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사 9년차다. 아침마다 나는 강을 건넌다. 발령 받고 지금까지 8년동안 통영에서 진주까지 하루 네 시간을 통근해 온 내게 강은 하나의 숙명이다. 실지로 내가 강을 보는 시간이란 진주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도동교까지의 5분 남짓한 거리지만 나는 통영에 닿을 때까지 강에 가슴을 담그고 흥건해진다. 봄철 까슬한 며칠을 제외하고 강은 안개를 뿜어낸다. 안개는 말하자면 강의 냄새나는 유혹이다. 나는 안개의 비릿한 내를 맡으면 비로소 강을 느낀다.
그 래서 강에 몸을 담그는 네 시간의 통근은 안개의 품처럼 몽롱한 편안함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하루 네 시간의 통근이 내겐 완벽한 자유였다. 더러운 시내버스 칸에 코를 박고도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시부모님 봉양에, 간단없이 찾아드는 시댁 손님들 치레에 지친 나는 시외버스 칸에서 나비처럼 자유로웠다. 첫딸을 임신하고서도 나는 시외버스 안에서는 단풍잎 한 잎처럼 가벼웠다. 그러나 둘째 딸을 낳고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나는 시외버스 안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제 진주에서 통영까지의 네 시간 통근거리는 소롯이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였다. 삶이란 얼마나 엄정한 것인가. 그건 만만하지도 간단하지도 않은 숨겨진 법칙이다. 통근거리에 부담을 느끼면서 나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것으로 그 네 시간을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책을 보면 속이 메슥거렸고, 가슴 저리게 좋아하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도노란 현기증을 일게 했다. 나는 어떻게든 통근시간을 참아내야 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교활한 속셈에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내겐 삶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강은 내게 가장 위로가 되는 존재였다. 강을 벗어나서도 강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나는 매양 물컹한 심정이 되어 환 상이 갖는 편안함에 젖었다.
차에서 내리자 시작된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찬 기온이 스멀스멀 소매사이로 스며들었다. 동쪽으로 몸을 앉힌 교사라 그런지 교무실은 아직도 찬 기운이 마지막 저항군같이 낮게 포복하고 있었다. 산언저리의 바위틈에 진달래가 맨 살로 비에 젖었다. 봄은 분홍빛 그리움을 펼쳐 두고도 여전히 늦은 걸음이었다. 하염없이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200까지 혈압이 오르던 남편이 떠올랐다. IMF 된서리를 난장으로 맞고 있는 남편에게도 이 봄은 차가울 터였다. 태연하게 업무를 보고 있는 남선생님들을 쳐다보았다. 나태하고 일률적인 남선생들의 생활태도 때문에 교원과 결혼하지 않은 나의 선택에 만족했었다.
그러나 경제불황의 가파른 현실에도 속편한 그들이 새삼 부러워졌다. 나는 스스로의 이기심이 역겨워 진저리를 쳤다. 1교시를 마치고 오니 교무실이 부산했다. 신임 여교사가 서너명의 학생들을 불러다 놓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열정이 귀여웠던지 남선생님들까지 가세하여 분위기는 제법 살벌하기까지 했다. 저런 때가 있었지. 아이들의 일탈이 못내 안타까워 목울대 를 돋우며 발을 동동 구르던 때, 시간이 지나면 이해와 너그러움으로 변명되는 적당한 무관심의 시기가 찾아 올 테지. 나는 신임 여교사에게 미소를 보내며 내 자리로 가 앉았다.
“김선생” 뜬금없이 찾아드는 편두통을 가라앉힐 요량으로 이마를 지압하고 있는데 옆자리 박선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박선생보다 분홍빛 장미가 먼저 눈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수가! 혜진이였다. 장미를 안고 선 혜진이, 어제 찾아오겠다는 전화가 있었지만 워낙 오랜만의 연락이어서 설마 했었는데 역시 혜진이 였다.
