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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찬 바람이 거세다. 기억의 편린 같은 수많은 가랑잎이 아우성으로 떨어지고 가을은 멀리 달아난다. 관절염을 앓는 계절이 절뚝거린다. 이제 기약 없이 추워질 겨울이다. 11월이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기에 알맞다면 12월은 앞만 본 달음박질을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이다.

 

늦가을과 겨울의 초입이다. 지난날 미련을 아쉬워하며 산사를 찾는다. 전년과는 다른 날씨에 단풍은 얼마 보지도 못한 채 흘러내리는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산바람이 불 때마다 갈색으로 오그라진 잎들이 돌계단에서 바둥거리며 구른다. 바스락바스락 낙엽의 부서짐 소리지만 내면으로 들으면 많은 사연이 숨 쉬고 있다. 무수히 흩어진 가랑잎은 돌개바람 불 때마다 혼란스럽게 쓸려간다. 그 모습은 어쩌면 개개인의 사연과 같다.

 

 

몸을 낮추어 늦가을 색을 카메라 앵글에 담아본다. 뷰파인더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아름답다. 문득 지금의 국내외 정치 현실을 보며 우리가 찾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자문한다. 모두가 겸손과 사랑, 넉넉한 마음을 우선으로 살았다면 지금의 혼돈은 조금 나아지질 않았을까?

 

 

겸손은 자신을 낮춤으로 시작된다. 올려다보는 풍경은 힘들고 내려다보는 풍경은 넓고 시원하다. 넓으면 마음이 풍부해지고 무릎을 꿇으면 아름다움을 더 찾을 수 있다. 몸을 낮추는 일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낮은 문이다. 몸을 낮추면 작고 하찮아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섬세한 색과 빛에 마음이 열리고 사랑이 생긴다. 헨리 밀러는 가녀린 풀잎같이 미약한 것이라도 주목을 받는 순간 그것은 신비롭고 경이로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운 하나의 우주가 된다고 했다. 가랑잎 하나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의 영롱함을 담으려면 몸을 낮추어야만 한다.

 

렌즈의 시선을 돌려 은행잎 자욱한 벤치를 담는다. 늦가을 오후 산사의 을씨년스러움을 온몸에 적시며 물어본다. 한 해의 갈무리처럼 삶의 갈무리는 어떻게 하는지, 오롯이 나만의 빛깔로 살아왔는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며 어우러져 살아왔는지 더듬어 본다. 또한 교만한 나머지 작은 생들을 짓밟지 않았는지, 소중한 것을 지나쳐 오지 않았는지 노란 은행잎이 들려주는 침묵의 웅변을 듣는다. 삶은 모든 작은 것이 어우러져 빚어낼 때 값지며 자신만의 빛깔이 된다.

 

 

사람에게 있어 제일 아름다운 모습은 무엇일까? 조금 떨어진 조그만 암자의 선방 앞을 지나며 댓돌에 올려진 흰 고무신 한 켤레를 본다. 짝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 짝과 황혼까지 같이 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인가? 젊은 봄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늦가을 같은 황혼까지 가는 아름다운 사랑은 얼마나 멋진가? 귀밑머리가 희끗 해져도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중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같이 살아온 시간, 독버섯 같던 지난 일도 승화되면 아련한 추억으로 쌓인다. 삶의 못 자국은 그대로이지만 밤하늘의 별처럼 아롱져 맺혀가면 참 좋은 삶을 걷는 것이다.

 

 

사랑이 있는 풍경은 언제나 아름답다. 사랑은 내가 베푸는 만큼 돌려받는다.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는 일이다. 아무것도 되돌려 받지 못한다고 원망하거나 후회할 필요도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 마음으로 서야만 완성된 사랑을 포옹할 수 있다. 늦가을 산사는 바람, 새, 낙엽 소리로 넉넉함을 풀어 놓는다. 은은한 불경의 메아리가 산속에 스며들고 마음도 물들인다.

 

우리는 남을 칭찬하는 일에 참 인색하다. 대개 칭찬보다는 단점을 찾는 데 익숙해져 있다. 단점을 찾으려면 누구를 대해도 나쁘게 보려 한다. 그래서 자신도 나쁜 면을 갖게 된다. 남의 나쁜 면을 말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그 말을 듣게 된다. 우리는 남의 좋은 면, 아름다운 면을 보려 해야 한다.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만큼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남의 좋은 점을 찾다 보면 자신도 언젠가 그 사람을 닳아 가게 마련이다. 누구를 만나든 장점을 보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많이 칭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새겨야 한다. 말은 할 때마다 좋은 말로, 그 말에 진실만을 담는 예쁜 마음 그릇을 가질 수 있다면 이 산사의 늦가을 숲처럼 넉넉한 행복을 수놓을 수 있을 것이다.

 

조화로운 인간관계는 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면 상대는 문을 열지 않는다. 받기만 하려는 마음이 넘치면 상대는 문을 열기는커녕 경계하는 마음이 된다. 그래서 감사는 참 아름다운 말이다. 그 감사가 있는 곳에 인정과 웃음, 기쁨이 있고 항상 넉넉함이 있다.

 

산사의 늦가을 맞이. 살면서 질투하지 않고 늘 겸손한 마음과 긍정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자신의 이익을 좇지 말고 배려하는 마음이어야 매사에 온유한 성품이 됨을 늦가을 산사의 숲은 알려준다.

 

우리의 삶. 그것은 산사의 가을 숲을 헐렁하게 돌아보며 걷는 것처럼 자유롭진 못하다. 그러나 세상에 빛나는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 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귀한 사랑과 진실을 위해 소중한 것을 희생할 때 잔잔한 행복을 물들일 수 있다.

 

산 정상으로부터 물드는 초겨울 색이 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너무 늦지는 않았다. 산사의 숲은 느릿느릿하게 걸어야 제맛이다. 범종각의 종소리가 조용히 퍼져나간다. 지혜와 어리석음은 모두 마음의 손에 달려 있다. 시간은 계절 속에 머물고 계절은 시간 속에 사연을 숙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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