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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조현호 | 울산 옥현초 교사 귀신들이 만든 돌다리 지난 호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현존하는 전국의 돌다리를 찾아가고자 합니다. 삼국유사 편에는 '귀교(鬼橋)'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다리의 감독관은 '비형(鼻荊)'이라는 자인데 아버지 진지왕은 저승세계의 귀신이요, 어머니 도화녀((桃花女)는 이승세계의 생모이므로 비형은 반신랑(半神郞)의 독특한 신분입니다. 비형은 밤이면 귀신들과 어울려 수작을 부리곤 했는데 이를 안 진평왕이 비형으로 하여금 신원사 북쪽 개천에 돌다리를 놓도록 명령을 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룻밤 사이에 귀신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다리를 완성하고 맙니다. 기록상 우리나라 최초의 돌다리는 바로 귀신들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불가의 다리 불가(佛家)에서는 세상의 중심에 수미산이 우뚝 솟아 있다고 합니다. 그 수미산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인간들이 수미산에 가려면 8산9해(八山九海)를 넘어야 겨우 수미산 어귀에 이르게 되고 그 수미산을 사천왕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빈틈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절집들이 깊은 산중에 입지한 경우가 많은 것은 척불(斥佛)이나 고유의 산신신앙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우주관이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절들은 대개 계곡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필연적으로 다리를 건너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과정은 물을 건넘으로써 차안(此岸)의 세계에서 피안(彼岸)의 세계로 접어들고 해탈, 극락의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에서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이라 하여 다리를 놓는 행위를 수행의 과정으로도 봅니다. 다리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도와 복전(福田)을 확보함으로써 깨달음에 더 빨리 이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수행자인 스님들이 월천공덕으로 쌓은 다리 중 대표적인 다리가 벌교에 있는 ‘홍교(虹橋)’입니다. 벌교(筏橋)라는 지명은 옛날에 뗏목다리가 있어서 불린 이름입니다. 조선 숙종 44년(1705)경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이 다리를 놓았다고 하며 영조 13년(1737)에 개축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다리의 내력이 담긴 석비가 많이 남아있어 그 가치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과학과 미학의 조화 - 무지개다리 무지개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 일컫습니다. 주로 궁궐이나 사찰 다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견고함과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석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무지개 모양으로 양쪽에서 쌓아가다 최종적으로 이맛돌[key stone]을 끼우면 완성됩니다. 홍예교의 견고함은 바로 이 이맛돌에서 비롯하는데 이맛돌이 빠지지 않는 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위에서 가하는 힘을 좌우로 분산시키기 때문에 붕괴 위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과학의 힘에다 선경(仙境)에나 등장할 듯한 미학이 조화를 이룬 쾌거라 하겠습니다. 무지개다리라 하면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昇仙橋)’를 많이 떠올립니다. 승선교의 아름다움은 뒤에 배경으로 따라오는 강선루(降仙樓)가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신선이 타고 오르는 무지개다리와 신선이 내려와 머문다는 집의 조화가 있기에 그 아름다움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함산이 있기에 함월산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강원도 고성 거진에 자리한 건봉사에도 ‘능파교(凌波橋)’가 있습니다. 대웅전 지역과 극락전 지역을 연결하는데 숙종 30년(1704)부터 숙종 33년(1707) 사이에 처음 축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폭 3미터, 길이 14.3미터, 다리 중앙부의 높이는 5.4미터이며, 다리의 중앙부분에 큰 아치를 틀고 그 좌우에는 장대석으로 축조하여 다리를 구성하였는데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돌다리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남 창녕 땅 ‘영산 만년교(萬年橋)’는 이전의 나무다리가 가진 불편함을 없애고 천 년 동안 변하지 않는 돌로 다리를 만들어 오랫동안 보존하자는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특히, 반원형 홍예는 영산 석빙고가 자리한 상류에서 흘러오는 개천과 어울리면 완벽한 원을 만들어 가히 환상적입니다. 조선시대 1780년에 석공 백진기가 가설하고, 1892년 4월에 영산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 다시 지었습니다. 전남 여수의 흥국사 홍교, 강진의 병영성 홍교와 진도 남박다리 또한 무지개다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돌을 나무처럼 잘라 뚝딱뚝딱 전라남도 함평군과 나주시를 가르는 고막천 위에 놓인 고막천 석교는 현지인들이 ‘똑다리’ 또는 ‘떡다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려 원종 14년(1723)에 무안 승달산에 있는 법천사의 도승 고막대사가 이 다리를 눈 깜짝할 새에 도술로 ‘똑딱똑딱’ 하여 ‘떡하니’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다리가 있는 고막리는 행정구역으로 함평군 학교면에 속합니다. 고막마을이야 고막대사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인 것은 추론할 테고 학교란 지명이 재미있지요? 학교(鶴橋)는 ‘학다리’를 말합니다. 삽교(揷橋)를 ‘삽다리’라고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다리는 무지개다리와는 달리 돌을 나무 다루듯 잘라서 교각 및 상판으로 꾸민 목조건축물의 양식을 보이는 돌다리입니다. 지난 2001년도 보수공사시 바닥 기초 나무 말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소한 고려 말, 조선 초로 밝혀져 축조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돌다리임이 증명되어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나주평야가 인접하여 한 때 각종 물산을 실은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던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그 화려함을 잃었지만 조수간만의 차와 홍수 등 모든 악재를 이겨내고 수백 년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1980년에 고막마을 사람들이 세운 유적비에 이 다리에 대한 향수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 서술컨데 이 석교는 옛날의 국도가 나주함평의 군계(郡界)를 흐르는 고막천을 통과하는 데에 가설된 것인데 철도와 신도로가 석교의 바로 전방에 개통된 1910년대만 해도 영산강을 오르내리는 선박들이 바로 교하(橋下)에 정박되어 있었음으로 미루어 그가 교통산업상 중요한 일역을 담당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고도화되는 문명으로 급속히 변모되는 세태는 석교로 하여금 그 무거운 짐을 후배 교량들께 물려주게 하였으니, 이제는 면전에서 들리는 갖가지 차량의 경적과 굉음을 푸념삼아 귀에 익히며 볏단을 나르느라 조심스레 아끼며 밟고 지나가는 농부의 발자국에도 긍지와 애착을 느끼고 그것으로써 자위 자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승지(勝地)는 불멸일세. 