“이런 걸 뭘.” 용돈을 거의 다 썼으리라는 안쓰러움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내가 장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혜진이에게 나는 옛날의 우정을 느꼈다. 그렇다. 내가 혜진이에게 느끼는 감정은 우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거였다. 나는 그 애와 깔깔거리며 거리를 싸대고 다녔으며, 서점에서 진지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책을 골랐다. 때로는 초밥집에서 콜라를 마시는 혜진이 앞에서 거리낌없이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시집을 갔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바람에 친구들은 일체 내게 연락을 끊었다. 시집살이 몇 년만에 가까운 친구가 남아 있지 않던 내게 또래보다 조숙한 혜진이는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혜진이를 만난 것은 3년 전 도산중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충무중학교에서 5년 꼬바기 근무했지만 경력 점수 외에는 아무런 부가점이 없었던 나는 그 게으름으로 해서 원하는 진주지역으로 전보되지 못했다. 그래서 엉겁결에 선택한 학교가 도산중학교였다. 통영에서는 그나마 가장 진주에 근접한 학교라는 이유에서였다.
혜진이를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난다. 히말리야시다가 너른 팔로 껴안은 도산중학교는 그림 같은 학교였다. 교사 16명의 워낙 작은 학교여서 업무가 많아 피곤했지만 아이들은 하나같이 총명했고, 시내에서 다소 벗어난 학교 여서인지 심성도 맑았다. 도산 중학교 근무를 명령받고 첫 인사를 갔을 때 운동장을 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청소시간을 무엇보다 싫어하던 통영시내 학생들에 질려 있던 내게 방학중인데도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운동장을 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진주로 발령 나지않은 서운함을 단번에 씻어 주었다. 그 아이가 혜진이였다.
혜진이가 다시 내 눈 안에 확 들어온 것은 어느 수업시간이었다. ‘위대한 사람의 기념비’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고 있었다. 시방도 혜진이의 비문을 정확하게 왼다. “1951년 4월 23일에 태어나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일을 하진 않았으나 한 사람에게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으로 남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딸을 통근시켰으며 그 통근 길에서 교통사고로 먼 길을 떠난 김영석씨 여기 잠들다. 살아서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나 죽어서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학처럼 자유로이 산천을 희롱하길 여기에 빗돌을 세운다.”
이마가 유난히 향그러운 아이는 심상찮은 목소리로 비문을 읽었다. 김영석씨는 혜진이의 아버지였다. 유명한 소프라너로 불같은 사랑의 전설을 남겼느니, 빈민 구제로 일생을 보낸 수녀니, 삶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사막에서 나서 사막에서 죽었으니 하며 아이들은 제법 진지한 눈으로 자신들의 비문을 읽었다. 유명하다는 말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기준은 각자 틀려서 자유롭게 사고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하여 간간이 짝을 대상으로 장난을 거는 유치한 비문들도 웃으며 받아 주었다. 그 많은 비문들 사이에서 혜진이의 비문이 유난히 마음에 남는 건 단순히 그 아이에게서 받은 신선한 첫인상 때문이었을까. 내가 실명이냐고 조심스레 물었을 때 “우리 아버지예요.” 하고 혜진이는 야무지게 대꾸했다.
혜진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애의 습작노트에 빼곡이 적힌 낱말들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아이다운 분노와 홀몸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날카로운 창날을 겨누고 일렬정렬 해 있었다. 나는 그런 혜진이 를 위해 글은 사랑이어야 함을 힘주어 말했다. 혜진이와 본격적인 얘기를 나눈 것은 3월말이 되어서였다. 퇴근길에 교문 앞에서 서성거리는 혜진이와 맞닥뜨린 것이다.
“엄마가 돼지를 길러요.” 학교에서 걸어 40분이나 되는 동네에 산다는 혜진이는 트럭을 몰고 사료를 구하러 시내에 간 엄마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고성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두 대나 보내면서 혜진이와 얘기를 나누었다.
“이제 아버지를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학처럼 비상하길 바란다고 하면서도 혜진이는 조롱 속에 가둬 두 고 있구나.”
