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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멈출 곳에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부”

공부의 발견
정순우 지음/ 현암사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다. 지식은 물론, 그 지식을 바르게 쓰는 법, 중심을 잃지 않는 법에서부터 세상을 구하는 법까지 그 모두를 포함한 것이 바로 공부(工夫)다.


‘교육열’은 있어도 ‘학구열’은 없는 나라. 칼 야스퍼스 식으로 말하면 ‘기술을 가진 네안데르탈인’만 우글거리는 나라, 대한민국. 유치원가기 전부터 시작된 공부는 대학에 가도, 취업을 해도 끝이 나지 않는다. 저자(한국학대학원 교수)는 말한다. ‘교육이라는 뜨거운 불가마에 들어앉은’ 나라가 바로 이 땅, 대한민국이지만, 정작 ‘공부를 왜 하는 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지지는 않는다고.  ‘공부의 발견’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조선시대 현인들에게 구하고 있다. 

공부, 왜 하는 가=조선은 교육열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사회였다. 선비 한 사람 한 사람은 치열한 구도자처럼 학문에 열중했으나, 수만 장의 고문서를 뒤져도 교육열로 지금처럼 사회적 물의가 일어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향교는 언제나 비어 잡초가 무성하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불러 모으기에 급급했다. 서당에서 훈장들은 아동들을 열심히 지도했으나, 치맛바람이 일어나거나 학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길러내지도 않았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공부는 참된 ‘나’를 찾아가는 긴 도정이며, 공부를 통해 인간의 마음에 있는 참된 본성을 회복하고 성인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치열한 자기극복의 과정이었다. 즉, 공부는 ‘나아감’과 ‘물러섬’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이다. 사물이나 인간에 대한 지식은 물론, 그 지식을 바르게 쓰는 법, 중심을 잃지 않는 법에서부터 세상을 구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를 포함한 것이 바로 공부(工夫)였다. 우리는 지금, 왜, 공부를 하고 있는가. 

조선(朝鮮) 지성 6인의 공부론=퇴계 이황, 순암 안정복을 비롯해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교산 허균, 다산 정약용. 책이 다루고 있는 6인의 선인은 자기만의 방법론으로 공부를 했지만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남명 조식이 남긴 글을 보자. “살아있는 법은 모름지기 마루 아래 수레바퀴 깎는 사람이 이해했나니, 다섯 수레 책의 의미도 무사(無邪)한 가지 속에 있었네.” 모든 공부는 삶과 함께 해야 사심이나 악의가 없다는 뜻이다. 화담 서경덕은 “멈출 곳에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것이 공부”라고 말했다. 그의 시조 ‘술회(述懷)’에는 이런 공부철학이 잘 드러난다. “책 읽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도 두었건만/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공부가 의심하지 않음에 이르니 쾌활함을 알게 되고/ 헛되이 백 년 사는 사람만은 면하게 되었네.”

이황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철학담론만을 일삼았다는 오해도 받고 있지만 그의 일기와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무엇보다도 일상의 삶을 중요시했고 유혹이 많은 일상을 지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식은 ‘목이 빳빳한 선비’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상과 한 발짝 떨어져 지냈지만 세상을 향한 고민을 져버린 적이 없었다. 역사의식과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며 공부가 공허해지지 않는 길은 결국 세상을 품는 마음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균은 당대에 ‘세상과 불화한 자’라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과감히 관념에 맞서 인간을 감성과 미학적 상상력의 대상으로 바라보려 했다.

안정복은 공부를 여공(女工)의 '공(工)'자와 같고 부(夫)자는 농부(農夫)의 ‘부(夫)’자와 같아 여공이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농부가 농사에 힘쓰듯 공부를 해야 한다고 풀이했다. 다산 은 이론적인 앎과 실천적인 익힘이 동시에 이뤄져야 참된 앎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통점이 보이는가. 그들은 진리의 세계를 탐구하면서도 일상의 삶을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지금, 왜, 공부를 하고 있는가.



향교는 언제나 비어 잡초가 무성하고, 성균관은 생원들을 불러 모으기에 급급했다. 서당에서 훈장들은 아동들을 열심히 지도했으나, 치맛바람이 일어나거나 학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길러내지도 않았다. 조선은 ‘교육열’보다 ‘학습열’이 높았던 것이다. 사진은 ‘평생도’ 중 과거시험장의 모습을 그린 ‘소과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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