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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기세(氣勢)를 몰고 영월로 간 홍성모 화백

동강 따라 손으로 그리는 역사의 기록

 

선돌. 영월로 넘어가는 소나기재 어디쯤에서 100m 정도 산으로 들어가면 탁 트인 서강 전경이 드러난다. 큰 구렁이 한 마리가 둥글게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혹은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안고 휘돌고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 같기도 한 강이 벼랑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그 벼랑 끝에 70m 높이로 날을 세워 서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가 선돌이다. 푸른 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더욱 위험한 비밀과 전설을 안고 있는 듯 여겨지던. 
 

선돌은 홍성모(58세) 화백을 다시 만난 곳이기도 하다. 신비롭다 못해 기이함으로 다가오는 곳. 단종이 유배지인 청령포로 가는 길에 잠시 쉬면서 바라본 절벽의 모습이 마치 신선 같다고 해 ‘선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원래는 하나의 바위였지만, 세월이 지나 틈이 생기고 갈라지면서 두 갈래 바위가 된 채로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설화 또한 안고 있다. 그곳에서 백빈(白鬢)을 휘날리며 붓끝에 힘을 실어내고 있는 노화백의 모습이 딱 선돌 그 자체로 비쳐들었던가.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닌 그의 그림 속

 

화백은 5년 전 홀연히 고향 부안에 내려와 높이 1m, 총 길이 56m나 되는 방대한 크기의 ‘해원부안사계도(海苑扶安四季圖)’를 완성했다. 그림에서는 큰 믿음의 뿌리와 크게 분발하려는 의지, 그리고 크게 의심하는 뜻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느껴졌다. 정성과 믿음이 한결같은 이가 아니면 결코 찾아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 그것을 나는 기세(氣勢)라고 표현한 바 있다. 
 

“나의 고향은 부안입니다” 붓을 든 내내 화백은 말했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완성한 ‘해원부안사계도’를 부안에 기증한 뒤, 기세를 몰아 그는 또다시 강원도 영월로 갔다. 그에게 영월은 1982년부터 40여 년 가까이 드나든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이제 강줄기와 산은 물론 영월 어느 곳이나 그의 화폭에 선(線)으로 담겨 실상보다 더 실상처럼 되살아날 터였다. 
 

그렇게 제일 먼저 탄생한 그림으로 영월군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선돌의 사계도를 빼놓을 수 없다. 현재는 영월군에 기증한 상태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그림 속에는 단순히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작 열일곱 살에 왕에서 노산군으로, 최후에는 서인으로 강봉돼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왕 단종의 가슴 아픈 사연도, 역사를 굽어볼 줄 아는 궁극의 마음까지도 선 속에 품어 그의 그림은 하나의 울림 있는 이야기가 돼 가슴에 ‘쩡’하고 와 닿는다.
 

“알다시피 나는 전라도 중에서도 논에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평야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영월은 그 반대의 고장이지요. 산과 계곡밖에 없어요. 하지만 영월은 자연이 순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이에요. 그래서 인간미가 있어요.”
  

      

 

화백이 영월과 인연이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이곳의 수많은 산이나 강처럼 사연을 하나 물고 있는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그렇듯 화백이 먼저 접한 것은 서양화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동양화를 접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선천성 심장병 질환으로 쓰러지고 난 후부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병원비가 무색했으나, 당시 원광대 전 동문이 1천 원씩 모아 무사히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두 번 사는 인생이기에 화백은 그 후로 ‘새 생명 찾아주기 운동’으로 전북도민일보와 함께 난치병 어린이 돕는 일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렇게 나무 그림도, 바위 그림도 안 배운 상태로 동양화를 시작한 것이 ‘청산계곡’이라 제목 붙인 그림으로 1986년 뜻하지 않게 미술대전 특선작으로 뽑히게 된다. 서양화의 면(面)과 동양화의 선(線)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던 때다. 다만 처음 가본 영월에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산 계곡에 물안개가 짙었더라는데, 보이는 대로 꾸미지 않아도 무릉도원 같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산과 계곡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었단다. 

 

강 따라 그린 정선 가수리에서 영월 읍내

 

“동강은 길이가 66km나 돼요. 그중 정선 가수리에서 영월 읍내까지 강 따라 그리고 있어요. 서강도 군데군데 그리고는 있지요. 특히 가수리(嘉水理)는 그 이름처럼 ‘물이 아름다운 마을’이라 그런지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착 감겨요.”
 

