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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우리나라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은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부모들의 교육열은 학교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사교육이라는 경쟁적인 교육을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 국민의 높은 학력과 경제성장은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주목을 받고 있다. 교육은 한 인간의 삶의 질뿐 아니라 국가 성장의 원동력이므로 모두가 관심사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그 변화에도 민감하며 모든 국가가 교육 개혁을 위해 앞을 다투고 있다. 즉 다가올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이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가진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프로젝트 개발은 보이지 않은 전쟁이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디지털 혁명은 인터넷 붐을 일으켰고, 각종 전자 기기의 대중화는 정보화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디지털은 국가산업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를 몰고 왔다. 스마트(smart)화, 인공지능화, 상호 연결성, 맞춤화, 개방화 등을 그 본질적인 속성은 제2의 디지털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스마트 시대, 세상은 분명히 변화하고 있다. 스마트 기기, 스마트 사회, 스마트 경영 등은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 각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말이 바로 ‘스마트’다. 휴대폰에서 시작된 스마트 혁명은 단순히 전자 기기의 컨버전스(convergence)와 다양한 컨텐츠(scontents)·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의 이용이라는 차원을 넘어 국가 산업,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큰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삼성과 LG는 이러한 분야에 기업의 명운을 걸고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요즘 우리 교육의 새로운 컨셉(concept)인 정보통신기술(ICT)의 결합에 의한 스마트교육이다. 스마트 교육이란 쉽게 말해 물리적인 공간과 가상적인 공간이 통합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시대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여 방대한 양의 정보나 자료를 접할 수 있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교실 안으로 끌어들여 학습할 수 있으며, 학습자의 수준에 맞게 가공하여 사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스마트교육은 모든 학습자의 요구와 수준, 그리고 흥미를 고려한 수준별 맞춤형 교육과 질 높은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미래와 사회 변혁을 위해 필요한 가치, 행동, 삶의 방식을 배움으로써 행복한 사회를 지향하는 교육이라고 수 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질 높은 교육을 위한 스마트 ESD(Education Sustainable Development) 교육 역량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 교육은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높은 성과도 많았지만 그에 따른 문제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교육의 획일화, 입시 위주의 교육, 과다한 교육열과 경쟁, 진로나 적성교육의 부재, 오로지 한길만 원하는 사회적 시스템, 인성교육의 부족 등이다. 특히 산업사회에 필요로 했던 대량 생산을 위한 교사 중심의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게다가 경쟁적인 대학입시의 과도한 지식 교육은 대내외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주입식 교육을 ICT 및 스마트 기술을 활용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ICT 강국답게 매우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는 스마트폰이 2,000만대 이상이 보급되었으며, 아이패드, 갤럭시탭 같은 태블릿 PC도 학교 현장에 보급될 준비를 하고 있다. 애플에서는 디지털교과서 사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발표했고, 정부도 2015년부터는 모든 교과의 디지털교과서를 전학교에 전면 보급하려는 등 사회가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 이에 우리 학교현장에 있는 교사와 관리자, 학생, 학부모를 비롯한 교육공동체의 마인드가 스마트 교육에 적합한 패러다임을 갖추어가고 있다. 곧 다가올 스마트 시대 교육환경은 까다로워지고, 교육수요자의 니즈는 다양화와 개별화로 더 복잡해질 것이다. 따라서 스마트 교육을 위해 학교에서는 어떤 준비를 하고 대비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스마트 교육을 위한 교육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스마트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학교의 스마트 기기 활용을 위한 기본적인 시설이 마련되어야 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삼성전자 '갤럭시탭'과 애플 시리즈 등 높은 하드웨어 사양을 내세운 100만원 가까운 고가 제품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지난해 말 아마존 '킨들 파이어'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올해부터 국내에도 10만~20만원대 태블릿 제품들이 잇따라 출시되고 있어 스마트 교육을 위한 시설비가 보다 저렴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스마트 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의 개발이 필요하다. 교육은 교육환경이 마련된다고 바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국가가 고시한 교육과정에 의해 교사가 학생을 교육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마트 교육은 스마트 교육과정과 콘텐츠가 뒷받침될 때 가능한 것이다. 셋째는 학생들의 스마트 학습을 지도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스마트 기기의 차별적 특징 중 하나는 동일한 하드웨어 기기를 사용하면서도 소프트적인 요소인 컨텐츠와 애플리케이션을 학생 개인별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해, 학생들이 자신만의 맞춤화된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그러므로 스마트 교육은 교육 수요자인 학생들의 욕구에 맞는 학생중심의 자기주도적인 학습이다. 이러한 스마트학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학생 혼자서 하기 어려운 학습과정을 객관적이고 진단하고, 이를 기초하여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학습을 수행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넷째는 학생지도의 교과내용, 교수방법에 대한 교사의 끈임 없는 전문성 개발이 필요하다. 스마트화 시대에 강조되고 있는 트렌드는 바로 ‘개방’이다. 스마트폰의 차별성을 가져 온 결정적 요인이 개방된 앱 스토어(apparatus store) 구축을 통해 방대한 컨텐츠·애플리케이션 공급 풀(pool)을 확보함으로써, 사용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이용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교사의 지도 내용이 자신이 지도한 학생만이 아니라 모든 반,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공유됨으로 지도내용이나 방법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고 자기 브랜드화를 만들어야 좋은 교사, 훌륭한 교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교사 자신이 브랜드화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가장 열정을 가지고 있는 일에 올인 해야 자신의 핵심역량을 구축하여 영역에서 1인자가 되면 자신의 브랜드가 형성된다. 작은 일이라도 열정의 불이 붙으면 위대한 일로 바뀐다는 것이다. 다섯째는 스마트 기기 활용에 대한 윤리교육이 필요하다. 스마트 교육은 우리 교육에 주는 긍정적인 이점도 많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치 많다. 최근에도 페이스북(facebook)이나 트위터(twitter)등에서 특정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공격의 폐해는 이미 도를 넘은 상태로 심각하다. 마찬가지로 스마트 교육에서도 철저한 컴퓨터 윤리교육 없이는 자칫, 학생 교육의 역효과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스마트 교육은 우리의 선진화된 ICT 기술과 교육이 융합한 교육이며 학생중심의 개별화 교육이다. 따라서 학교와 교사는 이러한 스마트 시대에 대비한 교육환경을 만들어야 새로운 교육변화를 충격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스마트 교육이 진정한 교육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생 개개인이 존중받고 학생중심의 자율적이고 선택적인 배움이 일어나는 특성화된 학교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내는 아까부터 위험하다며 나와는 멀리 떨어진 곳 안전한 곳으로만 다녔다. 나보다 산행을 즐겨하지만 워낙 경사진 절벽에 아까부터 겁을 잔뜩 집어 먹고 몸을 움츠리고 산행을 하는 모습으로 보아 무척 위축이 되어 산행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평소에 월류봉 산행을 간절히 원하였던 곳으로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곳이기에 고향 산천의 아름다움과 정겨움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 흔한 나무계단 하나 없이 아직 인간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행길이기에 더욱 애착이 갔다. 땀이 쏟아지고 숨이 턱에 와 닿았지만 고향산천의 추억이 스린 정겨움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스마트폰과 사진기로 연신 바꾸어 가며 사진 촬영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월류봉은 어릴 때부터 내가 늘 보고 자라왔던 곳이다. 우리 동리는 황간에서 추풍령 쪽으로 2Km 정도가면 오른 쪽 들 가운데 보이는 마을이다. 이름은 광평리라고 하지만 실은 넓은 땅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 크게 문경세재와 추풍령을 들 수 있다. 문경세재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을 하였지만 추풍령은 그렇지 못하였다. 이는 추풍령이란 가을바람에 낙엽 지듯 과거시험에 낙선한다는 인식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이 이 길을 회피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고갯길 또한 좁은 곳이기에 경부선 열차와 고속도로 및 국도가 나란히 지나가는 곳이다. 이러한 곳에 들판이 넓은 광평리는 남쪽으로는 물한계곡으로 향하는 넓은 계곡 사이의 뜰과 서쪽으로 확 트인 황간 향교 앞 가학루와 월류봉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음을 볼 수 있어서 넓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곳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사를 오면서부터 살게 되었다. 외가댁이 면내에서 가장 잘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도 외가댁 농사를 많이 지으며 살았기에 일거리가 늘 많았다. 나는 칠남매의 셋째로 부모님 따라 일하러 자주 다녔다. 일하기는 싫었지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마지못하여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일하다말고 늘 바라보는 곳이 황간 가학루와 월류봉 이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보면 확 트인 실개천과 아련한 들판을 따라 서쪽에서 비치는 아름다운 월류봉의 석양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였다. 절벽위에 우뚝 서 있는 황간 향교 앞의 가학루는 한 마리의 학이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과 왼쪽으로 보이는 월류봉이 황혼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철새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야말로 오래도록 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명화로 하루의 피로를 풀어주는 작품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가는 곳은 항상 월류봉으로 정해져 있었다. 월류봉에는 황간면 소재지에서 걸어 3Km 정도 되어 조금 멀기는 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친구들은 늘 월류봉으로만 소풍간다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월류봉으로 가는 길에 볼 것이 많았다. 월류봉 가는 길에는 용암으로 기암괴석이 능선을 이루는 장면을 볼 수 있었고, 능선이 끝나는 부분에 그림같이 다리가 놓여 있었다. 이 원천교 아래로 백화산에서 휘돌아 내려오는 맑은 물 석천이 흐른다. 물한계곡의 장교천과 추풍령에서 내려오는 소라천이 황간 금상구에서 합천을 하여 황간면 소재지를 지나, 월류봉 입구에서 석천과 합수를 하여 초강천이 월류봉 절벽 아래로 휘돌아 내려가는 것이다. 다리를 건너 원촌리 마을을 거쳐 나오면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깎아지른 절벽이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 강물이 휘돌아 내려가는 강변 넓은 자갈 모래밭이 소풍지였다. 깎아지른 절벽을 올려다보면 절벽에 기묘하게 기암괴석 위에 자리 잡은 소나무와 새들이 오르내리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절벽 아래로 흐르는 물가에 넓은 모래벌판과 자갈 그리고 큰 돌이 한데 어우러져 넓은 백사장으로 펼쳐져 있다. 월류봉 절벽 아래쪽으로 큰 굴이 있는데 이굴은 금광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내 어릴 때는 이곳으로 갈 수 있도록 연결이 되어 있는 구름다리는 월류봉과 어우러져 동양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색다른 풍경을 자아냈던 곳이다. 그래서 근동에서는 황간 월류봉이 아름답다하여 영동에서는 물론 경북김천에 이르기까지 이곳으로 소풍을 오기도 하는 곳이다. 내가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여름에 온 가족이 피서를 한 곳이 바로 월류봉이다. 부모님 모시고 형제들이 트럭에 음식을 잔뜩 싣고 이곳 월류봉 모래사장 강변에 솟 걸어놓고 음식을 해 먹으며 물에 들어가 다슬기도 줍고 고기도 잡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던 곳,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함께 맑은 강물에 들어가 수영도 하고 물장구치며 즐겼던 곳이다.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어떻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냥 자연이 아름다워서 가족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거워하였던 곳이다. 그날 이후 부모님 모시고 월류봉에 간일은 없었다. 사는 것이 무에 그리 바빴는지 그냥 고향 가는 길에 먼발치로 둘러보기만 하고 다닌 지 이순이 넘었다. 고향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는 고향에서 산행을 하자며 약속은 하였지만, 모두가 같은 시간을 만들기가 어려워 약속만 하고 실행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동네친구들과 월류봉과 가까운 백화산을 등산하자는 제의를 듣고 백화산에 오른 일이 있었다. 그 때만 하여도 월류봉에는 깎아지른 암벽으로 등산로가 없어서 산행을 할 수 없는 것으로만 알았다. 백화산은 우리 고향에서 꽤나 높은 산이다. 겨울철에 눈이 쌓이면 백화산은 연꽃모양으로 맑고 투명하다 하여 아름답다는 소문으로 등산객이 자주 찾는 곳이다. 친구들은 백화산에 올라 고향의 모습을 보며 옛날이야기로 옛 추억을 먹으며 즐거워하였다. 하산을 하고 찾아 간 곳이 월류봉이었다. 월류봉 절벽 맞은편에 송시열 선생이 후학을 위해 강론을 하셨다는 한천정사가 있고 옆에 한천가든이 있다. 친구들과 이곳에 들렸을 때 이 아름다운 곳에 식당을 인가해준 행정처사에 모두가 못마땅하다며 한 마디씩 입을 삐죽거리던 곳이다. 모처럼 고향친구들과 만나 옛 추억에 기분이 좋은 친구가 매운탕과 와인을 쏘겠다며 분위기를 끌어 올리는 바람에 모두가 술을 거나하게 먹게 되었다. 아름다운 월류봉에 걸린 달과 친구들이 권하는 술잔 안에도 달이 떠 있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곳에 다시 와서 밤새 달과 함께 노닐다 가겠노라고 다짐만 하고……. 어릴 때 고향마을에서 고향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달은 서편 월류봉에 걸려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달은 손톱마냥 봉우리에 걸려 늘 내 마음을 애초롭게 하였던 곳이 월류봉이다. 한천가든 주인장에게 물어 보았다. 월류봉에 걸려있는 달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언제인가 하였더니 보름쯤이란다. 보름날 이곳에 와서 밤새 달과 노닐다가 가겠노라 벼르고 벼르던 1박 2일, 오늘 이렇게라도 월류봉을 등산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제 친구들은 머나먼 세상으로 가기도 하였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이 아름다운 곳을 오르지도 보지도 못하니 이를 슬퍼하는 것이다. 아! 아름다운 월류봉 내가 정상에서 부르짖은 것은 이 한마디였다. 아름다운 월류봉 낮에 오르니 금수강산 아름다운 내 조국의 형상이 눈앞에 전개되고, 밤이면 아름다운 산수에 취해 달이 봉우리에 머물고 있는 내고향 월류봉의 아름다움을 혜당 양연화는 『한천정사』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하였다. 월류봉 절경 아래 법화천 흐르고 칠월 녹음 높은 산 덮어 바라보는 이 안을 듯하니 그 앞에 선 내가 비경의 일부 같네 천 년 머물던 달은 또 천 년 머물 텐데 오늘 잠시 흐르는 내(川)는 보름 밤 월류봉 절경에 취해 산허리 멈춰 떠나지 못하는 달님 마음 헤아릴 수 있겠네 여명에 초강천 물안개 피고 월류봉 계곡마다 운무 덮이면 토방 앞 툇마루 서서 법화천 월류봉 한 눈에 담던 우암 선생 살아 숨 쉬는 산수화 한 폭에 차라리 말문 닫고 상념 접어 사군봉(使君峯) 월류봉(月留峰) 산양벽(山羊壁) 용연대(龍淵臺) 냉천정(冷泉亭) 화헌악(花軒嶽) 청학굴(靑鶴窟) 법존암(法尊菴) 한천정사 팔경의 주련만 남겼네
