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산 중턱에 한 그루 옹이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주변 경관과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못생기고 나무에는 옹이 투성이였습니다. 허리 아픈 아낙네가 산행을 할 때 한 번씩 짚어가고, 산 위 약수터에 물 길러 가는 아저씨들이 한번씩 쳐다보며 이 나 무가 왜 여기 있지 하는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옹이나무는 왜 하필 이곳에 뿌 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곳 산중턱에는 자기와 닮은 옹이 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 없었고 왜 자기가 옹이나무라 불리는 지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날 자신의 가지에 내려앉아 쉬고 있는 바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바람님, 저 산위에는 어떤 나무가 있나요? 나처럼 옹이나무라 불리는 나무들이 많이 있나 요? 혹시 우리 엄마 나무는 보지 못했나요?" "옹이나무님, 나는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보았답니다. 구름 낀 계 곡에도 갔었고, 높고 높은 산에도 여러 번 다녔고, 어떤 때에는 끝도 없는 바다를 며칠동안 돌아다녔답니다. 하지만 옹이나무님처럼 똑같이 생긴 나무는 본적이 없답니다." 지나가는 바람에게서조차 자기와 똑 같은 옹이나무를 본 적이 없다는 얘기에 슬픔이 복바 친 옹이나무의 몸에는 또 하나의 옹이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옹이나무에게는 슬픈 감정이 생길 때마다 작은 옹이가 하나씩 생겨나서 온 몸이 옹이투성이였습니다. 어떤 옹이는 너무 커서 작은 골처럼 움푹 패였고, 작은 옹이 하나 하나가 모여 커다란 상처처럼 보이기도 했 습니다. "야, 옹이나무야, 넌 어쩜 그렇게 못생겼니? 온 몸이 곰보딱지잖아? 넌 나무라고 할 수도 없어. 저리 썩 가버려!" 주변의 친구나무들이 던지는 한 마디 말은 그대로 옹이가 되어 옹이나무에게 더해졌습니 다. 이젠 옹이나무의 몸은 옹이와 온갖 상처로 인해 정말 볼품이 없어졌습니다. 나무라기 보 다 흉측한 몰골을 한 낡은 비석 같은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눈먼 새도 둥지를 틀지 않고, 힘에 겨운 구름조차 옹이나무에게 내려와 쉬기를 꺼려했습니다. 개미들만 부지런히 드나들 며 아픈 몸에 생채기를 만들기가 일쑤였고, 지나가던 바람이 잠시 들러 가끔씩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바람님, 이제 나는 더 이상 나무도 아니랍니다. 내 몸이 너무 못생겨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그 어떤 누구도 없답니다. 가끔 바람님께서 전해 주시는 세상 얘기가 제게는 모두입니다. 여기를 지나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번만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 주고 어루만져 주기를 얼 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답니다. 이제는 산행을 하다가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기대는 힘없는 아주머니조차 없답니다. 아, 나는 이제 더 이상 이 뿌리를 지탱 할 힘이 없답니다." "옹이나무님, 세상에 생명 있는 것 중에 의미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나를 보세요.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옹이나무님처럼 상처투성이 뿐의 몸 같은 것이라도 없답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언젠가 옹이나무로 태어나 이 곳에 뿌리내린 이유를 꼭 찾게 될 것입니다. 나처럼 어떤 곳에 머물지 못하고 언제나 떠돌아 다녀야 하는 바람의 일생도 그리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랍니다." 바람과 이야기를 나무면서 잠깐씩이라도 아픈 상처를 달래 보던 옹이나무는 비록 상처뿐인 가지일 망정 바람이 잠시라도 지친 몸을 쉴 수 있도록 편하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 다. 바람이 지나간 후 옹이나무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금 아무도 날 봐 주는 이 없는 옹이와 상처로 뒤덮인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로 하는 존 재가 될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오는 거지? 그 동안에 내 뿌리가 썩기 시작하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걱정과 기다림과 원망스런 마음을 안고 몇 번의 눈을 맞았는지, 또 꽃은 몇 번이나 피고지고 했는지 헤아리기조차 힘들어졌습니다. 옹이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산 중턱도 그 모습이 많이 변했습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오더니 커다란 전동 톱으로 주변의 나무 를 한 그루 씩 베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선 트럭에 잘라낸 나무들을 싣고 어디론가 떠 나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베어지는 것일까? 저 사람들은 뭐 하는 사람들이지? 왜 나무를 베어내는 거야?' 주 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옹이나무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이는 없었지만 일하는 사람 들의 주고받는 얘기가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어이, 김씨. 