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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신문과 방송에 새로운 것이 오르고 있다. 바둑 이야기다. 그것도 일반적인 바둑 이야기가 아니다. 프로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 즉 사람과 기계의 대결이다. 대국이 끝나고도 후속 보도가 따르고 신문에도 연일 전문가 칼럼이 실린다. 솔직히 말하면 이 대결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 흔들지 몰랐다. 평상시에 바둑이 우리 사회의 중심에 자리한 적이 없었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 구도에도 익숙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AI는 조류 독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알파고에 대한 지식이 없다. 아는 것이 없으니 재미를 발견하기 어렵고 관심도 없었다. 경기란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때로는 패자의 눈물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 경기는 그런 기대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기계의 바둑 실력을 얕보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없었다. 내 관심과 달리 세상은 세기의 대결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결과도 의외였다. 신문에서 방송 뉴스에서 인공지능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이 생산되고 있다. 통찰력과 직관력은 인간 고유 영역으로 기계가 그 영역을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알파고가 그것을 뒤집었다는 기사다. 이제 기계가 인간의 뇌처럼 학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두려움까지 보이고 있다. 이번 대결은 인공지능 기술 진보라는 기대감을 불러왔다는 논조도 보인다. 반면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알파고에 세계 최고의 기사가 진 것은 충격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거라는 경계심을 드러내는가 하면, 인간의 패배는 대재앙을 가져올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그에 따른 미래 전망도 구체적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향후 지구상에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사회 각계 분야 대처도 각양각색이다. 바둑계는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 충격이니 이에 대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정치권에서는 알파고 같은 미래 먹을거리를 위해 서비스 발전법이 절실하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행정 관료는 서비스 발전법이 통과되면 한국판 알파고가 가능하다는 전망으로 맞장구를 쳤다. 정부 측에서는 알파고에 자극을 받고 민관 인공지능을 위해 컨트럴 타워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이런 반응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지만 일부는 너무 민감하다는 느낌을 넘어 무지의 소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기계를 세련되게 만들고, 그 기계를 이용해 산업 생산성을 향상했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공업 중심 사회를 열었다. 전기 에너지를 이용한 컨베이어 벨트는 새로운 산업 혁명을 가져왔다. 자동차 조립에 컨베이어 벨트로 생산 라인을 구축하면서 대량 생산의 포문을 열었다. 컴퓨터의 발전도 마찬가지다. 이를 활용한 생산성의 비약적인 확대로 인간의 삶은 풍요로움의 물결에 출렁이고 있다. 그렇다. 알파고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도전해온 기술 혁신의 과정이고 결과다. 이번 알파고는 끝이 아니다. 계속 인간의 지능이 진화하면 이보다 더 무서운(?) 알파고가 등장한다. 따라서 알파고는 두렵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는 논지도 엇나간 판단이다. 알파고는 인공지능 바둑프로그램이다. 그 뒤는 역시 프로그래머라는 인간이 있다. 지금까지 바둑을 두었던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컴퓨터에 모아놓은 것이다. 이세돌이 싸운 것은 인간이 만든 기계였다. 이번 싸움에 인간이 지고, 기계가 이겼다는 평판은 허점이 있다. 한번 싸움에 인간 존재의 능력에 대한 회의를 보이는 것도 지나치다. 기계에 대한 맹신도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도전이 한 단계 높은 성취를 이룬 것이다. 전패 위기 속에 포기하지 않고, 한 번을 이겼다. 힘겨운 싸움에서도 넉넉한 마음과 흐트러지지 않는 인간적 품격을 보였다. 그렇다면 인간도 이긴 것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삶의 변화를 가속화시켰다. 아울러 사회 변화로 직업도 끊임없이 변해왔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일자리의 수치 감소가 인간의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는 판단은 잘못이다. 더 나은 인공 지능을 만들기 위해서 인간의 창조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AI 발달 위한 고품질의 일자리로 변화가 올 것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면 학교도 교사도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전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도전은 확실히 필요하다. 인간은 어차피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AI를 인간의 삶에 어떻게 이롭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다. 새로운 교육을 통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을 다스릴 수 있는 교육이 올바른 대응책으로 거론되어야 한다.
일교차가 너무 심하다. 새벽은 아직 겨울이다. 낮은 완연한 봄이다. 새벽을 깨우는 이들에게는 혼란스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얇게 입자니 새벽이 힘들고 두텁게 입자니 낮이 힘들다. 이럴 때 지혜가 필요하다. 삶은 지혜가 있어야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얼마 전 한 제자로부터 카톡이 왔다. 무슨 중학교 몇 회 누구라고 하면서 나를 알겠느냐고? 알 수가 있을 리가 없다. 지금쯤 아마 50대 초, 중반쯤 되었을 것 같다. 선생은 모르는데 제자는 알아주니 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일인가? 어제는 70대 중반의 한 교장선생님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눴다. 한 제자가 국회의원 경선을 통과했다는 소식이었다. 선생님은 제자를 알아보았는데 제자는 선생님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선생님은 당당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겁하면 안 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나를 몰라주어도 당당해야 한다. 섭섭해 하지도 말아야 한다. 나를 알아달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인정해 달라고 교육시키는 것도 아니다.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해야 할 일은 가르치는 것이고 바르게 자라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만족하면 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감정을 드러내도 안 된다. 비겁한 말이나 행동을 하면 더더욱 안 된다. 그럴수록 더 당당해야 한다. 어떤 학생은 선생님을 봐도 일부러 인사를 하지 않고 외면하는 학생도 있다. 그렇다고 낙심해도 안 된다. 특히 졸업을 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선생님을 외면할 때가 있다. 그래도 당당해야 한다. 비겁하면 안 된다. 선생님은 어떤 상황을 만나도 선생님이고 학생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도 학생이다.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한참 세월이 흘러 변할 때도 있다. 어느날 갑자기 선생님이 생각이 나서 연락이 올 때도 있다. 꾸중을 들을 때는 섭섭해 해도 때가 되어 깨닫게 되는 날은 선생님을 찾게 된다. 제자가 선생님을 선생님 아니라고 할 때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그래도 선생님은 당당해야 한다. 그 제자는 내 제자라고 떳떳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나를 선생님 대접하지 않는다고 선생님도 제자를 내 제자 아니라고 하면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은 당당해야 한다. 비굴하면 안 된다. 제자는 부인해도 선생님은 인정하는 선생님은 당당한 선생님이다. 제자가 비굴해도 선생님까지 비굴하면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는 끝나고 마는 것이다. 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다. 제자의 행동이 어떠하든 제자는 제자다. 선생님의 가는 길이 멀고 험하다. 선생님 노릇하기가 너무나 힘든 시대다. 그래도 당당해야 한다. 선생님의 험한 길이 좋은 제자를 길러내고 좋은 인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조금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강마을에 봄은 향기롭습니다. 운동장가에 지천으로 핀 냉이꽃을 책갈피에 말려 엽서를 만들어 벗들에게 보내었습니다. 이 엽서를 받은 벗은 냉이를 캐러 다니던, 소녀적 생각에 한참 먼 산을 바라보았답니다. 봄햇살은 봄비처럼 그렇게 보실보실 내리는 날입니다. 강마을에서 이선애드림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입시전쟁, 스펙경쟁, 취업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룬 이는 극소수이고, 대다수는 이른바 '패자'로 전락하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왜 대한민국에는 이토록 패자들이 넘쳐나는 것인가? 