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다 되어 가는 동창들은 가끔 내가 보내는 편지를 기다린단다. 컴퓨터 앞에 앉아 제대로 다듬지 못한 詩를 띄우는데도 반응은 감동적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었다. 편지를 쓰던 감상으로 하얀 봉투에 꽃씨를 담듯 그림을 넣은 글을 부쳤다. 벌써 20년만인가? 교육자료에서 시로 추천을 받고 또 국영 방송국에서 희극 입선을 하고 얼굴을 내밀게 되는 게……. 그 동안 마흔이 넘으면 생의 아픔을 찍어내듯 글을 쓸 수 있으리란 막연한 예감에 이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그런데 이 나이에 동화라니?
어느 해, 도시 빈민아들을 가르치면서 참 가슴이 아렸었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가정사라는 고통의 무게를 진 아이들을 만나면서 일기장 끄트머리에 써주는 짧은 응원으로는 안 되는 무언가가 동화를 쓰게 하였다. 어쩌면 이제는 고전이 된 '빨간 머리 앤'이나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같은 강인한 주인공으로 그 아이들을 자라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크레파스 그림이 걸린 교실에서 움직이는 아이들은 모두가 내 동화 속의 주인공이다.
지독한 개구쟁이도 말을 잃은 자폐아도 내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 세계를 들려준다. 그들이 움직이는 공간마다 동화 속 배경이 된다. 기뻤다. 아마 내 앞에 널려진 많은 글감을 주워 담으란 뜻으로 알고, 늦게나마 아이들 꿈을 담을 그릇 하나를 빚는 기쁨이랄까? 투박한 질그릇 하나 빚어서 두고두고 아이들 동화 나라에 남기고 싶다.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시던 부모님, 어렵게 공부하여 지금은 교육이라는 공통 화제를 안고 사는 동생들, 그 동안 글을 쓰라고 용기를 준 친구, 동료들에게 이 소식 전하며, 올 겨울 편지에 담을 자작시 한편을 동봉한다.
우리 집 창을 가린/벚나무가/내 말동무다./바람이 훑고 가버린/앙상한 가지 하나가/내 그림이다/내 소설이다./연둣빛 잎사귀에서/만개한 꽃으로/무성한 잎사귀로/노랗게 물든 단풍으로/지금은 스산한 겨울이란다./'인생은 이런 거야'/끝내 맨몸을 보이며/벚나무가 말한다.(詩 '벚나무가 말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