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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몽골 대초원을 통일하다 12세기 후반까지 세계를 정복했던 몽골은 여진족의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지배 하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의 초원에도 통일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몽골의 역사서인 〈몽골비사〉를 보면 고구려를 건국한 또 하나의 세력이 몽골을 구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민족적 코드가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징기스칸을 '성길사한(成吉思汗)'이라 표기하고 있다. 징기스칸의 'Khan(칸)'은 '왕'이라는 뜻이니 '왕 중의 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의 원 이름은 보르지기드 부족의 테무진[鐵木眞]이었다. 그는 부족 간의 싸움에서 아버지(애수가이)를 여의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냈으나 먼저 자신의 부족을 통합하고 나서 케레이트족의 왕칸, 자무카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주변의 부족들을 차례차례 복속시켜 나갔으나 1188년 테무진이 부족의 수장이 되자 왕칸과 자무카는 등을 돌리게 된다. 이에 테무진은 케레이트족을 치고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킴으로써 1204년에 전 몽골을 통일하였고, 1206년 몽골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의 대칸으로 추대된 이후부터 '징기스칸'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렇게 몽골 전체를 장악한 징기스칸은 전쟁 준비를 서둘러 전통적 부족조직과 연합체를 해체시키고 '천호제'라는 군사 조직으로 개편하였다. 다시 말해서 몽골 전체를 병영화 했다는 말이다. 대내외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징기스칸은 진군의 명을 내려 서쪽으로 나가서 티베트인이 세운 서하를 압박하여 조공 약속을 받아내는 한편, 금나라을 치고 아예 내친 김에 그들의 본거지인 만주를 공략하였다. 이때 금이 의외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동반도의 거란족들이 대요수국을 세웠으나 징기스칸의 군대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왔다(1216년). 이렇게 고려 땅으로 도망쳐 들어온 거란족들은 한때 개경을 위협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고려의 김취려 장군 등에 의해서 강동성으로 내몰렸는데 그때 거란을 공격하던 몽골군이 고려에 합동 소탕작전을 제의함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1219년 고려와 몽골 사이에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궁금증이 낳은 서역 진출 징기스칸은 원래 서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금나라를 먼저 친 이유는 서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우선 지난날의 치욕도 갚고 후환도 없애 버린다는 일거양득의 속셈에서 나왔다. 징기스칸은 서역과의 교역을 원했으므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동·서 무역의 본거지를 손에 넣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다. 마침 징기스칸이 파견한 대상(隊商) 450여 명이 호라즘(Khorazm)에서 살해당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징기스칸은 이 사건을 구실로 병력 20만을 이끌고 1219년 호라즘 정벌에 나서 수도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였다. 호라즘은 중앙아시아 암 다리야 하류, 아랄 해 남방 지역으로 1077년부터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가 셀주크조를 대신하여 이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수도를 우르겐치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다. 호라즘을 정복한 징기스칸은 1225년 몽골로 귀환하여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준 다음, 계속 정복사업에 나섰지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서하 정복을 눈앞에 두고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원래 징기스칸은 영토 자체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정복사업을 벌인 것이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컸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이 궁금해서 못 견딜 정도였다. 서하를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투르크메니스탄·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 일대를 지배하던 서하는 우선 인종적으로도 몽골인과 다르다. 