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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이란 긴 세월 때문인가? 남북분단에 대한 국민들의 안보와 역사의식은 점점 퇴색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위정자들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어 지금도 그 진실된 안보의식을 왜곡시키고 있어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북한에게 당한 무력 도발은 너무나 많은데 그 중에서도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큼직한 무력도발 사건때문에 선량한 국민들은 납치당하고 훌륭한 인재들은 말없이 죽어가야만 하는 이 슬픈 사연을 망각하고 살고 있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 그 동안(60년) 북한의 도발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만한 13차례에 걸친 도발은 아직도 상상하기도 싫은 사건들이다. 특히 창랑호 납북사건(58.2.16), 당포함 침몰사건(67.1.19), 1.21사태(69.1.21), 대한항공기 납북사건(69.12.11),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76.8.18),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83.10.9), KAL기 폭파사건(87.11.29),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96.9.18), 제1차 연평해전(99.6.15), 대청해전(09.11.10), 제2차 연평해전(02.6.29), 천안함 폭파사건(10.3.26), 연평도 포격사건(10.11.23) 들을 국민 모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국가번영의 전제조건은 국가의 안보가 최우선인데 날이 갈수록 국가 안보의식은 위험한 수위에 도달하고 있다는 각종여론 조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갤럼이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전국 13세 이상 1703명을 대상으로 ‘6.25전쟁이 언제 발발 했는지에 관해 물었더니’10대(13-19세), 20대, 30대, 40대, 50대에게 설문했는데 ‘모르고 있다’가 각각 62.9%, 58.2%, 33.7%, 20.1%, 27.1%로 나타났다.특히 '1950년'이라고 정확하게 답한 응답자는 60.9%였고, 39.1%는 '모른다'거나 잘못된 연도를 답했다. 특히 13~19세에선 전쟁 발발연도를 모르는 경우가 62.9%, 20대에서도 58.2%나 됐다. 또 6·25 전쟁에 대한 책임이 가장 큰 나라를 묻는 질문에는 '북한' 43.9%, '남북한 모두' 16.9%, '일본· 중국 등 한반도 주변국가' 11.5%, '미국' 10.9%, '소련' 8.5%, '한국(남한)' 2.3% 등의 순으로 답했다.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에 대해해도 1995년 갤럽조사에선 '있다'가 52.7%로 '없다'(47.3%)보다 높았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있다' 43.8%, '없다' 52.2%였다. 15년 전에 비해 북한의 전쟁 도발에 대한 우려가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절반에 가까웠다. 통일에 대한 견해도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23.9%), '10년 후쯤 점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47.0%) 등 70%가량은 통일을 원했지만, '통일보다는 현재대로가 낫다'(26.0%)는 응답자도 전체 4명 중 1명에 달했다. 통일을 원하지 않는 응답자도 지난 2001년 갤럽조사의 7.6%에 비해 약 10년 만에 3배 이상이나 늘어났다고 한다. 또 2010.10.11 한겨레 21에서 ‘북한권력의 3대 승계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가’라는 국민의식을 조사한 결과 매우 그렇다 59.5%, 비교적 그렇다 24.6%로 나타났다. 국가보훈처도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9월27일부터 10월29일까지 전국 15세 이상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전화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만약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나라를 위해 싸우겠냐'는 질문에 75%가 답변했다. 그 뿐만 아니다. 연평도 도발 이후 2010.12.2일부터 13일까지 마감된 2011년2월7일과 14일에 입영을 희망하는 해병대 모집에 총 971명 모집에 3450명이 지원하여 평균 3:1의 높은 경쟁률(일반 634명 모집 2465명이 지원 3.8:1, 수색 11명 모집 231명이 지원 21:1, 화학 10명 모집 43명이 지원 4.3:1, 공병 26명 모집 86명이 지원 3.3:1, 정보통신 124명 모집 270명이 지원 2.1:1, 수송 130명 모집 291명이 지원 2.1:1)을 보였는데 지난해 12월 해병대 지원율인 2.2대 1보다 크게 경쟁률이 높았다. 지난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인한 우리 측 사상자가 45명(사망2명, 부상자43명) 건물파괴 134동에 달하고 대부분 해병대 군인 이였는데도 불구하고 해병대 지원자가 예년보다 더 높았다는데 우리는 안도하며 ‘귀신 잡는 해병대’ 젊은 청년들에게 박수를 보내자. 끝으로 위에서 본 각종여론 조사에서 공통된 내용은 국민들의 안보의식이 매우 결여 되었는데 특히 나이가 젊을수록 그 현상이 심하다는 통계를 보면서 국민안보교육이 그 어느 때 보다 시급하다. 그러므로 정부나 각종언론 단체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들도 그 어느 때 보다 시선집중이 필요하고, 특히 각급학교는 2011학년도 교육계획 수립시 철저한 안보의식 교육을 더 강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패러다임 변화를 기대 해 본다.
올해 시·도교육청의 종합청렴도가 공공기관 중 가장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에 비해 청렴도평가 등급이 크게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는 9일 706개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청렴도를 측정한 결과, 시·도교육청의 종합청렴도가 10점 만점에 7.96점으로 지난해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고 밝혔다.전체 공공기관 종합청렴도는 8.44점으로 시·도교육청은 중앙행정기관(8.59), 광역자치단체(8.55), 기초자치단체(8.37)보다 크게 낮은 수준이다. 시·도교육청은 민원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외부청렴도에서 8.04점(평균8.62점), 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내부청렴도에서 7.73점(평균 7.96점)이 나왔다. 16개 시·도교육청 중 서울은 인사비리 등이 크게 불거지면서 내부청렴도가 지난해 ‘보통’에서 올해는 ‘매우미흡’(7.13점)으로 크게 떨어져 종합청렴도에서도 ‘미흡’ 등급을 받았다. 충남도교육청은 외부청렴도가 7.41점으로 ‘매우미흡’ 등급이 나왔다. 반면 제주도교육청은 외부청렴도와 내부청렴도가 각각 8.68점, 8.48점으로 ‘매우 우수’ 등급으로 평가됐다. 193개 공공기관의 반부패·청렴활동 노력도를 평가하는 ‘공공기관 부패방지시책평가’에서도 ‘매우 우수’ 등급이 나왔다. 권익위 관계자는 “인사비리 의혹이 드러난 경우 외부 민원인은 물론 소속 직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내부청렴도 평가점수가 낮게 나타나 종합청렴도에도 부정적으로 반영된다”고 밝혔다. 이번 평가결과는 교과부에서 시행하는 시·도교육청 평가에 반영되며 권익위는 청렴도가 미흡한 기관에 대해서는 청렴도 개선계획을 제출받아 이행사항을 점검할 예정이다.
