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 재다보면 떠나기 어려운 게 여행이다. 준비과정이 복잡하면 가기 싫은 게 여행이다. 여행은 그냥 마음 맞는 사람들 몇이 훌쩍 다녀와야 더 재미있다. 그런 여행을 다녀왔다. 학교를 이동하려니 1년 동안 같은 학년을 맡아 정을 나눴던 직원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여직원들 몇 명이 겨울여행을 계획했다 다녀오지 못해 아쉬워하던 것이 생각나 여행을 시켜주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직원들 몇 명이 떠나는 여행을 제안했다. “직원들 몇 명이 여행한번 다녀올까?” 말이 떨어지자 대환영이라며 무척 좋아한다. “어디로 가지요?” “가보고 싶은 곳 아무 곳이나 말해.” 여행지를 결정하는 것도 모두 맡겼더니 멀리 남해의 보리암을 다녀오고 싶단다. “하루에 다녀올 수 있어요?” 먼 곳이다 보니 내가 전국의 여행지를 떠돌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다. “섬진강까지 다 보여줄 수 있어” 바쁜 일정이겠지만 이왕이면 더 멋진 구경거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마음이 들뜬 직원들과 아침 일찍 청주를 출발했다. 신이난 내 자가용도 경부와 호남고속도로를 쌩쌩 내달렸다. 전주 IC에서 남원을 지나 하동으로 차를 모는데 산수유마을 산동, 천은사, 화엄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게 인생살이다. 나이가 들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에 따라 똑같은 만남이나 헤어짐이 아니다. 따뜻하고 행복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만남도 있다. 섭섭하고 슬픈 헤어짐이 있는 반면에 속이 시원한 헤어짐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되짚어보면 만남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가수 노사연씨가 노래했듯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더 소중해야 하고 마음이 맞아야 한다.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면 마음 속에 신뢰가 자리잡아야 한다. 만남보다 어려운 게 헤어짐이다. 헤어짐보다 아픈 것은 그리움이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프고 시린 헤어짐이어야 한다. 떠난 후 빈자리에서 가치를 깨달으며 그리워해야 한다. 교직에 처음 발을 디딘 게 엊그제 같건만 벌써 28년을 넘어서고 있다. 나도 그 동안 참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로 기억되었을까? 손가락질 받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몇 년 전에 쓴 ‘좋은 사람’을 떠올렸다. 좋은 사람은 앉은자리에 온기를 남겨 다른 사람 따뜻하게 합니다 좋은 사람은 상대방 마
늘그막까지 고우시던 친구엄마 치매 7년째 혼잣말 길게 이어진다. 풍골만큼 인자하던 약국집아저씨 자식 친구 못 알아보고 천정만 바라본다. 우스갯소리 잘하던 부산아저씨 정신 놓느라 말끝마다 웃음만 짓는다. 명절이라고 고향 찾은 우리엄마 뜨럭 오르내리며 한숨 길게 내쉰다. 고향 더 그리운 나이 되었는데 반겨주던 사람들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어린시절 새록새록 떠오르는데 빛바랜 추억 자꾸 망각의 강을 건넌다. 작년 구정 때 친구 몇이 어울려 마을 어른들께 세배를 다녔다. 그날 가는 세월을 거역하지 못한 채 병으로 고생하시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어른들의 건강했던 젊은 시절 모습이 많이 남아 있기에 더 안타까웠다. ‘고향유감 2’라는 짧은 글로 아쉬움을 달랬다. 풍골만큼이나 인자하시던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올 구정 때는 병환이 더 심하다고 해 인사를 못 드린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공직에 오래 근무하셨고, 자식을 의사로 키운 덕망 있는 분이지만 5년여를 병환으로 고생하셨으니 이제 좋은 곳으로 편안하게 영면하셨으리라 믿는다. 장지가 마침 어린시절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고향 뒷산이라 오랜만에 고향냄새에 흠뻑 젖었다. 무더운 여름에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게 인생살이다. 임명권자의 발령장에 의해 근무지가 결정되는 공무원들에게는 그런 일이 더 자주 있다. 3월 1일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아이들에게 이임인사를 했다. 담임의 전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리 반 아이들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조회대 위까지 들려온다. 하교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인사를 마치자마자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았을 아이들이 쭈뼛쭈뼛 내 주위를 맴돈다. 자기들끼리 답을 주고받느라 갑자기 교실이 소란스럽다. “왜 가요?” “아마, 우리들이 싫어서겠지요?” “아냐. 집이 멀어서야.” 여자 아이들 몇이 눈물을 감추느라 연필을 꾹꾹 눌러 사랑이 가득담긴 편지를 쓰고 있는데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은 다시는 나를 안볼 것마냥 불만을 털어놓는다. “선생님, 빨리 가요.” “가는 마당이라고 선생님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이제 다른 학교 선생님이잖아요." “야, 너희들이나 빨리 가” 남자들은 가라는데도 내 주변을 맴돌며 괜히 농담을 건넨다. 남자들의 속마음을 담임인 나는 안다. 태연한 척 애써 웃음 짓는 담임의 마음도 아이들이 안다. 창 밖에서 한참을 서
