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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동교육청 운영 ‘여학생 친화적 과학교실’ 인기 서울 성동교육청(교육장 김영일)이 처음 마련한 ‘여학생 친화적 과학교실’이 학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참여한 여학생들은 “평소 학교에서 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실험을 직접하면서 좀 더 과학을 친근하게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경일중 한덕주 지도교사는 “앞으로는 과학에 관심이 많은 여학생들의 참여가 늘도록 과학 교실을 확대해야한다”고 밝혔다. 과학에 대한 여학생의 관심 높이려 첫 시도 지난 겨울 방학 서울 성동교육청 과학중심학교인 경일중(교장 주남수) 과학실에서는 흥미로운 과학교실이 열렸다. 실험에 푹 빠진 학생들은 모두 여학생. 바로 성동교육청(교육장 김영일)의 ‘여학생 친화적 과학교실’에 참여한 것이다. 이 과학교실은 성동교육청이 과학에 흥미와 관심이 있는 여중생들의 창의성과 과학적 탐구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 처음 시작한 것으로 교사의 추천을 받은 40여명의 학생들이 두 개의 반으로 나뉘어 총 20시간의 교육을 받았다. 여학생이 중심이 되는 과학교실인 탓에 실험내용도 은거울 만들기, 화장크림 만들기, 투명 비누 만들기, 내 아기는 누굴 닮았을까, 내가 하는 일기 예보 등 여러 분야의 과학에 대해 알 수 있으면서도 여학생들의 흥미를 끌만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기자가 찾은 날은 일명 ‘손에 손잡고 만들기’ 실험이 한창이었다. “책상위에 있는 납땜기는 뜨거우니까 특히 조심해야 해요” 남학생들에 비해 납땜기를 많이 다뤄보지 않은 여학생들에게 교사가 당부를 잊지 않는다. “오늘 만들어 볼 러브미터는 사람 몸에도 전류가 흐른다는 것을 안전하게 알 수 있는 장치에요. 이것을 완성하고 친구와 러브미터의 양쪽을 잡으면 이렇게 전구에 불이 들어오죠” "와! 신기하다!" 교사의 설명과 시범에 학생들의 탄성이 나온다. “이 러브미터를 만들면서 우리는 미세한 전류를 증폭시키는 트랜지스터, 빛을 내는 발광 다이오드인 LED, 충전과 방전을 반복하는 콘덴서, 그리고 전류에 대해 배울 수 있어요” “러브미터를 완성하면 사람마다 실험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죠. 각각의 사람 특성에 따라 불빛이 깜빡이는 정도가 다르거든요” 다양한 실험으로 학생들에게 호응 얻어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지는 등 실험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반응도 뜨겁다. “선생님, 제대로 연결한 거 같은데 왜 불이 안 들어올까요?” “플러스, 마이너스를 어떻게 구분해야하죠?”“납땜의 원리는 뭐에요?” 또 직접해보는 실험이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반응이다. 동마중 김혜원(14·2학년)양은 “이 과학교실에서는 교과서와는 달리 여러 가지 과학 상식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유익하다”면서 “여러 기구들을 만지면서 실제로 실험을 해보니까 더욱 재미있다”고 했다. 무학중 이시은(14·2학년)양도 “평소에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지만 학교 수업시간에는 형식적인 실험만 해서 재미가 없었다”면서 “방학 때면 학원에만 다니기 바빴는데 이렇게 별도로 자세하게 설명도 들으면서 과학 실험을 할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학생들을 지도한 경일중 한덕주 교사는 “남학생들은 실험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반면, 여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성향이 있는데 실험을 많이 안 해봤을 뿐이지 실력의 차이는 없다”면서 “계속되는 과학실험으로 준비할 것이 많지만 여학생들이 이번 과학교실로 과학에 흥미를 많이 갖게 되는 것 같아 보람 있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는 각 학교에서 선발된 소수의 학생들이 참가했지만 다음에는 과학에 흥미 있는 많은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더 넓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상미 기자
김연수 | 생태사진가 우아한 발레리나의 몸짓 "꾸룩 꾸룩 꾸욱" 겨울철새의 낙원 천수만 간월호에서 200여 마리 남짓한 큰고니(천연기념물 201호)들이 부르는 합창소리다. 호수를 뒤덮은 물안개 속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큰고니들의 우아한 자태는 차이코프스키의 를 떠올리게 된다. 언젠가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았던 러시아 볼쇼이 오페라단의 기억난다. 발레리나의 선녀 같은 율동에 흠뻑 빠져 치콥의 교향악을 매일같이 반복해 듣던 때가 있었다. 그 발레리나의 원조가 바로 큰고니 들이다. 활주로를 이용한 힘찬 비상 흔히 백조라고 부르는 고니는 11월 말쯤 되면 러시아 툰드라의 추위를 피해 우리나라 해안가의 호수를 찾았다가 이듬해 3월에 돌아가는 희귀한 겨울철새다. 겨울철이면 수많은 탐조객들이 하얀 천사 같은 이들의 평화로운 춤사위를 생생하게 담아내기 위해, 갈대밭 속에 위장텐트를 치고 녀석들이 가까이 접근하기를 기다린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동지섣달의 한기에 온몸을 웅크렸다가도, 얼어붙은 호수 가에서 움츠렸던 선녀들이 얼지 않은 호수 한가운데로 서서히 움직이면서 하나 둘 입을 모아 노래 부르면, 어느새 팽팽한 긴장감 속으로 추위 속에서 떨었던 지루함은 금세 사라져 버린다. 곧 이어 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질 테니까…. 