NSCI라? 신문을 보니 낯선 단어가 눈에 들어 온다. NCSI는 국가고객만족지수(National Customer Satisfaction Index)다.국내외에서 생산, 국내 최종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는 제품 및 서비스 품질에 대해 해당 제품을 직접 사용해 보고 이 제품과 관련된 서비스를 받아 본 고객이 직접 평가한 만족수준의 정도를 모델링에 근거하여 측정, 계량화한 지표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이 교육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교육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아래의 예를살펴 본다. 성균관대학교는 올해 도서관 서고에 있던 서적 160만여 권 가운데 3만권가량을 뺐다. 몇 년간 교수나 학생들이 한 번도 대출해가지 않은 책들이었다. 대신 그 공간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새 책을 채워넣었다. 학교 관계자는 "책을 빌려가는 수요자의 요구 사항을 파악해 책을 다시 배치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가 올해 국가고객만족도(NCSI) 사립대학교 부문에서 4년째 정상을 차지한 비결은 도서관 서적 관리에서 드러나듯, 수요자를 가장 우선에 두는 학교 운영이다.성균관대는 2005년 학생들의 불만족 사항을 과학적으로 측정, 분석해 문제점을 최소화하는 6시그마 기법을 국내 대학 최초로 도입했다고 한다. 필자의 자녀 고등학교 3학년 두 명이 올해 대학교에 합격했다. 아들은 성균관대학교 전자전기컴퓨터공학계열에 수시 1차로 합격했고 딸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수시 2차 일반전형에 최종 합격했다. 어제 즐거운 마음으로 등록 예치금과 수업료 일부를 납부했다. 처음으로 대학 학부모가 되는 것이다. 두 대학의 합격과정을 지켜보면서 고객만족도를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성대는 합격자를 조회하는데 학생에게 감동을 준다. 배경화면과 축하글과 흘러나오는 음악이 하나의 작품이다. 그 동안의 고생을 위로하고 성균관인이된 것에대한 자부심을 갖게 한다. 그 뿐 아니다. 합격 발표 하루 전날 합격통지서를 인터넷으로 출력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총장 명의로 된 합격통지서와 총장의 축하 편지가 상장 하드표지에 포장이 되어 택배로 도착하였다.축하 시기와 방법도 가히 극적이다. 다만 입학생 등록금 전화 문의에 대한 해당 부서의 응대는 감동 수준이 아니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합격자 발표 과정을 보니 성균관대학교를 따라 잡으려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고객 감동은 찾기 어렵고합격자 유의사항 등의 안내에 따라 행정사항 위주로 되어 있다. 아직 합격통지서 택배는 받지 못하였다. 필자는 자녀가입학한 두 대학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학부모로서 학생을 고객으로 대하는 일면을 살펴봄으로서학교의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2010학년도국가고객만족도지수를 보면 서강대는 성균관대에 2점 뒤진 74점으로 작년 4위에서 2위에 올랐다. 이어 이화여대(72점)가 3위(작년 4위), 고려대와 경희대(각각 69점)가 공동 4위를 차지했다. 고려대는 작년 9위였고 경희대는 작년 순위가 2위였다.연세대와 숙명여대(각각 66점)가 공동 6위(작년에도 공동 6위)를 차지했다. 국가고객만족지수 1위,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을 느꼈다. 우리 학교도 학생과 학부모가 항상 만족도를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학교건 기업이건 고객을 최우선 순위로 생각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정치는 모르지만 최저생계비 없앤 처사엔 분노한다 지난 10일 결행된 2011년 예산안 통과를 보는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습니다. 다른 항목은 깊이 따져 보지 않아 뭐라고 할 입장이 못 되지만 방학 중 결식아동 예산을 한 푼도 책정하지 않은 것에는 분노를 금할 수 없어서 이 글을 씁니다. 우리 학교 아이들만 보아도 상당수가 결손 가정이거나 조손가정으로 방학을 하면 점심을 대충 먹거나 아예 집에서 식사가 힘든 아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중 한 끼 만이라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학교 급식이 없는 겨울방학은 그 아이들에게는 슬픈 시간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은 아이들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많을 텐데 방학 중 결식아동 지원을 더 늘여야 할 판에 아예 책정된 예산마저 없애버린 어른들의 처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방학 중 결식아동 지원예산 0원 소식에 생각나는 분교장의 애환 엄연히 공무원인 처지로 대놓고 국가 일을 비판할 수는 없지만 교단 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 현직 교사로서현장의 실태까지 외면하는 일은 리포터의 자세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이 글을 씁니다. 결식아동 예산이 0원이라는 소식은 오래 전 분교장 시절의 애환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나니까요. 2년 동안 분교장부장교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학년 초 예산을 짜서 본교 교장 선생님의 재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첫해 1년은 다행히 인정 많은 교장 선생님 덕분에 가난한 분교장의 실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요청한 예산보다 더 많이 얹어주셔서 폐교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떨쳐 내며 행복한 학교를 가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새로 오신 본교 교장 선생님은 분교 예산을 사사건건 트집 잡아서 뭉텅뭉텅 깎아내리기 시작한 겁니다. 마치 폐교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 것처럼 분교장의 어린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불리하도록 일처리를 해 나가는 관리자 앞에서 분교장부장교사 업무를 추진하던 필자의 고충은 뒤로 하고 불이익을 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투쟁 아닌 투쟁을 위해 내 나름대로 설정한 예산안으로 1년 간 몸부림을 치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마음이 경직되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교장부장교사로서 내가 생각해 낸 살아남기 전략은 이러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들의 학습권을 지켜주는 최저생계비, 즉 학습준비물은 단 1원도 깎지 않도록 지켜낸 것입니다. 겨울철 난방비인 기름 값은 깎아도, 복사용지를 최대한 아껴 쓰며 용지값은 깎을 때에도 참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최저생계비인 1인 당 1만원의 학습준비물은 단 한푼도 깎을 수 없게 못을 박았던 것입니다. 학습준비물 품목을 보면서 항목마다 붉은 줄을 그으며 삭제를 종용하던 관리자에게, "교장 선생님, 그것만은 안 됩니다. 분교장 아이들의 최저생계비입니다. 추운 겨울에 덜덜 떨면서 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할 망정 학습 준비물 없는 공부만은 시킬 수 없으니 손대지 마십시오." 라며 지켜 냈던 씁슬한 기억이 국회 예산 통과를 보면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분은 사도대상까지 받으셨으니, 더욱 기가 찰 노릇이라며 분개했던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국격에 먹칠한 엉터리 국회, 아이들에게 부끄럽다 최소한의 규칙도 지키지 않은 채 힘의 논리로 밀어부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도 부끄럽습니다. 예산안을 심의하고 토론하며 계수를 조정하는 일은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결정되면 뒤집을 수도 없는 국가의 법이 한 순간에 날치기로 통과하는 모습은 배우는 아이들에게 은연중에 어른들을 무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결과보다 과정의 중요함에 있음을 배우는 아이들에게 국회의 모습은 부끄러운 어른들의 숨기고 싶은 모습이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을 더 생각해 주고 보듬어 주어야 할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들이 한참 자라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는 결식아동의 방학 중 점심값보다 더 급한 예산이 뭐라고 그렇게 불이나케 통과시킨건지 변명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부끄럽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아야 하는지, 각계 각층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세계에 떨치고 있는데 국격에 먹칠하는 국회의 모습을 2011년도에는 더 이상 중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강한 자에게 더욱 강하고 약한 아이들의 최저생계비엔 냉혹한 대한민국 국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어떻게 씻을까요?
올해 처음으로 시행된 교원평가 결과가 나왔다. 물론 교원들은 모두 자기평가 결과를 확인했지만 그 결과는 학생들의 성적만큼이나 관심이 큰 것이 사실이다. 그런대로 잘 평가 받은 교원들은 괜찮지만 생각보다 나쁘게 평가 받은 교원들은 불만이 가득하다. 사회일각에선 교원 상호평가의 높은 점수를 놓고 ‘자기식구 감싸기 등’ 말이 많다. 학부모 들은 평가당시에는 평가에 관심이 별로 없고 “잘 모르는 상항에서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등 볼멘소리였으나 이젠 그 결과를 놓고 다들 설왕설래하고 있다. 교원은 교원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모두가 불만족하다는 표정이다. 교과부는 이번 교원평가에서 재교육 심사대상으로 1056명의 교사를 선정했다. 이는 전체 교사 35만명 가운데 0.3% 정도이지만 당사자는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름대로는 ‘열심히 했었는데’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지만 평가는 역시 평가의 기능을 했다. ‘미흡하다’는 점수를 받은 단기 연수 대상자가 920명이며, 이보다 점수가 더 낮은 장기연수 대상자는 13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장기 연수 대상에는 16명의 교장, 교감도포함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 연수를 받는 교원이 내년 평가 때도 장기 연수자로 재선정되면 집합연수를 받게 돼 수업에서 아예 배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교원정책에서 초유의 사태가 예견된다. 반면 우수한 성적을 받은 교사 500명에게는 최대 1년의 연구년(안식년)이 주어진다는 당근 정책도 제시하였다. 조용하던 교직에 새로운 회오리바람이 일고 있다. 교직이 평생직장이라는 말도 곧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마저 든다. 그러므로 이젠 교원도 새로운 교육정보와 교육이론을 습득하고 교수-학습방법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교단을 지킬 수 없다. 다시 말해서 급변하는 교육환경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자기연찬과 연수로 자기계발에 힘써야 한다. 교원은 다른 직업인들과 든 특성 중의 하나가 지속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교육의 전문가로서 자질을 함양하여 훌륭한 스승의 교육역량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교원평가제는 현행 교원에 대한 평가가 승진에 초점이 있어 재직 중 교원의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비판에 따라 도입하게 되었고, 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위한 자기진단 목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과부는 이번에 처음 계획과는 달리 두 번이상 장기연수 대상자로 선정되면 사실상 퇴출될 가능성도 있음도 예고했다. 이 같은 예상은 내년도 장기연수 대상자로 된다면 수업에서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문제는 교원평가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다시 수면위로 나타나 교원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교총이나 전교조가 모두 평가방식의 객관성을 지적하고 있어 교원평가도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아무튼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교원도 예외일 수는 없고 어떤 식이로든 평가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교육 선진국들의 대세이다. 피터 드러커는 자기계발을 성과를 올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자기계발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사상이나 인성 따위를 포함한 슬기나 재주 등을 통하여 일깨운다는 뜻이다. 