이 석교가 고려조 이래 수백 년간에 쌓아올린 공적과 아울러 고막스님의 이름은 고막마을과 고막강으로 흐르는 강물의 영원함과 같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 이 고장을 지켜보리라…. 한편, 충청도 옥천 땅에 있는 ‘청석교(靑石橋)’도 목조건축 양식을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긴 장대석을 놓고, 그 양 끝에 네모진 돌기둥을 세워 교각(橋脚)을 만들고 그 위에 넓고 긴 상판석을 얹어 두었습니다. 고려 시대 강감찬 장군이 이곳을 지나다가 모기 때문에 백성들이 괴로워 하고 있음을 보고 모기에게 호령을 하여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원래 군북면 증약리에 있었는데, 보존상의 이유로 지난 2001년 4월 옥천 향토전시관 앞 인공못에 박물(博物)이 되어 서 있습니다. 근대화에 제 할일을 잃어도 미내다리[渼奈橋]는 금강지류인 강경천에 자리해 있습니다. 옛 비문에 의하면 강경의 석설산과 송만운이 처음 발의하고 주동이 되어 모금한지 일 년도 되지 않아서 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다리를 완성하였다고 하네요. 특히 이 작업에는 승려들이 협조해 주었다고 합니다. 원래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조수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하여 ‘조암교’ 혹은 ‘미교’라고 일러오다가 조선 영조 7년(1731)에 지금의 다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다리를 찾으면 다리가 냇가를 가로질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강경천의 물줄기와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다리가 물길과 평행하게 놓여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논산문화원 관계자의 답변을 듣고야 수긍이 되었습니다. 1931~1932년 일제강점기에 높은 제방을 쌓아 하천정비를 하는 과정에서 당시 여럿이던 물길을 정비하면서 다리 아래로 흐르던 물길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근 원목다리[院項橋]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목다리는 물길을 가로질러 제 위치에 있지만 하천정비로 인해 하천의 폭이 넓어지면서 현재 다리로는 물이 들지 않고 옆으로 물이 흘러갈 뿐입니다.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것이죠. 식량의 보고인 금강유역을 넘다들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미내다리와 원목다리는 자신보다 훨씬 키 큰 제방 아래에 웅크린 채 옛 영화를 추억할 뿐입니다. 투박한 막돌이 모여 미려한 농다리가 ‘생거진천(生居鎭川)’은 충북 진천 땅이 살기가 좋은 고장임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진천 땅 세금천에 ‘농다리[籠橋]’라고 불리는 돌다리가 있습니다. 지역 향토지에 따르면 고려시대 임연장군이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하는데 기록으로 보았을 때 현존 최고의 석교라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그런데 이 다리의 축조 연대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태권도 공원을 유치하기 위해서 과열경쟁을 벌이다 보니 진천이 김유신의 탄생지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이 농다리가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을 때 가설한 다리라고 주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던 것입니다. 하류에는 굵직한 돌을 바닥에 깔았는데 상류로부터 몰려오는 물살의 저항을 1차적으로 줄이는 역할을 해줍니다. 그 길은 또한 소와 같은 가축들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로도 활용됩니다. 항공사진을 통해 본 전체적인 생김새는 수심이 깊은 곳은 하류 쪽으로 돌출해 있고 수심이 얕은 곳은 상류 쪽으로 주춤한 곡선형입니다. 마치 교각과 판석이 어울려 배다리[舟橋]의 모습을 보는 듯하고 혹은 지네가 몸을 비틀고 있는 듯합니다. 특히, 붉은 빛이 나는 사력암질의 돌들은 다른 다리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멋을 풍기는데 결코 단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은 돌의 재질로 보아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것이 신기할 뿐입니다. 제대로 정련되지 않은 투박한 막돌이 모여도 이렇게 미려한 돌다리가 만들어지는구나, 농다리에 가면 새삼 길들여지지 않은 것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수한 형태의 돌다리 화성의 아름다움 중에서도 특히, 화홍문 및 방화수류정과 용연이 함께 어울린 풍광은 ‘용지대월(龍池待月)’이라 하여 화성의 백미라 일컫지요. 이중 화홍문은 본래 수문다리의 역할에다 건축물의 용도를 더한 대표적인 누교건축물(樓橋建築物)입니다. 화홍문의 홍예는 모두 7칸인 데 일곱 색깔 무지개를 형상화한 듯합니다. 수문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에서 피어나는 무지갯빛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팔경의 하나로 치고 있습니다. 3보사찰의 한 곳인 순천 송광사에서는 누교건축을 두 군데서 볼 수 있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초입에 계곡을 가로질러 ‘청량각(淸凉閣)’이 있습니다. 이 다리를 지날 때면 아래로 조계산의 맑은 물과 정기가 흘러 청량감이 몰려옵니다. 또 한 곳은 대웅보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건너야 하는 ‘삼청교’라는 무지개다리와 그 위에 세운 ‘우화각’입니다. 우화각은 18세기 초의 건물인데, 입구 쪽은 팔작지붕이고 나가는 쪽은 맞배지붕을 하는 특이한 양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는 국보로 지정된 계단형 다리입니다. 2단의 석단(石壇)과 함께 축조되었으며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安養門)을 통하여 극락정토에 들어갑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지나면 자하문(紫霞門)을 통하여 불국토에 들어갑니다. 계단 형태의 돌다리를 건넘으로써 극락과 불국토라는 피안(彼岸)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깨끗한 청계천을 기원하며 청계천 복원을 둘러싸고 말이 많습니다. '맑은 물'이라는 청계(淸溪)를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맑지 못해 한몫 챙기려는 자들이 있어 말썽입니다. 깨끗한 정치는 깨끗한 교육이 있을 때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음 호는 옛 다리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행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서울지역의 옛 다리를 만나고자 합니다.
*두발 자유*