하지만 예고편에 이어 본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오페라는 막을 내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밤새 쳐놓은 그물을 거두려는 강태공들 배의 모터소리에 큰고니들이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날아가거나, 호숫가를 무대포로 달리는 차량들로 큰고니들의 고요한 평화는 순식간에 깨져 버린다. 비록 놀라서 급히 날아갔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힘찬 비상은 장관이다. 크기가 140㎝나 되는 육중한 몸매의 큰고니는 가벼운 새처럼 단숨에 하늘로 날지는 못해, 육상에서 도움닫기 하듯이 수면 위 4~5m를 박차고 탄력을 받아야 비로소 하늘로 날 수 있다. 큰 비행기에는 긴 활주로를 필요하듯이 대형종일수록 날기 위한 예비동작이 힘차고 웅장하다. 낙동강하구가 주된 서식지 우리나라를 찾는 고니류는 혹고니, 큰고니, 고니 세 종류가 있다. 간혹 드물게 검은고니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필자는 이 검은고니를 외국의 동물원에서 보았다. 부리 위에 혹이 있는 혹고니가 몸집이 가장 커 152㎝ 가량 되고 고니는 120㎝ 정도다. 갈대와 부들 같은 수생식물의 뿌리와 수서곤충을 먹으며, 보통 네댓 마리의 가족단위로 생활한다. 풀잎과 줄기를 주재료로 큰 화사 모양의 원추형 둥지를 만들고, 크림색을 띤 흰색의 알을 3~7개 낳는다. 암컷이 알을 품고 35~42일이 지나면 부화한다. 가족단위 중에서 머리와 목이 잿빛을 띠는 녀석들은 태어난 지 1년이 채 안 되는 어린 새들이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의 호수나 강가에서 매우 적은 수가 월동하는데, 낙동강하구를 가장 많이 찾고 충남 천수만과 금강하구에도 100여 마리 정도가 찾아온다. 최근 몇 년 동안은 한강의 팔당댐하류, 미사리에서도 여러 마리가 월동하고 있다. 공존 위해선 이기심 버려야 14년 전 전북 고창의 한 저수지에서 4월 말이 되었는데도 고니가 고향인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호숫가를 맴돌며 구슬프게 울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필자는 조류보호협회 김성만 회장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망원렌즈로 보니까, 그 녀석은 날개 아래에 총상을 입고 있었다. 날개는 축 처져 날 수 있는 역할을 이미 잃었고, 오히려 움직이는 데 짐만 될 뿐이었다. 보다 못해 필자와 조류보호협회 회원들은 가까운 전주동물원의 수의사를 현장으로 불렀지만 수술기기가 없어 그 자리에서 치료를 할 수가 없었다. 전주동물원으로 고니를 옮겨와서 3시간의 수술 끝에 총 맞은 날개를 잘라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노력도 보람 없이 고니는 사흘 후에 숨을 거두었다. 선녀 같은 고니들을 총으로 잡는 사람들의 심보는 어떻게 생겼을까? 지금의 문화재보호법으로는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이하의 벌금을 물게 되어 있다. 고니를 총으로 쏜 밀렵꾼은 운 좋게 발각되지 않았지만, 결코 편안히 잠을 이루진 못할 것이다. 지금도 그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던 큰고니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람의 이기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인간과 야생동물의 공존은 영원한 숙제 같다. * 우아한 호수의 선녀 큰고니의 모습을 새교육 3월호에서 만나보세요.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기원전 221년 시황제의 통일 진제국은 이후 중국 역대왕조의 기틀이 되었으나 결국 15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전란에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은 이번에는 전쟁의 고통 대신 급진적인 국정운영과 사상통제, 각종 노동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군주 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외교력'이다. 만약 분쟁이 있을 때마다 무력만을 앞세운다면 비록 승리한다 해도 자국의 아까운 생명과 국가재산을 소모하여 자칫 망국의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돈 한 푼 안들이고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도랑 치고 가재잡고, 마당 쓸고 돈 줍는 셈이 아닌가? 소진(蘇秦)이 합종책(合從策)을 들고 나와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북방 오랑캐 나라인 진나라를 고립시키려고 하자(한족 제후국의 입장에서),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 특유의 탁월한 정보 수집과 분석력을 발휘하여 장의(張儀)를 발탁, 연횡책(連橫策)을 씀으로써 '진나라 말려 죽이기 작전'을 허사로 돌려놓는데 성공하였다. 즉 다른 여섯 나라 책사들의 술책이 진나라의 정보력을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진나라의 특징은 '존왕양이'의 이념을 전통으로 하는 제후국이 아니라, 서쪽 변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국력을 키운 흉노 계열의 '자주성가형 국가'였다. 다시 말해서 정통중화를 표방하는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말이다. 진나라 제31대왕으로 즉위한 정(政)은 부왕인 장양왕(莊襄王)의 뒤를 이어 1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일찍부터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섭정을 맡고 있던 재상 여불위(呂不韋)를 제거하고 말았다. 여불위는 원래 대상인(大商人)으로서 정의 부왕인 장양왕이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구해준 인연으로 재상이 된 인물이었고 자신의 첩을 장양왕의 소실로 들여보내 자신의 핏줄로 하여금 진나라의 왕통을 이어가게 하였다. 