얼마 전 교육과학기술부 연수원에서의 일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교장, 교감 선생님들과 함께 교원노사관계 선진화과정 연수를 받았다. 학교 현장에서 부딪힐 수 있는 갈등문제에 대하여 효과적인 접근 방안을 모색하는 연수내용도 유익했지만, 쉬는 시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도 의미가 매우 컸다. 노후 생활을 위한 재테크, 건강관리, 심지어는 주름살 관리 등 다양한 화제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에는 연수를 마친 지 두어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내 가슴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 매주 머리를 염색합니다.” 머리카락의 색깔이 유난히 검고 윤이 나는, 그리고 2대 8로 단정하게 가르마를 한 어느 교장선생님이 ‘자연머리냐’는 물음에 답한 내용이다. 오십이 되기 전에는 새치 하나 없었는데, 오십을 넘기자마자 봄비에 새잎 피어나듯 흰 머리가 가득 나기 시작해서 염색을 했다는 것이다. 필자도 사십 초반부터 흰머리가 하나 둘 나기 시작하더니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염색을 하게 된 지가 10년 이상 된 것 같다.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염색은 매우 번거로운 일이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염색이 머리카락만 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수건과 세면대 그리고 침대와 베개까지도 더럽히고 만다. 염색 약 냄새도 고약하여 머리가 지근거리는 경우도 있고, 체질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며칠씩 피부염으로 고생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시력도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습관적으로 늘 염색을 해오고 있지만, 필자도 어느 때부턴가는 흰 머리 그대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우선 염색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었고, 다음으로는 백발 자체의 중후함을 만끽하고 싶어서다. 오다가다 백발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마음이 더 간절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백발은 가끔 남의 손에 쥔 떡처럼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하얀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경륜과 중후함,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필자는 가끔은 백발이 매우 잘 어울릴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도 하였다. “백발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백발에서 은은하게 풍기는 그 중후함이 멋있잖아요. 시력까지 나빠진다는데 꼭 염색할 필요가 있어요. 이젠 교장선생님도 되셨으니 그냥 백발로 지내세요.” 우리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자 흑갈색 머리로 산뜻하게 염색하고 다니시는 그 교장 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한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멋을 내지만, 교육자는 학생들을 위해서 멋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학생들과 어울리고 소통하기 위해서란다. 요새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은 나이 먹은 선생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보듯, 백발은 아이들과 소통하고 어울리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디시 말하면, 아이들은 백발에서 중후함이나 카리스마를 느끼기보다는 현격한 세대 차이를 연상한다는 것이다. 그 교장선생님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백발은 아이들과 정서적으로 소통할 수 없게 하는 금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아이들과 어울리고 소통하기 위해서 흰 머리카락이 한 오리도 드러나지 않도록 염색을 정성들여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중후함이나 카리스마로 조직을 이끌고 운영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 교장 선생님에게 염색은 학생들과 어울리기 위한 친교의 메시지, 낮춤과 어울림의 메타포가 된 것이다. 어린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학생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춰야 하고, 젊은 학부모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학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을 낮춰야 한다. 또한 교사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교사의 고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교사의 눈높이로 자신을 낮춰야 한다. 염색 자체가 그리 대단한 영향을 미칠 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러나 정성들여 염색을 하는 것이 상대방만큼 자신을 낮추고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할 때, 그 낮춤과 어울림의 리더십은 우리의 가슴속에 신선한 자극으로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지난해 정부는 ‘5세 누리과정’을 발표하고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교육비를 만 5세아 전체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사실상 초·중학교 9년 의무교육에 1년을 추가·확대해 10년 의무교육 시대를 열었음을 의미한다. 지난 1월에는 누리과정을 만 3~4세로 확대하는 방안을 발표하였다. 이는 유아교육제도가 모든 어린이의 보편교육을 향해 나아가려는 것이며, 2012년부터 시작한 만 5세 누리과정은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마찬가지로 보편교육과정화 한다는 것이다. 유아교육기관도 변해야 산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아교육기관도 변해야 함을 느낀다. 유치원 교사들도 학급경영, 교수법, 교육행정에 있어서 변화를 추구해야 하며 교사의 이미지 변화와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21세기는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운 시대다. 때문에 유아교육기관의 변화 요구는 교사의 생존과도 직결된 문제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사로서 올바른 인성 함양, 전인적 인간 양성을 목표로 잘 가르치는 데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다. 유아교육기관은 기업 마인드와 서비스 정신이 절실히 필요하게 됐음을 인식해야 한다. 유치원 교사 역시 유아, 학부모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정신으로 교사의 이미지 변화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여 경쟁력을 갖춘 21세기형 교사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교사가 사람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교사가 하는 일의 가치를 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주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려 주는 것 이상으로 아이들의 미래에 피어날 꽃에 물과 영양분을 뿌려 심신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교사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지 다시금 되새겨야 할 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어떤 의미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가진 교사만이 좋은 교사, 행복한 교사, 발전하는 교사로 살아갈 수 있다. 열악한 환경을 받아들일 힘이 없다고 느껴질지라도 그 산을 넘어가는 용기를 가져보자. 그 산 너머에는 찬란한 의미의 빛이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공교육화를 위한 제도개혁 제안 이제 정부는 만 3~5세 모든 아이들을 위한 양질의 교육을 책임지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하였다. 초등 의무교육이 완성되는 데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보편적인 유아교육을 위한 제도, 법, 재정은 참으로 놀랍게도 1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교육과정, 교원, 장학, 관리체제 등의 질 관리 측면에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질 높은 선진화된 유아교육제도가 정착될 때까지 국가가 모범적으로 보편교육의 책무를 다하며 전체 유아교육을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생각하며, 유아교육의 공교육화를 위한 몇 가지 제도개혁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유치원’이란 명칭을 ‘유아학교’로 변경하자. ‘교육기본법 제9조 제1항’에서는 유아교육, 초등교육,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을 위해 ‘학교’를 두도록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교육법 제2조’에서는 유아교육법에 따라 설립·운영되는 학교를 ‘유치원’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유아교육의 공교육화를 위한 제도개혁이다. 우선 영·유아시스템 일원화가 요구된다. ‘3세 미만 영·유아지원은 보건복지부로 일원화’, ‘만 3~5세 유아지원은 교육과학기술부로 일원화’ 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유아교육은 동일 연령대의 교육을 교육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부가 동시에 주관하는 이원행정체제로 돼 있어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만 3~5세 유아교육담당 교사의 양성체제를 4년제로 일원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유치원교사는 전문대 이상의 학력을, 보육교사는 고졸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는 양성체제로 인한 평균학력격차로 교육의 질 담보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있다. 시도 교육청 유아교육과 신설·확대 및 유아교육전문직 100% 확보도 보육시설에 대한 교육력 제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셋째, 국·공립유치원 종일반 내실화를 위해 정교사 100% 확보, 종일반 시설환경개선비 지원 확대, 사립유치원교사 처우 개선 등 유아교육 질 제고를 위한 교육환경 및 유아교사 처우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처음 초등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은 2009년 가을, 나는 담임교사가 아닌 영어교과 전담교사로 처음 아이들 앞에 섰다. 대학생활 중 영어에 소홀했던 것을 후회하며 발음 교정에 열중하던 어느 날이었다. 외국에서 어학연수를 3년 마치고 이제 막 귀국한 한 남학생이 전학을 왔다. 낯선 학교생활이 힘겨워 보이던 그 아이 얼굴에 유일하게 웃음꽃이 피는 시간은 영어시간. 정형화된 교실영어와 활동으로 버티던 내게 이 전학생의 존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실력에 자신이 없어 안절부절 못하다가 몸과 마음의 병이 나를 덮쳐 시름시름 앓던 어느 날, “Any question?” 수업을 마무리하려는 찰나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지막한,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 “Your English is not lively.” 순간 돌처럼 굳어버린 나는 더 이상 구겨지고 싶지 않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Thank you, See you next class.” 한동안 그 충격에서 헤어날 수 없었고 그 날 이후 난 교사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말썽쟁이들의 일상적인 언행조차 나를 무시하는 것 아닌가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고 내게 교사로서의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잔뜩 웅크려 겨울을 지냈다. 달콤 살벌한 퍼즐 맞추기 초등교사는 전 과목을 다 가르쳐야 하고 심지어 가끔은 영어나 예체능과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과목을 맡기도 한다. 때로는 가르치는 내용뿐 아니라 가르치는 기술, 수업 이외 업무에 대한 능력, 학생과 학부모 상담, 생활지도 등 광범위한 영역 속에서 과연 나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지적 권위도 예전 같지 않고 그렇다고 타고난 카리스마도 없는 경우 교사로서의 권위를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슈퍼맨이 아니야, 열심히 하면 되는 거야!’라며 스스로 위로해 보지만 언제나 낙엽 떨어지는 가을마냥 쓸쓸한 교실이 못내 아쉽다. 그렇게 2009년이 지나고 이듬해 나는 담임이 되었다. 처음 만난 제자들은 너무나 귀여웠다. 담임 업무가 교과전담 교사에 비하면 월등히 많았지만 그래도 백배는 더 즐거웠다. 아이들은 너무 귀엽고 순수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 말썽쟁이들이 화나게 하기도 하고, 가끔은 위험한 사고가 심장을 쿵 내려앉게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문제로 투정하고 고민하고 또 기뻐하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다. 가끔 아이들이 다른 선생님께 칭찬을 듬뿍 받은 날이면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하고 하루 종일 구름 위를 날아다니기도 한다. 아이들이 가고 난 교실 곳곳에 귀염둥이들이 몰래 쓰고 간 쪽지들이 숨어있을 때도 있다. ‘선생님 힘내세요! 내일 봐요♡’ 어느 하늘에서 이런 천사들이 뚝 떨어졌을까 싶은 마음에 아이들을 맘껏 안아주기도 한다. ‘선생님이 되고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잘한 사건들만 떠오를 뿐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자잘한 조각들 하나하나를 보면 모두 나의 제자들이 주인공이다. 나는 해마다 내 편이 되어주는 30명의 제자를 만난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구보다 그 아이의 편에서 격려해주고 지지해준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자잘한 추억의 퍼즐조각을 함께 맞추고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나라는 학교에서 시작 학교는 폐쇄적인 공간이라 가장 나중에 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끔 흠칫 놀라곤 한다. 교육과정뿐 아니라 행정적인 부분마저도 급변하는 학교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불필요한 변화는 과감하게 줄이고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정책의 실현이 정착되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정책을 결정하든 실현하든 간에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다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효과보다는 효율을 잣대로 평가하고 실적 위주의 활동이 지속되다보면 우리네 학교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깊어진 만큼 교사와 학생·학부모 간 관계 정립에 있어서도 믿음을 더욱 쌓아가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학교교육’이고 저기까지는 ‘가정교육’이라며 선을 그을 수는 없다. 교사는 학교에서의 엄마 아빠이고, 부모는 가정에서의 선생님이다. 모두가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길은 서로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행복한 학교에서 자라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안에서 가르치는 기쁨을 느끼는 교사가 가득한 내일이 열리길 기대한다.