즉, 인위적인 교육이나 학습을 통해 어떤 능력이나 솜씨 등을 향상시킨다는 의미로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자기계발을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고 있는 이유는 급변하는 사회변화에 대한 불안과 다양한 직업 환경에 적응, 그리고 자신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확실한 미래의 삶을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잠재능력을 계발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다양한 잠재능력을 얼마나 깨우쳐 계발하여 활용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성공적인 삶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교원들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흥미, 특성, 소질 및 적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를 계발하여 교직에 활용하는 것이 성공적인 교원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요인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리석으며 부지런한 ‘최악’의 지도자 안돼야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 날마다 반복되는 하루인데 일 년이라는 단위를 만들어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반성하게 하고, 하룻밤이 지나 새해가 되면 다시 희망 속에서 일 년을 설계하도록 기회를 준 인류의 조상께 고마움을 느끼는 시점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늘 선생님을 존경했었는데, 중학교 때 선생님으로부터 입었던 마음의 상처가 커서 교사는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교사가 되어 평생을 살아가면서 연말이면 나를 돌아다본다. 만일 내가 아니었더라면 더 나은 선생님이 내 대신 학생들 앞에 서서 아이들이 더 행복하게 성장하도록 돕지는 않았을까? 그러한 반성이 나를 더욱 작게 만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이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도 되었던 것 같다. 최근 마주친 말 중에 100세에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본 성누가 국제병원의 히노하라 시게아키 이사장 말이 생각난다. “매년 1년 후에 죽는다고 생각한 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정해서 행동해 보세요. 오히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죽음이 찾아왔을 때 후회하지 말고 미리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2년전 별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총장이 되어 내가 생각한 것은 오로지 주어진 4년이 지난 후 후회가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는 것뿐이었다. 히노하라의 말에 따르면 나는 4년 후에 죽는다고 생각한 뒤 일을 해왔던 것 같다. 내가 한 시간 더 열심히 일하면 대학 구성원 전체가 그만큼 더 행복해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으나 아직까지 내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최고의 지도자는 명석하면서 게으른 사람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 경지를 감히 넘볼 수 있는 사람은 못된다. 다만 어리석으면서 부지런한 최악의 지도자는 아닌지 늘 돌아보고 있다. 내 능력에 이 정도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여 이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내 분에 넘치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급여가 너무 낮다거나 교직이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다음과 같은 말이 혀끝을 맴돌지만 나를 돌이켜보며 그냥 삼킨다. “자네의 역량을 가지고 지금 쏟고 있는 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서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 자체를 좋아해서 교단을 떠나지 않고 아이들 앞에 서 있다면 자네를 만나는 학생들은 참으로 행복할 것이네.” 교수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시작하던 첫 날 나는 가상의 퇴임사를 썼다. 그 퇴임사에서 32년간의 삶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내 교수 생활 계획을 수립했었다. 교대를 내가 머물고 싶은 땅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내가 떠나든지 하겠다고 공언하며 교대 근무 4년 만에 교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교대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책을 쓰기도 했었다. 돌이켜보면 30대 젊은 교수의 객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나와의 약속이 내가 총장직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학교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조금 버티다가 다른 학교로 가면되지 하면서 참고 있는 제자들에게 종종 당부한다. 그렇게 떠나면 자신의 뒤를 이어 그 학교로 전근오게 될 또 다른 내가 유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전근해가는 그 학교를 떠난 교사도 그러한 생각으로 학교를 옮겨갔을 가능성 또한 아주 높아진다는 것을 명심해달라고. 나는 총장이 되자마자 4년이면 돌아갈 평교수 생활 적응훈련에 돌입했다. 누구 말처럼 내 직업은 교수이고 다만 4년짜리 임시직 총장으로 선출되었을 뿐임을 명심하며 주어진 특혜에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또한 돌이켜보니 지난 2년 나도 모르게 서서히 물들어간 것 같아 반성하게 된다. 우리의 삶은 사형선고를 받고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리고 교직 또한 정년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순간이 닥칠 때까지는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나 싶다. 비록 이렇게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지만 끝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기에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빛날 수 있으리라! 새해에는 더 큰 소망을 해본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잠자리에 들 때마다 설령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후회 없게 살았나를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해보자.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 못지않게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보자. 나를 돌이켜 보는 글을 쓸 때면 늘 조심이 된다. 자칫 잘못하면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전라도 말로 소위 ‘까치 배깝닥같은 소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담배를 끊겠다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공언함으로써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자 하는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한해를 보내며 또다시 모험을 해본다.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출근을 한다. 눈을 거의 감은 채로 밥을 떠 넣고, 무섭게 가속 페달을 밟는다. 교무실에 도착해서 커피를 손에 들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매일 다른 날이 열리지만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출근하는 시간동안 만나는 사람들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지나친다. 집으로 돌아올 때도 발끝으로 달빛을 차는 무게가 어제와 같다. 어찌 보면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우리가 삶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틀에 박힌 삶에 의해 우리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며칠 전 멀리 출장을 가게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운전을 하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산이 가을빛에 흠뻑 젖어 있다. 출근길에는 코앞에 신호등만 보고 다녀 저 멀리 산자락이 치마폭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은 여유롭게 천천히 산을 보고 있다. 도심의 공기지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상쾌하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바쁘게 가고 있다. 저마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디로 가는가. 가고자 하는 곳은 좋은 곳일까. 오랜만에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가. 혹시 나쁜 일을 해결하러 가는 것은 아닌가. 일상이 지루하다는 이유로 간혹 일탈을 꿈꾼다. 오늘 출장도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 기회였다. 그러나 막상 어두워지니 집이 그리워진다. 한나절도 안 돼 집이 그리워진다. 내가 지나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혼자서 집을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많지만 그것은 일상이 싫어서가 아니다. 일상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차멀미 때문에 많이 걸어 다녔다. 그래서 혼자 학교에 다녔다. 하늘을 보고 구름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가다가 활짝 피어 있는 꽃을 보면 위안을 받았다. 들판에 피어 있는 꽃이 마냥 신비로워 나도 모르게 저절로 황홀경에 젖었다. 길가에 코스모스가 가녀린 허리를 흔들면 공연히 가슴이 설렜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을 시집에 끼어 넣고 수신자도 없는 편지를 썼다. 그때는 궁핍했지만 오히려 삶이 윤택하고 활기찼다. 새 한 마리의 비상에서 꿈을 키우고,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도 생명의 힘을 느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이슬은 위안과 한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늘진 곳에서 생명을 움틔우는 이름 모를 꽃을 보고 있으면 슬픈 현실도 금세 맑은 눈물방울로 떨어져 버렸다. 혼자였지만 다른 홀로인 자연과 더불어 존재의 의미를 생성했다. 그때의 삶은 모두 감동적이었다. 우리가 사는데 여럿이 힘을 주지만, 망각의 저편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는 추억도 한몫을 한다. 추억은 오랜 침묵과 고요의 힘으로 숙성시킨 시간의 향기가 난다. 그것이 슬프든 아니면 아름다운 추억이든 내 마음에 잔잔히 여울진다. 가끔 훌쩍 지난 기억의 우물에서 두레박질을 하다보면 시간이 남긴 과거의 흔적이 떠올라 삶에 미소가 머문다. 오늘날은 세상의 변화로 풍요로움이 넘친다. 차는 홍수를 이루고, 빌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다.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새로 구입한 자동차일까. 크고 웅장한 건물이 우리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란 큰 집이, 그리고 새로 산 자동차가 다 채워주지는 못한다. 인간의 삶이란 늘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남과 비교해 모자람을 느끼고, 바라는 것도 많다. 간혹 많이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내심 남모르는 결핍에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감에 크게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핍은 인간만이 가지는 모습이다. 결핍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꽉 차게 하는 밑거름이다. 인간은 부족함을 알기 때문에 소원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게 된다. 거센 눈보라 속을 헤매면서도 마음의 밭에 기대를 담은 따뜻한 바람의 풍차가 돌아가기 때문에 삶에 힘이 솟는다. 이처럼 비워지고 채워지는 순환의 반복이 우리의 삶이다. 아침 햇살이 감동으로 밀려왔듯이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의 바람과 이름 모르는 한 떨기 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어제도 내 어깨에 떨어지고, 오늘도 직장인의 어둔 귀갓길을 밝혀주는 달빛이 고마운 것이다. 