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말 교육부의 체벌 금지 지시가 있었는데 그때 교육현장의 반응은 다음과 같았다. 악동이 있는데도 체벌을 하지 않고 훌륭한 학생지도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교사는 위선자가 아니면, 도를 닦은 교사이거나 신통력을 가진 교사라고 평가했다. 또 ‘사랑의 매’까지 들지 못하게 하는 것도 교권(?) 침해라고 했다. 과거의 사례를 재론하는 이유는 2010년에 서울 ・ 경기 ・ 강원 교육청의 체벌금지 시행 후에 나타난 교사의 반응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무기력한 교사가 되라는 것 같다고 말한다. 문제 학생 지도를 위해서 교육자로서 정열을 기울이지 말아라, 무사안일한 교사가 되라는 것이다. 체벌금지 조치는 난장판인 교육 현장을 모르는 탁상공론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서울 명문 여대의 교육학 교수는 사대에 진학해서 교육학을 배워보니 매가 아닌 방법으로도 학생지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는데 초 ・ 중 ・ 고교 교사들만 모르는 것 같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학생 체벌을 하는 교사의 태도를 보면 이성을 잃고, 체벌을 시작하면서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진다고 한다. 학생에 따라 차이를 두며
교육자인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퀴리 부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공부를 잘했다. 그는 고상한 품성과 조국 폴란드에 대한 각별한 애국심을 자기고 있었고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던 퀴리 부인은 과학에 헌신하는 마음을 자녀 교육에 까지 고스란히 반영 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칙을 가지고 가정교육에서도 모범을 보였다. 그 당시에는 여성 과학자가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로서 과학자로서 현모양처의 표상이 되는 삶을 살았다. 퀴리부인의 고결한 품성은 스승에 대한 태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11년 퀴리부인이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을 때였다. 그녀는 바르샤바 중학교 시절에 자신을 가르쳤던 프랑스어 선생님을 기억했다. 파리 출신이었던 선생님은 제자가 노벨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념식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여비가 없어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퀴리부인은 상금의 일부를 선생님에게 보내 여비로 쓸 수 있도록 했으며 선생님께서 파리에 있는 동안 자신의 집에서 머물도록 배려했다. 1913년 퀴리 부인은 조국 폴란드로 돌아와 바르샤바 방사학 실험실 준공식에 참석했다. 폴란드 여성학계에서는 그녀를 환영하기 위해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