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6,894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초ㆍ중ㆍ고등학교 학생들의 학업성취도 평가 결과 영어 과목에서 대도시와 읍면 지역 간 학업수준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인적자원부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해 지난해 10월19~20일 실시한 2005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결과를 28일 발표했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는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학생들이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 매년 실시하는 시험으로 국어, 사회, 수학, 과학, 영어 등 5개 교과로 치러진다. 2005년 시험은 전국 초등학교 6학년의 1%, 중학교 3학년의 1%, 고등학교 1학년의 3% 등 총 3만1천340명(748개교)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우수학력, 보통학력, 기초학력, 기초미달로 구분했다. 평가결과 전체적으로 대도시 지역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읍면 지역 학생들보다 높게 나타난 가운데 특히 영어 과목에서 대도시와 읍면 지역 학생 간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초등 6학년의 영어 우수학력자 비율이 대도시는 64.7%, 읍면은 47.6%로 대도시가 훨씬 높았고, 반대로 기초학력 및 기초미달자 비율은 대도시 18.1%, 읍면 30.0%로 읍면이 훨씬 높았다. 중학 3학년의 영어 우수학력자 비율은 대도시 22.1%, 읍면 10.3%, 고교 1학년의 영어 우수학력자 비율은 대도시 14.7%, 읍면 9.2%였다. 영어 평균점수 역시 초등 6학년의 경우 대도시 166.86점, 읍면 162.63점, 중3의 경우 대도시 261.73점, 읍면 259.04점, 고1의 경우 대도시 362.57점, 읍면 358.70점으로 특히 초등학생의 영어성적이 도시와 농촌지역 간에 차이가 컸다. 교과별 평균점수는 전년도에 비해 전체적으로 약간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 6학년의 경우 사회, 과학, 영어점수가 전년보다 0.12~2.89점, 중학교 3학년은 국어, 수학, 과학점수가 전년보다 0.55~1.21점, 고등학교 1학년의 경우 국어, 수학, 과학, 영어점수가 전년보다 1.05~2.5점(사회는 전년과 동일)씩 올랐다. 학년ㆍ교과별 우수학력자 비율 역시 전체적으로 전년보다 약간 증가하고 기초학력 미달자 비율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 보면 남학생은 주로 사회, 수학, 과학에서 우수학력자 비율이 높았고 여학생은 국어와 영어 과목에서 우수학력자 비율이 높았다. 기초학력 미달자의 경우 초6, 중3, 고1의 모든 교과에서 남학생 비율이 여학생보다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광주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학력이 인정되는 평생교육시설이 들어선다. 광주시교육청은 28일 "일반 고등학교 학력이 인정되는 2년제 평생교육시설인 광주 대신고등학교를 인가했다"고 밝혔다. 대신고등학교는 내년 3월 서구 매월동에 개교 예정으로 주.야간 11학급에 550명을 모집한다. 1년 3학기로 운영되는 교육 과정은 국어와 영어, 수학, 과학, 한문, 사회, 컴퓨터 중심의 정보화 교육, 영어연극부, 제2외국어, 특별활동 등 다양하다. 졸업후에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며 국민기초생활수급자와 저소득가정 및 농어촌 가정 자녀 등에게는 학비지원과 함께 장학금 혜택도 주어진다. 원서접수는 내년 1월 2일부터 2월 28일까지이며, 자세한 사항은 대신고등학교 행정실(☏062-376-8400)로 문의하면 된다. 학교 관계자는 "그동안 시간적, 경제적 어려움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과 청소년들을 위한 평생교육시설로 성장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우리학교 교문 왼편에는 약 백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다. 지난 봄 부임당시 나뭇가지를 많이 잘라내어 덩그러니 서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은행나무가 고사(枯死)되어가는 증상이 나타나자 동문회에서는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한 성금을 모아 나무병원에 의뢰하여 치료를 했다고 한다. 나무가 병든 원인은 교문담장을 만들기 위해 시멘트 콘크리트로 기초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나무뿌리에서 맑은 물과 영양분을 빨아들여야 나무가 잘 자랄 텐데 시멘트의 독성이 뿌리를 상하게 하여 뿌리를 살리는 치료를 하고 영양제도 놓았으며 가지치기도 했다. 여름방학에는 시멘트담장을 헐고 콘크리트 기초를 캐내어 새로운 흙을 넣고 자연석을 쌓아 교문을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으로 은행나무는 녹색의 잎이 살아나오고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큰 나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 그중에서도 작은 실뿌리가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여 공급해주어야만 싱싱한 잎이 나오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법이다. 우리 교육이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려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실뿌리를 잘 관리해야 한다. 그러면 실뿌리는 무엇일까. 태어나서 세살까지 교육이 이에 해당 될 것이고 가정교육과 기초교육이 뿌리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교육현실은 땅속에 보이지 않는 뿌리는 무시한 채 가시적인 꽃과 열매만 따려고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모습에 비유된다.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에, 역사교육보다는 컴퓨터교육에, 국어교육보다는 영어교육에 인생을 걸고 외국유학과 어학연수를 보내며 아이들을 과열경쟁 속으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씨앗은 작다. 그러나 작은 씨앗을 잘 관리하여 튼실한 싹을 틔워야 성장이 잘되고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세 살까지의 가정교육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이 분야에 대한 교육은 너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초교육인 유아교육과 초등교육을 소홀히 생각하여 뒷전으로 밀어놓아서는 안 된다. 그 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을 고쳐보겠다며 수많은 교육공약을 내세워 강력한 개혁을 추진해 왔으나 우리교육이 건강하게 발전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도 비전문가가 교육개혁을 하려했으니 교육이 지치고 시들어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한건주의에 빠져 기초 교육보다는 고등교육에 치중하였고, 교육일선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의 사기를 북돋워주기 보다는 개혁의 대상으로 삼아 스승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으며, 너무 많은 간섭을 하여 학교현장은 불안정하게 흔들려 공교육은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교육을 고치려면 현장의 소리를 수용하여 학교현장이 신바람이 나도록 교사의 사기를 올려주는 ‘치료’를 해야만 교육의 실뿌리는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고 아름다운 꽃과 알찬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 꼭 알아 두어야 할 세가지 어원 우리나라를 외국에서는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코리아, 꼬레, 꼬레아’등 그 나라의 언어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영어권에서는‘코리아’라고 하지요. 이것은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다시피‘고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고려’라고만 부르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아’가 붙은 것이지요. 그러니까 ‘코리아’는 ‘고려 + 아’가 연결되어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Korea’가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 즉 ‘a’는 무엇일까요? 외국의 지명에는 끝에 ‘a’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America, Canada, China, 오스트리아, 오스트랄리아, 기니아’등 찾아보면 무척 많습니다. 이‘a’는 영어에서 지명을 표시하는 접미사입니다.‘코리아’는‘고려’에‘a’가 붙은 것이고‘China’는‘진’나라(진시황의)의‘진’에‘a’가 붙은 것입니다. 애국가의 가사 2절 중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 일세"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이 중에 `바람서리`를 간혹 `바람소리`로 잘못 알고 계신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람서리`입니다. 그 뜻은 `풍상`이란 뜻입니다. 즉 `바람 풍, 서리 상`이지요. 즉 `풍상에 불변함은`이란 것인데, 조사인 `-에`가 생략되었습니다. 애국가 중의 또 한 가지 `남산`의 의미를 모르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어느 고장을 가나 `남산`은 있습니다. 서울의 남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알고 계신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남`은 한자로 지금은 `남쪽`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 `남`은 `앞 남`이었습니다. 즉 `남산`은 `앞산`이란 의미입니다. `앞에 있는 산`이 곧 `남산`입니다. 그리고 `북`은 `뒤 북`이었었습니다. 그래서 `북망산`에 간다는 것은 `뒷산`의 묘지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학교마저 방학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요즘 아이들은 방학을 해도 바쁘다. 학원 순례를 하느라 쉴 틈이 없는 아이들도 많다. 이래저래 바쁜 아이들에게는 방학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잠잔다.’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다. 학교 교육을 잘못 이해하는 학부모나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교육마저 학원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다. 교육 정상화를 위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방과후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아직 정착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일부이지만 성공적인 사례들도 발표되고 있다. 방학을 했는데도 학교에 아이들이 많다. 문화원 후원으로 학교에서 열리고 있는 도의교실에 참여한 아이들이다. 추운 날 도의교육을 받겠다고 학교에 올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걱정했던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눈망울을 반짝이며 ‘사자성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도의교육을 받겠다고 학교에 온 아이들이 기특하다. 인성교육을 시키겠다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학부모님들이 존경스럽다. 앞으로도 이렇게 학교를 믿어주는 학부모님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본다. 방학 중에 열리고 있는 프로그램이 도의교실만 있는 게 아니다. 창의미술, 공부방, 아카데미영어, 순회영어, 영어교실도 열린다. 인근에 위치한 항공기술원에서는 무료로 컴퓨터강의를 지원한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도서관도 개방된다. 자모님들이 방학 내내 도서도우미를 자청하셨다.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방학숙제도 도와주는 자모님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평범한 행동에서, 사소한 일에서, 우리 주변에서 찾아봐야한다. 오늘 나는 학교에서 아름다운 모습들만 봤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흐뭇해하는 게 바로 행복이다.
