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스피드를 즐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람 사이로 나를 밀어 넣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겨울 저녁 팽팽하게 죄어진 공기 속으로 들어가면 뺨에 찬 기운이 닿으며 상쾌한 바람이 나를 죄여 온다. 그런 기분을 느끼기 위해 겨울 저녁이면 밖으로 나간다. 엄마는 내가 저녁에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나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다행히 오늘 엄마는 회식이다. 엄마는 아무리 빨라도 열시 후에나 집으로 올 것이다. 나는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엄마가 집으로 전화를 걸면 통화중이 될 것이다. 엄마는 내가 밤거리를 달리는 것보단 친구들과 통화하는 것을 더 낫게 생각한다. 나는 시시한 수다를 떨 만한 친구가 없다.
베란다로 나가 엄마가 숨겨놓은 인라인을 찾아 신는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다. 엘리베이터 앞으로 휙 다가가는 내 콧속으로 반찬 냄새가 훅 끼친다. 감자와 양파와 간장을 섞어 볶는 냄새. 조금 출출하긴 하다. 나는 새우 버거를 떠올리며 출출한 것을 참는다. 엘리베이터 옆에 있는
소화전 안에 운동화를 넣는다. 아파트를 나가 두 블록을 가면 내가 자주 가는 햄버거 가게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밖으로 나가니 어두운 곳에서 웅크려 있던 바람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나는 잠바의 자크를 열고 양쪽으로 펼친다. 천천히 겨울 공기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바람이 펼쳐진 잠바 속으로 들어와 펄럭인다. 내 몸은 점점 팽팽한 공기의 깊은 속으로 들어가고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온 바람은 내 몸을 죄여 온다. 모든 것을 잊고 나는 바람을 즐긴다. 이럴 때면 엄마의 헤픈 울음과 잔소리, 아빠의 행방불명을 모두 잊을 수 있다.
도로 앞 전자 마트의 대형 텔레비전에서 아홉 시 뉴스가 시작된다. 익숙한 앵커의 얼굴이 보인다. 앵커 뒷부분의 화면에는 화재가 난 현장이 보인다. 지나가던 사람들 몇 명이 텔레비전 앞에 서서 텔레비전을 본다. 나는 그들 사이를 헤쳐 지나간다. 엄마는 어제 저녁에도 울었다. 남자다. 앵커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자의 변사체가 차안에서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엄마는 그 보도가 나온 다음 스포츠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될 때까지 울었다. 평소 나는 아빠가 어디론가 여행을 갔을 것이라는 말로 엄마의 울음을 달랬지만 어제는 나도 조금 울었다. 누구든 가족을 가진 사람이 칠 개월 동안 연락 없이 여행을 가진 않을 테니깐.
엄마를 울리기는 식은 죽 먹기다. 사실, 식은 죽도 먹기 싫을 때는 어렵긴 하지만. 어쨌거나 엄마는 눈물이 헤프다. 길에서 아버지가 입고 나간 바바리랑 똑 같은 바바리를 입은 아저씨를 봤어, 라는 말 한마디면 엄마는 코가 벌게지며 크리넥스 티슈를 찾는다. 엄마의 눈물을 헤프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아빠의 책임이다. 나는 아빠의 무책임한 행동이 소름끼치도록 마음에 안 든다. 행방불명이라니. 이혼이나 병이라던가 죽음이라던가. 많은 부재의 원인 중에서 행방불명은 엄마에게 기다림과 허튼 상상만 늘게 만들었다. 나는 구질구질하게 아빠의 행방불명을 상상하는 엄마를 위로하는 것도 지겨워 졌다.
잠바를 오므려 더 이상 바람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신호등 앞에 서서 유리를 통해 보이는 햄버거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신혜가 앉아 있다. 신혜는 빨간색 머플러와 모자를 쓰고 있다. 콜라가 든 컵을 들어 스트로로 빨아 마시곤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신혜 옆에는 우리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앉아 있다. 맞은편에는 늘 신혜 옆을 졸졸 따라 다니는 은선이 햄버거를 먹는다. 입에 묻은 소스를 보니 새우
버거가 틀림없다. 은선이와 신혜는 나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인 지금까지 같은 반이다. 신혜는 얼굴도 예쁘고 성격이 밝아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름방학이 끝났을 때, 반에서 신혜네 부모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후로 신혜는 우리 반에서 더 이상 밝은 친구가 아니었다. 얼굴 전체에 그림자가 드려져 보였고 늘 어딘가 구석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도 신혜는 이를 드러내고 웃다가 콜라 컵 속을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다. 신혜와 함께 앉아 떠들고 있는 아이들에게는 신혜의 그 모습이, 그늘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나는 신호등을 건너서 햄버거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새우 버거와 콜라를 주문하고 신혜네를 등지고 앉는다. 다행히 은선이 아직 나를 발견하진 못한 것 같다.
