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려수도의 기항지이며, 어항과 임해공업의 수출항으로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는 어항. 중부고속도로 대전 통영 구간 개통으로 중부 이북지방에서도 가까워져 찾아가기 쉽고 적은 돈으로 회를 먹을 수 있는 바닷가. 그곳이 바로 한려해상국립공원과 죽방림, 낚시터와 삼천포화력발전소, 상족암과 사량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삼천포항이다. 비 오는 날의 항구는 왠지 을씨년스럽다. 오가는 사람도 적다. 그래서 더 여유롭고 회 값도 싸다. 삼천포항의 비 내리는 날 풍경을 사진으로 감상해보자.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옛길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 영동과 영서의 관문 역할을 해온 대관령의 옛길인 대관령 고갯길을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이 반갑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한숨을 지켜봤던 대관령 옛길로 접어들어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다보면 대관령 박물관을 만난다. 박물관은 강릉 방향에서 대관령 고갯길의 초입에 위치한다. 1993년 개관한 대관령 박물관은 음대 기악과를 졸업한 뒤 서양화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30년간 토기와 고서화 등의 골동품을 수집하며 우리의 민속품과 문화재를 사랑한 홍지숙 관장 개인의 정성으로 빚어낸 문화재 박물관이다. 대관령 박물관은 강원도 건축상을 받았을 만큼 건물의 외관이 대관령의 아름다운 자연풍광과 잘 어울린다. 매표소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면 야외에 문관석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오른편에 예쁜 물레방아와 너와집이 있다. 전시실과 수장고 등의 부대시설에 석기시대부터 조선조까지의 석불, 토기, 도자기, 공예품, 서화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우리의 문화유산을 골고루 알아볼 수 있는 산교육장이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현관에 왕실의 왕자나 공주의 태를 보관하던 태
신사임당은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로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아들 이이를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로 키웠다. 이이는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생원시와 식년문과에 급제하는 등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이라 일컫는다. 황해도 관찰사, 대사헌, 이조ㆍ형조ㆍ병조판서를 역임하며 기호학파를 만들었고 붕당 조정은 물론 10만군대의 양병을 주장할 만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오죽헌(烏竹軒)은 입구에 연못이 있는 초충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자경문을 들어서면 오죽헌과 문성사가 맞이한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오죽헌(보물 제165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양식으로 문신이었던 최치운이 지었다. 이이가 출생하던 날 신사임당이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꿔 아명을 현룡이라 하고 산실을 몽룡실이라 했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은 조선 전기 민가의 별당에 해당하는 건축물로 4면을 굵은 댓돌로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여 네모기둥을 세웠다. 우리나라 주
강원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에 있는 하조대는 빽빽한 소나무 숲과 바다풍경, 우뚝 솟은 기암절벽과 천년송이 어우러져 옛날부터 경승지로 알려졌다. 하조대는 승용차 몇 대 밖에 댈 수 없는 작은 주차장에서 가깝다. 전통차, 막걸리 등을 파는 카페 '등대'가 오래전부터 절벽 아래 바닷가를 지키고 있다. 카페는 돌 지붕에 쌓인 낙엽들 때문에 더 고풍스럽고 운치가 있다. 카페 바로 앞에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지고 그 사이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쉬지 않고 만들어낸다. 오른쪽으로 연결된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절벽 위에 하조대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육각정이 있다. 고려 말 이곳에 은거하며 새로운 왕조를 구상했던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말년을 보냈다는 정자다.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 내려오는데, 하조대라는 이름도 하륜과 조준의 성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이름이 유래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부근에 하씨 성을 가진 젊은 사내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이 잘생겨 처자들을 들뜨게 했다. 마침 이웃 마을에 살던 조씨 성을 가진 처자와 마음을 나눈 사이였는데 처자의 하나밖에 없는 쌍둥이 여동생도 이 사내를 사랑했다. 두