문제는 모든 청소년들의 부모가 '좋은 일자리'만을 찾기 때문이다. 문제는 좋은 일자리의 기준이다. 좋은 일자리에 대한 규정은 연구기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그 예로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는 명목임금을 기준으로 전체평균임금 수준을 상회하는 산업 부문에서 창출되는 일자리로 규정하고 있으며, 경영자총연합회는 정규직이면서, 임금이 평균치보다 약 20%정도 더 높은 일자리를 말한다. 그런가 하면 한국개발연구원(KDI)는 30대 대기업 집단과 공기업, 금융업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이런 좋은 일자리가 한 해 만들어 내는 신규 고용 인력은 고작 2만명 수준이다. 이에 비하여 매년 고등학교 졸업자는 60만 명이고, 대졸자는 50만명으로 본다면 60만명 가운데 2만 명만이 좋은 일자리를 차지할 수 있으니 이들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패자가 된 것이다. 학급 구성원으로 계산한다면 60명 학급에서 2명, 30명 학급에 1명이 좋은 일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기준의 좋은 일자리 개념을 갖고 경제생활을 하는 한 좋은 일자리에 가는 한 명을 뻬고는 다 실패자를 만드는 셈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부모는 자녀를 실패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에도 노는 아이가 없다. 학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거나 자기주도 학습 능력으로 무장을 하고, 상상도 못할 학습량을 감당하려니 스트레스가 쌓일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런 기준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이 기준에 대하여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기준이 지나치게 폭력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삶은 고귀한 것이다. 공부를 잘 하든 못하든 그가 은행에 취직을 하든 농사를 짓든 직업이란 하는로부터 명령받아 이땅에서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돈과 안정성으로 좋은 일자리를 규정하여 놓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장래는 좋은 일자리만 놓고 이에 매달린다면 모든 아이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것이 되므로 돈과 안정성을 넘는 더 귀한 기준으로 아이들이 자기 자신의 진로를 찾게 도와주어야 하며, 이런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귀한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금 지금 유망한 일자리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가이다. 60년대만 해도 잘 나가는 직업이 타이피스트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는 사람은 찾기가 어렵다. 문제는 변하는 세상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1년 후도 못 내다보는 우리가 20년 후를 바라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많은 정보가 필요하며 선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기업 수명이 10년 수준으로 짧아진 지금 수많은 직업변동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살아 남은 길을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살아 남는자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를 잘 관찰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육부가 지필평가 없이 수행평가로만 성적을 산출 할 수 있도록 한데 대해 교육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창의적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라는 취지는 공감하지만 지금도 평가 갈등을 겪고 있는 교원들에게는 지극히 낭만적인 탁상행정일 뿐이다. 이 같은 정서는 교총 설문조사 결과, 중등교원의 61%가 반대한 사실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암기 중심의 박제된 지식을 가르치는 현재의 평가 방식으로는 글로벌 경쟁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교육 당국의 절박한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관행처럼 굳어진 주입식 교육의 핵심인 지필평가부터 과감히 탈피해 평가 시스템 자체에 변화를 주겠다는 의도 또한 일리가 있다. 하지만 상급학교 진학이 걸린 교과 성적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교육현장의 실상을 감안할 때, 수행평가에 대한 객관적 기준 마련도 없이 밀어붙이기식으로 확대하는 것은 혼란과 갈등만 초래할 뿐이다. 현재도 수행평가는 점수에 민감한 학생들의 민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기본점수를 높게 주고 성적 차이는 최소화하는 등 기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무엇보다 교권 추락으로 갈수록 설자리가 좁아지는 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수행평가 확대가 큰 부담이다. 당연히 주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수행평가의 성격상 민원을 제기하는 학생과 학부모들로 인해 정상적인 교육활동에 지장을 초래할 개연성이 크다. 나아가 교사와 학교 자체에 대한 불신의 골이 더 깊어져 학생 교육을 위한 협력관계마저 무너질 수 있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 창의적 인재 양성이 시대적 과제이자 소명이라는 점은 동의하지만 밀어붙이기식은 절대 안 된다. 수능 등 입시제도를 개선하고 객관적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3월 21일(월) 오전 8시, 서산경찰서(서장 김석돈)는 서령중·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학교폭력전담경찰관(SPO) 이민로, 교사, 서령중·고 학생회 임원 등 2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학교폭력 없는 행복한 학교 만들기’ 캠페인을 실시했다. 이날 캠페인은 학생들과 친근한 분위기 속에 실시하고자 경찰관들이 직접 기타 연주를 했으며, 학생들이 학교폭력 예방 홍보물과 스티커 등을 나눠주며 동참을 당부했다. 서산경찰서는 3월부터 4월까지 ‘학교폭력 자진신고 및 집중단속 기간’을 운영하고 신고를 활성화해 학교폭력 예방에 노력한다는 방침이다. 이 기간 중 초·중·고교에 재학 중이거나 18세 미만 청소년으로 학교폭력을 행사한 자 또 폭력써클을 구성해 다른 학생들의 가입을 강요하거나 폭력써클에 가입해 학교폭력을 행사한 자가 자진신고 할 경우 최대한 선처 및 선도로 재비행방지에 주력할 예정이다. 또한 피해학생에게는 2차 피해를 방지하고 학교폭력전담경찰관 등 전문경찰관과 ‘멘토-멘티’를 지정해 지속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다. 한편 서산경찰서는 앞으로도 학교폭력예방을 위해 학부모설명회, 교육관계자들과의 간담회 등을 개최해 학교폭력 피해의 심각성을 널리 알려 학교폭력 제로(Zero)환경을 조성할 예정이다.
아직 새벽은 춥다. 새벽을 깨우며 일터로 나가는 분들이 참 많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하고 발전했다. 선생님들 중에는 벌써 출근을 서두르는 선생님이 많이 있을 것이다. 아침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출근 준비를 하는 선생님들도 계실 것이다. 아직 날씨가 차가우니 얇은 옷을 많이 입어서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함께 근무했던 한 선생님 중에는 몸살, 감기로 한참 고생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나 수업이 힘들고 괴로웠을 것인가? 건강관리가 선생님 자신에게도 좋고 학생들에게도 좋다. 수업의 결손은 학생들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건강관리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세월은 참 빠르다. 엊그제 개학을 하고 신학기가 시작되었는데 벌써 3월이 끝나가고 있다. 하루하루가 날라 간다. 시간을 아껴야 할 것 같다. 신학기에 가졌던 결심이 흔들리고 변할 때가 되었다. 처음 마음먹은 것 변치 않고 끝까지 잘 이어가야 좋은 선생님이 될 수가 있다. 선생님들이 가져야 할 자세 중의 하나가 좋은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선생님마다 습관이 있는데 좋은 습관을 가진 선생님이 있는가 하면 나쁜 습관을 가진 선생님도 있다. 좋은 습관은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나쁜 습관은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항상 늦게 출근하는 선생님, 항상 시간 전에 퇴근하는 선생님이 되면 안 된다. 이런 습관은 고쳐야 할 습관이다. 늘 일찍 출근해서 교재연구를 한다든지 교실을 둘러본다든지 청소를 자진해서 한다든지 하는 선생님은 좋은 습관을 가진 선생님이다. 이런 선생님이 되면 좋을 것 같다. 선생님들 중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한 선생님이 있다. 작은 감정에도 잘 흔들린다. 참지를 못한다. 교무실 분위기를 흐리게 하는 선생님도 있다. 이런 선생님은 좋은 습관을 가진 선생님이라 할 수가 없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는 선생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에도 내색하지 않는 인내의 선생님은 좋은 습관을 가진 선생님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다른 선생님을 험담하거나, 모욕을 주거나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편을 가르는 선생님이 있다. 이런 습관은 악습이다. 고쳐야 할 일이다. 이런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는 선생님은 불행하다. 행복을 주는 선생님이 되어야지, 불행을 주는 선생님이 되면 안 된다.