"그래, 신혜야, 오늘 밤 새워 너네 집에서 춤 연습하자."
"안 돼. 오늘 바람머리 오는 날이야."
"그 날라리 학원강사?"
"그래, 안타깝게도 바람머리와 주름 흘러내리는 얼굴이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나는 유리에 비춰지는 내 뒤의 신혜 얼굴을 본다. 오른 손으로 뺨을 받치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쳐다보는 신혜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들어져 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신혜의 그림자를 봐 버린 느낌이 든다. 나는 밝게 웃는 신혜의 얼굴도 좋아하지만 우울해 보이는 얼굴도
좋아한다. 신혜의 그런 얼굴은 마치 나 혼자 알고 있는 것 같다. 유리 속에서 신혜와 내 시선이 마주친다. 신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아이들에게 돌린다.
"좋아, 가자. 바람머리한테 문자 날리지 뭐."
"그래, 바람머리도 오늘 같은 날은 쉬게 해줘라."
신혜는 커다란 곰 인형이 달려 있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빠르게 문자를 보낸다. 내가 주문한 새우 버거와 콜라가 나왔다는 말에 나는 일어나 카운터로 간다.
"야, 인라인 고양이다. 저 얘 우리 반이야. 고양이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은선의 말에 남학생들이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는 것을 느낀다.
"장화 신은 고양이가 아니라 인라인 신은 고양이냐?"
은선이 탁자를 두드리며 까르르 웃는다.
"무슨 여자가 이 밤에 인라인을 타냐?"
"원래 저래. 말을 걸어도 대답을 안 해, 재수 없어. 저 애 아버지가..."
"그만 해, 남의 일에."
은선의 말에 신혜가 끼여든다. 나는 새우 버거와 콜라가 든 종이 봉지를 받아 들고 가게를 나선다. 신호등에서 길을 건너며 뒤를 돌아본다. 신혜가 이쪽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저 아이도 혹, 바람 속을 달리고 싶은 것 아닐까.
신혜네 아파트까지 달려간다. 아파트는 놀이터도 크고 주차장도 넓다. 노란 등이 길 위에 떨어진 은행잎까지 비춰준다. 나는 놀이터에 앉아 신혜네 집을 쳐다보며 새우 버거와 콜라를 먹는다. 신혜는 9층에 산다. 신혜네 집 거실과 방에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가끔, 아주 늦은 밤에 이곳에
와 보면 신혜 혼자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아까 그 아이들과 모여 가 춤을 추는 신혜는 즐거운 것일까.
콜라를 마신다. 등에선 땀이 흘러내리지만 얼굴은 차갑고 콜라 속의 얼음은 입안을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콜라 속의 얼음을 와삭 깨물어 바닥에 흩뿌린다. 노란 불빛을 받은 얼음은 노랗게 빛나다 금세 바닥에 작은 물방울 점을 내며 사라진다. 휴지통에 봉투와 컵을 넣고 다시 바람 속으로 들어간다. 신혜네 아파트 세 동을 구석구석 한 바퀴 돌고 난 뒤 거리로 나선다.
바람이 한차례 어디선가 몰려든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노란 은행잎이 다시 바람의 부름을 받아 어둔 공기 속을 나비처럼 팔랑거린다. 잎이 모두 떨어진 은행나무에 기대선 바바리 코트를 입은 아저씨가 보인다. 나는 코트의 색깔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쪽으로 간다. 바바리 코트를 마주치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늘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등과 어깨를 오므리며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불이 잘 붙질 않자 몸을 더욱 오그린다. 그가 얼굴을 들 때까지 기다린다. 그가 입에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들면 그제야 나는 바바리 코트 색깔도 아빠 것과 다르다는 생각에 미친다.