2005.1.5. 밤 7시 25분 캘커타의 외국인 거리라는 Sudder st.는 외국인들로 붐빈다. 싼 숙소가 몰려 있는 곳인데도 관광철이라 그런지 방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25루피에 겨우 방을 구해 목욕을 하고 일기를 쓴다. 초라한 호텔방이지만 낯익은 느낌이다. 1996년 미국 여행 때 느끼는 것과는 달리 왜 이렇게 낯설지 않고 편안한가. 별로 긴장감이 들지 않는다. 너무나 흔한 가난의 모습, 내게 너무 익숙한 가난의 모습이어서 그럴까. 파크 스트리트에서 만난 자항기르라고 하는 젊은이가 자꾸 영어로 말을 붙여오기에 대꾸를 하다 보니 이젠 내 관광안내원으로 나서려는 것 같다. 캘커타의 뉴 마켓을 구석구석 보여주기도 하고 극장에 가자고 안내하여 그의 친구와 함께 셋이 인도영화를 관람하기도 했다. 1.2층으로 된 대형 영화관이다. 표를 내고 들어가니 안내인이 손전등을 들고 일일이 자리를 안내해 준다. 이상한 것은 1층과 2층으로 좌석이 구분되는 데 앞줄부터 순서대로 열을 맞춰 앉히는 것이다. 인도의 극장엔 카스트제도가 있다는 인도 관광 안내서의 구절이 생각났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젊은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핸드폰을 가지고 오락을 하거나 문자를 띄우거나 한다. 길거리에 가난이 넘쳐나는 인도이지만 여지없이 현대문명의 산물들은 인도의 중심부를 파고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6,70년대의 한국 영화와 유사한 순정물인 것 같았다. 멋지게 생긴 미남 미녀 배우가 3각관계로 날카로운 대립을 보여주는 애정과 스릴러물의 종합편이라고 할까. 그런데 장면 장면에서 신나는 노래와 율동이 어우러져 마치 뮤지컬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 영화와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영화가 끝나자 성인영화관을 또 가자며 손가락으로 성행위 모습을 흉내 내며 깔깔대기도 한다. 아마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저녁에 헤어지며 내일 또 만나자고 한다. 저 아이가 따라다니는 것이 도움도 되고 여러모로 유익한 점도 있지만 예산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Mother House에서는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열심히 봉사를 하고 노점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아우성이다. 택시기사는 손님을 끄기 위해 눈만 마주치면 손짓이다. 릭샤꾼도 마찬가지. New York의 yellow cab처럼 택시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노란색이다. 노점식당의 메뉴에 서툰 글씨로 ‘김치 볶음밥’이라고 쓰여 있어서 입맛이 없던 차에 호기심 반 시장기 반으로 들어가 시켰더니 날아갈듯 끊기 없는 밥에 마른 배추를 조금 송송 쓸어 넣고 양념을 넣고 볶았는데 조금 김치냄새가 나는 듯 했지만 우리 김치 맛은 아니다. 집에서 가져간 볶은 고추장을 듬뿍 넣고 다시 비비니 제법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값은 12루피 . 우리 돈 300원 정도이니 그 가격엔 푸짐한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걷는데 한글 간판도 있는 인터넷 카페가 있어서 혹시 이메일을 보낼 수 있을까 해서 들어갔더니 한국의 한 학생이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다. 주인과 내가 한글 이메일 가능 문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도와드릴까요?”하면서 말을 건네 왔다. 그가 한글 화면을 띄워주긴 했지만 자판에 한글이 없어서 메일을 보낼 수가 없었다. 자판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아무런 지장 없이 메일을 주고받을 수 있다. 그는 한 달 동안 Mother House에 봉사하러 왔다고 했다. 캘커타의 낡은 건물들을 이해하려면 캘커타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웅장한 건물들이 많은 걸로 보아서 한때는 영화에 빛났던 도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건물들이 한결같이 낡아 슬럼가처럼 되어있는 걸 보면 오랫동안 침체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2005.1.6 목 요란한 까마귀 소리와 함께 캘커타에서의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깔리사원과 그 옆의 임종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Zoological Garden(동물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자항기르와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 나를 돈 많은 관광객으로 알고서 다른 욕심이 들지 않도록 경계해야겠다. 어쩌면 제 친구를 데리고 나올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할 때는 냉정해야 한다. 자항기르만을 데리고 가도록 하자. 경비를 내가 물어야 하니까. 숙소는 어떻게 할까. 오늘 또 오면 300루피에 해주겠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짐을 싸들고 아침 8시 쯤 식사를 하기 위해서 호텔을 나섰는데 자항기르가 옆에서 Hello하고 다가선다. 나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순전히 외국관광객에 대한 호의와 호기심에서 나를 반기는 줄로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Breakfast, Lunch, Dinner라는 안내 표시가 있는 식당으로 금방 안내했다. 나는 rice(쌀)와 egg(달걀)를 함께 볶은 것을 자항기르는 vegetable(야채)로 만든 요리를 시켰다. 60루피였다. 1500원 돈으로 두 사람의 식사를 해결한 것이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깔리사원으로 향했다. 지하철 요금은 4루피. 플래트홈에서 디카를 꺼내어 사진을 찍으려는데 한 승객이 다가오더니 손사래를 쳤다. 여기는 시진촬영 금지구역이라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알았다고 하면서 사진기를 집어넣었다. 힌두교 사원인 깔리사원에서 우리는 한 젊은이의 안내를 받아 여러 가지 기도의식을 행하였는데 가족의 축복을 위한 것이라며 큰돈을 요구해서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자항기르가 선뜻 3,000루피를 선뜻 내고 가족의 이름을 적어내며 기도하지 않는가. 나오려는데 어떤 젊은이가 또 flower(꽃)값이라며 80루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손바닥 만한 노란 금송아 꽃을 들고 기도를 하고 시바신상의 목에 그 꽃을 걸어주는 등 여러 의식을 진지하게 안내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조그만 수첩에 빼곡히 적힌 donate(헌금) 명부를 보여준다. 거기엔 한국인의 이름도 꽤 있었는데 1,000루피, 2,000루피 로 액수가 큰데 놀랐지만 그들의 행동이 너무 진지하고 천연덕스러워 나도 1,000루피를 헌금했는데 이 부분도 인도 여행 중 내가 바가지를 쓴 사례중에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 없다. 깔리사원을 보고 나오는데 입구에 구걸하는 노인들과 어린이들로 바글거린다. 사원안쪽 마루엔 브라만 계급의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그 브라만의 자세에서 읽을 수 있었다. 사원을 나와 여러 가지 제구를 파는 가게가 늘어선 골목을 걷다보니 조그만 강의 지류가 있었다. 캘커타 시내를 가로지르는 후글리강의 지류인 듯싶은데 역시 이 강도 신성시되고 있는 것 같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시궁창 물이었는데 이곳에서도 종교의식으로 얼굴을 씻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깔리 사원 안쪽에도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이 물 역시 성스러운 강물을 끌어드린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몸을 담그고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깔리사원에 들어갈 때는 양말과 신발을 모두 벗고 맨발로 들어갔으며 축복의 의미로 콧등과 이마에 빨간 점을 찍어주기도 한다. 내가 자항기르에게 물었다. “너는 부자냐? 너는 많은 헌금을 하지 않았느냐?” 하니까 “아버지가 보내주어서 한 것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기 때문에 헌금한다.”고 하며 태연하게 얘기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가 낸 3,000루피가 종교의식이 일반화된 인도인들의 일상생활 방식인지 속임수를 써서 관광객들로 하여금 헌금을 많이 하게하고 나중에 제 몫을 챙기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2005.1.7. 금 호텔을 옮겨 200루피에 묵고 아침 7시 30분 쯤 눈을 떴다. 자항기르가 이제 나의 관광가이들 나서고 싶은 눈치다.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 어떤 미국인은 매일 20$씩을 주었고 어떤 독일인은 매일 7달라씩 주었다는 등, 또 일본사람을 들먹이기도 했다. 공연히 여자 얘기 섹스 얘기도 들먹이며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는 것도 같았다. 바라나시에서는 하루에 1,000루피씩 주기도 했다는 얘기를 노골적으로 하는 것이다. 어제 그저께 계속 안내를 했다는 얘기로 생색을 내며 오늘은 돈을 주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맞긴 맞는 얘기다. 한국이나 미국이라면 하루에 20달라 아니라 50달라라도 주어야 했을 것이다. 20달라래야 20.000정도 아닌가. 1,000루피래야 26,000원이 아닌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음을 알면서도 내 예산을 감안하면 그것은 터무니 없는 비용이다. 이제 결론은 났다. 그냥 식사와 교통비, 입장료만 제공하고 함께 지내보려고 했었는데 예산상의 부담으로 안되겠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그의 친절이 고맙고 그의 영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유창해서 여러모로 좋은 점이 있지만 경비문제 때문에 오늘은 그에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약속한 대로 오전 8시 30분 쯤에 그가 왔다. 만나 얼마 안되었는데 오늘은 돈을 주어야 한다고 미리부터 다짐을 받으려 한다. 그의 의도가 이제 확연해졌다. 나는 조금뿐이 줄 수 없다. 나는 여행자이고 돈이 떨어지면 큰 문제다. 나는 당신에게 안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자기는 friendly guide(우정의 안내)를 하는 거란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라면서 최소한의 수고비를 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내 예산이 40만 원인데 하루에 그에게 10,000원씩만 더 써도 상당한 비용인 것이다. 외국에 나가니까 그 나라의 물가에 맞춰지게 되는 것 같다. 제 말로 friendly guide라고 하지만 그는 직업삼아 가이드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외국의 사정을 잘 알고 당신네 나라에서 돈을 쓰듯이 인도에서도 좀 돈을 쓰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깔리사원에서 그가 3,000루피를 선뜻 냈을 때 나보고도 따라서 하라는 것 같아서 지금도 약간 불쾌하다. 혹시 만에 하나 그들끼리 짜고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1,000루피래야 26,000원이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돈을 내고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3,000루피를냈는데 그것은 80,000만원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정도면 인도의 보통 시민에게는 엄청나게 큰돈이다. 아무리 부모가 잘 살고 부모가 주었다고 했지만 또 그들의 신과 헌금에 대한 관례를 이해한다 해도 그들 형편엔 큰 돈임에 틀림없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 몰라 망설여 지기만 했다. 그의 경쾌한 성격과 상당히 유창한 영어, 또 캘커타 지리에 밝은 점은 좋은 데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타려하는 등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입장료, 음료수, 식사 모두 2중 부담인 것이다. 일단 Victoria Mrmorial(빅토리아 기념관)으로 가기로 하고 Sudder St,에서 걸어서 20여분 가니 넓은 정원이 나온다. Victoria Garden이다. 예전 여의도 광장보다도 더 넓은 광장에 잔디가 깔려 있고 초중고 학생들이 제식훈련, 크리켓 운동 등을 하고 있다. 여기저기 양떼들이 풀을 뜯기도 했다. 나는 공원을 거닐다가 말문을 열었다. 혼자 여행하고 싶다고 했다.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도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눈치다. 그의 태도에도 분명한 데가 있다. 우리는 몇 마디 대화를 주고 받고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혜어졌다. 그 동안 수고비로 100루피를 주겠다 하니 200루피를 달란다. 안된다. 나는 예산이 짜여져 있다며 거절하고 100루피만 주었다. 100루피면 하루 숙박비 아닌가. 그는 다시 기분이 좋으냐 안좋으냐 확인까지 하고 자가 사진은 꼭 붙여달라며 주소가 적힌 명함을 주었다. 그리고 바라나시에 가면 자기 아버지가 하는 Guest House로 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서운했는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오던길을 되돌아 갔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디지털 카메라로 그의 뒷모습을 담기도 했다. 이렇게 홀가분 한 걸. 여행은 역시 혼자 하는 것이 묘미가 아닐까. 빅토리아 메모리얼에 도착하니 앞 뒤 그리고 양 옆으로 큰 정원이 있고 넙은 호수도 펼쳐져 있다. 앞 쪽은 한창 보수공사가 진행중이어서 뒤문으로 출입해야 했다. 건물의 내부엔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회화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많은 지도자들의 대형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었는데 간디의 초상화가 없었다. 영국이 세운 기념관이라서 영국에 저항했던 마하트만 간디의 초상화는 없는 것이라고 내 나름의 해석을 해본다. 입장료가 또 150루피였다. 인도인은 10루피이다. 구경을 마치고 5분 거리에 있는 St. Paul Cathedral로 갔다. 두 번이나 파괴되어 원형은 볼 수없다는데 너무 쓸쓸하기만 하다. 오후 3시에나 입장이 가능하다고 해서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관광안내서엔 서쪽면의 색유리가 볼만 하다고 했는데 사방을 살펴보아도 정교한 색유리(stained glass)는 없고 회갈색의 평범한 유리로만 둘러싸여 실망스러웠다.뒷마당에서 한 여인이 몇 가지 성물을 놓고 팔고 있을 뿐이었다. 성당을 나와서 조금 걸으니 Rabindra Sadan이 있고 그 옆에 Academy of Fine Art가 있는데 마침 전 인도 미술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입장료가 5루피였다. 많은 인도의 현대미술작품을 관람했으나 미술에 문외한이어서 제대로 감상할 수는 없었다. 미술관을 나와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25루피짜리 egg fried rice(달걀과 볶은 쌀밥)를 시켰는데 의외로 양이 많아서 포만감을 느낄 정도였다. 식당에서 마주 앉은 젊은이에게 Zoological Garden(동물원)을 물으니 maximum two and half km(최장 2.5km)란다. 다리가 아픈 걸 무릅쓰고 부지런히 걸으니 한참 후에 간판이 보인다. 입구가 엄청 붐빈다. 