어느 누군가가 나에게 “너는 대한민국 교사여서 자랑스러운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 나는 대한민국 교사여서 자랑스럽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큰 소리로. 나의 교직생활을 가만히 돌이켜 본다. 내가 교사가 된 지도 어언 26년이 됐다. 군대를 제대하고 파릇파릇한 나이였을 때 나는 아주 한적한 어느 시골 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 학교에 온 아이들과는 불과 서너 살 밖에 차이가 나질 않았다. 사건은 부임하던 날부터 거의 쉬지 않고 터졌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아이들을 데리러 가고 어떻게든 아이들에게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지도하겠다고 사정하여 데리고 나왔다. 학교를 졸업할 때는 내가 졸업했던 것보다 더 기뻤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초임이고 젊었기 때문에 열정이 있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사의 열정과 관심은 학생 인생도 바꾼다 그 후 중학교로 전직해 근무하게 되었는데 시골 아이들을 위해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방학 때 무보수로 가르쳤던 열정도 그러한 것이었다. 시골에서의 가정방문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주어야만 하는가를 깨닫게 했다. 그 시절만 해도 시골엔 학원도 없었고 있다 하더라도 학원에 갈 여력도 없는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들의 저녁 시간은 함께 밥을 하고 찌개를 끓여서 먹고 설거지를 하는, 그야말로 매일매일 야영생활이었다. 그 아이들이 고등학교 진로를 상담하고 자기 길을 찾아갈 땐 내 일처럼 늘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 직업 선택에는 자신의 관심과 적성을 고려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번은 제자가 “서울의 어느 명문 대학에 수시합격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상담을 해왔다. 정말 욕심나는 학교였지만 제자의 성격과 적성, 주변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교육대학을 권해 주었다. 후에 그 아이와 부모는 “결정하기 어려웠을 때 길을 잘 안내해 주어서 현재 아이가 너무너무 행복해하며 선생님의 길을 가고 있다”며 “적성에 잘 맞는 길인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고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했는지 모른다. 또 다른 제자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아이였다. 그러나 할머니와 지내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그 제자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고 무료로 기숙사를 제공해 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금은 교원대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그 학생을 보며 교사로서 얼마나 큰 보람을 느끼는지 모른다. 교사로서 열정만 있다면 제자들을 제도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늘 많았다. 시골 학교의 내신성적이 도시와 농어촌의 교육 격차 해소에 도움이 되었고 방과후학교 자유수강권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었다. 교육방송의 내실화와 사이버가정학습 운영 등도 사회적, 정책적 뒷받침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사가 학생을 품어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학교 한편으로 이런 교육적 열정이 교사와 학생 간의 신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교육은 학생과 교사 간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가정에서도 부모와 자녀 간에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일수록 부모의 의견을 따르고 부모를 존경하는 아이들이 많은 편이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부담의 늪에 빠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성적과 경쟁의 압박에 눌려 살아가고 있 다. 교사들 역시 이런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우리의 학교가 과연 학생들에게 배움의 즐거움을 줄 수 있고, 학교가 교사들에게 가르침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곳일까?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현실이 이러한데 과연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가능할까? 교사와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가 모두 함께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 ‘해품달’에서 주인공은 ‘달’이었다. 나는 ‘교품학’이란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교사가 학생을 품어 학생이 주인공이 되는 학교로 만들었으면 한다. 부모 중에 가장 현명한 부모는 ‘현명하면서 게으른 부모’라고 한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하면서 뒤에서는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지켜보고 격려하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는 부모라는 것이다. 교사도 인내와 끈기를 가지는 조력자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래본다.
원주의료고는 정부의 고급기술인력 양성계획에 따라 탄생한 국내 유일의 의료기기분야 마이스터고다. 2년간의 준비를 거쳐 2010년 3월 개교했지만 원주정보공고에서 마이스터고로 전환되면서 교육시설, 실습기자재 등 교육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의료고로 바뀌면서 새 학교에 대한 꿈을 안고 몰려든 학생들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다. 시설이나 실습장비는 교사들의 열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우리 교사를 바라보는 학생들을 위해서 교사들이 마음과 마음을 합쳐 신념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리고 지난해에 그렇게 바라던 교육 인프라를 대폭 확충할 수 있었다. 열정과 신념이 빛을 발해 새로운 학교로 일신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자 마이스터고 교사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게 되었다. 어느덧 마이스터고에 입학한 학생들이 3학년이 되었고 결실을 맺을 시기가 가까워졌다. 이제 우리를 보고 찾아온 학생들이 희망의 날개를 펼칠 시간이 된 것이다. 열정과 신념으로 가르친 학생들 의료기기는 사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기기인데 사람마다 진단이나 치료 방법이 달라 전반적으로 다양성이 존재한다. 때문에 우리는 학생들이 이러한 다양성 기술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융합교육에 많은 힘을 쓰고 있다. 의료기기와 연관된 기계와 전자, IT기술,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는 창의성을 포함한 교육과정과 관련 기업체와 협력해 산업맞춤형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특히 한국의료기기산업협회, 대한치기재협회와 MOU를 체결하여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의료기계과와 의료전기·전자학과의 교육과정을 세우기 위해 많은 기업체를 방문해 자료 조사과정을 거쳐 직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의료기기 기업에서 요구되는 기본지식에서부터 의료기기실무, 전문적인 기술 능력 등을 교육과정에 도입할 수 있었다. 이에 학생들이 졸업 후 의료기기 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쟁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전문적인 업무능력 함양은 물론 인성교육에도 힘쓰고 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프리젠테이션 제작과 발표, 엑셀과 문서작성 실무능력을 교육하고 학생들이 자격취득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많은 기업들이 전문 직무기술뿐만 아니라 업무능력을 갖춘 인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을 향해 나아간다 인성교육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매달 1회 이상 꿈을 실현한 명장, 명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학생 스스로 꿈을 갖고 동기의식을 높이도록 한다. 또, 지역문화행사 참여와 작품성 있는 영화감상, 대자연과 호흡하는 등산 등 다양한 인성교육프로그램을 병행하고 있다. 교사들은 이를 통해 이미 진로를 결정하고 목적을 갖고 온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며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 있고,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친구 같은 선생님이 돼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올해는 마이스터고에 입학한 학생들이 3학년이 되는 해, 교사는 이들이 3년간 이룬 땀을 모아 결실을 맺게 해주어야 할 책무를 가지고 있는데 올해 들어 벌써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동안 노력이 결실을 맺어 삼성전자, 한국수력원자력, 한전 등 우수 일자리에 23명의 학생들이 최종 합격했고, 양질의 일자리와 비전을 갖춘 기업들의 취업의뢰가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취업난이 가중되고 있는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은 그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 주는 것이어서 무엇보다 보람을 느낀다. 원주의료고가 의료기기 마이스터고로 개교하면서 주변에서는 많은 기대와 함께 걱정과 우려도 있었다. 학교체제가 바뀌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시작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결실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 9시까지 맞춤형 교육과정 개발, 교재 개발, 학생 기숙사 관리 등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이제 원주의료고는 과거보다는 지금이, 지금보다는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학교로 의료기기분야 전문기술자 양성 마이스터고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다만 지금의 성과는 교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재정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다. 따라서 교육당국에 마이스터고 운영에 필요한 재정지원을 지속해줄 것을 건의하고 싶다.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과 대학교육의 문제는 많아도 너무 많다고들 한다. 근래 들어 반값 등록금의 문제로 촉발된 대학을 향한 사회의 질타는 비록 대학교육 문제의 본질에서는 비켜나가 있지만,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 사회에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준 것이 사실이다. 대학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 교수와 학생과의 관계 설정, 연구와 교육과의 상관관계 혹은 우선순위, 국가의 대학교육 철학과 정책 전반 등에 대한 검토와 패러다임을 고민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 아닌가 싶다. 공생하는 대학 서열과 학생 서열 우리나라 대학교육 문제의 핵심은 각 대학이 역량이 우수한 학생 선발에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데에 있다. 평범한 학생을 뽑아서 우수한 학생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서열화 되어 있는 대학의 순위는 입학생의 성적 순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주지하는 바이다. 대학교육협의회 같은 공적 기관이나 일간지 등의 민간 기관이 시행하는 대학 평가는 교수충원률, 연구 성과, 사회적 평판 등 다방면의 지표를 활용해서 시행한다. 하지만 그 결과를 종합해 보면 결국 고등학생들이 매겨 놓은 순위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수한 학생이 지원하는 대학이 더 좋은 대학이 되고, 때문에 대학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경쟁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우수한 학생을 더 특별한 학생으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다. 우수한 학생의 존재는 교수들이 연구 성과를 더 많이 내도록 만드는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교육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대학 사회에서 그런 생각이 지배적 도그마가 되면 고등학교와 중학교 등으로 퍼져 나가고, 급기야 미혼 남녀들까지 좋은 유전자를 가졌다고 평가되는 상대를 고르기에 여념이 없는 세태를 만든다. 우수한 자원을 뽑아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은 누구나, 어느 대학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서열 상위권의 대학이 더 좋은 교육을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잠재된 가능성을 깨워주는 것 누구나 문제가 많다고 말하는 대한민국 교육의 변화는 이 지점에서부터 풀어가야 한다. 진정한 교육자는 좋은 학생을 선발하려는 노력보다는 자신이 맡은 학생을 그 수준대로 인정하고 잘 가르치려는 노력을 선행해야 한다. 당장 급여를 주고 일을 시켜 성과를 내야 하는 기업이라면 우수 인재 선발에 집착할 수 있다. 또 당장의 연구 성과를 내야 하는 연구 중심의 대학원 과정이라면 우수한 학생 선발에 전력하는 일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는 아니다. 대학 공부를 위한 기초 능력을 가진 학생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 그들을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우수 인재로 육성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본다. 영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경험한 일이 있다. 그곳 교수들은 석사 과정에 있던 나를 학생으로 부르지도 않고 그렇게 취급하지도 않았다. 같이 연구하는 동료이자 스태프로 대우했다. 그들에게 학생은 학부생까지만 해당한다. 대학원생들에게는 연구의 질적·양적 성과를 요구하는 동시에 전공 지식을 전수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학생 개개인의 학업 수준과 능력에 맡는 학업 지도, 인생 카운슬링을 주 업무로 삼고 있었다. 물론 대개 학부 학생 10명에 전임 교수 1명 정도인 교육 환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과 비교했을 때 참으로 부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경험은 나로 하여금 한국 대학교육의 문제를 보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대학 사회에서 진정한 의미의 스승과 제자 관계는 학생의 수준과 능력에 관계없이 개개인의 능력과 처지에 맡는 지식 전수와 지도가 이루어질 때 성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교수로서 학생을 교육 소비자 정도로 생각하고, 학생으로서는 교수를 지식 공급자로 생각하는 지금의 세태에서 참스승과 참제자라는 관계 정립은 불가능하다. 교수들이 최소한의 수학 능력을 갖고 있는 평범한 학생을 우수한 인재로 변화시키는 일이 대학 교육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전제해야 한다. 국가의 대학교육 정책 방향 또한 이런 철학을 바탕으로 할 때 대한민국 교육의 전반적인 문제는 긍정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것이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존재이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교육현장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신뢰’다. 교사와 학부모, 학생은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신뢰가 무너진 지금, 우리 모두는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체벌금지와 학생인권조례 도입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일부 학생들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해 선생님들에게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교육은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우리 반 아이들이 누구와 친한지,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장래 희망은 뭔지’ 인간적 소통을 하며 아이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주면 좋겠다. 또 학부모와 선생님이 아이에 대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학교를 개방하면 좋겠다. 학생 생활지도도 가정과 학교가 연계해 함께 협력할 때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고 소통이 활발해지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 자살, 집단 따돌림 등의 사건이 발생하고 난 후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소통할 걸’하고 후회하는 일은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에게 너무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겠지만, 어떤 지위에 있든 그 지위에 맞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선생님은 단순한 지식전달자가 아니라 미래세대를 올바르게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요구사항도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부모는 그 어떤 선생님보다 학교 선생님을 최고 순위로 두고 있다. 예전보다는 교권이 많이 추락했지만 그래도 그 어떤 사교육 선생님보다 공교육 안에 있는 선생님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존재라 여기고 있다. 선생님들도 이점을 분명히 인식했으면 좋겠다. 오늘도 교단에서 우리 아이들을 향해 가슴 뜨거운 사랑을 펼쳐 보이며 우직하고 묵묵히 학교현장을 지켜내고 있는 선생님들이 있기에 우리 교육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선생님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선생님은 이 사회의 힘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교육은 많은 문제와 맞서고 있다. 열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바른 길을 걷게 하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많지만 각종 교직원 비리가 뉴스를 장식하고, 학교폭력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교권추락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학생이 선생님에게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폭행까지도 서슴지 않는 것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는 행위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교권이 침해되는 보도를 접하면 선생님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보다 선생님들의 자존심과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교육계가 학생인권조례에서 비롯된 자유의 개념을 너무 무책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미국은 학생들이 자유를 보장받고 있어도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고 엄격하게 진다.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졌기 때문에 올바른 자유의 정착이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증가하는 학생들의 교권침해 행위에 대해 지금처럼 안일하게 대처하면 떨어지는 교권을 다시 세우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엄격하게 학생을 지도할지, 대한민국만의 교육 제도를 개척할지, 또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교권을 만들 것인지는 학부모나 학생들보다는 대한민국 모든 교육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교권 없이는 교사와 학생의 상호존중이란 있을 수 없다. 학생이 잘했을 때는 자상하게, 잘못했을 때는 엄격한 처벌을 내리는 중용의 길이야말로 선생님과 학생이 상호 존중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나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으로, 우리나라 미래를 책임질 세대의 일원이다. 나는 미래 세대가 선생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세대가 아니었으면 한다. 어떤 나라의 국민이든지 선생님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고는 선진국은 커녕 후진국으로 퇴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미래를 이끄는 존재라면 선생님은 미래를 책임질 학생들을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를 책임지는 주체는 학생뿐만이 아니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역시 미래를 이끄는 주체로서 시대적 사명과 열정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고 싶다.
2007년 나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6좌를 등정한 산사나이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하고 내가 히말라야에서 가장 먼저 도전했던 에베레스트 산자락에 위치한 해발 4060m 팡보체 마을에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그동안 수차례 산을 오르면서 수없이 많은 것을 배우고 인생의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산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16개의 휴먼학교를 짓는 것이다. 히말라야 16좌 완등과 같은 숫자다. 지난 3월 벌써 네 번째 학교인 안나푸르나 8091m 산자락 초입에 위치한 비레탄티 학교 기공식을 가졌다. 휴먼학교를 통해 현지 아이들이 실제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지난 4월부터는 강북구와 함께 청소년 등산교실을 시작했다. 지역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산행과 인공암벽등반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방학에는 캠핑도 함께할 계획이다. 산을 오르며 자연 속에서 호흡하는 과정을 통해 도전정신, 진취적 기상, 자기 자신 극복력을 배우며 올바른 인성을 형성하고, 성취감과 공동체정신을 기르는 것이 등산교실의 목적이다. 나는 산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대한민국 선생님도 모두 산과 같은 선생님이 돼 주기를 희망한다. 산을 오르며 정상이라는 꿈을 세우고, 산길을 걸으면서 인성을 바로 잡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을 배우며, 정상에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교육이 학생들에게는 필요하다. 산을 오르면서 흘리는 땀과 학생들에게 쏟는 열정으로 흘리는 땀, 그리고 그런 교육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산과 같은 선생님의 가르침은 학생들을 인생의 정상으로 올곧게 인도할 것이다. 사회 전반에서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잘못에 대해서 얘기들을 한다. 힘든 현실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선생님들이 산과 같이 듬직하게 중심을 잡고 아이들의 안내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인재를 양성해야할 책무를 가진 선생님들이 산과 같은 높은 존재가 돼주길 기대한다.
