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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원 | 인천대 강사·한국문학 근대 초기에는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다.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한 한국의 구습 가운데 조혼제도는 단연 상위에 랭크되었다. 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위한 동량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이 조혼으로 인해 색욕, 즉 성관계에만 열중하여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가 생기고 신세대 학생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이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신문과 잡지에서 피력하는 성교육의 중심은 순수한 혈통과 종족 보존을 위한 방법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1910년 5월 22일자 신문에는 황당한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이렇다. 황해도 황주군 영풍면 안심촌 이승각 씨의 부인은 본 월 13일 밤에 해산을 하였는데, 어린아이의 머리가 둘이요 꼬리가 하나요, 양경과 음문이 하나씩이다.(중략) 홍주군 내동 등지에서는 암캐 하나가 새끼 하나를 낳았다. 그 새끼의 머리는 사람의 머리요, 몸뚱이는 개의 몸뚱이라더라. 머리가 둘이고 꼬리가 하나며,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각기 하나씩 달고 나온 아이. 과학이 발달한 결과 이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이란성 샴쌍둥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100여 년 전 사람들은 이 아이를 과연 ‘인간’으로 믿었을까? 또한 인간의 머리와 개의 몸뚱어리를 지닌 생명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수(半人半獸) 켄타우루스가 수천 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한국에까지 상륙한 것일까? 모두 믿거나 말거나 박물지 같은 이야기들. 성에 관한 이야기도 그렇다.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뭔가 신비하게 꾸며져 그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성(性)이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실시한 것은 해방 이후부터 이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된다. 1982년 문교부는 ‘순결교육’이란 용어를 ‘성교육’으로 대체하였다. 각 학교는 문교부에서 발간한 성교육지침서를 통해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실시하였다. 8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학교에서 받은 성교육이란 신체해부도를 보거나 마지막에 살아남은 한 마리의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면 여성이 임신한다는 정도다. 성교육의 초점이 청소년들의 성이나 성적 욕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지 않았다. 임신과 출산에 대한 지극히 이론적이고 따분한 지식의 습득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은 성문제를 접할 수 있는 통로를 학교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섹스는 종족보존을 위해서만 근대 초기에는 너무 일찍 결혼하는 것이 문제였다. 일명 조혼제도가 전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이 비판한 한국의 구습 가운데 조혼제도는 단연 상위에 랭크되었다. 국가의 발전과 영광을 위한 동량으로 자라야 할 학생들이 조혼으로 인해 색욕(色慾), 즉 성관계에만 열중하여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가 생기고 신세대 학생들이 등장했지만 그들이 학교에서 성교육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성교육을 시켰는지도 알 수 없다. 신문과 잡지에서 피력하는 성교육의 중심은 순수한 혈통과 종족 보존을 위한 방법이다. 이에 덧붙여 과도하거나 문란한 성관계는 질병을 유발하거나 국가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국가적 낭비로 비난받았다. 조혼의 폐단이 지속되면 “이천만 동포가 멸종되고 삼천리강토가 타국의 영토가 될 것”이라는 과격한 논리가 도출될 만큼 조혼제도는 계몽가들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100년 전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의 표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두 학생이 있다. 이인직의 신소설 (1906)에 등장하는 학생들이다. 남학생은 구완서이고 여학생은 김옥련이다. 이 둘은 미국유학생이다. 외국에서 어렵사리 공부를 마친 이들은 어느덧 서로를 자신들의 반려자로 생각하고 결혼할 것을 다짐한다. 그런데 100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옥련은 아버지 김관일의 의사와 상관없이 구완서와의 결혼을 결정한다. 자유연애라고 할까.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단순히 구습에 대한 반대가 아닌, 각자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최적의 배우자를 선택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결혼은 서로에 대한 사랑에서 기반 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이끌고 갈 동반자를 구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동지적 결합이자 일종의 계약이다. 옥련이는 ‘조선부인을 교육할 마음’이 간절하여 구씨와 혼인 언약을 맺고 구완서도 ‘한국을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마음’으로 옥련과 혼인 언약을 한다. 자신들의 결혼에 대한 문제보다 국가를 향한 열정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옥련의 모습은 상식의 차원을 넘어 기이한 사명감으로까지 느껴진다. 비록 구완서와 김옥련의 이런 모습이 과장되어 보일지라도 국가에 대한 열정으로 표백되는 순간 아무런 문제도 없는, 그저 지고지순한 애국의 열정으로 비칠 뿐이다. 옥련과 구완서의 결혼관은 ‘개인’보다 ‘국가’를 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시대, 개인의 모든 열정을 국가를 위해 헌납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현실 속에서는 참으로 모범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랑의 딜레마 연애는 결혼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섹스 또한 결혼한 성인남녀들만의 ‘공인된’ 특권이다. 결혼 전에 남녀가 몸을 섞는다면 사회로부터 매도당하기 일쑤다. 건전한 연애란, 연애 속에서 싹튼 낭만적 사랑이란,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야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를 ‘결합’하기 전까지는 내숭과 호박씨를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성욕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 사랑은 숭고한 것이며, 섹스는 그 숭고한 사랑을 흠집 내는 것이라고 ‘근대인’들은 생각했다. 만남에서 사랑까지 그리고 다시 한 몸이 되어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때까지의 시간은 무척이나 길다. 유교적 질서가 전 사회를 뒤덮었다는 조선시대에는 성욕에 대한 통제가 더욱 심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소설의 문맥에서 본다면 조선시대의 남녀들에게 과연 정조의 문제, 육체적 사랑이 지금처럼 억압되어 있다고 믿기는 어렵다. 에서 성춘향과 이도령은 만나자마자 밤을 기다려 한 이불 속으로 달려든다. 얼마나 요란한 관계를 맺었기에 “삼베 이불 춤을 추고, 샛별 요강은 장단을 맞추어 청그렁 쟁쟁, 문고리는 달랑달랑”거렸다. 더욱이 그들은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네 아래 굽어보니 오목 요(凹)자. 좋구나. 내 아래 굽어보니 내밀 철(凸)자. 좋구나!”하며 낯 뜨거운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요즘으로 말하면 은 청소년보호법에 걸릴 외설 소설이다. 게다가 두 주인공이 모두 미성년자가 아닌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머리만으로 이해되는 감정이 아니다. 언제나 몸과 마음이 한 방향으로 간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무렵 한국에도 사회진화론이 유입된다. 우생학(優生學)을 동반한 사회진화론은 한국 사람들의 육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좋은 혈통을 지닌 강한 인종으로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욕의 통제이다. 또한 성교를 통해 피가 유전된다는 이야기가 ‘과학적 사실’이 되어 한국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해 갔다. 문란한 성생활은 순수한 혈통을 ‘잡종’으로 만드는 초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피의 순수성, 민족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족주의의 기반인 것이다. 그렇지만 육체적 사랑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자객과 같았다. 말할 수 없고 함부로 실천할 수 없었지만 육체적 사랑은 1920년대 들어 빈번하게 사회적 이슈를 생산해냈다. 1920년대 후반 한국은 포로노그라피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각종 도색잡지와 나체화보 그리고 성에 관련된 서적들이 독서계를 강타한다. 많은 사람이 일본에서 수입된 잡지와 그림에 넋을 빼앗겼다. 신문 광고는 연일 을 비롯한 잡지와 누드집을 보란 듯이 선전했다. 미성년자에게 팔지 말아야 한다는 규제가 없었으니 돈이 있다면 누구든지 책을 구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PAGE BREAK] 1927년 12월 호에는 김규택(金圭澤)이 그린 삽화 한 장이 실렸다. 자기 방에 틀어박혀 ‘독서에만’ 열중하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어머니가 방문을 열었다. 