길을 걷는 남자 어른들을 살피며 달린다. 바바리를 입은 남자, 잠바를 입은 남자,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 손에 붕어빵 봉투를 든 남자, 둘 혹은 셋이 모여 서 있는 남자들, 택시를 잡는 남자. 한 명 한 명 얼굴을 살피며 거리를 달린다. 그들은 모두 집으로 가는 중일 것이다.
술집이 즐비한 골목 구석구석과 네온사인이 화려한 모텔이 늘어선 골목을 달린다. 바람은 언제나 내 얼굴과 몸의 구석을 졸졸 따라 다니거나 내 몸 구석을 부드럽게 혹은 차갑게 쓰다듬어 준다.
손목시계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춘다. 초록괴물인 둘리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시계는 열 시를 알려준다. 손목을 들어 귀에 대본다. 척척척,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바람 속에서 들려온다. 중학교 입학 때, 아빠가 사준 선물이다. 나는 중학생이고 유치하다며 이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다. 아빠가 행방불명이 된 후로 나는 시계를 귀에 대고 자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살핀다. 예스25 편의점과 엔틱 가구 전문점 앞이다. 집에서 한참이나 멀리 왔다. 집으로 향하다 가구점의 진열장을 들여다본다. 은은하게 불을 켜 둔 진열장 안에는 가구들이 보인다. 엄마가 아빠를 몇 달을 졸라 샀던 침대와 똑같은 침대가 가게 안쪽에 있다. 저 침대에는 아직 아무도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침대를 산 후, 다음에는 화장대를 사달라고 했다. 엔틱 화장대 거울 속에 노란 잠바를 입고 서 있는 내 얼굴이 비춰진다. 식탁 위에는 플라스틱 과일과 꽃이 놓여져 있다. 갑자기 무서운 느낌이 든다.
나는 서둘러 달리며 제발 엄마보단 내가 먼저 도착하기를 바란다. 엄마는 내가 한번만 밤에 인라인을 탄 것을 알게되면 인라인을 버리겠다고 말하며 눈물 바람을 해댈 것이다. 엄마가 협박을 제대로 실천을 했더라면 아마 나는 세 달 전에 인라인과 작별을 했어야 할 터였다. 그나마, 엄마는
눈물이 헤픈 반면, 눈물의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나에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선물해준 사람은 삼촌이다. 그는 한쪽 다리가 길어 늘 비틀거리며 걷는다. 그가 걸음을 걸을 때면 한쪽 어깨도 덩달아 비틀거렸고, 그림자까지 흔들거렸다. 삼촌은 오리농장 주인이다. 삼촌이 기르는 오리들도 삼촌을 닮아 모두 뒤뚱거렸다. 삼촌은 엄마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고 시골에서 올라왔다. 삼촌이 왔지만 행방불명된 아빠를 찾는데 딱히 좋은 수가 나오지는 않았다. 삼촌은 중학생이 된 나에게 어른이구나, 하며 상자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회색에 남색 물결 무늬가 있는 인라인 스케이트가 있었다.
삼촌의 농장에서 나는 달리기를 했다. 삼촌 앞에서 바람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을 말했고, 삼촌은 나의 그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짧다면 짧지만 어쨌든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러니깐 삼촌은 나에게 바람을 선물해 준 것이다.
아파트 아래에서 쳐다보니 거실 불이 꺼져 있다. 이따금씩 파란 불꽃이 흔들린다. 내가 나올 때 거실 불을 켜 놓았으니 아빠가 돌아온 것은 아닐 테고 분명, 엄마가 돌아왔다는 흔적이다. 엄마는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텔레비전과 시계를 쳐다보며 벼르고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까지만 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인라인을 벗고 계단을 오른다. 10층에서 조심조심 소화전을 열어 운동화를 꺼내 신는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넣어두고 현관 앞으로 가 열쇠로 문을 연다. 현관문을 열자 요즘 엄마가 즐겨보는 드라마의 여주인공 목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잔소리가 날아올 줄 알았는데 조용하다.
살금살금 거실로 들어간다. 현관 앞에 엄마의 가방이 속이 벌어진 채로 놓여져 있다. 가방 안에는 아동 전집류 팜플렛이 보인다. 엄마는 아빠가 행방불명이 되자마자 출판사에 다녔다. 책을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팔러 다니는 것이다. 주로 아동전집을 팔러 다니지만 엄마는 생각보다 실적이 좋은 편은 아니다.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가방 안에서 책의 자료를 꺼내며 엄마는 어떻게 책을 팔아달라고 말할까.