차창 너머로 파도가 넘실대는 푸른 바다…. 주변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만들어 놓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이름난 관광지…. 곳곳에 숨어 있다 여행객들의 발목을 붙드는 이름 없는 암자…. 동해안은 수평선과 맞닿은 하늘, 하늘 가득 그려놓은 구름까지 아름답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7번 국도로의 여행길은 생각만 해도 즐겁고 신이 난다. 초행길이라면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바다만 바라봐도 행복한데 설악산과 낙산사까지 구경한다. 여행지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둘러볼 수 있는 여행지가 휴휴암이다. 휴휴암은 7번 국도로의 여행길에 잠깐이면 둘러볼 수 있는 여행지이지만 볼거리가 풍성하다. 휴휴암(休休庵)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온갖 번민을 내려놓고 쉬고 또 쉬면서 휴식을 취하는 사찰이다. 동해고속도로의 끝 지점인 현남 IC로 나와 7번 국도를 타고 설악산 쪽으로 가다 보면 광진 휴게소 이정표를 만나는데, 이정표 앞에서 오른쪽으로 언덕길을 넘어가면 휴휴암이 숨어 있다. 지난달 23일 가족과 함께 찾은 휴휴암은 1997년 해안가에 세워져 최근에야 알려지기 시작한 작은 사찰이다. 풍광이 아름답고 주변에 특이한 바위들이 많아 짧은 창건 연대에 비해
며칠 전, 일명 ‘기절놀이’로 인해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놀이가 학생들 사이에 번지고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그나마 필자가 담임하고 있는 농촌학교의 2학년 아이들은 아직 기절놀이를 해보지 않은단계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일본에서 시작된 ‘기절놀이’는 일시적으로 호흡이 멎도록 일부러 상대방이나 자신의 목을 조르고 가슴을 압박한다. 이때 잘못하면 저산소증으로 사망하거나 쓰러지면서 뇌진탕 등 부상을 당하기도 쉽다. 뇌세포를 죽여 머리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뇌장애도 일으킨다. 놀이치고는 위험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기절놀이에 중독성이 있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널리 퍼지기 전에 차단해야 한다. 이번에 사망한 어린이도 평소 기절놀이를 자주해 부모님에게 여러 번 꾸중을 들었다. 어처구니없게 이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은 기절을 경험하면서 희열을 느낀다니 가정이나 학교에서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일본의 청소년이나 어린이 사망자중 5%가 이 기절놀이로 사망하고, 지난해 7월 전북 익산에서 기절놀이를 하던 중학생이 쓰러지면서 두개골에 금이 가는 부상을 입는 등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월정사의 말사인 등명락가사(燈明洛伽寺)는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괘방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사찰로는 드물게 국도 변의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어 풍광 또한 뛰어나다. 등명(燈明)은 신령이나 부처를 위해 켜놓은 등불을 뜻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강릉의 등화와 같은 존재다. 등명이라는 명칭도 이곳에서 공부하던 서생들이 심야에 괘방산에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과거에 급제했다는 연유에서 생겨났다. 등명락가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북쪽의 고구려와 동쪽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부처님의 사리를 석탑 3기에 모시고 수다사로 창건하였다. 그중 하나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등명사지오층석탑이다. 신라 말 전쟁으로 불에 탄 것을 고려 초기에 중창하며 등명사로 이름을 바꿨고 조선 초기에 폐사(廢寺) 될 때까지 번창하였다.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릉도호부 동쪽 30리에 등명사가 위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등명사의 쌀 씻은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 용왕이 노하셨기 때문에 임금의 눈에 안질이 생겼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임금의 특사가 배편으로 와보니 사실이라 절을 폐사시켰다는 이야기에서 등명사의 규모가 컸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땅덩어리가 결코 작지 않다는 것, 볼거리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런데도 여름 방학을 맞이하고 여행 성수기가 되면 해외여행객들로 공항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해외여행에 앞서 가까이에 있는 우리의 문화재나 관광지를 찾아보는 인식전환도 필요하다. 새로운 것, 새롭게 시작한다는데 의미를 부여하면 매일 그 자리에서 뜨는 해일지언정 남다르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정동진보다 해돋이로 유명한 곳이 또 어디 있을까? 