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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에세이, 한 페이지] 어떤 만남

사범대를 갓 졸업한 3월. 읍 소재지 학교에 발령받았다. 그때 내가 담임했던 5학년 2반에 재구라는 아이가 있었다. 출석을 부르고 첫 시간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창가에 앉은 순영이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 저 재구와 앉기 싫어요. 재구 냄새가 코를 찔러 숨도 못 쉬겠어요.”

 

재구를 앞으로 불러냈다. 여기저기 해진 검은 바지, 국방색 점퍼를 입고 있다. 언제 빨아 입었는지 때가 꼬질꼬질하다. 머리는 기름이 졸졸 흐른다. 나도 재구 몸에서 풍기는 냄새가 역했다. 한겨울 한 번도 빨아 입지 않은 옷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순영이에게 내일 자리를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날 수업을 끝내고 재구를 남겼다.

 

“재구야. 순영이가 너무 밉지?” 재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말이 없다.

“재구야. 선생님이 널 야단치는 거 아니야. 오늘 목욕하고 옷도 갈아입자.”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재구가 울음을 ‘펑’ 터뜨렸다.

 

“재구야. 네 잘못 아니야. 선생님이 미처 몰랐어. 학교 숙직실에 선생들이 쓰시는 목욕탕이 있어. 그곳에서 목욕해. 네 옷을 사 줄게 ”

 

간신히 다독거리고 달래서 숙직실 목욕탕으로 데리고 갔다.

 

“재구야. 혼자서 목욕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인다. 마음이 좀 누그러진 것이다. 옷을 벗겼다. 내복에는 보리쌀만 한 이가 여기저기 기어다니고 머리에 붙은 서캐가 하얗다.

“재구야. 선생님이 나오라고 부를 때까지 씻고 있어. 옷을 사러 나갔다 올게. 문을 잠가 놓았으니 안심해도 돼.”

 

그때 사택에 사시는 양호 선생님이 숙직실을 지나시다가 무슨 일이야고 들어오셨다.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래요? 참 내. 선생님이 재구 옷을 사러 나가시겠다고요? 첫 월급도 아직 멀었는데 무슨 돈이 있어요. 집에 중 3인 큰 애가 입던 옷이 있는데 입을 만해요. 딱 맞을 거예요.”

 

양호 선생님이 내복 한 벌과 바지와 상의를 가져오겠다고 가셨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한 시간 반 후 잡무를 마치고 숙직실로 갔다. 양호 선생님이 가지고 온 옷을 재구에게 입혔다. 검정 바지에 넉넉한 회색 점퍼가 너무 예쁘고 잘 어울린다. 손톱과 발톱까지 깎아주고 계셨다. 재구가 나를 보자마자 좋아서 싱글벙글거린다. 재구를 웃기려고 “양호 선생님이 엄마 같지? 이젠 엄마라고 불러!”라고 했다.

 

“엄마는 작년 봄에 돌아가셨어요. 아빠하고 둘이 살아요. 아빠는 시장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와요. 아빠가 일찍 아침밥을 해놓고 가면 저 혼자 아침밥, 저녁밥 먹고 자요.”

 

양호 선생님이 재구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혀끝을 찬다. “재구야 넌 내가 보니까 뭐든지 잘할 수 있는 아주 똑똑한 아이야. 선생님 집이 학교 안에 있어. 저녁에 놀러 와, 맛있는 것도 해 줄게. 중3 형도 있고. 중1 누나도 있어. 공부 잘 가르쳐 줄 거야. 응?”

 

양호 선생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재구의 눈빛이 반짝거린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갔다. 순영이가 내게 바짝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선생님, 재구랑 같이 앉을게요. 어제는 잘못 했어요”라고 말했다.

 

창가에 앉아있는 재구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깎은 머리. 훤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인다. 아이들이 재구 옆에 몰려와 무어라 조잘거린다. 그날부터 재구는 열심히 공부했다. 양호 선생님이 무척 고마웠다.

 

교육은 사랑이다

 

3월 말 일제 고사가 끝났다. 재구의 전 과목 평균 성적이 90점이다. 반에서 1등이다. 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그땐 학년이 올라가고 한 달이 지나야 반장을 뽑았다. 반장 선거 결과 재구가 반장이 됐다. 그날부터 매시간 “차렷, 경례!”하는 재구의 모습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어느 날 양호실에 들렀다.