쉽게 말하면 정의 생부가 사실은 여불위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여불위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정(政)은 과감하게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16년간에 걸쳐 여섯 나라를 차례차례 멸망시키고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였다. 오랑캐가 이룬 중화의 기본 틀 진왕 정(政)은 춘추·전국이라는 복잡한 정치국면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함으로써 역설적인 말이지만 오랑캐(?)에 의한 한족(漢族)과 중화(中華)라는 이데올로기를 확립하였다. 다시 말해서 전국 칠웅이 패권을 다투던 지역이 통일제국이 됨으로써 '중국의 영역이 물리적으로 지정되어'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실체가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함으로써 중국 민족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춘추시대에는 남방 오랑캐인 초나라가 중국에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는 서쪽의 변방에서 발흥한 진나라가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서부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편입되었지만, 이후의 중국은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으로 재편되었으며 양 문화권 간의 기나긴 충돌과 마찰이 시작되었다. 진왕은 중국을 통일하자 고민이 생겼다. 자신에 대한 호칭문제였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기존 여섯 나라 왕들을 낮추어 공(公)이라고 하자니 반발할 것이 뻔하고 그냥 두자니 똑같은 왕이니 체통에 문제가 있어 왕 위에 군림하는 왕으로서 임금 황(皇), 임금 제(帝)(= 곱빼기 임금), 즉 황제라 칭하고 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시키고 화폐를 정비·통일하였는데, 이미 도량형과 문자, 화폐의 통일은 기나긴 분열시대와 전란시대를 거치는 동안 각국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자신의 명령이 중앙은 물론 지방의 최말단까지 미치게 하기 위해서 강력한 독재적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효율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담당할 행정기구를 설치하였다.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고 각기 군수·군위·군감이 관장토록 하였으며 중앙에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 국방장관격인 태위, 검찰총장격인 어사대부로 구성되는 3공(三公)과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九卿)을 두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시황제는 너무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매사를 챙기는 스타일의 통치형태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명이 제대로 집행이 되고 있는지 수시로 제국을 순회하면서 시시콜콜 점검하고 다녔다. 그 바람에 일선 관리나 백성들이 죽어났다. 일찍이 진나라는 상앙을 발탁하여 법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철저한 사상통제를 함으로써 국민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국을 통일하고 보니 모자이크 국가가 되고 말았을 뿐만 아니라, 얌전하게 복종하고 있던 진나라 백성들도 물이 들 우려가 있어 법가사상을 더욱 강화하였고 그 책임자로 재상 이사(李斯)를 임명하였다. 시황제는 무리수, 아니 악수를 두기 시작했다.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460여 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용서와 진기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려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고사성어를 만들어냈다. 그래도 시황제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왜냐하면 비록 중원 물을 마신지 오래되지만, 원래 출신이 흉노계열이라 북방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저들의 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한 대 역사에 들어갔다. 현재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시대에 완성된 것이며 길이 약 2400㎞, 높이 6~8m, 두께 4.5m이다. 그러나 정작 진나라 백성들은 흉노보다는 무자비한 노동착취가 더 무서웠다. 시황제의 열의는 대단했지만 너무 서둘렀다. 그렇지 않아도 망해버린 한족의 여섯 나라 백성들은 그를 자신들의 황제로 인정하지도 않고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민심을 달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는 격언만 알았지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은 아예 모르고 있었거나 잊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시황제는 안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신만을 위한 역사에도 백성들을 동원하여 고생을 시켰다. 호화로운 아방궁과 자신이 죽어서 묻힐 여산능 등,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각종 건설 사업을 벌였다. 