국제 환율을 출렁이게 한 한은총재의 입 최근 박승 한국은행 총재가 외환보유액과 외환시장 개입에 관련해 발언한 것이 외환시장에 큰 영향을 미쳐 화제가 됐다. 경위는 이렇다.박 총재는 최근 영국의 유수 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주요 외신들이 우리나라의 시장정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잘못된 보도를 일삼는다고 판단, 중앙은행 총재로서 <FT>와의 인터뷰를 자청했다. 5월 18일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인터뷰에서 박 총재에게 달러 약세로 인한 세계 경제의 혼돈과 한국의 대응에 대해 질문했다. 박 총재는 "한국은 국가 신용도를 지키는 데 충분한 외환보유액을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FT는 박 총재의 말을 한국은행이 더 이상 달러를 사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한국이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점을 시사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를 한은의 환율 방어 정책 포기로 해석한 세계의 외환 딜러와 환투기 세력은 이내 시장을 휘저어 원화 환율을 급락시켰다. 뉴욕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당 995원까지 떨어졌고, 5월 19일 서울 외환시장에서도 달러 당 1000원선이 무너졌다. 한국은행은 원-달러 환율 급락을 막기 위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고, 1조 원을 들여 10억 달러어치의 달러를 사들여야 했다. 국내 언론에서는 박 총재의 말 한마디 때문에 한국은행이 단 하루에 1조 원 가까운 돈을 쏟아 부어야 했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우리나라 ‘통화신용정책의 수장이자 세계 4위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관리하는 한은 총재’로서 신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 총재는 이보다 석 달 전인 올해 2월에도 국회에서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환의 수익성 증대를 위해 외환 보유용 통화를 다변화하겠다는 뜻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었다. 그때도 원-달러 환율이 급락해 세계 외환시장이 출렁거렸고, 언론이 일제히 박 총재의 ‘가벼운 처신’을 비판했다. 최근 한은 총재의 발언이 거듭 외환시장에 파문을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본적으로는 현재 한국은행이 정책적으로 달러 보유를 늘리느냐 줄이느냐 여부에 따라 국제 환율이 요동치기 쉬울 정도로 외환, 특히 달러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외환보유액이 많다는 얘기다.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은행의 외환보유 얼마나 필요한가? 한국은행은 평소 달러를 포함해 일정액의 외화를 보유해둔다. 국내 은행에 맡겨두거나 대출해주는 식으로 국내 금융기관에 맡겨두거나 미국, 독일 등 선진국 금융기관의 단기예금에 넣어둔다. 금을 사두기도 하고, 비교적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미국 정부 채권을 사두기도 한다. 평소 외환을 보유하고 있다가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 보유 달러를 내다 팔고 원화를 사들여 원화 가치의 급격한 추락을 막는다. 반대로 환율이 급락하면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들여 원화 가치가 단기에 지나치게 오르지 않게 해서 외환시장을 안정시킨다. 한국은행이 보유하는 외환은 우리나라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성뿐 아니라 나라 경제의 대외신용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다. 국내 기업·금융기관이 혹 외화 부족으로 외국 기업·금융기관에 진 빚을 갚지 못하는 사태가 생기면 한국은행이 대신 나서 갚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국은행이 국가 신용의 보루 역할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외환을 갖고 있어야 할까? 딱 떨어지는 공식은 없다. 국제금융기구인 IMF(국제통화기금 : International Monetary Fund)는 각국이 최소한 최근 3개월분의 수입대금을 치를 수 있을 정도는 보유하라고 권한다. 지난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당하기 직전 8월, 우리나라의 월평균 수입액은 120억 달러였다. IMF 권고를 따른다면 당시엔 외환을 360억 달러쯤은 갖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은행이 실질적으로 동원 가능한 외환 규모는 100억 달러도 되지 못했다. 그러다 연내로 갚아야 할 단기부채 상환 부담에 몰렸다. 중앙은행마저 외환이 부족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를 갚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는다. 해당국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일제히 외국 채권자의 빚 독촉을 받게 된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투자를 중단 내지 기피하고 기존 투자는 빼내간다. 외환위기 직전 한국은행에 외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해외 투기세력은 적극 환투기에 나서 달러를 사재기했다. 이 바람에 원화 가치는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폭락했다. 통화의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면 외환시장과 금융시장, 물가, 기업의 수출입 등을 포함해 경제 전반에 충격과 혼란을 준다. 그래서 정부와 한국은행은 늘 원화 환율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정부에서는 재정경제부(재경부)가 외환정책 담당부처다. 재경부는 국민경제의 성장에 직접 책임을 지는 주무부처이기도 하므로 외환 문제 중 특히 지금처럼 환율이 떨어지는 경우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 나라 경제가 성장하려면 수출이 잘 되어야 하는데 원화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이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달러 환율이 급락할 때면 국고채 같은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사들임으로써 환율 하락을 막는다. 정부와 한은은 왜 외환시장에 개입하나 정부 외환정책 당국과 중앙은행이 통화의 시세를 조정하려는 의도로 외환시장에서 통화나 외화를 매매하는 행동을 두고 ‘외환시장에 개입한다’고 말한다. 외환시장 개입은 어느 나라나 다 한다. 다만 아무 때나 그러는 것은 아니고 주로 환투기가 발생할 때 그렇게 한다. 환투기란 외환시세가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속성을 이용해 시장에서 외환을 투기적으로 매매하는 것이다. 국제 외환시장에서는 늘 환투기가 성행한다. 투기세력은 어떤 통화가 장차 오르거나 내릴 요인이 보인다 싶으면 그런 방향으로의 변화를 증폭시키고 그 흐름을 주도하면서 시세차익을 거둔다. 전형적인 방법은 미리 해당 통화를 사재기 하거나 팔아치워 시세의 오름세 혹은 내림세를 가속시키는 것이다. 자연히 환투기가 끼어들면 통화 가치가 너무 급하게 오르내리게 마련이다. 그 결과 해당 외환의 시세에 경제적 이해가 큰 나라는 금융시장과 수출, 국민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따라서 환투기가 생기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외환시장 흐름에 잘 대처해야 한다. 즉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외환시장 개입은 환투기를 막아 외환시세를 안정시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시장개입, 안 하느니만 못한 때는 언제?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외환시장에서 가수요나 환투기를 막으려 하는 것이지만, 시장개입이 늘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시장개입 자체를 잘 해내는 것도 쉽지 않다. 개입 시기를 잘 못 고르거나 방법을 잘못 택하면 설사 개입하더라도 시장의 방향을 바꾸기 힘들다. 어설프게 개입했다간 투기꾼들의 기세를 한층 키워 차라리 개입하지 않느니만 못한 결과를 빚을 수도 있다. 가령 원-달러 환율이 급등세인데 달러에 가수요가 붙고 환투기 조짐이 생겼다고 하자. 이럴 때 정부나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한다면, 보유 달러를 시장에 대거 내다 파는 행동을 보이게 된다. 이 같은 외환당국의 개입이 유효하리라는 관측이 외환시장에 받아들여지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는 고개를 숙이고 환율 급등세도 멎을 것이다. 원화 가치는 다시 높아지고 시세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한국 외환당국의 달러 보유액이 투기세력의 달러 사재기를 막아낼 만큼 충분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사실이 시장에 알려진다면 투기세력은 달러 사재기를 계속할 것이고, 다른 거래자들마저 투기에 가담해 원-달러 환율은 한층 급등할 것이다. 한국의 외환당국이 달러를 팔아치우는 정도로는 시장에서 환율 급등세가 멎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 경우 노련한 투기꾼들은 우리 외환당국이 시장에 개입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거세게 달러 사재기에 나설 수도 있다. 