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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반대어를 찾아서

01 초등학교 3학년쯤부터, 반대말(반의어)과 비슷한 말(유의어)을 배웠던 것 같다. 한 단어를 다른 단어와 쌍을 맺게 하며 익힌다. 언어의 유창성을 기르기 위한 어휘력 학습의 과정이다. 겉으로는 어휘를 배우는 과정이지만, 인지심리 차원에서는 사고력 발달을 도모하는 과정이다. 언어와 사고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이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비슷한 말과 반대말 익히기를 스피드퀴즈 활동으로 하고, 쪽지시험으로 선생님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유의어와 반의어를 잘 끄집어내는 능력은 말하기(speech)와 글쓰기 역량의 기반이 된다.

 

나는 처음 반대어를 배울 때, ‘반대어는 참 쉽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특히 동사나 형용사는 주어진 말 앞에 ‘안’을 붙이면 바로 반대어가 된다고 생각했다. ‘죽다’의 반대어는 ‘안 죽다’, ‘자다’의 반대어는 ‘안 자다’, ‘부지런하다’의 반대어는 ‘안 부지런하다’, ‘가난하다’의 반대어는 ‘안 가난하다’ 등으로 대답하면 되는 줄 알았다.

 

이런 대답이 잘못된 것이라는 합리적인 설명은 나중에 들었던 것 같다. ‘안’을 앞에 붙인 말, 이를테면 ‘안 부지런하다’는 ‘부지런하다’의 반대어가 아니라, ‘부지런하다’를 부정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부정하는 것과 반대하는 것, 그게 다 같지 않은가? 할 수도 있지만, ‘부정’과 ‘반대’는 의미론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며, 반대어가 되기 위해서는 두 말의 뜻이 서로 대조 대비되는 위상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안 부지런하다’라고 해서 꼭 ‘게으르다’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안 부지런하다’는 ‘부지런하다’의 반대어가 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말의 의미를 곰곰 생각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 하나를 탐색하는 일이다. 반대어를 찾아 나선다는 것도 같은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계에 머물고 있던 데에서 벗어나, 그 맞은편 쪽 세계를 기꺼이 탐색해야 하는 과업이 바로 반대어 찾기이다. 그러다 보면 두 개의 말(현상)이 겉으로는 반대인 것 같아도, 좀 더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음도 볼 수 있다. 겉으로는 상관없는 듯이 보여도 알고 보면, 상당한 반대의 의미가 도사리고 있음도 알게 된다. 교육토론에서 나는 찬성과 반대 역할을 서로 바꾸어서 진행하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학습하고자 하는 현상이나 지식의 총체적 모습을 이해하는 장으로 삼으려고 한다.

 

유의어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여기 ‘혼이 나다’와 ‘꾸중을 듣다’라는 두 말을 보자.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윗사람에게 나무람을 당한다는 뜻이다. 유의어이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짚어 보면 미묘한 대조가 드러난다. ‘혼이 나다’는 상대 어른의 나무람이 너무 강하여 내 안에 있는 내 혼(정신)이 밖으로 나가버린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나무람으로 인해서 내가 겪는 놀람이 의미의 중심을 이룬다. 혼을 내는 어른에 대한 무서움의 감정이 의미에 가담한다. 반면 ‘꾸중을 듣다’는, 나를 나무라는 말씀을 내가 잘 듣고, 받아들임에 의미의 포인트가 있다. 꾸중하시는 어른에 대한 존중이 들어 있는 말이다. 분명 대비되는 차이가 있다. 이 두 말을 굳이 반대말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는 유의어라고 하기에도 문제가 있다.

 

02 2021년 기준, 오대양 육대주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는 약 750만 명이다. 크게 보아서, 우리 한민족은 남한에 5,000만, 북한에 2,500만, 한반도 밖 지구촌에 750만이 있다. 근현대 150년 동안 한반도를 떠나 세계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간 한민족이 그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는 분들도 많다. 향후 세계화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역동성 발현을 위해서나, 남·북한 관계의 질적 변화를 도모해 나가기 위해서나 이들 재외동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일찍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개진되어왔다.

