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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흔적

 

01 외우(畏友) 서덕현 교수가 책을 보내왔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은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수필과비평사)>이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연상케 하는 제목이다. 서 교수는 의도적으로 그 제목을 빌려 왔으리라. 책의 제목 앞에 ‘서덕현 교수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서사’라는 수식어가 있다. 나는 책의 제목에서 이미 기구하고도 절절한 아버지 찾기의 행로를 예감한다. 아니 그 이전에 서 교수의 고운 성정과 더없이 정직하고 성실한 성품을 알기에, 이 서사의 운명적 비극성을 예감한다.

 

서 교수의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는 충청도 농촌에서 1949년 초에 입대하여 1950년 6.25 전쟁 발발 무렵 전사한 아버지를 찾아가(내)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의 부친은 전몰의 구체적 시간과 장소가 미상이다. 임시로 작성한 전사자 명부에 등재된 것이 전부다. ‘잃어버린 아버지’가 확실하게 각인된다. 서 교수가 두 살 때 헤어졌으니,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이다. 전사 통지를 받은 그의 조부모가 견지한 심적 태도는 참으로 짠하게 이해된다. 전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 언젠가는 반드시 집 마당으로 들어설 거다. 20대에 청상(靑孀)이 된 서러운 운명의 서 교수의 모친도 그러했다. 남편이 서울 북방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걸로 믿고 싶어 했다. 게다가 어린 손주인 서 교수에게, 굳이 아버지의 부재를 각성시킬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조부의 배려도 있었다.

 

그래서 서 교수는 아버지의 부재를 거의 의식하지 않고 자랐다고 한다. 우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아버지의 필요를 못 느낄 정도로(못 느끼도록) 조부모의 보살핌이 각별해서 특별한 결핍을 느끼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의 현상계에서만 그러했다. 그의 무의식 안에서는 ‘부재의 아버지’가 항상 그를 찾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가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그 무의식은 의식의 표면 위로 올라왔다. 아버지에 대한 각성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를 찾을 일이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일, 그것은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어머니 삶의 흔적을 비로소 의미 있게 찾아가는 것이기도 했고, 어릴 때는 몰랐던 조부모님들의 마음 흔적을 제대로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서 교수 자신의 생애적 정체를 찾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 책을 씀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존재가 온전하게 되는 데에 이르렀으리라.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제목만 닮은 것이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 가는 스타일도 은연중에 닮았다. 매우 소소하고 작은 사연들을 아버지와 관련하여 끄집어내고 오래 음미한다. 사연마다 감정의 세부 움직임이 살아나고, 그것이 서사의 중심으로 건너온다. 어딘가 훼손된 온갖 파편의 기억을 집요하게 이어붙인다. 그리고는 마침내 아버지의 흔적 하나를 구성해 낸다. 직접 접하지 못한 ‘잃어버린 아버지’이었으므로, 그 아버지를 반영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감정과 말들을 반추한다. 젊은 날에는 그냥 그렇게 들었던 어머니 한숨에 배어 있는 아버지의 흔적까지 되짚어 본다.

 

서 교수는 아버지의 실체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서, 1949년 개성 송악산 전투에 투입된 아버지의 포병부대가 기동한 경로 일부를 직접 걸어가 보기도 한다. 나는 이 대목이 감동이었다. 잃어버린 그 무엇을 찾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몸과 정신이 함께 겪는 고행의 일종이다. 아버지 부대는 주둔지 영등포에서 105밀리 곡사포와 함께 한강을 거쳐 무악재를 넘어, 수색을 거쳐, 문산의 연대 본부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임진강 다리를 건너 송악산으로 간다. 서 교수는 이 길 위에서 아버지의 실체를 느끼려 한다.

