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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라이프&여행]동대문과 동대문운동장, 기억과 기록 사이

 

11월은 가끔 그 정의를 두고 논란이 일어난다. 누군가는 늦은 가을이라 하고, 누군가는 이른 겨울이라고도 한다. 이런 주장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11월이 가을과 겨울이 겹치는 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근현대의 기억을 담은 역사 유적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누군가에게는 직접 경험하고 보던 곳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역사책처럼 기록에 의지해야 하는 장소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옛 서울운동장, 곧 동대문운동장이다.
 

서울은 근현대에 이르러 많은 변화를 겪었다.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장소를 보며 누군가는 경기장과 관객, 선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겠지만 젊은 세대는 새롭게 들어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보며 역사문화공원 한쪽에 있는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을 통해 내력을 살펴본다. 조그마한 기념관 하나가 ‘기억’과 ‘역사’를 이어주는 것이다. 이글 역시 기억과 역사의 중간쯤에 있지만 아무래도 기록에 의지해야 할 것 같다. 다만, 동대문운동장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 ‘동대문’이 바로 이 지역 역사를 상징하는 존재이니 그 내력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동대문의 본래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조선시대 한양은 18.6km에 이르는 도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성안 지역과, 성 밖 10리까지다. 이에 따르면 도성이 한양의 경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계의 기준이 되며 더불어 한양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경계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양 밖 여러 지역과 연결되는 도로망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도성의 여러 곳에 있는 문은 곧 한양과 다른 지역을 잇는 도로가 지나는 곳이니 도성과 함께 문이 갖는 의미도 꼭 살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삼남지방에서 오는 이들은 숭례문을, 함경도나 강원도에서 오는 이들은 혜화문을 지났다. 그런데 한양도성의 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격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한양도성의 통로이자 상징…흥인지문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양도성의 성문은 대체로 4대문과 4소문이 있었다고 본다. 이 가운데 4대문의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다. 북쪽의 숙정문은 문루도 없는 문이었으며 서쪽의 돈의문은 그 규모가 4소문이라고 하는 혜화문이나 광희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대문과 남대문, 곧 흥인지문과 숭례문만 문루가 2층이었다는 점에서 ‘대문’으로 부르는 데에 이견이 없는 편이다. 한양의 주요 도로 역시 두 문을 연결한 길이었다. 흥인지문에서 시작된 종로는 종각까지 이어지며 여기에서 방향을 틀어 숭례문으로 연결됐다. 
 

흥인지문, 곧 동대문이 처음 생겨난 것은 1396년이니 한양도성을 처음 쌓았던 시기와 같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했으며 마지막 보수는 1869년에 한 것으로 보인다.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다른 문과 다른 점이 몇 가지 보인다. 다른 문이 세 글자로 돼 있는 것과 달리 흥인지문은 갈지(之)자가 하나 더 들어가면서 4글자 이름의 문이다.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仁義禮智) 가운데 동쪽을 가리키는 인이 들어간 이름에 이 지역 지형의 기운이 약하다고 해서 한 글자를 더 넣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점은 성 밖을 둘러싸고 있는 옹성이 있는 점이다. 옹성은 나중에 수원 화성의 성문을 쌓을 때 참고가 되기도 했다. 흥인지문에 옹성을 쌓은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해석되고 있다. 하나는 풍수 기운이 약해서 옹성을 세웠다는 설, 다른 하나는 흥인지문 일대 지형이 낮아 성문의 방어를 보완하기 위한 실질적인 이유로 쌓았다는 설이다. 실제로 이 일대가 한양의 지형 가운데 낮은 부분에 속하며 도성 안에 흐르던 물은 청계천을 비롯해 이쪽으로 빠져나간다. 예전에 있던 청계천의 오간수문이나 최근 그 모습을 복원한 이간수문에서 그런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통로로서, 혹은 숭례문과 더불어 도성의 상징이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그 위상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899년에 일어났다. 바로 돈의문-청량리 구간에 놓은 전차가 흥인지문을 통과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때는 성벽이 아닌 성문으로 지나가게 했다. 그러나 1911년,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일제는 도로를 넓힌다는 이유로 흥인지문 일대의 성벽을 헐어버렸다. 더 나아가 1926년에는 성문 좌우의 성벽 대부분을 헐어냈다. 흥인지문은 성벽을 잃고 로터리의 중심부 역할만 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습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어졌다. 다만, 최근 인도와 흥인지문을 연결한 덕분에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됐으니 옛 도성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상상할 수 있게 됐다.
 

 

동대문 주변에는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비롯해 청계천 좌우로 들어선 대형시장건물은 동대문의 규모를 능가한다. 그런데 15년 전만 해도 이 일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다름 아닌 동대문운동장이었다.
 