일본에서 문부과학성 교원연수생 신분으로 체류하던 기간 동안 일본인을 제외하고도 자국에서 교직에 종사하는 외국인을 여럿 만날 기회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필자가 일본에서 겪은 직·간접 경험을 토대로 일본과 싱가포르 교원들의 지위와 위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일 양국 및 싱가포르에서 겪은 직·간접 경험 및 사적인 견해는 각국의 초등학교 및 초등교원의 실태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밝힌다. [PART VIEW] 일본 ‘작은 학교’ 정책, 교원에겐 업무 부담 일본 교사들은 한국 교사들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제도적 환경 아래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유사점이 많다고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교육 전반에 걸쳐 한국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을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지방자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지역차가 있다 해도 정부의 국가정책과 방침이 전국 구석구석의 일선 공립학교까지 실시간으로 영향을 주는 한국의 시스템에 비해 일본은 광역지자체만 생각해 보더라도 47개의 도도부현과 여러 곳의 정령지정도시를 합하여 60곳이 넘는 지자체가 존재하며 각 기초·광역지자체 단위의 교육위원회가 상당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통계적 교육지표에서 중요한 수치 중 하나인 학교 및 학급당 학생 수, 교원 1인당 학생 수 등에서도 숫자만 보면 한국과 일본은 매우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큰 차이가 있다. 일본은 ‘작은 학교’ 정책을 실시하고 있어서 소규모 학교 통폐합이 진행 중인데, 폐교가 속출하는 우리나라와는 정책의 출발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NHK 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 도쿄도 고토구 토요스에 고층아파트가 새로 생겨 전교생이 1000명이 넘었다며 학급 증설과 교실 증축을 근심하는 초등학교 교장을 본 적이 있다. 도쿄 부도심지이자 인구 초밀집 지역에서도 전교생이 1000명이 넘는 것은 드문 일인 것이다. 한국의 서울과는 매우 대조적인 풍경이다. 그런데 필자의 체감으로는 일본의 학급당 학생 수를 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농어촌산간지역을 제외하고는 35명 이하 학급이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다인수학급이 많다. 그러나 통계상으로 교원 1인당 학생 수는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적은데, 이는 일본의 학교 숫자와 교원 숫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데다 특수교육대상인 학생 2명당 교원이 1명꼴로 배치되어 있는 특별지원교사(특수교사)가 통계에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소규모 학교일수록 교원 1인당 업무량이 많은 것이 통념이듯, 단위 학교 규모는 작은데 학급당 학생 수는 많은 일본 특유의 현실이 일본의 교원들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겨주는 근무 조건이라 할 수 있겠다. 한 일본인은 교사의 사기 진작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학급당 학생 수 감축, 그 다음으로 문제를 가진 학생을 돕고 보조할 수 있는 인력의 확충, 업무경감을 순서대로 꼽았다. 한국의 1급 정교사와 비슷한 지위인 ‘교유’가 된 이래 정해진 퇴근시간에 퇴근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학부모 “교원의 높은 윤리성은 급여 무관” 인식 일본의 공립학교 교사들은 모두 공무원이다. 다만 한국처럼 특정직 교육공무원이라는 별도 직렬에 위치하는 것은 아니고 핀란드와 비슷하게 해당 지역의 지방공무원이다. 일본은 지역에 따라 최저임금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일본 교원이 어떤 대우와 복지 혜택을 받는지에 대해 일반적으로 아우르기는 어렵다. 게다가 일본뿐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직무상 근무여건 및 급여 등 복리후생에 관련된 사항은 아무리 개인적으로 친하더라도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아니기 때문에 오직 편린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인 경향을 살피자면, 미국이나 영국 등을 비롯하여 각 지역 교육위원회가 교원의 임면을 결정하며 급여와 계약조건이 천차만별인 국가가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한국, 일본, 싱가포르, 몽골 등 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대개 자국 교원들에게 공무원의 지위와 고용안정성을 보장하고 있고 공립학교 교원의 급여와 기타 수당을 국고에서 부담한다. 또한 한국과 일본은 승진이 어려운 교직의 급여손실분 보전을 위해서 같은 호봉의 일반직 공무원보다 보수를 우대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한일 양국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사례이다. 교원 우대와 관련해서는 일본 문부과학성의 2006년 ‘교원의식조사 및 보호자의식조사’ 결과 중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북한이탈주민(탈북자)의 강제송환문제가 다시 현안으로 떠올랐다.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시기 식량난에 따른 대규모 탈북이 이뤄진 이후 탈북자 문제는 ‘북한문제’의 한 축을 차지해 왔다. 오랜 기간 탈북자 문제가 제기돼왔지만 지금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데는 영토주권문제, 인권문제, 외교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영토, 국민, 주권은 국가를 구성하는 3대 요소다. 이와 관련한 문제는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타협이 불가능하다. 탈북자 문제 역시 영토와 국민에 관한 문제로 해당국가의 주권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다. [PART VIEW] 南 “헌법상 북한주민도 대한민국 국민” 우선 우리는 탈북자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고, 자유의사에 따라 우리나라로 입국할 수 있도록 중국 등 체류국이 협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이기 때문에 헌법상 북한주민들도 우리 국민에 해당한다. 따라서 북한을 이탈하여 중국에 머물고 있는 주민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헌법논리에 따라 국내로 입국을 희망하는 탈북자는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 정부와 대다수 국민의 주장이다. 한편 북한과 혈맹관계를 유지해온 중국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주권국가로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중국은 탈북자 문제를 자기 영토에 불법으로 들어온 범법자로 취급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중국은 탈북자를 식량을 구하러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온 ‘유민(流民)’으로 규정하고, 체포할 경우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고 있다. 탈북자는 북한 국민이기 때문에 북한으로 송환해서 북한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중국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 北 “탈북자 송환은 주권국가의 정당한 활동” 탈북자 강제북송문제에 침묵을 지켜온 북한은 최근 탈북자 송환이 주권국가의 정당한 활동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대남선전용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2월 24일 논평에서 “국경지대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모든 위험요소로부터 자국민의 안전과 이익을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응당한 의무”라고 밝혔다. 북한은 탈북자 증가를 급변사태와 연결 짓는 외부 시각 등을 의식해서 탈북자를 막기 위해 내부 통제를 강화해 왔다. 김정은 체제가 출범하면서 북한은 중국 등지에 떠돌고 있는 탈북자 검거에 주력하고, 검거된 탈북자의 강제북송을 서두르고 있다. 국제인권단체들은 탈북자 문제를 인권차원에서 다루면서 탈북자를 ‘난민’으로 규정하고 자유의사에 따라 정착할 곳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탈북자 문제는 주권, 인권, 외교문제 등이 얽힌 복합한 문제다. 그 복잡성 때문에 지난 정부들은 ‘조용한 외교’로 일관하면서 포괄적 해결방안을 찾기보다는 사안별로 해결하는 외교적 노력을 지속해 왔다. 북한 ‘급변사태론’을 펴왔던 이명박 정부도 최근 탈북자 북송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하기 전까지는 조용한 외교로 일관해 왔다. 북한이 붕괴하면 탈북자 문제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탈북자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기 말 선거를 앞두고 쟁점으로 부각돼 씁쓸하다. 그동안 탈북자 문제해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여론에 밀려 뒤늦게 중국에 할 말은 한다는 식으로 강경발언을 쏟아내는 정부의 ‘공개 외교’도 매끄럽지 못한 것 같다. 북·중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중국이 우리 정부의 요청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탈북자 문제를 국제 여론화할 경우 중국 정부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와 시민사회가 역할분담을 해서 시민사회는 국제여론화에 힘쓰고 정부는 외교적 해결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할 것이다. 조용한 물밑 외교가 답일 수도 탈북자 강제북송에 대해 중국도 일정한 부담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인권문제, 티베트문제 등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그동안 굴하지 않고 그들 식으로 해결책을 모색해 왔다. 한국의 압력에 중국이 굴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탈북자 처리를 하려면 다차원의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2만 3000여 명의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기까지는 중국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입국은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한국행을 지원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개외교로 밀어붙일 경우 중국은 대국의 위신을 내세우고 반발할 것이다. 한국의 압력으로 탈북자 북송을 막았다고 할 경우 중국은 그들의 국제적 위신이 실추된 것으로 간주할 지도 모른다. 중국과는 탈북자 이외에 핵과 장거리 미사일 등 북한문제 해결에 협조해야 할 일들이 많다. 때문에 탈북자 문제만을 내세우는 단선적인 접근보다는 북한문제 전반을 해결하는 포괄적 접근이 필요하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언급한 대로 탈북자 문제 해결에는 조용한 물밑 외교가 효과적일 수 있다. 최근 탈북자 강제북송과 관련해서 국내 공론화와 국제 여론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제북송을 막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탈북자 중에는 정치적 이유를 가진 난민도 있고, 경제적 이유, 즉 식량을 구하러 넘어온 불법월경자인 유민도 있다. 북에 가족을 두고 있는 탈북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 처리해야 할 것이다. 탈북자 모두를 한국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에 의한 난민 중심으로 해결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유엔 난민기구(UNHCR) 등을 통해서 중국에 압력을 넣고, 유엔과 중국이 탈북자에 대한 공동조사를 실시하여 난민지위 부여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탈북자 네트워크 차단되는 일 없도록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할 문제로는 남북공존과 화해협력을 진전시켜 북한의 내부 경제사정이 나아지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탈북자가 줄어들게 하는 방법과 또 다른 방법으로 제재와 압력을 지속하면서 경제를 어렵게 해서 오히려 탈북자 수를 늘려 급변사태를 유도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볼때 제재와 압력으로 북한을 붕괴시킨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탈북자 문제를 다룸에 있어 주의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탈북자 문제가 부각될 경우 북한 당국이 북에 남아있는 탈북자 가족에 대한 내부통제를 강화해서 네트워크가 단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 정착한 탈북자 중 일부는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송금하고 소식을 주고받는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경제난에 따른 북한 당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김정은 체제의 공고화를 위해 북측이 사회통제를 강화할 경우 탈북루트가 봉쇄되고 남과 북의 탈북자 연결망도 붕괴될 것이다. 탈북자 네트워크는 북의 변화를 추동할 작은 통로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탈북자의 강제송환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탈북 통로와 연결망이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사회운동차원에서 탈북자문제를 여론화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하지만 정부차원에서는 대중국외교, 대북전략 차원에서 차분하고 주도면밀하게 대책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탈북자 정착지원은 ‘통일예행연습차원’에서 탈북자의 인권문제는 이념과 체제를 떠나 해결해야 할 인류보편의 가치임에는 분명하다. 북송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으로 들어온 탈북자들의 정착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탈북자를 껴안고 함께 살아갈 동포로 인식하기보다는 소수자로, 사회적 약자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탈북자를 같은 민족, 통일역군으로 보기보다는 이주민으로 본다는 것이다. 탈북자 정착 시설이나 관련 학교를 짓는데도 이웃주민들의 반대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북한의 획일화된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다원주의 사회에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탈북자의 정착지원은 ‘통일예행연습차원’에서 다뤄야 한다. 탈북자들의 성공적인 정착이 향후 통일과정에서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탈북자 지원에 정성을 쏟아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해양이 시끄럽다. 남중국해 중부에 있는 남사군도(南沙群島)를 둘러싸고 중국, 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브루나이 사이에 다년간 영유권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센카쿠 제도를 둘러싸고는 대만, 중국, 일본이 영유권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캄차카 반도를 잇는 쿠릴 열도 20개 도서 중 최남단 4개 섬을 둘러싸고는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영토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최근에는 제주도 남쪽해역에 위치한 이어도에 대해 중국이 관할권을 주장하며 한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류츠구이(劉賜貴) 중국 해양국장은 지난 3월 3일 ‘쑤옌자오(蘇岩礁·이어도의 중국 명칭)가 중국의 해양관할구역에 있으며 정기적인 순찰범위에 속한다’고 밝혔다. 이에 우리나라 외교통상부에서는 중국대사를 불러 중국이 공식적으로 이어도에 대해 관할권을 주장해도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아시아 지역 해양을 둘러싼 분쟁은 중국의 급부상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는 국제정치문제이며,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이 될 것이다. [PART VIEW] 일본 고지도에서도 독도는 한국 땅 이어도 문제로 한·중 간에 시끄러운 외교적 공방이 이어지던 와중에 3월 27일에는 우려한 대로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영토로 주장하는 고등학생용 교과서를 검정에서 통과시켰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의 독도 기술 특징은 7종의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기술이 새로 추가되는 등 이전에 비해 일본 정부의 영유권 주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독도가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것은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주장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개의 포인트’에서도 5개 항목이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우기는 와중에 이 주장을 부정하는 일본의 고지도가 지난 3월 28일 동북아역사재단에 의해 공개됐다. 