그래야 달러 가치가 계속 올라, 투기적 달러 사재기의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은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셈이다. 이처럼 정부나 중앙은행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투기세력과 맞섰다가 패배하면 심각한 경제적 악영향이 올 수 있다. 우선 해당국 통화 가치가 국제 외환시장에서 시세의 안정성을 잃고 삽시간에 큰 폭으로 급등락할 수 있다. 외환시장은 금융시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금융시장 안정성도 교란되고, 국민경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기 쉽다. 바로 지난번 우리가 겪은 외환위기 때가 극적인 예였다. 당시엔 원-달러 환율이 급락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급거 시장개입에 나섰다. 그러나 시장엔 이미 한국 외환당국에 원화가치 하락을 막을 ‘총알(보유 외환)’이 바닥났다는 사실이 알려진 마당이라서 사태가 오히려 더 나빠졌다. 결국 외환위기가 현실화했고, 우리 정부는 IMF로부터 긴급 자금을 빌려 위기를 넘겨야 했다.당시 외환위기로부터 우리가 얻은 교훈은, 외환시장 개입은 개입 여부와 개입 시기, 개입의 규모와 방법 등을 항상 주의해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은행은 매월 외환보유액 통계를 발표해가며 외환보유액을 높이고, 관리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외환위기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지금 와서는 외환 보유액이 2천억 달러를 넘어 우리가 일본, 중국 등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보유국이 됐다. 이젠 쓸데없이 너무 많은 외환을 보유하고 있어서 나라 재산 관리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정희창 |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맞춤법이나 표준어는 딱딱하고 지루하다고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을 담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어떤 말이 옳고 그른지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의외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가 그러한 경우이다. '그리고 나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흔히 쓰이는 말이다. (1) 한두 걸음씩 걸어도 보았다. 그리고 나서는 또 울었다. (2) 채화꽃이 만발할 때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는 못 가보고 말았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북간도로 떠났으니까요 위의 예에 나와 있는 '그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로 바꾸어도 의미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가 같은 셈인데 이처럼 의미가 같고 형태가 유사한 말이 있을 경우 두 말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동의 관계인지, 의미나 용법에서 섬세한 차이가 있는지가 탐구의 대상이다. 먼저 '그리고 나서'의 띄어쓰기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그리고나서'를 한 단어로 다룰 수도 있고, '그리고∨나서'와 같이 두 단어로 다룰 수도 있다. 한 단어라면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와 같은 접속 부사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한 단어가 아니라면 '그리고∨나서'로 분석되는데 이때는 선행 요소와 후행 요소의 문법 범주가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그리고나서'가 한 단어가 아니고 '그리고∨나서'의 구성이라는 근거로는 아래와 같은 쓰임을 들 수 있다. (3) 전라좌도의 해변을 돌면서 어디든 마음 내키는 대로 정박한다. 그리고 나면 영접 나온 그 지방 벼슬아치들을 따라 관아에 향응을 받는다. 위의 예에 나타나는 '그리고 나면'을 보면, '그리고나서'와 같이 한 단어로 형태가 굳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고나-' 전체가 하나의 용언이거나 '그리고'와 '나-'가 결합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그리고 {나서, 나니, 나면, 나자 ……} '그리고나-'가 하나의 용언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무엇보다 그러한 단어가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으며 의미상으로도 좀 더 분석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를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나서'의 '나-'가 용언의 어간이라면 '그리고'는 무엇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와 같이 학교 문법의 접속 부사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에 '고'가 결합한 구성으로 보는 것이다. 먼저 접속 부사로 볼 경우 접속 부사 다음에 용언의 활용형이 연결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5) {그리고, *그런데, *그러나, *그러므로 ……} 나서 '그리고 나서'를 제외한 '*그런데 나서, *그러나 나서, *그러므로 나서' 등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 국어에서 접속 부사는 문장이나 단어를 연결해 주는 것이므로 용언의 활용형이 바로 연결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리고 나서'의 '그리고'는 접속 부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보면 '그리고 나서'는 '그리고'와 '나서'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와 '-고 나서'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먹고 나서, 자고 나서, 뛰고 나서, 웃고 나서 …… 위의 예들은 모두 '-고 나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고 나서' 앞에는 동사가 나타난다. 형용사나 서술격 조사가 오면 비문이 된다. (7) *예쁘고 나서, *슬프고 나서, *사람이고 나서 ……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뜻풀이되어 있다. (8) 나다 [보조] (동사 뒤에서 '-고 나다' 구성으로 쓰여) 앞말이 뜻하는 행동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말. 즉 '그리고 나서'는 '[동사]+-고 나다'와 같은 보조 용언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는 동사일 수밖에 없다. 동사 '그리-'는 다음과 같이 쓰인다. (9) 그림을 그린다. / 지난 날을 그린다. 문제는 동사 '그리-'가 '그리고 나서'와는 뜻이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지난 날을 그리는 것과 '그리고 나서'는 의미가 다르다. 이러한 문제는 동사 '그리-'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짝을 이루는 '이, 그, 저'가 '*이리고 나서, *저리고 나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 것도 동사 '그리-'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결론적으로 동사 '그리-'를 쓴 '그리고 나서'는 동사 '그러-'를 잘못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를 써야 하는데 '그리고'에 이끌리거나 '그러다'의 의미를 가진 방언형 '그리다'에 이끌려 '그리고 나서'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고 나서'와 '그러고 나서'는 의미와 쓰임이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러고 나서, 저러고 나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그, 저'의 짝을 만족시킨다. 또한 의미적인 면에서도 완전히 일치한다. 동사 '그러-'와 관련하여 '*그리고는' 또한 '그러고는'을 잘못 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접속 부사 '그리고' 다음에는 보조사가 붙지 않으므로 '*그리고는'과 같은 구성은 잘못이다. 이 또한 '그러고는'을 '그리고'에 이끌려 잘못 쓴 것이다. (10) 그때는 들은 척도 않했잖아? 그러고는(*그리고는) 이제 와서 몰랐다고?