분명히 서역 저편에는 흥미로운 사람들이 흥미로운 생활을 하면서 몽골인의 흥미를 끄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다. 거란족, 여진족이나 송나라 사람들이나 고려인이나 얼굴 생김새가 비슷비슷하여 목욕탕에서 머리에 수건이라도 뒤집어쓰면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지만 서역인들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중앙아시아 초원 저편,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유럽 정벌에 나선 오고타이 당시 몽골의 주변국은 징기스칸이 죽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어 이제는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징기스칸이 죽자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정복사업을 계승하였는데, 그는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뜨는 정복 군주였다. 그는 부족연맹회의인 쿠릴타이를 열어 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을 국시로 선언하였다. 우선 오고타이는 제국의 수도를 현재 몽골 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의 서쪽 카라코룸으로 정하고 도로망을 정비하는 등, 제국의 기초가 되는 여러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내부적으로 어느 정도 여건이 갖추어졌다고 판단한 그는 쿠릴타이의 공약(징기스칸의 정복사업 계승)에 따라 정복사업에 나섰다. 그런데 오고타이는 정복사업에 나서기에 앞서 고려를 침공하였다. 1219년 양국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바가 있었으나, 당시 오고타이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는 바람에 고려는 난감한 입장에 빠져 있었다. 1231년(고종 18년) 오고타이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시 최 씨 무신정권하의 고려를 침략하여 개경을 포위하였고 고려 조정은 화의를 청하였다. 이를 수락한 몽골군이 서북면에 무려 72명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벼슬아치를 두고 철수하였다. 이는 몽골의 관리가 고려를 감독하겠다는 뜻이었다. 몽골이 먼저 고려를 친 이유는 그만큼 고려가 만만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려를 단속한 몽골은 본격적으로 금을 정벌하였다. 이 때 몽골의 요청으로 금나라 때문에 강남으로 쫓겨나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南宋)이 지난날의 복수를 한다고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이것은 남송의 명운이 다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만다. 1235년 오고타이는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자신의 야심을 추인해 줄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일찍이 징기스칸이 호라즘을 정복하였을 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심복 수부타이를 보내어 남 러시아를 정복케 한 바가 있었다. 오고타이는 유럽 원정을 위해서 전략에 뛰어난 조카 바투를 원정군의 총사령관, 수부타이를 부사령관으로 하는 몽골 대군단을 출정시켰다. 1236년 바투가 이끄는 유럽 원정군은 뛰어난 기동성을 최대로 발휘하여 볼가 강 상류의 킵차크, 러시아의 리아잔·블라디미르·로스토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카프카스와 키예프를 공략하였다. 무서운 몽골군을 피해서 킵차크와 러시아의 왕들이 헝가리로 도주하자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서 북으로는 폴란드, 남으로는 헝가리로 향하여 폴란드의 수도 크라코프를 함락시키고 독일 접경 슐레지엔까지 밀고 들어갔다. 위기에 빠진 유럽은 슐레지엔의 하인리히 2세의 지휘 하에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무서운 정복군단과 대결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결국 연합군은 패배하고 하인리히마저 전사하고 말았으며 헝가리 방면으로 진군한 몽골군은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여 쑥밭으로 만들고 바투 원정군은 1244년에 카라코룸으로 개선하였다. 이민족 최초의 중국 통일 당시 강남지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남송에 대해서 몽골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몽골 제국이 오고타이 칸국·차가타이 칸국·킵차크 칸국으로 분열되어 각기 독립하였다. 그때 징기스칸의 막내아들이었던 툴루이 가문은 영토가 원래의 몽골지역으로 한정되자 남송을 노리게 되었다. 