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 선생인 내가 어린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좀 멋적긴 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 심리와 정서 등을 아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초·중학생인 딸들의 독서지도에도 유익하리라는 깨달음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여러 책중에서도 『국화』(김정희지음)를 택한 것은 동화로는 드물게(이건 혹 나의 과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제 침략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다. 사실 일제 침략은 오늘의 분단조국 등 우리가 온몸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온갖 비극적 삶의 원천적 빌미인데도 지금 국민에게 얼마나 기억되고 있는가?
대학생 등 젊은이들과 청소년·아동은 물론이고 기성세대에 이르기까지 일제침략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할 만큼 '잊혀진 계절'이 되어 있다. 얼마 전 된장마저 일제(日製)가 좋아 사먹는다며 주저없이 기자에게 말하는 주부를 TV뉴스에서 본 적이 있으니 말이다.
물론 어린이 소설인 『국화』가 대하소설 『아리랑』처럼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건 아니지만, 국화라는 소녀의 ‘수양딸 되기’를 통해 잔잔하면서도 강하게 나라 빼앗겼던 시절의 아픔과 슬픔이 묻어나는 건 사실이다.
우선 전혀 잘못한 것 없는 어린이 국화의 삶이 그러하다. 국화의 아버지는 징용으로 끌려갔다. 곧바로 엄마마저 죽자 외할머니에게 의탁되어 지내다가 이내 부잣집의 수양딸로 들어간다.
하지만 말이 수양딸이지 사실은 식모나 다름없다. 한창 재롱을 떨거나 ‘이쁜 짓’을 할 나이이건만 국화는 부엌일이며 빨래 등을 도맡아 한다. 그래도 그것은 육체적 노동일 뿐 국화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것은 엄하디 엄한 할머니의 싸늘한 시선과 태도이다.
하긴 양어머니 집도 사정은 비슷하다. 할머니의 외아들 민규가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젊은 양어머니는 서울에서 대학공부까지 한 신여성인데도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며 웃음기없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국화가 어른들 몰래 밥을 훔쳐먹다 들킨 후 할머니로부터 종아리 맞는 장면이라든가 바우에게 밥을 내다준 ‘죄’로 사흘을 앓아 누운데서는 새삼 일제침략에 분노의 불꽃이 일어난다.
이외에도 일경의 고문에 의해 바보가 되어버린 칠구, 도깨비 놀음을 통해 ‘왜놈’ 앞잡이인 갑성에게 복수하는 바우 등 모두의 삶이 살을 찢긴 아픔으로 다가온다. 도대체 어린 국화와 바우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그래도 국화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징용에 끌려간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빠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에다가, 그래야만 자신의 딱한 처지(수양딸)에서 벗어나 학교도 다닐 수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드디어 해방이 된다. 민규의 죽음 소식은 전해지지만, 국화 아빠는 감감 무소식이다. 국화의 희망은 절벽이다. 그 무렵 국화에겐 새로운 희망의 싹이 움튼다. 중풍에 걸린 할머니로부터 곳간 열쇠를 넘겨받는 것. 여전히 국화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어른들 잘못에 의해 고단한 삶을 살게 된 국화이지만, 끝내 희망을 잃지 않으며 사는 모습이 너무도 의젓하고 대견하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의 곳간 열쇠 건네주기는, 다소 현실감이 부족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의 열쇠처럼 보인다.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 父父子子)라는 옛말이 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가 따르고, 부모가 부모다워야 자식이 따른다는 뜻이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야 말할 것도 없지만, 과연 그들만의 잘못이라고 치부해버리면 끝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을 막아내지 못한 조선의 어른들도 면죄될 수는 없다. 어린 소녀 국화의 기구한 인생유전은 새삼 국력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있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부모이자 교사인 나의 그런 깨우침이야말로 국화와 같은 어린이들이 생겨나지 않게 할 어른의 제몫 해내기에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값진 일은 초등학교 4학년인 막내에게 『국화』를 읽게 하고 아빠로서 이런 이야기들을 해줄 수 있게 된 점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어린 소녀를 화자로 하면서도 어른(작가)의 시선이 부분부분 드러난 점이다. 예컨대 ‘풍경’, ‘후궁’, ‘달거리’ 등 국화가 모를 단어사용의 지문이 그것이다. 책을 읽는 국화 또래의 아동들에게 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