어제(17일) 1925년에 개교해 졸업생이 1만2000여명이나 되는 강외초등학교의 78회 졸업식이 열렸다. 당사자인 졸업생과 5학년 어린이들, 축하해주려고 시간을 낸 학부모님과 내빈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요즘은 예전의 졸업식장과 풍경이 다르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시 언니께……’ 졸업식 노래를 부르는 시간에도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꽃다발을 든 부모님들이 더 긴장된 모습이다. 아이들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도 그럴 것이 100% 모두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90여명의 졸업생 중 70여명이 최하 10만원씩 장학금을 받았다. 상의 종류도 많고 상품도 푸짐하다. 어린이들에게 모두에게 주는 졸업선물도 있다. 졸업식이 열린 강당이 노후건물이라 졸업식의 축제 분위기와 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건축한지 50년이 넘어 벽이 다 드러난 낡은 강당을 보며 학부모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교육예산이 너무 많아 학교가 풍요롭다는 잘못된 생각을 아직도 바꾸지 않았을까?
매일 아내와 함께 출퇴근을 한다. 맞벌이 부부의 퇴근길이었다. 평소대로 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고 있을 때였다. “참, 쌀이 떨어졌는데…….” 미안했는지 아내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봤다. 막 지나온 곳에 대형유통센터가 있어 야속하기도 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요즘 아내의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다. 오던 길을 되짚어 차를 몰았다. 견물생심이라고 누구든지 가지런히 놓여있는 물건들을 보면 욕심나게 되어있다. 또 직접 가사를 책임져야 하는 여자들은 해주는 대로 먹기만 하는 남자들과 다르다. 반찬하나라도 이것저것 챙기는데서 보람을 느낀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지만 모두 가족을 위한 일이기에 탓할 일도 아니다. 평소 같으면 유통센터가 사람들로 넘쳐날 시간이건만 이상하게 한가했다. 알고 보니 그날이 마침 여러 대학교가 등록금 납부를 마감하는 날이었다. 사실 처음 알았지만 세금이나 등록금 등 목돈이 필요한 날 앞뒤로는 소비가 줄어든단다. 살기 어려운 세상살이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너도나도 웰빙을 부르짖다보니 어떤 물건이든 신선도가 생명이다. 팔리지 않으면 폐기처분해야 하는 것을 뻔히 아는데 손놓고 있을 장사꾼이 어디 있겠는가? 유통업
어른들이 요즘 아이들은 자기밖에 모른다고 걱정을 많이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이기도 하고, 저 출산에 핵가족이라 부모들이 과잉보호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회 탓만 하면서 학교마저 뒷짐 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학기말이라고 들떠있는 아이들에게 유종의 미를 가르치는 의미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지도하기로 했다. '정보와 생활' 시간을 이용해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카드메일로 감사함을 전하도록 했다. 카드메일을 고집한 것은 비록 남이 만든 것이지만 멋진 그림이나 애니메이션을 이용해 받는 이를 더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수업을 치른 그날 저녁, 이메일을 확인해보니 여러 명의 어린이들이 보낸 카드메일이 있었다. 아이들이 보낸 메일 속 문구는 인터넷에 떠도는 단어들로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날은 그 문구들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꼈다. 덩치만큼 마음씨 좋은 준영이와 나에게 제일 많이 혼났던 인한이는 "피-이 때린데 또 때리고 선생님 미워.…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그 크신 사랑의 매가 그립습니다"라고 보내왔다. 본인의 존재를 잊지 않도록 수시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석규는 "언제부턴가 내안엔 따뜻한 작
아이들을 하교시키려는데 한 아이가 울상을 지으며 볼멘소리를 한다. “선생님, 제 엠피쓰리 없어졌어요.” “뭐, 엠피쓰리가 어떻게 없어져?” “얘가 아침에 책상 위에 뒀다는데 없어요.” “분명히 우리 반에 범인이 있어요.” 범인까지 단정 짓는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침에 운동장으로 공놀이 하러 나가면서 친구에게 맡겼고, 맡은 아이는 자기 책상 위에 놓아둔 엠피쓰리가 없어진 것을 이제야 발견했다는 것이다. 평소 수업에 방해가 된다며 엠피쓰리를 학교에 가져오지 말라고 주의를 줬었다. 그런데 몇 명의 아이들이 어깃장을 부리더니 기어이 학기말에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더 황당한 것은 분실한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여러 번 애기했었는데도 잃어버린 아이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아이들의 소지품 검사를 요구했다. 못들은 척 아이들에게 자기 주변에서 엠피쓰리를 찾아보게 했지만 마음이 집에 가있는 아이들은 이곳저곳에서 소란만 피워댔다. 엠피쓰리에 욕심을 낸 아이가 있었다면 아무도 찾지 못할 곳에 깊숙이 숨길 만큼 시간상 공백이 컸다. 또 엠피쓰리를 찾느라 하교가 늦어지면 학부모나 학원으로부터 원성을 살 우려도 있었다. 혹 엠피쓰리가 가방 등에서 발견되면 내일 아침