매일 매일 하찮은 일상 같지만 그것이 쌓여서 지금 우리의 평온한 모습을 만들고 있다. 지나치게 과거에 집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오지도 않은 내일을 무겁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삶이 지겹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갇혀 헤어나지 못한다. 오늘을 열심히 사는 사람은 불행할 수가 없다. 그날이 그날 같은 일상은 내세울 것이 없는 잡다한 것 같지만, 내게 중요한 순간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물은 그냥 태어난 것이 없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오늘이 내 앞에 있는 것도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실체를 규정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은 물 위에 달빛 머물듯 느끼는 순간순간 아름다움 그 자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미래는 지금 이 순간이 만들어 낸다. 거대한 일상의 바퀴에 늘 충격적이고 커다란 삶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어서 작은 것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작은 풀씨가 자라 꽃을 피운다. 거대한 바다가 출렁이는 것도 작은 물결의 파장이 시작이다. 내 삶의 뿌리가 일상에 있다면 여기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제 반복되는 삶에서 깊은 사랑과 사색의 울림을 깨달아야한다.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다.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교육 한국의 현주소 지난 12월 7일 발표된 오이시디 34개 회원국과 31개 비회원국의 만 15살 학생 약 47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학업성취도 국제비교연구’(PISA 2009) 보고서의 내용은 여러 모로 생각할 바가 많은 자료였다. 우리나라 137개 고등학교와 20개 중학교 학생 5123명이 참가한 이번 보고서의 결과를 종합해 보면, 자기학습능력 65개국중 58위, 읽기·수학·과학 등 성적 OECD 회원국 1~4위권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세계의 부러움을 받는 교육 한국의현주소는 단순암기로 올린 성적의 허점을 보인 거라는 평가였다. 2003년 평가에서도 우리나라는 집중 분석 과목이던 수학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흥미도와 학습동기에서 전체 41개 나라 가운데 각각 31위와 38위였고, 과학이 집중 분석 과목이었던 2006년 평가에서도 흥미도가 오이시디 평균을 밑돌아 단순 암기식 교육의 부정적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 바 있다. 수치로 나온 성적으로만 보아서는 매우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매우 걱정스럽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만 15살 학생들의 읽기·수학·과학 실력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1~4위에 올라 학업성취도가 최상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읽기 학습’에 대한 흥미도가 낮고 혼자 읽고 공부하는 능력(자기학습관리능력)은다른 회원국 학생 평균보다 크게 떨어지는 것으로 조사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가정과 학교에서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게 하는 풍토에사 자란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된다. 공부란 즐거워야 하며 본인이 좋아서, 호기심의 발로에서 비롯되어야 오래도록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먼 여정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땅의 학생들은 공부의 즐거움을 알기도 전에, 그 단맛을 느끼기도 전에 공부에 질려서 오래 가는 공부를 못하는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기주도학습력, 어떻게 기를까 그토록 오랜 시간 학교 현장의 화두인 '자기주도학습력'은 구호로만 그친 것일까? 너무 일찍부터 공부로 내몰아서 다그친 것은 아닌지 어버이도 선생님도 가던 길 먼춰 서서 돌아보아야 할 시점이다. 각종 영재교육으로, 다양한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준비한 중 고등학교 프로그램도 결국은 명문대학의 문 앞에서는 한 줄 서기로 그 특성이 약화되어 버린 탓은 아닐까. 학생 자신이 가진 소질과 능력보다는 명문대학의 인기학과에 맞춰서 공부를 해야 하니 그 공부가 즐거울 까닭이 없다. 그렇게 진학을 했다 하더라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다시 공부를 하는 대학생들이 많으니 엄청난 국력의 낭비요, 개인적으로도 시간과 노력, 금전적 소모전이다. 결국은 교육 본연의 물음으로 귀결된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공부를 해서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먼저다. 그러나 이 나라의 부모들은 일류대학이나 명문대학의 명예 앞에서는 자식의 인생도 대신 살아줄 것처럼 다그치고 채근한다. 그러한 집착과 욕심이 오늘 이 나라의 학생들에게 공부란 즐겁지도 않고 괴로운 짐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생각의 틀을 과감하게 바꾸어야 할 때이다. 얼굴 모습이 다 다르듯 아이들이 지닌 장기도 다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직업을 향하여 올인하도록 코뚜레를 꿰어 한 줄로 몰아온 교육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자식이나 제자가 행복하지 않은 선택을 해놓고 억지로 그 길로 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지는 않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 본다. 모두 다 대학을 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데 우리는 그러질 못했다. 너나 없이 대학의 문으로 집어 넣고 결과물을 기다려왔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국,영, 수 몇 과목에 목숨을 걸고 매진하게 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 가는 길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그 길의 1%도 안 되는 쪽에만 돋보기를 들이대고 좁은 문을 통과하도록 가르쳤으니 자기주도학습력이 정착될 리가 없다. 자기애를 지닌 아이, 여러 줄 세우기 교육으로 언제부턴가 없어져 버린 여러 줄 세우기 교육이 해법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본인이 원하는 공부를 하게 하는 원초적 방법만이 살 길이다.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하면 즐겁고 행복하게 자신의 길을 가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아이가 되도록,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당당하게 가는 공부를 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일이다. 눈에 보이는 가문의 명예와 물질의 풍요에 휘둘리지 않는 자존감으로 세계적 등수에 눈이 어두워, 명문대학의 그늘에 가려서 원하지도 않는 인생을 살지 않도록 어버이와 선생이 자식과 제자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시야를 넓힐 때가 되었다. 눈에 띄는 직업이 아니더라도, 일류대학이 아니더라도 자식이 원하는 길을 기꺼이 가게 하는 것이 인생의 선배로서 부모가 해야 할이다. 우리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제자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을 닦아주고 살펴주는 일이 선생님이 해야 할 일이다. 평생학습의 시대의 초석은 가정과 교실 이제는 평생교육의 시대다. 학교 교육이 끝나면 책을 놓아버리는 자세로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통제 전략(자기학습관리능력)이다. 상황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선택해서 집중하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학교 문만 나서면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게 현실이다. 학창 시절에 공부에 질린 탓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독서력은 교육입국의 위상이 부끄럽게 세계 최하위라고 한다. 다시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새롭게 봐야겠다. 나의 교육방침과 교육철학을 되돌아보고 반성해야겠다. 긴 겨울방학 동안 자기주도적으로 공부하는 아이들이 될 수 있도록 각기 다른 계획과 진로 지도를 서둘러야겠다. 평생학습의 초석을 다지는 길은 바로 가정과 교실이다. 그 곳에서 공부를 즐기는 아이로 만들어야 자기주도적학습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형 혁신학교가 내년부터 등장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서울형혁신학교가 생각보다 관심이 적었지만 정식으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교육계의 관심이 높긴 하지만 아직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내년 상반기에 추가지정을 하게되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지만 현재의 상황이라면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사실 서울형혁신학교는 그동안 지정되었던 자율학교와 자원학교, 교육복지학교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육여건이 좋지않은 학교에 집중투자한다는 것과 교장을 공모제를 통해 임용하는 것, 자율학교의 경우는 교사들을 초빙해 올 수 있는 비율이 일반학교에 비해 높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다른 학교보다 예산을 많이 투자하여 학교교육을 혁신하겠다는 취지도 공통점에 해당된다. 이미 수년전부터 이어져왔던 '좋은학교 자원학교'나 자율학교가 혁신학교와 같은 형태인 것이다. 문제는 이들 학교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이들학교에 대한 예산의 집중지원으로 학교가 어느정도 제 궤도에 올랐는지 학생들의 인성이 변했는지, 학력이 신장되었는지 다각도로 분석이 되었느냐는 것이다. 결과에 대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실제로 이들학교에 대한 분석을 통해 혁신학교를 추진한다면 백번 찬성하고 지지한다. 또한 이들 학교의 변화가 긍정적으로 나타났다면 더욱더 찬성한다. 그런데 관련 연구나 분석을 거의 접해본 경험이 없다. 물론 필자의 무관심으로 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인근에 있는 자원학교를 살펴보면 어느정도 답이 나온다는데 있다. 인근의 학교에서 최근에 많은 변화를 이룬 학교를 찾기 쉽지 않다. 예산운용을 잘못한 것인지, 원래 그 지역의 학생들 수준이 낮기 때문인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다른 학교보다 예산을 더 지원하여 여건 개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혁신학교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것이 자원학교라고 볼때 혁신학교의 앞날도 결코 밝다고만 볼 수 없다. 의욕에 비해 결과가 시원찮게 나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혁신학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교육여건을 개선시켜 가고싶은 학교로 만들 것인가가 중요하다. 학생과 학부모는 물론이고 교사들이 신뢰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의욕만으로 되지 않는다. 의욕과 함께 해당학교 구성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앞으로 혁신학교를 더 많이 지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양적인 팽창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양적인 팽창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면도 고려해야 한다 단순히 혁신학교가 몇개라는 식의 통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들 혁신학교들이 다른 학교와 어떤 차별성을 가졌는지, 그 차별성이 성공적 이었는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것이다. 의욕적으로 출발하는 서울형 혁신학교가 그동안 어떤 처방으로도 듣지않던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교육과학기술부 설동근 제1차관이13일 정부중앙청사 별관 제2브리핑룸에서 교원능력개발평가 모형 개선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번에 발표된 평가제 개선모형은 2011년 교원평가제 시행의 기본 틀로 향후 시도 교육감과 학교장이 연수 대상자 선정을 위한 기준으로 적용 될 예정이다. 브리핑이 끝난 후 교과부 출입기자들이 실무자들에게 교원능력개발평가 모형 및 학습연구년제 등 교육현안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하고 있다.