몽골의 상속법으로는 막내아들이 가문의 재산을 상속하고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의 제4대 군주인 몽케칸(Mo..ngke Khan, 1251~1259)은 오고타이의 유럽원정 총사령관 바투의 지휘 하에서 전공을 세운 바 있는 인물로 그는 동생인 쿠빌라이에게 운남(雲南)·대리(大理)·티베트 등 남송의 주변국을 정복케 하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세력인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리고 다른 세력의 동진(東進)을 막기 위해 훌라구를 서역 페르시아 평정에 파견하여 일 칸국을 세웠다. 이후 몽케칸은 1258년 친히 남송을 치려했지만 1259년 진중에서 병으로 죽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쿠빌라이(Khubilai)가 대칸에 올랐다. 쿠빌라이는 이미 중국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융합을 꾀하였다.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1270년 국호를 원(元)이라 하고 대도(북경)를 수도로 삼음으로써 원나라의 건국자가 되었고 중국풍의 나라를 건설하였다. 1279년 남송을 멸망시키고 나아가서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는 서유럽 국가들과 세력이 미치지 않았던 인도·이집트·일본·동남아시아의 섬들 그리고 세력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몽골의 직할령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는 고려뿐이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식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았으나, 지방행정은 중국식 주현제(州縣制)를 따르지 않고 행성(行省)과 다루가치라는 몽골 특유의 제도를 시행하였다. 고려 삼별초의 대몽투쟁 한편 고려와 몽골의 강화로 몽골 황제의 입조(入朝) 요구에 따라 중국에 가 있었던 태자(나중에 원종이 됨)는 몽골 제국의 분열 이후 쿠빌라이를 택하여 조공을 바쳤다. 그 후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을 계기로 왕권강화를 위해 국왕이 직접 친조(親朝)하여 몽골과의 유대강화에 힘썼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당시 집권세력의 반발을 샀다. 당시의 실권자 임연(林衍, ?~1270)은 원종과 원나라 세조(쿠빌라이)와의 결탁에 반대하고 몽골과의 결전 의지를 다지면서 원종을 폐위시켰으나 몽골이 출병하겠다고 위협하자 원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해프닝을 벌였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열어 원종에 대해서 출두할 것을 요구하니, 두 번째로 원의 조정에 간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임연의 제거를 위한 병력파견을 요청하는 발언을 하였다. 원은 그와 함께 병력을 파견하였으나, 돌아오는 길에 임연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원종은 강화도로 사신을 보내어 삼별초의 개경환도를 명했다. 그러나 원종과 개경환도를 반대한 삼별초는 반정부, 반원투쟁을 선언하고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삼별초의 지휘자인 배중손(裵仲孫, ?~1271)은 강화도에 새로운 군주와 정권을 출범시키고 강화에서 진도로 옮겨가면서 대몽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271년 고려·몽골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삼별초는 본부를 제주도로 옮겨 자주 본토를 공격하면서 몽골에 대항했으나 3년 만에 진압되었다.
김동석 | 한국교총 정책교섭국장 Ⅰ. 교원평가 추진 과정 1. 교원평가 시발점과 시범운영까지의 과정 “교원평가”라는 용어가 인구에 회자되자 가장 반긴 집단은 교육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공교육 붕괴로 대변되는 교육현실에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과 불만을 일거에 교원에게 전가시킬 수 있는 좋은 호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이후 교원평가는 학교교육력 제고에 이르는 최고선으로 포장되고 언론과 학부모단체의 절대적 지지 속에 교육부의 교원평가 시범실시 및 후속조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교원평가 실시에 이르는 방법과 과정만 남아 있을 뿐 교육적 효과, 교원 전문성 신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 지, 교원평가의 궁극적 목표가 수업효과성이나 수업만족도 향상인지, 학생의 학업성취도 향상인지 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어 버렸다. 사실 교원평가시스템 개선 논의는 1964년 교육공무원승진규정이 제정된 이래 계속되어 왔다. 1995년 문민정부의 대통령자문 교육개혁위원회, 1998년 국민의 정부 대통령자문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 등에서 논의되다가, 1999년 교육발전 5개년계획 시안, 2001년 교육부 교직발전종합방안에서 제안되었다. 