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자란 시대와 오늘 우리 학교에 나와 공부를 하고 있는 시대는 너무나 많은 것이 다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을 교육하는 중심축에는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추어 잣대를 대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이다. 우리의 시대는 학교가 모든 정보의 보고였고, 한마디로 학교 선생님이 아니면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다. 학교는 모든 선진적인 것을 베출어줄 위대한 보물 창고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회가 다양화되고 먹을 것이 충족되는 풍요한 시대이다. 따라서 신세대에게 학교를 더 이상 성스러운 곳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서서히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학교를 기피하는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담임교사로부터 결석이 잦은 아이가 있어 집에 연락을 했더니 오늘도 배가 아프다거나 속이 좋지 않다는 등 뭔가 분명하지 않은 이유를 대며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 찾아갔을 때 마지못해 얼굴을 내민 아이는 기운이 좀 없어 보였지만 등교를 못할 정도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럴 때 교사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많이 할까 생각해보면 거의가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거지?”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말에는 담임으로서 자기 반에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초조감이나 설득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아이에 대한 짜증스런 마음이 담겨있음을 발견한다. 이런 선생님의 질문에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앞서 살펴 본 학교에서 가치를 찾지 못하고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선생님의 물음에 “학교는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학원에서 공부하니까 상관없어요. 앞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할 거예요” 등으로 대답할 것이고 비행, 불량 경향의 아이들은 교사에게 적당히 대꾸하면서 스스로 학교가지 않는 이유를 이야기할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등교를 재촉하는 교사의 자극에 크게 위축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심리적인 요인으로 학교의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보통 증세가 시작되기 전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극한 상황까지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어떤 계기가 있어 등교를 거부한 것이다. ‘난 틀렸어’하는 생각에 고민하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아이에게 “어째서?”라고 물어봐야 교사가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이 자신도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는 갈등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에 이러한 교사의 질문은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는 셈이 된다. 이런 말은 교사가 해서는 안 될 말(금구)의 대표적인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는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기초 지식을 갖추고 평소에 아이를 잘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심리적인 요인으로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에게는 여러 교사와 협조하면서 적절하게 대처해야 한다. 아이와 대면할 수 있으면 상황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도록 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남자아이라면 “운동장에서 캐치볼이라도 할까?”라고 유도해 보고 아이가 승낙하면 함께 놀이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아이와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데 힘쓰는 것이 바람직하고 기본적인 방법이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네가 “고민에 빠져 있는 것 같구나. 괜찮다면 무슨 고민인지 이야기해주지 않을래? 선생님도 같이 생각해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