인도인들의 가족나들이 단골 코스임을 직감한다. 5루피를 내고 들어가니 깔끔한 구석이라곤 없다. 찢기고 뜯겨 페허처럼 방치된 시설들이 수두룩하고 쓰레기와 먼지로 뒤덮인 길, 낡을대로 낡은 동물우리가 지은 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대부분의 건물이 그렇듯이 캘커타가 식민지 인도의 수도이었을 때 영국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곰, 사자, 호랑이, 낙타, 하마, 사슴 등 여러 가지 동물이 있지만 과천 동물원에 비하면 유치할 정도의 시설이다. 그러나 백호 몇 마리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서 사진기에 열심히 담았다. 동물원의 후문을 나와 걷다가 노점에서 짜이 한 잔을 시켰더니1.5루피란다. 짜이 값은 장소와 상인에 따라서 1.5푸피, 2루피, 3루피, 4루피, 5루피 등 다 다르다. Indian Museum이 있는 Park Street로 가는 버스를 물으니 77A번을 타란다. 인도 박물관 앞에서 하차하여 호텔이 있는 Free School Street에 있는 Hotel Al-Gaus를 찾는데 그 길 앞으로 여러 번 다녔으면서도 찾지 못하고 헛걸음만 치다가 결국 한 호텔에 들어가 물었더니 한 노인이 앞장 서서 친절하게 알려 준다. 그에게 또 5루피를 주었다. 인도의 길거리엔 가끔 사탕수수의 즙을 내서 파는 사람들이 있다. 사탕수수대를 몇 번이나 압축기로 짜서 즙을 내서 한 컵에 4루피 혹은 5루피를 받는데 자연그대로의 음료수여서 여러 번 사먹었다. 옛날 시골 고향에서 먹던 사탕수수맛을 인도에서 맛보니 별미였다. 동물원에서 환타 비슷한 음료를 15루피에 사서 마시고 호텔 근처에서 콜라 한 병을 18루피에 사서 마셨다. 인도의 물가는 여행 하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정보다. 인도는 타고르와 간디의 나라가 아닌가. 인도의 모든 화폐엔 마하트마 간디의 초상화가 인쇄되어 있다. 동물원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오다가 파크 스트리트에서 내렸는데 근처에 간디의 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십대 적에 나는 간디의 자서전을 읽으며 그의 무저항주의에 깊이 공감한 적이 있었다. 서점에 들렀더니 타고르가 저술한 서적이 십수 종이 있었다. 길거리에 차린 노점 서점에서도 타고르의 서적은 쉽게 만날 수 있다. 인도가 낳은 세계적 시인, 타고르는 캘커타 출신이다. 간디와 타고르가 인도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길거리의 풍경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십대 적에 나는 타고르에게 매료된 적이 있었다. 단지 동양 최초의 노벨상 수상시인이라는 것과 수염이 덥수룩한 그의 모습, 그리고 단편적으로 읽은 그의 작품과 그의 사상을 접하며 나는 그에게 빨려들었었다. 그리고 타고르와 같은 시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읽은 타고르의 시 ‘동방의 등불’과 시집 ‘기탄잘리‘ 중의 한 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동방의 등불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진실의 깊은 속에서 말씀이 솟아나는 곳 끊임없는 노력이 완성을 향해 팔을 벌리는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 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당으로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The Lamp of the East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Where the mind is without fear and the head is held high ; Where knowledge is free ; Where the world has not been broken up into fragments by narrow domestic walls ; Where words come out from the depth of truth ; Where tireless striving stretches its arms towards perfection ; Where the clear stream of reason has not lost its way into the dreary desert sand of dead habit ; Where the mind is led forward by thee into ever-widening thought and action -- Into that heaven of freedom, my Father, let my country awake. 19297년 일본을 방문했던 타고르에게 동아일보 기자가 한국방문을 요청했을 때 방문하지못함을 미안하게 생각하여 이 시를 썼다고 하는 데 1929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 위 시는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 국민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위 시 말고도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라는 시는 시집 ’기탄잘리‘의 60번 째 시로 내가 10대 적에 애송했었는데 그 평화의 이미지와 함께 아직도 생생하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무한한 하늘은 머리 위에서 꼼짝도 않고 쉴 줄 모르는 물결은 시끄럽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소리치며 모여든다. 그들은 모래로 집을 짓고 빈 조개를 가지고 논다. 가랑잎으로 그들은 배를 엮고 방긋 웃으며 허허망망한 바다에 띄운다. 아이들이 세계의 바닷가에 놀고 있다. 그들은 헤엄 칠 줄을 모른다. 그들은 그물을 던질 줄 모른다. 진주 캐는 이는 진주를 캐러 물속데 뛰어들고 상인들은 그들의 배를 타고 항해하나 아이들은 조약돌을모아서는 또 다시 흩뜨린다. 그들은 숨은 보물을 안 찾는다. 그들은 그물을 던질 줄 모른다. 바다는 웃으며 일렁이고 그리고 창백하게 바다 기슭의 미소는 반짝인다. 죽음을 거래하는 물결은 아이들에게 의미없는 노래를 들려준다 마치 애기의 요람을 흔들 때의 어머니 처럼 바다는 아이들과 더불어 논다. 그리고 창백하게 바다기슭의 미소는 반짝인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폭풍우는 길 없는 하늘을 헤매고 배는 길없는 바다에 난파하여 죽음이 넘치는데 아이들은 장난한다 끝없는 세계의 바닷가에 아이들의 큰 모임이 있다. -‘기탄잘리’의 6번 째 시- On the seashore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he infinite sky is motionless overhead and the restless water is boisterous.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with shouts and dances. They build their houses with sand, and play with empty shells. With withered leaves they weave their boats and smilinglyfloat them on the vast deep. Children have their play on the seashore of worlds. They know not how to swim,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Pearlfishers dive for pearls, merchants sail in their ships, while children gather pebbles and scatter them again. They seek not for hidden treasures, they know not how to cast nets. The sea surge up with laughter,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Deathdealing waves sing meaningless ballads to the children, even like a mother while rocking her baby´s cradle. The sea plays with children, and pale gleams the smile of the seabeach.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children meet. Tempest roams in the pathless sky, ships are wrecked in the trackless waters, death is aboard and children play. On the seashore of endless worlds in the great meeting of children. 노점에서 나는 타고르의 시집 ‘Stray Birds, Lover`s Gift and Crossing`을 샀다. 100루피를 달라는 걸 50 루피에 사고 뒷 표지를 보니 정가가 60루피가 아닌가. 잠시 싸게 샀다고 생각한 것이 착각이었다. 책의 내용에 비하면 아까울 게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하루를 보내고 조용히 캘커타의 인상을 적어본다. 까마귀의 도시, 차선이 있으나 마나한 도시, 소음과 먼지의 도시,길거리에 마구 똥을 싸는 아이들,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 캘커타의 견공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닮았다.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도시, 다양한 것이 뭉뚱그려져 있는 도시가 캘커타인 것 같다.
2005.1.8토 밤 9시 45분 오늘은 완전히 혼자 캘커타를 여행했다. 아침에 일찍 깼다가 다시 잠이 들어 9시 30분에 깼다. 제일 먼저 Tagore House엘 가고 싶다. 토요일 Tagore House는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개관이다. 지하철을 타고 Girish Park역에서 내려 20여분 걸어갔더니 Tagre House로 들어가는 Gate가 보였다. 300여년전에 동인도 회사가 캘커타로 옮기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여 식민지 시절 인도의 수도가 되었던 캘커타는 London 다음가는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1772년에서 1912년까지 140년동안 인도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던 캘커타는 지식인계층이 민족주의적 경향을 띄자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영국 정부의 일련의 조치가 취해졌다. 수도는 뉴델리로 옮겨지고 뱅갈주는 분할되었다. 더욱이 인도 독립 후 East Bengal 이 동파키스탄(지금의 방글라데시)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난민사태가 발생하여 부귀영화는 막을 내리고 도시는 급격히 쇠락하였다. 타고르 하우스 인근도 마찬가지다. 길바닥에 쓸어져 잠든 엄마 옆에 두세 명의 젖먹이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매달려있는 모습은 여기저기에 흔하다. 죽은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길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들. 저들은 어떻게 하루의 끼니를 때우며 연명하는 것인가. Tagore House로 들어서니 정원이 있고 저만치 타고르의 흉상이 보인다. 타고르의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50루피를 내고 건물의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내부는 타고르기념관으로 꾸며져 많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타고르가 뛰어놀던 거실이 있고 타고르가 임종한 방엔 병석의 79세 타고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영국 유학시절의 젊은 타고르의 사진엔 콧수염도 없다. 아내 Debi의 사진도 있다. 일본 중국 태국 미국 러시아 독일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아내가 1901년 죽고 1903년엔 딸, 1905년엔 둘째 아들, 1907년엔 아버지를 잃는 불운이 닥쳤다. 1912년 자기가 쓴 시를 영국 사람들에게 낭독했을 때 그들이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스스로 번역한 시를 Gitanjali(Song offering)란 시집으로 출간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타고르는 동양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타고르 하우스에는 시인이 입던 옷 그림을 그리던 이젤, 화구도 전시되었는데 타고르는 작곡도 많이 했고 말년에는 그림에 심취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아내가 쓰던 부채며 화장품도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3층엔 아버지인 철학자 Devendranath Tagore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Tagore House는 타고르의 고향집이다. 이 건물에 Rabindra Bharati University가 붙어 있는데 타고르의 예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대학이라고 한다. 건물의 상당부분이 페허인채로 남아 있고 일부 건물에서 음악 등 예체능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을 가르치는 소규모 대학이었다. 마침 토요일이고 이른 시간이어서 학생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대학건물로 들어갔을 때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은 몹시 낡았으나 학생들은 발랄하고 활기에 넘쳤다. 나는 입학 절차와 학비, 커리큘럼 등을 알고 싶었는데 직원들의 영어가 시원치 않아 의사소통이 잘 안되었다. 나는 별 도움이 안되는 한 장 짜리 팜플렛 하나를 얻었는데 5루피를 받으며 영수증을 떼어 주는 것이 아닌가. 홍보책자 하나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대학 사무실이 인도의 비참한 교육 현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인도에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영수증 제도가 철저하다는 것이다. 3루피 4루피를 내고 버스를 타도 영수증은 꼭 끊어주는 것이다. Tagore의 여러 사진을 보고 나는 감동을 느꼈다. 타고르의 생존시에도 캘커타는 이렇게 지저분하고 가난했을까. 캘커타의 번영과 쇠퇴를 모두 체험했던 타고르가 아니었을까. 사진 자료 중엔 거리에 쓸어져 있는 두 빈민을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타고르의 사진도 한 장 있었다. 그는 세계적 영적 스승임에 틀림 없다. 나는 저번에 샀던 책을 들춰봤다. 다음과 같은 구절도 있었다. ⅩⅩⅩ The sunshine greets me with a smile The rain, his sad sister, talks to my heart. 햇빛은 나를 미소로 맞이하고 그의 슬픈 누이동생, 빗방울은 내 마음에 속삭이네. ⅩⅤⅠ I do not ask thee into the house. Come into my infinite loneliness, my lover. 나는 그대에게 나의 집으로 오라하지 않네. 나의 무한한 고독 속으로 그대 오게나, 애인이여. ⅩⅠⅤ The road is lonely in the crowd, for it is not loved. 길은 군중 속에서 외롭네,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에. 참고사항) o 중국 식당의 음식가격: 45루피~ 100루피 o 간이화장실(남자용): 도로를 향해 3면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o 빅토리아 메모리얼의 정원: 꽃이 많이 낯익다. 사루비아, 백일홍, 국화, 장미, 금송아 등이 우리나라 꽃밭을 보는 것 같았다. 미국의 꽃들은 낯설었다. o 과일이 낯익다: 배, 사과가 맛과 모양이 비슷한데 작고 맛이 덜 좋다.대추는 한결 크고 맛도 좋다. 도마도 바나나는 싼데 도마도는 우리나라보다 작다. 오렌지는 미국산 오렌지와 비슷한데 맛은 제주산 감귤에 가깝다. 파파야, 망고, 파인애플, 찌꾸는 감자처럼 생겼는데 맛은 감맛이다. 포도는 우리나라 캠벨 포도와 같은 것이 있고 길죽 길죽하고 껍질이 더 두꺼운 독특한 맛의 포도가 있는데 비교적 비싸며 검은색 포도와 청포도가 있는데 검은색이 약간 더 비싸다. o 매우 드물게 애완견이 보인다.