물론 위의 방안 및 시안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 학부모를 포함한 교원평가적 성격보다는 승진규정상의 개선․보완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후, 참여정부들어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원인사정책혁신방안의 하나로 검토되었으나 교원단체의 반발로 합의에는 이루지 못하였다. 2004년 2월 당시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사교육비경감대책의 일환으로 교원평가시스템을 도입하고 교원의 능력개발과 전문성 신장 지원을 위한 평가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교육계 안팎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교육부는 새로운 교원평가시스템 모형개발연구를 한국교육학회, 한국교육행정학회, 한국교육평가학회에 의뢰, 3개 학회는 새로운 교원평가방안을 마련하여 교육부에 제출되었다. 이 평가방안을 토대로 교육부는 교원평가제도 개선방안 공청회(1차, 2005. 5. 3)를 개최하려다 전교조의 물리적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후 교원평가와 둘러싼 교원단체와의 갈등으로 난항을 걷다 2005년 6월 20일, 김진표 교육부총리와 교원3단체장간에 정부, 교원단체, 학부모단체가 참여하는 ‘학교교육력제고를위한특별협의회’를 구성․합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협의회는 합의(9. 5)를 통해 부적격교사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육부가 합의안이 마련될 때까지 시범학교 선정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시범학교 48개교를 확정․발표(11. 7)함으로써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교육부는 19개교를 추가 지정하여 총67개교의 시범운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대해 한국교총 등 교원단체는 강도 높게 교육부의 행태를 비판하고 전국학교에 교육부의 졸속적 교원평가 시범운영 참여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김진표 교육부총리는 “선생님께 드리는 호소문(11. 24)을 통해 교원의 협조 당부와 함께 교원증원, 수업시수 법제화, 교원잡무 감축 등의 교육력 제고사업 추진을 약속하였다. 이런 가운데 한나라당 교육위원인 이주호의원은 학교별로 교원평가관리위원회 설치를 주요골자로 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하여(2005. 10. 21) 현재 국회 교육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2. 교원평가 시범운영 과정 및 결과 교육부의 67개교 시범운영 기간에 한국교총은 올해 시범학교 10개교 평가담당 교사, 교장, 교감을 대상으로 방문 면담조사를 실시하였다. 면담조사 결과 동료교사와 학부모와의 평가차이가 커 이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평가주체가 학생인 경우에는 장난 섞인 평가현상이 나타났으며, 수업개선과 교사개인의 선호여부에 대한 평가를 혼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학생지도에 엄격함을 요구하는 생활지도 담당 교사들의 학생평가가 낮게 나타나는 등 인기에 편중되는 평가결과가 나타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소규모학교의 경우 평가에 대한 객관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어, 이에 대한 대안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교육부는 48개 교원평가 시범학교 중간 점검 결과를 발표(2006. 3. 6)하여, 시범학교 교사 67%가 “수업 개선될 것”, 학부모 82%, 학생 73%가 긍정적으로 답변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교원단체는 정부의 전폭적인 행․재정적 지원에 따른 당연한 결과일 뿐, 평가방법, 신뢰도에 의문이 가며, 당위적 결론도출보다 문제점을 보완해야한다며 교육부의 긍정적 평가를 폄하하였다. 한국교총은 리서치 앤 리서치와 공동으로 시범학교 교원 756명을 대상으로 전화여론조사를 실시(2006. 8. 30 - 9. 5)하였는데 응답 교원의 93.8%의 교원이 “더욱 충분한 시범운영기간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평가 결과를 인사․보수에 반영치 말아야 한다“에 82.3%가 응답했다. 이에 따라 한국교총은 시범운영기간 연장을 통해, 교원평가 수정․보완해야 함을 주장했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은 교원평가 정책 포럼(교원평가제 시범 운영 결과와 개선방향)을 개최(2006. 9. 26)하여 2006년 3월부터 8월까지 시행되었던 2차 교원평가 67개교 시범학교 운영 결과를 발표하였다. 더불어 교육부는 보도 자료를 통해 시범학교 교사 73.9% “내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 학생 67.8%, 학부모 77.9% “수업과 학교 경영에 자신들 의견 반영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교총은 교원평가는 공정성 미확보, 소규모학교(10학급 미만, 3,455개교) 동료평가 현실성 결여, 연 1-2회 공개수업평가, 실효성 의문, 정부, 교원충원 등 교육여건개선 약속 이행 촉구 등의 이유를 들어 연내법제화 추진을 반대하고, 시범운영을 더 연장하여 문제점을 보완해야 함을 주장했다. 