혜진이는 잠시 내 눈을 응시하더니 눈물을 흘렸다. 그 애의 작은 머리를 안아 주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때가 있다. 뭔가 그럴듯한 얘기를 해주었다고 가슴이 뿌듯해졌는데 아이들의 말간 눈을 곧바로 대하게 되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 ‘ 아, 내가 입술을 놀리고 있구나.’하는 자책.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도 잃어보지 못한 내가 혜진이의 아픔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혜진이는 순순히 내 품안에 안겼다. 나는 그런 혜진이의 너그러움이 고마워서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혜진이에게 본격적인 창작 실기를 지도할 계획을 세웠다. 제법 글재주가 있다는 지숙이와 경량이를 함께 불렀다. 길동무가 있는 것이 혜진이에게 도움이 될 듯해서다. 방과후에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도록 했다. 먼지 앉은 보급용 도서 몇권과 쓰레기로 처리할 작정으로 보내온 기증도서 수십 권, 해묵은 교과서 몇 권으로 채워져 아무런 소용이 없던 도서실은 이제 의젓해졌다. 우리는 하루의 대부분을 도서실에서 보냈다. 나중에는 점심을 먹기도 했고, 아이들의 생일 잔치를 조촐하게 마련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다가 귀가가 늦어져 시어머니에게 꾸중을 듣는 일도 있었다.
혜진이는 확실히 글재주가 있었다. 적은 재주는 없느니만 못하다고 비탄해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도 글이 느는 게 느껴 지는지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간 편지글이나 교환일기 따위를 쓰고 나서 나는 세 아이들에게 작정대로 소설을 쓰자고 제안했다. 소설은 수필과는 달리 일정한 형식이 있는 글이고 분량도 만만찮아서 중3학년이 쓰기로는 역부족일는지 몰랐다. 그러나 아이들의 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욕심을 낼 필요가 있었다.
때마침 대산문화재단에서 전국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소설을 공모했다. 나는 이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정형편이 어려운 우리 아이들에게 대산문화재단이 제공하는 우대 조건은 참으로 훌륭한 직접적인 동기가 되리라고 믿었다. 소설 얘기를 꺼내자 예상대로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일주일의 여유를 주며 이야깃거리를 구상해 오도록 했다. 노상 자연의 커다란 품에 안겨 지내는 아이들의 생활이 소재 찾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되리라 격려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도저히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며 호소하던 아이들은 일주일 후 제각기 한 꾸러미씩 이야기를 꾸며 왔다. 역시 혜진이는 아버지 얘기를 쓰고 싶어했다. 나는 좋다고 말했다. 표현하고 나면 정복되지 않는 대상이란 없는 법이니까. 아이들과 소설을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 아이들 모두 성적이 수위인데다 계속 문학이론을 공부해 왔으니 이론적인 무장은 그런대로 탄탄하리라고 믿었는데 막상 본격적인 글쓰기가 시작되자 머리 속의 이론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경량이가 2인칭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바람에 우리 모두는 웃을 수도 없는 참담함을 느껴야 했다. 문학적 지식만을 무작정 주입 시킨 나의 문학수업을 반성하는 좋은 계기였다.
원고지 60장이 목표였는데, 아예 첫 문장부터 내가 손을 대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한 단락을 써 오면 내가 서너 단락을 이어 붙이는 식으로 글을 전개시켰다. 그러다가 글이 중반에 이르게 되니까 아이들이 스스로 글을 쓰는 부분이 점점 늘어났다. 때로 아이들은 자신들이 글을 이끌어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글이 자신을 이끌기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기해했다. 뜻하지 않는 멋진 표현이 떠올라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눈이 시렸다.
그렇게 60여장의 원고가 완성되었고, 햇살 고운 오월 말 학교 앞 우체국에 원고를 부쳤다. 아이들은 스스로 소설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지만 나는 이 일이 아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길 바랬다. 아마 작가가 되고 싶어하던 내 꿈에 대한 보상심리나 대리만족의 열망이 컸으리라. 그랬다. 아깝게 경량이는 탈락했지만 혜진이와 진숙이는 예선에 통과하여 겨울방학 문학캠프에 참가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캠프에서 또 한 번 백일장을 치르고 나면 고등학교 3년간을 무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당선 소식을 듣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진숙이 엄마가 해 온 떡을 우리들의 도서실에서 먹으며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혜진이 엄마는 고구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고구마 한 가마니를 트럭으로 실어 왔다. 나는 혜진이 엄마가 싣고 온 고구마를 받아 들며, 어둠 속에서 장미가 말라 가는 냄새를 맡으며 사흘이고 나흘이고 배를 깔고 누워서 눈물을 흘리던 나의 음습한 습작기와 이별했다. 일없이 흐르는 눈물은 얼음조각보다 차갑고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던 그 서름 푸른 꿈을 곱게 접었다.