2005.1.9 일 맑음 아침 식사 대용으로 바나나를 샀다. 10루피 (260원 정도)에 5개는 주니 배가 부르도록 먹을 수있다. Tram(전철)을 탔는데 어디에서 내려야 할지 정류장 이름도 없고 안내 표시도 없어 난감했다. 시내 구경도 할 겸 무작정 끝까지 갔다. 차장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 것 같은 데 힌두어로 물으니 알 수 가 없다. 영어를 못하는사람도 많아 의사소통이 안 될 때도 자주 있다. 종점에 내려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호텔 근처의 중국음식점 howhua에서 mixed noodle soup(짬뽕)을 먹었다. 56루피였는데 맛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여기저기 LSD라는 간판이 붙은 집으로 가 집으로 전화를 했다. 분당 20루피(520원)란다. 아내가 무척 궁금했었나보다. 162초에 54루피(1400원)를 지불했다. 다시 인터넷 카페에 들러 집으로 메일을 보냈다. 시간당 15루피(390원). 캘커타에서의 인터넷 요금은 싼 편인다. 한글이 지원되어 편리하다. 다만 자판을 외우지 못해 그를 입력하기가 좀 어려워 메일을 영어로 써야 했다. 카페를 나와 길을 걷는다. 거대한 인도인의 행렬에 나는 이방의 나그네, 그러나 미국에서보다는 낯선 느낌이 덜 드는 것 같았다. 비용에 대한 걱정이 덜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2005.1.10월 맑음 아침 열시쯤에는 Al-Gaus Hotel에서 Continental Guest House로 옮겼다. Continental이 150루피로 50루피가 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고르 하우스를 다시 방문하였으나 사진은 찍지 못했다. 건물 내에서는 일체 사진 촬영이 금지되었다. 밖에서 찍으려 하나 사진을 찍을만한 장소가 없었다. 타고르의 집과 한데 붙어있는 Barahati University로 들어가니 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여기저기 등교하는 학생들로 교정이 활기에 넘친다. 건물은 몹시 낡았지만 학생들의 발랄한 모습을 보니 인도의 희망을, 인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보는 것 같다. 타고르 하우스를 다시 방문하고 나오는데 디지털 카메라에 용량이 부족하다는 메시지가 뜬다. 할 수 없이 다시 Park Street에 돌아와 걷고 있는 데 어디서 왔는지 또 한 사람이 따라오며 말을 건다. 카메라 가게가 어디 있는냐고 묻자 그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카메라 수리점으로 안내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메모리 카드가 없었다. 그는 다시 카메라 판매점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런 안내인을 자꾸 만나니 걱정이 된다. 나중에는 꼭 돈을 요구하고 자기네 가게를 소개하는 등 관광객을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돈을 안 받는다면서 그냥 friendly guide(우정의 안내) 혹은 인도에 온 guest(소님)니까 안내한다고 말은 하지만 속셈은 그게 아닌 것이다. 직업삼아 하는 것이다. 얼마동안 함께 다니며 이것저것 소개하고 나중엔 몇 분 동안 도와줬다며 돈을 요구한다. 가게 주인들 하고 계약을 맺고 얼마의 수당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공식절차를 밟아 안내인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외국인이면 누구에게나 접근하여 즉흥적으로 상가 안내 등을 한다. 안내인이 카메라 가게까지 안내해 주었다. 카메라점 점원은 메모리 카드를 새로 구입해야 한다며 가장 싼 것이 3,650루피짜리와 1,900루피 짜리가 있다고 한다. 사긴 사야하지만 비용이 문제다. 나중에 사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안내를 해준 사람에겐 그냥 고맙다고만 하고 헤어졌다. 헤어지니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가. 피로감이 몰려왔다. 20루피에 릭샤를 타고 Free School Street에 돌아와 Hong Kong Chinese Restaurant에서 44루피에 chicken soup를 먹었다. 닭죽이었다. 식사 후 오후엔 봉사활동 신청을 위해 마더 하우스로 갔다. 월, 수, 금 3시부터 신청을 받는데 도착하니 2시쯤 되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테레사 수녀님의 무덤도 보고 성당 내부도 둘러보았다. 수녀님이 세운 이 봉사단체 건물을 캘커타 시민들은 마더 하우스라고 부른다. 수녀님의 동상과 사진엔 성스러운 빛이 감돌고 자비로움이 흘러넘쳤다. 2층 성당에선 수녀님들 여럿이 기도하고 있었다. 1층의 수도가에서는 선교회 복장을 한 여러 수녀님들이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1층 한 쪽에 테레사 수녀님 동상이 있었는데 자비롭게 손을 앞으로 내밀고 계신 모습이다. 수녀님들은 이 동상 앞을 지나갈 때면 수녀님의 손을 한 번씩 잡아보고는 지나가는 것이다. 복도에서 성당 앞을 지나갈 때도 무릎을 꿇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몸을 숙여 절을 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키도 작고 몸집이 작은 인도의 수녀들이 제일 많은데 벽안의 수녀님들도 상당수 있었고 동아시아 수녀님들도 있었는데 한국 수녀님들 같았다. Volunteer(봉사자) 담당 수녀님은 서양 수녀님이었다. 3시가 되니까 담당 수녀님이 앞장서서 150m 정도 떨어진 House of charity(자선의 집) 건물로 옮겨 그곳에 마련된 여러 개의 간이 벤취에 앉았는데 자연스럽게 서양인은 서양인끼리 동양인은 동양인끼리 앉게 되었다. 곧 담당봉사자가 와서 여러 가지 봉사활동에 대한 안내를 해 주었다. 2005년 1월 10일 오늘 한국인 신청자는 5명이었다. 여자 대학생 2명 젊은 부부 한 쌍 그리고 나였다. 서양인까지 포함하면 오늘 15명 정도가 봉사활동을 새로 신청했다. 아까부터 수녀님과 의논을 하며 직원처럼 열심히 일하는 동양인이 있었는데 저 분은 뭐하는 분일까 하고 궁금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1년 동안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이이었다. 이 분이 우리 5명에게 자세한 안내를 해주었다. 먼저 손바닥만한 신청서에 이름, 한국 주소, 캘커타 도착일, 캘커타 출발 예정일을 적어서 제출했다. 다음 자세한 안내가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물을 조심하라. 길거리에 쓸어져 있는 사람이나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마라. 아기들도 자기 아기들이 아닐뿐더러 기업적으로 그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엔 씁쓰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들이 그대로 방치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안도의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안내는 계속 이어졌다. 6시에 아침 미사가 있다. 7시쯤 빵과 바나나 커피로 간단한 아침 식사 7시 30분 쯤 각 봉사활동 장소로 출발 8시부터 12시까지 오전 봉사활동 저녁에는 6시 30분에 묵상의 시간이 있는데 목, 토, 일요일엔 6시에 있다. 목요일엔 봉사활동을 하지 않는다. 봉사는 오전과 오후 구분해서 하는데 오후에도 하겠다고 하면 할 수 있는데 여행임을 감안하여 오전만 하는 것도 괜찮다. 봉사장소는 일곱 군데가 있는데 오전 오후 모두 하는 곳이 있고 오전만 하는 곳이 있다. 여자 봉사자만 필요한 곳이 있고 남녀 봉사자 모두 필요한 곳이 있다. 각자 식사하고 각자 호텔에서 자고 아침 6시 전까지 Mother House로 오면 된다. 일곱 군데가 다 따로 떨어져 있는데 같이 가는 사람들끼리 가는 것이 좋다. 끝나면 각자 자기 숙소로 돌아간다. 이것 저것 시키는 사람이 있거나 일과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하는 것을 보면서 알아서 열심히 하면 된다. 사진 촬영은 봉사 마지막 날 수녀님의 허락을 받고 찍을 수 있다. 일곱 군데 봉사기관은 다음과 같다. 1.쉬쉬바반(신청서 받던 건물) : 오전 오후 봉사 가능. 여자 봉사자만 필요. 갓난아기 돌보는 곳. 장애아 비장애아 다 있다. 5세 이하의 갓난아기들을 돌본다. 2.쉬쉬바반 하우라 : 남녀봉사자 모두필요. 오전봉사만 가능. 유치원이나 학교 같은 분위기에서 조금 큰 아이들을 돌보는 곳. 3.다야단 : 장애 어린이를 돌보는 곳. 남녀봉사자 모두필요. 오전 오후 봉사 가능. 4프렘담 : 장애 있는 어른들 씻기고 청소하고 면도, 시트 까는 일 등을 한다. 남녀봉사자 모두 필요. 5.깔리 가트 : 임종의 집. 중환자 보호. 남녀 봉사자 모두 필요. 오전 오후 봉사 가능 6.싼티간 : 학대받는 여성들 보호. 파키스탄에서 넘어온 불법 난민 여성들 심신의 안정을 목표로 함. 여자 봉사자만 필요. 오전봉사만 가능. 7.니보디보 : 남자수사가 관리. 장애 남자 아이들, 길거리의 아이들을 돌봄. 일요일엔 많은 봉사자 필요. 거리가 좀 먼 편이며 점심식사 제공. 이와 같은 설명을 듣고 나서 수녀님 면담이 있었다. 어디서 하고 싶으냐고 해서 깔리 가트라고 했다. 수녀님은 조그만 메달과 영수증을 주었다. 메달에는 성모님의 모습이 있다. 언제부터 언제까지라 날짜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간은 임의로 하면 되는가보다. 하루도 좋고 한 달도 좋고 1년도 좋을 것이다.