 

재외동포를 향하는 관심이 높아지면서, 재외동포의 발전과 미래 위상을 논하는 학술 세미나 등의 자리도 많아진다. 이런 자리에 주요 담론으로 등장하는 주요 이슈는 그들의 정체성 문제이다. 이민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한인 디아스포라 2세·3세들이 그들의 거주국 사회·문화에 적응하면서, 한국어와 한국문화에서 멀어지게 되고, 자연히 한민족 정체성이 엷어져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외동포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그들의 정체성 강화가 중요하다는 것이 정체성 강조론의 논지이다.

 

그런가 하면, 재외동포는 각기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라의 주류 사회에 진출하여, 그 사회의 시민 주체로서 당당하고도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문제가 중요함을 강조하는 의견도 큰 호응을 얻는다. 그래서 정체성 교육 못지않게 그들에게 ‘세계 시민성’을 길러주는 교육이 필요함을 말한다. 세계시민으로 살아가야 할 재외동포들의 세계화 태도와 정신적 역량을 기르는 데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한민족 정체성’과 ‘세계 시민성’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읽힌다. ‘한민족 정체성’은 안으로 향하는 재외동포의 존재론으로 보이고, ‘세계 시민성’은 밖으로 향하는 재외동포 존재론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계 시민성’ 담론이 등장할 때는 ‘한민족 정체성’ 강조론에 대한 비판의 색조를 띤 바가 없지 않았다. ‘한민족 정체성’ 쪽에서도 ‘세계 시민성’ 강조론에 전폭적인 이해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오랜 기간 논의가 선순환하면서 이들 두 개념의 반대 관계는 새롭게 자리를 찾아갔다. 요약하면 이렇다. ‘재외동포의 한민족 정체성’은 간단치 않다. 온 세계에 이산되어서 사는 한인으로서의 모습이 그 정체성에 포함되어야 한다. 즉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정신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재외동포의 세계 시민성’ 또한 단순치 않다. 동포들의 내적 자아를 떠받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없이 세계시민으로 나아가는 것은 뿌리 없는 유랑객으로 세계를 떠도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체성 없이는 세계시민으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어렵다. 정체성 없는 디아스포라들이 세계무대에서 멸절된 사례는 넘친다.

 

그러고 보니, 한민족 정체성 안에 세계 시민성이 들어와 있고, 세계 시민성 안에 한민족 정체성이 들어와 있는 셈이다. 두 개념을 동의어라고까지 할 수는 없겠지만, 반대어라고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적어도 상당히 통하는 개념을 함께 지니고 있으며, 서로 돕는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어떤 세계를, 어떤 현상을 총체(totality)의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복잡한 사고를 필요로 하는가. 얼마나 풍성한 경험을 요구하는가.

 

03 ‘사랑’의 반대어는 오로지 ‘미움’만일까. 반대 의미로 치자면 더 혹독한 것으로 ‘무관심’도 있다. 연민의 감정으로 시작한 남녀 간의 사랑은 실패하기 쉽다. 한쪽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데서 비롯되는 사랑이라면 ‘서로 사랑하기’의 건강한 균형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 일방적 시혜(施惠)의 사랑으로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연민은 사랑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 이를 철저히 경험한 사람이라면 사랑의 반대어로 ‘연민’을 말할 수 있다. 누가 그를 틀렸다 할 것인가.

 

‘전쟁’의 반대어를 ‘평화’라고 말하는 사람은, 사전에서 규범적으로 적어놓은 반대어를 말한 것이다. 이는 누구나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반대어이다. 전쟁이나 평화에 대한 구체적 체험과 각성이 있기 이전에, 우리는 일반적인 언어로 ‘전쟁’의 반대어를 ‘평화’로 배운다. 그러나 자신이 각성된 주체로서 전쟁이나 평화를 절절히 체험하고, 그 체험을 자신의 인생에서 각별한 의미로 새겨 보는 사람은 전쟁의 반대어를 반드시 ‘평화’라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국가 간 외교협상이 실패로 끝나고, 그 결과로 바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경험한 외교관은 전쟁의 반대어를 외교라고 말한다. 전쟁을 방지하는 숨은 메커니즘을 호혜(互惠)의 무역체제임을 현장에서 경험한 통상 전문가는 전쟁의 반대어를 ‘무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의 반대어가 평화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사전이 정해 놓은 반대어만이 반대어는 아니다. 누구나 자기만의 반대어가 자기의 경험 내부에서 마련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신의 언어를 부단히 재창조한다.

 

잠깐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배우며 터득해 가야 하는 것이 반의와 유의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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