엄마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어 있다. 손에 쥐고 있는 리모컨이 바닥에 닿을 듯 흔들린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옛사랑을 만나 커피를 마시며 자신을 용서해달라며 울고 있다. 그녀는 울고 있지만 슬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리모컨을 손에 쥐고 온기 없는 거실 소파에 웅크려 있는 엄마의 모습이 더 슬프다.
나는 텔레비전 볼륨을 낮춘다. 그러자 전화기에서 뚜우뚜, 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전화 수화기는 내가 내려놓은 그대로다. 엄마는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 꼬꾸라졌을 것이다. 수화기를 올려놓는다. 안방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켜고 장롱 문을 연다. 하얀 레이스가 달려있는 침대 시트가 아무렇게 개켜져 있다. 엄마는 아빠가 행방불명된 지 삼 개월이 지나자 침대를 내다버렸다. 동사무소에 전화하자마자 다음 날 침대를 가지러 온 아저씨들은 새 것이라며 좋아했다. 침대는 아빠가 엄마의 생일 날 사 준 것이었다. 엔틱 가구를 가지고 싶어하던 엄마는 침대에 맞춰 시트를 새로 샀다. 아빠는 침대를 사준 후, 일주일만에 사라졌다. 엄마는 가구를 새로 들일 때, 가구 뒤에 왕, 자를 한문으로 써야 하는데 안 써서 집에 우환이 생겼다며 울었다. 그러나 아빠가 힘들어했던 것은 침대를 사기 훨씬 전부터였다. 다만, 엄마는 침대에 원인을 퍼붓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장롱에서 푹신한 이불을 꺼내 바닥에 깐다. 침대가 차지하던 자리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이불은 안방을 더욱 크게 보이게 한다. 거실에서 엄마를 일으키려하자 엄마는 놀란 듯 눈을 번쩍 뜬다. 엄마의 눈에 화장이 번져 검게 뭉개져 있다.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엄마의 입에서 쉰내와 술 냄새가 난다.
"신혜 알지? 걔네 집에서 춤 연습했어, 얘들이랑. 아 피곤해."
"공부나 하지. 무슨 춤? 허긴 인라인 타는 것보단 낫다."
엄마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켜 검은 쫄 바지와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엄마 화장이라도 지우고 자, 낼 아침에 얼굴에 주름 생겼다고 짜증 부리지 말고."
"우리 착한 딸이 좀 지워져."
엄마는 베개를 머리에 베지 않고 가슴에 끌어 앉고 눕는다.
"아까 전화했더니 통화중이더니 신혠지 뭔지랑 통화를 했구나. 그 아이 한번 집으로 데리고 놀러와라."
엄마는 신혜와 내가 무지 친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는 신혜에 대해 엄마에게 많은 거짓말을 했다. 나와는 단짝이며 반에서 공부도 잘하고 아주 평범한 집의 외동딸이라고. 물론, 외동딸인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신혜는 나와 헤어지는 것을 싫어해 매일 같이 자자고 한다고, 그래서 귀찮기도 하지만 신혜가 예쁘니깐 봐주는 것이라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말했다. 예쁜 것이 다가 아냐, 착해야지. 어릴 때 친구가 평생 가기도 해.
가끔, 좋은 거짓말이 필요할 때가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아기는 아빠가 사랑이라는 씨앗을 엄마에게 주어 엄마가 뱃속에 품고 있다가 태어나는 것이라는 거짓말을 믿었다. 나는 꽃가게에 가서 사랑이라는 씨앗을 달라고 했다. 그런 씨앗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엄마에게 속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만약, 그때 엄마의 배에 있는 칼자국이 내가 태어날 때 생긴 것이고, 자세하게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설명했더라면 어렸던 나는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대로 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고, 공책에 이상한 상상 얘기를 쓰는 것이 취미고 밤의 거리를 달리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면 엄마에게 걱정만 던져 주는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은 표정을 숨기고 좋은 거짓말을 해서 남에게 걱정을 끼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아빠도 그래서
엄마와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아빠는 어른이니깐.
칠이 벗겨진 화장대에서 화장수를 솜에 묻혀 엄마의 얼굴을 닦는다. 눈가에 검게 흐르다 만 눈물을 닦아내고 눈썹을 지우자 눈썹이 반쪽만 남은 엄마는 아주 많이 늙어 보인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눈가와 입가의 주름을 닦는다. 다시 솜에 화장수를 묻혀 닦아낸다. 금세 닦아낸 엄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인다. 낮게 코를 골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엄마는 정말 눈물이 헤픈 여자다.