2005.1.13 목 맑음 비가 온 다음이라 그럴까, 오늘은 햇빛이 제일 밝게 빛나는 날이다. 11시쯤 외출하여 길을 알아놓을 겸 Mother House까지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 두번 타야 하는 등 오히려 번거롭다. 걸어서 가는 것이 더 편하다. 내일부터 새벽마다 가야되는데 걸어다니기로 했다. Mother House에서 깔리가트 임종의 집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내일 아침 5시 30분까지 Mother Hose에 가 아침 미사에 참석하고 다시 임종의 집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기로 신청해 놓은 상태. 모든 것이 처음이라 조금 걱정도 되었다. 봉사활동을 잘 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다시 Sudder St.에 와서 점심식사를 했다. 유명식당이 아니더라도 여행자거리 골목골목에는 간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값도 저렴하여 일반 식당의 3분지 2수준인데 양도 맛도 손색이 없다. 경비를 아끼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Mixed noodle Soup은 짬뽕보다 더 잔맛이 있는 것 같았다. Chicken Soup도 맛이 있었다. 돼지고기 음식도 한번 맛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이 났던 여학생이 궁금했다. 몸이 나아 병원에서 나왔을까. 빨리 나아서 나머지 여행 일정을 잘 소화해야 할텐데. 학생들이 착해보이고 모범학생들 같았다. 이제 나의 관심사는 내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봉사활동. 다섯 시에 일어나서 준비해야 한다. 자명종 시계도 준비했으니 걱정 없겠지. 그 여학생들은 내일 봉사활동에 갈 수 있을까. 저녁 6시쯤 들렀더니 둘다 외출중. 다행이다. 몸은 다시 회복되었나보다. 2005. 1. 14. 금 맑음 어제 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8시에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엎치락 뒤치락거리다가 시간을 보니 11시 30분쯤 되었다.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Oliver Twist를 두 시까지 읽다가 잠자리에 다시 들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침에 늦잠자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서 그런지 어제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서 그런지 모르겠다. 얼마쯤 뒤척이다가 잠깐 잠이 든 사이 꿈을 꾸었다. 막내딸 승우가 어떤 시합에서 두 번을 우승하고 세 번째의 결과를 기다리는 꿈을 꾸다가 따르릉따르릉 자명종 울리는 소리가 울려 잠을 깼다. 4시 20분 쯤 되었다. 자명시계가 20분쯤 빨리 울린 것 같았다. 40분에 울리도록 맞춰놓았었다.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옷을 차려 입고 났는데도 시간은 5시도 안되었다. Oliver Twist를 조금 더 읽다가 5시 10분 쯤 Mother House를 향해 출발했다. 걸어가기로 했다. Kolkata의 새벽거리가 상쾌하다. 청소하는 사람,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이 벌써부터 분주하다. 여기저기 쭈그려 앉아 소변을 보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남자들도 발뒤굼치를 들고 쪼그려 앉아 소변을 본다. 사람들에게 Mother House를 물으니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Mother House를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Continental G.H에서 Algaus Hotel 쪽으로 걸어가다가 첫번째 만나는 왼쪽 길로 계속 걸어가면 바로 Mother House였다. 길을 확실히 알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가는 길에 담요 한 장을 뒤집어 쓰고 여기저기 길가에 잠자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바깥공기가 차가운데 말이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Mother House에서 보살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도착하니 나보다 조금 앞서 초로의 서양할머니와 젊은 동양인 남자가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5시 30분 쯤 되었다. 미사는 6시에 시작된다. 나는 낯설기만 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서성이는데 수녀님 한분이 뭐라고 묻기에 I came for Mass. (미사보러 왔는데요)했더니 2층으로 올라가라고 손으로 가리킨다. 신발을 벗어놓고 올라갔더니 성당 입구에서 왼쪽에 100여명의 수녀님들이 벌써 열을 맞춰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20여명의 volunteers(봉사자)들이 미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여분 지나자 자원봉사자들이 100여명으로 늘었다. 그 중에 50여명 정도는 일제히 하얀 유니폼을 입은 호주의 봉사단이었다. 6시 미사가 시작되었다. 5명의 사제단이 입장하여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나도 영성체를 모셨다. 미사가 끝나자 빵 한 쪽, 짜이 한잔, 바나나 하나씩이 아침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것을 먹고나서 깔리가트로 어떻게 가야할지 걱정이 되었다. 등록할 때 안내하던 한국 분이 있어 다시 물어봤더니 한국사람이 많이 있으니 같이 가라고 한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동양인에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며 저쪽의 한국 남자분이 그곳으로 갈 것이니 같이 가라고 한다. 그분이 인솔자가 되어 호주사람들 포함 20여명은 길 건너편에서 204번 버스르 타고 바로 깔리가트 임종의 집으로 갔다. 교통편을 알고 나니 이제 혼자라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인솔하던 분에게 봉사활동 한 지 오래 되었느냐고 물으니 가톨릭대학교 학생인데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계속해서 릴레이 식으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 간식시간에 그분이 신학생인 걸 알았다. 등록 때 안내를 하시던 분도 신학생이라고 했다. 몇 분 더 있는 것 같았다. 깔리가트 임종의 집에 도착하니 `Mother teresa`s Home for the Sick and Dying Destitutes`(병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마더 테레사의 집)이라는 영문 글귀가 입구 위쪽에 쓰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앞치마 같은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사물함에 짐을 두고 곧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봉사는 타올 담요 빨기, 환자복 베갯닛 빨기, 목욕시키기, 소변 받아내기, 식사나르기, 식사 시중들기, 약 타다 먹이기, 목욕 시키기, 설거지 하기, 빨래 널기. 마른 빨래 걷기, 목욕실에 더운물 나르기, 환자복을 일일이 점검하여 오물 묻은 빨래 가려내기, 욕창및 각종 상처 약바르고 거즈 붙이기 등 눈코 뜰 새가 없다. 약 처방하기와 욕창및 상처소독은 따로 맡아서 하는 분들이 있었다. 남자환자실엔 150여 분이 있었는데 임종의 집이라 해서 상태가 심한 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몇몇 욕창과 상처가 심한 분이 있을 뿐 당장 임종을 앞둔 것 같은 의식불명환자는없었다. 나는 약을 타다 먹이고, 밥을 나르고, 목욕을 시키고, 환자복을 갈아입히고, 더운 물을 받아다 목욕실로 옮기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손짓하는 환자에게 가면 물을 달라, 옷을 갈아 입혀 달라, 오줌통을 갖다달라던지 짜이를 더 달라는 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것이다. 화장실로 데려가 달라고도 하고 목욕을 시켜달라고도 했다. 이렇게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쯤 간식을 먹고 다시 한 시간 쯤 더 활동을 하다보면 오전 봉사가 끝난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사물을 챙겨 임종의 집을 나왔다. 첫날의 일과가 끝난 것이다.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젊은이가 있었다. 옷도 인도 사람처럼 차려 입고 세탁을 도맡아 하다시피 열심히 일을 했다. 간식시간에 대학생이냐고 하니까. 회사에 다니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4개월째 인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머리를 짧게 깎아 나이가 들어 보이지 않았는데 33살이라고 했다. 작년에도 6개월 인도 여행을 했다며 남인도가 북인도보다 좋다며 경험담을 풀어놓기도 했다. 이제 네팔을 거쳐서 귀국할 거라고 한다. 남인도가 음식도 맛있고 도시간 이동도 단거리고 비용도 북인도의 절반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다. 해변가엔 겨울철에도 피서 인파가 있겠다는 나의 말에 “ 이번 해일로 쑥대밭이 됐지요 뭐.”해서 머쓱해지기도 했다. 서양인들도 정말 열심히 봉사활동을 했다. 임종의 집 벽에는 여러 곳에 수녀님의 사진과 함께 어록이 붙어있었다. 한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Let Every Action of Mine Be Something Beautiful for God Mother 1948 (내 모든 행동이 하느님을 위해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해주소서)
깔리 가트 임종의 집에서 오전 봉사활동을 마치고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누웠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피곤했던 모양이다. 두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아직도 햇볕이 쨍쨍한 한낮이다. 병이 났던 Ashok Hotel의 두 여대생은 지금 어떤가. 봉사활동에도 나오지 않았던데.... 저녁 때 한번 들러보아야겠다. 4시쯤 다시 외출하여 internet방에 갔다. 한글지원이 확실하게 된다. 좌판 외우지 못해서 좀 힘이 들긴하다. 오늘은 인터넷으로 National Geographic(영문잡지 이름)에 실린 서방 기자의 cast제도에 대한 장문의 글을 두시간 가까이 다 읽었다. 물론 번역본이다. 한 편의 완벽한 논문 분량이다.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제도가 카스트 제도이며 2,000여개의 세분화된 신분이 존재한다고 했다. 이 제도에 억매어 있는 사람 3/4이 농촌에 살고 있는데 도시의 익명성과 여러 요소로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카스트 제도의 폐해가 심하다는 것을 여러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간디를 비롯해(간디는 바이샤 출신, 부처는 크샤트리아 출신))여러 탁월한 지도자가 나타나 카스트 제도의 폐해를 철폐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인구의 80%가 힌두교도인 인도에서 사회적 관습은 법률적 효력보다도 강하다. 법적으로 차별이 금지돼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직도 국민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카스트 제도다. 인도 내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 관심이 필요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인도의 저 역동적인 힘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있는 것이 카스트 제도라는 생각이다. 서방기자의 눈에 비친 저 적나라한 불가촉천민(untouchable)에 대한 차별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최고의 지도자가 불교로 개종하자 수십만 명이 따라갔던 일도 있었지만 힌두교도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인도 사회에서 그 개선책을 찾기란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다. 카스트 제도로 인한 폐해는 엄청나며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과제다. 소설 Oliver Twist가 너무 재미 있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한국에서도 매우 인기있는 소설중의 하나, 어린이용 소설로도 나와 있었다. 인터넷 방을 나와 식사를 하려고 저번에 보았던 닭죽집을 찾다가 못 찾고 인도 음식점에 들어가 탄도리를 시켰더니 부풀어오른 빵 두 쪽과 beef 한 접시가 나오지 않는가. 탄도리를 인도의 인기있는 음식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15R였다. 내가 방금 먹은 것이 탄도리가 아닌게 분명했따. 식사가 시원찮아서 골목길의 소규모 식당 `모모식당`으로 찾아가 닭죽을 35R에 또 먹었다. 고향에서 먹던 닭죽과 거의 비슷해서 맛있게 먹었다. 거기에선 항공대 4학년 ROTC생 두 명을 만나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도 내가 권하자 닭죽을 시켜먹었다. 오늘 캘커타에 도착했는데 모래 중부지방으로 떠난다고. 그들은 졸업을 앞두고 짬을 내 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바라나시엔 이미 다녀왔다고 한다. 바라나시에 한국식당이 있는데 라면이 130루피(3400원), 김치찌개가 180루피(5,700원) 등 비싸긴 해도 고향의 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한번도 한국음식을먹어보지 못했다. 캘커타에 한국음식점은 없다. 바라나시에 가면 꼭 그 식당에 들러 라면도 먹고 김치찌개도 먹어야겠다. 소주도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주는 또 얼마나 비쌀까. 전에 미국을 여행할 때 소주값이 꼭 한국의 10배였던 걸 기억한다. 그런데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이 탄도리가 아니라 탄도리 치킨인데 음식점에서 탄도리를 찾으니 엉뚱한 음식을 내 놓았던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내 발음을 잘못 들은 모양이다. 왠지 메뉴판에도 없었는데 그들은 있다고 했으니까. 다음에 탄도리 치킨을 다시 한번 먹어보자. 인도 안내책자엔 탄도릭 치킨이 인도가 자랑하는 세계적 음식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먹어봐야겠다. 디지털 카메라의 메모리가 왜 42장에서 멈춰섰는지 모르겠다. 새로 2.000루피를 주고 메모리 카드를 새로 끼웠지만 해상도를 조절하면 사진의 장 수를 더 늘릴 수 있다는 얘기는 또 무엇인지. 왜 150장 정도는 찍을 수 있다더니 42장에서 멈춰 서서는 계속 라는 message만 뜨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조작 미숙일 것이다. 출국할 때 카메라를 구입, 조작법을 제대로 익히지도 않고 왔으니 자꾸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다. 2005.1.15 토 맑음 비가 온 후라 그런가. 어제 오늘 갑자기 날씨가 더워졌다. 4시 20분 자명종이 울린다. 일어나 세수하고 화장실 다녀오고 옷을 차려 입으니 다섯 시가 다 되었다. 어제 오후 내내 설사 때문에 고생을 해서 아침에 걱정이 되었다.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화장실을 두 번씩이나 들렀다가 Mother House로 향한다. 새벽공기가 신선하다. 벌써부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가다가 길거리에서 새벽 짜이 한 잔을 사 먹고 도착하니 voluteerㄴ(봉사자)는 3명이 와 있고 수녀님들은 모두 모여 미사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조용히 성당에 앉아 묵상하며 속으로 기도를 한다.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우리 가정에 평화가 오기를 기도한다. 테레사 수녀님 생존시부터 나는 인도에 한번 와서 마더하우스에 들르고 싶었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매스컴은 여러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발표하고 기사화하곤 했다. 20세기에 가장 인기있었던 노래는 비틀즈의 Let It Be 라든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은 테레사 수녀님이라는 말도 들렸다. 테레사 수녀님은 1997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아 있는 성녀로 추앙받은 분이고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성녀품에 올리려는 절차가 진행되어 현재 복자품에 올라계시지 않는가. 수녀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는 인천에 있는 사랑의 선교회 인천 분원에 찾아가 조문하고 헌금을 하고 온 일이 있다. 인도에 가도 수녀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늦은 감이 있지만 캘커타에 찾아가서 그분의 뜻에 따라 조금이라도 봉사할 수 있기를 나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것이다. 몇 분의 신부님이 와서 미사를 집전하고 갔다. 오늘도 영성체를 모셨다. 호주의 단체손님은 빠지고 오늘도 자원봉사자가 60여 명 정도 되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굶기로 했다. 어제 설사로 너무 고생을 해서 조심을 해야겠다. 미사가 끝나고 간단하게 아침 간식을 먹은 후 일행은 깔리가트 임종의 집으로 가려는데 어제 봤던 아기 안은 엄마들이 또 따라온다. FIVE 루피! FIVE루피를 계속 외쳐대며 따라오는 데 정말 떼어놓기 힘들었다. 어제 5루피를 주었기 때문에 오늘도 5루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기업적으로 구걸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나니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줄 수도 없고 안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매일 주면 매일 그럴 것이 뻔하다. 오늘은 결단코 주지 않기로 한다. 차도까지 따라 건너며 따라왔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거의 필사적이다. 두세번 5루피씩을 줬더니 그걸 기억하고 나에게 특히 더 매달렸지만 거절했다. 깔리가트에 가자마자 바지를 갈아입고 웃옷과 간편 가방과 전대를 보관함에 넣고 활동에 들어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밥 나르고, 물 나르고, 화장실 데리고 가 똥 오줌 뉘고, 밥 먹이고, 빈 밥그릇 부엌으로 나르고, 빨래 빨래터로 나르고, 약타다 먹이고, 목욕시키며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또 12시가 다 되었다. 짜이 한 잔만 먹고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매일 그렇게 누워서 지내는 150여 명의 환자들 방에서 환자 냄새 하나도 안 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매일 매일 세탁하고 목욕시키고 쓸고 닦으니 전혀 환자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하나도 안 나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임종의 집을 나와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는 데 골목에 여자들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다. 대로에까지 나와서 서성이며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알로! 알로!하며 다가서는 것이다. 대낮 길거리까지 나와 호객하는 윤락녀들이었다. 깔리가트에서 멀지 않은 골목길에 윤락촌이 있는 것 같았다. 이 낯선 풍경에 의아해 하며 나는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게스트 하우스까지 걸어갔다.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서 다시 그 여학생들을 만났다. 선후배 사이라는 인하대생과 한양대 학생말이다. 우리는 음료수를 마시고 같이 쇼핑을 하러갔다. 이곳 저곳 둘러보다가 Himalaya 대리점으로 갔다. 그들은 이미 그 가게에 대한 정보를 이미 다 갖고 있는 듯했다. 곧장 가서 물건을 고르지 않는가. 히말라야는 화장품, 기능성 식품 등 다양한 제품을 생산 판매하는 인도의 유명 기업체란 걸 알았다. 그들은 1,200 ~1,300루피 어치 제품을 샀다. 나는 나중에 여행이 끝날 무렵 사기로 하고 조그만 샴푸 하나만 샀다. 우리는 함께 김치국밥을 판다는 곳으로 갔다. 노점 식당이었다. 나는 김치국밥, 선배언니는 김치볶음밥, 정옥이라는 후배는 라면을 시켜먹었다. 거리를 걷다보면 마더 하우스에서 같이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 뿐 만 아니라 외국사람도 만나게 된다. 외국분을 만날 때 하이! 하고 아는 체를 하면 그 사람도 미소를 보내며 반갑게 인사를 하곤 한다. 김치볶음밥 집에서 같이 봉사하던 사람을 만났다. 4개월 째 인도 여행을 한다는 젊은 사람인데 Mother House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젊은이다. 머리를 깎고 인도사람 처럼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는 20대의 대학생인 줄 알았는데 30대란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 이렇게 인도 매니아들을 만나곤 한다. 또 Ashok 호텔에서 만낫던 부탄 학생 세 명도 이 길거리 식당에서 또 만났다. 그들은 오늘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인도로 유학하기 위해 대학 입학시험 때문에 왔었다고 한다. 둘은 부탄에 살고 하나는 시킴주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들과 헤어져 Continental G.H로 돌아오면서 20루피에 화장지 하나를 샀다. 여관에서 일하는 영어를 곧잘 구사하는 아이가 초코릿을 사달라고 하여 10루피를 주고 사주었다. 그리고 저녁식사로는 한번 먹어보려고 했던 치킨 탄도리를 55루피에 먹었는데 안내책자의 소개보다는 그저 구운 치킨에 불과했다. 그리고 약국에 들러 설사약을 사가지고 왔다. 대충 하루에 화장실을 몇 번 다녀왔다, 잠을 제대로 못잤다 하고 설명하니 금방 알아차리고 약을 지어주었다. 놀랍게도 약값이 122루피였다. 3끼 식사값이었다. 약효는 즉시 나타났다. 설사가 나았다.
