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자기전쟁규슈 답사 마지막은 조선도공 이야기입니다. 주지하시다시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 땅으로 많이 잡혀갔습니다. 왜 수많은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을까요?
마침 그때 일본에서는 다도(茶道)가 한창 유행했습니다. 16세기 후반 센노리큐라는 사람이 일본의 차문화를 다도로 발전시켰던 것이죠. 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제대로 된 찻잔 하나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인기 절정이었습니다. 특히,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찻사발은 평범한듯하면서도 오묘한 멋으로 인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것도 있습니다.
도자기는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영주들에게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자기를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도공들을 잡아가는 데 더더욱 혈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도공들을 집단적으로 거주시키며 감사와 함께 파격적인 대우까지도 보장하면서까지 하이테크 기술의 응집인 도자기를 만들도록 했던 것이죠.
7년여의 전쟁으로 인해 조선의 도자기산업은 크게 위축되었던 반면, 일본은 조선도공들로 인해 도자기산업이 싹트게 되었고 이후 국제적 정세를 잘 이용하여 중국을 대신하여 유럽에까지 수출함으로써 일본 도자기의 명성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7년여의 전쟁을 일컬어 ‘도자기전쟁’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규슈 곳곳에도 조선도공들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오늘은 사가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이삼평과 가고시마현의 대표적인 조선도공이었던 심당길의 궤적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삼평에 대한 논란

사가현 아리타나 이마리 마을에 들어서면 길거리에서 쉽게 도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하는 가게는 물론이고 다리 위 난간도 도자기로 꾸며 두었습니다. 이렇게 사가현이 도자기의 고장이 된 데는 이삼평의 공이 크다 하겠습니다.
이삼평은 일본 도자기의 시조[陶祖]라고 일컬어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 명성에 비해 알려진 자료는 극히 미미합니다. 이삼평이라는 이름부터가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그의 성이 원래부터 이씨 성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단지 조선도공의 대표자로 예우하는 차원에서 조선 왕실의 성을 따 이씨 성을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출신지를 놓고도 이견이 있습니다. 잠깐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이삼평 관련 내용을 소개해 드립니다.
…포로로 끌려간 기술자들 중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상도에서 끌려간 후 일본 규슈에 정착하게 된 도공 이삼평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6학년 1학기 사회과탐구 60쪽>살펴본 바와 같이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삼평의 출신지를 경상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출병 때 일본에 온 충청도 금강(金江) 출신의 삼평’이라는 일본 측 기록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금강을 김해로 추정하는 시각에서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금강을 금강(錦江)의 착오로 추측하고 그의 출신지를 충청도로 보는 경향이 더 우세합니다. 아리타와 공주에 각각 세워진 이삼평 기념비문에는 모두 충청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삼평과 관련한 논란은 또 있습니다. 일본으로 ‘강제적으로 끌려갔느냐’, ‘자발적으로 넘어갔느냐’는 문구 때문입니다. 논란이 되는 문구를 그대로 옮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리타에 있는 이삼평기념비로 오르는 계단 옆에 안내된 문구입니다. 2005년 이삼평공헌장위원회 명의로 세웠습니다.
아리타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삼평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金江)라고 지었다…다음은 공주 동학사 가는 길 박정자삼거리에 조성된 이삼평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지난 1990년에 세워진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 명의의 안내문입니다.
이삼평공은 임진정유의 난에 일본에 건너가 여러 도공들과 역경을 같이한 끝에 1616년 규슈 아리타 이즈미산에서 도석의 활용으로 일본 최초의 백자기 생산에 성공하여 일본자기산업 융성의 원조가 되었고…
공주 이삼평기념비의 안내문 앞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하나 더 서 있습니다. 지난 2001년 각 단체 명의로 세워둔 것입니다.
…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두 군데 비문 일부분에 역사적 왜곡이 있다는 점이다… (중략)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 근 십만 명에 이르는 도예공, 부녀자, 농민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이삼평님은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렇듯 이삼평에 대한 시각은 그의 위상에 맞게 다양한 시각으로 논의가 진행 중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일본 도자기의 시조라고 칭송받는 조선도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리타 도조 이삼평비에서아리타에는 이즈미 광산, 도산신사, 도조이삼평비, 이삼평의 묘와 그가 도자기를 만들었던 텐구다니 요터,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 큐슈 도자기 문화관, 또 다른 조선도공이었던 백파선의 묘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삼평은 1616년 백자의 원료가 되는 백토를 이즈미 광산에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못 구해 이리저리 찾아 헤맨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일본에서 백자가 만들어지는 전환기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지요. 처음에는 거대한 산이었다지만 현재는 흙을 파헤친 흔적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웃한 산으로 동굴을 파헤치듯 백토를 찾아간 흔적이 역력합니다. 아직도 고급도자기를 만들 때는 이곳의 흙을 아직도 활용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리타역사민속자료관에 가면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보급했던 오름가마 모형이나 도자기의 원료, 아리타 도자기의 변천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가마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었습니다.