박경민 | 역사칼럼니스트 cafe.daum.net/parque 폴리스의 형성과 발전 에게 문명은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크레타 섬이 중심이 된 BC 3000년에서 BC 1400년까지의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문명이고, 후기는 BC 1400년부터 BC 1200년까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와 티린스 혹은 소아시아 트로이 중심의 미케네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을 크게 이오니아인·아카이아인·도리아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후기 에게 문명은 미케네 문명으로 그 맥을 가까스로 이었으나 이미 BC 12세기 초에 이동한 이오니아인·아카이아 인과 달리 가장 늦게 남하한 도리아인들이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하면서 지중해로 진출하더니 먼저 남하한 그리스인들의 문명을 차례차례 파괴하면서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하였다. 즉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발칸반도 일대에 흩어진 그리스인들은 BC 8세기부터 지리적 조건, 특히 교통의 요지를 골라 집단거주(시노이키스모스)를 시작하였으며 이렇게 해서 생겨난 도시를 '폴리스'라 하였다. 폴리스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서 아크로폴리스(언덕)와 아고라(광장)가 설치되었으며 주위에는 성벽과 농지가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비교적 많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발칸반도를 중심으로 형성하면서 고도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서양 최초의 문화를 창조하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대 동방(오리엔트)의 문화적 유산을 계승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문화를 가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창의성이 강한 그리스인들은 인간과 사회의 원리를 철학적으로 사고하여 예술과 철학·역사·정치 등 각 분야에 활용함으로써 역동적인 문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는 그리스인들의 정치·경제·사회 생활의 기본적인 요소이며 배타적 단위였다. 폴리스에는 어김없이 한 복판의 산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어 유사시에는 일종의 피난처(대피소) 구실을 하였으며 성안에는 그리스인들이, 성 밖에는 외지인들이 거주하였는데 그리스 본토에만 100여 개가 넘었고 식민지의 그것까지 합치면 1000개는 족히 넘었을 것이다. 폴리스는 상호간 정치적 지배관계가 전혀 없는 자주 독립적 사회로 전체적인 정치적 통일성이 없었으나 같은 언어와 종교(올림포스 신앙), 그리고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념적 유대감으로 올림픽 경기 등을 통해서 그들의 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그리스인들의 모험심 처음에는 귀족정치가 행하여졌지만 나중에 일반시민(자작농민)의 사회적·경제적 대두에 의한 발언권이 세어지면서 민주정치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크레타가 에게 해를 중심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이래, 아테네가 전면에 등장한 BC 8∼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인들은 식민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개발에 열을 올린 이유는 소수 귀족들의 토지독점으로 영세농민이 증가하였다는 점인데, 이 말은 귀족들이 마음을 고쳐 토지의 독점을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새로운 경작지를 찾아보는 편이 빠르다는 판단에서이다. 더욱이 폴리스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인구의 집중과 증가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적절한 인구의 이동이 불가피했으며 도시의 번창과 시장확대는 각 폴리스에서 생산된 상품을 내다 팔 대상 지역으로서 식민지가 필요했고, 정치적 불만세력이 식민지를 통해서 탈출구를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노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만 그리스인 특유의 모험심, 다시 말해서 배를 타고 나가면 바다 저편에 뭔가 있다는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원정대 이야기'가 비록 허구적인 전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최초의 해외원정이었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많은 식민지를 건설한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황금의 양가죽'을 바다로 진출하여 획득한 일종의 전리품이라 전제한다면 당시 의외의 성과가 황금의 양가죽이라고 바꾸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식민지는 지중해와 흑해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는데, BC 600년대에는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 그리스 식민지가 넓게 퍼짐으로써 그리스의 경쟁상대로는 오직 페니키아 인이 세운 식민시(植民市) 카르타고 밖에 없었다. 그리스의 정치적 변화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는 그리스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민주정치가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란 가능하다면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흔들고 싶어하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으면 독재정치를 펼 수 없다. 소위 민주정치의 원조라고 하는 그리스에도 귀족·평민·노예의 구별이 있었으며 기원전 8세기경부터 왕정이 행하여졌다. 그리스 역사에서는 이 시기(BC 1000∼800년)를 '왕정시대'라 하는데 소위 '호메로스 시대'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당시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그리스에서는 오리엔트, 또는 중국의 황하지역과 같은 치수사업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왕정시대라 하더라도 전제적 군주제는 아니었다. 치수사업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과 이를 추진하기 위한 강력한 군주의 통치력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농업과 목축이 주된 산업이었으며 BC 900년경에는 동방과의 교역을 통해 페니키아의 문자(알파벳)가 전해졌다. 기원전 7세기까지는 귀족들이 군사와 국방의 중심을 떠맡는 집정관(아르콘)으로서 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를 과두정시대(寡頭政時代 : BC 800∼550년)라고 한다. 그 이유는 전쟁에 있어서 기병의 역할이 종전보다 강화되었다는 점과 귀족 가운데 일부는 전쟁에서의 전리품과 식민으로 재물을 끌어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며 식민시의 건설과 교역, 산업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귀족의 발언권이 강화된 것이다. 