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보는 내내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그저 누군가 만들어낸 멜로드라마 속 선남선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일 뿐인데, 그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도대체 왜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을 느낀 것일까? 의지나 환경, 치명적인 무지 혹은 책임감으로 인해 견딜 수 없으나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에 맞서는 주인공의 비극을 직시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극복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으로 점철된 사랑을 감내하는 선남선녀의 비극적 운명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멜로(melo)’라는 장르 하나만으로는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 복합적인 경향이 대세인 드라마 환경에서 이른바 ‘정통 멜로’를 표방한 <천일의 약속>(김수현 극본, 정을영 연출)은 김수현 작가의 신작임에도 불구하고 방영 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화려한 볼거리에 자극적인 소재가 범람하는 드라마 환경에서 이미 수많은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하여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랑 이야기가 유효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작가의 필력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를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을 통해 기억의 문제와 결합시켜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으로 전이시키는 순간, <천일의 약속>은 시청자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삶의 궤적이 고통스럽고 힘겨운 시절,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여자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혹시 나도 그런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과 공포의 감정이 솟구친 것이다. <천일의 약속>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 이후 집을 나간 어머니를 기억에서 지우고 두 살 터울의 남동생과 함께 고모 밑에서 외롭게 성장한 서른 살 여자의 ‘사랑’을 알츠하이머라는 극적 장치를 통해 ‘기억’의 층위에서 새롭게 부각시키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성찰한 멜로드라마이다. 사랑이 아무리 닳고 닳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형상화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보여준 경우이다. 특히 약혼녀가 있는 남자와의 한시적 사랑이 파국을 맞는 상황으로 시작하여, 그들이 어떻게 가슴 졸이며 사랑했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보여주는 구성은 이타심(利他心)과 이기심(利己心)이 충돌하는 사랑의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헌신적인 순애보에 어울리지 않게, 그 파국의 시작이 대단히 자극적이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청춘남녀의 거침없는 애정 행각은 그들이 꽤 오래된 연인임을 보여주지만, 서로를 탐하는 그들의 몸짓 속에 틈입 되어 있는 불안한 기운은 슬픔의 강도를 올리면서 그들의 뜨거운 감정을 허허롭게 만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의 애틋한 사연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면서 쉽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구의 사촌여동생 그리고 사촌오빠의 친구’로 만나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나 그들의 사랑은 그 누구에게도 용인 받을 수 없는, 한시적 감정이어야만 했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성장하여 부모가 정해준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 한 남자, 남자에게 약혼녀가 있음을 알면서도 단 한 번만이라도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은 여자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파국이 예정되어 있었던 만큼, 언제든 헤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결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그들은 언제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했다. <천일의 약속>은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약혼녀와의 결혼 날짜가 잡혔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 남자의 괴로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결별을 준비하는 여자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다른 여자가 있어 결혼을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또 다른 여자의 슬픔 등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감정을 한 번에 끌어올리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저 사소한 개인의 낭만적 감정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멜로드라마의 사랑은 이렇게 인간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몰아가면서 진부하고 상투적인 감정을 인간적 고뇌로 승화시킨다. 특히 너무나 절실했던 사랑과의 결별 후에 알게 된 알츠하이머라는 질병으로 그 사랑에 관한 기억마저 지워질 것이라는 두려움에 자기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 여자의 처절한 몸부림을 인간의 실존 문제로 귀결시키는 작가와 연출자의 탁월한 감각이 아니었다면 <천일의 약속>은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츠하이머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헤어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물근성일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현실의 장벽을 하나씩 거둬내면서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 옆에 다시 서서 기꺼이 결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위대한 사랑의 해피엔딩과 더불어 알츠하이머라는 현실이 시작된다. 그들에게 예고된 힘겨운 현실 앞에서 사랑은 끝없이 진정성을 의심받으며 갈등을 유발한다. 그래도 흔들리지 않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론 존재감마저 지워버리는 ‘알츠하이머’라는 극적 장치를 활용하여 인간의 실존을 강조하는 역설의 미학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천일의 약속>은 그렇게 사랑의 본질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되묻는다. 멜로드라마에서 주로 다루는 사랑은 권선징악적인 해피엔딩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든 것과 직결되어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항상 현실 문제로 전이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강하다. 멜로드라마가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도 그래서이다. <천일의 약속>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통해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잃어버린 사랑의 진정성과 삶의 가치를 강조한 멜로드라마라면, 문학교과서에 시나리오의 일부분이 수록된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는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역설한 멜로영화라 할 수 있다. 소도시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는 한 남자가 죽음을 앞두고 만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그려낸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멜로영화의 흐름을 바꿔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정형화된 등장인물과 상투적인 서사 구조로 감정 과잉을 유발했던 기존의 한국 멜로영화와 달리,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삶과 죽음의 철학을 절제된 미학으로 표현한 멜로영화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한 남자, 가슴 설레는 사랑의 달콤함과 쓸쓸함에 일희일비하는 한 여자의 사랑을 담백하게 형상화한 <8월의 크리스마스>는 멜로 장르 관습에 충실한 영화다. 하지만 감정의 과잉 없이 담담하게 표현된 사랑 속에 죽음에 대한 따뜻한 응시의 시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철학적 성찰이 돋보이는 멜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불치병에 걸린 남자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절규하다가 영정사진을 준비하는 할머니를 통해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는 극적 상황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찬사가 결코 허사가 아님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사랑 때문에 행복한 기억으로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한 남자, 한 때의 풋풋한 사랑의 감정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한 여자의 짧은 사랑 이야기인 <8월의 크리스마스>가 왜 한국 멜로 영화의 차원을 한 단계 발전시킨 작품으로 평가받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드라마 <천일의 약속>과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 때 ‘타락한 비극’으로 불렸던 ‘멜로 장르’는 이제 더 이상 감정 과잉의 통속적인 극 양식이라 할 수 없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한 여자의 격정적인 사랑이나,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절제된 사랑 모두 우리의 황폐한 감성을 자극하면서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그렇게 우리를 감성의 바다로 이끈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잘 만든 멜로드라마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통해 무한 경쟁 구도 속에서 황무지로 변해버린 우리들의 감성을 되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윤석진(尹錫辰) 2000년 8월 한양대 대학원에서 「1960년대 멜로드라마 연구 - 연극 · 방송극 · 영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양대 국문과, 동국대 문예창작과, 인천대 국문과,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등에서 강의를 하다 2004년 가을학기에 충남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희곡과 영상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2005년부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드라마 평론을 연재하고 있으며, 2010년 8월부터 트위터(@kdramahub)에서 새로운 방식의 드라마 단평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