대청고등학교(교장 김영곤) 백진성 학생이 옹진군 관내 학교에서는 해방이후 처음으로 서울대학교 교육학과에 수시전형으로 합격하므로써 지역사회 화제가 되고 있다. 대청고등학교는 연안부두에서 배로 4시간 이상 걸리는 서해 최북단 도서지역인 대청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전교생이 22명인 초미니 학교로 대청고를 비롯한 서해5도 지역은 지난 3월 천안함 사건과 이번 연평도 기습 포격 사건으로 남북 긴장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도서지역으로 사교육시설은 물론이며 변변한 문화시설조차 없는 곳으로 학생들의 학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열악한 곳이다. 대청고에서는 농어촌지역 명품학교로 발돋움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무학년제 방과후 교육, 맨투맨 개별지도 학습, 군부대와 연계한 주말학교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이번 백 군의 서울대 합격이라는 결실은 섬지역의 불리한 교육 환경을 극복하고자 노력해온 김영곤 교장과 교직원의 헌신적인 자세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공교육 활성화의 성공적인 사례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대청고 김영곤 교장은 "이러한 교육적 성과를 통해 학생에게는 자긍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학교생활에 임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교직원에게는 헌신적인 지도와 관심으로 21세기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운다는 자세로 거듭 노력하자"고 당부했다.
교권실추, 누구 잘못인지 자성(自省)해 봐야 스승의 종은 치는 대로 크게도 작게도 울려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며, 과거는 영원히 정지하고 있다.’는 ‘실러’의 말처럼,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니 참으로 시간은 빠른가 보다.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세월의 변화 속에 벌써 辛卯年이라니 내 마음만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왠지 다사다난한 세태를 보고 느끼는 감회가 새로움은 인생의 나이테가 그만큼 더 깊어졌기 때문일까? 파랑새의 작가 ‘메테르링크’는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비유하였다. 즉 인생이 한 권의 책과 같다고 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매일 한 쪽씩 인생의 책을 엮어나가는 사람들 속에 기록되는 내용이 다르고, 표현되는 빛깔이 다르고 실리는 무게가 모두 다르지만, 유독 교사들이 쓰는 인생의 책만이 어느 한 페이지, 어느 한 행, 어느 한 글자라도 소홀히 다룰 수 없음은 교직이라는 무거운 무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교직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 년 열두 달 어느 것 하나 소홀한 것은 없을 진데,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는 12월이 우리 교사들에게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농부의 추수처럼 교육도 결실을 해야 함이 아닐 런지 모르겠다. 흔히들 5월을 가정의 달이요, 사랑의 달이라고들 하는 것은, 동심이 눈을 뜨는 어린이날 뒤엔, 순백(純白)의 사랑으로만 가득 찬 어버이날이 있는가하면,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는 잊힐 뻔한 플루타아크 영웅전이 새삼 떠오르는 스승의 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 교문을 닫아야만 하는 학교가 많다는 신문의 사회면을 대할 때마다 안타까운 자성의 몸부림보다는 “어쩌다가?”라는 오늘날의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옛 선현들은 가르쳤는데, 서구문물의 자유분방한 유입과 다양한 기치관의 혼란으로 일부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제자가 스승을 구타하고, 전후사정은 무시한 채 학부모가 교사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는 이 세태를, 교권침해라고 그냥 흘려버리기엔 교육의 한 구석이 뭔가 허전한 오늘날의 이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런지 그저 난감한 심정뿐이다. 더욱이 아무리 취지와 목적이 좋다고는 하지만 ‘학생인권선언’이니 뭐니 하여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교육현장을 더 난감하게 만드는 세태를 보면서 먼 훗날, 오늘을 살아 간 학부모와 스승과 제자들은 무슨 생각들을 할런지 자못 궁금해진다. 실추된 교권? 진정 누구의 잘못이며 누가 다시 제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는지 침울한 마음으로 분필을 꼬옥 쥐는 어느 노교사의 애잔한 손 떨림을 그 누가 헤아려 줄 수 있을까……. 물론 제자의 잘못도 학부모의 잘못도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수양과 겸덕이 부족한 탓일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크게 뜨면 우리들 주위엔 자랑스럽고 훌륭한 스승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어느 낙도의 분교장에서부터, 두메 학교의 까칠해진 부부교사는 물론, 칭얼거리는 어린 아이까지 안쓰러운 마음으로 놀이방에 맡기고 수업연구 지도안을 다듬는 젊은 여교사들의 다사로운 손길이 있는가 하면, 한 자라도 더 가르쳐보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부진아를 돌보는 자상한 담임교사의 애정 어린 정성이 있는 한, 우리의 교단은 결코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미국의 한 소도시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화한 ‘굿모닝 비둘기선생’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주인공 비둘기 선생님은 그 도시 소학교에서 늙도록 교편을 잡아온 늙은 처녀 선생님이다. 시장은 물론 교통순경도 그의 제자요, 야채장수에서 죄수까지 그의 제자 아닌 시민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이 비둘기선생님이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교통순경이 뛰어와 모든 차량을 멈추게 한다. 그러면 모두들 차에서 내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한편, 비둘기선생님이 앓아 누었다하면 병문안을 위해 온 도시가 철시까지 한다니, 선생님의 권위란 이렇게 학교 안팎과 관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참다운 스승의 모습 일 런지도 모른다. 실추된 교권을 회복하고 존경받는 스승의 풍토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며 모든 선생님들이 비둘기선생님 같은 대우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사회 환경이 되도록 모두가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열고 예기(禮記)의 악기편(樂記篇)에 나오는 ‘고지이 소자소명(叩之以 小者小鳴)’이란 종을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듯이 스승은 종과 같다는 이 말을,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한 번쯤은 더불어 음미해 보자.
오전 08시 30분. 교사의 시계는 잠시의 빈틈도 없이, 쉼 없이 돌아간다. 우선 담임을 맡은 반의 학생이 모두 등교했는지를 확인하고 일기장과 숙제를 검사한다. 한 학생이 결석이다. 무슨 일이 있는 지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묻는다. 늦잠을 자서 미처 학교버스를 타지 못했다면 친절(?)하게도 자신의 승용차로 아이를 데리러 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학과 수업, 방과 후 지도, 하교지도. 정신없이 하루가 가고 퇴근시간이 된다. 본교는 면소재지의 5학급 전교생 36명인 소규모 학교다. 과거에는 학생 수가 2000명이나 돼 오전 오후로 나누어 공부를 하기도 했던 학교였으나, 이젠 이농현상과 출산율 저조로 금학년도에는 1학년 입학생이 단 1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교육은 단 한명이 있든, 한 학급에 30명이 있든, 할 일은 똑같이 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읍내 학교나 시내 학교처럼 교원의 수가 많으면 그 일을 여러 교사가 나누어 추진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소규모 학교에서는 한 교사가 10여 가지 이상의 일을 맡아 처리할 수밖에 없다. 교사의 본분은 학습지도와 인성교육에 있다는 것에 이론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위 기관과 지자체에서 오는 공문의 접수번호가 12월 초 5500여건을 돌파했다. 교재연구와 학습지도에 투자해야 할 교사의 일과가 공문응신과 각종 서류 및 행사 계획을 수립하는데 낭비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과부도 교육청도 교원의 업무경감을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지만 현장에서는 눈에 띄게, 몸으로 체감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잡무 경감 방안을 세우느라 시간을 투자해야하는 실정이다. 이에 본교에서는 대안을 찾고자 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 보았다. 첫째는 행정실에서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듀파인이 도입되면서 교사가 모든 사안을 입안, 진행하고 결재를 얻어 업무처리를 해야 한다. 행정실에서는 금전만 지출하니 교사의 업무를 줄이기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 가중 시키고 있는 셈이다. 담당교사가 필요 사양을 행정실에 요구하면, 행정실에서 주문‧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둘째는 청년일자리 창출차원에서 배치되는 비정규직 인력 문제다. 방과학교 학부모 코디네이터, 전산보조, 교무보조, 과학보조 인턴교사 등을 채용하면 그들의 인력 관리 또한 교사의 업무가 된다. 정규직이 아니어서 책임이 없으므로 비중 있는 업무를 줄 수도 없다. 따라서 채용 시 전문성 고려는 물론 그분들에게도 일정 업무를 부과해 직장의 일원으로서 소속감도 느끼게 할 필요가 있다. 교사는 인력 관리가 아니라 학생 교육을 위해 교실로 돌려 보내야 마땅하지 않은가. 셋째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교수-학습지도, 생활지도 이외의 불필요한 업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과 실적위주 행사가 많다는 점이다. 전교생 95%이상이 학교버스를 이용해 등하교하고 있는 학교에서 굳이 교문 앞 교통지도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 30여명의 학생을 인솔해, 차가 질주하는 도로에 나가, 학교폭력을 줄이자는 캠페인을 하고 사진으로 담아 실적을 보고해야 하는가? 이밖에도 지방자치 단체에서 실시하는 각종행사 및 축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교사들의 잦은 출장도 교사와 학생 간 만남의 시간을 줄이는 한 요인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은 교육적이어야 한다. 상위 기관의 체면을 위해, 축제의 성황을 위해, 아이들을 동원하는 행사성 대회는 축소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 교사들의 바람은 하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에 온 것이지 공문 응신하러 온 것은 아니다”라는….