각종 기념일 마다 학교는 홍역 교실에 들어서자 오늘이 밸런타인데이라며 몇 명의 여자 아이들이 몰려나온다. 개구쟁이 남자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질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서로 달라'고 아우성이다. 초콜릿을 들고 나온 여자 아이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이 거 예쁘지요?" "제 것 다른 사람 주지 말아요." 어떤 아이는 아주 한 술 더 떠 "사모님도 드리면 안 돼요"라며 "꼭 선생님이 먹어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수고 수고, 맛있게 드시는 거 아시죠! 1년 동안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맛있게 드세요. 1년 동안 수고 많이 하셨어요.' '선생님 초콜릿 맛나게 드세요. 1년 동안 고생하셨어요. 2006년 행복하세요.' 초콜릿 상자에 붙여 놓은 쪽지에는 제법 어른스러운 글도 있었다. 기념일을 잘 이용하면 이렇게 아이들이나 교사가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기념일들은 대부분 상업적으로 만들어져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과소비나 무질서를 부추긴다. 오죽하면 기념일마다 학교가 몸살을 앓겠는가? 생활지도가 어렵다보니 넘쳐나는 쓰레기 처리로 고심을 한다. 기념일, 학교에서 선물을 주고받지 못하게 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무슨 날이라고 정해져 있
5학년 아이들이 도서실에서 가위손을 시청했다. 마음이 들떠있는 학기말이고, 여러 반이 모이다보니 처음에는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내용이 흥미롭게 전개되자 스크린을 주시하느라 조용해졌다. 말썽꾸러기 몇 명은 장난을 칠만도 한데 그 아이들마저 점잖을 떨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다 뜬금없이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1969년 여름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강당이 있는 시내의 큰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발사장면을 보기 위해 전교생이 강당으로 모였다. 그날을 생각할 때마다 저절로 웃음이 난다. 그 더운 날 아이들이 가득 들어찬 강당에 화면이 잘 보이게 하는 방편으로 안막까지 쳐 바람구멍을 다 막아놨으니 오죽 더웠겠는가? 더구나 연단위에는 화면이 작은 TV가 달랑 한대 놓여 있어 아무리 고개를 길게 빼본들 보일 리가 없었다. 아마 앞에 앉은 몇 명의 아이들에게만 우주선이 발사되는 장면이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그때 무엇을 봤는지 내용마저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들과 땀을 비 오듯 흘렸던, 즉 아폴로 11호가 발사되던 날이 7월 17일이라는 것과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첫발을 디딘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도 후에 알았다. 그렇게 무모한
억새 태우기 축제가 열리는 화왕산으로의 여행이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같은 날 노래방기계까지 갖춰놓고 대보름 맞이 척사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발길을 향했다. 친구들과 마을에 도착하니 ‘내곡동 주민을 위한 화합의 한마당 큰잔치 척사대회 및 주민노래자랑’이라는 글자가 크게 써있는 플래카드가 맞이한다. 내 고향 소래울은 80여 호가 오순도순 살고 있는 도시근교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그런데 서로 사는 것이 바쁘다보니 구정 때에도 얼굴보기가 어려웠다. 애향심마저 예전과 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몇 명이 서둘러 대보름날 마을주민과 출향한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경비는 또래들끼리 만든 몇 개의 모임에서 십시일반 찬조를 했다. 구정 때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우리 모임도 이번 행사부터 동참하는데 만장일치로 찬성을 했었다. 척사대회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승부에 매달릴 필요도 없이 먹고 마시면서 하루를 즐기는 자리였다. 나같이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고향을 지키고 있는 어른이나 선배들에게 인사도 하고 후배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는 날이었다. 어쩌면 고향사람들과 옛날이야기를 하며 가슴 속 어디엔가 꼭꼭 숨겨두고 있던 보물을 찾아내는
아내가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꿈속을 헤매고 있었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불을 켜고 시간을 보니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다. 모처럼만에 자유를 누려도 되는 일요일인데 왜 불만이 없겠는가? 혼잣말로 불평을 하며 영문을 물었다. 머리를 만져보란다. 단잠을 깨워놓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머리에서 손이 뜨거울 정도로 열이 난다. 잠이 확 달아나 벌떡 일어났다. 잔병치레는 잘하지만 우연만하면 혼자 견뎌내는 사람이라 더 걱정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어?" "어제 저녁부터." "그럼 진작 말하지?" "술 먹고 들어와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 무심했던 것을 후회하며 그제야 증상을 물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꽉 막힌 것 같단다. 아내는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평소와 다르게 먹으면 소화시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보름음식이라고 식탁에 진수성찬이 차려진 것이 오히려 화를 만든 것이다. 급하게 실타래를 찾았다. 자주 체하는 아내와 살다보니 손가락 따는데 도사가 되었다. 등을 두드린 뒤 가슴을 몇 번 문지르고 팔위에서부터 손가락 쪽으로 몇 번 쓸어내린 후 실로 엄지손가락을 묶어 바늘로 톡 따