안산 수암봉 야생화 찾아가다 우리 부부의 무언의 약속 하나. 해마다 봄이 되면 야생화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본격적인 여행은 아니고 1일 코스로 인근에 있는 산을 찾는 것. 올해도 어김없이 그 약속을 실천했다. 나의 기록을 살펴보니 이 실천은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지켜졌다. “여보, 봄맞이하러 밖으로 나가야지? 지금쯤 야생화가 피었을 텐데….” 아내가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나에게 묻는다. “그럼, 광교산(수원), 수리산(안양), 수암봉(안산) 중에서 어디로 갈까?” 수원 인근에 있는 산 중에서 야생화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각 지역마다 피어나는 야생화의 종류가 다르고 개화 시기도 다르다. 기상예보를 들으니 낮 기온이 18°C다. 이번에 우리가 향한 곳은 안산시에 위치한 수암봉. 우리 부부가 언제부터 야생화에 대한 이런 애정을 갖게 되었는지 아침도 거른 상태로 출발이다. 사실 매니아 정도는 아니고 작년에 보았던 그 야생화가 지금도 그 곳에서 잘 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에 안부를 전하러 가는 것이다. 주말에 산을 찾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어난다. 수암봉도 예외는 아니다. 단체 산행객들은 복장도 화려하고 줄지어 넓은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른다. 걸음걸이도 빠르다. 마치 누가 먼저 정상에 도달하느냐를 놓고 내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야생화를 찾는 사람들은 걷는 길이 계곡 쪽이다. 걸음 속도가 느리다. 천천히 바닥을 보면서 야생화를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보라색의 제비꽃. 작년에도 길 가장자리에 돌틈 사이에 다소곳이 피어있더니 올해도 변함이 없다. 그 다음 발견된 것은 노오란 민들레꽃. 정말 부지런도 하다. 벌써 만개를 해서 씨앗을 퍼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로 반겨 준 것은 현호색이다. 참나무 낙엽 사이로 현호색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현호색이라고 다 같은 종류는 아니다. 꽃 색깔도 다르고 잎 모양도 차이가 난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촬영을 하다 보니 괭이눈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시기가 빨라서 그런지 노란 색깔이 완연히 드러나야 하는데 아직 선명하지 못하다. 흰색의 바람꽃은 두 곳에서 봉오리만 맺혀 있다. 부부 산행의 좋은 점은 관찰할 수 있는 눈이 두 배라는 것이다. 먼저 발견한 사람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수암봉 약수터를 지나 나무 데크 계단이다. 여기를 지나면 오른쪽 능성이에 노루귀가 우리를 맞는다. 올해도 변함없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을까? 과연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카메라를 든 야생화 매니아를 발견했다. 그렇다면 오늘도 작품 하나를 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노루귀 촬영의 핵심은 만개한 꽃이 아니다. 줄기에 가느다란 털을 잡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선 매니아는 노루귀를 촬영하고 다시 낙엽으로 덮어준다. 낮은 온도에 대비하여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한 마디 건넨다. “아마 한 시간 정도 지나면 꽃이 활짝 필 거예요.” 그렇다면 이 분은 최상의 작품을 위해 한 시간 정도 여기에 머문다는 이야기다. 야생화를 촬영하려면 애정도 있고 인내심도 있어야 한다. 이제 어느 정도 촬영을 했느니 하산이다. 수암봉 정상 정복이 목표가 아니고 노루귀 등 야생화 촬영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점심도 먹고 수원에서의 모임 약속을 지키려면 시간에 맞추어 하산해야 한다. 하산 도중 시산제 준비모습을 보았다. 방송통신대학교 안산․시흥 총동문회 주관인데 돼지머리가 커다란 플라스틱 돼지 저금통이다. “그래 해마다 시산제 때 쓰려면 저것도 한 방법이지.” 혼자서 중얼거려본다. 점심은 잔치국수로 대신했다. 반찬으로 나온 파김치가 국수 맛을 더 돋우어 준다. 식당 주인은 밥공기 하나를 서비스로 제공한다. 산을 찾는 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라고 보았다. 오늘 수암봉에서 들은 새소리, 계곡물소리, 낙엽 밟는 소리와 야생화의 우아한 모습은 도심 일상에 지친 우리부부에게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숲이 있기에,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야생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전남 남부 보성에 위치한 용정중학교(교장 황인수)가 창의력 교육의 열매를 거뒀다. 이 학교학생 6명(김동규, 박용주, 전수환, 이준형, 홍산, 김태현)이 올헤 5월 23일부터 29일까지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교에서 개최되는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SAFO라는 팀으로 지난 2월 27일, 국립 과천과학관에서 열린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 한국 본선대회에 참가해 중학부 금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대회는 세계창의력올림피아드 본부가 주최하고 미래창조과학부가 후원하고 있다. 이번 대회는 21세기를 관통하는 교육철학인 융합적 사고와 사물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 향상을 기본으로 한다. 배우는 방법으로 팀에서의 협동심과 리더십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오감으로 체득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남이 가지 않는 새로운 길을 창조하고 도전하며 끊임없는 실패와 좌절을 통하여 감동스러운 성취의 기쁨과 자존감을 체험하게 할 목적으로 개최됐다. 이번 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둔 SAFO팀의 대표 학생인 3학년 김동규 학생은 “이번 대회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5월 세계대회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입상하여 모교와 우리나라를 빛낼 수 있도록 최선을 대해 준비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 같은 입상은 그간 용정중학교가 개교 이래 학생들의 창의성 신장을 위해 다양한 교육활동을 전개해 온 결과이다. 용정중학교는 일반교과 수업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운 영역을 토론, 국선도, 악기, 다도, 목공예, 철학과 같은 특성화 교과로 편성·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화 교과 활동을 통해 다양한 영역과 주제를 접하면서 창의력 및 문제 해결력을 계발하고, 교과별 토론수업과 타 교과와의 융합교과 수업을 통해 학생들의 종합적 사고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됐다. 또한 국어를 비롯한 일반교과 시간에도 단원이 끝나면 단원 관련 주제에 대한 토론수업을 실시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의 사고력, 발표력, 종합력, 창의력을 기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직면한 문제를 도전정신으로 해결해내는 창의성을 기르도록 지도해오고 있다. 또한 교내에 과학동아리를 비롯한 많은 학습 동아리를 학생들 스스로 결성해 주제 탐구활동을 전개하여 학생주도의 창의성을 신장해오고 있다. 이러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습동기가 유발되고 집중력이 길러져 높은 학력 향상이 이뤄지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 인사혁신처는 공무원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부작위’와 ‘소극행정’이 눈에 띈다. 