다음은 최고의 정치권력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은 독재자가 국정을 좌우하는 참주정치시대(僭主政治時代 : BC 660∼500년)가 이어졌는데, 그 배경으로 부유한 중산층의 대두와 그로 인한 계급투쟁, 기병을 대신한 중무장 보병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참주에는 물론 폭군적인 사람도 있었지만 18세기의 계몽군주와 같았으며 대부분 귀족출신이었고 인심을 얻어 자유시민(평민)과 결탁하여 귀족세력을 억압했기에 참주=독재자=폭군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최초의 참주는 BC 6세기 후반 아테네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 : BC ?∼527)였다. 그는 아테네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던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명성을 얻어 민중의 지지 속에 BC 560년에 참주가 되었다. 민중을 배경으로 소수 귀족을 억누르니 정권을 빼앗긴 귀족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합법적이며 독재였던 것이다. BC 7세기 오리엔트의 첫 통일을 이루었던 아시리아가 붕괴하고 네 나라로 나뉘어졌는데, 그 가운데에서 리디아에서 화폐가 발명되자 상업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도 화폐를 주조하여 부를 이룬 평민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때 많은 도시국가들이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를 민주정시대(民主政時代 : BC 500년 이후)라 한다. 재산을 모은 평민들이 자신의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중무장 보병부대를 편성하자 그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되었고 사회 기득권 층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던 아테네가 가장 전형적이었지만 이러한 그리스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주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아티카 지방과 트로이젠을 비롯한 폴리스 집단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파르타와 스파르타 계열의 폴리스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과정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군사 독재주의로 일관하였다. 민주정치 속의 불평등 BC 508년, 민주정치의 봄이 찾아 왔다. 아테네의 민회(民會)가 입법·사법·행정상 최고기관이 됨으로써 민주정치의 서막이 올라 페리클레스(Pericles : BC 461∼429년)시대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민회는 대의제(代議制)가 아니라, 성년 남자 자유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스파르타에 비하면 개방적이며 민주적이었지만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노예의 피땀 위에 이루어졌고 여성의 정치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가부장적 부계사회로 넘어온 데다가 정치적 중심이 왕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도시국가(폴리스)체제가 되자,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주신(主神) 제우스를 폴리스의 수호신이며 각 가정에서는 가장(家長)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제도의 수호신으로 설정하여 이를 파괴하려는 자는 어느 누구도 형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사회에서 당시의 자유 남자시민은 노동과 집안 일에 구애받음 없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었으며 오직 사회에 책임을 지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아테네조차 남·녀의 성차별은 심각하여 아버지들이 아이의 양육여부를 결정하였다. 만약 '이 아이는 키우지 않겠다'고 하면 아이를 폐기처분하였다. 다행히(?) 선택된 자녀들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맡았는데 남자아이는 7세까지,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였다. 일곱 살이 된 사내아이는 어머니의 손에서 떠나 교사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는데, 남자아이의 교육 중점은 '건강한 신체, 건전한 정신'이었지만 여자아이는 결혼할 때까지 '요조숙녀(窈窕淑女) 되기'에 모아졌다. 이러한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다른 폴리스에도 확산되어 페르시아 전쟁 때에는 자기 돈으로 무기를 살 수 없었던 무산계급 시민들은 몸으로 때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자발적인 힘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들은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역할을 하였고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돈 없다고 우리를 무시하면 다시는 힘든 중노동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발언권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민주사회는 의무가 있는 곳에 권리도 따른다는 점인데, 전제적인 독재국가에서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음으로써 자발적인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없다. 우선 바로 눈앞에 있는 채찍만을 두려워할 뿐이다. 아무튼 남자로서 군대가고 전쟁에 참전해야 비로소 진정한 민주시민이라는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거꾸로 가는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맨 마지막으로 남하한 도리아 인들로 구성된 도시국가였으며 그들이 폴리스를 건설하기 전인 BC 1200년경에 미케네 문명(후기 에게 문명)을 멸망시키기도 하였다. 즉 도리아 일파의 정복에 의해서 탄생한 폴리스가 스파르타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의 일반적 정치적 발전과정과는 전혀 별개의 소수 독재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물론 스파르타의 시민들도 불만을 가졌겠지만 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고 충성의 대상인 권력에 주눅이 들어 으레 그러려니 했다.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또는 라케다이모니아 지방의 주요도시로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북동쪽과 서쪽은 산악지대가 개방을 가로막아 지역적 폐쇄성이 결국 보수 과두제적 왕정에 머물러 있게 한 요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전제적 군사 독재로 일관하게 되었으며 참정권을 가진 시민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스파르타의 사회적 특성은 자유로운 창의성과 개성의 발휘를 억압함으로써 시민의 각성과 정치참여를 위한 대중적 투쟁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산계층이 나오지 않았으며 이러한 군국주의적 성향은 곧 문화침체로 이어졌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기억은 어떻게 저장될까 망둥이를 보면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한다. 기억은 단편적인 경험을 체계적인 지식으로 저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망둥이는 기억력이 약하기 때문에 바로 몇 초 전에 했던 실수를 되풀이한다. 반면 기억력이 뛰어난 인간은 실패의 경험을 되살려 더 잘하게 된다. 창의성도 뛰어난 기억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상태에서 정보가 서로 연관되면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과학자가 젊어서 이룩한 업적으로 노벨상을 타는 이유는 기억력이 가장 좋을 때 창의성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머리 회전 속도가 느려도 많은 것을 알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을 더 믿는다. 