子 : 아이고. 머리 아파. 母 : 밤낮 공부만 하니까 그렇지. 너무 공부에만 힘쓰지 말라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스런 걱정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들이 무슨 공부에 그리 정열을 쏟는지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아들의 책장을 보면 온갖 성에 관한 책들이 즐비하다. , , , (하트가 그려져 있다), , , , , 등. 게다가 아들이 보고 있는 이라는 책은 기생들이 발간한 잡지였다. 아들 녀석의 머리가 아플 만도, 아니 어지럼증을 느낄 만도 했을 것이다. 조선 학교에 성교육을 許하라! 1930년대까지 학교에서 성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 여전히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고리타분한 경구가 가정과 교육계에 잔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성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학생들의 성문제는 뒷구멍으로 숨겨만 두고 내놓고 가르쳐 주기를 꺼려했다. 1929년 2월 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다. ‘학교와 가정의 시급 문제-성교육 실시 방책’이다. 제목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시급한 문제’가 바로 성교육이었다. 잡지에 글을 기고한 사람들의 면목을 살펴보면 대부분 교육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들은 학생들의 성교육에 대해서 일대 지상토론을 펼쳤다. 남학생들의 성 문제 중에서 ‘자위’는 건강에 해로운 행위로 지탄받았다. “한때의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여 자위를 하게 되면, 혈색이 나빠지고 신체가 허약해지기 때문에 학업에 지장을 준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건전한 뇌와 신체’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중학교 교육에서 수음(手淫)을 하지 않게만 가르쳐도 된다는 것이다. 요즘 같으면 ‘뻗치는 성적 에너지는 운동으로 풀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운동만으로는 억제된 성적 에너지를 배설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운동도 아니고 도덕관념을 키워 욕망을 억제하도록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이 등장한다. 학생들에게 고상한 인격을 양성하여 주고 지혜와 이성을 밝게 하여서 내적 자기를 충실하게 하여주면 된다니. 정말 다분히 이상적인 생각이었다. 그래서 올바른 성교육의 방법으로 시각적 매체를 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과연 어떤 매체를 활용할 것인가. 바로 인체모형이다. 이는 단순히 인체의 해부학적 모형이 아니다. 당시 상점에서 이 모형을 팔았던 모양이다. 성병에 걸려 비참한 형체를 지닌 신체의 모형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자는 것이다. 성병에 걸린 사람을 표본으로 만든 모형을 활용하여 학생들을 교육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만약 학생들이 그 표본을 보게 되면 그 끔찍한 것에 딴생각이 달아나 버림으로 늘 억제할 수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런 의견을 주장한 교육가 역시 젊은 시절 성욕이 넘쳐 났을 때 그 모형을 보고 성욕을 억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서양은 ‘만국위생박람회’를 개최한다. 각 국가를 순회하면서 정기적으로 열렸던 행사였다. 사회진화론과 우생학, 즉 인종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만국위생박람회에 등장한 것이 신체의 모형이다. 여기에는 매독에 걸려 태중에서 죽은 아이의 모형과 각종 성병에 걸려서 고통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모형이 적나라하게 전시되었다. 모형이긴 하지만 실물과 흡사한 인체가 사람들에게 낱낱이 공개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성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은 아직도 인터넷에 유포된 기괴한 내용의 사진과 글, 주위 친구들의 불확실한 경험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비행청소년, 불량청소년이라는 ‘차별과 구별 짓기’의 이름표를 들먹이면서 학생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성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1920년대 후반 한국에 불었던 학생들의 성교육. 21세기가 되었지만 한국의 성교육은 그리 변한 게 없다. 바야흐로 꽃 피는 사춘기는 영원히 반복될 텐데 언제쯤 청소년의 성은 자연스럽게 커밍아웃 될 수 있을까? 그래, 열심히 ‘운동’만 하면 될까?
최효찬 | 경향신문 기자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한 자녀교육 현대에 이르러 우리의 것, 동양적인 것에 대한 서구의 시각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양이 동양보다 우월하다는 시각에 대해 서구인들이 반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서구가 일부 동양의 문화를 빌려가 그들의 문화로 삼았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고 한 것에 대해 뒤늦게 그 뿌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징기스칸을 '근대의 기획자'로 보는 서구 학자도 있다. 서구에서 징기스칸은 야만인(원래 야만인 'barbarian'은 그리스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칭한 말), 피에 굶주린 미개인,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 정도로 폄훼(貶毁)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서구에서 오히려 징기스칸을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로 통합한 '근대의 기획자'로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 잭 웨더포드가 쓴 '〈징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에서는 징기스칸을 서구인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책에서 징기스칸을 '근대의 기획자'로 끌어올린다. 즉 월러스틴은 15, 16세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체제가 형성됐다고 말했지만, 저자는 이보다 200년 앞서 징기스칸이 근대세계체계를 형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주장한다. 징기스칸은 기동성 있는 전문적인 전쟁기술, '비단길'을 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하는 등 세계화된 교역을 했고 국제적 세속법을 통한 통치라는 면에서 철저하게 근대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낡은 사고패턴을 깨고 패러다임을 전환해 징기스칸을 보면 야만인에서 근대의 기획자로 승격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우리의 전통적인 덕목을 바라보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다가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토마스 쿤이 처음 사용한 말인데 패러다임의 현재적 의미는 모델, 관념, 지각, 시각, 준거틀 등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말한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고의 틀을 깨야 한다. 바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몸속에 체화돼 있는 서구중심주의, 전통에 대한 열등의식 등을 깨고 들여다보면 그 순간부터 우리의 것이 소중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우리의 선조들과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나 자녀교육방식을 들여다보려고만 한다면 우리의 과거사나 과거의 인물들이 온통 보수적인 틀에 묶여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서 징기스칸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근대의 기획자'로도 볼 수 있는 인물도 많을 것이다. 함재봉 연세대 교수는 유교는 분명히 많은 차원에서 흔히 말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진보성도 아울러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유교의 위민사상 또는 민본주의는 진보사상의 민중주의와 매우 흡사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위민사상이 근대적 의미의 민중사상과 만날 경우 유교사상은 매우 진보적 색체를 띤다"고 지적하고 있다. 함재봉의 지적처럼 유교가 대부분 도덕주의로 흐르고 또 보수적이며 권위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아울러 진보적 색채도 띠고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가를 전통 명문가 문화의 산 체험장으로 개방한 의성 김씨 지촌 종가인 '지례예술촌'은 현대에 전통 종가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음미해볼 수 있는 곳이다. 지례예술촌은 오늘날에 와서 다시금 삶의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는 '느림의 미학' 혹은 '한적의 미학'을 느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한국판 '아티스트 콜로니'를 세우다 지촌종가가 한국판 아티스트 콜로니(Artists Colony), 즉 '문화예술인촌'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바로 종가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의성 김씨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의 13대 종손인 김원길 시인이 종가를 예술인촌으로 개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종가가 전통고수의 '엄숙주의'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종가로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절박한 인식에서다. 