비록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시황제가 남긴 여산능의 병마총과 만리장성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한몫 단단히 챙기고는 있지만 말이다. 백성들은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차라리 나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백성들의 천지개벽을 원하는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고, 실제로 연나라 출신의 형가(荊軻)가 시황제를 암살하려고 하였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제국을 순시 하다가 병으로 급사하고 권력의 공백기가 생기자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백성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또 그 권력이 막강하면 막강할수록 그 권력자의 빈자리 때문에 한동안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진의 멸망 불러온 농민반란 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趙高)가 승상 이사와 음모를 꾸며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 재위 BC 209~207)를 옹립하여 2대 황제로 추대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조고는 시황제의 철권통치를 한층 업그레이드하여 무자비한 잔혹정치를 폈다. 백성들은 싸우다가 죽던가, 아니면 무자비한 통치에 고생만 하다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농민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지식인들이 이에 합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최초의 반란은 시황제의 사후 기원전 209년에 일어났다. 주동자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 하여 일명 '진승·오광의 난'이라 하는데, 그들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들이 각지에서 합세하여 점차 세력이 커져 혁명군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황하 이남의 수십 개 성을 점령하고 세력을 떨쳤다. 진승은 처음에는 장군을 칭하다가 나중에는 '진나라 타도'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걸면서 옛 강국이었던 초(楚)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陳王). 진나라 장수 장감(章邯)은 기원전 208년, 대대적인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사직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것이니 만큼 조정으로서도 총력전을 폈다. 정규군을 농민군이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농민군은 거병한 지 6개월 만에 진압되었지만, 결국 진의 멸망 그리고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 되었다. 유방 승리의 비결은 민심잡기 기원전 208년 장감(章邯)이 농민군을 진압하고 개선하였으나 이번에는 통일 이전 6국 세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자칫하면 옛날의 전국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당시 환관 조고의 포악한 성격은 극에 달해 있었다. 승상 이사를 숙청하더니 이제는 황제 호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부덕한 황제를 폐하여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호해를 용상에서 내몰아 버리고 그 자리에 자영을 앉혔다. 한편, 초나라의 귀족출신이었던 항량(項梁)은 진승·오광의 군대가 거병하자, 경포의 군대와 합세하여 전선을 구축하고 초나라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장감(章邯)의 진압군에 패하고 항량이 전사하자, 그의 조카인 항우가 전권을 이어받아 유방(劉邦)과 연합하여 거록(鉅鹿)에서 장감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후 진 황제 자영은 국사를 농단한 환관 조고를 죽이고 국세회복을 꾀하였으나 민심이 떠난 사직을 더 이상 버텨낼 수 없어 결국 기원전 206년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의 사직은 3대 1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한편, 항우는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했으며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의제(義帝)를 시해하자, 유방이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유방은 원래 강소성(江蘇省) 풍읍의 하급 관리(농민출신)였으며 처음 거병할 당시에는 그 세가 약했으나 항우가 거두어 자신의 휘하에 두었던 것이다. 출신성분이나 무력, 무공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항우와 유방은 전우였지만, 적이 사라진 마당에 한쪽은 반드시 도태되어야 했다. 항우의 입장에서 본다면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고 게다가 진의 황제(자영)가 유방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홍문(鴻門)의 위기를 벗어난 유방은 장량(張良)을 책사, 전략에는 한신(韓信), 정치와 행정에는 소하(蕭何)를 배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니 항우는 결국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내몰리고 말았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 氣蓋世)의 힘과 무용을 떨치던 초패왕 항우는 민심을 잡는데 실패하였다. 항우의 군대가 입성하면 백성들은 달아나기에 바빴으나 유방의 군대가 오면 수고한다고 물이라도 떠왔다. 초나라 병사들이 속속 대열을 이탈하자, 이내 항우는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몇몇 장수를 데리고 전전긍긍하다가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漢)과 초(楚)가 천하를 두고 다투는 장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곳곳에서 내기장기를 두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짧지만 굵게(?) 살다간 진(秦)은 서양에 'China'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국의 국가명이 되었다.
