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초록 자장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라 베르쇠즈(La Berceuse), 1889>는 모성애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제목 <라 베르쇠즈>는 프랑스어로 ‘요람을 흔들어주는 여자’, 즉 ‘자장가를 불러주는 이’를 뜻한다. 고흐가 프랑스 아를에서 지내던 시절, 가까이 지내던 우체부의 아내이자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어거스틴 룰랭 부인을 모델로 그린 초상화이다.
아이를 재우는 자장가를 떠올려보자. 조용히 흥얼거리는 엄마의 노랫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든다. 요즘같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이 많은 시대에, 위안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고흐는 이 포근한 순간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작품 배경을 살펴보면, 초록빛 색채와 부드러운 선율 같은 문양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위로’를 그려냈다. 이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눈앞에서 초록빛 자장가가 은은히 흐르는 듯하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우리 선생님들과 이 그림은 뭔가 공통되는 점이 있어 보인다. 이제 천천히 그림 속으로 들어가, 고흐가 전하는 이야기를 함께 느껴보자.
초록빛 요람을 흔드는 어머니
실제로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며 ‘지금 우리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행복·희망·사랑이 필요하다’고 편지에 적었다. 말 그대로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북돋워 줄 마음의 자장가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초록 벽지 배경에 앉아 있는 어거스틴 룰랭 부인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두 손으로 보이지 않는 아기의 요람과 연결된 밧줄을 쥐고 있다. 살짝 아래로 향한 시선과 다소곳한 자세에서 아이를 재우는 어머니의 헌신이 느껴진다. 화면에는 아기 모습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밧줄 끝 너머에 있을 아기를 향한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흐는 아기의 존재를 이렇듯 암시함으로써 감상자가 장면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만든다.
고흐는 이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 그는 완성된 그림을 자신이 그린 길쭉한 해바라기 그림 두 점 사이에 걸어 마치 세 폭 제단화1처럼 전시하기도 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제단화 대신, 현실 속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을 세상 속 성인(聖人)처럼 표현했다. 그는 친구 고갱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폭풍 이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고된 사투를 벌이는 가난한 어부들이 선실에 이 그림을 걸어두면, 배의 흔들림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어린 시절의 자장가를 떠올릴 것’이라고 썼다. 그만큼 이 초록빛 자장가에 모두가 공감하고 위로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색과 선이 만들어낸 서정적 자장가
그림을 감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색이 눈에 들어온다. <라 베르쇠즈>에서는 한눈에도 초록색과 붉은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배경 벽지와 모델의 옷은 짙은 초록색이다. 대비되는 색으로 벽지에는 붉은빛이 도는 꽃들이 만개해 있다. 초록과 붉은색은 서로 보색 관계여서 나란히 쓰이면 서로를 더욱 선명하게 돋보이게 한다. 고흐는 이 보색 대비를 적극 활용해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묘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초록 배경 속에 붉은 점 문양과 꽃송이들이 리드미컬하게 흩어진 모습은 마치 색채로 연주하는 잔잔한 자장가 같다. 실제로 미술평론가들은 고흐의 이 그림이 색으로 빚어낸 자장가처럼 보는 이를 편안하게 감싸준다고 말한다.
색채만큼이나 선과 형태도 중요한 요소다. 룰랭 부인은 전체적으로 두꺼운 검은 선 테두리로 비슷한 초록 배경에서 부각되도록 하였고, 배경의 꽃과 잎사귀도 뚜렷한 색면으로 단순화되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대상을 단순화하던 그의 스타일이다. 머리 부분의 사실적 묘사도 있고, 몸을 단색으로 채색하여 평면화하는 대범한 형식이다. 고흐는 당대 유행하던 일본 판화처럼, 평면화하여 선명한 스타일과 과감한 구도로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 부인의 손에 들린 줄은 화면 아래에서 위로 대각선 방향으로 뻗어 있는데, 이 시선을 유도하는 사선의 밧줄은 그림에 잔잔한 움직임을 더해준다. 밧줄을 통해 우리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요람이 흔들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림 전체가 앞뒤로 흔들리는 동세를 품은 듯하여, 보는 이에게 자장가의 포근한 리듬감을 준다.
고흐의 트레이드마크인 질감 역시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고흐는 두꺼운 유화 물감을 나이프와 붓으로 듬뿍 떠서 캔버스에 올리는 기법을 즐겨 썼다. 그래서 그림 표면에는 울퉁불퉁 도드라진 입체적인 질감이 남는데, 이를 미술용어로 ‘마티에르(matière)2’라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룰랭 부인의 녹색 치마와 벽지의 꽃무늬 곳곳에 물감이 톡톡 찍혀 있다. 작가가 물감을 찍으며 붓 터치를 넣었을 그 순간을 상상해 보자. 마치 자장가의 리듬을 시각화한 것 같다. 어머니가 아이를 재우며 불러주는 자장가의 잔잔한 리듬이 눈앞에서 그리고 요람으로 이어질 듯 우리 마음도 흔들린다.
고흐는 이러한 미술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각뿐 아니라 마음에 말을 건다. 그림을 한참 바라본다면, 초록색의 차분함과 붉은색의 온기가 어우러져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엄마가 아이를 품에 안고 흔들어주며 “잘 자라”고 속삭이는 듯한 시각적 자장가가 우리를 토닥여주는 것이다. 고흐 자신도 이 그림에서 큰 위안을 얻었는지,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자장가를 불렀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만큼 이 작품은 작가에게도, 감상자에게도 치유와도 같은 힘이 있다.
교실에서 만나는 따뜻한 위로
이 그림이 전하는 무언의 감동은 자연스럽게 ‘엄마’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 각자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힘들 때 기대어 쉴 수 있는 심리적 안전기지가 되어준 분이 아닐까. 흥미로운 것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교사에게도 이러한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흔히 교사를 ‘제2의 부모’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지식 전달을 넘어 아이 한 명 한 명의 마음을 살피고 보듬는 일과 맞닿아 있다. 아이들이 힘들 때 언제나 찾아와 기대어도 좋은 존재, 바로 엄마와 선생님이 그렇다.
요즘같이 바쁘고 어려운 학교현장에서, 선생님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위해 애쓰고 있다. 때로는 교실 한편에서 상심한 제자를 다독이고, 때로는 말없이 지켜봐 주면서 정서적 버팀목이 되어준다.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얻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곤 한다.
<라 베르쇠즈> 속 룰랭 부인의 모습은 우리 교육현장의 선생님들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아이들의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아이들을 위해 흘리는 땀과 눈물, 그리고 가슴 속 깊은 애정은 부모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흐가 그린 어머니가 항상 아이를 생각하며 시선을 그곳으로 돌리듯이, 그리고 요람에 연결된 따스한 손길에서 한없는 사랑이 느껴지듯이, 교사들의 헌신에서도 아이들을 품는 깊은 사랑이 전해진다.
화면 속 짙은 초록색 배경은 어둡고 깊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다. 오히려 밤하늘처럼 포근하게 우리를 안아줄 것 같다. 그 위에 반짝이는 점들과 꽃들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별 같다. 먼 우주 속 공간 같지만, 뒤돌면 우리 바로 뒤편에 있는 평평한 벽 같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의 마음속에도 엄마의 사랑과 함께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가 오랫동안 희망의 빛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