 

서 교수가 여기까지 오기에는, 오래된 전사(戰史) 자료를 얼마나 많이 뒤적거렸을까. 그걸 확인하러 관계기관은 또 얼마나 빈번하게 출입하였을까. 그 이전에 아버지와 관련해서 남겨진 문서와 편지와 사진은 또 얼마나 많이 들여다보았을까. 그리고 어려서부터 서 교수에게 전해져 온 아버지에 관한 주변의 말들을 얼마나 곰곰이 조회했을까. 그 주변 사람들마저도 이미 세상에 없는 형편이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70년 전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그의 고초에 나는 감화된다. 그것은 고된 수행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아무런 흔적도 없이 변해 버린 길 위에서 그는 아버지의 흔적을, 기어코 찾아서 기술한다. 흔적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내가 최종적으로 발견하(려)는 어떤 ‘의미의 화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02 흔적은 사라짐을 보여주는 쪽에 속하는 것일까.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쪽에 속하는 것일까. 도교식으로 말하면, 흔적이란 사라짐을 통하여 존재를 증명하고, 동시에 존재란 반드시 소멸을 향하여 가는 것임을 흔적이 입증한다고나 할까. 흔적은 그 두 쪽을 모두 아우르는 존재론을 가능하게 한다. 사라지지만 남는 존재, 사라짐을 받아들이며 그 앞에서 겸허해지는 마음, 그 모두를 일깨운다. 조용히 흔적을 발견하는 경지로 나아감으로써, 우리는 우리 내면에 있는 성(聖)스러움을 일깨울 수 있다. 내 안의 거룩함을 만나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아, 거룩함이여, 네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정신의 경지를 대할 수 있으리라.

 

인간은, 어떤 부재에 대해서도 그것을 ‘있는 흔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정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 흔적을 향해 감으로써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고매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흔적을 통하여 부재를 그 어떤 실존으로 지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정신은 고양된다. 흔적은, 오로지 실증의 논리로만 존재를 증명하라는 현실의 삭막함에 잠시 위안과 쉼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황명륜 시인에게서 흔적의 위안을 받는다. 시인은 ‘흔적’이 가져다주는 사유(思惟)의 깊고 그윽함을 전한다. 시간을 음미하는, 시간의 철학이 참으로 아스라이 전해진다. 옛 고향을 찾아가서 발견하는 흔적을 시인은 이렇게 음미한다.

 

어린 날 발자욱 소리/ 그 소리 남아 있다//

귀 기울여 앉았으면/ 옛 흔적의 숨소리//

때로는 달빛도 앉아/ 쉬어 가는 그 길목// <‘고향’ 중에서>

 

그런가 하면, 시인은 추풍령 고갯마루를 걸어 넘으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흔적으로 보려는 지혜의 눈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만져지지는 않지만, 면면히 흘러왔을 무량의 시간, 다 가 닿지는 못하는 무한의 공간을 ‘흔적의 감수성’으로 전한다. ‘지금 여기’의 추풍령 길이 유장하게 확장되는 흔적의 상상력을 나는 향유한다.

 

추풍령 고개 너머/ 가던 길 잠시 멈추고//

숲속의 발자욱 소리/ 기침 소리를 듣는다//

그 누가 오고 갔는지/ 먼 옛길의 이 흔적들// <‘추풍령을 넘으며’>

 

황명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흔적의 미학을 알아차린다. 흔적은 속된 말로 하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의 번짐 때문에 흔적은 무한대 유현함의 세계를 품고 있는 그 무엇이다. 고생대의 동물 화석 같은 것이 흔적의 전형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화석은 단순히 그 동물만 입증하지는 않는다. 화석을 흔적으로 다가가면 그 흔적이 암시하는 고생대의 생태와 모습에 근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흔적을 추구하려는 정신은 과학 정신에 가닿는다.

 

흔적은 어떤 실증보다도 더 반듯하고 오래 미덥게 우리를 이끄는 마력 같은 것이 있다. 나는 흔적을, 길고도 긴 시간성을 안으로 머금고 있는, 그래서 신령한 그 무엇이 깃들어있는 표식(標式 : 하나의 형식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전형적인 유적)이라 말하고 싶다. 요컨대 어떤 부재(부재의 인물)를 흔적으로 재발견하려는 의식은, 그 부재(부재의 인물)에 대한 나의 각성이 큰 울림으로 왔음을 의미한다. 그 각성은 물론 전(全)인격적이고 때로는 초월성을 띠는 것이라말하고 싶다.

 

정말 내 생에서 잃어버리고 지내 온 것이 있는가. 소중한 것임에도 잃어버리고 지내 온 것이 있는가. 나의 생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서’ 나서 볼 일이다. 그것이 ‘잃어버린 나’를 찾는 길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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