며칠 전 전북 남원 용성중은 최근 최병우(48•도덕) 교사가 올해 1•2학기 학교에서 정한 방침을 위반했다며 남원교육청에 징계를 요구했다라는 뉴스를 보았다. 남원교육청은 지난 7월 최 교사에게 1차 경고를 했고, 18일에는 “경고가 지켜지지 않았다”며 징계위를 열어 경징계할 방침이다라고 발표했다. 최 교사는 올 1학기 소신에 따라 학생에 대한 평가를 지필평가(시험)와 수행평가(실습)의 비율을 3대 7로 설정했다. 지필평가는 중간고사를 없애고 기말고사 1번만 치르고, 수행평가는 자아 및 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 연극, 노래, 춤 등 10회로 배치했다. 그러나 학교 쪽은 전북도 교육청 성적관리 지침을 보면 도덕 과목 평가는 지필평가와 수행평가 비율이 7대 3이고, 시험도 중간•기말고사 2번으로 권장한다며 최 교사에게 수정을 요구했다. 과연 학생들의 성적은 교사가 평가하는 것인가? 교육청이 정한 성적관리 지침을 적용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까닭에 학생평가에 관련된 이와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일까? 교육인적자원부 훈령인 ‘학교생활 기록부관리지침’은 지필고사의 ‘변별력’을 강조하고 있고, 동점자 발생을 억제하고 있다. 동 지침은 특히 중등학교 지필평가에서 변별력을 최대화하라는 지침을 명시하고 있고, 동점자를 최소화하라는 지침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결과적으로 불필요한 경쟁을 야기하고 학생들에게 고통을 초래하며, 각급 학교가 나름의 일정한 교육목표 달성이 아니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서 상대평가 점수를 산출하는 기능을 주로 하는 기관이 되게 한다. 성적표에 나오는 성적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갈 때,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를 갈 때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앙교육행정기관의 훈령이 학생평가방법을 규정하고 있고, 시도교육청, 지역교육청,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를 인용해서 규정을 만들고 있다. 학생평가문제는 학생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학생평가를 검토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평가를 전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교사의 권리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바른 길인지 의문이 생긴다. 학생평가는 바람직한 원칙이라면 확고하게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지침서에만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있었는가? 평가방식은 학생들의 학습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이나 수업에 임하는 태도에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정해진 중간, 기말고사라는 평가제도 외에도 학생들을 수업에 참여시키는 교사에게 성적산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 올바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조건의 교사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교사들이 학업성적 평가관련 전문성을 재고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겠다.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학교에서 관행으로 이루어지는 평가 방법만을 고수, 전수하는 형태가 아니라, 교사 양성과정에서 학생평가의 개념과 그 진정한 목적을 내면화시켜서 교사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함께 함양시키는 게 중요하겠다. 학생들을 교사와 학생이라는 지위와 명분의 관계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이 과목에서, 지금 이 시간에 배운 학습 내용이 그 학생의 일생에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교사양성과정에서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겠다. 교사가 되고 난 후에도 이에 대한 교육부의 철저한 재교육이 함께 이루어 진다면 학생에 대한 평가가 기술적 전문성과 함께 교사가 가져야 할 교육 철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현장에 서야 하는 교사의 어깨가 무겁다. 제대로 가르쳐야 하고, 이렇게 가르친 내용을 정확하게 평가해야 하고, 이런 많은 과정을 통해서 미래에 밝은 인물을 양성하기까지 해야 하는 교사는 “만능인”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교사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그는 프로페셔널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 이번 최병우(48•도덕) 교사의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중등학교의 학생성적평가제도의 모순은 앞으로도 많은 논쟁거리가 되리라 생각된다.
수업에 뛰어난 교원을 표창하는 제도를 제정하고 있는 교육위원회는 작년도보다 6개 교육위원회 증가해 35개 도도부현·정령시 교육위원회로 증가한 사실이 23일, 문부과학성의 조사로 밝혀졌다. 우수한 교원에게 부여하는 칭호도, 「발랄한 선생님」, 「수업의 철인」 등 여러 가지이고, 급여면에서 우대나 해외 연수 등의 “포상”을 주고 있는 교육위원회도 있다.「지도력이 부족 교원」의 인정 수가 증가하는 가운데, 문부과학성은 「교사의 자질 향상에는, 우수한 선생님을 제대로 평가해, 의욕을 높여 주는 일도 중요하다면서, 이 제도는 향후도 한층 더 확대될 것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조사는 금년 4월 1일 현재로, 60개 도도부현·정령시 교육위원회를 대상으로 실시한 바 우수한 교원의 표창이나, 인정 제도를 채용하고 있는 지역은 홋카이도, 도쿄도, 오사카부, 나고야시 등 35개 교육위원회와 이와테현, 후쿠이현, 키타큐슈시 등 6개 교육위원회가 금년도부터 새롭게 도입을 하였다. 이에 수반해, 특별 승급이나 근면 수당을 증액하는 등 급여상의 우대 조치를 취하고 있는 교육위원회도 미야기현이나 기후현 등 7개 교육위원회에 이르고 있으며, 「해외 연수」등의 특전을 주고 있는 곳도 7개 교육위원회에 이르고 있다. 에히메현 교육위원회는 작년도로부터 즐겁게 알기 쉬운 수업을 실시하는 교원을 「에히메 수업의 철인」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인정하는 제도를 실시했다. 아동 학생이나 보호자 등으로부터 추천된 교원의 수업을 선발위원회가 시찰하는 등의 방법으로 결정해, 제1호에는 추천자 19명중에서 5명이 선택되었다. “철인의 기술”을 하는 공개 수업에는 많은 교원이 참여하여 현 교육위원회는 이같은 노력이 교원들의「지도력 향상으로 연결된다」라고 기대한다. 철인으로 인정된 현립 마츠야마남고의 마치다 영어교사(49)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학생에게 짝을 맺어 질의 응답 형식으로 영어회화를 실천시키고 있다. 마치다 교사는 「(선택된 것에 대한) 중압도 있지만, 「자신을 한층 더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의식이 강해졌다」라고 소감을 이야기했다. 금년도에 3년째인 사이타마현교육위원회는 재작년도는 135명중에서 19명이, 작년도는 114명 중에서 20명이 선택되었다. 급여면의 우대 등은 없지만, 표창장과 기념품이 주어져 현 교육위원회 등이 실시하는 연수회의 강사 역할을 하도록 명부에 등록된다. 이 외에도 기후현교육위원회는 「슈퍼 교원」, 히로시마현 교육위원회는 「전문 교원」, 나가사키현 교육위원회는 「능력 교사r」의 칭호를 주고 있으며, 이바라키현 교육위원회는 금년도부터 「선생님의 선생님」제도를 시작하였다. 교원의 「질」을 둘러싸고 작년도에 「지도력 부족」이라고 인정되고 연수를 받는 등 한 교원이 과거 최다의 566인에 달했던 것이 공표되었던 바로 직후부터, 표창 제도 외에, 교장이 요구하는 교원을 모집하는 「공모제」, 교원 스스로 전문성이나 우수 분야를 살려 전근처 요구하는 「FA제」등을 도입하는 교육위원회도 증가하고 있는 등 선생님의 사기를 북돋우는 제도가 확산되고 있다.