안방의 불을 끄고 거실로 나온다. 가죽이 벗겨진 레몬 색 레자 소파 앞에 엄마가 벗어 놓은 스커트와 쫄 바지가 아무렇게 있다. 스커트를 펼쳐 소파에 놓는다. 바지를 집으려다 그 앞에 웅크리고 앉는다. 엄마의 다리가 빠져나간 모양새가 뱀의 버려진 허물처럼 쓸쓸하다. 무릎 부분과 발
뒷부분이 늘어난 바지는 엄마가 더 이상 멋 부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는 다리를 좀 더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 한 겨울에도 얇은 스타킹을 신었다.
"당신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그래? 멋 부리다 다리 빨갛게 얼면 쳐다 도 안 볼 꺼야."
아빠가 농담을 건네면 엄마는 얇은 스타킹을 다시 내리고 다리에 로션을 듬뿍 바르며 호호 웃었다. 아빠와 내가 엄마의 다리 하나에도 맘껏 웃을 수 있었던 때였다. 쫄 바지를 들어 차곡차곡 갠다. 언제부터 엄마는 추위에 떨고 있었을까.
책가방을 싼다. 생각해보니 수학숙제가 있다. 수학 책을 꺼냈다가 그냥 가방 안에 넣는다. 내일 아침 일찍 가서 하자. 잠옷으로 갈아입고 베개를 들고 안방으로 간다. 엄마는 다리와 팔로 베개를 안고 웅크려 있다. 엄마의 옆에 누워 손목시계를 빼서 엄마와 나의 귀 사이에 놓는다. 척척척,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는 아빠의 심장이 뛰는 소리 같다. 아빠는 보상금 지급도 없이 사퇴를 당했다. 아빠는 지금은 이미 유행이 지난 노래처럼 엄마와 나에게 말하지 않고 늘 아침에 출근했다. 엄마가 미처 다림질을 못 해 놓은 와이셔츠를 손수 다려 입고, 급하게 아침 신문을 읽으며 우유를 마셨다. 나는 한번도 아빠의 우울한 뒷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제나 나의 고민은 친구들 속에서 어울리지 못하는 나였다.
집에선 평범한 척 재롱을 떨었지만 도무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점심시간이면 늘 혼자 도시락을 먹었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데 왜 성적은 그 모양이지? 하며 뒤에서 비아냥거렸다. 나는 가끔,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들과의 대화에 끼어 드는 방법을 몰랐다. 아이들은 한 명이 어떤 가수를 좋아하면 우르륵 몰려들어 그 가수를 좋아했다. 만약, 누군가 그 가수를 나쁘게 말하면 금세 왕따, 라는 말을 했다. 가수들의 유행가를 공책에 적어가며 외웠고, 그들의 춤을 따라 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은 나에겐 대부분 시시했고, 흥미롭지 못했다.
나는 공상에 빠져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 상상을 글로 써 놓았다. 가장 마지막에 쓰고 있던 것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아빠가 행방불명이 된 후로 그 공책을 펼치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친하고 싶은 신혜와 나는 우주의 낯선 별에 단 둘이 있게 된다. 신혜는 처음에 거만하게 앉아만 있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별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그러다 우리는 동굴을 발견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동굴 속에서 별의 비밀을 발견한다.
커다란 웅덩이 속에 작은 난쟁이가 있다. 난쟁이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고 웅덩이 속으로 우리가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들의 부모님을 볼 수 있고, 난쟁이의 도움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게 된다. 처음에 신혜는 별을 떠날 궁리만 하다가 나와 친해진다. 우리가 별에 정을 붙일 때, 난쟁이가 우리에게 지구로 돌려보내 준다는 제안을 한다.
난쟁이의 제안을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신혜에게 그 공책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신혜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다. 신혜는 그 별에서 나와 단둘이 있고 싶은지 친구들과 부모님이 있는 지구로 돌아오고 싶은지. 그러나, 신혜와 나는 3년 동안 친해질 수 없었다. 늘 신혜
주변에는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그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그런 고민에 몰두할 때, 아빠는 어디를 돌아다녔을까? 공원이나 오락실, 동시상영 영화관 같은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한숨을 쉬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 아빠는 어디를 헤매고 있을까. 시계를 귀 가까이 댄다.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면 어느새 나는 또 꿈을 꾼다.
