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2011.12.27) 보도에 따르면 지난 한 해 국내외 상영 영화는 582편이다. 연 인원 1억 5638만여 명(2011.12.26 기준)이 극장을 찾았다. 거기엔 이른바 대박 영화도 있었고, 개봉되자마자 급히 사라져간 작품 또한 많았다. 관람객은 10대 소녀들부터 6, 70대 노년층도 있었다. 소설 등 문학에 비해 온 국민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장르가 영화임이 새삼 확인된 셈이라고나 할까.
내친김에 잠깐 영화판부터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듯하다. 지난 해 한국영화 점유율은 51.9%였다. 1위 자리는 779만 명의 ‘트렌스포머3’에 내줬지만, 서울신문(2012.1.20)에 따르면 747만 명으로 흥행영화 2위를 차지한 ‘최종병기 활’을 비롯해 ‘써니’(736만 명), ‘완득이’(530만 명), ‘조선명탐정:각시투구꽃의 비밀’(478만 명), ‘도가니’(466만 명) 등의 선전은 주목할 만 하다.
당연히 한국영화 점유율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51.9% 기록이 4년 만에 이뤄진 50%대 복귀라 그렇다. 곽영진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은 “50%대를 회복한 것은 한국영화산업이 그 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는 청신호”라 말했지만, 100억 원 이상 쏟아부은 소위 대작영화 ‘퀵’, ‘7광구’, ‘고지전’ 등은 흥행에 실패였다. 특히 한국영화사상 최고로 많은 제작비(순제작비만 280억 원)를 투입한 ‘마이웨이’의 흥행참패는 또 다른 과제를 안긴 셈이 됐다.
어쨌든 2011년 한국영화는 뚜렷한 특징을 드러냈다. 원작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대박행진도 그중 하나이다.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와 김려령 청소년소설 ‘완득이’가 그것이다. 관객동원에서 ‘완득이’가 ‘도가니’보다 앞서지만, 각각 15세 관람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인 점을 감안하면 사정이 달라진다. 10대 학생들 관람이 봉쇄된 ‘도가니’가 원작소설 영화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일단 ‘도가니’는 원작소설의 후광에 빚진 영화라 할 수 있다. 2009년 6월29일, 인터넷 포털 ‘다음’에 6개월 여 연재한 후 출간된 소설 ‘도가니’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 이미 50만 부쯤 팔린 베스트셀러이다. 그리고 영화 대박에 힘입어 다시 각광을 받았다. 세계일보(2011.12.31)에 따르면 2011년까지 누적 판매 부수는 80만 부이다. 가히 2011년은 ‘도가니’의 해였다 해도 크게 시비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도가니’(감독 황동혁)는 광주 인화학교에서 실제 있었던 청각장애학생 성폭행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아마 소설을 이미 읽은 관객이라면 원작과 다른 영화 내용에 다소 의아했을 것이다. 주인공 강인호(공유)와 서유진(정유미)의 관계(소설에서 둘은 대학 동기로 나온다.)라든가 딸을 어머니가 키워주는 홀아비로 둔갑시킨 강인호 등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어서다.
물론 그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하나의 소설이 발표되면 작품이 작가만의 것이 아니듯 소설과 영화를 똑같이 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로서만 ‘도가니’를 본 관객들을 충족시킬 수 있느었느냐에 달려있다. 원작소설보다 흡입력이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영화 ‘도가니’ 역시 괜찮아 보인다. 오히려 시각적 영상이 드라마틱한 효과의 극대화에 기여하고 있어 영화의 사회적 힘을 느끼게 한다.
시각적 영상이라고? 그렇다. 인쇄매체인 소설이 할 수 없는 영화만의 특장(特長)은 청각장애 학생들에 대한 성추행 및 성폭력 실상을 보다 리얼하게 담아내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연두·유리·민수, 그들의 법정 증언도 그 중 하나이다. 연두의 교장 이강석(장광) 지목하기라든가 특히 결말에서 민수의 박보현(김민상) 칼로 찌르기(이것도 소설엔 없는 내용이다.) 등에선 어쩔 수 없이 콧등 시큰해지는 성선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경험은, 그러나 단순한 동정심 따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런 경험은 강인호와 서유진 등을 ‘우리 편’처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니다. ‘우리편’의 진실 밝히기를 가로막고 있는 것들(교육청, 경찰, 동창회, 교회)이 마침내 법원과 한통속이 돼 유린하고 있는 사회정의 때문이라 해야 옳다.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가며 민수의 죽음을 알리는 강인호와, 그 와중에 연행되어 가는 서유진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다름아닌 공분(公憤)이다.
그렇듯 영화는 강인호와 서유진이 사회라는 거대 괴물과의 진검 승부에서 패배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영화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 재판에서 교장 이강석, 행정실장 이강복, 박보현 교사 등 가해자들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나서다. 그들의 룸살롱에서의 잔치와, 강인호·서유진의 헤어짐 대비, 시위와 물대포, 그리고 그런 광경을 팔짱낀 채 구경하는 일반시민 등의 장면도 패배를 인정하라는 앵글처럼 보인다.
과연 강인호·서유진은 저들에게 진 것일까? 물론 아니다. 연두, 유리가 “우리도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작과 다르게 민수를 복수하게 해 박보현과 함께 죽는 걸로 처리했지만, 청각장애이면서 성폭행까지 당한 연두, 유리의 그런 인식을 놓치지 않는 등 ‘의도의 오류’를 범하지 않은 탄탄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이유이다.
관객의 공분과 ‘장애인도 똑같은 인간’이란 깨달음은 마침내 영화의 사회적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다. 실제로 광주 인화학교 성폭행사건 재수사, 학교 폐쇄, 13세 미만 아동대상 성범죄 양형기준 대폭강화, 장애인대상성범죄 양형기준 신설에 이어 일명 ‘도가니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도가니법은 성범죄자의 사회복지법인 근무제한, 정부의 사회복지시설 영업정지․폐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모두 ‘도가니’의 사회적 파장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기쁜 것은 뜨거운 관객 반응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일반은 영화라는 오락을 통해 골치 아프거나 심각함에 빠지려 하지 않는다. 유쾌, 통쾌하거나 그저 시간죽이기, 그것도 아니면 사교용 정도로 영화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나 한국 코미디영화들이 관객동원 면에서 강세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도가니’는 이를테면 치열한 사회현실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흥행지표를 갖게해준 영화인 셈이다.
그렇다고 ‘도가니’에 대해 전혀 불만이 없냐면 그렇지는 않다. 우선 ‘안개’와 ‘고요’라는 소설에서의 주요 장치가 영화로 옮겨오면서 너무 미약해졌다. 초반과 결말 부분에서 장애학생들의 온갖 고통이 암시된 안개장면이 있긴 하지만, 소설에서처럼 긴밀하기보다 사건과 따로 놀고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고요’는 강인호와 서유진이 겪는 좌절과 분노를 상징하고 자애학원에 드리워진 온갖 악행의 그림자를 걷어 내는 열쇠인데, 영화에선 아예 그게 없다.
어려운 수화 연기를 무난하게 소화해낸 아역 배우들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15세라는 나이에 비해 너무 작은 애들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혹 더 어리게 하여 공분의 극대화 내지 선정성 배제를 노린 것인가? 대학 동기인 강인호와 서유진을 생판 처음 만난 사이로 각색한 건 아무래도 좋다. 그런데 그럴 듯한 사건 진전도 없이 갑자기 강인호가 서유진을 반말로 대하고 있어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좀 아쉬운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