2005.1.16 일 날씨가 완연히 달라졌다. 꼴까타에 도착해서 며칠 동안은 더운 줄 몰랐는데 1월 10일 오후부터 밤새도록 비가 내리더니 그 후로 날씨는 갑자기 더워졌다. 우리나라에서 봄비가 오고 나면 더 더워지는 것처럼 인도도 그런가 보다. 인도의 봄은 2월에 오는가 보다. 본격적인 봄이 오려는 징조인가. 이삼 일 더 머물 때까지 날씨의 변화를 지켜보아야겠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시간 미사에 참석하고 깔리가트로 봉사하러 갔다. 60여 명의 환자가 있는 방에 그 특유의 환자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것은 매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기 때문인 것 알겠다. 오늘도 변기통의 똥을 치우고 오줌통으로 오줌을 받아내고 밥과 물을 나르고 약을 먹이고 빈 밥 그릇을 설거지 하는 사람들에게 나르며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외부 환자가 하나 들어왔다. 임종 직전의 환자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 분이 임종할 때까지 봉사자들이 얼마나 노력하는 지 지켜볼 수 있었다. 지켜보면서 저 형제가 조금이라도 세상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하느님 곁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화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에 들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 했다. 40대로 추정되는 환자는 가난한 인도에서 태에나 신분의 차별을 받으며 고난의 삶을 이어오다가 오늘 거리에서 임종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히 누군가의 눈에 띄어 임종의 집까지 오게 된 것이 아닐까. 한 한국인 봉사자가 인공호흡기를 계속 코에 대고 있었는데 이미 동공은 풀어져 있었고 간신이 호흡만 가늘게 유지하다가 결국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고된 삶을 살고 떠나는 것일까. 그래도 최후의 순간에 깔리가트에 실려와 여러 나라의 봉사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 속에 따뜻한 마음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두었으니 다행인 것 같다. 책입자 수녀님이 흰 까운에 덮힌 임종자에게 다가가 가운을 한 번 들추어 보고는 성호를 긋고 간다. 예사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수녀님의 행동도 아주 예사롭게 보이기만 했다. 주검은 조용한 눈을 아래로 감기게 하고는 빈 공간으로 옮겨졌다. 아무런 영안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은 빈 방일 뿐이다. 그 곳에 가운에 덮힌 시체를 두고 모두 자기 일로 돌아갔다. 미국인 세 젊은 봉사자들이 끝까지 손을 잡아주고 묵주를 들고 기도해주고 숨을 거둔 후에는 들것에 옮겨 깔리가트의 영안실로 옮겨졌다. 수사인 것 같기도 하고 봉사자인 것 같기도 한 나이 지긋한 한 서양인이 죽은 형제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고 옷을 벗기고 수의를 갈아입혀서 (창호지 처럼 생긴 종이옷 같았다) 영안실로 사용되는 빈 공간으로 옮기는 것 까지 보았다. 이 깔리가트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이 세상을 떠나 주님 곁으로 갔을까. 방금 세상을 떠난 형제도 형제들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갔으면 좋겠지만 이미 혼수상태로 왔기 때문에 그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사랑을 느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다음 절차가 있었을 텐데 지켜보지 못했다. 흰두교식으로 화장을 할지 천주교식으로 매장을 할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은 혼자 여행한다는 일본인 젊은이와 함께 남자 병동(men`s ward)에서 일했다. 경북대 의대생이라는 여자 대학생은 학교 실습의 일환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경희대 다닌다는 여학생도 있었다. 또 대학교 4학년이라고 만 밝힌 남학생도 같이 봉사활동을 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4개월째 인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봉사자는 인도식으로 복장을 차려입고 머리는 1cm정도로 짧게 깎고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봉사활동이 끝나는 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보통 한 달 이상 일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대부분 그런 것 같다. 독일에서 온 여성은 3개월 일정이라고 하고, 혼자 여행한다는 젊은이도 한 달 일정이라고 했다. 여행코스가 비슷해서인지 자주 만났던 이스라엘 대학생도 상당히 긴 여행 일정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인도에서의 여행 비용이 싸서 그런 것 같다. 1월 17일 18일 이틀 더 봉사활동을 하고 바라나시로 가자. 기차 예매를 여행사에 부탁하면 수수료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내일 직접 BBD Bagh(비비디 박)에 가서 직접 기차 표 에매를 하자. BBD Bagh은 많은 관공서가 모여있는 지역이다. 안내 책자를 보니 Esplnade거리에서 10분만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봉사가 끝나고 곧바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컨티넨탈 게스트 하우스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아이는 영어를 제법 잘 했다. 심부름도 잘 한다. 1,000루피 짜리 돈을 잔돈으로 부탁했더니 금방 가서 바꿔가지고 왔다. 영어를 곧잘해서 얘기도 많이 나누었다. 인도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를 가느냐고 했더니 가기가 어렵단다. 아마 경쟁이 심한 것 같았다. 한국에서 인도의 정보통신(IT)기술자들이 많이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더니 놀라워 하며 부려운 눈치였다. 인도를 여행하다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남한이냐 북한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마 한 때 인도는 북한과 더 가깝게 지낸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남한과 북한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북한은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나쁘다.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이며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남북으로 분단되어 50년이 넘도록 헤어진 부모형제를 못만난다. 그 동안 남한은 경제적으로 많이 발전했는데 북한은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온다고 했더니 놀라워하면서 자기들도 파키스탄과 한 나라였는데 갈라졌다고 한다. 1945년 영국으로부터 인도가 독립했듯이 한국도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고 하니 한국과 일본이 한 나라였느냐며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한 나라가 아니라 일본이 한국을 침범하여 36년 동안 지배했다고 하니 또 놀라는 눈치다. 모든 인도인들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아이는 다른 젊은이들에 비해서 비교적 영어를 잘하는 편이다. 어디서 영어를 배웠느냐고 하니 학교에서 배웠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했다. 한국에 가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고 하기에 100만원 정도 벌 수 있다고 하니 Take me. Take me. 라며 자기를 데리고 가라고 매달리는 것이다. Kolkata에 한국 음식점이 없냐고 하니까 없다며 나보고 하나 차려서 자기가 일하게 해달라고 또 조르는 것이다. 그 아이가 말하는 대로 계산을 해보니 2만 달러(2천만원)면 음식점을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콜카타에 한국음식점을 차려서 같이 일하자고 막무가내다. 이렇게 여관 종업원 아이들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동양인 여자가 들어온다. 한국사람이냐고 하니까 그렇단다. 6개월 째 혼자 인도 여행을 하고 있단다. 네팔에서 비자를 다시 받았단다. 3월까지 더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9개월 일정으로 인도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니 인도 매니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깔리가트 임종의 집에서 우리들에게 한국말로 자세하게 봉사활동 일정과 장소 시간 등에 대해서 안내를 하던 30대 자원봉사자는 작년 3월부터 2년 가까이 임종의 집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경제적 부담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나도 퇴직 후에 인도 유학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타고르의 시를 연구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방만 하나 마련하면 하루 5,000원으로 생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제는 한양대 중국어과 정옥이라는 학생과 선배라는 인하대 경영학과 학생과 함께 번화가인 New Market 근처에 갔다가 다시 Park Street에 있는 Himalaya라는 상점에 가서 나는 20루피 짜리 샴프 하나를 사고 두 사람은 1300R씩 화장품과 기타물건을 샀다. 가격이 확실히 싸다. 우리돈 32,000원 정도인데 물건이 한 보따리 씩이다. 지금은 여행일정이 많이 남아서 물건을 못 사지만 여행을 끝내고 다시 콜카타로 돌아왔을 때 히밀라야 대리점에 와서 화장품과 건강 제품을 사야겠다고 계획을 세워보았다. 타고르의 저서도 몇 권 사고 싶었다
고교 교사들이 수능시험을 끝마친 제자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충북 증평군 소재 형석고등학교 교사 8명으로 구성된 보컬 팀 '링크'(Link.리더 신범식.45)는 21일 오전 이 학교 체육관에서 수능시험을 마친 고등학교 3학년생과 형석중학교 3학년생 250여명을 대상으로 '선생님이 여는 3학년을 위한 콘서트'를 열었다. 링크는 이날 자신들의 학창시절 때인 1970-1980년대에 유행했던 '나 어떡해', '어쩌다 마주친 그대' 등 대중 가요와 팝송, 경음악 등 7곡을 공연했다. 1시간 동안 펼쳐진 이날 공연에서는 앙코르가 이어져 2곡을 더 부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워 입시에 지친 학생들과 교사들이 모처럼 하나가 돼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링크가 구성된 것은 올 3월. 대학 때 보컬 활동을 한 경험이 있던 신 교사가 제안해 평소 음악에 관심이 있던 교사 8명이 뜻을 모아 팀을 구성했다. 음악을 통해 학생들과 소통을 하자는 의미에서 팀 이름도 연결이라는 뜻의 링크로 정했다. 교사들 대부분은 처음으로 악기를 만졌지만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트럼펫, 색소폰 등으로 역할을 나눈 뒤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몇 개월 전부터는 매일 점심시간과 퇴근 후 3시간 이상 연습을 하는 강행군을 이어가 지난 10월 학교 축제인 '반탄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이날 두 번째 공연을 가졌다. 신 교사는 "교사들이 지도하는 과목이 한문, 중국어, 수학, 영어, 과학 등 다양했지만 학생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자는 한 마음으로 뭉쳐 꾸준히 연습한 결과 무대까지 오를 수 있었다"며 "교사들의 콘서트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 한글 자음이름 영어의 알파벳은 알면서 한글 자음은 제대로 모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는 지식 이전에 국어를 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ㄱ-기역 ㄴ-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이응 ㅈ-지읒 ㅊ-치읓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ㅎ-히읗 이 중에서도 특히 'ㅌ'은 많은 분들께서 '티긑'으로 발음합니다. '티긑'이 아니라 '티읕'입니다. 2) [안] 과 [않∼] 안과 않도 혼동하기 쉬운 우리말 중의 하나입니다.‘안’은 아니의 준말이요,‘않’은 아니하의 준말이라는 것만 명심하면 혼란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의 소비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는 문장에서 않으면은 아니하면의, 안은 아니의 준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3) [∼던] 과 [∼든] "∼던과 ∼든도 많은 혼란이 일고 있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던은 지난 일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고, ∼든은 조건이나 선택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꿈을 그리던 어린 시절」,「그 책은 얼마나 재미가 있었던지.」의 예문은 둘 다 과거를 회상하는 말이므로 ‘∼던’을 사용해야 하고, 「오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라.」,「눈이 오거든 차를 가지고 가지 마라.」의 경우는 조건·선택을 나타내므로 ‘∼든’을 써야 합니다. 4) [∼ㄹ게] 와 [ ∼ㄹ께] "이 경우는 ∼줄까?, ∼뭘꼬? 등과 같은 의문 종결어미는 'ㄹ소리' 아래의 자음이 된소리가 납니다. 이때에만 된소리로 적으면 됩니다. 그러나 ∼할걸, ∼줄게 등과 같은 종결어미는" 1988년의 한글맞춤법에서 예사소리로 적어야 한다고 규정을 바꾸었답니다. 그러니「그 일은 "내가 할게.」,「일을 조금 더 하다가 갈게.」로 써야 바른 표기입니다." 5) [예부터] 와 [옛부터] '옛'과 '예'는 뜻과 쓰임이 모두 다른 말인데도, '예'를 써야 할 곳에 '옛'을 쓰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옛은 '지나간 때의'라는 뜻을 지닌 말로 다음에 반드시 꾸밈을 받는 말이 이어져야 합니다. 예는 '옛적, 오래 전'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 이것을 바로 가려 쓰는 방법은, 뒤에 오는 말이 명사 등과 같은 관형사의 꾸밈을 받는 말이 오면, '옛'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예'를 쓰면 됩니다. 예를 몇 개 들어 보면 그 뜻이 명확해질 것입니다. 「예부터 전해 오는 미풍양속입니다.」,「예스러운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닙니다.」,「옛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있습니다.」,「옛날에는 지금보다 공기가 훨씬" 맑았습니다.」 6) [우레] 와 [우뢰] 소나기가 내릴 때 번개가 치며 일어나는 소리를 '우뢰' 또는 '천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행 표준어 규정에서는 이 '우뢰'를 표준어로 삼지 않고, '우레'와 '천둥'을 표준어로 삼고 있습니다. "우레는 울게에서 나온 말이고, 울게는 울다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레를 억지 한자로 적다" 보니 우뢰(雨雷)라는 말이 새로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레는 토박이말이므로 굳이 한자로 적을 이유가 없답니다. '우뢰'는 이제 표준어 자격을 잃고 사라진 말이니 사용하면 안 됩니다. 7) 띄어쓰기 [성과 이름] "성과 이름, 성과 호 등은 붙여 쓰고, 이에 덧붙는 호칭어, 관직명 등은 띄어 쓰고 우리말 성에 붙는 '가, 씨'는 윗말에 붙여 씁니다." 김대성, 서화담(徐花潭), 최가, 이씨, 채영선 씨, 이충무공, 우장춘 박사, 이순신 장군, 백범 김구 선생, 김 계장, 철수 군, 이 군, 정 양, 박 옹 ☞ 다만, 성과 이름, 성과 호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띄어 쓸 수 있습니다. " 남궁선/남궁 선, 독고탁/독고 탁, 구양수/구양 수, 황보지봉/황보 지봉, 존 케네디, 이토오 히로부미 등 "
최근 정부가 해가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국민연금 및 공무원 연금의 적자 해소방안의 하나로 부담률은 높이면서 급여율은 낮추는 방향으로 연금 규정을 손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공직사회와 교육현장이 또 다시 술렁거리고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 IMF파동이 빌미가 되어 정년을 65세에서 62세로 단축하는 바람에 3만여명의 중견교원들이 학교현장을 일거에 이탈하는 바람에 교단이 얼마나 심한 몸살을 앓았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연기금의 적자도 따지고 보면 IMF 당시 공무원을 구조 조정(약 11만 추정)하면서 퇴직수당 및 비용을 정부가 별도로 부담하지 않고 연기금에서 지출한데다가 주식투자 및 정부재정 손실을 고스란히 연기금에 전가시킴으로서 야기된 것이 아닌가. 교직 사회는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다. 또다시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전국 초·중등교원의 명예퇴직 신청이 폭주해 이른바 교직사퇴 대란이 일어난다면 국가 재정의 고갈은 말할 것도 없고 일선교육현장은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서 이제 진부하게 들린다. OECD 국가를 비롯한 선진국들은 교육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교육혁신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철 지난 ‘평등’교육 이념에 사로잡혀 정말로 서둘러야 할 교육과제는 손도 대지 못하고 교육본질과는 거리가 먼 사안으로 계속 교직 사회만 흔들리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국가재정을 압박하고 있는 연기금 적자를 그냥 내버려 두자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이번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 동안 수급자들이 낸 기금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으며 연기금 부실 운영의 잘못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 속내를 확연하게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주자십훈엔 안불사난패후회(安不事難敗後悔)라는 말이 있다. ‘편안할 때,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 한다’는 뜻이다. 최근 통계청에서 발표한 장래인구 추계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이미 고령인구 비율이 7%를 초과해 고령사회에 진입했으며 ‘베이비 붐’ 세대들이 신 고령층으로 접어드는 2026년경에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들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따라서 젊은 세대 3명이 1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한다고 하면서 걱정하는 소리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한 발 앞서 고령사회로 진입한 미국에서는 은퇴노인들을 상대로 한 평생교육시장이 2년새 50%나 성장했고, 프랑스에서는 실버산업이 점점 번성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보다 경제수준이 낮은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같은 동남아 국가들은 사시사철 따뜻한 기후와 저렴한 물가, 영어 사용 같은 이점을 살려 선진국의 은퇴자 이민 잡기에 안간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마다 2만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가정을 떠나 해외로 빠져 나가고 은퇴자들마저 안락한 노후를 위해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니 심한 자괴감마저 든다. 이러다가는 이 나라가 빈껍데기만 남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가까이 있는 나무만 보지 말고 먼 숲을 보는’ 혜안으로 국가 재정도 살리고 수급자들도 수긍할 수 있는 연금 규정이 마련되기를 기대해 본다. 다시는 이 땅에 교직사퇴 대란이 없기를 바라면서….
