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0 (토)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국제

<교육100년 교사 100년-3> 皇國臣民化를 위한 학교건축(1900∼1945년)

古來로 한국건축 外皮에는 가공하지 않은 자연재를 사용했다. 건축물을 하나의 자연으로 동화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정답고 익숙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다. 즉 傳기와, 傳돌, 大長松, 회반죽, 사고석, 진흙 등으로 쌓여진 건축이 한국인에 맞는 한국전통환경을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인의 문화와 민족의식은 성장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4년 일본과의 맺은 '한일 외국인고문 빙용협정'에 의해 한국학교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日人 교사가 배치됨을 기회로 학제가 개편되기 시작했으며 교육의 방향이 한국문화를 희석하고 민족의식을 없애려는 교육정책을 운영하기에 이른다. 이를 위한 제 1차 조선교육령이 발동되어 민족차별교육, 기본교육(초등교육)과 실업교육 중점 등 우민화 교육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운영과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시설환경을 만들기위해 한국에 세워져야 할 학교건축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그들은 생각해야 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학설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나 좋은 환경보존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건축환경은 자라는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그 내에서의 모든 행위와 활동을 제어받기도 한다. 일본식 건축환경을 한국에 세움으로 그 환경 속에서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사고를 갖게 하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일본식 목조건축은 일본의 기후조건과 일본 국민들의 의식구조에 적당한 건축이기에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 지붕은 양철지붕이나 왜식기와를 얹었으며, 외벽은 얇은 벽체에 얇은 나무판을 붙이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외피를 칠하여 우중충하고 춥고 어색하고, 허전한 느낌을 갖게 한다. 습하고 그리 춥지 않은 곳(일본 지역)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춥기도 덥기도 한 한국기후에 대처하기에는 맞지 않는 이질감 나는 건축을 그들의 편의나 정책에 의해
마구 지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한국인들은 가볍고 임시 건물 같은 초라한 학교건축환경을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왜식 의식구조에 젖어 들어가고 말았다.

3.1 운동의 세계적인 선언은 일본인들의 교육정책에도 변화를 주었다. 1922년의 제 2차 조선교육령 시행으로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일본과의 일신동인화, 한민족 지도층의 민족운동 분열 등을 꾀했던 것이다. 학교교육형식을 일본과 동일화를 함으로 학교교육환경 구축에 있어서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환경으로 나아갔다. 학교운영자가 교사와 학생들의 행동을 감시하는데 유리하게 一字形 건물을 세웠다. 복도를 시원하게 직선의 一字式으로 연결, 한곳에서 모든 교실들을 쉽게 감시할 수 있고 통솔에 유리하게 했다. 복도로 향한 교실의 벽은 천장에서 아래까지 유리창으로 되어 교실 내부의 모든 상황이 복도에서 잘 보임으로 운영자나 감시자에게는 편리한 학교건축의 형태와 구조로 건축되었다.

이렇게 직선으로, 병렬식으로 놓여진 학교건축의 배치형태는 군인막사와 같이 일률적으로 모든 학교에 적용됐다. 더욱이 학교규모에 비해 아주 큰 운동장은 교장실 앞에 높은 단을 놓고 이를 중심으로 좌우로 크게 펼쳐졌는데, 이는 교사와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해 동시에 모든 구성원들을 통솔하기 용이하고 그들 운영자들의 위엄과 권위주의적 형상 창출에 기인되어 학교배치계획을 한 것이다.

운동장 배치는 장축이 남북 방향으로 되어야 하는 것이 설계의 원칙이고 이곳의 소음이 교실군에는 영향이 가지 않도록 계획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건축 계획적 충족은 日人의 통솔 차원 정책에 밀려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본사람들의 교실 설계와 운동장 설계가 해방 후 50년 이상이 되도록 아무 여과 없이, 아무런 불평 없이, 현재의 우리 한국교육환경에 여전히 쓰여지고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이것은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시대가 바뀌고 일본인에서 한국인으로 통치자는 바뀌었지만 우리 교육의 방법이나 운영체계는 그 시대와 유사한 형식일 것이라고 건축가의 눈으로는 비춰지고 있다. 작금의 학교시설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권위적이고 운영 중심적이고 통치적인 교육사고의 교육형상이 눈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입은 옷이 그 사람의 내면적 사고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어진 건축환경은 환경 표현의 의미로 그 개인이나 집단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학생, 교사, 학습, 놀이 중심의 자유로운 교육환경으로 하루속히 변화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정세에 따라 초조해진 일본사람들은 1938년부터 皇國臣民化 정책으로 빨리 한국인을 일본화 시키려는 교육정책으로 급진전되었다. 학교건축 내에서도 운동장과 연계된 조그만 동산에 皇國 숭앙의 장소를 만들고 참배를 실시, 학생들의 의식에 영향을 주었다. 학교환경 내에 가장 중심적이고 신성한 핵심부분이 그들의 정신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곳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이는 皇國臣人誓詞 암송의 강제적 행위와 더불어 학교건축환경의 경직화, 식민화를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인들이 한국인에게 기본교육(초등)과 실업교육만을 강조한 것에 반해 선교사들과 한국우국인에 의해 설립된 사립중등학교의 건축들은 왜식환경과는 달리 붉은 벽돌조의 서양 근대건축사조로 계속 세워져 대조적인 상황을 이루었다. 이 부분이 암울한 시대에 학교건축 발전의 일면을 보이고 있어 그나마 다행스러웠다고 생각된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