부작위는 “공무원이 이행해야 할 직무상 의무가 있는데도 상당기간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소극행정은 “공무원이 해야 하거나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국민의 불편을 초래하거나 권익을 침해한 업무 형태”이다. 지난 2월 말 교사로 명예퇴직한 내가 공무원 시행규칙을 시시콜콜 살펴보는 것은 물론 그만한 까닭이 있어서다. 3월 초 지급된다던 퇴직연금 수당이 중순을 지난 지금까지도 감감 무소식이어서다. 같이 퇴직한 동료에게 전활 걸어 물어보니 예정대로 3월초 통장으로 입금되었다는 답변이 전해졌다. 이상하고 궁금하여 공무원연금공단으로 문의했더니 뜻밖의 답변이 마치 비수처럼 날아왔다. “전과기록 조회가 국가기록원으로부터 아직 오지 않아서 지급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란 답변이었다. 아니, 전과기록이라니! 나는 순간 멍한 기분이었다. 불쾌함과 함께 솟아오른 분노로 한동안 어찌 할 줄 몰랐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쯤 갓 스무 살 어름에 술 마시다 시비가 붙어 쌈을 하게 됐다. 젊은 시절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집행유예를 선고 받는 전과자가 되고 말았다. 대학 4학년때 교원 순위고사(지금의 교원임용고사)에 합격하고도, 동기들보다 1년쯤 늦게 임용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교사로 임용된 것은 1984년 4월 20일이다. 이를테면 교사 임용으로 그 전과 기록은 사실상 사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실제로 32년을 교직에 있으면서 그로 인한 불이익은 당한 바 없다.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착실한 교직 수행을 하다 떠났는데, 이제 와서 그로 인해 퇴직수당 지급이 보류되고 있다니 그 황당함을 어디에도 비할 바가 없다. 무엇보다도 그 전과는 교사 임용 전 생긴 것이기에 공무원연금공단의 그런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바꿔 말해 교사를 하며 파면이나 해임 따위 중징계를 당한 게 아닌데, 공무원연금공단이 무슨 권한과 자격으로 그런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단 얘기다. 도교육청으로부터 명예퇴직 수당을 이미 받았기에 더욱 그렇다. 어디가 됐든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이 아닌가? 만약 이런 걸 알았더라면 월급에서 기여금을 떼는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무원연금공단은, 그러나 그런 규정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32년을 멀쩡히 교단에 섰으니 그들 행태대로라면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아주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런 놈의 규정이 다 있나 싶어 절로 억하심정이 들기까지 한다. 한 평생 교단에서 헌신한(나는 교육부총리⋅교육부장관 표창에 이어 남강교육상까지 수상한 교사였다.) 퇴직교사에게 치하와 격려는 못해줄망정 이 무슨 불쾌한 일인지, 진짜 이 나라가 싫다. 당국에 바란다. 먼저 공무원연금공단의 그런 규정이 과연 올바르고 합리적인지 적극 검토해보기 바란다. 설사 그렇다쳐도 국가기록원은 왜 또 공무원연금공단의 공문에 의한 전과기록 조회에 대한 답변을 이리 오랫동안 안하고 있는지, 그것이 ‘부작위’나 ‘소극행정’은 아닌지…. 퇴직수당은 2주쯤 늦게 지급되었다. 그로 인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는 내가 고스란히 안아야 되는 것인가? 어린 시절 잘못을 개과천선하여 잘 살아온 선량한 시민을 이렇게 골탕먹이고 초라하게 만드는 공무원연금공단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규제 푸는 혁신인지, 참 답답한 봄날이다.
교총 회원관리, 개선할 점 있다 나는 지난 2월말 교직에서 명예퇴직을 하였다. 공직자에서 퇴직을 하여 자연인으로 신분이 변동되다보니 다섯 개의 기관을 상대하게 된다. 한국교총, 경기교총, 공무원연금공단, 한국교직원공제회, 경기도교육청이다. 이 기관들과 그 동안 맺었던 인연을 끊기도 하고 다시 연결하기도 한다. 한국교총은 퇴직을 하게 되면 회원에서 자동 탈퇴된다. 그 동안 매주 가정에서 받던 한국교육신문 배달도 끊기게 된다. 나는 2월 29일(월)까지 신분을 유지하고 있으니 3월 초순이면 29일자 신문이 배달될 줄 알고 있었다. 교총에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회원에 대한 도리이자 의무다. 그런데 신문이 도착되지 않았다. 얼마 전 담당부서에 전화를 거니 담당자의 분명한 답이 나온다. 내 이름과 전 소속 학교명을 묻더니 회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름이 삭제되었나 보다. 2월 29일자 신문 배달 여부를 따지고 싶었지만 구태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홈페이지를 통하여 신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우, 한국교육신문 e-리포터이기에 다른 회원보다 교총에 대하여 교육신문에 대하여 애정이 깊다. 화면상으로 보는 신문과 오프라인으로 보는 신문은 차이가 있다. 화면상으로는 그냥 스쳐가지만 지면을 실제 보면 정독이 가능하다. 또 지면 전체를 살펴볼 수 있어 피드백도 가능하다. 경기교총의 경우, 지난 달 23일 퇴직 부조금을 신청하였다. 부조금 신청서와 인사기록카드 출력본을 팩스로 보내고 전화로 확인하였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친절하게 확인해 준다. 선배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 부조금은 얼마 아니 되니 크게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경기교총 부조금, 누가 대신 주는 것 아니다. 그 동안 회원으로서 내가 매월 낸 돈 다시 돌려받는 것이다. 3월 2일, 8만원 넘는 돈이 통장에 입금되었다. 내가 교총 회원 39년인데 너무 적다 싶어 담당과장과 통화를 하였다. 잠시 후 담당자는 정확한 통계자료롤 보면서 산출근거를 알려준다. 2009년 3월부터 납부했다고 알려준다. 00중학교 교총회원 이름도 대면서 알려주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공무원연금공단은 지난 1월 퇴직자를 대상으로 지역별로 이미 연금설명회를 가졌다. 교재를 준비하고 담당자가 공무원연금에 대하여 설명하고 퇴직급여 청구방법을 알려준다. 국민건강보험 담당자도 초빙하여 건강보험제도를 안내한다. 개인별로 질문도 받고 담당자 전화번호도 알려준다. 공단은 이미 홈페이지에 연금대상자 개인별로 연금월액, 퇴직수당, 계산방법 등을 안내하고 있었다. 한국교직원공제회는 퇴직자에 대한 계속 회원 유지방법으로 퇴직생활 급여 제도를 할용하고 있다. 그 동안 납입했던 장기저축을 부가금(이자) 포함하여 일시에 다 찾으면 회원 탈퇴가 되는 것이고 5백만 원 이상 생활급여에 가입하면 회원번호와 공제회 문화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면 한국교직원신문이 매주 배달된다. 다음은 경기도교육청 명예퇴직의 경우에는 명예퇴직금이 언제 입금되는지 알려 주는 사람이 없다. 연금공단에서는 사전 문자로 날짜와 입금액을 알려주는데 도교육청은 무소식이다. 선배들에게 문의하니 사람마다 다르다. 두 달 후 입금되었다는 선배도 있고 3월 중에 입금되었다는 선배도 있고. 필자의 경우, 학교 행정실 담당자가 보수지급일에 연락을 준다. 3월 17일 명예퇴직 수당을 받았다. 명예퇴직하면서 관계했던 기관 5곳을 평가해 본다. 사전 안내, 정보제공, 직원친절도, 업무 처리 속도, 사후 회원 관리 등을 종합한 것이다. 한국교총 ‘미흡’, 경기교총 ‘보통’, 공무원연금공단 ‘아주 잘함’, 한국교직원공제회 ‘미흡’, 경기도교육청은 ‘매우 미흡’이다. 이것은 교직에서 반평생을 바친 고객회원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보았다. 한국교총 회원인 경우, 2월 29일자 신문까지 배달하는 것이 원칙이고 교총의 당연한 의무다. 부부교원인 경우, 물자 절약 차원에서 회원 요청에 따라 한사람에게만 배달되었다. 이런 경우, 회원 관리 차원에서 사전에 다른 배우자 명의로 배달되게 하는 서비스가 필요한 것이다. 필자는 아내 이름으로 배달을 신청하였다. 교총 회원관리에 있어 문제점을 제언하는 것이다.
