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날 과학시간에 사용할 바늘구멍 사진기가 완성되었을 때는 서쪽으로 기운 해가 자취를 감춘지도 꽤 오랜 후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생각이 갈길 바쁜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잘 할 수 있을까? 바늘구멍 사진기에 나타난 물체의 상이 왜 거꾸로 보이는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3학년 어린아이들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는 아닐까?'
다음날 아침, 교실문을 들어서니 모든 아이들이 창가에 모여있었다. 내가 들어왔음을 알았는지 왁자지껄하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선생님! 사진기는 언제 만들어요?"
"야! 사진기가 뭐야, 바늘구멍이지."
"바늘구멍?"
하하하하. 조용하던 교실은 어느새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의 말을 듣고 나는 어제 만든 바늘구멍 사진기를 찾았다. 책상 위에 있어야 할 사진기는 준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찌그러진 바늘구멍 사진기에는 커다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이거, 누가 이렇게 했어?"
순간 나의 목소리가 높았던 모양이다. 떠들썩하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피, 이게 뭐야. 아무 것도 안보이잖아.'
'구멍이 없어 그런거야. 이리줘, 내가 잘보이게 해줄게.'
'야, 잘보인다.'
'정말? 내가 먼저야.'
'아니야, 내가 먼저야.'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는 찌그러진 사진기를 눈에 가까이 가져갔다. 눈앞에 펼쳐지는 동그라미 속의 세상. 지팡이를 짚고 가는 할머니의 모습도,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이 조그마한 동그라미 속에서는 아름다운 꿈이 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 사진기(?)를 통해 예쁜 마음이 살아숨쉬고 고운 꿈이 영그는 세상을 마음껏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무엇이든 보면 호기심이 살아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이라고, 지극히 정상이라고 자위하며 나는 아이들과 다시 바늘구멍 사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