여기에다 동네 사람들을 위한 운동시설을 설치한다면서” "그렇다나봐. 마을 사람들이 민원을 넣었대. 지역 주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산책로와 배드민턴시설 등을 설치 해 달랬다나 봐. 장소 물색에 한참 시간이 걸렸는데 여기에 산행하 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해서 이곳의 나무를 좀 잘라내고 터를 닦아서 운동시설을 갖추기로 했대. 우리야 뭐 일이나 하고 돈이나 받으면 되지." "어여 일이나 하세." "그러세." 그러기를 며칠 후 굴러가기에도 힘겨운 커다란 바퀴가 달린 기계차가 오더니 땅을 평평하 게 한답시고 이리저리 냅다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산행을 즐기던 사람들도 공 사현장을 구경하느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현장 감독처럼 휘휘 둘러보며 인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여기 좀 보세요. 입구가 이쪽인데 여기 흉칙하게 생긴 옹이나무가 한 그루가 있어요. 이 나무는 왜 안 베어냈어요?" "너무 재수 없게 생겼잖아요. 그래서 일하던 사람들이 그냥 놔 둔 모양인데, 막걸리로 목이 나 축이고 그 나무는 마지막에 베어 낼께요." 옹이나무는 마음이 서글퍼졌습니다.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나무로 태어나 가장 싫은 순간 인 베어냄을 당하는 순간에서도 마지막이라니 정말 나무로 태어나 이 곳에 뿌리박은 자신이 한없이 가엾고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옹이나무의 몸에는 더 이상 상처 아닌 곳이 한군데 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나무로 뿌리내림을 하면서 한 번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생겨났 던 옹이가 더 이상 생겨 날 곳이 없어지자 움푹 패인 곳에 또 옹이가 생겨나고 딱지가 앉아 서 벼락맞아 제 형상을 잃어버린 나무 보다 더 흉칙했습니다. "박씨, 저쪽 입구 쪽에 옹이 투성이 흉칙한 나무 한 그루 보이죠? 저 나무 베어버리세요." 멀리서 일하던 박씨는 구부린 허리를 펴면서 대답 대신 손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두어 시 간이 지났나 싶더니 박씨라고 불리던 남자가 옹이나무 옆으로 왔습니다. 손에는 전동 톱을 들고 허리에는 무섭게 생긴 연장들이 커다란 주머니 속에서 키재기라도 하려는 듯 빠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박씨라고 불린 사람은 나이를 가늠 할 수 없을 정도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움푹 패인 이마의 주름은 그 동안의 삶의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았음을 말 해주는 듯 했고, 투박한 손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혀 있었습니다. 푹 눌러 쓴 모자 밑으로 작 은 눈이 인자하게 옹이 나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놈 참 못생겼구나, 어디 보자." 박씨라고 불린 이 사람은 옹이나무를 쓱쓱 쓰다듬어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었습니 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옹이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본 후에 톱을 옹이나무의 몸에다 갖다대 었습니다. 그러자 온 몸이 뒤틀리고 머리가 아찔해지는 가 싶더니 온 몸이 쪼개지는 고통을 견디다 못해 옹이나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트럭 뒷 칸 한 구석에 처박혀진 자신을 발견한 옹이나무 는 한 줄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뿌리깊은 나무로서의 마지막 자존심도 사라 졌습니다. 보기 흉한 모습일 망정 가지와 잎이 있었던 자신의 몸이 몸뚱이만 덩그러니 남겨 진 것이었습니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가리고 싶어도 이제는 가리울 나뭇잎 한 장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눈물샘 보다 더 깊은 상처를 안고 트럭 뒷 칸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한 옹이나 무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조차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걸 보 면 살아 있기는 한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한 번의 고통으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망각 의 강에 그대로 빠져들었다면 더 이상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 자신의 처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트럭이 갑자기 서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제는 더 이상 사물을 분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두 개의 손이 옹이나무를 끌어내리고 또 다른 작 은 손이 밀어내는 느낌이 들어 자세히 바라보니 낮에 자기를 베어 낸 박씨라고 불린 그 사 람이 옹이나무를 어딘 가로 데려온 것이었습니다. 옹이나무가 뿌리내리고 살던 숲과는 다르 지만 주변에 나무들이 보여 좀 안심이 되었습니다. 