종가가 더 이상 지역사회를 위해 도덕적인 책무를 다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종가를 보존, 유지하는 것이 종가의 존재이유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져 예전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고답적인 기능에 머물며 종가를 보존하느냐,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새로운 기능을 종가에 부여하느냐는 순전히 종가가 결정해야 할 몫이다. 이때 소설가 김용익이 1983년 우연히 종가에 들렀다가 이렇게 태고연한 마을이 다 있느냐며 탄복을 했다. 김용익은 "나중에 퇴직한 후 이곳에 와서 자서전을 쓰고 싶다"면서 아티스트 콜로니로 꾸미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는 미국에서는 예술가들이 일정 기간 살면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아티스트 콜로니가 15개 이상 있다고 했다. 김 씨는 이때 뭔가 얻어맞은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고 한다. 소설가 제니 런던의 〈7일간의 파라다이스〉에는 한 아티스트 콜로니에 대한 대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집은 영혼의 친구였고, 사랑의 힘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완벽한 남자를 찾는 것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19세기에 지어진 농가를 예술가들을 위한 스튜디오와 은신처로 개조했다. 처음에는 2층짜리 건물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규칙하게 지어진 건물 2개가 더 늘어났다. 집에서 연결된 산책로는 강으로 이어졌다. 나무들 사이로 지붕이 보이는 다양한 미디어 스튜디오들을 포함한 외부 건물이 산책로를 따라 줄이어 서서 목가적인 고립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13장에서) 지례예술촌은 바로 '7일간의 파라다이스'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고립된 분위기 속에서도 목가적이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로 그런 곳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다름 아닌 전통종가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새로운 변신을 가능하게 했다. 자녀교육의 새 장을 연 종가의 변신 김원길 시인은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종가(안동시 임동면 지례리)를 이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산이라도 많았으면 좀 더 접근하기 쉬운 곳으로 이전을 할 수 있겠지만 당시 그의 형편으로는 400여년 된 고(古)가옥을 이전할 땅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지례예술촌을 만들고 패러다임을 전환할 수 있는 동기로 작용했다. 고가옥들은 1664년 조선 숙종 때 지어진 종택과 제청, 서당 등 모두 10여 동 125칸, 17개 방이다. 그는 다른 방도가 없어 1986년부터 89년까지 200여 미터 떨어진 산기슭으로 건물들을 옮기기 시작해 89년에 모두 다 옮겼다. 그리고 김용익의 제안대로 예술촌으로 문을 열었다. 지례예술촌은 시인의 열정의 산물이다. 당시 안동대 교수였던 시인은 보장된 교수직도 과감하게 내던졌다. 교수직을 유지하면서도 예술촌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몸에 베인 '도덕주의'가 그 자산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수업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겠느냐"면서 "학생들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 미련을 두지 않고 교수직을 포기했다"고 회고했다. 예술촌으로의 변신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종가를 이용해 돈을 벌려느냐", "그게 말이 예술촌이지 여관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등의 비난이 문중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쏟아졌다. 그럴 때마다 시인은 "종가가 변신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엄숙주의를 털어내지 않으면 종가의 앞날은 없다"면서 설득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시도하는 종가의 변신이어서인지 문을 열자마자 언론 등으로부터 호응이 대단했다. 예술인들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면서 찾기 시작했고 외국인들도 한국전통문화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며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동안 이어령, 조병화, 홍신자, 유안진, 한수산, 김용옥 등 학계, 예술계 인사들이 다녀갔다. 처음에는 예술가들을 위한 창작의 산실로만 염두에 두었지만, 일반인에게도 양반문화체험장으로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교수에서 '촌장'으로의 변신은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가능했다. 그가 기존의 종손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직도 종택은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고 문중인사들만 찾는 폐쇄적인 공간으로 머물고 있을 것이다. 폐쇄적인 종가의 분위기는 400여 년 전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종가가 지역사회에 할 수 있는 역할도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종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지촌종가는 이렇게 종손의 열정과 확신, 그에 따른 순발력 있는 결정에 힘입어 새로운 종가문화를 창출하고 곳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17대 할아버지는 바로 의성 김씨를 당대에 명문가의 반석에 올려놓은 청계(淸溪) 김진(金進)이다. 지촌은 김진의 고손으로 1689년(숙종15년) 사간이 되었으나, 이해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서 왕의 과오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서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후 대사성, 대사간을 지냈고 지산서당을 지어 후학을 가르친 인물이다. '영수옥쇄 불의와전'의 가르침 전해 시인은 어릴 때 조부로부터 17대조에 대한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퇴계와 동시대를 살았던 청계는 다섯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인물로 다섯 자녀들은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모두 과거에 합격했다. 조선시대에 다섯 아들이 급제하면 오자등과택(五子登科宅)이라고 불렀다. 또 다섯 아들을 오룡(五龍)에 비유해서 오룡지가(五龍之家)라 칭하기도 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보면 아들 다섯 명이 과거에 합격하면 국가가 해마다 쌀을 주고 부모가 죽으면 벼슬을 추증하고 제사를 지내주는 등 많은 혜택을 주었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 약봉 김극일, 구암 김수일, 운암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 김복일이 바로 그들이다. 학봉은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영남학파의 양대 학맥을 이었다. 새로운 종가를 이룬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여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했다. 학봉종가는 퇴계종가와 함께 영남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꼽히고 있다. 청계가 자녀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청계가 젊은 시절 서울 교외의 사자암에서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어떤 관상가를 만났는데 하는 말이 "살아서 참판이 되는 것보다는 증판서(贈判書)가 후일을 위해 유리할 것"이라는 충고였다. 이 말을 듣고 즉각 대과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녀교육에 전념하였다는 일화가 문중에 전해진다. 증판서는 다름 아닌 다섯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사후에 내리는 벼슬을 말함이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늘 강조한 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런 가르침으로 의성 김씨 대종회에 따르면 이 문중에서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은 사람만 모두 68명에 이른다. 청계는 또 후손들에게 "벼슬은 정2품 이상을 하지 말고, 재산은 300석 이상을 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가정교육의 요람으로 탈바꿈해야 21세기에는 오히려 한발 '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특히 속도의 시대에 살면서 겪는 스트레스와 대인관계 등으로 인해 더욱 느림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곳을 삶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여유를 주는 느림의 미학, 한적의 미학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이미 시인의 목표는 달성된 것이 아닐까. 지례예술촌은 자녀들과 함께 찾으면 느림의 경쟁력, 한적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산 교육장이다. 임어당은 '한적의 미학'을 동양의 가치로 꼽았다. 한적의 미학이란 바로 동양적 가치인 '귀전원거(歸田圓鋸)의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대자연 속에서 수신을 행함과 함께 제자를 가르치면서 살아가는 정신이라 하겠다. 이 정신은 도연명과 퇴계 이황, 에머슨, 소로 등 동서양에 걸쳐 위대한 현인들의 삶에서 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예술촌으로 변신한지 17년이 되는 요즘, 아직도 예술촌으로 가는 길은 마치 조선시대 500년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구불구불 산길을 넘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그야말로 한적한 곳이다. 