아빠는 둘리처럼 다른 공간으로 여행을 갔다. 아빠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귀가 커다란 사람들 사이에 있다. 그들은 아빠의 작은 귀를 당기며 놀려댄다. 아빠는 엄마와 내가 그립지만 이곳으로 오는 통로를 잃어버려 낯선 공간과 시간 속에 갇혀 있다. 다행히 아빠는 선량해서 둘리처럼 그 공간의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는다. 귀가 커다란 사람들은 아빠의 사정을 듣고 비밀 통로를 찾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이곳으로 오는 통로를 찾으면 아빠는 돌아올 것이다.
엄마가 뒤척이는 소리에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다시 꿈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안 가는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귀를 시계에 바짝 댄다.
아파트 앞 놀이터에 신혜가 서 있다. 빨간 목도리와 모자를 쓴 신혜가 오른쪽 신발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치며 서 있다. 엄마 심부름으로 아파트 상가에 갈 때만 해도 그곳은 그냥 텅 빈 놀이터였다. 그러나 지금 놀이터에는 신혜가 서 있다. 신혜에게는 정말 빨간 색이 잘 어울린다. 신혜의
뒤에 있는 미끄럼틀의 빨간색도 신혜를 위해 꾸며놓은 배경처럼 느껴진다. 두부와 파가 들어있는 검은 비닐봉지를 든손에 힘을 주고 신혜가 있는 놀이터를 지난다. 일부러 놀이터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신혜도 나를 못 보았는지 신발로 흙을 파헤치고 있다. 아파트의 통로로 천천히 들어선다.
"야, 인라인 고양이."
신혜의 목소리는 둘리 시계처럼 내 귓속을 부드럽게 파고든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신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신발로 땅을 파헤친다.
"너, 지금 시간 있어?"
나는 손에 들고 있는 비닐 봉지를 뒤로 감춘다. 엄마는 두부 전골로 요리를 하기 위해 지금 부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라면 얼마만큼?"
나도 모르게 놀이터 앞으로 다가가며 말한다.
"많이. 나한테 인라인 타는 법을 가르쳐 줄만큼. 싫으면 관두고."
신혜는 가방 안에 인라인을 꺼내 보인다. 바람이 분다. 그네가 철겅거리며 바람을 태운다. 혼자 밥을 먹으라면 엄마는 또 헤프게 울어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신혜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그 동안의 거짓말이 들통날 것이다. 분명, 엄마는 이것저것 캐묻다가 청소년을 위한 문학전집을 읽었느냐, 로 시작해 신혜네 집에 방문할 계획을 세울 것이다.
"야, 빨리 대답해."
신혜는 신발 끝으로 흙을 파헤치다 목도리를 입가로 끌어당긴다.
"잠깐만 기다려. 이것 두고 나올게."
엘리베이터를 누른다. 엘리베이터는 14층에서 내려온다. 나는 다시 통로 입구로 가 놀이터를 쳐다본다. 신혜는 그네에 앉아 있다. 그네를 움직이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다. 노란 가로등이 신혜의 빨간 목도리와 모자를 따뜻하게 비춰주고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면서 어떻게 할까, 궁리를 한다.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만드는 육수냄새가 난다. 엄마는 식탁 위에 전골 냄비를 올려놓고 버섯과 갖가지 야채를 썰어 놓은 커다란 접시를 식탁 위에 올린다. 내가 건네준 비닐 봉지를 받아 두부를 꺼내 썬다.
"엄마, 나 엄마 쏙 빼 닮았나봐. 어떻게 해?"
"전골 냄비 전선을 꽂아라. 그런데 왜?"
엄마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두부 썬 것을 접시에 담는다. 나는 엄마를 뒤에서 안고 베란다로 데리고 간다. 베란다의 창을 열고 놀이터를 가리킨다.
그네에 앉아 있는 신혜의 어깨에는 커다란 가방이 매달려 있다.
"저 아인 누구야?"
"신혜, 내 단짝. 오늘 생일이었어. 내가 깜빡했지 뭐야."
"그래서? 들어오라고 해. 같이 밥 먹자."