마당이 있고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을 보아하니 여기가 사람들이 산다는 집이란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는 바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박씨라고 불린 그 사람은 옹이나무를 담벼락 안쪽에 비 스듬히 세워놓고는 불빛 가득한 방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혼자 남은 옹이나무는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어두운 마당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물건들이 잔뜩 널려져 있었습니다. 깨진 항아리도 있고, 녹슨 도끼, 세수 대야며 물호스, 쪼 개진 나무토막이 보이고 저 멀리에 커다란 솥이 담 아래 걸려 있었습니다. 조그만 꽃밭도 보였습니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저기 쌓여 있는 장작들처럼 나도 저렇게 온 몸이 쪼개어 지는 것일까? 너무나 답답하구나. 바람 님은 어디에 계신걸까?' 갑자기 서늘해진 공기에 차 가워진 몸을 움츠린 옹이나무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람이 지친 몸을 이끌고 잠시 쉬러 이 곳에 들른 것이었습니다. "바람님, 저에요. 옹이나무에요. 이렇게 잘려 버린 몸이라 알아보기 어려우시죠? 이런 지경 에까지 되어 버린 저에게 더 바랄게 무엇이 있을까요? 이제 남은 것은 절망뿐이랍니다." "옹이나무님,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답니다. 지치긴 했지만 아직 우리는 살아있잖아요. 그리 고 옹이나무님을 나무공장으로 보내지 않은 걸 보면 무슨 다른 뜻이 있을거에요. 살아 있는 한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순 없어요." 바람은 절망에 지친 옹이나무 어깨에 앉아서 옹이나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고는 옹이나무 가 편히 잠들 때까지 옹이나무를 지켜보았습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바람은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부산스런 소리가 집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쪼개진 나무토막들이 타닥타 닥 소리를 내며 시뻘건 불길을 토해 놓고 있었고 담벼락에 걸려 있던 커다란 무쇠 솥이 그 위에 걸려 있었습니다. 무쇠 솥과 뚜껑 사이로 허연 김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작은 손을 가진 예쁜 여자아이가 헝겊으로 만들어진 작은 인형을 안고 펄펄 끓고 있는 무쇠 솥 곁에 쪼그리고 앉아 이었습니다. "아가야, 이쪽으로 와야지." 나즈막한 목소리로 소녀를 부른 사람은 박씨라고 불리던 사람 이었습니다. 아가라고 불린 여자아이는 박씨의 투박한 손에 이끌려 무쇠 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아까처럼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옹이나무 있는 데로 오 더니 옹이나무 위에 턱 하니 걸터앉는 것이었습니다. 연장주머니에서 커다란 칼을 꺼내더니 옹이나무의 살갗을 마구 도려내었습니다. 삐죽 나와 있던 잔가지 조각도 다 잘려 나가고 나 서 옹이나무는 이제 모든 것을 잊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달은 옹이나무는 아픔보다 오히려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자기 처럼 다른 사람에게 미움만 받으며 살아온 옹이나무를 그래도 어딘 가로 데려와 주고 쓰다 듬어 주었으니 이까짓 살갗 벗기는 정도의 아픔은 참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저만치서 예쁘 게 생긴 작은 여자아이가 아까부터 아무 말 없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했습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자기를 바라 본 사람이 없었는데 이렇게 바 라 봐 주는 것만으로, 흉칙하게 생겼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바라만 봐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 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갗을 벗겨내더니 박씨라고 불린 사람은 옹이나무를 이쪽에서 한 번 내려다보고 툭툭 몸통 살을 찍어내고 저쪽에서 한 번 내려다보더니 툭툭 몸통 살을 찍어내는 것이었습 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옹이나무의 몸통은 펄펄 끓고 있는 무쇠 솥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펄펄 끓는 물 속에 몸이 잠기는 순간 자신의 몸에 그런 기운이 있었는지 조 차 몰랐던 알 수 없는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옹이나무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늘한 기운이 옹이나무를 감싸는 순간 정신을 되찾은 옹이나무는 눈을 떴습니다. 모든 인내심과 내일에 대한 희망, 그 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던 삶에 대한 애 착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아무 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늘 진 담벼락 밑에 비스듬히 세워진 옹이나무는 자기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 알고 싶지도 않 았습니다. 뜨거운 물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기면서 더 이 상 삶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로 마음을 먹으니 한결 마음이 가볍고 넓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 봐 주던 작은 여자아이 모습만 간직하기로 했습니다. 