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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박열의 드라마 같은 인생

해마다 광복절 무렵이 되면 우리는 우리 나라의 존재과정을 더듬어 보게 된다.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를 보면 부부가 함께 투쟁한 예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물론 여자가 독립운동을 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럴 경우 그 여자는 미혼이었거나 아니면 남편과 사별한 여자들이었다.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을 한 예를 굳이 찾아보자면 그 한 예로 박열의 예를 들 수가 있다. 박열의 아내는 일본 여자였다는 점에서 또한 특이하다.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은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로 온 후에는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로 퇴학을 당한 바도 있다. 그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했는데 이때 동갑인 일본 여자 가네코(金子文子)를 만나 무정부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들은 사상이 같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사이어서 1922년 결혼을 했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이 부부는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한 생활을 했다.

이 무렵 일본 탄광에서 일하던 한인 광부들의 학살사건이 일어나자 이때부터 박열 부부는 무정부운동에서 조선 독립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박열의 투쟁이 너무도 과격한데 놀란 일본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알선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박열이 21살 되던 1923년, 이들 부부는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동지 1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오랜 예심과 하급심을 거쳐 1926년 대심원에 출정한 박열은 공판에 앞서 다섯가지를 요구했다. 첫째는 공판시에 피고니 심문이니 하는 용어를 쓰지 말 것, 둘째, 나는 조선 사람이니 한복을 입도록 할 것, 셋째, 나의 의자는 재판관과 같은 높이의 것으로 줄 것, 넷째, 나의 최후 진술은 선언서로 대신하도록 할 것, 그리고 다섯째, 우리가 비록 부부라고는 하나 아직 법적 절차를 밟지 못했으니 공판 당일 재판정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허가해 줄 것 이었다.

이어서 가네코는 우리는 부부이고, 모든 일은 함께 추진하였으나 사형이든 무기 징역이든 형량을 똑 같이 해주어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재판장은 박열의 요구사항 중 첫째 이외의 것을 승락했다. 1926년 1월 16일 일본 대심원에서 사모관대를 쓴 박열과 원삼 쪽두리를 쓴 가네코의 결혼식과 더불어 언도공판이 있었다. 언도는 가네코가 원했던 것처럼 두사람 모두 사형이었다. 그해 7월 가네코 여사는 몸에 태기가 있어 일본 법정을 발칵 뒤집었으며 무슨 이유에서였든지 그는 옥중에서 자살을 하고 말았다.

이듬해인 1927년 박열은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복역하다가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였는데 그가 복역한 22년 2개월은 우리 나라 독립투사들의 복역 중에서 가장 긴 기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옥한 박열은 그후 초대 재일거류민단(현재 한국민단) 단장이 되었다. 그는 1948년 근 30년만에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북으로 납치되어 세상을 떠났다.

박열의 일생을 보노라면 그것은 하나의 극적인 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조국이 있고, 애틋한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고, 수모가 있으며 또한 영광과 비참이 줄무늬처럼 이어지고 있는 박열의 일생이야말로 1900년대 전반기의 한국사를 대변하는 하나의 드라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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