 

“선생님, 재구를 잘 돌보아 주셔서 딴 아이가 되었어요. 너무 고맙습니다. 재구가 3월 말 일제 고사에서 일등을 했고 반장까지 되었으니 이 모두가 선생님 덕분입니다”라고 고개를 조아렸다.

 

“아유, 선생님 칭찬이 너무 과해 어쩌지요? 재구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와요. 형과 누나가 공부를 잘 가르쳐줘요. 어제 일요일은 형, 누나와 함께 한나절 운동장에서 공놀이했고 저녁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같이 먹고, 시민회관에 가서 영화 구경을 했어요. 재구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내 손을 자꾸만 만지작거려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서 한참을 머뭇거렸어요.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재구의 손을 꼭 잡아 주었지요.”

 

“감사합니다. 양호 선생님, 아들이 하나 생겨 2남 1녀네요. 전 총각이라 어떻게 재구를 돌보아야 할지 막막해요. 재구를 아들이라 여기시고 끝까지 잘 보살펴 주세요.” 간곡히 부탁드리고 양호실을 나왔다.

 

어느 날 반 아이들 일기장을 걷어 교무실로 가지고 왔다. 아이들의 일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재구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전략)… 전에는 선생님이 무서웠다. 마주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이제는 선생님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양호 선생님을 엄마라고 불렀으면 좋겠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엄마‘ 하고 불러야지….’

 

재구가 안타까워 눈을 감았다. 교무실 창 너머로 재구가 환히 웃고 있다. 눈을 떴다. 창밖엔 흰 구름만이 두둥실 떠나갈 뿐이다. 재구는 양호 선생님의 사랑을 흠뻑 받아 동산의 물 댄 나무처럼 무럭무럭 자라가고 있었다.

 

‘교육은 사랑이다. 아이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해진다. 열심히 공부한다. 불행하다는 걸 느끼게 되면 어디론가 튀고 싶어진다. 가만히 있다가 튀는 메뚜기처럼 튀고 만다. 때는 이미 늦었다.’ 이것이 나의 교육 좌우명이 됐다.

 

그해 가을 어느 날이었다. 낯선 사람이 교무실에 들어왔다. 재구 선생님이 누구냐고 묻는다.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고 목발을 짚고 있다. 내가 재구 담임이라고 했다.

 

“아이고. 선상님. 죄 많은 재구 애비랍니다. 홀아비가 되어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시장에서 짐을 나르느라고 꼼짝달싹 못 해요. 며칠 전 다릴 다쳐서 일은 못 하고 이참에 선상님이라도 뵈어야겠다고 왔습니다. 선상님. 재구를 닭 모가지처럼 비틀어도 괜찮으니 제발 사람만 만들어주세요.”

 

당시는 학부모는 절대적으로 선생님을 신뢰했다. 선생님에게 매우 긍정적이었다. 학교장은 소신껏 학교를 운영했고 선생님은 마음 놓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어느 선생님이 아파트 단지 내 학교 근무가 싫어서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내신을 냈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망원경으로 운동장이나 교실 안을 들여다보고 선생님의 일거일동을 감시하고 학교장에게 콩이니 팥이니 따져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교육 3불신’ 시대가 됐다. 학부모는 교사를 불신하고, 학교 교육을 불신하고, 교사는 학부모가 미덥지 않아 무척 조심스럽다. 공교육은 뒷전이고 학원에 매달리는 꼴이 되어 교육은 엉망진창이다.

 

일흔 넘은 제자의 전화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총각 선생님 때 겪었던 온갖 일들이 하나의 전설이 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재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기절할 뻔했다.

 

“선생님, 살아 계셨군요. 저 일흔이 넘었어요. 한평생 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서점에 갔다가 월간 샘터에 선생님이 쓰신 글을 보고 편집실에 사정해서 연락처를 알게 됐어요. 그때 양호 선생님은 제 꿈대로 장모님이 되셨고 오래전 돌아가셨어요. 저는 중화학 공업 단지 수석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고 2남 1녀의 첫 할아버지가 …. 찾아뵐게요.”

 

이야기는 끝도 없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미스터리다. ‘운명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요, 숙명은 뒤에서 날아오는 돌이다’라고 했던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은 피할 수 있지만, 뒤에서 날아오는 돌은 맞을 수밖에 없다. 숙명은 자신이 인정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운명은 자기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재구는 양호 선생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숙명을 운명을 바꾼 것이다. 하여간(何如間) 인생은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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