그걸로 충 분했습니다. 그 기억마저도 분에 넘치는 사치라면 그것 마저 다 버리기로 했습니다.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이제 옹이나무를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어쩌다 한 번 씩 오 다가다 옹이나무 곁에 서서는 이리 저리 훑어보곤 했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옹이나무를 찾 지 않았습니다. 가끔 작은 여자아이가 마당에서 놀다가 한번씩 옹이나무 곁에 와서 그 작은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는 납작한 코를 발름거리면서 냄새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은 여 자아이의 방문은 세상에 대한 원망, 자신의 모습에 대한 분노를 송두리째 잊게 해 주었습니 다. 옹이나무 속에 있는 모든 욕심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자신을 찾아주는 작은 여자아이의 방문을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젠 웃음이 나왔습니다. 햇빛을 못 본지 두 달이 지나갔습니다. 살갗이 모두 벗겨진 옹이나무는 바람이 찾아 왔을 때 더 이상 여행에 지친 바람을 편히 쉬게 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바람님, 바람님이 잠시 머물다 갈 가지도, 바람님을 덮어 줄 나뭇잎 하나 없답니다. 이제 더 이상 제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세상에 대한 원망도 모두 버 렸습니다. 가끔 이 집에 사는 작은 여자아이가 찾아오는데 그 아이는 밉게 생긴 제 모습에 는 아랑곳하지 않고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바람님, 뿌리도 없이 이렇게 내 팽개쳐 진 모습이지만 그 작은 여자아이 때문에 행복함을 느끼며 지내고 있답니다." "옹이나무님, 편안한 모습의 옹이나무님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나는 어느 한 곳에 머물 수 없는 운명이랍니다. 운명의 힘에 떠밀려 또 어디론 가로 가야만 합니다. 어디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은 어느새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져 있습니다. 옹이나무님, 운명이 허락하면 또 만나게 되겠지요. 안녕히 계세요."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어느새 차가운 기운만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날 눈을 뜬 옹이나 무는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작은 여자아이 때문에 깜짝 놀랐습니다. 언제나 말 한마디 없이 자기를 바라보는 소녀였지만 오늘은 유난히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늘 갖고 다니던 인형도 손에 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이 연장주머니를 어깨 에 늘어지게 메고서 이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옹이나무 곁에 오더니 연장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고서는 작은 여자아이를 덥썩 안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야,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해 볼까? 우리 아가는 아빠가 일하는 것 여기에서 보고 있을 래?" 박씨라고 불리던 이 사람은 그 작은 여자아이를 햇볕이 조용히 드는 곳에 납작하게 놓여있 는 돌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앉혔습니다.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박씨라고 불리던 이 사람은 연장주머니에서 날카로운 끌 칼과 창 등을 꺼내더니 옹이나무의 몸 이곳 저곳을 마구 깎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톱으로 자르기도 하고, 주머니칼로 다듬 기도 하고, 까실까실한 종이 같은 걸로 온 몸을 마구 문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옹이나무의 몸 조각들이 찍혀 나가고 몸의 가루가 햇살 속에서 춤추듯 날아다녔습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어둠이 찾아오고 옹이나무를 마구 깎고, 구멍도 뚫고, 몸 이곳 저것을 갈아대 던 손을 멈추고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온갖 연장들을 한 자리에 가지런히 모았습니다. 그리고선 박씨라고 불리던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 작은 여자아이를 덥썩 안더니 불빛 가득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옹이나무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자기는 영원히 잊혀진 존재라 생각하고 삶에 대한 모든 희망과 세상에 대한 원망도 다 버리고 오로지 가끔씩 찾아와서 따뜻한 미소로 자 신을 바라봐 주는 소녀에게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맛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뿌리 에서 몸통이 잘리고 뜨거운 물 속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옹이나무에게 작은 여자아이의 미소 는 마지막 위로라고 생가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옹이 나무를 하루 종일 깎고 다듬고, 만지고, 이리 저리 견주어 보는 것으로 보아 옹이나무를 다 른 용도로 쓸 모양인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쓰임이 된다는 것,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 는 일이었습니다. 