동북아역사재단이 공개한 지도 중 특기할 만한 것은 다음과 같다. 국내 최초로 공개된 오노에이노스케(小野英之助)의 ‘대일본제국지도(大日本國地圖, 1892년)’의 경우 일본 영토를 황색으로 채색한 반면, 울릉도와 독도는 채색이 되어있지 않아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시마네현 관내를 정교하게 그린 고토 츠네타로(後藤常太郞)의 ‘대일본분현지도(大日本分縣地圖, 1895년)’ 역시 독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마모토 이사오(濱本伊三郞)의 ‘극동일로청한사 국대지도(極東日露淸韓四國大地圖, 1904년)’는 울릉도와 독도를 강원도와 동일한 연한 보라색으로 채색했다. 100여 년 전 지도에는 분명 독도를 일본 영토가 아닌 조선의 영토로 표시했음에도 일본이 자꾸만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라고 우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에 들어 왜 이렇게 일본이 집요하게 독도문제에 집착할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국내외적 환경 변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냉전기 ‘일국평화주의’에 취한 일본 국민의 국경 무관심 일본은 제국주의 전쟁에서 패하고 난 후, 외교·안보 면에서는 미국일변도정책으로 일관하면서 오로지 경제문제에 전념하였다. 일본 외교사학계에 ‘요시다 독트린’론이 회자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한국전쟁과 냉전기의 특수성에 힘입어 1960년대에 벌써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냉전이 끝나는 1980년 말까지 이웃나라 중국이나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제대국으로서의 호황을 누렸다. 전후 일본 국민은 전전의 제국주의적 국가주의의 폐해에 대한 반성과 경제적 호황에 힘입어 일국평화주의적인 내부지향적 성향의 국민성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나라의 지리적 특성이 더하여 일국평화주의에 물든 일반국민들은 국경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고, 자연히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의 영유권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였다. 한편, 바다를 가운데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주변국 중국은 냉전기 동안 국내문제의 해결이 선결과제였으며 국경문제는 대륙 국가들과 국경선문제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에 해양경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고 하겠다. 중국은 센카쿠제도 밑 바다 속에 막대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된 1960년대 말부터 센카쿠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면서 간간이 일본 정부와 마찰을 빚어 왔지만 국내문제에 함몰되어 있던 일본 국민들에게 이 섬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전 세계가 경제발전과 더불어 부각되고 있는 에너지 문제로 인해 해양자원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고 해양자원개발과 관련한 에너지탐사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석유 등 막대한 에너지자원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섬들, 게다가 본토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무인도들이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도영유권문제도 최근 5~6년 사이에 한일간 외교문제로 부상하여 시끄러워지기까지 일본 국민들에게 거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국가주의’ 부추기는 일본 국내외 환경 변화 그러나 중국이 2000년대 들어 중국이 급격한 경제발전과 더불어 G2로 회자되며 지역패권국가로, 나아가 세계패권국가로의 야망을 드러내면서 동중국해와 센카쿠제도에서 일본과 마찰이 급증하게 되었다. 세계패권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으로의 해군력 확장은 불가피하다고 인식하는 중국이 제1열도선 영역 내에 속하는 센카쿠제도를 ‘핵심이익’으로 규정하면서 일본의 위기의식은 영토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스며들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이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낀 결정적 계기는 2010년 9월 센카쿠제도에서 일본 해상보안청 경비선을 들이받은 중국어선 선원들과 선장을 체포하여 기소함으로써 일·중 간 외교마찰이 험악한 지경에 이르렀던 사건이었다. 중국 정부의 외교적 압박에 굴복하는 형태로 선장에 대한 기소를 중지한 민주당정부의 외교는 실패로 규정되고 많은 국민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내에서는 국경문제에 대해 관심과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여론은 독도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유약한 대응을 하여 온 것이 중국 정부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주었다는 비판으로 이어졌다. 오랫동안 애국심을 강조해온 우익들의 주장을 국가주의자라며 비판하던 일본 국민들이 앞의 사건을 계기로 일본 정부가 국경문제에 대해 좀 더 강력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늘의 일본 사회 속에 우익들이 주장해 온 국가주의가 점차 탄력을 받고 있는 우려스러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지 부시 정부 시절 백악관 일본담당보좌관을 역임했던 마이클 그린은 워싱턴 사무실에서 가졌던 인터뷰에서 ‘일본이 독도문제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은 한국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라는 견해를 보여주었다. 일본이 탈냉전 후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적인 경제적 침체로 인해 자신감을 잃어가는 반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중화주의를 내세우며 급부상하고 있고, 한국 역시 ‘한류’ 현상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국제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는 현실을 두고 초조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 일본 ‘국가주의’의 대두라는 것이다. 일본이 최근 독도문제에 집요함을 보이는 것은 독도영유권 주장이 이러한 일본 국내외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연결되어 있고, 일본에게 있어 독도문제는 일본이 안고 있는 복수의 영토분쟁과 연계되어 있는 복합적인 문제인 만큼 어느 날 갑자기 해결의 실마리가 나타날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반론 펼 수 있는 압도적 지식·논리 무장 필요 그렇다면 독도(및 이어도)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먼저 학술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독도에 대한 ‘일본 고유의 영토’론을 혁파할 수 있는 지속적인 자료 발굴과 함께 학술행사 등을 통하여 동아시아 지역 영토분쟁의 전체상을 이해하고, 독도문제 해결에 유리한 환경조성을 위한 논리를 개발하여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둘째, 장기적인 호흡으로 우리 학생들이 독도에 대해 정확한 지식과 논리를 갖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학생들을 능가할 정도의 압도적인 지식과 논리를 한국 학생들이 갖는다면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의 영유권 도발에 대해 냉정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진행 한강희 전남도립대 교수(전문대) ■참석 이동형 한밭대 교수(국립대) 강선보 고려대 교수(사립대) 오영환 경기수원과학대 교수(전문대) 이창준 제주대 교수(국립) ■서면 참석 안양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대학 평가지표에 대한 총평 교육백년대계로 볼 때 소탐대실 우려 한강희 • 교총 산하 대학교수회 출범과 더불어 이런 좌담회를 열게 되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대학 평가지표가 대학구성원의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주어진 테마에 관해 가급적이면 소속하신 개별 대학의 구성원이라는 입장에서 의견을 개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선 교과부의 대학 평가지표 개선안을 보면 취업률이나 재학생 충원율, 교원 확보율 등의 지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데 국공립·사립·전문대학 등 개별대학들의 입장 차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각자 대학평가에 대해 총평을 부탁드립니다. 이창준 • 이들 지표 모두는 대학을 운영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지표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을 사회 진출 후 바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이 우선 구축된 후에 취업률 평가 반영 여부에 관한 토의가 진행돼야 합니다. 대학 역시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가 요구하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대학이 반성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동형 • 대학 구조조정을 위한 대학평가는 입학자원 급감에 대비한 연착륙 시도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 평가지표는 고등교육의 본질인 교육, 연구, 봉사와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큰 명제를 감안할 때 취업률 등 시장경제주의 프레임에 지나치게 편향됨으로써 향후 고등교육 백년대계를 볼 때 소탐대실의 우려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강희 • 전문대학 관련 항목을 보면 이번 평가부터 국공립을 구분하여 평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46개 전문대 중 국공립은 8개 대학에 불과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립 전문대학은 고등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재정 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재정지원사업도 인원수 규모로 분배하다보니 사립대학의 절반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선안대로 사립과 공립을 구분하여 평가한다면 5%에 불과한 공립대학 중 한두 곳이 완전 제외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강선보 • 이번 평가지표를 보면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대학평가가 ‘대학의 자율성과 특성화’를 훼손했다고 하는 부분들을 상당 부분 보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입니다. 그러나 아직 지방대 등 특정 대학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지표들이 포함돼 있어 공정성 및 형평성 논란이 일 여지가 있는 점이 다소 아쉽습니다. 대학교육역량강화사업의 교원 확보율 지표에 겸임 및 초빙교원을 포함시킨 것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대학들이 전임교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할 염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수나 비율에 일정한 제약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기본계획에 국가장학금 노력, 소득 7분위 비율을 반영하여 지원금을 감액한다는 계획을 추가했는데 국가장학금 노력 반영은 국가장학금과 연계해 이미 확정된 등록금 부담 완화 지수와 중복되는 지표입니다. 소득 7분위 이하 비율 반영은 대표적인 독소조항인데 국가장학금 지원 대상으로 가정의 소득이 많고 적은 비율을 따져 지원액을 차등한다는 것은 교육역량강화지원사업의 취지와 연계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영환 •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인성교육과 예절교육 실시에 대한 평가나 대학의 준법성, 윤리성도 중요 평가항목에 포함돼야 합니다. 취업률 및 재학생 충원율 등 실적평가에 치중하느라 더 중요한 대학 교육의 본질이 훼손되거나 경시된다면 주종이 뒤바뀌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수가 지나치게 취업률, 탈락률 감소 등 계수 달성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교육역량 평가와 관련해서는 국공립전문대학이 각종 지원과 혜택을 받고 있어 교육 여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육재원이 고등교육에 동참하고 있는 지방·사립 전문대에도 배분되어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평가인력을 전문성 있는 인력으로 확충하고 방법론적으로도 꾸준히 평가 방법을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대학 유형별 평가지표에 대한 평가 보다 정교·세련된 일관성 있는 지표 필요 [PART VIEW] 한강희 • 대학교육역량강화사업의 평가지표를 보면 국공립, 사립, 교원양성대 등 대학의 유형별 특성에 따라 일부 지표를 구성하고 반영비율을 차별화했습니다. 국공립대학에는 선진화 지표 추가, 교원양성대학 취업률은 ‘임용시험 합격률’ 반영, 예체능계 특수성 감안한 평가 등 대학 특수성을 반영한 유형별 평가 지표에 대해 만족할 만한 부분과 보완·수정해야 할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창준 • 국공립대학을 별도로 유형화시키면서 사전에 어떤 공지도 없이 전년 대비 국공립대학의 사업선정 수 및 사업비 규모를 대폭 축소시킨 점과 교육역량강화사업과 국가장학금 사업을 연계시킨 점 등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국공립대학의 경우 선진화지표 추가 외 일부 평가지표 중 교원 확보율의 경우 사립대와는 다르게 배정정원 대비 전임교원 확보율로 평가하면서 이와 연계된 외국인 전임교원 확보율은 사립대와 동일한 산출근거를 갖다 대는 등 해당 지표의 평가가 일률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또 각 평가지표의 산출근거에 대한 적절한 설명과 공개되지 않은 지표값에 대한 공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업률지표의 경우, 여러 가지 개선사항을 포함하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적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 강선보 • 사범대학의 경우 중등교원 양성이라는 목적 대학이므로 졸업생들이 중등교원이 되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등교원이 되는 길은 임용고사 합격 후 국공립학교 교원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립학교 교원이 되는 길도 있으므로 이 부분도 고려가 필요할 듯합니다. 또한 임용시험 합격률을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교육 분야에서 사회적 요구가 있는 전공이나 학과가 폐지 또는 축소될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필요할 것입니다. 오영환 • 예체능계의 특수성을 감안해 취업률을 국세청 DB 기준으로 평가하기로 개선한 것은 늦었지만 잘 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근로소득세 납세액의 기준치 항목, 연중 근로일수나 공연회수 항목 등 취업으로 인정되는 적정한 기준을 미리 명확히 제시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 없이 예체능계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이고 일률적인 방법에 의해 졸속 시행하는 것은 특정 분야에 속한 대학, 학과, 소속 교수들에게 불공정, 불공평한 적용입니다. 프리랜서도 그 취업인정 기준을 조기에 명확히 제시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강희 • 전문대학은 대학 평가지표를 근거로 교육역량강화사업지표(약 2500억 원 규모)를 따로 만들어 정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1인 창업 및 프리랜서’를 국세청 DB를 근거로 인정하는 취업률 지표에서 인문계열, 예체능계열, 농업계열 등 일부 졸업자의 불규칙한 수입이나 세원이 포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계열의 특성을 감안한 대학 간 유사계열 경쟁방식을 도입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또한 전문대학의 복잡한 산학협력역량지수를 보면 마치 대학 교원이 기업경영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문제는 대학 고유의 교수-학습기능을 외면하고 대학을 영리법인화하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으며 대학 교원의 주된 임무의 변질을 막기 위해선 교원의 산학협력수익 항목은 재고돼야 합니다. 