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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간직하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역사 속의 인물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말하는 거창한 이야기나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말하는 운명 같은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외롭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주는 이야기나 기쁠 때 누구보다 앞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거나 햇빛이 반짝이는 여행길에서 느끼는 감동, 아니 첫눈이 오는 날이라든지 비가 내리는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이어도 좋다. 어느 때이든지 ‘내 마음의 보석 상자’에서 살며시 꺼내어 미소 지을 수 있는 작은 이야기 하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영혼은 얼마나 따뜻해지는지….
어제 내린 비로 오늘 아침 기온이 급강하하였다.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길을 바람을 쌩쌩 가르며 달려와 교실의 온풍기며 난로를 켜서 아이들과 함께 언 손을 쬐며 녹이고 있는데 내 휴대전화의 벨이 울렸다. 영어타운 체험학습을 하려고 5학년 동순이를 데리고 고흥 읍내에 있는 고흥동초등학교 영어타운으로 출장을 가시던 김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신 것이다.
“선배님! 밖을 좀 내다 보세요.”
“아니, 왜요?”
“밖에 눈이 많이 내립니다.”
“네, 눈이 내리더군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까와는 다르게 거의 환상적입니다.”
“아, 그래요?”
반가운 마음에 밖을 내다보니 간간히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소복소복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야, 눈이 와요.”
“진짜 눈 맞지요?”
“야호!”
출근길에 함께 오면서 간간이 날리는 눈발을 보면서도 좋아하며 탄성을 지르던 은상이의 모습이 떠올라 은상이를 불러서 밖에 눈이 많이 내린다며 내다보라고 했다.
“애들아! 눈이 온다.”
“네~에? 눈이라고요?”
“그래, 눈이 많이 오네.”
“와우! 눈이다!”
“정말?”
“누나, 눈이 와. 지은아, 눈이야, 눈!”
“야, 눈이다!, 언니, 언니 눈이 와. 어서 나와 봐.”
“어, 그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언제 눈이 내리느냐며 성화를 대기에 이번 주엔 ‘눈이 올 것 같아요’라는 노래를 ‘12월의 노래’로 정하여 함께 부르기까지 하였던 아이들이다. 막상 눈이 내린다는 소식에 반신반의하던 아이들도 밖을 내다보고 나서야 그렇게도 고대하던 눈이 내린다는 사실에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펄쩍펄쩍 뛰었다.
우리나라 남쪽의 끝자락에 자리한 고흥반도는 겨울이 되어도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하는 눈을 보면 사람들은 눈길을 걱정하기보다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그처럼 기다리던 첫눈이 내리니 차분히 공부를 할 태세가 아니기에 아예 아이들을 불러 밖에 나가서 눈을 맞으며 놀다 오라고 하였다. 눈을 맞는 것도 좋지만 날씨가 몹시 추우니까 옷을 단단히 입고 나가라고 했더니 주섬주섬 목도리며 장갑을 챙기던 은상이가 장갑을 끼려다 장갑이 없는 지은이에게 저의 장갑을 주겠다면서 내게 묻는 것이었다.
“선생님, 지은이 장갑 빌려줘도 돼요?”
“왜?”
“지은이 장갑 없대요.”
“넌?”
“난, 안 껴도 돼요.”
“그래? 너도 손 시릴 텐데.”
“아뇨, 난 하나도 안 시려요.”
“왜, 안 시리긴?”
“괜찮아요.”
“그래?”
“네.”
“아~참, 그럼 지은에게는 내 장갑을 주면 되겠다.”
“네, 그래요? 지은아, 넌 선생님이 장갑 주신대.”
은상이와 내가 주고받는 말에 말똥말똥 쳐다보다 배시시 웃는 지은이에게 내 장갑을 찾아서 건네주었다.
지난 11월 14일 우리 학교에서 열렸던 학예회 때 ‘우리 집이 최고야!’라는 연극을 하면서 소품으로 쓴 아기돼지 목도리와 에버랜드에 체험학습 가서 사온 백호 마술사 머리띠에 원숭이 목도리까지 두르고는 양손에는 장갑을 끼어 단단히 무장을 하고서 팔짝팔짝 뛰며 밖으로 나가는 아이들을 보니 ‘내 마음의 보석상자’에 들어 있는 작은 이야기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며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67년 3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던 봄이었다. 내 기억에 의하면 내가 자란 고향도 여기에서 가까운 곳이라 지금은 겨울이어도 따뜻한 곳이지만, 42년 전 그때, 1학년 입학식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머니회의’가 열린 그날은 3월인데도 날씨가 꽤 추웠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고 4㎞ 쯤 되는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따라 집으로 가는 길엔 그날따라 싸락눈이 세차게 날리고 있었다.
