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만나야 하는 아이들은 너무나 많다. 유난히 본교같이 천여명이 넘는 대형학교에서는 아이들 파악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관심이 없으면 이름도 외워지지 않고 시간이 흘러도 아이들의 행동 변화에는 무감각하게 된다. 그렇게 한 학기가 지나고 아이들과는 냉냉한 관계 때문인지 학교생활을 했지만 마음 속은 공허함으로 가득찰 것이 뻔하다. 그런데 이같은 교육을 하는 삶의 과정에서 아이들과 접하면서 불행하게도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늪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늪’이란 비유적인 표현이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부정적인 감정이나 기분, 또는 꼬인 마음이나 잘못된 생각 등을 일컫는 말이다.
사실 사람이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심리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인 기분에 휩싸이는 순간, 우리가 그 기분에 자꾸만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아무리 애써도 쉽게 벗어나기가 힘들다. 도대체 우리는 왜 자꾸만 감정의 늪에 빠지는 것일까? 과연 부정적인 생각을 멈추고 감정의 늪을 빠져 나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까?
문제는 이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늪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이며, 우리는 왜 여기서 빠져나오기가 힘든 것일까? 왜 부정적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을까?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빠진 늪은 상대방이 우리를 그런 상태로 만든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늪은 우리가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보이게 되는 리액션(Reaction. 반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부정적인 태도와 관점에 바탕을 둔 크리에이션(Creation. 창조, 창출)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이를테면 A씨가, 어느 기분 좋은 저녁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 마침내 웨이터가 나타났을 때는 A씨가 인내할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긴 때였고, A씨는 이미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A씨는 보통 때에도 음식점에서 제때에 적절한 서비스를 받지 않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하는 경험을 했다. 주문을 늦게 받으니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그만큼 더 기다려야 한다. 결국 A씨는 웨이터에게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 ‘형편없는’ 레스토랑을 나와 버리고, A씨의 애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며 그를 따라 나선다.
아마도 그녀는 A씨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말하거나, ‘불쌍한’ 웨이터 편을 들 것이다. 그러면 A씨는 애인과도 다투게 되고, 그날 밤은 완전히 망쳐버리게 된다. A씨는 늪에 빠진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로지 ‘멍청한’ 웨이터 때문이라고, 자신은 외부 상황의 ‘희생자’이며, 애인조차도 이런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다. 다시 말해, 자신은 조금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A씨는 아마도 다음 날 절친한 친구에게 어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할 것이고, 그러면서 ‘희생 타령’을 할 것이다. 친구는 A씨를 ‘너무도 잘’ 이해해 주며 A씨의 말에 맞장구를 쳐준다. A씨는 외부 상황의 희생자로서 ‘부당한 세상’의 늪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이 사건 전반에 걸쳐 ‘부당한 세상’의 잘못은 사실 거의 없다. A씨는 그 상황에서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습관적인 반응 방식을 버리고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A씨가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을 인식하는 순간, 늘 그래왔듯이 화가 치밀어 오르려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을 이전과는 다르게 이해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웨이터가 자신을 못 보았거나, 마침 동료와 몸이 아픈 부모님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A씨는 담담하게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웨이터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A씨는 결코 늪에 빠지지 않는다. 혹은 늪으로 추락하기 직전에 재빨리, 그러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방향을 틀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빠지는 부정적인 감정의 늪은 그 대부분이 우리 스스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제 문제는 늪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일정량의 늪은 우리의 삶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다. 문제는 한 인간을 에워 싼 늪의 크기와 깊이, 그리고 늪의 발생 빈도다. 그러므로 해답은 늪에 섬을 만드는 일, 그리고 혼자 힘으로 늪에서 빠져나오는 법과 너무 자주 늪에 빠지지 않는 전략을 배우는 데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교사의 마음에 들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얽매이다 보면 문제의 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에 변화가 필요하다. '욱'하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아이들은 존경심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교사는 감정 노동자임을 인식한다면 아이들로 부터 "한 둘의 선생님은 학생의 의견을 잘 듣지 않고 혼자 욱하시기도 하신다. 좀 짜증날 때가 있다"는 지적은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을 힘들게 만드는 것은 아이들인가? 아니면 내 감정의 늪인가를 잘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결국,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