선진화 지표 중 ‘총장직선제’에 대해 폐지보다는 문제점 개선·발전이 우선 한강희 • 국공립대학의 경우 ‘총장직선제 개선’ 등을 포함하는 국공립대학 선진화 지표가 새롭게 추가됐습니다. 이에 대해 전국국공립대학교수회연합회는 “교과부가 총장직선제 폐지를 통해 국립대를 통제하려 한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총장직선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양옥 • 총장 직선제는 사회 민주화와 대학 자율화에 따라 1988년 이후 처음 실시됐으며 현재 국공립대학은 모두 직선제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학연과 지연에 따른 파벌 형성, 단과대별 이기주의, 면학 분위기 손상, 선거 후 논공행상에 따른 인사 갈등, 교수 중심의 총장 후보를 선출해 여타 구성원은 배제되는 문제 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수 사립대학이 직선제를 폐지하고 총장간선제 등을 도입했습니다. 각 대학은 대학별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학교 상황에 맞춰 올바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직선제의 대안으로 간선제, 하향식 절충제, 상향식 절충제 등 다양한 방법이 있으니 평가 반영보다는 한국 고등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동형 • 동전의 앞뒤처럼 모든 정책은 장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직선제나 간선제(공모제)도 마찬가지이며 간선제(공모제)가 직선제보다 확실히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 총장임용제에서 보았듯이 통제위주의 관 주도 대학운영으로는 교육과 연구의 창의성과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교수들에 대한 학문적 자율과 권위가 보장되어야만 대학본연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공모제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대학경영으로 구성원 간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공모제로 인해 정부에 줄을 대려는 인사들이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직선제를 폐지하는 것보다는 직선제의 문제점을 개선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총장선거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통해 선거부정을 바로잡으면서 직선제의 폐해로 인정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대학평가 시 반영, 불이익을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강희 • 현재 전남대, 경북대, 부산대 등 국립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등의 공립대가 직선제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공립 전문대학은 간선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자율성을 그 자양분으로 하는 교육공동체입니다. 다소간 혼란이 불가피하더라도 직선제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물론 구성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다면 꼭 직선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요컨대 직선제의 틀을 유지하되 단점, 취약점,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식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또, 정부의 총장직선제 폐지 유도는 정부의 국립대학 법인화 취지와도 배치됩니다. 경영의 큰 틀을 대학에 맡긴다는 발상이 법인화라면 당연히 CEO 선택도 대학 구성원 내부 의사에 맡겨야 옳습니다. 직선제 여부를 대학평가와 결부시키려는 것은 직선제를 빌미로 대학을 쥐락펴락 옥죄겠다는 저의에 다름 아닙니다. ‘취업률 부풀리기’에 대한 대책 위반사례 발견 시 ‘엄격한’ 조치 강화 한강희 • 교과부가 지난해 6월을 기점으로 교내취업률도 대학 평가지표 취업률에 반영하겠다고 밝힌 이후 대학에서 다양한 편법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평가지표만 올리면 대학 구조조정을 모면하는 것은 물론 정부 재정지원까지 받을 수 있으니 대학으로서는 편법을 자행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강화해 이번 개선안에서는 건강보험 가입, 고용계약 기간 기존 3개월에서 1년 이상으로 강화, 최저 임금 이상 급여 지급 등의 3대 조건을 충족해야 교내취업률을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교과부의 조치가 취업률 부풀리기를 방지할 수 있을까요? 이동형 • 이번 취업률 산정방법의 개선으로 어느 정도는 취업률 부풀리기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하지만 현재처럼 계속 취업률에만 높은 비중을 둔다면 대학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업률 향상을 위한 편법적 노력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시점에서 취업률의 비중에 대해 냉정하게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업률 지표에 단순 취업률만을 반영하지 않고 대학설립목적, 4년 동안의 취업지도교육 및 예산지원 등에 대한 노력과 성과 등이 반영된 평가지표로 개선한다면 취업 부풀리기 등의 편법 대신 양질의 취업을 위한 노력에 총력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강선보 • 취업률 부풀리기는 분명히 잘못된 일이지만 대학 측만 비난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대학평가가 대학의 이미지나 재정 지원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취업률이 대학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평가를 받는 대학의 입장에서는 취업률 제고를 위한 각종 묘안을 짜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취업은 대학 자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이므로 대학이 강구하는 이러한 묘안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펙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취업이 잘 안 되는 스펙 푸어(spec poor)의 현실을 해결할 수 있는 종합적이고 실효 성있는 대책을 정부가 제시하면서 취업률을 대학평가의 지표로 활용하도록 해야 취업률 부풀리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영환 • 이번 개선안으로 교내취업 관련 편법이 다소 억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법에 의거하면 그 피용자의 고용기간을 2년까지 할 수 있으므로, 신의성실의 원칙상 통상 2년을 넘지 않는 기간까지 최대한 고용하는 것만 인정해 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대학 평가 시점을 기준으로 과거 3년간의 대학 내 취업 수를 산술평균해 반영하는 것도 취업률 부풀리기를 방지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투명한 취업률 집계를 위해서는 인증평가에 있어서 위법사례, 편법 부당사례가 발견될 경우 재평가대상에 포함시키거나, 차기 평가에서 크게 불이익을 주는 사후관리로 정비해야 합니다. 민·형사적 책임 등 확실한 조치를 부과해야 이런 불법사례가 시정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후관리와 함께 제반 평가에 교육관계법 등 제반법률 준수 정도 및 교육부패 개선지수도 평가항목화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특성화고 특별채용처럼 사립전문대생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필요합니다. 현재와 같이 종전에 전문대학 학생들의 일자리였던 것을 특성화고에 일방적으로 갖다 주는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에 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전문대생들을 위한 채용쿼터를 배정하거나, 최소한 특성화고 출신 전문대생만이라도 동등한 지원자격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학생 안전이 최우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세종시 첫마을의 잘 정돈된 시가지와 깔끔하게 가꿔진 조경은 첫마을이 뉴타운이라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게 한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마을에 울타리나 담장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첫마을에 있는 한솔중학교도 마찬가지다. 울타리가 없으니 당연히 정문도 없을 터. 어디서나 늘 봐왔던 정문이 없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학교에 조심스럽게 한 발 다가서면 정문 대신 스마트스쿨의 세계를 알리는 무선주파수인식(RFID : 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리더기를 만날 수 있다. 학생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스마트스쿨의 첫 번째 ‘스마트’한 시스템인 셈이다. RFID리더기는 이 학교 학생이 학교에 도착하면 전자학생증을 자동 인식해 등교처리를 하는 동시에 학부모에게도 문자메시지를 전달한다. 학생들의 안전과 사고예방을 위한 것이다. 또한 학교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에는 CCTV가 설치돼 있어 교무실과 교장실, 행정실에서 실시간 모니터링을 하고 있다. 사고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학생들에게 위험이 발생하거나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CCTV 밑에 설치된 비상벨을 누르면 된다. 비상벨은 인터폰과 같아서 교무실이나 행정실에 있는 교사에게 상황 설명을 하며 직접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마련한 완벽한 안전망이다. 권성순 교감은 “학생 안전 시스템구축은 사회적 이슈로 자리 잡은 학교폭력과 안전사고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자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철저한 준비로 탄생한 스마트스쿨 이제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스마트교육을 위한 시설을 완벽히 갖춘 미래형 학교라는 점이다. 이에 걸맞게 교실에는 음향 및 정보기기장비, 무선인터넷 등이 설치돼 있고 학교는 최첨단 장비로 가득하다. 학교 현관에는 비디오월(Video Wall)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비디오월은 학생들에게 학교의 공지사항 및 안내사항을 전달하는데 학교나 학급의 게시판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여기에 전자화된 시청각실과 도서실을 지나 교실로 들어서면 전자칠판, 전자교탁, 교사PDA, 학생용 스마트패드, 메시지보드 및 무선인터넷이 가능하도록 하는 무선안테나(AP) 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이루어지는 스마트형 교수·학습을 통해 창의력과 사고력을 신장시킬 수 있는 프로젝트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시설들이다. 또한 교내 무선인터넷 통신망 지원은 언제 어디서든 다양한 스마트기기를 활용할 수 있게 해주고 학생들은 이런 기기를 통해 학습의 장을 넓혀갈 수 있다. 하지만 하드웨어만 완벽하다고 스마트스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교육과정과 교사 역시 스마트교육에 맞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공모 및 지원을 통해 이 학교에 온 교사들은 스마트스쿨에 대한 연수를 통해 스마트스쿨의 취지와 수업방식을 숙지했다. 또, 개교를 앞둔 2월 초부터 학사일정과 수업 등 교육과정을 철저히 준비하며 스마트기기의 사용법을 터득하는 한편 학교의 교육목표와 실천방법을 정립했다. 구자일 교장은 “처음으로 도입되는 스마트교육이라 부담이 있었지만, 그 첫 길을 간다는 자긍심과 사명감을 가진 교사들이 협력해 개교에 맞춰 모든 것을 이상 없이 준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즐거움으로 가득한 맞춤식 양방향 교육 그렇다면 스마트스쿨의 수업은 어떻게 진행될까? “자, 이번에는 이전 수업에서 발표했던 동영상을 보고 선생님이 내는 퀴즈를 풀어볼까? 정답은 스마트패드를 이용해 선생님한테 보내도록 하자.” 1학년 4반 영어수업 시간이다. 교사가 전자교탁의 컴퓨터를 이용해 동영상을 열자 전자칠판에서 그 동영상이 재생된다. 학생들이 동영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교사가 터치스크린으로 된 전자칠판에서 직접 동영상 크기와 소리를 조절한다. 동영상을 본 후 학생들은 자신의 스마트패드로 도착한, 교사가 보낸 문제를 풀어 다시 교사에게 보낸다. 정답을 받은 교사는 모든 학생들의 정답을 전자칠판에 띄어 학생들 한 명 한 명의 답을 확인하며 수업을 진행한다. 그런데 학생 한 명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스마트패드를 계속 사용하고 있다. ‘스마트패드를 이용해 다른 것을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곧바로 교사가 그 학생을 지목하며 “좋은 질문”이라며 칭찬을 해준다. 학생은 스마트패드로 교사에게 직접 질문을 하고 교사는 실시간으로 학생들의 스마트패드를 확인할 수 있으니 질문과 소통이 무척 자유롭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양방향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전자칠판과 전자교탁, 스마트패드를 학습의 도구로 이용하는 스마트수업은 수업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수업을 마친 박지현 교사는 “아직까지 스마트수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많지만, 끊임없이 수정·보완해 간다면 미래형 학교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솔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스마트교육을 처음으로 접해 본 1학년 한호현 양도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바로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수업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또 초등학교 때보다 반 친구들이 적어 선생님이 얘기도 더 많이 해주고 좀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좋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런 스마트수업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교과교실제 덕분이다. 이 학교는 교사가 이동을 하면서 기자재를 가지고 다닐 수 없기 때문에 과목에 맞는 스마트기기 이용을 위해 교과교실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각 층별로 과목을 나눠 학생들이 수업에 맞춰 직접 이동한다. 또한 각 층마다 사물함이라고 할 수 있는 홈베이스를 학년별로 설치해 학생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학습용 스마트기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학기 초에는 학생들에게 스마트패드 및 스마트기기 사용법에 대한 수업을 진행했다. 스마트세대인 학생들이 기기 사용법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에 따라 기기의 사용법이 달라질 수 있고, 학습방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사들을 위해서는 교사협의실을 만들었다. 이 공간은 같은 과목 교사끼리 교육과정 연구와 학생지도 방법을 공유하고 소통하기 위한 곳이다. 인성과 감성을 더한 미래형 학교의 허브를 꿈꾸다 최첨단 기기를 도입한 스마트교육이라고 해서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니다. 조은경 교사는 “스마트교육만큼이나 인성지도와 창의교육에도 무게를 두고 있다”며 생활지도 부분을 강조했다. 이 학교 한 학급 당 학생 수는 25명이다. 때문에 담임교사의 세심하고 직접적인 생활밀착형 지도가 가능하다. 게다가 주기적인 정보통신윤리교육을 통해 문제점으로 제기되는 스마트패드의 악이용을 사전에 방지하고, 자기주도적인 창의적 체험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동아리활동 역시 학생들이 스스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동아리공모제를 통해 운영하고 있다. 이와 함께 체육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각 학년마다 전체 수업시수에서 체육시간을 한 시간 더했다. 체육활동을 통해 학생들의 신체성장을 돕고 자연스러운 인성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학교 안에 있는 헬스장, 수영장 등의 여가시설은 마을 주민들과 공유하는 것으로 학생들 스스로 더불어 사는 삶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울타리가 없는 학교와 마을을 통해 이웃, 사회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IT기기가 등장하고 있는 최첨단 정보화시대 길목에서 한솔중학교는 미래형 학교의 허브로써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한국의 스마트스쿨 로드맵을 그리고 있는 중이다.