엄마는 고개를 내밀어 신혜를 쳐다보곤 창을 닫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이들이 햄버거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어. 날 데리러 온 거야. 만약, 내가 지금 안 가면 나 왕따 당할지도 몰라. 어떻게 해?"
엄마는 두부를 썰던 손을 멈추고 소파에 가 앉는다.
"그래, 다녀와. 일찍 와. 선물은?"
나는 내 방에 있는 커다란 곰 인형을 집는다. 신혜의 핸드폰에 매달려 있는 것과 똑같은 테디 베어다.
"이것 주지, 뭐."
엄마에게 곰 인형을 들어 보이고 커다란 쇼핑백에 넣는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엄마, 미안. 얼른 두부 전골해서 먹어."
"혼자 무슨 맛으로."
이제, 엄마는 내가 현관문을 나서면 바로 울어댈 것이다. 술술 나오는 나의 능숙한 거짓말에 감탄하면서도 엄마에게 미안함으로 심정이 복잡해진다. 엘리베이터 앞 소화전을 열어 곰인형을 소화전에 넣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꺼낸다.
신혜는 인라인을 처음 타보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신혜에게 바람을 느끼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다. 나는 신혜의 손을 잡아주며 넘어지는 법과 앞으로 걷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신혜는 불평 없이 넘어지며 내가 잡아 주는 손을 잡고 일어난다. 지금 신혜는 온전히 나의 단짝이 된다.
"나 그만 쉬고 싶어, 네가 달리는 것 보고 싶어."
신혜는 학교 진입로 앞 도로에 걸터앉는다. 나는 신혜의 시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바람 속을 달린다. 잠바를 펼쳐 바람이 내 몸과 겨드랑이 사이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신혜는 말없이 나의 움직임을 좇아온다. 신혜를 바라보며 뒤로 달린다. 뜨문뜨문 지나가는 차들이 모두 나의 방향과 반대로 달려간다. 가로수가 뒤로 물러서는 것을 보면서 신혜에게 다가간다.
"너, 잘 달리는구나. 기분이 좋니?"
"바람이 몸을 죄어오는 느낌이 상쾌해. 너도 느껴봐."
신혜를 일으켜 손을 잡고 천천히 달린다. 바람에 추위를 느끼던 신혜는 곧잘 달리기 시작한다. 이따금 넘어지기도 하지만 내 손을 꼭 잡은 신혜는 말 잘 듣는 아이 같다. 검은 하늘에서 말간 솜사탕 같은 구름들이 우리를 빠르게 지나간다. 우리는 천천히 바람 속으로, 찬 공기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신혜도 터플 코트의 단추를 연다. 갑자기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준 신혜는 멈춰 서서 웃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신혜의 웃음은 정말 맑고 쾌활하고, 건강하다. 나도 따라 웃는다. 우리는 웃다가 다시 손을 잡고 달린다. 나와 신혜의 통로는 바람이 된 것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바람을 느낀다. 신혜를 따라 다니는 아이들은 결코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신혜는 목도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말한다.
"야, 인라인 고양이. 너, 매일 나랑 달리자."
"그래. 그래, 좋아."
신혜의 발갛게 얼어붙은 사과알 같은 볼에 깊은 보조개가 패어진다. 아파트의 통로 앞에서 신혜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다. 소화전에 둥글게 말려있는 테디 베어를 꺼내 엘리베이터를 내려오며 쫙 편다. 아파트 앞에 나가니 신혜는 어느새 인라인을 벗어 가방에 넣고 운동화를 신고 있다. 우리들의 통로 수단인 인라인 스케이트를 벗은 신혜의 모습도 그렇게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테디 베어를 안고 가는 신혜의 뒷모습이 작아질 때까지 나는 아파트 통로 앞에 서 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편지함으로 시선을 던진다. 우리 아파트 편지함에 가로로 놓여져 있는 하얀 사각봉투를 발견한다. 봉투는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편지함에 꼭꼭 숨겨져 있다. 혹시, 신혜가? 세금 납부고지서와는 다른 직사각형의 봉투를 집는 내 손은 떨렸다.
엄마는 소파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다. 잠이 든 것인지 엄마가 싫어하는 범죄 사실을 재연하는 프로가 나오고 있다. 식탁 위에는 전골 냄비에 육수만 있고 두부와 갖가지 야채를 썰어 담아 놓은 접시가 그대로 있다. 엄마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 텔레비전을 끈다. 그 바람에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난다.
"지금 왔어?"