그런 외진 지례예술촌에는 연간 3500여명 정도 찾는다. 주로 자녀들과 함께 찾는 가족들이 많다. 아이들은 핸드폰도 안 터지고 TV도 볼 수 없는 이곳에 와 별똥별을 보면서 하룻밤을 묵게 되면 그야말로 '명가의 초석'을 쌓을 것을 다짐하는 자리가 된다. 밤새 아버지는 자식들과 그동안 단절된 대화를 다시 잇고 미래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대화하고 가슴을 열고 목표를 정하고 그런 연후에 열정을 갖고 살아가면 그게 명가의 초석이 되는 게 아닐까. 지례예술촌은 21세기 종가가 가야할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전통 종가가 해왔던 자녀교육의 산실로 종가를 부활하는 것이다. 조선 500년 동안 명문 종가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면서 가정교육의 요람이 되었었다.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를 거치고 시대적 상황이 급변하면서 종가의 위상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종가의 고택과 함께 종가문화, 나아가 명문종가의 문화는 시대상황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녀교육의 산실로서의 문화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비잔틴제국 탄생의 주역 프랑크족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멸망 또한 하루 저녁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많은 모순점을 안고 있었던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더니 동로마제국의 전통을 부분적으로 흡수한 비잔틴제국 문명권과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침입자 게르만족의 여러 나라에 의해서 독특한 라틴·게르만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프랑크족은 일찌감치 로마제국의 보편교회(가톨릭)로 개종했기 때문에 서로마제국의 주민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유럽의 재편을 주도할 수 있었다. 훈족이 유럽으로 침입했을 때 원래 프랑크족은 라인 강 유역에 살고 있었으며 크게 살리아파와 리푸아리아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5세기 초에 갈리아 북부로 진출한 살리아파의 클로비스는 계속 남진하여 갈리아의 중앙과 남부를 점령하는 군사적 대성공을 거두었고 서기 493년 그리스도교의 신도인 부르군드의 왕녀 클로틸다와 결혼하고 우여곡절 끝에 그녀의 종교로 개종하였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유럽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대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점령지 주민의 가톨릭 사상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국가를 쉽게 통치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게르만 민족의 개종이 촉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군주권과 교황권의 끊임없는 제휴와 분쟁이라고 하는 중세사의 특징을 만드는 시발점이 되었다. 가톨릭은 역사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에게 고대의 문화적 전통을 전해주고 종교사적으로는 프랑크족 이외의 다른 게르만 민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크 왕 클로비스가 사망하고 그의 계승자인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창업자의 정복사업을 계승하였지만 6세기 후반부터 메로빙 왕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실권이 궁내대신(Majordomus)의 수중으로 넘어 갔기 때문이며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상업 활동이 감소되고 소규모 자작농이 증가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점차 인수·합병 등을 통해서 대토지를 소유하는 대지주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기점으로 유럽은 장원체제의 중세 봉건사회로 넘어가는데, 특히 8세기에 궁재 샤를 마르텔이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북상하는 이슬람 군을 격퇴시킴으로써 프랑크 왕국의 통일적 세력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그의 아들 피핀은 자신의 통치력을 더욱 강화하고 색슨족 등을 정복하는 한편, 명목상의 군주인 메로빙 왕조의 왕을 폐위시키고 카롤링 왕조(751~888)를 창업하였다. 당시 교황 자카리아스는 눈치를 보고 있는 피핀에게 이렇게 말했다. "명목상의 왕보다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왕이 아닌가요?" 피핀은 창업 과정에서 자신의 손을 들어준 교황에게 로마에서 라벤나에 이르는 지역을 롬바르드족으로부터 빼앗아 기증하였다. 이것이 바로 교황령의 기원이며 나중에 독립국가로서의 바티칸이 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게르만족은 로마제국의 전통 계승 이번에는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계승하는 이야기이다.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며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Charlemagne)가 왕위를 계승하였다(768년). 샤를마뉴는 프랑스식 이름이고 라틴어명으로는 'Carolus Magnus', 독일식으로는 '카를 대제(Karl der Grosse)'이다(프랑크 왕국 자체가 프랑스 냄새가 많이 나므로 그리 하였는데, 독일어에서는 프랑스를 그대로 '프랑크라이히(Frankreich)', 즉 프랑크 왕국이라고 한다). 그는 부왕 피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교황에게 적극 협조하였다. 즉 정치가 정신적 지주인 교황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니 제국의 발전에 가속이 붙었던 것이다. 이때가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였는데, 교황의 요청으로 롬바르드족을 정복하고 색슨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 후에도 카를 대제는 정복사업을 계속하여 마침내 이베리아반도·브리타니아·시칠리아·덴마크 및 교황령을 제외한 서 유럽의 대부분을 복속시키니, 서로마제국이 망한지 300여 년 만에 유럽은 다시 정치적 구심점을 가지게 되었다. 전체 서유럽인들이 프랑크 제국의 통치 질서 속에 성당을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는 뜻이다. 서기 800년 카를 대제가 이탈리아를 방문하였는데, 당시의 교황 레오 3세가 그에게 서로마제국의 황제관을 수여하였다. "이제부터 주상은 로마인의 황제이니 천하를 잘 이끌어주시길 바라오." 카를 대제에게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주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단절된 로마의 전통을 계승시킴으로써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이 나중에 10세기 말(962년) 오토 1세 부터 시작되는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으로 이어지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동서양 역대 군주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창업자와 그의 아들과 손자까지는 나라를 다스리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손자까지는 직접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며 창업정신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건국이념이 퇴색해 버린다. 왕자병에 사로잡혀 호의호식만 하다가 왕위(제위)에 등극하면 너무 세상물정을 몰라 권신(측근)들에게 정사를 맡기고 나라를 살피지 않기 마련이다. 군주제의 최대 단점이다. 무력했던 메로빙 왕조를 대신하여 유럽세계를 장악했던 프랑크 제국도 오래가지 못했다. 814년 카를 대제의 사망 이후, 내적으로는 중앙집권의 정치기반 붕괴와 외적으로는 노르만족의 침입이라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더니 루이 1세가 프랑크 왕가의 상속법에 의해서 그의 아들들에게 국토를 분배하면서부터 치열한 유산싸움이 벌여졌다. 루이 1세의 사망 후에 황제 로타르 1세는 동생인 샤를 2세, 루이 2세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베르덩 조약(843)으로 제국의 영토는 완전히 삼분(三分)되었다. 로타르 1세(795~855)는 황제 칭호와 함께 제국의 중간지대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고 루드비히 2세(독일왕 804~876)는 동 프랑크를, 샤를 2세(대머리왕, 827~877)는 서 프랑크를 장악하게 됨으로써 통일 카롤링 왕조의 프랑크 제국은 분열되었다. 이후 제국의 쇠퇴는 노르만의 침공을 불러들였으며 정치·사회·경제 각 분야에서 봉건화가 이루어지면서 870년에 샤를 2세와 루드비히 2세가 메르센 조약에서 국경을 확정하였고 독일과 프랑스 양국의 성립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911년 동 프랑크의 루드비히 4세가 사망하자 독일지역에서는 카롤링 왕가가 단절되어 양국의 분리는 완전히 이루어졌다. 당시의 유럽은 분권적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국왕보다는 제후들의 힘이 강했고 진정한 단일국가로서의 통합은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독일의 경우에는 황제 선출에 제후들의 입김이 강하여 19세기 프로이센이 통일할 때까지 분립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다만 10세기에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로마황제의 대관을 받음으로써 독일은 '신성로마제국(Das Heilige Ro‥mische Reich Deutscher Nation)'이라 일컬어졌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제국'의 개념과는 다르다. 