문학캠프에서 고등학교 학자금을 타는데는 실패했지만 혜진이와 진숙이는 50만원이란 적지 않은 상금을 타 왔고, 무엇보다 책으로만 보던 젊은 소설가들과 똑같이 작가에의 꿈을 키우는 전국의 어린 문재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귀한 추억을 담아 왔 다. 개학을 하고서도 아이들은 문학캠프에서의 추억을 자랑하느 라 달떠 있었다. 나는 혜진이를 데리고 갈비집으로 갔다. 뒷머리를 질끈 묶어 올린 혜진이는 한결 어른스러워 보이고 이마는 더욱 향그러웠다.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통영 시내에 있는 이모집에 얹혀 지내는 혜진이는 원래도 야윈 체질이지만 그새 많이 말라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이 아파 계속 물만 마셨다. “니가 잘 살아 주면 돼. 훗날 여유가 생기거든 그때 찾아 와도 된다. 너희가 잘 자라 주면 나는 행복해.”
그건 에누리없이 진심이었다.
“한동안 힘들었어요. 갑작스레 돼지값이 내리는 바람에 엄마도 휘청거렸었구요. 생활이 엉망이니 괜히 운명이란 단어만 떠오르 고, 글 쓸 마음도 없어지고, 그래서 더욱 살기 싫어지고……”
혜진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언젠가 혜진이 엄마가 전화를 했었다. 보모일을 하려고 하는데, 필요한 여선생이 있으면 소개 해 달라는 것이다. 전화를 받고 여기저기 알아 봤으나 마땅한 자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연 짜증이 나고 이런 부담을 주는 혜진이 엄마가 뻔뻔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아, 나는 얼마나 이해타산 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인가. 스스로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내 사랑의 뿌리는 관심이나 희생의 수액과 닿아 있지 않았다. 지극히 공식적이고 메마른 산출의 논리가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며 사랑을 매음한다. 그런 나의 사랑이란 얼마나 교활한 수작이냐. 하루 네 시간의 통근을 단순히 밥벌이로 치부하고 나면 스스로 비참해질 것이다. 생존의 등딱지를 지고 기어가는 짱구벌레는 되고 싶지 않다는 교활한 자기 만족, 그것이 내가 말하는 사랑이냐.
“그랬었구나.”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글도 생활도 자신이 없어지니 자연 선생님께 연락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하루도 선생님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래 그렇단다. 열정 만한 재능은 없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며 부딪치는 숱한 문제들은 그 문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길이 보인단다. 글을 쓰는 일은 그 문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지. 이런 얘기는 니 문제에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태평스런 설교라고는 생각하지마. 어차피 고통은 자기 혼자만의 몫이어야 하니까. 삶이란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니지. 얼마나 숱한 고통을 주어야 순해질까 싶어. 그러나 내 경우 글을 쓰면 생활도 열심히 하게 되더라. 밥맛도 좋아지고. 창작은 배신의 기억만을 남긴 첫 사랑 같은 거야. 절대 딱지가 앉지 않는, 언제나 생살이 찢기는 상처, 그러나 수백 되의 피를 쏟아도 오히려 생활의 밀알이 되지. 삶이 엄정하다면 그걸 극복하는 길 또한 지독한 도전이어야 되지 않겠니?”