학생들에게는 할아버지라고 불리고 주로 있는 공간은 두 평 남짓 수위실이지만 사실상 자신이 평생에 걸쳐 축적한 경험과 시간을 전부 기부하는 사람, 바로 김국남 배움터지킴이다. 경찰 고위 간부라는 꽤나 높은 자리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퇴직금도 있으니 얼마간 여행도 다니고 자신과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쓴다 해도 누구 하나 뭐라 할 사람이 없을 터인데 그는 자신의 경험과 열정, 심지어는 시간까지 싹싹 긁어모아 수도여자고등학교에 쏟아 붓는다. 우리나라 공교육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 그리고 경험 기부에 대한 오랜 욕심 때문이다. 그는 경찰관으로 재직하면서 무수히 많은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만났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왜 비뚤어지는지, 가정의 해체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지, 또 우리나라 공교육의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하루가 멀다고 바뀌는 교육정책, 날로 무너져가는 교권,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을 상실한 채 부모 손에 떠밀려 학교로 빨려 들어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던 날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이해하고 품어주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 죄책감도 느꼈다. 그래서 언젠가 제복을 벗는 날, 학교 현장으로 가 교사의 입장을 헤아리고, 학생들을 가슴으로 품으며 토닥여주고 격려해주리라 다짐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2009년 마침내 실현됐고, 지금 수도여고 배움터지킴이라는 자리를 지키며 수십 년간 되뇌던 고민과 숙제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다. “걱정 붙들어 매! 나 경찰 출신이라고!” 본래 그는 경찰관이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군장교로 복무했다. 제대하고 31살에 경찰관 시험을 통과해 경위부터 시작해서 경감, 경정까지 차곡차곡 능력과 인품을 인정받아 승진하다가 1999년에는 경찰총경이라는 직함까지 달았다. 남다른 행보였고, 자부할 만한 족적이다. 하지만 배움터지킴이를 하고 있는 지금,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과거에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을지라도 그건 과거일 뿐이지. 과거에 매이면 앞을 못 봐.” 간결하고 명쾌한 대답에서 그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그는 경찰 시절부터 몸에 밴 시간 새벽 4시 30분이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한다. 지난 30년간 변함없이 지켜온 기상시간이다. 경찰서로 출근할 때야 순찰, 범인 수색, 교통정리, 또 때로는 시끌시끌한 경찰서 데스크에 앉아 부하 직원들의 보고를 받고, 인사를 받고, 결재 사인을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지만 학교로 출근하는 2009년부터는 이전과는 360도 달라진 삶을 산다. 일찍부터 서두른 부지런한 개미 학생들이 마음 편히 자습할 수 있도록 교내외 주변 순회를 하고, 7시부터는 학생지도부 선생님들과 함께 정문 앞에 서서 흰 머리가 듬성듬성한 머리를 90도로 숙이며 학생들을 맞는다. 학생들이 학교에 올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얼굴이 된 셈이다. 9시 30분부터는 정문 옆 작은 수위실을 지키며 학교 안팎을 살피고 출입하는 학생들과 외부인을 통제·관리한다. 배움터지킴이라고 해도 업무시간은 교사, 학생과 마찬가지다. 지켜야 하는 규칙도 많다. 주어진 근무시간은 8시간이지만 새벽 6시 30분부터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학생들 등교지도, 교통지도, 가끔씩은 담배피우는 학생들과 무단 외출하는 학생들에 대한 생활지도, 교내외 취약 장소 순회를 하다 보면 10시간, 11시간 근무하는 날이 대다수다. 교육의 시작은 학생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부터 그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는 마음으로 매사에 완벽을 기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보니 잊히지 않는 에피소드도 제법 있다. 하루는 학생들 등교지도를 마치고 수위실에 앉아 있는데 80대로 보이는 노부부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찾아와 수위실 창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얘기를 들어보니 손녀를 만나려고 왔다고 하면서 이름도 말해주지 않는 게 아닌가. 안되겠다 싶어 수위실 안으로 모시고 상담을 했더니 노부부에게 맞벌이하는 아들, 며느리가 있는데 고부갈등이 너무 심해져 아들 내외가 집 전화번호, 핸드폰번호도 싹 바꾸고, 주소도 말하지 않고 이사를 가버렸다는 것. 그래도 노부부는 당신네들 손으로 키웠던 손녀가 눈에 아른거려 쌈짓돈 20만 원을 들고 와서 손녀에게 전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 그렇다고 내가 덥석 돈을 받을 순 없잖아. 그래서 지도부 선생님한테 사정을 얘기하고 수소문해서 지도부 학생 명단에서 학생 이름을 찾았어. 복도에서 학생한테 돈을 주면서 밖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와 계신데 만날 의향이 있느냐 물었더니 아, 글쎄 안 만난다는 거야. 뭐 어떡해, 싫다는데. 노부부가 울면서 갔어.”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노부부는 여러 차례 와서 손녀를 만나려고 했고 그때마다 조부모와 손녀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며 서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결국 손녀는 마음을 돌이켜 할머니를 만나 극적인 화해를 했고, 노부부는 감격해서 지금까지도 고맙다는 인사 전화를 한다고 한다. 소통을 향한 한걸음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교육계와 경찰계가 손을 잡고 학교폭력 근절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요즘, 그는 학교로 흡수돼 학생들을 보호하고 배움터 주변 환경을 지켜낸다. 은퇴 후 배움터지킴이로서 또 다른 인생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각이 선 제복을 벗고 인심 좋은 ‘선생님’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는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변화무쌍한 교육환경과 과중한 업무 속에서 교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가르치고 있는지 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몰랐지. 지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야.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건 학생들이야. 교사가 학생들을 품어주지 못하니까 학생들은 할 얘기가 있어도 참는다고. 그러면 소통이 안 되잖아. 가장 중요한 건 이해와 소통인데 말이야.” 그는 오랫동안 경찰관으로 있으면서 깨달은 것이라며 젊은 교사들을 위한 조언을 조심스레 전한다. “관계의 핵심은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소통에서 온다고, 그걸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학생들이 ‘선생님~’ 부르면서 달려오면 기분이 상쾌해진다”고 얘기하는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즐거운 마음으로 배움터지킴이로 살면서 함께 나누는 진정한 삶의 스승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 선생님 모두가 그에게는 가장 귀한 인적 재산이라고 속삭이는 그에게서 주변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툼과 폭력 사이 학교폭력으로 전국 온 학교가 들썩이고 있다. 연일 쏟아지는 관련 연수에 생소한 용어들, 즉각·즉시적 대응방법 및 증거확보 중심의 학교폭력 처리과정 숙지 등 한마디로 학교는 난리법석이다. 현장에 있는 교사로서 지금도 자라고 있는(growing), 아직 완성되지 않은(being) 아이들 간의 거친 상호작용까지도 자칫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될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집, 유치원을 거쳐 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아이들은 사회를 경험한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나의 욕구와 남의 욕구가 다름을 알게 되고, 언제나 내 욕구가 충족될 수 없음을 알아 간다. 그 과정에서 슬픔이나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함께하는 기쁨과 배려에서 오는 따뜻함을 배우기도 한다. 아이들은 개인의 타고난 기질이나 가정의 문화, 부모의 태도로 인한 잠재적 습득 등에 따라 타인과 함께하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에 저마다 다르게 대처한다. 어쨌든 아이들의 속마음은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난다. 교사의 눈으로 볼 때 사소하다고 생각되는 수준에서 심각하다고 느껴지는 수준까지 참으로 다양한 넓이와 깊이의 다툼들이 아이들의 생활 속에 함께한다. 그러나 이렇게 학교가 ‘폭력’이라는 말로 얼룩진 것은 다툼의 수준을 넘어 위험하고 치명적인 범죄수준의 문제들이 너무 이른 연령에서 자주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PART VIEW] 폭력의 씨앗, 편견 아이들은 언제부터 폭력적이었는가? 이 질문은 ‘아이들은 언제부터 폭력에 노출되어 왔는가?’로 바꿔 말할 수 있다. 교육에서는 개인의 기질과 결함된 환경의 영향이 한 사람의 ‘지금’을 설명해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점수를 매기고 등급을 주어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길들여지다 보면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을 잃고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편견이다. 편견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틀렸다고 생각되는 것을 바라보는 주체인 나는 상대적으로 옳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법을 사용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한다. 그 방법이 가진 폭력성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폭력적이다. 편견 자체가 폭력의 씨앗이 되는 것이다. 다름 이해교육, 반(反)편견 교육 특수교사로 현장에서 일반학생과 장애학생의 조화로운 관계형성과 장애인식개선을 위해 애쓰면서 아이들이 생각보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음에 놀란다. 직접 만나거나 함께 생활한 경험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조차도 단호하고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장애인은 아프니까 무조건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에는 장애인에 대한 상대적 우월감과 연민이 녹아 있다. 나도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듯이 장애인도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고,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무조건 항상 도움이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부모가 아이를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가타부타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자체가 편견을 대물림하는 것이다. 서로 주고받는 것 없이 일방적인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누구나 어떤 이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주기도, 어떤 이의 어깨에 기대기도 하니까 말이다. 통합학급에서 장애학생과 단골짝꿍을 하는 학생들을 보면 당시에는 장애아동을 열심히 도와주다가 다음 학년이 되어서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그 학생을 놀리거나 피해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그들 안에 있는 편견이 처음에는 정의감으로 표현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원래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리라. 병원학교에 있으면서 일반학생들에게 ‘소아암(백혈병) 이해교육’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소아암에 걸린 학생이 마스크를 쓰고 다닌 이유를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옮으니까요’라고 대답하는데 참 흥미로웠다. 아이들은 감기가 유행할 때 마스크 쓴 사람 옆에 있으면 엄마가 ‘감기 옮는다, 저리 가자’라고 한 것을 여과 없이 내면에서 일반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아암에 걸린 친구들은 치료 과정에서 면역이 많이 약해져서 건강한 사람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정도의 작은 세균에도 크게 아플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쓴다고 이야기하자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들이 피해야할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배려해줘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안 것이다. 아이들은 다름의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면 어른보다 훨씬 빨리 왜곡된 생각을 수정한다. 이럴 땐 어른보다 아이들이 더 어른스럽다. 바로 이것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위해 ‘다름 이해교육, 즉 반(反)편견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다. 서로 다른 아이들, 그들의 우정 만들기 다시금 학교폭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교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기 쉬운 존재가 바로 장애학생이기 때문이다. 장애학생들의 심리내적인 요인들이나 장애라고 생각되어지는 불편한 점들로 인해 일부 통합학급은 바람 잘 날 없이 시끄러울 수 있다. 가만있는 장애학생을 나쁜 말로 놀리거나 자신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고, 장애학생의 소위 문제행동으로 인해 아직 인내심이 많지 않은 초등학생들은 감정적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일반학생이나 장애학생이 이러한 불편함에 노출되었을 때 교사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장애학생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 힘들어할 수 있다. 이럴 땐 우리 모두를 위해 이해가 아니라 인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 모두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냥 다름을 다름 자체로 인정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일반학생들이 장애학생을 함부로 대하거나 이유 없이 놀릴 때에는 그들의 마음이 무엇 때문에 들끓고 있는지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 것이 좋다. 그것을 찾아 해결하거나 다독이고 나서 장애학생에 대해 그 학생이 보인 태도를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그리고 작은 것부터 장애학생과 함께 할 수 있는 과제를 주자. 서로 모른다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가? 이렇게 학생들이 서로를 알아 가는데 좋은 인성교육프로그램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경인지역 특수학급 교사들의 연구모임인 ‘서울경인 특수학급 교사연구회’에서 통합학급 담임교사가 장애아동과 일반아동이 함께 할 수 있는 교육활동을 1년 단위로 엮은 통합학급 지원 프로그램 ‘서로 다른 아이들이 함께 만드는 우정(이하 서다우)’이 그것이다. 우리 반 아이들만의 계발활동을 개설하거나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반 아이들과 서다우 프로그램을 함께한다면 장애학생은 물론 다문화가정 학생, 나를 제외한 나와 다른 나머지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1년을 좀 더 즐거운 추억으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연재 끝 ※ 서울경인 특수학급 교사연구회 홈페이지(www.tesis.or.kr)를 방문하면 서다우 프로그램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인 언어유희는 때로는 수준 높은 해학을, 때로는 가벼운 말놀이로 긴장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개그를 보면 욕도 아닌 것이 욕처럼 들리는, 그러나 분명 욕의 의도를 담고 있는 말장난들이 등장한다.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기 때문일까, 인기 만점이다.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는 이 ‘애매한 말장난’을 두고 심의 중이다. 다양한 언어유희 속에서 교육적 성찰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싶다. 김꽃두레 씨, 저는 어떻게 웃어야 하나요? “샘! 김꽃두레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꼭 보세요. 정말 재미있어요.” 평소 ‘유머감각 고양’을 목표로 하는 필자를 위해 충성심(?) 강한 제자가 한 케이블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었다. 코미디나 개그 프로그램을 보며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을 좋아했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특히 필자가 좋아하는 개그우먼이 멋진 연기를 한다기에 기대감은 잔뜩 부풀어 올랐다. 그 개그우먼은 기존 프로그램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을 과감히 버리고, 파격적인 연기혼으로 동물, 영화캐릭터, 사물 등을 실감나게 분장하여 시청자를 포복절도하게 만든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개그우먼의 연기만 보면 거실을 데구루루 구르며 입고 있던 티셔츠로 방 청소를 했던 경우가 많았기에 이번에도 거실을 구를 준비를 하며 시청했다. 그런데 개그우먼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필자의 예측에 허를 찔렀다. 폭력적인 학생, 즉 소위 문제아라고 부르는 학생을 표현하기 위해 개그우먼은 김꽃두레라는 이름으로 기괴한 복장과 이상한 화장, 현란한 피어싱을 하고 등장했다. 좀비형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서 상대방의 말을 비틀어서 받고, 냉소적인 미소를 짓곤 했다. 특히 “이런 면~접 같은, 이런 피~씨방” 등과 같이 욕설은 아니나 분명히 욕의 의도를 담고 하는 말장난을 구사하고 있었다.[PART VIEW] 분명 웃기고 재미있는 상황이기는 한데, 무엇인가 형용하지 못할 불편함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갑자기 김꽃두레라는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폭력적인 학생, 일진 학생을 웃기게 표현하려는 의도인가? 그럼으로써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학교폭력에 대해 풍자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욕설을 표현하는 절묘한 언어유희를 통해 방송이라는 미디어의 심의를 절묘하게 넘어가는 스릴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시청자에게 욕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냥 크게 웃고 넘어가자는 것인가? 마음껏 웃기를 희망하며 보았던 프로그램에서 개그의 사회적 의미와 언어유희에 대한 깊은 고민이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언어유희 흐름을 생각하다 언어유희란 ‘말장난, 말놀이’라는 의미로, 말이나 글자를 소재로 하는 놀이를 뜻한다. 끝말을 이어 말하거나 어려운 말을 외우는 놀이, 새로운 말을 만드는 놀이가 모두 언어유희에 해당된다. 문학적으로 춘향전에서 ‘서방인지 남방인지’와 같은 표현, 나무노래에서 ‘십리 절반 오리나무, 서울 가는 배나무’와 같은 표현들을 모두 언어유희라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친구들과 끝말잇기를 하는 놀이, 동음이의어로 하는 재담 등이 모두 언어유희에 해당한다. 최근에는 ‘넌 천 사, 난 바늘 살게’와 같은 문자메시지, ‘엄마아빠로 4행시를 지으면 엄마는 마덜, 아빠는 빠덜’과 같은 인터넷 게시글에서도 언어유희의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뉴스의 딱딱함과 격식을 깨기 위해 ‘탈출한 말레이 곰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도망 다니지 말레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아나운서에게 언어유희의 욕구를 읽을 수도 있다. 개그 프로그램은 언어유희의 단골 무대로서 ‘꺾기도’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여러분, 재미있으셨습니까부리, 까부리” 등과 같이 말꼬리에 무의미한 단어를 붙여 사용하기도 하고 같은 음절에 다른 낱말을 연결하여 대화하기도 한다. 이렇게 언어유희는 보는 이, 듣는 이에게 웃음이라는 선물을 선사하며 엔도르핀을 분비시킨다. 빡빡한 느낌이 드는 삶의 순간, 어색한 대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 어려운 것을 잠시 잊고 싶은 상황에서 언어유희는 삶의 긍정성과 낙천성을 이끌어주는 힘을 주었다. 언어를 통해 재미와 단순한 기쁨을 누리는 것! 어떻게 보면 언어유희는 대화와 소통에 가미된 언어의 윤활유 역할을 하였다. 학생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다 김꽃두레의 언어유희도 필자가 일반 대중의 입장이었다면 즐겁게 웃고 넘어갈 유머였는지도 모른다. 해학적인 느낌만 가지고 즐겼다면 불편함이 없었겠지만, 교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이에 개그의 수용자인 학생들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정희/ 김꽃두레의 개그를 정말 좋아하는데요, 저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요. 문제 학생, 폭력 학생을 풍자하는 모습에서 욕설과 비슷한 말을 사용하기 때문에 웃긴 것이거든요. 이런 장면을 봤다고 해서 그런 욕설 말장난이 좋다고 느끼지는 않고, 또한 사용하지도 않아요. 그냥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보고 즐기는 거예요. 민호/ 저도 자주 그 프로그램을 보곤 해요. 안영미 씨가 연기를 잘해서 정말 재미있어요. 특히 욕설을 의미하는 말을 하면 저도 방청객들처럼 많이 웃어요. 그런데 만약 제가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웃고 나면 조금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요. 수정/ 텔레비전에서 그런 말을 쓴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나이가 어린 학생은 보지 않도록 시청 연령이 표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동영상이 많이 나오거든요. 어린 학생들이 이를 보고 따라하거나 배운다면 어떨까요? 저희 부모님은 그래서 보지 말라고 하세요. 학생들과 대화하며 우리 아이들이 미디어에 대해 나름의 기준과 판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미디어에 대해 가치관을 정립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잠시 고민의 끈을 내려놓기도 하였다. 미디어를 접하는 성찰의 교육을 생각하다 혹자는 필자를 고지식한 국어교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의 대중문화에서도 최소한의 교육적 기준은 지켜주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전통적인 언어유희가 때로는 수준 높은 해학을, 때로는 가벼운 말놀이로 긴장을 완화한 반면에, 사례로 제시한 개그처럼 말놀이가 욕설을 빗대거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파괴적인 수단이라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교육적 성찰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좋지 않은 언어유희를 배워서 주변인에게 사용하거나, 풍자를 위한 비판이 아닌 단순한 비난의 수단으로 말놀이를 이용한다면, 이는 언어유희가 주는 본질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닐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다매체 시대를 살아가면서 더욱 많은 개그와 언어유희를 접하게 되고, 또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디어, 개그, 그리고 언어에 대해 학생들이 직접 대화해 보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이를 바라보는 냉철한 힘을 기를 논의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은 어떨까? 언어유희를 마음껏 즐기면서도 자극적이거나 지나치게 공격적인 말놀이에 대해서는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교육! 소박하지만 재미있던 언어유희의 본질을 알려주고, 상황과 맥락에 맞게 적절한 언어유희를 구사하게 하는 교육! 이것이 바로 학생과 교사, 아이와 어른, 사람과 사람이 함께 즐겁게 소통하고 의미 있게 대화를 하는 접점이 아닐까 한다.