해돋이의 중심에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정동진역이 있다. 매일 청량리역에서 해돋이 열차가 운행되고 있는 이곳 정동진역은 1994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람들은 탤런트 고현정이 정동진역에서 형사들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그 당시 드라마의 배경이 되었던 소나무는 '모래시계(고현정) 소나무'로 불릴 만큼 유명세를 타면서 연인들이 추억 남기기를 하는 기념촬영 장소가 되었다. 정동진역은 작고 아담한 역사 때문에 더 정이 가고 바다와 어우러진 주변의 풍광 때문에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역 구내에서 제일 먼저 맞이하는 게 매일
이틀 동안의 연휴, 마음이 들뜬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거리마다 차량들이 넘쳐났다. 기상청에서는 전국적으로 강풍을 동반한 비가 많이 내릴 것이라고 예고하며 나들이 나온 사람들을 훼방 놨다. 그래서였을까? 푸른 바다가 넘실대며 유혹하고 있는데도 동해안으로 달려온 사람들이 적었다. 6월 23일 정동진 바닷가도 한적했다. 하늘의 구름이 아름다워 백사장에 앉아 황국산 시인의 ‘정동진에서’를 음미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정동진에 왔다 정동진에서, 바다 앞에 서서 바다를 보았다 꿈틀거리는 바다, 거대한 몸짓으로 천하를 호령하는 저 바다, 마치 그녀의 가슴처럼 솟아오른 젖봉오리처럼 거칠게 숨쉬는 저 바다, 나는 바다 앞에서 그녀를 본다 내 모든 것 다 감싸안고 영원을 노래하던 그녀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바람이 몹시 불고 간간히 눈발이 날리는 날 나는 정동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깊은 숨소리와 함께
중소도시에 살고 있는데다 주로 농촌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서일까? 학원에 목매지 않고 학창시절을 보낸 자식 둘이 군대를 제대하고 지방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있어서일까? 학원수강에 지친 아이들이나 교육비문제로 고심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그렇다고 자식을 키운 부모로서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무리를 해서라도 강남으로 이사 가겠다는 학부모의 마음까지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마음 다 같기에 그게 바로 자식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자식에 관한 일이라면 실낱같은 믿음에서도 희망과 행복을 찾아내는 게 우리나라 부모다. 부모가 주는 사랑은 모두 보약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강남이 아니어도 좋은 학군, 좋은 학원을 끼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절대 집값이 떨어지지 않는 신화를 만들었다. 모든 욕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데서 시작된다. 특히 이웃이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식을 가지고 경쟁한다. 경쟁에 불이 붙으면 서로 피곤하고, 자식에 대한 사랑도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렇게 복잡한 교육문제를 다룬 드라마 ‘강남엄마 따라잡기’가 25일 SBS에서 첫 방송되었다. 가장 큰 관심사
여름철이라고 날씨가 제법 무덥다. 동물들도 더위를 이길 재간이 없나보다. 동물원에 들른 시간이 점심때라 낮잠을 즐기는 동물들이 많다. 얼룩말 한 마리는 업어 가도 모른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침까지 흘리며 깊은 잠에 빠졌다. 어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젖을 빨아먹는 새끼 조랑말이 귀엽다. 눈을 반쯤 감고 졸음을 억지로 참는 산양이 있는가하면 옆에 잠든 양들은 습성대로 잠을 자면서 서로 품속을 파고들어 보는 사람들까지 덥게 한다. 과나코는 시위라도 하려는 듯 잠시도 쉬지 않고 길길이 날뛴다. 원숭이의 엉덩이를 바라보는데 어린시절 수없이 불렀던 '연상되는 말 이어가기'가 생각난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에 태극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목욕을 즐기는 불곰 옆에서 반달곰들이 사랑싸움을 뜨겁게 한다. 혀를 길게 뺀 표범은 이렇게 편한 자세를 봤느냐는 듯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관람객들을 내려다본다. 아무리 무더워도 공작은 날개를 활짝 펴고 관람객들을 환영한다. 동물원에서 동물들이 생