서울지역 자율형 사립고의 원서접수가 마감되었지만 추가모집을 해야 할 형편이다. 대거 미달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 자료에 따르면 1만4백62명 정원에 1.44:1의 경쟁률을 보였다. 전체적으로는 미달되지 않았지만 학교별로는 미달사태가 발생했다. 즉 26개 자율형 사립고중 한가람고등 17개교는 정원을 넘겼지만 나머지 9개교는 미달되었다. 미달학교중에서는 지원율이 매우 저조한 학교들도 있다. 다만 여학교나 공학교는 미달된 학교가 없다. 앞으로 자율형공립고의 원서가 마감되면 자율고의 미달사태는 더욱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는 예측을 하고 있지만 필자는 자율형 공립고는 상대적으로 미달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자율형사립고와 공립고의 차이가 확연하기 때문이다. 즉 자율형사립고는 내신성적 50%를 지원자격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자율형공립고는 내신성적에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자율형사립고의 대거미달사태는 이미 예견 되었었다. 한꺼번에 많은 학교들이 자율형사립고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의 선택폭이 넓어지긴 했지만 지원자격에 제한을 두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쉽게 지원하기 어려운 기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대학입시에서 정시보다 수시의 선발인원이 60%이상인 점을 감안한다면 자율형사립고에 쉽게 지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수시가 정시보다 선발인원이 많은 반면, 내신에 의해 당락이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중3학생과 학부모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율고를 선택하는 이유가 대학입시와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판단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내신에 의해 대학진학을 하지 않겠다면 문제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내신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기에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학교들이 자율고로 전환된 점도 미달을 가져온 이유이다. 자율고로 전환된 학교 중에는 기존에 선호하는 학교들도 상당히 많지만 기존에 비선호학교였던 곳도 있다. 선호학교라면 문제가 없지만 비선호학교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쉽게 선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율고로 전환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선호학교로 바뀔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의 지적은 교사와 학교시설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율고로 전환된다고 우수한 학교가 될 가능성이 있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여학교나 공학교가 미달되지 않은 것은 자율고 중에서 여학교와 공학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여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는 학교는 공학교 3개에 여학교 2개교가 전부이다. 상대적으로 지원율이 높아진 이유이다. 앞으로 여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는 학교비율을 어떻게 넓혀 갈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남여 공학교에 여학생들은 많이 지원했지만 남학생들의 지원은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내신성적에서 공학교에서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불리하다는 이야기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았나 싶다. 여학생들은 공학교를 선호하고 남학생들은 남학교를 선호하고 있는 것이다. 내신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자율고의 대거미달사태가 내년에도 계속된다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올해의 지원결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자율고의 확대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고, 여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는 학교를 어떻게 확대해 나갈 것인지도 연구되어야 한다. 철저한 원인분석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의 종류가 다양해 지면서 선발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예전처럼 일률적으로 원서를 제출하여 성적순으로 학생을 선발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고, 외고 등으로 대변되는 특수목적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자율형학교까지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는 학교들이 다양해졌다. 학교가 다양화 되면서 선발방법도 다양화 되고 있다. 단순히 성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지 않고 학생들의 다양한 면을 보겠다는 것이 상급학교들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대학도 사정이 비슷해 보인다. 내신성적과 수능성적만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였으나, 최근에 입학사정관제를 필두로 각 대학마다 적성고사를 실시하여 학생들을 선발하기도 한다. 농어촌 전형, 기회균등선발, 학교장추천, 교사추천, 가까운 지인들의 추천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전형이 있다. 이 글을 쓰기위해 대학교육협의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전형유형을 살펴보니 정말로 고등학교 교사들이 진학지도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시와 대학입시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전형중에서 추천서를 필요로 하는 전형들이 많았고 학교에 따라서도 추천서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입시에서의 추천서를 작성해 보았기에 역시 대학입시에서도 추천서를 많이 작성해야 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고등학교 교사들은 추천서 작성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추천서가 입시에서 어느정도의 영향력이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추천서를 함께 제출할 것인데 해당학생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것이 교사들이라면 추천서의 신빙성은 상당히 높을 것이다. 특목고 입시에서는 대부분 추천서를 해당학생들의 장점과 잠재력을 위주로 하여 작성한다. 대학입시에서의 추천서는 어떻게 작성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학생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성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학생에 따라서 차별적으로 작성되는 것이 추천서이다. 무조건 모든 학생들의 추천서를 미화해서 작성하지는 않는다. 장점을 살려서 작성하되, 그 학생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작성은 하지 않는다. 추천서를 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그 추천서가 입시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추천서를 작성해 보내고 나서 입시결과를 보면 공통점이 있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합격을 하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은 불합격 하는 경우가 많다. 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이런 사정은 대학입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성적위주의 학생선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추천서의 영향력이 없거나 미미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의 다양한 면을 보고 선발하겠다는 것이 최근의 입시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입학사정관제에 의한 전형은 성적보다는 학생의 잠재력이나 발전가능성에 중점을 둔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성적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적보다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찾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략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합격한다는 것은 기본취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본취지에 어긋나는 선발을 한다면 교사들의 추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된다. 교사들은 한 학생의 추천서를 작성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해당학생을 이해시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면서 작성하게 되는데, 성적위주가 된다면 추천서가 영향을 주기 어렵게 된다. 그렇게 할려면 추천서를 굳이 받을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면접을 통해서 상급학교에서 학생을 직접 파악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많은 시간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했던 교사들의 추천서가 어느정도 영향력을 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학교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고, 전형의 종류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추천서가 어느정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진정으로 잠재력과 발전가능성이 높은 학생을 선발하고자 한다면 기본적으로 교사추천서의 신뢰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추천서를 작성하는 교사들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작성해야 할 것이다. 서로의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성적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유치원교육은 유치원다워야 하고 초중고의 보통교육도 보통교육다워야 한다. 대학은 대학다운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극히 일부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구석이 보여서 안타깝다. 유치원 교육은 가정교육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글자를 가르치거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 보다 바르고 좋은 습관을 갖도록 놀이를 통해 반복학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독일처럼 자연의 품속에서 스스로 보고 만지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인공적인 교실에서 간접적으로 가르치는 교육보다 훨씬 교육효과가 클 것이라고 본다. 강가 모래사장이나 숲속에서 자연을 보고 배우는 원시적인 학습이 아이들의 성장에 더 도움을 주지 않을까? 초등학교 교육은 올바른 인성의 바탕을 형성해 가는 중요한 과정이므로 6학년 졸업 전까지는 인성교육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초등학교까지 형성된 인성이 평생을 간다는 것을 안다면 너무 많은 지식을 주입하려는 교육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면 에서는 학년을 진급할 때 기초ㆍ기본학력이 미달되면 그 학년의 공부를 다시하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만하다. 그리고 초등의 교육과정양이 너무 많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지하고 있다. 좀 더 단순화 할 필요가 있다. 무슨 음식이 좋다면 그 음식만 먹듯이 좋다는 것을 별도로 뽑아서 가르치려는 것은 욕심일 수 있다. 인성과 창의성도 교과 및 생활지도안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쳐야 한다. 아무리 세계화가 밀려와도 우리 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한자도 가르쳐야 우리글의 어휘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중ㆍ고등학교 교육도 대학을 가기위해 청소년의 진을 빼놓는 사교육에서 벗어나 타고난 소질을 키워나가는 직업교육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을 대학으로 몰아넣는 우리의 교육행태는 고쳐져야 할 것이다. 전문 계고등학교가 공부가 뒤지는 학생들이 소질과 관계없이 가서 마치 인생의 낙오자처럼 취급받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전문 계고등학교만 나와도 자기 전문분야에서 당당하게 직업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무조건 대학만 가려는 풍토는 바뀌어야 하고 입시위주교육은 황금 같은 청소년기를 낭비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학교가 너무 많다.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정원과 같거나 적다면 이것은 너무 잘못된 것이다. 모두가 대학을 가라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고급인력만 양산하고 학력(學歷)만 높아져 균형을 잃은 교육구조가 되는 것이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도 한글도 잘 모른 다든지 간단한 계산도 못하는 대학생이 있다면 대학의 질과 수준이 떨어질 뿐이다. 대학생이 중ㆍ고등학교 보다 수업일수가 적은 것도 문제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세계에서 최고를 자랑하지만 세계적인 명문대학이 없는 부끄러운 나라이다. 우수한 두뇌를 바르게 성장하도록 학교교육이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올해도 학문분야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지 못한 것도 우리교육이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어진다.