3월 15일, 청주행복산악회원들이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에 위치한 달마산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달마산은 산세가 아기자기한데다 산줄기에 유서 깊은 도솔암과 미황사를 품고 있는 명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최남단인 땅끝에 위치해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아침 6시 20분 용암동 집 옆에서 출발한 관광버스가 중간에 몇 번 정차하며 회원들을 태우고 서청주IC로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발했지만 해 뜨는 시간이 빨라져 길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호남고속도로 이서휴게소에 들르며 부지런히 달리는 차안에서 달콤 회장님의 환절기 건강조심과 참여해준 회원들에 대한 감사인사, 석진 산대장님의 산행안내와 처음 참여한 회원소개가 이어졌다. 장성IC를 빠져나온 관광버스가 국도와 지방도를 갈아타며 남쪽으로 향하는데 넓게 펼쳐진 보리밭과 영산강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신북휴게소에 들렀던 버스가 영암읍을 지나자 오른쪽으로 월출산이 나타난다. 산행지가 먼 날은 차안에 있는 회원들도 달리는 버스만큼 고생한다. 바다가 나타난 후에도 한참을 더 달려 11시 5분경 마봉리약수터에 도착했다. 대부분 북쪽인 해남군 현산면 송촌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지만 우리는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산행을 했다.차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하고 약수부터 한 모금 마신다. 임도를 따라 걷는데 동쪽으로 달마산 능선과 철제 통신탑이 눈에 들어온다. 소형차량을 이용하면 통신탑에서 가까운 도솔봉주차장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지만 해발 50여m 되는 지점에서 임도를 따라 시작된 산행이 산길로 들어선 후 직선에 가까운 급경사 계곡 길이 한참동안 이어져 땀을 흘리게 한다. 주차장 전망대에 올라 앞산도 바라보고 방금 지나온 길도 내려다본다. 달마산(높이 489m)은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과 북평면에 걸쳐 있는 아름다운 산으로 공룡의 등줄기처럼 울퉁불퉁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호남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주차장에서 도솔암 사이에 멋진 바위들이 많아 발걸음이 느리다. 도솔봉(높이 418m)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일행들과 떨어져 홀로 산행을 했다. 통신탑 북쪽의 도솔봉에 오르면 동쪽의 완도, 남쪽의 노화도와 보길도, 서쪽의 진도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솔봉에서 내려와 산줄기에 기암괴석이 즐비한 능선을 걸어 도솔암으로 간다. 도솔암은 달마산의 남쪽 끝자락 바위틈에 요새처럼 자리 잡은 암자로 미황사의 열두 개 암자 중 하나다.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수도했던 곳으로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데 천년을 훨씬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불타 폐사된 후 수 백 년 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2002년 오대산 월정사 법조 스님의 현몽에 의해 기와를 한장 한장 손으로 올려 32일 만에 지은 것이 지금의 도솔암이란다. 도솔암 옆 빈터에서 점심을 먹는데 호산자님 친구가 막걸리와 소주는 물론 자연에 어울리는 안주까지 내놓는다. 가끔 작아서 더 소중한 것들을 만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 칸짜리 작은 전각, 한 그루의 나무, 작은 마당이 전부다. 도솔암의 진짜 모습은 삼성각 가는 길에서 바라봐야 한다. 아래로 내려가면 삼성각에 닿는데 이곳에서 올려다보면 요새처럼 돌을 쌓아올린 도솔암의 기암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땅끝에서 만나는 하늘끝의 다락방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도솔암에서 바라보는 멋진 일몰도 유명하다. 도솔암에서 나와 북쪽으로 향한 능선에도 수석전시장이 연달아 펼쳐진다. 수시로 나타나는 높은 봉우리에 오르면 앞으로 진행할 달마봉 방향과 방금 지나온 도솔봉 방향의 날카로운 바위들이 멋진 풍경을 만든다. 동쪽으로 해남 바닷가의 너른 들녘과 완도대교도 눈에 들어온다. 산에 오르지 않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눈으로 본 것을 마음으로 담아가는 것도 산행을 하며 누리는 행복이다. 산행이 힘든 회원 몇 명은 떡봉을 지난 삼거리에서 왼쪽의 하숙골재 방향으로 하산했다. 아직 때가 이르지만 길옆의 양지바른 풀숲에서 예쁘게 꽃을 피운 작은 야생화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유혹한다. 잠깐이지만 눈높이를 맞추느라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것도 휴식이다. 인생살이에 대한 답이나 가르침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 야생화와 눈맞춤하며 자연은 계절, 인생은 세월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을 배운다. 이럴 때는 꽃 이름 몇 개 몰라도 괜찮다. 바닷가에 있는 산들은 높이를 가늠하기 어려운데 달마산 줄기는 고만고만한 높이의 봉우리가 연달아 나타난다. 두 손까지 사용해 오르내려야 하는 암봉들이 많아 산행 속도가 더디고 산행도 유난히 힘이 든다. 낮은 산은 있어도 쉬운 산은 없다고 했다. 산에서의 사고는 무리한 산행이 원인이다. 가끔은 자신에게 맞춰 목표를 수정하는 것도 지혜다. 달마산의 정상인 불썬봉(달마봉)이 아른거렸지만 대밭삼거리에서 40여분 거리의 부도전으로 향했다. 포기는 다른 무언가를 채울 수 있게 해준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발걸음이 가벼워 콧노래가 나온다. 절이라고 다 같은 절이 아니다. 긴 역사에 맞게 나름대로 특색을 지니고 있다. 산에서 내려오면 20여 기가 넘는 부도와 부도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부도전이 맞이한다. 부도에 조각된 다양하고 독창적인 동물의 문양들이 마음을 휘어잡는데 바닷가의 사찰답게 게, 거북이도 보인다. 부도전 옆 부도암으로 가면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전하는 미황사 사적비가 축대아래에 서있다. 부도암과 부도전 뒤편에서 달마봉이 멋진 모습으로 얼굴을 내민다. 부도전에서 미황사까지 10여분 거리는 비교적 넓고 편안한 산책길이다. 3시 30분경 미황사에 도착해 사찰을 한 바퀴 돌아본다. 미황사(美黃寺)는 우리나라 최남단의 달마산 서쪽 기슭 양지바른 터에 자리 잡은 사찰로 749년 의조화상이 창건하였다. 달마산의 바위 능선이 병풍처럼 사찰을 감싸고 있는 멋진 풍경을 어디서 또 볼 것인가. 미황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은 전각을 단청하지 않아 오히려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늘씬한 기둥과 주초 위에 조각되어 있는 게와 거북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창 번성하던 때에는 큰 사찰이었다지만 지금은 대웅전(보물 제947호), 응진당(보물 제1183호), 명부전, 만하당, 달마전, 임심관, 세심당 등의 전각과 요사채만 남아있어 오히려 편안함이 느껴진다. 불썬봉에 다녀온 회원들 기다리다 4시 50분경 출발한 관광버스가 월출산에 다녀가며 몇 번 들렀던 입소문한정식(010- 3602-3619)으로 갔다. 반찬이 다양하고 주인장의 인심이 좋아 저녁을 먹으며 뒤풀이도 진하게 했다. 우리나라가 작다지만 땅끝은 참 멀다. 호남고속도로 여산휴게소에 딱 한 번 들르며 부지런히 달려왔는데도 10시경 집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 학교교육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기 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은 고3의 대입준비이며, 그 다음이 취업을 위한 준비라고 답할 것이다. 내가 만난 제자들 대부분은 고교시절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 것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학창시절의 노력은 곧바로 결과로 반명된다. 시험이 끝나면 성적으로 표현이 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시험점수나 학년 순위는 공부의 양에 비례하여 향상된다. 이 점수에 따라 해당 학교 수준에서 진학할 대학도 꿈을 꾸게 된다. 그래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한 방법을 거의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학생도 사회에 나가면 세상이 학교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일의 성과는 학교처럼 점수를 메기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과정에서 공부의 노하우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특히,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배교사들이 처음 접하는 학교 현장은 이론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것이다. 현장과 이론의 차이를 완벽하게 없앤 평가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 공부는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 넣는 입력의 작업이다. 시험이 아니면 출력을 할 필요가 없기에 머릿속에 정보를 집어 넣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지금 까지는 이런 삶의 방식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세상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이 출력의 작업이다. 각종 실행한 것, 보고나 전달, 회의에서의 발언 등 출력의 양과 성과가 업무성과로 꼭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엘리트들을 살펴보면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유일무이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학교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입력의 양을 늘리면 좋은 성적이 나온다는 가치관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성공경험이 지속되어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사회에서 큰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사회는공부 잘 하는 사람이 아닌 일 잘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오면 정답이 하나가 아니다. 상황이나 맥락, 인간관계에 따라 항상 변하고 있다. 조직의 비전과 전략에 따라 올바른 정답이 정해져 간다. 그러기에 사회와 조직 전체를 바라보는 힘이 사회인으로서 가져야 할 본질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한 사람들은 향상심이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난다. 어런 현상은 취업현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러기에 성과가 나지 않으면 절망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향삼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 목적 달성을 위한 유리한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직 중추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출력의 힘과는 다른 본질적인 힘이 있다. 그것이 바로 폭넓은 시야를 갖는 것이다. 책임이 클수록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이는 사장이 되면, 교장이 되면, 회장이 되면 따라붙는 것은 아니다.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의식적으로 몸에 익힐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이야말로 궤도의 중심에 오을 수 있다.
