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02 (수)

  • 구름많음동두천 27.7℃
  • 흐림강릉 29.4℃
  • 구름조금서울 29.1℃
  • 구름조금대전 30.2℃
  • 맑음대구 32.3℃
  • 연무울산 29.4℃
  • 맑음광주 31.6℃
  • 구름조금부산 26.6℃
  • 구름조금고창 32.1℃
  • 맑음제주 29.6℃
  • 흐림강화 26.9℃
  • 구름많음보은 28.2℃
  • 구름조금금산 30.3℃
  • 구름많음강진군 30.8℃
  • 구름조금경주시 32.9℃
  • 구름조금거제 28.1℃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국제

<교육100년 교사100년-4> 46년∼80년대 초의 학교

"우리나라 학교에는 '표정'이 없다"
동일 설계도로 전국에 기성품 양산
공사·유지관리비 절감방안만 고민

우리는 항상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과거나 현재의 교육이 못마땅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1946년의 美軍政 시기부터 학교교육의 교육목표는 '민주화 교육', '개별화 교육', '자발적 학습방법' 등이었고 이 원칙과 목표는 현재까지 변한 적이 없으며 불행하게도 제대로 실천조차 못한 것이 사실이다.

48년 8월 정부수립. 기쁨과 기대는 컸으나 경험과 가진 것 없는 정부는 교육목표만은 皇國臣民化 시대의 것에서 벗어나 자주국민으로서의 위신을 세웠었다. 그러나 이를 담을 교육환경은 일제시대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고 발전을 도모하기도 전에 6.25 전쟁으로 인해 상황은 더욱 절망스럽게 되고 말았다.

50년 6월 1일부터 실시하려던 균등교육(의무교육)은 6.25로 인해 중단됐으나 52년부터 연차적으로 실시, 59년에는 취학률이 96%까지 달하게 되었다. 교육환경을 구축할 여유도 없이 급증하는 학생수를 감당하게 된 것이다. 파손된 학교복구에 이어 제한된 대지와 부족한 예산으로 '어떻게 하면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만이 당면과제가 되어 교육목표, 교수·학습방법, 학생의 개성 등을 고려한 학교 건축계획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60년 5월 국민학교 시설기준 규정(문교부령 제 12호)이 마련되고서야 몇 차례의 표준설계도를 작성, 교육환경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표준설계 전국적용은 지역특성이나 대지여건에 관계없이 학생수용만을 위해 동일한 설계도를 가지고 전국 어디에나 同一하게 짓는 기성품을 만들어냈다. 이로써 한국의 학교건축은 유니폼 입은 내용 없고 표정 없는 모습을 갖게됐다.

수용정책 우선의 교육환경은 동물의 "성장과 환경"과의 상호관계성 연구 실험에서도 나타난다. 동일면적에 5∼6배가 함께 자란 동물들은 많은 문제점을 갖는다. 즉 적정크기의 공간에서는 성장이 잘되는 것에 비해 밀도가 조밀한 공간에 사는 동물들은 성장과 신경에 문제를 가져와서 죽거나 싸우거나 성장을 멈추는 결과를 갖는다는 것. 우리의 교육환경은 과거 30년 동안을 정상적인 교육환경 밀도의 5배 정도에서 교육이 이루어져 왔다.

60∼80년대의 우리의 교육환경은 이렇게 열악했다. 이는 또한 교육목표, 교육개혁 등은 말뿐인 정책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그 시대 우리의 정책과제는 제한된 대지에 가장 경제적인 학교를 지으려면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구조와 재료, 형태를 가져야 되는가' 였다. '어떻게 하면 교실 1개의 공사비가 가장 적게 드나', '유지관리비는 적게 들 것인가', '금년예산에서 교실을 몇 개 증축할 것인가' 였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증축한 곳에 균열이 가고 비가 새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지붕과 벽체는 얇고, 창문은 얇은 유리(3mm)창에 틈새에서 황소바람이 들어오고 교실 가운데 작은 조개탄용 난로가 고작인 난방에 의존한 교실환경에서는 햇볕에 옹기종기 모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몸은 움츠려들고 정상적인 학교생활은 기대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여기에 비해 교실 천장 높이는 강제로 3m로 해 비효율성을 보여주었다. (2.5∼2.7m가 적정한데 3m의 교실 체적은 커서 춥고, 공사비도 많이 들고, 심리적으로도 안전성이 없는 근거 없는 높이임) 한 교실의 크기는 40명 내외가 적당한 면적에 70명까지 수용하는 교실규모 역시 변함이 없었다.

60, 70, 80년대에 각각 몇 차례 학교건축 표준화 설계가 관 주도로 이루어졌으나 그 근본 평면형태나 배치방법 등은 변함이 없고 단지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교실동 내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수거식 변소로서 냄새를 교실동과 격리시켜야 하므로 별동으로 건축해야 하는가(70년대 초)의 차이만 있었다. 70년대 중반부터 별동이지만 수세식 화장실이 건축되기 시작했고, 80년대가 되어서야 본교사동 속으로 배치, 짧은 동선으로 사용하기 편하게 설계되어졌다.

배치형태는 운동장을 가운데 두고 외곽으로 교사동을 둘러서 ㄱ, , ㅁ 字 형으로 지었는데 교실이 많이 필요한 학교일수록 ㅁ字에 가까운 아주 환경이 나쁜 배치를 할 수밖에 없다. 편복도(한쪽에 복도, 한쪽에 교실) 구성은 皇國臣民化 시대의 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외부형태는 극히 제한된 기둥과 보와 창문만으로 가장 간단한 형태로 시작해 처마모양으로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조형적인 디자인은 생각할 수 없었다.

색채는 황토색의 페인트로 전 교사를 동일하게 칠해(60년대) 운동장 땅 색과 교사 건축 외부의 색이 조화가 되었다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70년대 중반부터 외부를 회색으로 칠하고 부분적으로 벽돌을 섞어지어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회색 빛의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의 생활을 하게 되는 좋지 않은 환경의 연속이었다. 70년대 중반부터 강남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강북 도심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중심에 있는 중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 80년대 초 강남지역에 신축 학교가 생기게 된다.

이들은 새로운 대지에 처음부터 종합계획을 해 지어지는 학교이므로 교육부나 교육청, 사립학교 운영자들은 예산을 확보, 종합계획(Master Plan)을 거쳐 새롭게 학교를 짓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배치와 형태만 좀 달라졌을 뿐 기능이나 효율적인 면에서는 교육 목표(민주화 교육, 개별화 교육, 자발적 능력별 학습)와 다가오는 교과과정에 대처하지 못한 채 여전히 경직된 붉은 벽돌조와 회색 콘크리트 집을 반복해 짓고야 말았다.

학교건축은 교육환경을 고려한 다각적인 적합성과 논리성이 만족되는 기능, 형태, 구조, 미래의 융통성과 심리성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숨가쁜 생활로 인한 능력의 한계 또는 필요성에 따른 실천적 의지 결여로 그렇지 못했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