올해 처음으로 도입되었던 교원평가 실시결과 학생, 학부모의 평가보다 동료교사 평가가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가 주어졌다고 한다. 당연히 언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 학생과 학부모 평가의 점수보다 더 높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봐 주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표현은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결과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에 다소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평가결과는 신뢰해야 한다. 그 이유는 가르치는 것에 대한 전문성은 아무래도 학생이나 학부모보다 교사들이 더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교원평가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이 학부모평가라고 본다면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다. 학부모 평가는 교사들의 수업을 한 차례정도 참관한 후 이루어지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즉 기준을 어디에 두고 평가를 해야할지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0점에 기준을 둘 것인지, 만점에 기준을 둘 것인지, 아니면 중간점수에 기준을 둘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동료교사평가를 한다면 해당교사의 모든면을 생각하면서 평가하게 된다. 가르치는 것이 주업무인 교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르치는 기본은 어떤 교사라도 잘 갖추고 있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다. 학생이나 학부모 평가는 해당수업시간에 교사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심지어는 도중에 말을 조금 더듬지 않았는가 등이 평가에 들어간다. 나름대로 판단한다는 이야기이다. 교사들이 봐주었다는 표현보다는 매일같이 같이 생활하는 입장이기에 쉽게 판단하기 어려워서 점수가 높게 나왔을 개연성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교사들은 평가를 할때 자신의 수업과 평가대상 교사의 수업을 비교하게 된다. 수업을 잘하고 못하는 것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교사들은 자신과 비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의 수업이 자신보다 더 우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됨으로써 상대적으로 점수를 높게 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학생이나 학부모 평가는 교사가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평가를 하고, 교사들은 해당교사의 내면적인 면까지 모두 들여다 보면서 평가를 하기 때문에 점수차이가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동료교사 평가는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평가하기 때문에 기준이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원평가제도 자체가 안고있는 이러한 문제를 단편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결국 여러가지 경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평가제도를 개선해 나가야 한다. 여기에 교사들의 가르치는 업무는 반드시 전문성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혹여 교사들끼리 봐주기 평가가 있었다면 교사들도 생각을 달리해야 하겠지만 모든 학교에서 봐주기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최근 어느 지방 도의원이 학교 운영위원회(이하 학운위로 칭함)를 '거수기'로발언을 해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불어 학운위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리포터는 현행 학운위의 문제점과 개선 방향에 대해 논술하고자 한다. 학운위는 그동안 학교에 부족했던 자율성을 부여하고 지역사회와 학부모, 교사의 학교운영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마련한 제도이다. 따라서 이 제도는 학교 발전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제도이나 몇 가지 문제점과 개선할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운위의 문제점 우선 현행 학운위는 기존의 학부모회나 육성회 등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데도 불구하고 지역사회나 학부모들이 아직 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학운위에 대한 올바른 역할과 기능을 홍보 및 연수를 통해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운영상에도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지역 교장단회의나 단위 학교 등에서 미리 결정한 내용을 학운위에 통고하고 동의를 구하는 경우 등이다. 이렇게 되면 학운위원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폭이 그만큼 좁아지게 된다. 학교구성원들의 적극적 참여의지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교사들은 기존의 "상명하달" 관행에 익숙해져 있으며, 학부모들 또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되지는 않을까, 혹은 자신의 자녀에게 어떤 불이익이 돌아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학운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있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학운위에 참여할 수 없는 것도문제이다. 회의가 주로 낮에 이루어지다 보니 직장을 가진 학부모들은 참여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학운위 구성원들의 전문적 식견도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학부모들은 학교의 학사운영이나 예, 결산, 교육과정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이해가 부족하여 심의과정에서 학교측의 일방적인 주도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학부모들은 학교장의 권위적인 리더십을 문제삼고 학교장들은 학부모위원들의 전문성 부족을 문제시하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또한 부족한 편이다. 예를 들어 학운위와 관련된 민원이 발생할 경우, 교육당국의 중립적 자세가 아쉽고 교육청단위의 운영위원회 연수 또한 형식적인 연수에 그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학운위의 활성화 방안 학운위뿐만 아니라 전체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학운위의 취지와 기능 중요성 등을 적극 홍보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학운위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유인해야겠다. 또한 학운위원들에 대한 연수를 보다 현실화하는 일이다. 연수대상이나 시기에 따라 가장 적합한 내용을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연수하여 학운위원들의 심의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다. 학운위 제도 또한 개선 보완해야할 점으로 꼽힌다. 우선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촉진하고 불법적인 찬조금 관행을 일소하는 등 학교의 모든 재정운영이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개선, 보안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학운위가 이루어지도록 행정적인 지원노력을 보다 강화해야 한다. 학교재정운영에 탈법과 잘못된 관행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되며, 운영위원회와 관련된 당사자들이 관련 법령의 내용을 숙지하고 법을 어기는 경우 그에 상응하는 처분이 따르도록 다양한 정책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단위 학교 또한 지역사회로서의 리더역할을 인식하여 청렴하고 합리적인 학교경영에 힘써야 한다. 글을 마치며 학교운영에 필요한 학교공동체 구축을 위해 학운위는 앞으로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당사자인 교사와 학부모가 머리를 맞대고 교육현안에 대해 반드시 상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각종 교육 문제들도 말끔하게 해결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 또한 학운위가 애초에 정부가 의도한 대로 실질적인 교육개혁기구로써 제 역할을 다해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야 할 것이다.
