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는 서구 선진국인 다른 나라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 스마트 교육이 아닌가 생각된다. 스마트 교육에서 가장 큰 환영을 받는 주체는 단연 학생들이다. 무엇보다도 학생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론적으로 모두가 학습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한다. 또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은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고 싶어하지 않은 것 같다. 오랫동안 선생님이 설명하고 듣는 것에 익숙해서일까? 아직도 선생님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의문이 간다. 그런데도 스마트 교육 시대에는 학생들이 교육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것은 학생에게 교육의 모든 책임만 지우는 것은 아닌가 더 두렵다.
스마트 교육에서 지향하는 학생의 자리는 유아 독존적 생명을 가진 학생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디지털 교과서가 서책 교과서와 가장 다른 점은 모든 학생에게 맞춤형으로 꾸며진다는 것이다. 학생 개개인별로 다른 흥미와 수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교육 콘텐츠가 디지털 교과서를 통해 활용될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만의 콘텐츠를 교사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스스로 만들어 것이며, 다시 그것들은 다른 학생들과 협동해 새로운 컨텐츠로 거듭날 것이다.
학생의 자리는 학생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곳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아직 어리기에 스스로 잘 하는가에 대한 반성이 되고 있는가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지구조의 변화를 이루기보다는 이는 프로그램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진 자료이기에 다른 사람의 견해나 이미 그 컨테츠를 만든 사람의 수준을 능가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하는데는 한계가 따른다. 따라서 친구들과의 의문점에 대한 토론과 선생님의 확인과 격려가 쪽 필요하다.
니콜라스커는 컴퓨터와 디지털 문명이 등장한 이후 인간은 점점 더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플라톤에게 글자로 쓰기 시작하고 글을 읽기 시작하면 말을 하고 말을 듣는 능력이 퇴화돼 급기야 인간에 내재된 고유의 이데아를 회상하고 지식을 아는 기쁨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과 마찬가지다. 과연 그러할지 아니면 플라톤의 글쓰기가 우리에게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전승해 인류 문명의 새로운 세기를 창조했듯이 전혀 새로운 그러면서도 좀 더 풍요로운 세기를 창조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맥루한이 주장하듯 서구 세계가 이룬 성과는 분명히 문자 문화의 경이적인 가치로 인한 것이며, 인류의 역사는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반복되는 인쇄물 형태의 문자를 통해 인간은 획일화, 전문화, 단편화의 과정을 거쳐왔으며, 확실히 현재 서구의 발전은 인쇄와 표음문자의 전문화, 인과성의 논리, 단편화의 기반 위에 서 있음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쩌면 인류는 전문화된 테크놀로지와 가치 체계를 손에 넣기 위하여 너무도 많은 것을 희생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류사가 늘 그래왔듯이 종말의 직전까지는 번영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에 바벨탑이 무너지고 노아의 대홍수가 나기 이전까지는 적어도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디지털 혁명은 분명 또 다른 이로움과 번영을 가져온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적어도 종말 이전까지는 인류는 달리는 기차를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눈앞에 벌어지는 디지털 혁명의 속성이 어떤 것인지 사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글쓰기의 미래에 대해 알지 못했듯이 우리는 디지털 혁명의 미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 냄새를 약간 느끼고 그림자를 살짝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처럼 어느 누구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길을 헤쳐나가야 하는 운명을 걸머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