한반도면, 김삿갓면, 무릉도원면, 태양면 등 이름만 들어도 꼭 한 번 다녀오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영월. 영월에는 두 개의 큰 강줄기가 있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한 남한강 본류인 동강과 평창에서 발원한 서강. 두 강은 하나로 모여 다시 거대한 역사로 흐른다. 영월읍에서부터는 남한강으로 불리고, 남한강은 양평에 이르러 다시 북한강과 합류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이 강으로부터 시작됐고, 우리나라 역사 역시 큰 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의 욕망으로 수많은 댐이 설치되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동강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1990년대 말 동강댐이 만들어질 계획 속에 놓여 있었던 것. 다행히 주민들의 반발로 백지화되긴 했지만 당시 수몰예정지역 주민들의 가슴앓이가 동강에는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원래 흘러야 하고, 흐르면서 수많은 소리를 내는 여울들이 있어야 비로소 강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림이란 손으로 그리는 기록이자 역사

 

“임실에 가면 섬진강 댐이 있고, 부안에 가면 부안댐이 있잖아요.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그곳들이 얼마나 생생하게 아름다운지 몰라요. 그런데 그곳들을 화폭에 더는 담아낼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세월 지나 그것이 그렇게 큰 한이 됩디다.”
 

이제 화백은 영월 동강의 역사적, 미학적 가치를 되새기며 강이 온전해야 사람이 온전하다는 울림을 전하고자 한다. 이미 1997년도에 폐교를 작업실로 정해놓고 동강을 따라 붓을 잡은 바가 있다. 어쩌면 지금의 작업은 당시 미진했던 부분들에 대한 재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마음이 있기에 오전 동안 서른 군데가 넘는 마을을 둘러보고, 오후부터는 밤늦도록 밑그림 작업에 여념 없다. 마을 이장님들이나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산에 드는 어둠이나 물 위로 드리우는 산 그림자, 영월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다. 그림이란 단순히 눈으로 그리고 보는 것이 아니라 기록이기 때문이다. 구불한 나무 한 그루, 풀잎 하나, 돌멩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열정의 원천을 말하자면, 다시 화백의 고향인 전라도 부안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안댐이 만들어지기 전 내변산을 끼고 구불구불 흐르는 중계 계곡에는, 신선들이 발을 적시다 가는 ‘백천내’라는 내가 있었다. 백 길의 천이 흘러 내를 이룬다는 백천내는 흐르던 물이 갇혀 머물러 있기 전, 봉래구곡(蓬來九谷)의 하나로 절경을 자랑할 만해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댐 공사로 수몰돼 현재는 백천내는 물론 그 많던 천도 사라지고 구곡 중 5곡까지만 남아 있다. 무릉도원과 같은 상상의 산이라 일컫는 봉래곡의 신령한 운치를 이제는 영영 돌이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화폭에나마 담아두지 못한 것이 한이 돼 화백은, 가슴에 품은 또 하나의 고향 영월의 동강을 지금이라도 손끝에 담아두고자 하는 것이다. 하여 그의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또 다른 기록이자 역사이며, 묵묵히 흐르는 강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에 당도했으니 3년 여 동안 동강은 그렇게 그의 붓끝에서 낱낱이 생하게 될 터였다. 

 

 

영월의 골격 그리려면 잎 나오기 전에 

 

“잎이 나면 산에 가려지니까 잎 나올 때까지는 계속 그려야 해요. 일주일에 4일 간은 영락없이 스케치하는 데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나무는 꽃 진 늦봄부터 잎이 무성진다. 그러기에 줄기나 가지를 보려면 꽃이 피기 전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꽃눈과 잎눈이 어디에 붙어 있고, 잔가지나 햇가지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나무 전체 골격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산의 골격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잎이 없는 한겨울을 택해야 산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닮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닮게 하다보면 다듬는 데 빠지기 때문이다. 또 꼼꼼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꼼꼼하게 하다보면 묘사하는 데 빠지고 만다. 닮지 않으면서도 닮아야 정신이 있고, 꼼꼼하지 않으면서도 꼼꼼해야 의취가 있는 법. 산을 그리는 자로서 능히 그 정신과 의취를 전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우거진 숲이 아니라 허한 데가 있는 것이 귀한 것임을 아는 이만이 그려낼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일 게다. 한 획을 발전시켜 남은 곳을 덜어내고 부족한 곳을 채워 넣는 대원칙이, 두루 영고성쇠의 원리까지 통하고 끊임없이 변화해 나아가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이치가 화백의 그림 속에는 있다. 작은 한반도라 불리는 영월의 한반도면이나 동강의 백미로 불리는 어라연이 또 그렇게 거대한 이치를 가지고 화백의 손끝을 타고 다가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화백의 그림은 조선 명종 때 격암 남사고가 남긴 한국의 역사서이자 예언서인, ‘격암유록’에 수없이 나오는 구원의 활방(活方)인지도 모르겠다. 큰 병이 큰 약이 되기도 하듯, 알게 모르게 곪아버린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약이 되는 자리. 어지러운 심신과 떠도는 혼백을 안정케 하는 안식의 자리 말이다. 김형미 시인·전주KBS방송총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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