나와 세상을 향한 관조의 시선 - 류인채 시집 소리의 거처를 읽고 옛날에 다 읽었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인천의 시인들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인천의 문학도 많이 발전했다. 소설도 수필도 십여 년 전에 비하면 눈부시게 발전했다. 시도 그렇다. 상당히 비중 있는 시집들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 류인채 시인도 그 중에 하나다. 인천문학의 희망이 걸린 기대주임에 틀림없다. 수록 작품 전부를 다루기엔 무리고 특별히 선별하지는 않고 아무렇게나 펼쳐 읽은 작품 중에 세 편에 대해서 소감을 적어 본다. 우선 거북을 읽어보자. 거북 전동차 문이 닫히는 순간 덜컹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목과 두 팔이 문틈에 끼었다 성급히 빠져나간 두 다리만 문밖에서 버둥거린다 그러나 폐지 자루를 움켜쥔 손은 완강하다 손등에 적힌 갑골문자가 그가 헤맨 도시의 길들을 보여주고 있다 움켜쥔 자루는 꿈쩍도 않고 門이 큰칼*이 되어 깡마른 노인의 목을 겨누고 있다 절룩이며 거둔 따끈한 뉴스들 아무렇게나 접힌 아침이 너무 육중하다 방금 전까지 선반을 더듬던 손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고 쫓기듯 두리번거리던 눈빛은 단도처럼 자루에 꽂혀 있다 안도 밖도 아닌 그 노인 눈만 끔벅거린다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러 번 당해본 일이라는 듯 뜻밖에 덤덤하다 쇄골이 산맥처럼 뚜렷하다 찰나에 백년이 지나간다 잠시 후 방송이 나오고 잠깐 문이 열리고 그는 늘어진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였다 * 중죄인의 목에 씌우던 형구. 시를 다 읽고서야 왜 제목이 거북인지를 알겠다. 이 시는 전철의 종점 부근에서 목격한 기이하고 안타까운 광경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선 시의 제재는 한 노파다. 가난하고 남루한 고령의 한 노파가 폐지자루를 등에 지고 전철 문을 빠져나가려다가 문틈에 끼어버린 상황으로부터 시가 출발한다. 문틈에 끼어 있는 노파의 모습이 기이하게도 거북이를 세워놓은 모습과 닮은꼴이다. 안간힘으로 빠져나가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길게 목을 빼고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거북이와 닮아 있다. 등에 진 종이자루는 거북이 등껍질이고 허우적거리는 두 팔은 영락없는 거북이의 앞발이요, 가느다랗게 땅을 밟고 있는 두 다리는 거북이의 뒷다리다. 거북이가 드넓은 바다를 헤엄치며 등껍질에 갑골문자를 새겼듯 이 노파는 도시의 골목과 전철의 통로를 휘젓고 다니며 저 육중한 폐지자루를 채웠을 것이다. 폐지 줍는 노파는 우리 시에 이미 익숙한 제재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참혹한 불평등을 나타내는데도 나타나고 가난하고 병들고 고단한 삶의 아이콘으로 곧잘 등장하는 것이 바로 폐지 줍는 노파다. 김사인 시인도 바짝 붙어서다란 시에서 밀차에 폐지를 싣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다가 자동차가 다가오자 벽에 납작하게 붙어 섰다가 자동차가 지나간 후 구겨졌던 종이처럼 다시 펴지는 노파를 시로 그려낸 적이 있다. 그렇게 길을 가다 보면 폐지 줍는 일은 노인들이 도맡아 하고 있고 그 광경은 바로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시적 질료로써 자주 인용되고 있다. 그러니 이 시가 단순히 풍경을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막한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고 실상을 폭로하며 시적 소명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저 중노동으로 얻어지는 소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저 치열한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노파에게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지는 않는가. 생명의 고귀함, 그 생명을 끝까지 완수하려는 노파의 강한 집념과 끈질긴 생명력을 깨닫게도 된다. 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노파의 승리를 확인한다. 그 승리는 고귀한 생명의 확인이며 숭고한 노동의 승리인 셈이다. 길게 늘어졌던 목을 천천히 제자리로 거두어들인 노파에게서 우리는 희망을 본다. 이제 다시 두 번째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이끼의 시간 공터에 버려진 수레 하나 때 절은 손잡이를 치켜들고 전봇대에 등을 기대고 있다 싣고 나르던 짐들은 모두 어디에 부렸을까 먼 길을 가던 바퀴가 헐렁해졌다 길과 길을 이어주던 힘이 멈춰있다 눅눅한 때를 건너온 시간의 흔적 푸른 이끼가 기울어진 수레의 바닥을 타고오른다 저 수레가 걸어온 길을 알 것만 같다 단단하게 조였던 시간이 느슨해지고 길은 이곳에 멈춰있다 해가 구름 사이로 잠깐 들어간 사이 바람이 손잡이를 슬쩍 만지다 간다 그 손에도 이끼가 묻어 있다 이끼의 시간이 굴러가느라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도 한 풍경에서 씨앗을 얻어 발아시킨 한 그루의 시다. 그 풍경은 버려진 수레다. 오랫동안 길과 길을 연결하며 짐을 실어 나르던 수레가 이제 수명을 다해 전봇대에 기대어 앉아 있다. 앉아 있다기보다 수명을 다하여 이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뼈마디는 풀어져 있고 힘은 빠져나갔다. 눅눅한 시간을 건너와 지금은 온몸에 이끼가 덮이고 있다. 움직이지 않는 수레의 몸뚱어리를 바람이 슬쩍 건드리고 간다. 그 바람의 손에도 이끼가 묻어난다. 그렇게 이끼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아니 지난 삶을 되돌아보기라도 하듯 수레는 지금도 덜컹거리고 있다. 이 시는 단지 사물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듯하지만 실은 우리 인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수레는 펄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였다. 주인과 더불어 길과 길을 잇고 잔뜩 짐을 지고 세상을 활보하던 생명체였다. 그러나 늙고 노쇠해지고 더 이상 기력이 없어지고 마침내 수명을 다하여 지금은 한 개 시신이 되어 이끼에 몸을 맡기고 있다. 그러나 시신으로 누워 있는 몸이지만 비극적으로 느껴지거나 암울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잠깐 구름 사이로 해가 들어가긴 했지만 여전히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슬쩍 손잡이를 만지고 지나가기도 한다. 덜컹거리는 수레 본래의 음악도 여전히 들려오는 상황이다. 몸이 헐렁해지고 느슨해지긴 했지만 죽음의 절망적인 상황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심상을 읽을 수 있다. 이 시 2연의 ‘눅눅한 때를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중요한 시행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눅눅한 시간은 현재의 시간이 아니다. 수레가 펄펄 살아 움직이던 시절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수레는 일평생을 눅눅한 시간 속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눅눅한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죽어서 이끼를 기르게 한 그 눅눅한 시간은 지나온 우리의 현대사의 시간이다. 전쟁이 지나가고 혁명이 지나가고 가난과 노동이 묵묵하게 굴러가던 시간이 바로 눅눅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이제 저 수레는 그 눅눅한 시간을 다 살고 이제 바통을 후세에게 넘긴 상태다. 그 바통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는 어떤 시간을 펼쳐야 할까. 