충북 청주의 젖줄인 무심천의 발원지나 옛 문화가 남아있는 산길과 논밭 길을 직접 걸어다니며 청주사랑을 몸으로 실천하는 모임이 청주삼백리다. 청주삼백리 회원들이 청주, 청원의 중심산줄기인 한남금북정맥을 8구간으로 나눠 답사를 시작한 게 3월 4일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월 17일은 이번 답사의 피날레인 마지막 구간을 답사하는 날이다. 8구간 답사를 밤티재에서 시작하기 위해 지난번 답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만났던 새왕이마을로 갔다. 2주 전에는 보이지 않던 '황새서식지 조성을 위한 실험방사' 환영 플래카드가 마을입구에서 회원들을 반긴다.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일손이 달리는 게 농촌의 현실이다. 논두렁에서 일을 하고 있거나 연모를 챙겨 일터로 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노인이다. 주름살 더 많은 노인들 몇이 아침부터 정자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는 새왕이마을의 아침풍경이 한가롭다. 강남에서 돌아온 제비들이 계량기와 연결된 전깃줄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도 평화롭다. 배추와 인삼을 많이 경작하는 마을을 막 벗어나면 오염물이 없어 다슬기들이 살을 찌우고 있는 냇가를 만난다. 이곳에 오래전에 놓였지만 규모가 작지 않은 다리가 있다. 답사 전에 갖는 만남의 시간을 다
지난 10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구곡을 답사하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이날 회원들은 화양구곡에 있는 화양서원과 만동묘, 청천의 매봉산에 있는 우암의 묘, 묘의 지형과 연관이 있는 청천장을 돌아보며 우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80이 넘는 일생을 살며 크든 작든, 좋든 나쁘든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온다는 분이 우암 송시열이다. 또한 자신의 주장이 강했던 인물로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자 정치가이고 문인이었다. 우암은 1607년(선조 40년) 11월 12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리의 외가에서 출생했다. 올해는 우암 탄신 400주년을 맞이하는 해라 다른 해보다 여러 가지로 뜻이 깊다. 푸른 물은 성낸 듯 말이 없구나/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을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싫어하노라 인조11년(1633년) 27살이 되던 해 시험관인 대제학 최명길로부터 '이제 중국의 도학은 우리 동방으로 왔다'는 칭찬을 들으며 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한 후 여러 번 벼슬길에 나섰지만 항상 산천에 뜻이 있어 74세 되던 해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화양구곡에 은
가까이에 있는 송면이 아내의 고향이라 내가 남다르게 느끼는 여행지가 화양구곡이다. 지난 10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화양구곡으로 충북사랑 답사를 다녀왔다. 남들보다 추억거리가 많아서일까? 자주 들렸던 곳을 가는데도 다른 날과 달리 마음이 들떴다. 처가가 그곳을 떠난 게 벌써 20년이 넘었지만 화양구곡에 가면 옛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화양구곡으로 가면서 아이들이 어린시절 처가에 들릴 때마다 캠핑 오는 대학생들로 찜통이 된 직행버스 안에서 고생하던 일을 떠올렸다. 여름철이면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져 피서지로 많이 알려진 화양구곡은 주변에 이름난 산과 계곡이 많다. 화양구곡은 화양동에 은거하던 우암 송시열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9곡에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화양구곡 입구에 있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제1곡 경천벽이다. 깎아지른 층암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치듯 높이 솟아 있어 경천벽이라 한다. 곧게 뻗은 기암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의 신비를 느끼는데 여름철에는 무성한 나뭇잎이 층암절벽을 가린다. 주차장 전에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1곡이 있다는 것을
삼척항에서 죽서루로 가다보면 왼쪽 바닷가 방향으로 야트막한 육향산을 만난다. 이 산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8호인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가 있다. 남인의 영수로 삼척 부사를 지낸 미수 허목이 비문을 지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는 현종 2년(1661)에 건립되었다. 척주동해비는 '퇴조비(退潮碑)'라 불리듯이 조류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정라진의 만리도에 건립되었다가 비가 풍랑으로 파손되자 1710년에 모사하여 현재의 위치인 육향산 산정에 세웠다. 삼척의 옛 지명인 척주는 폭풍과 해일피해가 잦아 고기잡이배가 부서지고 파도 때문에 고기잡이를 나갈 수 없었다. 당시 해일이 일면 30리 떨어진 관아 앞까지 물이 들어와 농사도 지을 수 없었고 어민들이 굶어 죽는 상황까지 직면하였다. 이때 신임 부사로 부임한 허목이 비석에 동해송(東海頌)이라는 문장을 새겨 바닷가에 세우자 물이 들어오지 않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농민들이 논밭에 농사를 짓고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게 되면서 척주동해비는 영험한 비석으로 알려졌다.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역시 허목이 임금의 은총과 수령인 자신의 치적을 글로 짓고 쓴 것이다. 목판에 새긴 48자를 읍사(邑司)에 보관해 오다가 240여년 후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