큰 고릴라가 산꼭대기에 올라 석양을 봅니다. 망망대해. 그에게 세상은 섬과 바다, 그 뿐입니다. 바다 저편으로 넘어가는 붉은 해를 넋 놓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고릴라에게 그 너머 세상은 아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이 들고 다시 저 너머에서 해가 솟아 아침이 되면 배를 채우기 위해 섬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먹히지 않으려면 싸워야했고, 싸워야만 배를 불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산을 오르고 석양을 보고, 배를 채우는 일을 매일같이 되풀이했습니다. 그런 녀석 앞에 한 여인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잡아먹어야 할 일이었지만 그녀의 재롱(?)이 귀여웠던 탓인지, 녀석은 여자를 죽이지 않고 보살펴줍니다. 물론 여자는 그런 그에게서 도망을 칩니다. 녀석은 여자를 찾아 나섭니다. 아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는 여자를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다시 산에 올랐을 때, 녀석은 많이 싸운 뒤였습니다. 여자를 잡아먹으려는 공룡들과 싸우며 온몸에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공룡 녀석은 아가리를 찢어 죽였음에도 분이 안 풀려 확인사살까지 한 번 더했습니다. 산꼭대기에 올라앉은 녀석은 천천히 숨을 고릅니다. 바다 저편으로 붉은 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 때 여자가 고릴라를 향해 손으로 가슴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말합니다. “너무 아름답다”고. 녀석은 순간, 알게 되었습니다. 아름답다 부르든, 가슴을 치며 울부짖을 수밖에 없든, 무엇이든 간에, 삶에는 먹고 먹히는 싸움을 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을 말입니다. 석양너머 저 편에 있는 그 무엇의 존재를 말입니다. 그 것의 존재를 여자가 일깨워줬고, 지금, 그녀와 함께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 ‘킹콩’(2005)은 누가 뭐라 해도 멜로 영화입니다. ‘사랑’이라 불리는, 감정을 너무나 잘 그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 알게 된 소중한 가치를 모른 척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 수는 없다는, 바로 그 것을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붙잡혀 뉴욕까지 끌려온 건, 그녀를 좇아가고 싶었던 까닭입니다. 그녀가 없는 섬은 이제, 녀석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좇아감이 비록 비극의 시작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다시 여자를 만난 녀석은 뉴욕 최고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옥상에 올라갑니다. 여자를 구해 산꼭대기로 올랐던 때처럼,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때는 석양(夕陽), 지금은 여명(黎明)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이겠습니까. 녀석은 여자를 향해 손으로 가슴에 동그라미를 그려 보입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저 여명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영화 속에서 덴헴이 말했던 것처럼 킹콩을 죽인 건 비행기가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녀석은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사랑 속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 우기며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은, 녀석이 깨달은 진실을 애써 외면하려 합니다. 약육강식의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데 급급해, 잇속을 좇는 목소리의 달콤함에 이끌려, 바른 가치의 말들은 자꾸만 저 깊은 바다 속으로 밀어 넣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래 세상에서의 이전투구(泥田鬪狗)만이 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제 우리도 그만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요. 더 늦기 전에 녀석처럼 우리도 산에 올라 숨고르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랑의 초심’을, ‘삶의 본질’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요. 설령 녀석의 경우처럼 그 끝이 죽음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한국교육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