적어도 눅눅한 시간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아니 삶이란 언제나 눅눅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 세 번째 시를 읽어 보자. 엎질러지다 강의시간에 늦어 택시를 타고 왔다 수업시간보다 한 시간 앞질러온 생각이 문 앞에 서 있다 텅 빈 교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늘 그랬다 식탁을 훔친 행주를 냉장고에 넣고 휴대폰을 냉동실에서 찾기도 했다 반갑다고 다가서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눈에 익은 길도 문득 낯설다 다닥다닥 공중에 떠 있는 플라타너스 열매가 낯설고 나무가 놓쳐버린 수많은 이파리가 낯설고 그 열매의 속이 낯설고 그 중심의 까치집이 낯설다 도대체 익숙한 것은 무엇인가 어딘가에 잠복했던 기억들이 툭툭 끊어지는 소리 들린다 수많은 기억의 동굴로 바람이 들랑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과부하 된 기억들이 썰물처럼 쓸려나간 자리에 내가 있다 타인이다 이 시엔 자의식이 짙게 배어 있다. 나와 세상의 부조화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강의 시간 훨씬 전에 문 앞에 한 생각(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다)이 서 있다. 거기 서 있는 생각을 보고 교실이 깜짝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바쁘게 허둥대는 화자의 삶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어서 화자는 계속 허둥대고 낯선 풍경에 부딪친다. 익숙했던 길도 낯설고 눈에 익은 길도 낯설다. 그리고 늘 보던 플라타너스의 풍경도 낯설어진다. 급기야 내 안에 가득했던 기억들이 툭툭 끊어져 튕겨나가고 기억의 동굴로 바람이 드나들고 마침내 과부하 되어 가득했던 기억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내가 있는데 거기 서 있는 내가 낯익은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며 시는 끝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화자의 의식 작용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종종 날마다 쓰던 어떤 낱말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오래 사귀어 왔던 친구나 동료가 갑자기 낯설어져 예전의 그 허물없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화자도 그런 시점을 시로 형상화한 걸까. 아닌 것 같다. 그런 경험과는 다른 어떤 심리적인 까닭이 있을 것 같다. 어떤 자의식 같은 것, 일시적으로 우연히 낱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깊은 생의 근저에서 우러나오는 무엇인가 있을 것 같다. 내 주변이 모두 낯설게 느껴지고 급기야 나까지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의식의 심저에는 세상과 화자 사이에 깊은 부조화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종 부딪히는 그 부조화가 어느 날 크게 확장되어 나란 존재 전체가 예전의 내가 아닌 타인으로 인식되기까지 이른 것은 아닌가. 모든 기억을 썰물처럼 쓸려 보내고 난 후에 만나게 된 타인 같은 나, 그 타인 같은 나가 바로 진정 나의 본 모습인지도 모른다. 화자는 어쩌면 비로소 나를 찾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를 텅 비워내고 새롭게 바라보는 나, 그 텅 빈 자리에 새롭게 세워나가는 나, 그 작업이 바로 시인의 시작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에서 희망을 본다. 시인은 세상을 낯설게 보는 존재다. 그 낯설게 보는 과정에서 언어미학은 발현되고 궁극의 자아와도 만나게도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절망의 시편이 아니라 희망의 시편이다. 이 시집 속엔 명편들이 가득하다. 꽤 오래 전에 다 읽은 작품집인데 시인의 작품 몇 편에 대한 소감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쳐보다가 거의 즉흥적으로 세 편을 골랐다. 꼭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선정해서 쓴 것이 아니라는 점 이해하기 바란다. 문학에 있어서 어떻게 중앙이 있고 지방이 있겠는가. 모두에 얘기했지만 인천의 문학은 괄목할만하게 발전하고 있다. 앞으로 인천의 많은 시인 작가들이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문학인들로 성장하길 바라며 짤막하게 적어본 소감을 마친다.
우리나라에는 모세의 기적으로 알려진 바닷길이 여러 곳 있다. 경기도 화성시의 제부도에서 안산시 대부도를 거쳐 다리로 연결된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선재도와 영흥도를 여행하면 모세의 기적을 여러 번 만난다. 교통편도 좋아 짧은 시간에 멋진 바다풍경과 싱싱한 수산물을 접할 수 있는 알찬 여행지로 손색이 없다. 3월 9일, 사진동호회 설레임 회원들이 제부도에서 영흥도까지 돌아보는 출사를 다녀왔다. 서신면 송교리와 제부도 사이의 자동차로 통행할 수 있는 물길이 있다. 이 물길은 썰물에 드러나기 시작해 밀물로 다시 덮일 때까지 열리는데 그 시각은 화성시문화관광 제부도 바닷길(http://tour.hscity.go.kr/Guide/jebudo_time.jsp)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부도는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진 작은 섬이지만 볼거리가 많다. 남쪽의 바닷가에 매들의 보금자리인 매바위가 있고 입파도 앞으로 평택항을 오가는 큰 배들도 보인다. 북쪽 바닷가의 선착장으로 가면 작은 고깃배들이 바다위에 떠있고 바다 건너편의 누에섬과 대부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제부도의 북쪽에 위치한 대부도(大阜島)는 큰 언덕을 뜻할 만큼 무척 큰 섬이다. 대부도 초입의 누에섬은 탄도항과 어촌민속박물관 바로 앞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으로 썰물 때만 길이 열린다. 작은 등대와 풍력발전소가 이색적인 풍경을 보여주고 일몰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마침 물길이 열릴 시간이지만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현수막에는 ‘새로운 누에섬등대전망대로 다시 태어납니다’라고 쓰여 있다. 건너편으로 등대전망대가 보이는데 공사가 완공되면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궁금하다. 선재도로 가며 대부도를 벗어나기 전 아일랜드CC 못미처에서 어심바다 방향인 오른쪽 잘푸리길로 들어서면 가까운 거리에서 플라야펜션을 만난다. 펜션 앞 해변에 주차하고 바다 쪽으로 나가면 바닷길을 이용해 광도까지 다녀올 수 있다. 물이 차면 잠기는 포장도로라 물때를 맞추지 못하면 건너편의 선재대교와 선재도, 물에 갇힌 광도와 주도 등 눈앞에 보이는 바다 풍경만 구경한다. 선재도는 대부도와 영흥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선재대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진입하여 다리 밑 그늘에 차를 주차하고 바닷가로 가면 걸어서 목섬을 둘러볼 수 있다. 목섬은 바닷물이 빠지면 문을 열어주는 무인도다. 물이 빠지고 길을 드러낸 모습이 멋진데 모랫길에는 인적이 끊겼다. 오른쪽으로는 육지와 연결된 측도가 가깝게 보인다. 영흥도는 서쪽의 자월도와 가깝고 옹진군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영흥도의 북쪽으로 가면 장경리해변과 십리포해변이 바다 건너편의 무의도와 영종도를 바라보고 있다. 영흥대교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 내려서 동쪽 바닷가를 달리면 십리포해변을 만난다. 고운 모래밭과 수백 년 된 소사나무 숲이 주변 경관과 어우러지며 멋진 풍경을 만들어 해변에 사람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다.