이런 사람은 많은 것을 알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필요한 정보를 꺼내서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느린지도 모른다. 기억은 어떻게 저장될까? 우선 기억은 순간기억, 단기기억, 장기기억 세 가지가 있다. 예를 들어 전화번호부에서 집 근처 자장면집의 전화번호를 찾아보았다 치자. 책을 펼쳐 본 순간 숫자의 상이 뇌에 1초도 못 되게 잔상처럼 남는다. 이것이 순간기억이다. 우리가 만화영화를 볼 때 실제로는 끊어진 여러 장의 만화를 보는데도 마치 이어진 화면처럼 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속에 전화번호를 외우고 번호를 누른다. 번호를 누른 뒤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 우리는 번호를 기억한다. 이것이 단기기억이다. 다음 날 깨어나면 전화번호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만일 일주일에 한번씩 자장면집에 전화를 걸어 요리를 시켜 먹는다면 이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번호를 잊지 않게 된다. 이것이 장기기억이다. 기억 제조공장 - 해마 우리가 눈과 귀 등 오감을 통해 자극 받은 단기기억은 뇌의 원시적 부위인 변연계에 속하는 해마와 그 바로 옆의 편도체에 일시적으로 보관된다. 이 해마란 이름은 모양이 바다의 해마(海馬)와 닮았다고 해서 붙은 말이다. 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해마는 크기가 새끼손가락만하지만 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해마와 편도체가 손상되면 손상되기 전에 한 일은 잘 기억하면서도 최근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따라서 학습도 할 수 없고 지식도 늘지 않는다. 편도체는 행복, 공포, 불쾌감 같은 감정을 맡아 동기를 부여하는 부분이다. 편도체를 없애면 사람은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 감정과 동기를 만드는 편도체가 왜 기억에 관여할까? 감정이 기억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불쾌한 경험이나 자극, 공포의 기억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경험, 한밤중에 산 속에서 맹수의 푸른 눈과 맞부딪친 순간, 첫 키스의 쾌감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 이런 일을 기억함으로 해서 다음에 비슷한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고 다음에 또 연인과 만나 그 쾌감을 반복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은 기억 강화제이다. 따라서 기억은 차가운 머리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또한 재미없는 공부를 기계적으로 할 때보다 흥미에 이끌려 하는 공부가 훨씬 오래 기억으로 저장된다. 해마는 단기 정보가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한다. 해마는 뇌의 기억 제조공장이다. 해마에 단기기억이 일시적으로 저장되는 시간은 불과 5분 정도이다. 5분 안에 단기기억으로 갈지 장기기억으로 갈지가 정해진다. 해마는 뇌에서 신경세포가 가장 활발하게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만큼 가소성도 뛰어나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자란 쥐를 자극이 풍부한 곳으로 옮기면 쥐의 해마에서는 신경세포가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런던 시내 택시 운전사들은 운전 경력이 오래된 사람일수록 해마의 뒷부분이 크다. 여러 군데를 다니고 다양한 사람과 만나게 되는 택시 운전사는 많은 자극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해마의 특정 부위가 커지게 되는 것이다. 단기기억 중 단편적 지식은 곧바로 기억에서 지워진다. 뇌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억 삭제 기능이다. 만일 중요하지 않은 단편적 지식을 모두 기억한다면 우리의 뇌는 기억 용량 초과로 결국 멈춰 버리고 말 것이다. 대신 중요한 지식과 경험은 축적됐다가 고등한 인간의 뇌에 해당하는 전두엽에 장기적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단기기억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지워질까? 독일의 심리학자인 헤르만 에빙하우스는 100여 년 전 실험을 통해 '에빙하우스 망각 곡선'이란 것을 만들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곡선에 따르면 암기한 단어는 네 시간 뒤에는 10개 중 5개 정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24시간 후에는 3∼4개, 또 48시간 뒤에는 2∼3개의 단어를 기억한다. 암기한 단어의 대부분은 잊혀지지만 머리 속에 살아 남은 몇 개의 단어는 비교적 오랫동안 기억된다. 에빙하우스는 망각 속도가 시간이 흐를수록 완만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공부를 할 때 되풀이해서 복습을 하면 망각 속도가 더욱 완만해져 더욱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기기억은 언제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는 것일까? 뇌는 잠자는 시간 동안 학습했던 내용을 정리한다는 이론이 가장 유력하다. 잠을 자면서 뇌에 입력된 정보를 정리하고 필요 없는 기억을 삭제하고 기억을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경험을 우리의 장기기억 시스템 속에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잠을 잘 때 뇌에 새로운 신경 회로망을 만들어 기억을 저장하는 것이다. 기억은 뗄 수 없는 관계 잠과 기억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하버드 대학 로버트 스틱골드 박사는 24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밤샘 공부를 한 사람과 공부를 한 뒤 잠을 잔 사람이 그 다음날 얼마나 더 많은 것을 기억하는지 실험했다. 예상대로 충분히 잠을 잔 학생들이 더 많은 것을 기억했다. 이처럼 잠은 장기기억의 형성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밤샘 공부는 시험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잠이 드는 순간 마치 불이 꺼지듯 의식이 멈추기 때문에 밤새 뇌가 쉬고 있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깨어서 활동한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파가 발생하고 렘(REM=Rapid Eye Movement)수면과 비 렘수면이 5∼7차례 반복된다. 특히 잠든 지 한 시간 반쯤 뒤 잠이 깊어졌을 때 시작되는 렘수면 때에는 깨어 있을 때처럼 톱니 모양의 뇌파가 나타난다. 또 눈알을 빠르게 굴린다. 심장도 빨라지고 숨도 가쁘게 쉬고 혈압이 오르고 남자의 경우에는 발기가 된다. 잠을 잘 때 눈이 빙글빙글 도는 렘수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진다. 렘수면 때에 뇌교는 척추신경을 차단하고 대뇌와 시상하부 쪽으로 신호를 보낸다. 렘수면은 성인보다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서 훨씬 많이 나타난다. 갓 태어난 아기는 전체 수면 시간의 50%가 렘수면이지만 성인이 되면 렘수면이 20%가 되고 노인이 되면 더욱 줄어든다. 렘수면 상태에서는 꿈을 더 많이 꾸기 때문에 흔히 '꿈 수면'이라고도 부른다. 새로운 지식을 더 많이 경험하고 습득하는 어린이가 꿈을 많이 꾸는 렘수면 시간이 길다는 것은 꿈과 기억이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꿈의 기능에 대해 현재 가장 인기를 얻고 있는 이론도 '기억과 학습 이론'이다. 이 이론은 꿈이 새로운 정보를 메모리 시스템 속에 짜 맞추면서 정서적 자극을 줄이는 동시에 다른 스트레스나 마음의 상처에 적응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즉 꿈을 꾸면서 느끼는 복잡 미묘한 감정은 그날 습득한 경험을 뇌가 정서적으로 소화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꿈은 단순히 렘수면 동안 발생하는 정신 활동의 부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수의 의견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색다른 경험을 한 날 꿈을 많이 꾼다. 