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슈는 일본의 관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이나 서양세력과의 접촉도 대부분 규슈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땅과도 아주 가깝습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 하카타 항까지는 배로 3시간이면 충분하니까요. 특히, 나가사키 현에 속하는 대마도는 배로 40여 분이면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규슈로 떠나는 여객선은 이런 지리적 여건에다 온천관광을 위한 사람들로 늘 호황입니다.
규슈는 모두 7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후쿠오카 현, 사가 현, 나가사키 현, 구마모토 현, 오이타 현, 미야자키 현, 가고시마 현이지요. 오키나와 현까지 포함하면 모두 8개의 현입니다. 규슈 곳곳에는 우리 역사와 관련된 유적지가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의 도작문화가 건너간 곳이며,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와 비슷한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백제 멸망 후 많은 백제 유민들이 건너갔고 북 규슈를 중심으로 살면서 동화되어 갔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두 전쟁을 거치면서 도자기를 비롯한 우리의 선진 문화가 약탈되어 전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우리 역사와 관련한 규슈의 우리 문화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건축한 나고야 성과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세운 구마모토 성과 울산마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조선침략의 교두보 나고야 성‘나고야’라 하면 1988년 우리와 올림픽 개최를 다투던 혼슈의 나고야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나고야[名護屋]는 규슈 사가 현 가라쓰[唐津]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고, 혼슈의 나고야와는 전혀 다른 곳입니다. 가라쓰 즉, 당진이란 지명은 당인(唐人)들이 드나들었던 곳이었음을 말합니다. 일본에 있어서 당인은 곧 조선인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다른 나라 사람들을 통상적으로 당인이라 일컬었습니다. 우리나라 당진과 같이 바다를 향해 돌출되어 다른 나라와 문물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지형입니다.
이곳에 세워진 나고야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머물며 전쟁을 지휘했던 왜군의 총사령부였습니다. 1592년 4월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왜군이 일본 본토를 처음으로 떠난 곳이 바로 이 나고야 성이었고, 전쟁 중 총사령부의 역할을 하다가 전쟁 후 도쿠가와 정권으로 바뀌면서 그 용도를 상실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성은 오사카 성이나 히메지 성 등과 달리 천수각 등 성내 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복원도 해 놓지 않고 성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지요. 그래서 처음 이 성터를 보았을 때 규모만 다를 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왜성과 무척 닮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 지역에 있던 영주들을 중심으로 이 성을 쌓게 하였는데 1591년 11월에 공사를 시작해 불과 5개월 만에 완성하였답니다. 전체 규모가 오사카 성과 맞먹을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큰 비중을 가졌던 곳인지 짐작이 갑니다.
‘히젠 나고야성도 병풍’을 보면 당시 성 주변의 풍경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성곽 주변 지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전국에서 소집된 조선 침략의 선봉장들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도요토미의 출동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적했던 시골 마을이 전쟁 준비를 위한 대규모의 병력이 진주하면서 순식간에 시끌벅적 성시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미로와 같이 휘어진 출입구를 지나 천수각이 있던 정상까지 올랐습니다. 현재 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이 한창입니다. 도요토미는 주로 천수각 아래 있었던 다실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눈앞에는 현해탄을 향해 뻗어나간 하토미사키[波戶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병풍 그림을 보면 그 일대에 수많은 진영(陣營)이 자리를 틀고 정렬되어 있습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 이키 섬이고 이키 섬 너머로 대마도가 있을 것입니다. 자를 대고 긋는다면 나고야 성-이키 섬-대마도-부산이 일직선상에 자리합니다. 조선을 공격하기 위한 최단거리였던 것입니다. 처절했던 울산왜성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가토 기요마사도, 순천왜성 전투에서 이순신의 수군에 쩔쩔매던 고니시 유키나와도 대마도와 이키 섬을 거쳐 이곳 나고야 성으로 돌아왔을 터입니다. 그 길은 포로로 잡혀온 수많은 조선인들의 눈물 어린 여정이기도 할 테지요.
흥미로운 것은 성벽 모서리 부분이 공통적으로 많이 파괴되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훼손하였다는 것인데요, 현지 안내원의 말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각 영지로 돌아간 영주들이 자신들의 영지에서 가져왔던 장비나 재료들을 다시 가져갔다고 합니다. 심지어 쓸만한 돌도 떼어내 가져갔다고 하네요.
왜군의 본거지에 들어선 박물관사가현립 나고야성 박물관은 이 성터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있으며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교류사’를 주제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박물관 건립 취지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사람들 사이에는 오랜 교류의 역사가 있습니다. 문록·경장의 난(임진·정유재란)은 그 관계를 한때 단절시킨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나고야성 박물관은 이 전쟁의 반성 위에서, 나고야성 유적을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오랜 교류사 가운데에서 이해하며 그 역사적 위치를 밝힘으로써 앞으로 양쪽의 교류․우호의 추진 거점이 될 것을 지향하고 있습니다.전쟁을 반성한다는 의미로 박물관을 짓고 양국의 미래에 긍정적인 장으로 자리 잡고자 건립하였다는 취지가 그럴 듯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국어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한국인 국제교류원을 두어 박물관 안내를 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침략을 정당화하고 전쟁을 소재로 관광 상품화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듭니다.