중등 교원의 61%가 지필평가 대신 수행평가 등으로만 성적을 산출하는 방안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나타냈다. 교원들은 객관적 기준 미비로 인한 평가 갈등 확산을 가장 우려했다. 한국교총은 최근 교육부가 초·중등학교의 지필형 시험을 서술·논술, 수행평가만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한 것과 관련해 전국 교원 960명이 응답한 인식조사(9일~16일) 결과를 20일 발표했다. 이번 온라인 설문에는 초등 555명, 중학 177명, 고교 208명, 기타 20명의 교원이 참여했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p이다.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수행평가 등으로만 성적을 매기는 것에 대해 초등은 찬성(55.3%)이 반대(40.8%)보다 높은 반면 중학 교원은 찬성(42.4%)보다 반대(54.8%) 의견이 더 많았다. 특히 대학입시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받는 고교 교원은 반대가 66.3%로 찬성(32.3%)의 두 배를 넘었다. 이런 결과는 교사, 학생 모두 입시와 평가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 응답 결과, 중·고교 교원들은 평가방식 변경이 가져 올 문제에 대해 ‘공정한 기준 마련이 어려워 내신 갈등 확산’을 1순위(중학 46.3%, 고교 44.7%)로 꼽았다. 이어 ‘수능 불변에 따른 이중적 학습부담 가중’(중학 24.3%, 고교 30.3%)을 지적했다. 초등 교원도 대부분 내신 갈등(31.9%)과 이중 학습 부담(38.7)에 공감했다. 이를 반영하듯 초·중·고 교원들은 평가방식 변경 시, 우선 지원해야 할 과제로 ‘상대평가 형식의 수능제도 변경’, ‘객관적인 기준 마련’, ‘교원 수업전념 환경 조성’을 요구했다. 초·중학교 교원은 수능 변경(초등 30.1%, 중학 27.7%)을 1순위로, 고교 교원은 객관적 기준 마련(30.8%)을 가장 많이 제시했다. 교원들은 자유서술식 설문 답변에서 보다 생생한 현장 상황을 전달했다. 한 고교 교원은 "수시, 정시, 논술, 학생부종합 등으로 지금도 학생들은 이중 삼중고를 겪고 있다"며 "입시가 바뀌지 않는 한 공정성 시비가 불 보듯 뻔하고 사교육만 늘어날 것"이라고 토로했다. 또한 "객관적 기준 없이 수행평가로 내신을 대신하면 민감해진 학부모들의 이의 제기가 이어지고 교권 추락으로까지 연결될 것", "여학생보다 내신이 뒤처지는 남학생들만 더 불리해질 것"이라는 의견도 이어졌다. 교총 김동석 대변인은 "교육부 발표 후 실시한 첫 인식조사 결과, 현장 교원들은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며 "서둘러 밀어붙이지 말고 공정한 평가기준 마련과 입시제도 개선, 교원 근무환경 조성부터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세계 최고의 교육으로 주목받던 핀란드가 지난 10년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학습 부진학생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OECD는 지난 2월 2003~2012년 PISA결과를 분석해 ‘학습부진학생’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서는 수학과 읽기, 과학 영역의 성적을 6단계로 구분해 하위 1단계를 학습부진학생으로 정의해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분석했다. OECD는 학습 부진 학생이 대체로 줄어들어 15세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개선됐다는 종합평을 내놨다. 그러나 핀란드는 이와 정반대의 결과를 나타냈다. 읽기영역에서 학습부진 학생 비율이 5.6%나 증가했다. 평가를 시행한 32개국 중 부진학생 증가 비율이 가장 큰 것으로 드러났다. 부진 학생이 늘어난 국가들도 그 비율이 0.9~2.5% 수준 내에 있는 것을 볼 때, 그 폭이 크다는 분석이다. 러시아가 11.7%, 일본이 9.3%, 독일이 7.8%나 부진학생 비율이 낮아진 것과도 대조적이다. 수학 영역에서도 부진학생 비율이 5.5% 증가했다. 뉴질랜드(7.6%), 아이슬란드(6.5%), 프랑스(5.7%)의 뒤를 잇는 불명예를 안았다. 2006~2012년 평가의 과학영역에서도 부진학생이 3.6% 증가했다. 32개국 중 부진학생 비율이 늘어난 국가는 8개국뿐으로, 이중 핀란드가 증가 비율이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됐다. 2000년부터 줄곧 1~3위를 기록했던 핀란드가 지난 2012년 PISA 수학, 읽기, 과학 영역에서 각각 12위, 6위, 5위라는 결과를 내면서 큰 충격에 빠졌던 터에 이번 결과로 교육계가 또다시 긴장하고 있다.교육 환경과 체계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해졌다는 의견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학생도 교육적 혜택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목표에 대해 추진 상황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핀란드 교원노조(OAJ) 교육상담가인 야꼬 살로는 "지난 2006년부터 학습 부진의 경향성이 지속적으로 관찰돼 이번 결과가 크게 놀랍지만은 않다"며 "현재 초중학교 기본 교육과정에서 학습 조건이 매우 악화됐다"고 말했다. OECD는 "학생 수가 적은 나라는 모든 학생의 학습권을 돌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며 "유아교육을 통해 조기에 학습 불평등을 해소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학교에 대해 우선 지원하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교원을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매도하는 서울교육청의 촌지 근절대책이 지난해에 이어 되풀이 됐다. 교사가 몰래 뇌물을 받다 들키는 식의 희화화한 동영상을 배포하고, 부조리 행위 신고 시 최고 1억 원 등 자극적인 문구를 써가면서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매도해 교육계 비난을 샀는데 또 꺼내든 것은 지나친 독선이다. 교원이 법령을 위배하거나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했다면 마땅히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교총이 줄기차게 주장한 촌지 수수 교사 및 학부모에 대한 ‘쌍벌제’ 적용 또한 당연하다고 본다. 문제는 교육청이 교사들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이런 식으로 굳이 교사들 마음에 상처를 줘서 되겠는가. 특히 학교관리자가 불법찬조금 모금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도 엄중 처분하겠다는 것은 과도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이는 학교가 잘못할 경우 교육청과 교육감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대책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민망하다. ‘원스트라이크 아웃제’와 같은 징계도 명확한 법적 근거 마련은 물론, 여타 지역 교원과 다르게 적용되는 형평성조차 따지지 않은 것으로 불합리하다. 추후 문제가 발생되지 않도록 제반 여건을 충분히 마련할 것을 주문한다. ‘걸리면 죽는다’는 식의 처벌 위주 대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예방책이 더 중요한 것이다. 오히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자정운동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인식해야 한다. 교총은 그간 기자회견, 대의원회 결의문 등을 통해 학부모-교원 간 불신을 초래하는 ‘물질적 촌지’를 배격하고 교원-학부모간 신뢰회복을 위한 감사편지 나누기 등 ‘마음의 촌지문화 운동’을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현재 학교 현장 촌지문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서울교육청도 보도자료에서 지난해 촌지사건이 6건에 불과하다고 적시했다. 신학기만 되면 촌지문제를 꺼내 교사들을 미필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구태는 청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