옹이나무는 다시금 삶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 습니다. 그런 것이 옹이나무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해도, 옹이나무에겐 지나친 욕심이라 해도 무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욕구가 용솟음 치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 습니다. 이 날의 흥분으로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던 옹이나무는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과 작은 여자아이가 곁에 오자 온 몸을 가볍게 떨었습니다. 투박한 그 손으로 어서 자기를 다듬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 주라고 애원하고 싶었습니 다. "아가야, 여기 앉자. 아빠 일할게." 아가라고 불린 작은 여자아이는 어제처럼 작은 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박씨라 고 불리던 투박한 손을 가진 이 사람은 어제처럼 다시 옹이나무를 이리 깎고 저리 깎고, 날 카로운 날로 밀고 당겨서 옹이나무의 살갗을 보드랍게 다듬는 것이었습니다. 작은 나무 조 각이 박히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꼴딱 넘어가서야 투박한 손을 가진 박씨라 고 불리던 이 사람은 누런 빛깔의 칠을 옹이나무에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끔거리는 느낌 과 향긋한 냄새는 숲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아가야, 황색 옻을 입히니까 훨씬 예쁘지? 이제 마르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단다." "아빠..." "우리 아가, 지금 뭐라고 했니? 아빠라고 했니? 다시 한 번 아빠라고 불러봐." "아빠......" "수지야!" 투박한 손을 가진 박씨라고 불리던 이 사람은 작은 여자아이를 와락 품에 안았습니다. 말 이 별로 없던 이 사나이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작년에 네 엄마 잃고 말문을 닫더니 이제야...... 이제서야...... 고맙다. 우리 아가 수지야." 박씨라 불리던 이 사람은 작은 여자아이를 안고 불빛 가득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옹이나무는 영문을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가 자신의 몸을 둘러보니 자 신의 몸이 커다란 상자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몸은 두 개로 나누어져 위로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옹이나무의 속은 파내어지고 그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이 만들어졌습니다. 옹이 자국이 심했던 곳에 독수리 모양과 꽃잎이 아로새겨 졌습니다. 상처가 가장 심했던 윗 부분은 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이 아로새겨진 손잡이 로 변했습니다. 옹이나무는 오늘의 일을 절대 잊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음날 투박한 손을 가진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옹이나무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갔 습니다. 가재도구라고는 장롱과 서랍장밖에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무척 깨끗했습니다. 방안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앉아 있다가 옹이나무를 보자 벌떡 일어섰습니다. 투박한 손을 가진 박씨라고 불리던 그 사람은 그 큰 옹이나무 상자를 작은 여자아이 곁에 놓았습니다. 작은 여자아이는 두 손으로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빠, 여기는 엄마 머리카락 넣어두고, 이 작은 서랍에는 엄마 사진도 넣어 두고, 조개 목 걸이는 여기에, 또 여기는 우리 가족 사진을 넣어 둘 거에요. 아빠는 우리를 지켜주는 제일 큰 사람이니까 여기 큰방을 쓰세요." 작은 여자아이는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우며 자기의 보물을 옹이나무 상자 속 작은 방 들 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것이었습니다. 옹이나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흉하게 생긴 모습 때문에 모두가 미워했던 자신을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가족 곁에서 지내게 된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도 예쁘고 작은 여자아이의 가장 귀한 보물을 간수하는 창고가 된 것 입니다. 옹이나무는 언젠가 바람이 말해주었던 생명 있는 것은 모두가 의미 있는 것이라는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이렇게 고운 여자아이가 꼭 필요로 했던 보물 상자가 되다니 드디 어 옹이나무로 태어난 자신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감격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