면소재지에 위치한 학교에서 우리 마을까지 가는 길에는 산골짜기에 제법 큰 저수지가 두 개 있었는데 겨울이면 거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사람들은 그 바람을 호된 시집살이에 비유해서 ‘시어머니 바람’이나 ‘시아버지 바람’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세찬 바람에 날아와 볼을 때리는 싸락눈을 맞아본 사람을 알 것이다. 볼을 때리는 싸락눈발이 얼마나 아픈지를. 더구나 시아버지, 시어머니라고 불리던 그 매서운 바람에 날리는 싸락눈이라니…. 그날의 꽃샘추위는 이제 막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한 햇병아리 1학년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상당히 버거웠으리라. 더구나 어렸을 때 친구들에 비해 유난히 체구가 작았던 나는 그 날도 추위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자 걸음을 재촉하는 다른 친구들의 걸음을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뻔하다.
자꾸만 일행에서 뒤처지며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그때, 나의 손을 잡고 내 옆을 지켜주며 함께 가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와 같은 반이 된 우리 마을의 단요라는 친구였다. 단요와 나는 저만치 앞서가는 친구들 뒤에서 자꾸만 볼을 때리는 눈발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면서도 서로의 잡은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꼭 잡으며 있는 힘을 다해 친구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도 귀하기만 했던 목도리나 장갑도 하나 없이 그 매서운 눈바람을 맞으며 걸어가던 나는 얼마 걷지 못해 땡땡 얼어붙은 볼을 때리는 세찬 싸락눈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고 말았다. 나를 달래던 친구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웠는지 자신의 목에 감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내 목에 감아주었다. 따스한 목도리의 방어로 나의 울음은 그쳤으나 얼마를 가지 못해 이제는 친구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목에 있던 목도리는 다시 친구에게로, 또 얼마 못 가서 내가 훌쩍이면 그 목도리는 또 내 목으로…. 그렇게 목도리가 우리 두 사람의 목에 오가기를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다다른 마을 입구의 다리쯤에서 마지막으로 내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고 친구는 그동안 꼭 잡고 있던 내 손을 놓더니 집으로 뛰어가 버렸다.
혼자가 된 나는 땡땡 언 볼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가까스로 집에 도착하여 나를 반기는 아버지께 안기며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시절에 딸만 셋을 기르면서도 유난히 우리들을 예뻐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그 우람한 팔로 다정하게 나를 감싸 안으시고 큰 손으로 나의 등을 다독여 이불을 덮어주시며 방안에 피워놓은 화롯불을 뒤적여 온기를 높여 주셨다.
이글거리는 화롯불에 땡땡 언 손을 쬐며 몸을 녹이고 있는데, 단요가 자기네 집은 문이 잠겨 있고 아무도 없다며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친구 단요랑 함께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 호호 불어가며 군고구마를 먹었던 나의 어릴 적 아름다운 작은 이야기 하나.
살아오면서 난 해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겨울이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삼월이면 그때 그 일을 떠올리곤 했다. 마흔 살 무렵부터 우리 마을 어릴 적 친구들의 모임을 하게 되면서 만나게 된 친구 단요에게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내게 목도리를 씌워줄 생각을 했니?”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한 일이었음에도 잊고 살아온 듯 가물가물 하다고 했다.
‘선행을 베푼 사람은 잊어버려야 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은 꼭 기억하여야 한다’는 어느 성현의 말처럼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을 희생해가며 베푼 선행을 친구는 잊고 지냈지만 난 해마다 겨울이 되거나 내가 가르치는 나의 아이들에게 ‘친구들과의 우정’을 얘기할 때면 어릴 적 내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가 베풀어준 작은 선행 하나가 한 사람의 가슴 속에 얼마나 따뜻한 불로 남아 아름다운 보석이 되는지를 말해주곤 했다.
오늘 뜻밖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 첫눈을 맞으러 나가는 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장갑을 선뜻 내밀어 동생 지은이에게 사랑을 전하는 은상이의 예쁜 마음도 우리 지은이의 가슴 속의 보석상자 속에 오롯이 담길 것이다. 나는 지은이가 살아가면서 오늘처럼 소록소록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남녘의 작은 섬 우도에서 피워낸 아름다운 이야기를 꺼내어 고운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 귀여운 모습들을 놓치기가 아까워 얼른 사진기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