전교조는 교원평가의 반교육적 위험성, 시범학교 선정과 운영 과정에서 공정성과 객관성 부족, 시범운영기간이 너무 짧다는 점에서 교원평가제의 도입문제는 원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부는 한국교육개발원의 2차 시범실시 결과보고 이후 교원단체, 학부모단체, 교육전문가 등의 여론수렴을 듣는 차원에서 “교원능력개발평가 정책 추진 방행 공청회”를 개최(2006. 10. 20)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공청회 이전에 교육부가 보도자료를 통해 교원평가 시행을 사전 확정하고 공청회를 요식절차로 진행한다며 강력 반발, 공청회가 파행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육부는 공권력을 동원, 25명의 전교조 교사들은 연행, 이중 3명은 구속, 22명은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 공청회에서 교육부 시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원평가 → 교원능력개발평가(명칭 변경) ▲ 평가대상 : 국․공․사립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원(유치원교원,전문상담교사,사서교사,보건교사,영양교사 제외) ▲ 평가자 : 교장, 교감, 동료교사, 학생, 학부모 ▲평가영역 : 단위학교 평가관리위원회에서 정함(교사 : 수업계획, 수업실행, 수업평가, 교장, 교감 : 학교운영 전반) ▲ 평가주기 : 3년에 1회의 평가(본회 요구 수용) ▲ 평가방법(동료교사 : 평소관찰, 수업참관 등, 학부모 및 학생 : 설문조사 작성, 제출, * 학부모의 경우 초등3년까지는 학교경영만족도 조사, 초등4학년부터는 학급경영만족도 조사 형태로 참여) 이 같은 교원평가방안을 2007년도에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통한 법제화를 통해 2008년도 3월 1일부터 전국학교를 대상으로 단계적 확대하여 정착시킨다는 구상이다. 3. 교원평가 관련 각 교육주체의 입장 교원단체에 있어 한국교총과 전교조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즉, 한국교총은 전문직 교원단체로서 올바른 교원평가는 찬성하되, 충분한 시범운영과 문제점보완을 통해 졸속적인 교원평가가 아닌 올바른 교원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교조의 경우 교원평가가 가지고 있는 반교육적 문제점을 감안할 때, 교원평가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다만, 교원평가 이전에 학교교육력 제고를 위한 제반여건(교원증원, 수업시수법제화, 잡무감축 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양 교원단체가 공히 하고 있다. 교원평가의 교원평가에 대한 학부모단체 및 시민단체의 입장은 절대적 찬성이라는 기본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나아가, 교원평가를 통해 부적격교원 선별이 가능하게 하고, 보수, 인사에 반영되어야 하며, 평가를 3년 주기가 아니라 1년마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교육부의 시안에 대해 학교를사랑하는학부모모임은 허상뿐인 교원평가 법제화를 전면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반면 한국국공사립초․중․고교장회 회장인 배종학 교장은 교육부 공청회에서 원칙적으로 교원 평가에 동의하였고, 국민 모두가 열망하는 진정한 교원평가제도가 정착되어 평가로 검증된 우수한 교원이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Ⅱ. 교원평가의 과제 그간 교원단체는 마치 교원평가만 시행되면 학교의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교원 전문성 신장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착각, 공교육 불신과 붕괴의 원인을 교원으로만 돌리는 듯한 사회적 분위기를 경계하고 교원평가의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교육여건 개선 및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와 반면 교육부는 교원평가 2008년 실시를 위해 입법절차를 강행하려 할 것이다. 교육부는 1년도 안 되는 시범운영으로 단지 교원평가에 대한 이해도나 만족도 내지는 적응성이 높아졌다고 해서 교원평가 적용의 타당성이 확보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2006년 법제화 추진, 2007년 500개 선도학교 선정, 2008년 전국 학대 실시를 강행해서는 안 된다. 참여정부 임기 내에 성과주의나 한건주의식으로 교원평가를 무리하게 강행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교육현장에 돌아올 것이며, 이러한 우려는 영국이 교원평가제의 후유증으로 교직이 3D 업종으로 인식되어 교직 기피현상이 심화되자 러시아, 페루, 아프리카 등 55개에 이르는 국가에서 교사모집 공고를 내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한 것을 볼 때 이는 기우가 아님이 증명되고 있다. 대학교수의 경우 강의평가제가 도입되는데 5년여가 소요되었고, 성인인 대학생들마저 강의평가를 성의 없게 하는 태도가 문제가 되고 형식적인 운영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교원평가 도입은 교육여건, 평가의 문제점 보완, 인프라 구축 등 충분한 준비와 기간을 전제로 추진되어야함을 강조한다. 교육정책은 포퓰리즘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며, 교육 본질적으로 접근해야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진실을 교육부가 다시 한 번 인식해야 하며, 정부가 졸속적인 교원평가를 강행할 경우 이에 따른 혼란과 갈등은 고스란히 학교현장으로 돌아올 것이다.
