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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칼럼

서늘한 기운이 쓰적쓰적 겨드랑이 속살을 간질이며 황금빛 들녘으로 유혹한다. 매년 시월 추수를 앞둔 벼 논의 황금빛 물결은 환한 두근거림으로 눈부시게 한다. 특히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들녘은 그 어떤 재료나 기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황금빛 가을 색 그 자체이다. 이 색은 일사량과 태양의 고도, 원근에 따라 농담을 달리한다. 영글어 고개 숙인 벼 이삭의 색과 날렵한 잎새의 가장자리부터 누레지는 벼잎이 어우러져 일렁대는 물결은 파란 하늘에 대비되어 가을 색 선명한 빛이다. 결실의 빛, 생명의 빛, 기다림의 빛이다.

 

 

가을 색 황금빛 벼 논의 물결은 멀리서 봐야 한다. 고개 숙여 가까이 보면 조화로움을 느낄 수 없다. 먼 곳을 응시한 채 약간 떨어진 곳에서 소박한 마음으로 봐야 한다. 그러면 색의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가을 색 합창을 마주할 수 있다. 이런 거리감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달을 사랑해 붉게 변한 토기의 눈과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 년에 걸친 플라토닉한 사랑 이야기다.

 

토끼 눈이 붉은 이유가 있다. 토끼는 달님을 사랑하여 밤마다 이산 저산 마루에 걸린 달을 찾아다녔다.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자연히 앞다리는 짧아졌다. 그리고 밤을 새워 산을 넘어가면 또다시 달은 다른 산마루에 걸려 있다. 이렇게 밤마다 달님을 쫓다 보니 눈이 붉어졌다는 이야기이다. 토끼가 둥근 달의 환한 아름다움만 보려고 하였다면 좋았을 것인데 소유하고 확인하려다 보니 아픔의 훈장이 다리와 눈에 남은 것이다.

 

토끼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유년 시절 엄마 등에 업혀 비 온 뒤 가로지른 무지개를 잡아주라고 때 쓰다 등짝을 맞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황금빛 들녘을 그리워하고 예쁜 색을 갖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아름다운 색과 그리움의 감상은 거리가 있어야 한다. 거리감을 편지로 극복하며 연정을 주고받은 영원한 사랑으로 남은 플라토닉 사랑 이야기를 가을 색에 적셔본다. 바로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함께하지 못한 사랑 이야기이다.

 

청마 유치환은 통영여중 재직시절 연인에게 작업실에서 5000통의 편지를 써서 중앙동 우체국에서 보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행복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복’이란 시의 일부이다.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낸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이고 이영도는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하나 둔 상황이어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20년 동안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이 편지는 6·25전쟁으로 이전 것은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당시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 년에 걸친 플라토닉 사랑은 긴 기다림을 편지를 통한 애달픔을 담아 마음을 움직인 예이다. 요즘 MZ세대에게는 전설과 같은 에피소드일 것이다.

 

요즘 우리의 일상은 손 편지 쓰기와 활자 책과 마주함이 소원해지고 있다. 눈 떠자 마다 스마트폰을 더듬고 뉴스와 날씨를 확인한다. 하루의 시작 시각의 뉴스는 거의 언제나 세상의 문젯거리나 혼란스러운 일, 사람들이 죽어가는 전쟁 기사가 많다. 그리고 SNS에 접속하여 트위터와 메일을 확인하고 하루의 다양한 일의 생각이 거미줄처럼 얽히기로 시작한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 어느 통계에 따르면 사람은 하루에 6만 가지 생각을 하는데, 좋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라 한다. 이런 부정적인 정보와 생각의 홍수에 끌려다니다 보니 SNS상의 대화가 실생활에도 일어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음주운전, 마약 남용, 묻지마 폭력 등이다. 사회가 왜 이렇게 변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은 스트레스와 유대관계 단절, 물질 남용의 증가를 지적하며, 이에 따라 이성과 감성이 도덕적 사회적 행동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자연의 본성이 아닌 기술과 정보, 과학의 벽에 기댄 사람의 욕심은 화를 불러온다. 그 인기에 영합하는 유튜버나 편리성을 앞세운 문자메시지, 주목을 받으려는 가짜뉴스는 판단의 오류를 초래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순수에 시점을 두는 가을 색 편지를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감성과 풍요를 깨울 수 있다. 가을 색 짙어지는 들녘 노을이 진해진다. 눈길이 닿는 어디인들 황금물결로 아름답지만, 여름을 견뎌낸 아픔의 지난날들로 더 곱고도 풍요로운 가을의 감동이 눈물 맺는다. 가을엔 모르는 이도 친구가 되어 편지를 쓰고 싶은 계절이다.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질화로 같은 열정을 귀 기울이면 보이는 것은 시가 되어 따뜻한 가슴이 된다.

 

이 가을 단편적이고 가까운 것에 집착하지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낭만으로 여울진 들꽃 향기, 가을 이야기와 마음속 울림의 설렘까지 가슴 뛰게 가을 색 손 편지를 물들여 보자.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처럼 편지를 통하여 사유와 반추하는 시간을 가지면 팍팍한 일상의 수월함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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