해서는 바깥에서 선생으로 비쳐지는 것이나, 안에서 아비로 보여지는 것 사이에 되도록이면 인식의 틈새가 없으면 좋겠다. 이렇게만 된다면 선생으로서 행복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나는 선생의 아들이다. 내 아버지 또한 선생의 아들이셨다. 나는 평생 시골 학교 선생이었던 아버지의 진솔한 실체를 가난 속에서 많이 보았고, 지역사회에 비추어지는 아버지의 공동체적 역할, 즉 아버지의 ‘명분적인 자아’도 보았다. 별다른 인식의 괴리가 없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려서는 늘 아버지의 편이 되어서 세상을 바라보았고, 내가 선생의 길로 들어서면서는 아버지를 존경할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만한 선생이 못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시대 선생의 길과 지금 시대 선생의 길은 달라지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아들은 선생인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이 ‘선생의 아들’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