“분풀이한답시고 다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습작 노트를 다 태웠었어요. 습작노트를 태우는데 웬일인지 눈물이 났어요. 뭐 위대한 작가의 습작이라고, 우습죠? 그러나 이젠 달라졌어요. 글을 쓰기로 했어요. 그래 그런지 모의고사 성적도 한층 나아졌어요. 3학년 학기초에 자살 소동을 벌인 애가 있는데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어요. 미현이라구. 근데 미현이도 작가가 꿈이라지 뭐예요. 지도 죽기 전에 습작노트를 찢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열심히 글을 쓰고 있어요. 우린 둘 다 교지 편집반에 들었는데, 교지 담당 선생님이 너무 멋있어요. 제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선생님이에요.”
혜진이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혜진이에게 익은 고깃점을 올려 주며 동지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여고시절이란 그건 것이다. 사람살이에 별이 될 수 있는 시기, 나도 야간 자율학습을 빼먹고 옥상에 올라가 친구와 별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남선생님이 유부남이란 사실에 좌절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 사랑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지사연하기도 했었다. 동성 친구에 대한 깊은 사랑을 키울 수 있는 때도 그때다. 남자애들은 죄다 몸껍데기만 가진 유치한 족속들이라고 폄하하고, 스스로의 순결함에 취해 함빡 웃는 것만으로 입안 가득 별을 깨물 수 있는 시기, 그래서 먼 훗날 흩어져 세상의 한가운데로 걸어 갈 때 깃발이 되는 추억을 쌓는 시간. 우리 혜진이도 꼭같은 길을 걷고 있구나. 그래서 니 주위가 이렇게 밝은 거구나.
“친구랑 이번에 소월문학상에 응모해 보기로 했어요. 우리의 새로운 출발을 보다 확실히 하는 의미에서 뭔가 현실적인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워낙 시간이 부족해서 이 번엔 시를 한 번 써 봤어요. 크게 기대하지는 않지만 다시 글을 쓰기로 한 것만은 의미로울거예요. 그런데 우리 작문선생님께서 미혜 글을 보고 너무 난해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손을 볼 수가 없다고 고백했대요. 그래서 저는 내놓지도 못했어요. 불현듯 찾아와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선생님 도와주세요.”
그렇지. 글을 쓰는 일은 혼자 하는 일이다. 철저한 고독 속에서 자기와 세계와의 맞대면, 그러나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 힘든 일을 세상에 대해 면역이 약한 너희 혼자서 하려면 얼마나 막막할 겐가. 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를 지망했던 단짝 미경이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당당히 등단했을 때 했다. 이래서 지방대다 싶었다. 학생들에게 어떤 기대도 걸지 않았고 아무런 열의도 보이지 않는 교수들.
혜진이는 외롭다는 말을 거듭하며 습작시 세 편을 내놓았다. 안도현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연어’와 ‘어느 난장이의 가방’ ‘염원’ 세 편이었다. 혜진이의 정신적 성장을 첫 눈에도 알 수 있었다.
“그새 많이 컸구나. 힘자랄 때까지 혼자 하지 말아라. 금새 지 친다. 세상에 대한 불건강한 혐오감만 키우게 될 수도 있어. 내 힘이 부치면 주위에 문재가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마.”
나는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상추쌈을 싸는 혜진이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나는 미혜를 생각해서 시를 너무 난해하게 쓰지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가장 구체적인 세계의 형상화, 그것이 시아니던가. 지나친 감정 노출이나 곡예는 환상이나 허상이다. 그건 글을 비틀거리게 하고, 읽는 사람마저 휘청거리게 한다. 혜진이를 위해 노트를 한 권 사기로 했다. 노트를 고르며 어쩌면 나도 다시 글을 쓸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기대에 손가락이 떨렸다. 현실의 한 높이 도움닫기, 나의 네 시간 통근의 노역마저 새로운 의미로 바꿔 줄 일, 어쩌면 그건 끝없는 배신에도 굴하 지 않는 습작열 일 지도 모르겠다.
혜진이가 삐삐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왠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혜진이가 그 나이 때의 치기 만만함마저 갖추고 있는 건 정말 다행이다. 나는 아버지를 해방시키던 어른스러움과 삐삐 여기저기 스티커를 부친 단순한 쾌활함까지 고루 갖춘 혜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다음주 퇴고한 원고를 가지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나는 혜진이의 삐삐번호를 소중하게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