참고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을 흔히 '제3제국'이라고 하는데, 제1제국은 신성로마제국이며 제2제국은 프로이센제국(독일제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당시의 유럽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행정조직'이라는 정치적인 유산과 정신적으로 가톨릭교회의 통일적 보편성이 작용하고 있었으며, 고대의 문화적 전통이 단절되지 않았다. 이상 세 가지의 요소에 마지막으로 게르만이라는 인적요소가 첨가되어 라틴·게르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세유럽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 이슬람교 게르만족의 개종으로 서유럽과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 그리고 서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그리스도교 문명권이 형성되었으나, 거대한 세력의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이슬람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7세기 전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에 마호메트가 나타나 반도를 통일하고 후계자인 역대 칼리프들은 정교일치의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탄생시켜 유럽세계는 긴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이란의 사산 조(朝) 페르시아와 오랜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6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비단길'과 '바다길'이 거의 막혀버려 아시아에서 오는 상품은 아라비아 반도로 집중되었다. 자연히 그 중심지인 메카가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크게 번영하였고 이 지역에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를 창시하여 급속한 속도로 세계종교로 발전시킴으로써 현재는 33%의 크리스트교에 이어서 교세 랭킹 2위(17%)를 자랑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개조(開祖) 마호메트는 571년경, 한때 메카를 지배한 바가 있는 크라이슈 족의 하심가(家)에서 태어났다. 그가 12살 되는 해에 시리아의 대상에 끼어 상업으로 출세하려고 결심하였다. 성실했던 그는 호상(豪商)의 미망인 하디자(Khadijah)의 신임을 받아 대상무역(隊商貿易)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마침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595년에는 15세나 연상인 하디자와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마호메트가 40세가 되는 서기 610년,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슬람교이다. '이슬람'이란 아라비아말로 '신으로의 절대적 귀의'를 의미하는데, 당시 부와 권력이 대상인(大商人)에게 편중된 것이었기 때문에 마호메트의 '알라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사회변혁을 통한 일종의 계급투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호메트의 일신교는 당시 특권계급이 믿고 있던 다신교를 부정했기 때문에 메카에서 메디나(현재의 야슬리브)로 추방을 당하였다. 서기 622년 7월 16일의 이 사건을 '헤지라'라고 하며 이것이 이슬람력(태음력)의 기원이 되었다. 마호메트는 탁월한 전술가였다. 메디나에서 통행세를 물지 않고 통과하려는 적의 대상을 습격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대시켜 추방된 지 8년 만에 메카에 무혈입성 하여 우상들을 끌어내려 파괴하였다. 마호메트는 이렇게 전 아라비아 반도에 세력을 확장하더니 631년에는 아랍인에 의한 최초의 반도통일을 이룸으로써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마호메트는 군사적 재능을 발휘한 종교인이었으며 동시에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자신을 '최후의 예언자'라 칭하면서, 사막에서의 전투를 지휘했다. 참고로 코란에는 27명의 예언자가 기록되어있다. 그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로는 아담과 에와의 아담, 노아의 방주의 노아, 유대교의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스도교의 예수의 이름이 올라 있다. 즉, 마호메트는 타종교의 모세, 예수도 자신 앞에 온 예언자였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은 마지막으로 신의 가장 확실한 메시지를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존재임을 확신시켰다. 또한, 마호메트에게 알라의 존재를 계시한 천사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다. 이 천사는 유대교에도 등장하며, 특히 그리스도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알렸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색채가 깊이 배어 있었던 신흥종교였다. 마호메트가 죽자, 마호메트의 후계자이며 신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칼리프가 선출되고 그들의 지도 아래 대 정복사업을 계속하였는데 이를 지하드[聖戰]라 한다. 21세기 현재, 지하드는 강경파 이슬람 근본주의자에 의해서 계속되고 있다. 물론 원초적 책임은 서방세계에 있지만….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우리나라 고교에서 ‘학생들의 흡연’이 학교의 골칫거리라면 호주는 10대들의 무절제한 성적 방종이 문제가 되고 있다. 남녀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행동이 사회문제로까지 이어지다 보니 최근에는 연방정부의 한 국회의원이 “중·고등학교에 콘돔 자판기를 설치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고등학교 11학년, 10학년(한국의 고2, 고1)생이 된 두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에 다닐 무렵, 적지 않게 놀란 일이 있는데 지금도 잊혀 지지 않고 당혹스럽게 기억되는 것이 있다. 그때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는 대학과정을 제외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이른바 유·초·중·고교의 총 13년 과정을 갖춘 통합형의 학교였다. 큰아이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작은 애는 신입생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큰아이가 하굣길에 소변이 급하다며 교정으로 다시 돌아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왔다. 잠시 후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 손에 뭔가가 들려 있다 싶던 차에 내 눈앞으로 그것을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엄마, 이게 뭐야?” 아이가 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용하고 버린 콘돔이었다. 내심 너무 놀랐지만 짐짓 별 일 아닌 척하며, “그거 어디서 났어?”하고 되물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화장실에 가면 이런 게 매일 매일 여러 개가 있어.” ‘아니, 이럴 수가. 유흥업소도 아니고, 어린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 쓰다 버린 콘돔이 시도 때도 없이 널려 있다고?’ 아이들이 어린 탓에 호주 학교에 대한 경험이나 들은 얘기가 별로 없던 때라 당시에는 아이의 말이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야?” “그렇다니깐. 그리고 화장실에 가면 고등학생 형아와 누나들이 꼭 끌어안고 있고 그래.” 생전 처음 보는 콘돔이 신기하기만 한 아이의 호기심을 슬쩍 돌려놓기 위해 상황을 모면하고자 그때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나라 중․고등학생들의 성의식이나 태도 등에 대한 단면을 직접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던 일이라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다. 서구 사회 10대 청소년들의 문란하고 방종스런 성관념에 대해서 요즘은 논란거리도 못 되는 세상이지만, 유치원생과 초등학생까지 함께 다니는 학교에서 상급학년인 중·고등학생들의 이 같은 행위를 묵인하는 것은 해도 너무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학교 측의 무심한 처사에 분노가 일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이 외부도 아닌 학내에서 버젓이 성관계를 맺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어서였는데, 성에 대해 한창 호기심이 많은 나이의 학생들을 계도하기 위한 학교 측의 고민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겨우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교정에서는 키스를 금함’ 얼마 전 길을 지나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슬로건 형식으로 내건 경고문이 눈길을 끌었다. 문구가 지나치게 직설적이라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면서도 ‘오죽하면 저랬을까’ 하는 생각에 곧이어 한숨으로 변했다. 말이 ‘키스’지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결국 ‘학교에서는 성행위를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뜻으로 해석이 되었다. 그 문구를 보자 갑자기 2년 전 한국에서 보았던 서울의 한 고등학교 정문 위에 펄럭이던 ‘학내 흡연 금지’라는 경고문이 기억 속에 겹쳐졌다. 한국의 고등학교들이 학생들의 ‘학내 흡연’으로 고심하고 있다면, 호주에서는 ‘학내 성행위’ 가 같은 수위의 골칫거리라는 뜻이기에.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녀 학생들의 분별력 없는 성관계로 인해 고등학생 신분으로 졸지에 부모가 되는 사례나, 어린 여학생들의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낙태 시술을 반복하다 건강에 치명적 영향을 입는 경우 등이 종종 보도되는 점도 이 나라 10대들의 성적 방종의 위험수위를 짐작케 한다. 