도산신사는 도조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모신 곳입니다. 철길을 건너 신사로 오르는 입구에는 이삼평과 함께 응신천황, 그를 잡아간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배향되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리이나 고마이누 모두 도자기로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마이누는 신사 양쪽에 서 있는 개를 말합니다.
도산신사에서 만난 이삼평의 14대 후손은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신사에 모셔진 분이 이삼평”이라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백제왕족을 모신 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인물을 신으로 모신 곳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신사 뒷길로 5분 정도 오르면 도산 정상에 이삼평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삼평기념비에 서면 아리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첩첩산중 좁은 골짜기를 뚫고 곳곳에 도자기를 만드는 공방이 들어서 있습니다.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이런 오지에 저렇게 빼곡하게 집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요? 매년 도자기축제를 할 때면 몇 ㎞에 이를 만큼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하는데…. 14대 후손의 말대로 이삼평은 죽어서도 아리타 마을을 내려다보며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치 남해 다랭이 마을처럼 다닥다닥 지붕을 붙이고 들어선 발밑의 도자기마을이 모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의 노력이 아니었던들 불가능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삼평가가 계속해서 도공의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중간에 도예가의 맥이 끊어졌다가 13대부터 다시 도예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현재 14대 역시 도자기를 만들고 있고 우리나라 이천에서 1년 정도 도자기 공부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어서 그 이후 계속 도예가문으로 지속될는지는 의문입니다. 14대 역시 그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는 듯했습니다.
심당길과 심수관규슈 최남단의 가고시마현에는 심수관이 있습니다. 심수관이라는 이름은 세습명입니다. 그러니까 정유재란 당시 초대 심당길이 시마즈 영주의 군대에 의해 남원에서 잡혀 가고시마에 도착한 이래 줄곧 도자기를 만들어 오다가 12대부터 심수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현재는 15대 심수관이 가업을 잇고 있습니다.
처음 남원성에서 잡혀온 조선인들은 모두 16개 성씨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는 본능적으로 가마를 만들고 그곳에서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는데 일본사람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들이 살던 고향 산천과 너무 닮은 곳에서 정착을 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일본사람들도 살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이들이 정착했을 때는 일본의 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워서 시마즈 영주가 이지메 당하는 조선도공들을 안중에 둘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정세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영주가 나서서 심당길 일행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도자기 제작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겠노라고 직접 챙겼습니다. 자신의 직접적인 보호 아래 도자기를 만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영주의 이러한 주문에도 이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고향을 닮은 산천을 떠나기 싫었고, 둘째 이유는 가고시마에 같이 온 조선인 중에서 일본인의 앞잡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영주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조선인자치를 허용했다고 합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조선말을 그대로 쓰고 8월 15일 추석날이 되면 한복을 차려입고 단군왕검을 모시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조선말이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걸상을 ‘앉을 통’이라 하고, 막대기를 ‘찔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밖에 ‘가마’ ‘바닥’이라는 말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심당길을 시작으로 대를 이어 400년이 넘게 도자기를 계속 만들어온 이 가문은 제12대 심수관에 이르러 각종 세계 도자기 대회에서 큰 상을 받게 되면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습니다. 심수관도예촌 안에 있는 전시관에는 초대 심당길부터 15대까지 심당길 가문의 역사가 한눈에 펼쳐집니다. 특히, 12대 심수관의 작품이 많이 보이지요.
도예촌에 들어서면 입구에 조선 갓이 내걸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심당길이 썼던 망건 조각을 가보로 아주 귀하게 여기고 있다고 합니다. 오름가마를 보면 우리나라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조선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며 400년 넘게 조상이 물려준 성을 그대로 쓰고 조상이 물려준 물건을 아끼고 조상이 했던 일을 계속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 또한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00여 년 전 일본에 정착한 이삼평과 심당길. 그들을 비롯한 조선도공들이 있었기에 일본은 세계적인 도자기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는 도공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고려청자, 청화백자, 백자와 같이 찬란했던 우리네 도자기산업은 내외부적으로 수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겨 다시금 새로운 도자기역사의 한 축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경기도 세계도자비엔날레에 참가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니면 9월 강진청자문화제도 괜찮을 듯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