와, 우리가 양돼지잖아! 지금 어린이 여러분의 아버지 어머니가 여러분만큼 어린 나이로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1968년 여름이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무더위가 극성을 부렸고, 가뭄으로 미처 모내기를 못한 논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벼 대신으로 심은 메밀이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메밀이란 원래 산골짜기나 아주 메마른 등성이 땅에 심는 것인데, 이렇게 기름진 논에다가 심어 놓았으니 얼마나 잘 자라는지 모릅니다. 메밀은 산등성이의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아주 끈질긴 작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당시의 우리 형편으로는 어떻게든지 먹고 살 식량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미국은 우리나라에 자기나라에서 생산된 식량중 남은 식량을 다른 나라에 원조하는 법률인 미국잉여농산물처리법 480호에 따라 많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원조하여 주었습니다. 아직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나라는 이 식량의 원조가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 두 끼를 먹는 것도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긴긴 여름을 아침에 죽 한 그릇을 먹고서 저녁까지 기다리자면 기운이 없어서 운동장에 나가서 뛰어 노는 것조차 귀찮아하고 있었습니다. “당번 ! 얼른 가서 죽을 타오너라 !” 선생님은 넷째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당번을 재촉하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미국에서 원조해준 사료용 옥수수를 잘 골라서 가루를 만들어서 국민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죽을 쑤어 먹이게 한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커다란 솥을 걸고 전교생이 먹을 죽을 쑤는 것입니다. 600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에게 먹일 죽을 쑤는 일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금만 불을 세게 때어도 죽은 솥바닥에 눌어붙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을 때면서 또 한 편으로는 부지런히 저어 주어야만 이렇게 눌러 붙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쑤어 주는 죽이나마 제대로 얻어 먹이지 않으면, 6학년이라서 해가 기울도록 공부를 해야 하는 어린이들이 지쳐서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선생님은 언제나 다른 반보다 먼저 가서 죽을 타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아직 남아 있어서 중학교에 들어가기가 지금 대학에 들어가기 만큼이나 어려웠던 때이었습니다. 6학년이 되면 요즘 고등학교 3학년과 같이 밤이 되어서 칠판의 글씨가 보이지 않아야만 겨우 어린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물론 그중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전기도 없는 교실에서 석유호롱불을 켜놓고 앉아서 밤 11시가 되도록 밤공부를 하고 교실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점심시간의 죽 한 그릇은 어린이들에게 뿐 만아니라, 선생님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을 쑤어 먹이던 점심이 날마다 죽을 태워서 제대로 먹일 수가 없고, 또 그 죽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하게 어린이들에게 먹일 것인가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이젠 죽보다는 빵을 만들어 먹이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자 훨씬 번거롭지 않고 아이들도 즐겨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부판과 같은 빵틀에다가 옥수수가루의 반죽을 부어놓고 김을 들여서 빵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말이 빵이지 옥수수 개떡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기운이 약한 아이들은 그만 힘센 아이들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야 ! 안기욱 ! 이리 나와 !” 선생님이 덩치가 커서 우리 학급의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기욱이를 불렀습니다. 기욱이가 곁에 앉은 영길이의 빵을 빼앗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커다란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앞으로 나오는 기욱이는 어느새 빼앗았던 영길이의 빵은 슬그머니 영길이 책상위에 놓고 있었습니다. “그걸 가지고 나와 !” 선생님은 어느새 보셨는지 벌써 눈치를 채시고 또 호령을 하셨습니다. “네.” 기욱이가 기가 팍 죽은 모습으로 앞으로 나오자 선생님은 “안기욱 ! 배고프지 ?” “네.” “그래, 넌 배고프고, 영길이는 배부를까?” “아닙니다.” “그래 ? 다같이 배가 고플 텐데, 너만 배 부르자고 친구 것을 빼앗아 먹어 ?” “잘못했습니다.” “좋아, 잘못 한 것을 알았으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예.” 점심시간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교실이나 거의 마찬가지 였습니다. 선생님이 교실에서 이렇게 지키고 있는 교실은 괜찮지만 정말 기운이 센 아이가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제과점에서 파는 옥수수 빵과 같이 가루가 고운 것을 가져다가 맛있게 구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료용의 옥수수 가루를 가지고 빵을 만들면서, 너무 비싸서 설탕을 타서 쓸 수도 없어서 요즘엔 먹지도 못하게 하는 삭카린을 타서 단맛을 내어 찐 것입니다. 한입 베어 물면 입속에서 모래알처럼 꺼칠꺼칠한 것을 간신히 씹어 삼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이 빵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였습니다. 이 빵을 찌는 원료가 되는 옥수수가루는 두 주일에 한 번씩 큰 트럭이 실어다가 나누어 주었습니다.이것이 오는 날은 아이들이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릅니다. 그 트럭에서 수많은 옥수수 포대를 날라 가는 일이 재미나서가 아닙니다. 자기들은 만져보지도 못하는 옥수수가루를 마음껏 만질 수 있고, 또 터진 포대에서 가루를 한 움큼 집어 담아서 먹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옥수수가루가 도착하는 날입니다. 아이들은 ‘언제쯤 트럭이 도착할까 ?’ 하고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다섯째 시간에 체육시간이어서 운동장에 있던 우리 반의 아이들이 옥수수 포대를 나르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저마다 나르겠다고 덤볐습니다. 선생님이 “자 ! 키가 크고 힘이 센 기욱이,영길이,상민이,철규,영진이,그리고 경래 이렇게 여섯이서 좀 날라다 드려라.” 하고 말씀 하셨습니다. 뽑힌 아이들은 의기양양하게 트럭으로 다가 갔습니다. “자, 조심해서 가져가라.” 학교 아저씨가 차에서 받아 내린 포대를 아이들의 어깨에 올려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서 옥수수포대를 걸머지고 숙직실 옆의 창고로 달렸습니다. “조심해 ! 넘어질라.” 다른 선생님들도 소리를 치셨습니다. 저마다 한 포대씩 걸머지고 창고로 달려가고 나자 아저씨는 부지런히 옥수수포대를 받아 내렸습니다. 아이들은 창고에 가서 포대를 내려놓고서 빵을 찌다가 둔 옥수수가루를 한주먹 집어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그렇지 않아도 체육시간에 뛰고 나서 힘이 드는데, 포대를 걸머지고 달려 와서는 가루를 한입 털어 넣었으니, 목이 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캑, 캑.” 목이 메어 낑낑거리면서 창고에서 나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며 “야 ! 이 녀석들아. 너희들 그게 뭔 줄이나 알고 먹고 있니 ? 이건 미국에선 돼지 사료야. 사료 ! 인석들아 알고나 먹어 !” 하고, 꾸지람을 하시면서도 화가 나신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때. 우리 반에서 가장 짓궂은 짓을 잘하는 철규가 “와아 ! 그러면 우리가 양돼지다. 양돼지 !” 이 순간에 우리들은 물론 짐을 내리던 아저씨도 곁에 서 계시던 선생님들도 모두 한꺼번에 “와 하하하하하.” 웃음보따리를 풀어 놓았습니다.그렇지 않아도 목에 가루가 막혀서 숨을 헐떡이던 아이들은 그만 목을 움켜쥐고 웃지도 숨을 쉬지도 못하고,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래 이 양돼지들아 실컷 먹고 어서 자라라.” 선생님은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이라는 듯이 바라보면서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모두들 웃음을 웃기는 하였지만 마음속에서는 ‘우리나라도 어서 부자 나라가 되어서, 이 따위 사료를 얻어먹는 나라가 되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저 하늘 복판에서 조금씩 기울어 가는 여름 해를 바라봅니다.
언어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매체다. 그러기에 언어란 선한 사람이 선하게 사용하면 부드러운 향기로 표출되고, 악인이 악용하면 독약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무기를 들어야만 남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 말이란 무기를 통해서 상대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세월이 유슈와 같이 흘러가도 인간에게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기본양식인 것 같다. 아이가 어른을 멸시하고, 자식이 부모를 외면하는 인간의 법도가 무너져 가는 현실에서 아무리 우수한 지식을 인간에게 주입하여도 그것이 올바르게 사용될 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청소년들의 언어는 갈수록 성적으로도 적나라하다. 예전에는 남학생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제는 여학생이 대수롭지 않게 사용한다. 교사 앞에서 예사로 성적인 말을 표출하는 것이 마치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다. 표현에 있어서도 군더더기를 싫어한다. “짱 좋다” “완전 좋다” 등등은 오늘의 젊은이들의 용어에서 여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빠르고 짧게 그리고 강하게 표현하려는 것이 마치 승부수 세계에서 상대를 말로 제압하려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상대에게는 거칠게 대하고자 하는 태도에는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이기주의적 사고를 학교 정문지도에서부터 고쳐보려고 인사를 하도록 시켜 보았다. 인사를 하도록 시키지 않았을 때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조용히 관찰해 보니, 부드럽게 학생을 대하면 학생의 인성도 부드러워지고, 거칠고 사납게 학생을 대하면 학생은 성난 이리와 같이 교사를 대한다. 그러면 성난 이리를 그 이상으로 대하면 학생은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 학생은 겉으로는 꺾이는 듯하지만 돌아서면 또 다른 것으로 교사에게 화풀이를 한다. 말의 윤리는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초등학교에는 도덕과목이 있어 인간의 기본 태도를 배운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윤리에 대한 인식도 점차 높아 간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 갈수록 윤리가 이론적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윤리는 이론적으로 치우쳐 체험학습 형식으로도 시청각 교육으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궁극적으로 윤리는 대학을 진학하기 위한 점수 획득 과목으로 전락돼 버린 오늘의 현실에서 윤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아우성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진정한 윤리 과목의 가르침이 어디에 있어야 할까? 대학입시의 탐구과목으로 전략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윤리를 가르쳐야 할까? 아니면 윤리가 학생들의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하는 체험학습 위주의 교양 과목으로 탈바꿈시켜야 할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인성 교육의 초안을 잡아야 할 지 한해를 넘기는 마당에서 아련히 명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