변수란 | 일본 동경한국학교 파견 교사 “굿모닝”, “하이”. 매일 아침 이곳, 동경한국학교 교무실에서 필자가 원어민 선생님에게 건네는 유일한 말이다. 개학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났지만 아침 인사 내용은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영어책에서 배운 대로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등 세트로 짜인 영어 문장을 한 번 정도 써 먹은 뒤로는 더 할 말이 없게 된 것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일상사 혹은 학급 아이들 문제에 대해서 프리토킹을 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나, 문장을 어떻게 만들어 얘기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일쑤다. 그래서 겨우 인사말 정도만 하고 교실로 퇴장하는 신세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중학교부터 대학교 때까지 장장 10년이란 기간 동안 영어를 공부했으면서, 명색이 교사라는 사람이 영어로 얘기도 못하나 하고 말이다. 속으로 화가 나도 반박할 여지는 없다. 영어 회화 책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전자 사전을 두드려 가며 말을 할라 치면 왜 말을 못하겠는가마는 더듬더듬 대는 모습이 쑥스럽기도 하고, 어쩔 땐 초라해지기까지 해서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필자의 영어실력이 항상 제자리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비해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두 주 11시간씩을 원어민 선생님과 수업을 하는 이 학교 아이들의 영어 실력은 제법 상당하다.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원어민 선생님 앞에서 영어를 쓰는 데도 그다지 부끄럼이 없다. 우리나라 초등학교에 영어가 정규 교과 수업으로 도입된 지도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현재 3학년부터 시작되는 영어를 1학년부터 확대하고자 교육부는 올 2학기부터 시범학교 50곳을 선정, 발표한 바 있다. 교육부는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웠던 고등학생의 영어 실력이 초등학교 때 영어를 배우지 않은 학생보다 영어 실력이 월등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고 영어 교육의 조기 실시를 주장하고 있지만 찬반의 여론이 무성하다. 공립초, 정규교과로 영어 교육 안해 이런 논란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아직 공립 초등학교에서는 정규 교과로 영어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초등학교 영어교육 문제를 놓고 고심에 빠져 있다. 초등영어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자 당초 2005년 3월경에 초등학교 영어에 관한 방안을 내놓을 방침이었으나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아직 불투명한 상황에 있다. 영어를 도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정규 교과로서 가르칠 것인지’, ‘총합적 학습의 시간을 이용할 것인지’, ‘도덕과 같은 영역에서 다룰 것인지’ 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현재 일본도 정규 교과는 아니지만 총합학습의 시간에 ‘국제이해교육’ 혹은 ‘이문화 교육’으로서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학교의 영어활동 내용을 보면 가장 많은 것이 노래나 게임 등 영어를 즐기는 활동이며, 그 다음으로 간단한 영어 회화 연습이 들어 있다. 영어활동 연간 평균 실시시간 수를 보면 1학년은 8.0시간, 2학년은 8.1시간으로 월 1회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3학년은 12.4시간, 4학년은 12.7시간, 5학년은 13.2시간, 6학년은 13.7시간으로 월 1회 정도이다. 이 말은 결국 정규 교과목이 되어 주 1회 정도 실시한다고 했을 때는 대강 연간 35시간이나 필요하게 됨을 뜻한다. 현재 이 정도의 시간을 충족시키고 있는 학교는 전국 2만 3000교 가운데 1% 전후에 지나지 않고 있다. 주 5일제 수업 때문에 수업 시수가 부족한 가운데 영어까지 넣는다고 하면 또 다른 과목의 시수를 줄여야 할 것이며, 그런 만큼의 효과를 결과로서 내놓아야 하는 부담감 또한 생기는 것이다. 정규 교과가 되었을 때 부각되는 또 다른 문제 중의 하나가 ‘과연 누가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현재 영어활동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90%가 학급 담임이 지도하고 있다. 6학년만 놓고 봤을 때는 학급 담임이 92.6%, 영어지도 담당교사가 2.4%, 특별 시간 강사가 2.3% 정도 차지하고 있다. 