특히 스트레스를 크게 받거나 또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때 그날 밤 강렬한 꿈을 꿀 가능성이 높다.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을 때 불이 나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며 쫓긴다는 것이다. 이런 꿈은 며칠씩이고 반복되지만 결국 상처가 치유되면 희미해져 없어지게 된다. 따라 기억능력도 달라져 기억은 있는 그대로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따라 기억은 조작되기도 하고 쉽게 퇴화하기도 하며 전혀 없었던 일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언어의 간섭에 의한 시각 기억의 퇴화이다. 범행 현장에 있던 증인은 사건 직후 경찰에 불려가 범인의 얼굴을 설명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범인의 얼굴을 자꾸 말로 설명하다 보면 처음에는 또렷하게 기억하던 범인의 얼굴이 희미해지게 된다. 이런 사실을 밝힌 인물은 미국 피츠버그 대학 심리학자 조너선 스쿨러 교수이다. 그는 증인의 기억을 오래 보존하려면 증인을 가만히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쿨러 교수는 강도가 은행을 터는 비디오를 실험 대상자에게 보여주었다. 이어 절반에게는 강도의 얼굴을 말로 묘사하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쉬게 했다. 이어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준 결과 쉰 사람들의 3분의 2는 강도의 얼굴을 구분한 반면 얼굴을 묘사해야 했던 사람들은 3분의 1만이 강도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포착한 얼굴을 말로 설명하는 의식적 활동을 하다 보면 오히려 기억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사실 얼굴 생김새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쉽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다보니 기억이 희미해진 것이다. 영국 플리머스 대학 티모시 퍼펙트 교수는 귀로 들어 기억한 것도 언어로 묘사하게 하면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퍼펙트 교수는 녹음한 음성을 실험 대상자에게 들려주었다. 실험 대상자 절반은 조용히 있게 했고, 나머지 절반은 음성의 특징을 열심히 쓰게 했다. 그 결과 조용히 있던 사람이 녹음된 목소리를 훨씬 잘 기억했다. 따라서 심리학자들은 경찰이 증인을 인터뷰할 때 신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턱대고 불러다가 범인의 얼굴과 목소리를 설명하라고 하는 것보다 쉬거나 음악을 들려줘 증인의 기억을 보호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기억에는 오히려 '침묵이 금'인 것이다. 세뇌가 얼마든지 가능한 기억 기억은 광고나 강압에 의해 얼마든지 주입되거나 조작될 수도 있다. 세뇌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미국 어바인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심리학 교수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박사가 2001년 미국과학진흥협회 연례총회에서 발표한 '벅스 버니 사례'는 기억이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 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기억에 관한 저서를 모두 19권이나 쓴 전문가이다. 로프터스 교수는 대학생들에게 디즈니랜드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워너 브라더스의 만화영화 주인공 벅스 버니(토끼)를 선전하는 '디즈니랜드의 광고'를 보여준 뒤 어렸을 적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들에 관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이들 중 36%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는 대답을 했으며, 상당수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쓰다듬었다던가 포옹을 했다던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자세한 경험을 얘기했다는 것이다. 디즈니랜드에서는 수많은 만화영화의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지만 벅스 버니는 만날 수 없다. 벅스 버니는 워너 브라더스사의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벅스 버니를 끼워 넣은 '디즈니랜드의 광고'를 보여주자 사람들은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났다고 대답했다. 이는 기억이 얼마든지 영화 같은 수단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벅스 버니 사례는 사람들 가운데 약 3분의 1은 허위 기억의 인위적인 주입을 통해 전혀 겪은 일이 없는 경험을 스스로 했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로프터스 교수는 경찰 수사관이 암시나 거짓말을 통해 혐의자에게 하지도 않은 범행을 자백하게 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신문하는 사람은 피의자의 마음에 어떤 암시를 심어주는 일이 없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프터스 박사는 정신적 외상을 가져올 수 있는 사건에 관한 기억도 조작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러시아 출신의 동료 교수들과 일단의 러시아인들과의 대담을 통해 1999년 모스크바 폭탄 테러 사건과 9.11 테러에 관한 조작된 사실을 생생하게 주입시키자 나중에 이들 중 12%가 허위 사실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더라는 것이다. 로프터스 박사는 또 언론 매체가 지니는 강력한 암시의 힘도 시청자들에게 허위 영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서 얼마 전 워싱턴 연쇄 저격 사건이 발생했을 때 흰색 밴에 관한 보도가 나가자 사람마다 흰색 밴을 보았다는 신고가 들어온 사실을 지적했다. 기억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로프터스 박사는 지난 25년 동안 모두 2만여 명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로 볼 때 '기억이란 쉽게 조작할 수 있고, 깨지기 쉬우며, 되살린 기억 중 일부는 사실이 아니다'고 말한다. 미국 윌리엄스 대학 사울 카신 교수팀이 벌였던 실험도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보여준다. 연구팀은 컴퓨터를 일부러 고장 낸 뒤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웠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그가 고장내는 장면을 똑똑히 봤다고 우기자 상당수가 혐의를 인정했고, 몇몇은 자신이 어떻게 하다가 고장을 냈는지 설명까지 했다. 주위의 압력이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의도적으로도 망각할 수 있어 사람은 의도적으로도 특정한 기억을 망각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주변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학대를 당하고도 이를 잊는 사람이 많다. 아마도 이를 계속해서 악몽처럼 기억한다면 이 사람은 정신질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전쟁처럼 처참한 상황을 겪었거나 집단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경우라 하더라도 모두 정신질환자가 되지 않는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는 메커니즘이 우리의 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프로이드가 성욕이나 학대의 경험과 같은 기억은 의도적으로 망각돼 무의식의 세계에 자리 잡는다고 설명한 것과도 궤도를 같이 한다. 하지만 이 무의식은 이후의 삶에 지속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경우 꿈이나 최면으로 이 기억들을 되살려 치료를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