"엄마, 밥 안 먹었어?"
"어, 피곤해서 잠깐. 몇 시니?"
"그것보다 엄마. 이것."
나는 혹시 편지의 내용이 안 좋은 것 일수도 있으니깐 먼저 뜯어보려고 했던 봉투를 내민다. 봉투 겉의 글씨체는 신혜의 글씨체가 아닌 아빠의 것이었다. 엄마는 봉투를 받아들고 아빠의 글씨체를 확인하자마자 마치 아빠를 안듯 와락 안는다. 엄마가 편지를 읽는 동안 나는 엄마의 얼굴 표정을 살핀다. 엄마의 얼굴은 금세 밝았다가 화를 내는 표정이었다가 결국,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나를 안는다.
"네 아빠. 우리를 잊지 않았어. 바다에 나갔단다. 아주 먼바다에."
엄마는 편지를 다시 한번 읽고 나에게 편지를 건넨다. 그리곤 식탁 앞으로 가 전골 냄비에 불을 켜고 밥솥에서 밥을 푼다. 밥 냄새에 갑자기 맹렬하게 허기가 진다.
"엄마, 나도 더 먹을 수 있어. 엄마랑 먹으려고 밥 조금만 먹었거든."
"그래, 알았어. 편지를 소리내어 읽어봐라, 다시 듣게."
엄마는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꺼내며 나를 돌아보며 웃는다. 엄마의 얼굴에 있던 주름들이 그 웃음에 사라진다.
"어릴 때, 나의 꿈은 마도로스가 되는 것이었어. 그러나 생각보다 바다는 힘이 드오. 나는 지금 남해에서 고기잡이배를 타고 먼바다에 나왔소. 이곳에는 물이 아주 좋아 물고기가 쉴 틈을 안 준 다오. 바다를 멀미날 정도로 느끼며 육지에 있는 당신이 너무 그립소. 당신과 나의 딸, 해진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아빠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편지를 읽는다. 엄마는 마지막 부분을 다시 읽어달라고 한다.
"당신과 나의 딸, 해진이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내 목소리는 아빠와 너무 닮아 마치, 아빠가 돌아와 화장실에서 고개를 내밀고 말하는 것 같다. 아빠는 언제 돌아온다는 말도 없었지만 엄마는 마냥 기쁨에 들뜬다. 엄마와 나는 김이 폴폴 나는 두부 전골을 먹는다. 엄마는 뜨거운 두부를 입에 넣고 고개를 흔들어대며 웃는다. 우리는 모처럼 기분 좋게 국물을 식탁 위에 철철 흘리며 많은 양의 밥을 먹는다. 엄마는 그릇들을 개수대에 아무렇게 담가두고 소파에 누워 습관처럼 채널을 돌린다.
한번도 엄마의 손에서 고정된 적 없던, 내셔널 지오 그래픽 채널을 튼다. 화면 가득 바다가 출렁거리고, 해양 어류 연구가들은 고래의 울음소리를 좇아가며 고래를 기다린다. 엄마 옆에 눕는다. 좁은 소파지만 엄마와 내가 눕기에는 넉넉하다. 손으로 엄마의 배를 만진다. 배에 있는 상처를
더듬는다. 엄마는 간지럽다고 웃는다. 그러니깐, 이 상처를 통해 나는 세상으로 나온 거다. 그 전에 아빠는 엄마에게 사랑의 씨앗을 주었을 것이다. 아빠의 목소리를 흉내내 엄마의 귓속에 말한다.
"바다를 멀미날 정도로 느끼며 육지에 있는 당신이 너무 그립소."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는 통로를 잊지 않고 있다. 언젠가, 어쩌면 빠르면 내일이면 아빠가 돌아올 지도 모른다. 돌아온 후에 어쩌면 싸울지도 모르지만 아빠가 돌아오는 것은 엄마에게 희망이 될 것이다. 나는 엄마에게 내일부터 신혜랑 인라인을 타고 한 시간씩만 달리겠다고 말한다. 엄마는
아주 늦은 시간이 아니면 허락하겠다고 말하고 내 어깨를 안아준다. 엄마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신혜와 손을 잡고 바람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경쾌한 느낌이 든다. 나는 신혜에게 아주 천천히 바람이 몸을 죄어오는 느낌을 알려줄 것이다. 우리는 내일부터 겨울의 바람 속을 달릴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