상설전시실은 크게 ‘나고야성 이전’, ‘역사 속의 나고야성’, ‘나고야성 이후’, ‘특별사적 나고야성터 및 진영터’ 네 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습니다. 전시실을 들어서면 중앙에 큰 병풍 그림이 눈에 띄고 그 아래에는 병풍 그림을 바탕으로 한 모형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그 병풍 뒷면에는 낯익은 고려불화가 눈에 띕니다. 양류관음상인데 어찌 된 연유인지 먼 이곳까지 흘러왔네요.
‘나고야성 이전’이라는 주제에서는 나고야성이 세워지기 전 우리나라와 일본의 교류를 상호 비교해 두었습니다. ‘역사 속의 나고야성’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실상과 관련한 자료와 나고야성과 관련한 자료를 만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인 진주박물관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자료가 제법 다양합니다. 거북선 모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 왜군의 침범도, 부산진순절도,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바닷가에 쌓았던 왜성, 울산성전투도, 평양성탈환도, 코 무덤, 이순신 관련 자료, 타루비 탁본, 조선에서 건너간 도자기, 전쟁 후 포로 등에 대해 설명해 두었습니다. ‘나고야성 이후’에는 조선통신사의 왕래, 왜관 설치, 성신외교를 주창했던 일본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별사적 나고야성터 및 진영 터’에서는 이 성의 발굴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그림을 두고 붙인 이름이 다릅니다. 양국 간 시각차를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이를테면 ‘평양성탈환도’를 그들은 ‘평양성공방도’라고 부르고 있고 ‘울산성 전투도’를 두고 ‘조선군진도’라 해서 소수의 왜군이 개미떼 같은 조명연합군에 둘러싸였고 그 싸움에서 살아났음을 은근히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이나 포로로 잡혀간 강항, 귀 무덤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일본만의 시각을 벗어나려고 시도한 점은 발전적인 시각이라 하겠습니다. 또 일본과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를 비교해 두고 그 내용을 비교하게 한 점도 주목되는 부분입니다.
울산마찌와 구마모토 성

규슈지역에는 우리나라와 연관이 있는 지명이나 상호가 많습니다. 백제역, 백제마을, 고려교, 한국악 등등. 그런데 혹시 울산마찌(蔚山町)라고 들어 보셨나요? 구마모토에 ‘울산’이 있다는 말입니다. 울산마찌는 우리나라 울산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지난 1965년에 울산마찌가 신마찌(新町)에 편입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울산마찌라는 전차역이 남아 있고 일대 가게 간판이나 버스 정류장 등에 울산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여기 구마모토는 가토 기요마사의 영지였습니다. 그가 울산에 머물다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도공, 축성 기술자, 기와 및 제지 수공업자 등 울산 지역의 기술자들을 대거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구마모토 성을 쌓는데 활용했고 그들이 사는 마을을 지정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울산마찌로 이어졌던 것이죠.
그가 울산왜성에서 치렀던 전투는 최악이었습니다. 나베시마 영주가 당시 전투를 회상하여 그리도록 한 울산성 전투도(도산성 전투도)를 보면 왜군은 조명연합군에 의해 포위된 채 허기져 쓰러져 있고, 배가 고파 말을 잡아먹는 모습도 보입니다. 구마모토가 말고기로 유명한 것이 여기서 유래하였다고 할까요. 당시 성벽의 흙은 물론 심지어 인육까지 먹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특히, 물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은 더욱더 절망적이었습니다.
나베시마와 함께 울산성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에 돌아와 구마모토 성을 쌓으면서 제일 염두에 둔 것이 바로 물이었습니다. 성 안에 모두 120여 개의 우물을 파고 해자와 같은 수리시설도 다듬었습니다. 구마모토가 물의 도시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울산성 전투와 무관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은행나무도 곳곳에 심었습니다. 비상시 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 수나무만 심었다고 하네요.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지역에 머물면서 서생포왜성과 울산왜성을 쌓았습니다. 또, 호랑이를 잡아 도요토미에게 진상하기도 했고 한 그루의 동백나무에서 다섯 색깔의 꽃이 핀다는 희귀한 울산동백을 캐어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조선에 머물면서 먹었던 엿을 응용하여 비상식량으로 엿을 준비하였다는데 지금도 구마모토는 조선 엿이란 이름으로 일본식 입맛에 맞는 엿이 팔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서생왜성에서 유래한 서생(西生)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도 구마모토에서 살고 있습니다.
2007년 올해는 구마모토 성이 축성된 지 400주년이 됩니다. 시내 곳곳에는 축성 400주년을 기념하는 홍보물이 내걸리고 구마모토 성 내부에도 특별행사를 개최하기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계절별로, 월별로 지속적인 축하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성은 단순히 돌을 다듬어 쌓은 성이 아니라 울산에서 끌려간 기술자들의 피와 눈물이 함께 쌓인 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울산 사람으로서 이곳을 방문하노라니 복잡 미묘한 감정이 솟아오르는 모양입니다.
국민가수 조용필이 부른 노래 중에 ‘간양록’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유학자 강항의 이야기를 읊은 노래입니다. 나고야 성과 구마모토 성을 돌아보면서 내내 그의 노래가 입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애절한 감정을 넣어 강항의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러 봅니다. 독자 여러분도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국 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어야 어야어 어야어야아~~~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 그린 뜻 바다 되어 하늘에 닿을 세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 어야어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