넘치게 야단을 맞은 동안 아이는 마음속에서 이미 자기 스스로 자기의 잘못에 충분한 면죄부를 준다. 이렇게 심하게 야단맞고 있으니 이제 나 잘못한 것은 없어졌다. 잘못한 값을 전부 물어내고도 남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한 값을 다 물었을 정도로 꾸중을 들었는데도 꾸중이 넘치게 계속되면 이제 그 넘치는 꾸중의 분량은 꾸중하는 사람을 향해 언젠가는 되받아 내야 할 감정상의 빚으로 남는다. 1.넘치게 잘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고맙다. 하지만 이 넘치는 것이 감당이 안 되게 계속 다가오면 꼭 고맙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언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순간, 넘치게 잘해 주는 것은 살짝 부담으로 다가온다. 입장을 바꾸어 보자. 나는 누구에겐가 넘치게 잘해 주었던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 나의 헌신적 성품과 봉사정신의 발로이었던가. 그렇지 않을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상대에게 어떤 보상적 호응을 나도 모르게 기대하지는 않았던가.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다고 강변해도, 내 무의식의 심연에는 보상에 대한 기대가 숨어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기에 인간인 것이다. 같은 직장에서 좀 넘친다 싶을 정도로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던 동료가 있다. 그래서 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저 데면데면 지내며 그럭저럭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즈음에, 느닷없이 그에게 봉변에 가까운 공격을 받는다. 나는 그에 대해서 별 생각 없었는데, 그의 편에 서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넘치도록 잘해 주었는데, 좀 자기에게 다가와서 살펴주지 못한단 말인가. 치사하게 말할 수도 없고, 대충 참아둔다. 그러다가 사소한 일을 빌미로 참아둔 것이 터진다. 갑자기 그가 격렬한 언사로 나를 욕한다. 당혹스럽고 놀랍다. 그는 겉으로 ‘사소한 그 일’을 문제 삼지만, 그가 마음 안에서 실제로 문제 삼는 것은 그의 넘치는 공덕을 내가 따뜻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이다. [PART VIEW]그의 분노가 얼른 생각하면 당치도 않은 부당함 같지만, 그가 내게 베푼 넘치는 배려들을 그냥 넘치게 방치해 두었던 내 잘못이 있었음을 나중에 알게 된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긴 하다. 누가 그렇게 넘치도록 해 달라고 했단 말인가. 사실 넘치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어딘가 자기 내부에 ‘결핍에 대한 아픔’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사랑에 대한 결핍, 관계에 대한 결핍일 경우가 많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서 그는 자아 바깥을 향해 그렇듯 베푸는 노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넘치는 것은 일단 합리적이지 않다. 또 상대가 늘 자신만 일방적으로 넘치는 역할을 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넘치게 하기’는 관계의 균형을 망가뜨린다. 사실 연애 관계에서도 이 격률은 긴 흐름으로 보면 유효하다. 설명을 어렵게 돌려서 했지만, 속된 말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대목이다. 감정이든 배려든 인정이든 염려이든 그것이 일방으로 넘치면 낭패로 치닫기는 잠깐이다. 이렇게 넘쳐서 잉여로 남게 되는 감정은 삽시간에 분노의 에너지로 화할 수 있다. 그 분노 또한 맹랑하여 절대로 이성적인 것은 못된다. 내 공덕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클수록 통제의 끈을 놓치게 된다. 그러므로 넘치는 것은 나쁘다. 넘치게 방치하는 것 또한 나쁘다. 2. 아이들을 야단쳐야 할 때가 있다. 그릇을 깨거나 가구를 망가뜨리거나, 남을 때리거나, 못된 거짓말을 하거나 등등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아무 일도 없었듯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마땅히 꾸중하고 야단쳐야 한다. 그런데 너무 넘치게 야단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훈육의 방법이다. 여러 아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한 아이를 대표 케이스로 불러내어 넘칠 정도로 심하게 꾸짖는 경우가 있었다. 부모나 선생님 쪽의 편의를 위한 징계일 가능성이 다분하다.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짧은 효과에 긴 부작용’만을 남긴다.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데, 요즘은 군대에서도 잘 쓰지 않는 군기잡기이다. 특히 자기가 무엇을 잘못한지를 아는 아이에게 지나치게 넘치는 꾸중과 질책을 하는 것은 뒷날 만회할 수 없는 손실을 불러온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아는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그는 자기가 어느 정도 꾸중을 들어야 할지도 대략 헤아릴 수 있는 아이다. 잘못을 한 아이들은 자기가 받을 벌과 꾸중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이미 직관적으로 헤아릴 수 있다. 그러고는 부모나 선생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넘치게 야단을 맞는 동안 아이는 마음속에서 이미 스스로 자기의 잘못에 충분한 면죄부를 준다. 이렇게 심하게 야단맞고 있으니 이제 나 잘못한 것은 없어졌다. 잘못한 값을 전부 물어내고도 남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한 값을 다 물었을 정도로 꾸중을 들었는데도 꾸중이 넘치게 계속되면, 이제 그 넘치는 꾸중의 분량은 꾸중하는 사람을 향해 언젠가는 되받아 내야 할 감정상의 빚으로 쌓인다. 내가 잘못한 빚은 다 갚았는데 또 이렇게 넘치게 야단을 치니 이 야단을 언젠가는 내가 다시 되받아 내야 할 채권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엄한 부모와 자녀 사이에 고만고만한 불화가 있는 것의 주된 원인이 여기에 있다. 넘치게 꾸중을 듣는 아이들은 자라서도 ‘부모에게 대들 수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비축해 둔 것처럼 무의식중에 행동한다. 이게 어찌 아이들의 마음에서만 일어날까.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아랫사람 나무라고 야단칠 때 지혜로운 임계점을 잘 찾는 어른이 진짜 어른이다. 대신 좀 모자라게 꾸중을 들었을 경우는 어떻게 될까. 아니 생각지도 못한 큰 용서를 받았을 때의 심리는 어떠할까. 분명 오늘 내가 저지른 과오는 중대한 과오이다. 부모님이 아시면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아, 나는 오늘 정말 죽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느 정도 꾸중을 들어야 할지를 헤아려 보고 또 헤아려 본다. 그런데 부모는 가볍게 나무라시고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는 정도로 꾸중을 마무리한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이의 마음속에는 아직 더 벌 받아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감정상 빚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부모에 대해서 감정상의 채무를 지는 셈이다. 이 빚을 어떻게 해서든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채무 의식은 부모에 대한 공경과 사랑으로 나타날 것이다. ‘모자람’이 ‘지나침’을 압도하는 대목이다. 3. 넘치면 풍족하여 좋다. 부족한 곳에 나누어 선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넘침은 흔하지 않다. 넘침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불행의 원천이 된다. 넘침은 쓸데없이 남아도는 것으로 흐르기 쉽다. 남아도는 것이 많다보면 인간의 욕망이 왜곡된다. 사실 잉여(넘치는 것)가 결핍(모자라는 것)만 못한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결핍은 절실함을 부르고, 결핍은 절제를 익히게 한다. 하지만 잉여 가운데 파묻혀 있다 보면 행복해질 수가 없다.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잉여는 권태를 부르고, 권태는 허영을 부르는데, 다시 잉여는 그 허영을 모방하도록 인간을 몰고 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잉여는 인간의 욕망을 타락시키게 한다. 문학비평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 1923~)는 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토스토에프스키 등 근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여 인간의 진짜 욕망과 가짜 욕망을 구별하였다. 그는 현대인들이 진정으로 자기 내면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나는 욕망을 가지기 어렵다고 보았다. 특히 위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남이 무언가를 욕망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여 내 욕망을 만들어 내는 인물들임을 밝혔다. 그것은 ‘왜곡된 욕망’이고 ‘짝퉁 욕망’이고 ‘타락한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욕망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이 순정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오염되기 때문이다. 내가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경우가 자발적으로 생겨난 진정한 욕망이라면, 다른 사람이 커피를 좋아하는 욕망을 내가 은연중에 모방하여 나도 커피를 욕망한다면, 내가 커피를 욕망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커피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베껴 넣은(매개시킨)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그런 욕망을 ‘매개된 욕망’이라 부른다. 오늘날 대중 미디어의 상품 광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매개된 욕망’에 이끌려가도록 한다. 배가 고프지 않는데도 맛있는 라면 광고를 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물을 데우고 마침내 라면을 끓여 먹는다. 그러고 나서 공연히 잠잘 밤에 라면을 먹었다고 후회를 해 본 경험을 너도나도 가지고 있다. 괜찮은 얼굴인데도 몇 번씩 얼굴을 뜯어고치면서 ‘연예인 아무개의 얼굴처럼 고쳐 달라’는 주문을 한다. 성형만으로 생애 전체가 진정한 행복을 담보받기는 어렵다. 사실 가전제품 따위를 살 때, 우리들의 구매 욕망은 이웃이나 친구의 욕망에서 매개된 것이 대부분이다. 연애나 결혼을 하는 데도 이런 가짜 욕망들이 판을 친다. 매개된 연애 욕망들, 모방된 연애 욕망들이 이 사회에 넘치고 또 넘친다. 텔레비전에서 본 연애나 결혼을 모방적으로 욕망하는 것이다. 경제형편이 안 되는데도 무리해서 비싼 호텔 예식장을 구해야 하고, 남들에게 자랑하려면 빵빵하게 혼수를 받아야 한다고 강박한다. 그러다가 막상 결혼 자체가 깨어지기도 한다. 청순한 청춘의 시절에 꿈꾸었던 나의 진정한 연애 욕망은 무엇이었던가. 르네 지라르는 매개된 가짜 욕망으로 사랑을 얼룩지게 하고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대표적 인물로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에 나오는 주인공 ‘줄리앙 소렐’을 지적한다. 모든 넘쳐나기에는 브레이크가 없다. 모든 넘쳐나기에는 강한 중독성이 들어 있다. 넘침보다는 모자람을 선택할 일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모자람’을 가까이 두고 살 일이다. 그곳이 바로 행복이 비쳐드는 지점 아닐까. 인생을 길게 보면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