또래로부터 남자 친구 혹은 여자 친구와 일단 성관계를 가져 볼 것에 대한 압력과 부추김, 모두들 경험이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판에 자신만 해보지 않았다는 그릇된 위축감과 오해 등이 10대들로 하여금 반성 없는 성행위를 하도록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고등학생 때 아이를 낳아 미혼모로 살거나 한순간의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이를 양육할 만한 정신적, 경제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입양을 선택한 후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게 되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근한 현실이기도 하다. 호주는 이른바 문명국가 가운데 10대들의 임신율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통계에 의하면 15세 미만 청소년들의 10~30% 정도가 성관계를 가지며, 같은 연령대의 소녀 1천 명 가운데 세 명꼴로 임신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낙태율 또한 심각한 상황으로 OECD 회원 국가 가운데 15~19세 사이 호주 청소년 1천 명당 연평균 낙태율은 25명꼴로, 미국과 헝가리(30여 명 수준)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사태의 심각성이 이 정도이다 보니 최근에는 연방정부의 한 국회의원이 “중·고등학교에 콘돔 자판기를 설치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호주에서는 세 번째의 영향력을 가진 정당인 민주당 소속 한 하원의원은 ‘중·고등학생들이 학교에서 성관계를 갖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강조하며, 임신의 일차적 예방을 위해 학교에서 콘돔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중·고등학생들의 성생활은 건강상의 문제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생들을 돕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콘돔 자판기를 설치해 주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학생들의 성관계를 막을 수 없다면 성병에 걸리거나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것이라도 예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콘돔을 사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성보건과 피임에 대한 보다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 이 나라 청소년 성의식의 현주소인 것이다.더 이상 성윤리나 도덕의 잣대로 학생들의 성관계를 자제하도록 하기는 어려우며, 교사의 훈시나 교육적 차원에서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는 단계를 벗어난 현실 앞에 성교육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까. 신체적으로는 이미 성년이 된 큰아이와 성적으로 한창 예민한 단계를 지나고 있는 작은 아이를 부모의 처지에서 바라만 보며 ‘설마, 쟤들이…’하는 속마음 밖에는 가질 수 없는 무능함(?)이 그 어느 때보다 안타깝게 느껴지는 때이다.
윤종혁 |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일본은 지난 10년 이상의 불황 속에서 파생된 높은 실업률과 이직률, 정년 보장이 안 되는 직장 분위기 등이 경제의 큰 흐름으로 정착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청년 계층에 대한 불안정 고용이 확산되는 등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일본 정부는 연 217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는 청년실업자 중심의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현상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래서 정부 차원의 대책으로 교육·고용·산업정책을 연계하는 ‘청년자립·고용촉진·진로교육’ 등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2000년 교육개혁국민회의에서 강조하고, 그 이후 문부과학성 대신 자문 중앙교육심의회에서 계승한 일본 교육개혁의 핵심 목표로써 학생의 ‘생활개척능력’을 배양하는 과제가 부각되고 있다. 2006년 2월에도 문부과학성은 국제학업성취도 검사 등에서 일본 학생의 학력이 부진하다고 판단하면서 ‘여유 있는 교육’을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검토할 것을 각계 전문가에게 부탁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학생의 ‘언어 능력’ 함양과 ‘체험 중시 교육’이라는 두 가지 활동이 더욱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교육계 핵심 목표 ‘생활력’ 배양 이는 학교교육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미 고등교육 및 교육인적자원 개발 영역에서는 2003년 ‘청년자립·도전플랜’이라는 청년실업대책 및 인력 재배치 정책 등의 인적자원개혁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초·중·고등학교에서도 학생의 ‘체험 습득’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진로지도 및 직업훈련교육 등을 강조하고 있다. 2005년 5월 문부과학성은 새로운 진로지도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학교교육에서 진로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2006년 4월 이후의 새 학기부터 종합학습시간 등의 재량수업은 물론 각 교과교육 등에서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측면의 진로지도 강화대책을 시작할 것임을 밝힌 것이다. 원래 진로지도는 학생 스스로 자신의 인생관을 점검하고 장래에 대한 목적의식을 확고히 하여 자신의 의지와 책임으로 스스로 진로를 선택·결정하는 능력·태도를 몸에 익히도록 지도·원조하는 것이다. 일본의 중학교는 학교의 교육활동 전체를 통해 학생의 능력·적성, 흥미·관심 혹은 장래의 진로희망 등을 고려하여 진학하려는 고등학교 혹은 학과의 특색 등을 학생들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 문부과학성은 이전에도 사설적성검사 등에 따른 진로지도를 자제하고, 학생 개개인의 특성·능력·적성 등을 고려한 본래의 진로지도로 환원할 수 있도록 조치한 바 있다. 현재도 중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연수회 등을 개최하고, 학생에 대한 진로지도용 지침서를 배부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진로지도를 강화하고 있다. 장기 불황의 결과물 니트족 문부과학성이 진로지도를 교육활동의 중점으로 내세운 것은 최근의 청년실업 대책과 무관하지 않다. 사실 지난 10년 이상의 불황 속에서 파생된 높은 실업률과 이직률, 정년 보장이 안 되는 직장 분위기 등이 일본 경제의 큰 흐름으로 정착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청년들의 직업 능력도 축적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경쟁력·생산성이 저하되면서 청년 계층에 대한 불안정 고용이 확산되는 등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미 일본 정부는 연 217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는 청년실업자를 중심으로 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현상에 대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래서 정부 차원의 새로운 대책으로서 교육·고용·산업정책을 연계하는 ‘청년자립·고용촉진·진로교육’ 등의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문부과학성도 ‘청년자립·도전플랜’에 기초하여 청년이 올바른 근로관·직업관을 가지고 명확한 목적의식 속에서 취업을 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학교 단계별로 체계적이고 충실한 진로교육·직업교육 등을 강조하게 되었다. 청소년의 자립지원을 위한 교육적인 과제로서 중학교 단계부터 진로지도를 본격 추진하고 있다. 즉, 모든 중학생들이 5일 이상의 직장 체험을 통해 진로교육을 실천하는 프로젝트인 ‘진로교육 주간’ 행사가 2005년 4월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단계도 전문 직업인 육성을 목표로 하는 ‘슈퍼 전문고등학교’ 육성사업을 통해 특색 교육을 하는 특성화고등학교를 지원하고 있다. 이 학교는 주로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는 교육에 집중하고 있다. 향후 문부과학성은 전문고등학교 등을 집중 육성하는 방식으로 ‘일본식 교육 이원화체제’를 추진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현재 고등학교 단계의 진로교육 차원에서 기업실습과 교육을 조합한 인재육성 시스템으로서의 새로운 학교모델사업을 하고 있다. 고등교육 단계에서도 대학의 우수한 진로교육 활동에 대한 지원을 통해 학생의 높은 직업의식과 직업능력을 배양하는 새로운 교육개혁을 실천하고 있다. 또한 전문고등학교 등을 통해 정착·활성화되고 있는 ‘교육 이원화체제’를 전문학교 및 단기대학까지 확충·연장하여 청년의 직업능력과 직업훈련을 향상시키는데 활용하고 있다. 평행교육 차원의 실업대책도 강구 한편 문부과학성은 평생교육 차원에서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교육대책을 제안하고 있다. 이미 일본의 국가적 난제가 되고 있는 ‘NEET족’과 ‘(파트·아르)바이터족’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공민관, 비영리조직(NPO) 등과 연계·제휴한 직업훈련 및 재교육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NPO 등과 연계·제휴하는 ‘NEET족’에 대한 직업교육지원 사업은 주로 전수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또한 공민관 등에서도 NPO와 지역사회의 관련모임 등이 협력하여 NEET족을 가진 보호자 등을 대상으로 한 지원 대책사업 등을 시범적으로 운영·실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부차적인 과제로서 e-러닝 시스템을 활용한 인재육성지원을 시범사업으로 하고 있다. 앞으로도 문부과학성을 중심으로 해서 후생노동성, 경제산업성, 그리고 내각부 등 4개 중앙 부처는 지방 성청을 포함한 각종 NPO, 지역사회 모임 등과 연계하여 다각적인 방식으로 진로지도 확충 및 청년실업 해소대책을 마련할 것이다. 이를 반영하여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학교교육 내에서 진로교육을 강화하는 새로운 방안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진로교육 개혁안이 ‘직업훈련 인턴 십’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문부과학성은 고등학생의 직업교육을 강화하기 위하여 인턴 십 제도를 활성화하고 있다. 