동대문운동장 역사의 시작은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근대의 일이며 1925년에 생겨났으니 당시 이름은 경성운동장이었다. 개장은 1925년 10월 15일이지만, 정식 준공은 1926년 3월 31일이다. 경성운동장은 1만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500m 트랙을 갖춘 축구장, 7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 3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정구장으로 이뤄졌다. 1934년에는 600평 규모의 수영장도 들어섰으니 명실상부한 종합경기장이었다고 할만하다. 

 

한국 스포츠의 중심 역할 톡톡히 해

 

원래 이 자리는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 군사들이 훈련하던 훈련장인 ‘하도감’이 있었다. 도성 일대에서 비교적 넓고 평평한 곳이었으니 이를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뒤 공터로 남아있던 곳에 일제가 대규모 운동장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옛 훈련장은 물론 한양도성의 상당 부분이 파괴됐다. 일제가 거창한 운동장을 건설했던 것은 스포츠의 한반도 전파가 일정한 수준에 있었던 것도 있지만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드러내려는 의도도 포함됐다고 할 수 있다. 대규모 운동장을 건설할 수 있는 일제의 통치 능력을 보여주고 한국인의 정치에 대한 시선을 스포츠로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일제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스포츠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고나 할까. 예를 들어 이미 대중스포츠로 자리를 잡은 축구 경기를 살펴보자. 당시 최고로 인기 있던 라이벌전인 경평전 제2회 대회가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어떤 면에서는 서울과 평양의 라이벌전이었지만 관중들의 집단 응원 속에서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일체감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축구와 더불어 가장 인기 있던 야구 역시 경성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다. 최초의 홈런 타자는 1928년 6월 9일 장외홈런을 친 이영민 선수였다. 당시 한국인 학생이 중심인 연희전문과 일본인 학생이 중심인 경성의전의 야구 시합에서 홈런을 친 것이니 이는 경성운동장이 생긴 이후 첫 홈런이었다. 아마 이 경기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립구도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손기정 선수가 처음 이름을 알린 것도 경성운동장의 육상 경기였다. 1931년 5000m 경기에서 2위를 시작으로 1936년까지 펼쳐진 육상 장거리 경기에 13번 출전해 10번 우승하며 마라톤으로 전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손기정 선수는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하며 잠들어있던 민족의식을 깨우는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됐다. 처음에는 즐기는 정도였지만 응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일제는 1940년이 되자 구기종목을 금지하는 등의 조치를 내렸다.
 

광복 이후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시기 서울운동장은 한국 스포츠의 중심이었다. 1945년 10월, 광복을 기념하는 경기가 열리며 태극기가 게양되기도 했다. 각종 정치, 사회, 문화와 관련된 주요 행사도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식이 열린 곳도 서울운동장이다. 각종 정치집회, 국군의 날, 어린이날 행사는 물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도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그렇지만 서울운동장의 진짜 모습은 스포츠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조명탑이 설치돼 야간경기가 가능해지자 말 그대로 한국스포츠의 요람이 됐다. 1970년대 최고의 인기를 이끌었던 고교야구대회의 중심도 여기였으니 각 언론사가 주최한 청룡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등 전국 고교야구 대회의 열풍은 지금 프로야구 못지않았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야구 명문 고등학교를 자랑하며 자신의 지역에서 배출한 선수가 누구인지를 놓고 벌인 열띤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을지언정 삶의 활력이 되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최동원 선수는 1976년 청룡기 결승전에서 완봉승을 올리며 명성을 올리기 시작했으니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화두였을 것이다. 
 

축구의 차범근 선수 역시 1970년대 서울운동장에서 활약했다. 박대통령컵 아시아축구대회에서 말레이시아에 지고 있던 상황에서 7분 만에 세 골,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경기를 무승부로 이끌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늘 사람들로 북적이던 서울운동장은 1984년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잠실에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종합운동장이 개장하며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이후 여러 곳에 경기장이 들어서며 동대문운동장은 그 위상조차 위협을 받게 됐다. 이런 가운데 2003년, 청계천 복원사업 과정에서 갈 곳이 없어진 노점상이 활동할 공간으로 동대문운동장의 축구장에 ‘풍물 벼룩시장’을 열며 축구장이 폐쇄됐다. 이후 2007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결승전을 끝으로 야구장도 철거되며 동대문운동장이란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리고 서울시는 그 자리에 디자인 패션 산업의 중심이 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세웠으며 다른 공간에 역사문화공원을 조성했다. 
 

이제 동대문운동장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다만, 동대문운동장 시절 쓰던 조명탑 일부와 성화대를 보존하고 있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정도다. 역사문화공원 안에 있는 ‘동대문운동장기념관’에서 누군가는 ‘역사 기록물’을 통해 기억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는 순전히 역사 기록으로만 그 장소에 대한 내력을 알 수 있다. 이미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은 기억과 기록이 교차하는 공간인 셈이다. 그래도 흥인지문, 동대문이 옆에 있어서 동대문운동장의 ‘동대문’이란 이름만은 여전히 굳건하다. 박광일 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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