충북도교육청은 21일 내년 3월 1일자 교원 초빙 공모제 운영학교를 지정하고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공모를 실시하도록 했다. 교장을 초빙하는 학교는 충주 대소원초와 보은 수정초, 청주 죽림초, 청주중앙여중, 영동고, 제천디지털전자고, 제천산업고 등 7개교이며 교사는 30명을 공모한다. 교장 공모 학교 가운데 대소원초와 영동고, 제천디지털전자고는 전국 단위에서, 다른 4개 학교는 도내에서 초빙 공모를 하게 된다. 또 교사 공모는 도내 국.공립학교 재직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데 영동고가 5명(국어, 영어, 일반사회, 전산, 체육 각 1명)으로 가장 많고 ▲청주중앙여중 4명 ▲충주고 ▲충주여고 ▲충주예성여고 ▲진천고 ▲제천고가 각 3명씩이다. 이밖에 괴산고가 2명이며 대소원초, 괴산중, 단양고, 제천디지털전자고 등이 1명씩의 교사를 초빙 공모한다. 이들 학교는 내년 1월 2-3일 서류를 접수하고 1월 12일 학교운영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1월 16일까지 초빙교원의 2배수를 임용추천하면 교장은 대통령이, 교사는 교육감이 각각 임명하게 된다.
학교 교육에서 수업은 생명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업에 대하여 학생들의 만족도가 낮다면 개선하여야 하는 것이 현장의 과제이다. 중학교1학년의 영어수업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음독에 대하여 다른 학생의 코멘트를 요구했다.「소리가 커서 알아듣기 쉬웠다」,「열심히 하였다」라고 한 소감을 발표하였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반성하는 시트」에 자신과 친구가 좋았던 점도 쓰게 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2학년의 수학에서는, 다각형의 내각의 합을 요구하는 「재미있는」대각선의 긋는 방법을 한 학생에게 교사가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다」라고 하고, 모두의 앞에서 다른 학생에게 설명을 시켰다. 이와같이 이번 달 14일에 오사카부 히라카타시립 쿠스노하중학교를 방문하여,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의 「좋은 곳 찾아내기」를 하는 장면을 몇번이나 봤다. 이러한 수업은 이와타니 교장(49살)이 부임한 3년 전부터, 교사의 기본적인 태도로서 철저하게 해 왔다. 이를 위해 교사들에게는「내가 좋은 곳을 찾아낸다. 평가는 가점방식으로 한다」라고 선언하였다. 방과 후 자신의 학급을 정성들여 청소하거나 동아리 활동으로 열심히 지도를 하거나 하고 있는 교원을 찾아내서 동료가 있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칭찬하도록 노력했다. 당시 이 교장은 일본 전국에서 최연소 교장이었다. 이 교장이 부임할 당시에는 교내에 담배 꽁초가 굴러다닌 학교였다. 보호자나 학생에게서는 「무책임한 발언이 너무 많다」, 「학원의 수업이 알기 쉽다」라는 등, 교원에게 엄한 평가가 난무하였다. 교원의 3분의 1이 연상이었지만, 「교원의 의식을 바꾸려면 , 우선 행동을 바꾸는 것이다」라고 자신으로부터 솔선해 시작했다. 우선 방과 후의 보충 학습을 3년생 대상으로 시작해 교원 지망의 학생을 자원봉사로서 활용하였다. 학생에 대해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이 교원들에게 자극이 되는 것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2년차에는「인연학원」이라고 이름 붙인 이 학원을 하급생도 대상으로 하는 것과 동시에 전 교원을 대상으로 한 PC를 사용한 수업 진행하기 연수를 하는 등, 전교적인 수업 개선에 나섰다. 금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이 「탈설교형」의 수업이다. 학생에게 생각하게 해 자신의 사고 과정을 설명시키는 것으로, 학생 자신들이 서로 가르치면서 학습을 촉진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타니 교장이 「배움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수업 스타일이다. 이같은「배움사랑」에는「수업 중에서 인간 관계 만들기가 제일이며, 학력은 나중에 따라 온다」라고 하는 신념이 들어 있다. 또한,「수업 만들기 위원회」를 만들어 주 1회, 교감이나 주임급의 교원들과 교장실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자신의 수업에 대한 방법을 전하는 장소로서 이와타니 교장이 강의를 하는 것도 많았다. 위원회의 멤버의 한 사람으로, 수학교사인 후나하시교사(46)는 이를 되돌아 보면서 지금까지의 수업은 확실히「설교형」이었다. 그런 만큼 「 실제로, 생각 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는 수업에 초조해 한 적도 있었다」라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학생은 적극적이다. 어느 쪽이 학력이 붙을까 검증은 지금부터이다라고 기대된다」는 것이다. 정년까지 아직 11년 정도 남아있는 젊은 교장의 경영 수완이 앞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한편 문부과학성에 의하면, 2004년도말의 정기 인사로 공립 학교의 교장이 된 5,232명의 평균 연령은 53.2세이다. 신임 교감의 평균 연령은 48.8세였다. 올 연도말에 요코하마시에서는 기업 출신의 32세 교장이 탄생하고 있지만, 2003년도의 최연소는 46세로 20명이나 되고있다.
전국 방송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즈음 충청지역 초미의 관심사중 하나는 “장항 산업단지 착공(이하 ’장항 산단‘) “을 요구하는 서천 군민의 성난 민심이다. 얼마 전에는 서천군수가 상경하여 죽음을 건 단식을 하기도 하여 여론의 주목을 약간은 받은 모양이나 지방의 일이라 그런지 갑자기 찾아온 동장군처럼 사회의 관심은 냉랭하기만 하다. 오늘 중부지역 최대 일간지인 ㅊ, ㅈ, ㄷ 모 신문들의 지역민을 자극하는 제목들을 한 번 보자. '장항 산단' 초등생도 화났다 서천 집단등교거부 사태… 정부, 원점 재검토 입장 고수 화난 서천군민 결국 등교거부 서천 '등교거부' 사태 중ㆍ고교 확산 조짐 장항 산단 비대위, 문화강좌ㆍ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 운영 필자는 장항 산단 착공의 당부(當否)와 필요성 유무를 논박하지는 않겠다. 비록 서천 사람이 아니라서 입바른 소리만 한다고 뭐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 아버지 입장으로, 교육계에서 일하고 있는 공무원으로서 한 마디 해야겠다. 아무리 자기들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관철시키고 싶다고 해도 소중한 아이들을 볼모로 한 상태로 협박을 할 수는 없다. 또한, 이렇게 해서 얻어낸 소득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겠지만, 공교육을 무시하고 믿지 못하는 마음이 어떠한 것 보다 컸기에 그러한 등교거부 행위를 더욱 조장하고 방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나쁜 생각들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비록 그 어렵고 험난하다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때에 살지 않은 사람이지만 우리 조상들은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붕도 없는 운동장에 거적을 깔고 가르쳤다. 그렇게 배웠던 사람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반석위에 올려놓는데 어느 정도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때보다 사정이 더 나은 현실에서 학교에 더 보내고, 가르침을 받으라 말해도 시원찮을 판에 학교를 가지 말라고 선동하고, 학교 수업을 일찍 끝낸 후에 체육관에서 영어 학원 선생이나 댄스교실 선생을 데려다 가르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어떤 학부모 머리에서 나왔는가? 물론 가슴에 불이 일어난 서천군민의 민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지난 ’89년 정부는 지리적으로 서해안 중심지역이며 타 지역에 비해 경제력이 취약한 장항과 군산을 묶어 약 1천만평 규모의 장·군산업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하고 국가산업단지로 지정·개발을 추진하였다. 이후 군산지역은 꾸준한 단지 조성사업 추진으로 4백82만평 규모의 국가산업단지가 연내 완공을 앞두고 있으며, 지엠대우자동차 등 120여 업체가 이미 입주, 활발한 가동으로 군산지역 경제 활성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는 반면, 같은 시기에 국가산업단지로 지정된 장항지역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부 어업권 보상만 되었을 뿐 착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몇 차례에 걸친 환경영향평가로 그 규모도 당초 4백90만평에서 3백72만평으로 축소된 상태라고 하니 힘이 없어 홀대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학습권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현재가 무슨 전시도 아니고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배우지 못하는 그런 상태는 아니다. 이런 문제 발생의 원천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표만 의식한 노태우 전 대통령부터 이후 대통령들의 묵인 내지 방조가 한 몫을 했다. 추진하려면 면밀히 검토하여 확실히 추진을 하든가, 사업성과 환경파괴의 가능성이 커 경제성이 떨어지면 과감히 취소를 하든가 해야 하는데 유야무야 임기만 지나기를 바라고 있다. 이러한 정치인들의 무능과 일부 교육자의 미온적이고 방관자적인 행태, 학생을 배척하는 학부모의 태도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어떤 이는 "학부모의 등교거부는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장항산단이 지역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문제로 대두돼 전군민의 관심이 쏠려있는 만큼 등교거부 추이를 살펴 대처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고 한다. 어떤 학부모는 "자식까지 극한투쟁의 자리로 내몰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아이들에게 발전된 고향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향후 투쟁 강도를 더욱 높여 갈 것이며,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군민을 기만해 온 정부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모든 교육자와 학부모가 위와 같이 생각하지는 않아서 해당 지역교육청에서는 장학사를 중심으로 해당 학교장들이 학생들이 등교하도록 부지런히 설득을 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지역의 문제가 시급하다 하더라도 학생을 볼모로 등교거부를 조장하고, 공교육을 불신한 나머지 사교육에 의지해 보충수업하면 그만이다는 잘못된 생각으로 과격한 행태를 더욱더 지속시킬 수 있다는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이러한 큰 문제는 도교육청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설득하여 학생을 등교시키도록 해야 하며, 서천군민들의 의견은 합법적으로 표출할 수 있도록 설득해야 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도 아이들의 학습권은 침해받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