고등학생의 인턴 십 제도는 학생이 학습내용이나 장래 진로 등에 관련하여 취업 체험을 하는 것부터 자신의 직업적성이나 장래설계에 대해 설계할 좋은 기회로 할 수 있는 높은 교육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문부과학성은 진로교육을 통해 학교교육과 직업생활을 접속하는 과정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역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진로교육은 바람직한 직업관 및 근로관, 그리고 직업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며, 학생 스스로 개성을 이해하고 주체적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태도·능력을 기르는 교육이다. 그런 측면에서 진로교육은 학교와 사회, 그리고 학교 간에 원활하게 연계될 수 있는 조건을 우선 마련해야 성공할 수 있다. 앞으로도 일본은 소학교 단계부터 진로교육이 직접적으로 학생의 장래 생활을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활동이라는 것을 강조하게 될 것으로 본다. 이는 학교교육이 ‘교육과 노동’이라고 하는 이원화된 영역으로 본격 분화하게 됨을 예고하는 것이다.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권총 자살한 고흐 작품이 가장 비싸 정신분열증을 앓은 괴짜 수학 천재인 존 포브스 내쉬의 일생을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가 많은 영화 팬을 감동시켰다. 정신분열증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내쉬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것이었다. 낭만주의 시대 이후 천재를 정신질환자로 묘사하는 것은 문화적 유행이다. 〈뷰티풀 마인드〉도 어찌 보면 '천재 = 광기'라는 유행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지도 모른다. 광기 어린 천재의 작품은 '천재적 예술혼'의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다. 창의성과 예술은 곧 광기가 표출된 것이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광기의 화가'였던 반 고흐이다. 면도칼로 귀를 자르고 권총 자살한 반 고흐의 작품인 '해바라기'는 사상 최고가인 3992만 달러에 경매됐다. 전기 작가들은 아인슈타인의 아들, 제임스 조이스의 딸, 칼 융의 엄마가 정신분열증을 앓았고, 슈만, 포, 카프카, 비트겐슈타인, 뉴턴 심지어는 다윈과 패러데이도 비슷한 증세를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재의 정신질환은 신비화 전략 정말 천재와 정신질환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갈톤은 천재와 정신병의 관련성을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다윈처럼 훌륭한 과학자는 아니었다. 우생학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1869년 예술, 문학, 과학 분야 천재의 가족과 친척에게 정신질환이 많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실제 주인공 내쉬의 삶은 영화 속의 내쉬와는 크게 달랐다. 그 뒤에도 한편에서는 관련이 있다, 다른 편에서는 관련이 없다는 논문이 한 세기가 넘게 쏟아져 나와 논란이 계속돼 왔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자폐증 환자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과연 사실일까? 얼마 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심리학자인 샬로트 와델은 이 논란에 일침을 가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와델 교수는 20세기 들어 창의성과 정신분열증, 우울증의 관련성을 연구한 논문 29편을 분석해 '관련성은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분석한 논문 중 '15편은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고, 9편은 있다, 5편은 모른다'였다. 중요한 것은 논문의 숫자가 아니다. 대부분의 논문이 창의성과 정신질환을 모호하게 정의하고, 임의 추출법을 무시하고 연구 대상을 구미에 맡게 골랐다. 과학자들이 과학적 방법론을 무시한 것이다. 천재와 정신질환 관련성은 '과학적 증거'가 없는데도 책과 영화가 정신질환을 천재의 운명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 전기 작가, 언론은 대중의 관심을 더 끌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경우가 많다. 작가들 가운데는 조울증 때문에 좀 더 많은 것을 깊게 느낄 수 있었고, 더 강도 높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더 깊은 사랑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에밀 졸라는 15명의 심리학자를 불러 자신에게 약간의 신경증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 몸부림쳤다. 이런 식으로 정신질환을 천재의 운명으로 신비화하면서 정신질환이 창의성을 고양시킨다는 헛된 망상이 유포됐다. 문제는 이런 풍토가 자리 잡으면서 대부분의 정상적 천재가 연출된 괴짜 천재에 밀려 푸대접을 받는다는 점이다. '마음의 암'에 대한 대책 마련 시급 그렇다면 진짜 정신질환자들은 누구일까? 미국에서는 거리를 헤매는 거지, 즉 '홈리스'의 3분의 2가 정신분열증 환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노숙자의 절반이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정신질환자와 알코올 중독자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10%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인생은 이렇듯 '뷰티풀' 하지 않은 게 보통이다. 정신분열증은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그래서 '마음의 암'으로도 불린다. 정신분열증은 워낙 증상도 다양해 확실한 진단도 없는 실정이다. 증세가 심각하지만 어떤 정신병에도 속하지 않을 경우 의사들은 대개 정신분열증이라고 진단한다. 어느 나라나 보통 전체 인구의 1%가 정신분열증 환자다. 정신분열증은 대개 유전된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다른 사람과 현실 인식을 전혀 공유하지 못한 채 환상과 환청,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 영화에서 천재 수학자 내쉬는 약을 먹지 않고 정신분열증을 극복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 자연 회복되는 환자는 5명 중 1명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 〈레인맨〉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자폐증 환자의 역할을 인상 깊게 연기한 이후, 자폐증에 대한 관심도 부쩍 높아졌다. 톰 행크스가 열연한 〈포레스트 검프〉는 정신박약자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주인공에게만 초점을 맞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가족이나 친척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우리는 흔히 정신분열증 환자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분열증 환자는 대개 방에서 돌처럼 굳어서 소리 없이 몇 시간씩 웅크리고 사는 게 보통이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위험한 존재는 아니다. 자폐증 환자나 정신박약자도 더스틴 호프만과 톰 행크스의 연기에서처럼 착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거리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정신질환자가 보호 속에서 생활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증세가 심한 환자에 대해서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과 의사를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 이들이 노숙자와 거지가 되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를 타는 것과 다름없다.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평생의 인격 형성을 돕는 교육 명문 사립 성 베네딕트 학교에서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고대 문명사를 가르치고 있는 훈더트 선생(캐빈 클라인)은 교육이란 단순한 실용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아이들 평생의 인격을 형성하도록 돕는 중요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첫 시간에 '슈트럭 나훈테'라는 어느 정복자의 이야기를 통해, 아무리 많은 땅을 차지했을지라도 그에게 기릴만한 성품에서 말미암는 '업적'이 없다면 그것은 다만 세월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야만적인 약탈행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마디로 말해 세상에서 두각을 나타내려 하기 전에 먼저 바른 인간 됨됨이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의 가르침에 순종하지만 뒤늦게 수업에 합류하게 된 현직 상원의원의 아들 세드윅 벨은 특유의 반항적 기질로 사사건건 훈더트와 맞서려 한다. 헌신적인 교사와 문제아의 만남, 영화의 전반부는 교육소재 영화의 전형적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를테면 벨의 반항적인 태도가 일에만 분주한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말미암는다는 설정이나 이런 벨을 훈더트가 특별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펴 자발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등의 설정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헌신적인 교사를 통해 문제 학생의 삶과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식의 다소 상투적인 교육 성공담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던 영화는, 최우수 학생 선발을 위한 퀴즈 대회와 관련된 뜻밖의 상황에 부딪히면서 전혀 다른 흐름으로 전개된다. 