벌써 20년도 더 지난 얘기다. 그때 나는 시골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인정이 넘치던 시절이라 학부형님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대화가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정치인들이 안주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반 학부형 한분이 그곳의 지역구 국회의원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불평과 불만을 심하게 늘어놓으며 번번이 대화를 단절시켰다. 그곳의 국회의원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장관까지 지낸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덕망이 있는 분으로 알려져 몇 번째 의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분이 도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저렇게 욕을 얻어먹는지가 궁금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서운해 하는 이유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무나 어이가 없는 오해였다. 그 당시 우리 반 학부형의 사촌동생이 사법고시를 패스해 집안에서 잔치까지 열었다. 지역구의 작은 행사까지 잘 챙기던 국회의원은 직접 찾아가 축하를 해줬다. 축하과정에서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고 학부형의 집안 중 한분이 그 말을 들었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고생 끝에 낙이 왔다는 것을 별 뜻 없이 표현한 것으로 그냥 흘려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 반 학부형의 집안은
아이들이 하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열쇠꾸러미를 찾아 학교와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파의 영향으로 바람은 찼지만 이틀 동안 내린 눈이 대지를 감싸고 있어 포근하게 느껴졌다. 교문 앞에는 하교하는 아이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몇몇 아이는 맡겨둔 것이라도 있는 양 가게를 향해 급하게 뛰어간다. 학교 주변에 사는 아이들은 몸을 움츠리고 집으로 종종걸음을 한다. 겨울 추위 때문인지 교문에서 조금 벗어난 길에서는 여럿이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기도 어렵다. 고개를 돌려 넓은 논과 밭, 그리고 기찻길이 있어 언제나 평화롭게 보이는 학교 건너편 마을을 바라봤다. 흰눈 사이로 길게 뻗어있는 도로가 무척 아름다웠다. 시간에 쫓길 필요 없이 이곳저곳 둘러보며 천천히 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낭만적인 길이다. 그런데 한참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차들은 오락가락하는데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우리 학교 학생들 여러 명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하교시간이면 교문 앞이 차로 붐빈다. 아이들은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과 같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할지,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니 교문 앞의 차량들은 교통사고의 위험요인이 될
지금쯤 각급 학교들은 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개학을 앞뒀거나 이미 개학을 했다. 누구에게나 휴식은 생활의 활력소가 되나보다. 한파가 몰려와 모든 사물들이 꽁꽁 얼어붙었지만 학교에 나온 아이들의 모습에서는 생기가 넘친다. 그런데 첫날 아이들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개학날을 무척 기다렸다는 것을 알았다. 방학하던 날 그렇게 신이 났던 아이들이 왜 그렇게 개학을 기다렸을까? 방학이 너무 길어 노는데 싫증이 났을까? 주변에 학교운동장만큼 자유스럽게 놀만한 장소가 없었을까? 의문이 풀린 것은 잠시 뒤였다. 그동안의 방학생활을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의 얘기를 들으니 왜 그렇게 학교에 오고 싶었는지 금방 이해가 되었다. 사실 긴 방학이었으니 그래도 뭔가 특별한 일이 한 두개쯤은 있으려니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긴 방학동안 학원에 갔다 와서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시청한 게 전부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내근교이지만 농촌의 면소재지에 사는 우리 반 아이들 중 학원에서 서너 과목의 과외를 받은 아이들이 많았다. 하물며 종합반에 다닌 아이들은 5과목이나 과외를 받았다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오죽 학교에 가고 싶었겠나? 아이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계절적으로 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