퀴즈대회를 통해 벨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싶었던 훈더트는 자신의 손 때 묻은 책을 빌려주는 것은 물론, 대출이 불가능한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심지어는 작은 차이로 경쟁에서 탈락할 뻔 했던 그를 위해 약간의 가산점을 부여한다. 결국 벨은 최종 경쟁에 오르고 다른 2명과 함께 치열한 퀴즈 대결을 벌인다. 퀴즈를 진행하며 훈더트는 자신의 관심과 사랑에 의해 최고의 자리에 까지 오게 된 벨의 모습에서 뿌듯한 마음을 느낀다. 제자에게 안겨준 치명적 위기 그러나 그 순간 어려운 퀴즈를 풀 때 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벨의 우연찮은 행동을 통해 그가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퀴즈대회를 중단하려는 훈더트에게 교장 선생은 벨의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지원받아야 하므로 모른 척 계속 진행할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 않고 벨이 부정행위로는 결코 맞출 수 없는 문제를 출제해, 승리는 다른 학생의 몫으로 돌아간다. 퀴즈 대회가 끝난 후 훈더트는 혼란과 실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벨을 만나 묻는다. '대체 왜?' 그러자 벨은 도리어 반문한다. 자신의 부정행위를 알면서 왜 알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오히려 훈더트 쪽이었다. 그는 겉으로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었노라 말하지만 벨은 자신의 아버지를 의식한 것이 아니냐고 빈정거릴 따름이다. 이후 벨은 다시 반항아의 태도로 돌아가 졸업 때까지 그러한 모습을 일관한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존경할만한 선생님의 가장 큰 덕목이 바로 언행일치라고. 진리와 옮음을 외치는 그의 말과 행함이 일치할 때 비로소 학생들은, 자녀들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를 완벽히 이룬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훈더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통해 진정한 용기, 지식, 행동을 말하였지만 정작 벨을 야단쳐야 할 그 순간에는 교장과 그 자리에 참석해 있는 상원의원의 막강한 권력의 눈치를 살폈고, 결국 자리에서 침묵으로 일관했다. 벨은 그런 훈더트를 보았다. 더욱이 그는 벨의 이러한 지적을 얼버무리며 회피하였던 것이다. 그에게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 첫 번째는 부정행위를 알았던 바로 그 때 벨을 지적하고 그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동시에, 이로 인해 피해를 받은 학생들에게 정당한 권리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벨이 그의 침묵을 비난할 때 상황을 강변하기 보다는 솔직한 태도를 자신의 비겁함, 위선을 고백했어야 했다. 이미 지나가 버린 두 번의 기회는 벨에게 있어 치명적인 위기인 동시에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시발점이 될 수 있었다. 이렇듯 아이들은 보지 않는 것 같지만 분명히 보고 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단지 '말'뿐인지 아니면 생생한 '삶'인지를 말이다. 그러기에 성경을 기록한 어느 필자는 사람들에게 섣불리 '선생' 되기를 즐겨하지 말라고 권한다. 그렇게 힘겨운 자리가 바로 선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비인간적인 현실 속의 교육 벨과의 만남, 곧 실패한 교육을 통해 깊은 반성과 성찰의 과정을 가졌던 훈더트 선생은 올곧은 교사로 20여 년을 넘겨 학교에 봉직하며 이제는 교장의 자리에 임명될 날을 기다린다. 하지만 오직 학생들의 인격 성숙에 최고의 교육적 가치를 두었던 그는, 기능과 효용성 그리고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는 길을 선택한 학교 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교장 후보에서 탈락하고, 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평생을 교육에 헌신했던 훈더트가 직면한 비인간적인 현실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선 모습이 아니다. 이미 일선 교육현장에서 적지 않은 학부모들은 요구한다. 인격의 성숙보다는 좋은 대학, 좋은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력과 방법, 그것이 심지어 편법일지언정, 비결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라고 예외는 아니다. 본래의 의도가 어떠하든 '교육인적자원부'라는 교육 담당관청의 이름이 말해 주는 것은 이제 교육은 균형 잡힌 인격을 성숙시키는 전인교육의 장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인적자원으로서 아이들을 보다 세상에 효용성 있는 존재가 되도록 만드는 과정이라는 인상이다. 결국 탈락된 훈더트의 자리에는 많은 대학의 총장들이 존경받는 교육자들 보다는 투자유치와 경영 마인드를 앞세운 전현직 CEO들로 교체되듯, 자본의 논리와 처세에 능한 후배 교사가 임명된다. 실의에 빠져 있던 훈더트에게 불현듯 벨의 초대장이 날아온다. 동문들이 모여 다시 한 번 추억을 되살려 퀴즈대회를 하자는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만감이 교차하던 훈더트는 이제는 장성하여 사회의 기둥 같은 존재들이 된 제자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추억의 퀴즈대회를 진행하던 훈더트는 또다시 벨이 첨단기술을 동원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정신이 아득해져 옴을 느낀다. 벨이 주최한 동문회는 실상 그가 상원위원에 출마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기획된 자리였으며, 여기서 주목을 받기 위해 퀴즈대회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훈더트는 다시 한 번 뼈저린 후회를 느끼며 깊은 절망감에 빠진다. 실패한 교육을 통한 자아 발견 영화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사건으로서 교사 훈더트와 학생 벨의 관계는 〈엠퍼러스 클럽〉을 실패한 노(老)교사의 이야기로 보기에 충분한 빌미를 제공한다. 하지만 반전은 언제나 최후에 있는 법. 실의에 빠져 돌아간 그의 방 안에는 다른 모든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훈더트에게 진심어린 환영과 깊은 감사의 마음을 돌판에 새겨 전달한다. 비록 그가 한순간의 오판으로 말미암아 벨을 잃어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위해 포기한 적 없던 그의 진실한 사랑의 가르침은 훈더트 본인도 모르는 사이 더 많은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영화는 말한다. 뜨거운 가슴을 지닌 교사도 한 아이의 영혼을 잃어버린 실패한 교육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동시에 포기하지 않고 그런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평생의 애씀과 수고함으로 씨앗을 뿌리는 교사만이 진정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린 시절 6월은 붉은 달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담벼락 위엔 가시 돋친 빨간 장미들이 출렁였고, 교실에선 ‘멸공방첩’을 주제로 한 글쓰기 대회와 6·25 전쟁 관련 포스터며 표어 제작에 열을 올렸었습니다. 포스터에는 너나없이 전면에 빨간 도깨비 탈을 쓴 북한군의 모습을 그려 넣었었지요. 그때는 정말 북한 사람들의 얼굴엔 도깨비 뿔이 달려있는 줄로만 알았으니까요. 포스터의 영향이었는지, 6월 달력의 빨갛게 칠해진 6일은, 다른 공휴일보다 더 유난스레 빨갛게 보였었습니다. ‘청’ 군과 ‘백’ 군으로 나눠 싸우는 운동회가 봄, 가을로 빠짐없이 열렸음에도 그 시절 저는, 친구들 사이에서의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의미로 ‘빨간’ 색과 ‘파란’ 색을 주로 쓰곤 했었습니다. 나쁜 것은 무조건 ‘빨갱이’로 말하는 버릇도 생겼던 걸로 기억됩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공산당, 공산당은 나쁜 놈…. ‘빨갱이’란 말이 촌스럽게 느껴지던 80년대 말. 빨간색은 운동권을 상징하는 색이었습니다. 그 시절, 빨간색은 또다시 빨간색을 경계하는 층과 옹호하는 층으로 나누는 아픔의 색이었습니다. 87년 6월, 대학 교정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붉은 장미는 빨간색 머리띠를 두르고 ‘호헌철폐’를 외치는 함성에 의해 무수히 떨어져 갔습니다. 그리고 2002년 6월, 광화문 네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출렁였습니다. 어릴 때 무섭게만 여겨졌던 도깨비 모양을 얼굴에 그려 넣고, 빨간색 티셔츠를 다 같이 맞춰 입은 ‘붉은 악마’들이 거리거리마다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월드컵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거대한 함성 “코리아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너무나 강렬했던 빨간색의 물결.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가슴에 용솟음칠 젊은 피, 한마음 한뜻이 되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승리를 염원하던 함성의 색, 빨강. 이 강렬하고 순수한 색 속에 ‘흑백’ 논리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습니다. 깨끗한 피를 욕되게 하는 억압의 사슬도, 오해와 반목과 질시의 어두운 그늘도, 새로운 빨강의 물결에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이글거리는 여름 태양의 불꽃 같은 열정으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2006년 6월. 광화문과 시청 앞 거리는 또다시 열정의 붉은 물결이 넘쳐날 것입니다. 지난날 전쟁의 붉은 피로 물들었던 6월의 대한민국 산하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평화와 화해를 염원하는 축제의 붉은빛을 밝히며 전 세계를 향해 그 빛을 강렬히 발산할 것입니다. ‘붉은 악마’ 아니 ‘붉은 천사'들이 외치는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의 함성은 세상을 다시 한 번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어두웠던 우리 6월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는 ‘붉은 악마’. 그들이야말로 2002년에 이어 이번에도 월드컵 최고의 승리의 전사로 기억될 것입니다. | 한국교육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