학급 담임의 입장에서는 정규 교과로서 도입이 된다고 했을 때 적지 않은 부담이 될 것은 당연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영어 수업은 영어 전담 교사가 가르치고 있다. 중등 영어 교사 자격 소지자이거나 혹은 초등 교사 가운데서도 영어를 잘한다 하는 사람이 영어수업을 전담하고 있다. 물론 학교에 따라 사정이 다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그러한 관례를 따르고 있다. 만약 여기에서 1, 2학년까지 영어교육이 확대된다면 영어 전담 교사 수가 더 요구될 것이고, 학급 담임이 지도한다고 했을 때는 학급마다 수준의 차이가 생기게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일본의 경우 초등학교 영어교육에 관한 의식조사에서 약 70~80%의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영어 도입을 찬성하고 있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영어를 도입하면 영어 기술이 향상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주 1회 정도의 수업으로 영어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사실상 무리가 있다. 학부모 70~80% 초등 영어 도입 찬성 영어 조기 교육에 관한 이론이 무수한 상황에서 ‘신학습지도요령’의 초점의 하나인 초등학교에서의 영어 필수화에 대해 일본 문부과학성 대신은 9월 27일 “일본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외국어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어느 쪽의 의견이 타당한가는 단정 짓기 힘들지만 현재 영어가 국제어로 통용되고 있는 이상 영어교육을 어떤 방법으로든 실시해야 함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영어가 제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모든 교과를 제쳐 두고 영어 수업만 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시간 수가 확보된다고 해도 가르치는 교사의 실력이 형편없다면 백 날 해봐야 제자리걸음일 것은 뻔하다. 물론 예산이 풍부하여 원어민 교사를 학교에 몇 명씩 배치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서 혹은 취업을 위해서 영어가 필수가 되는 상황에서 영어에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목적의식’이 있고 ‘효과적인 학습 방법’을 선택하여 영어 학습을 꾸준히 한다면 누구라도 영어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한국이나 일본을 막론하고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어 학습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영어는 너무 어려워’, 혹은 ‘나는 영어로 말할 수 없어’ 등의 말을 하지 않도록 쉽고, 다양한 교재 개발과 아울러 효과적인 교수·학습 방법에 관한 연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장이 좀 어색하면 어떻고, 발음이 좀 서툴면 어떤가? 흔히 하는 말로 외국어를 할 때는 조금 뻔뻔스러워질 필요도 있다. 모국어가 아닌 이상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원어민 앞에서 더 이상 기죽을 이유도 없다. 영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우리보다 우수한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제 ‘문법이 틀리면 어쩌지’ 하며 불안해 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볼 작정이다. 내일은 ‘It’s a beautiful day’, ‘I like fall’, ‘How about you?’라고 말해서 깜짝 놀라게 해줘야겠다. 그런데 날씨가 흐리면 어떻게 하지?
최수룡 | 대전 버드내초 교사 누구든지 사는 것이 평탄치는 않겠지만 올해에는 유난히도 정신적 고통을 무척 많이 받아 힘들었다. 직장생활에서 승진포기라는 절망은 하루하루가 목적의식 없이 무의미한 생활을 하게 했다. 나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무능하다는 생각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모든 분들과 연락을 끊게 되었고, 모든 모임에 의도적으로 참석하지 않았다. 꼭꼭 마음을 가두어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생활이었다. 계속되는 이런 생활은 필자로 하여금 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했고, ‘못난이’라고 자학을 하게 되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학교에 출근해 학생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교재연구를 대충 하다가 퇴근하여, 저녁에 TV 드라마를 몇 편 보다가 지쳤을 때 잠을 자는 것의 연속이었다. 학교행사에서도 꼭 필요할때 외에는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직장동료 간에도 될 수 있으면 어울리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의도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이를 본 아내는 정신 좀 차리고 함께 산행이나 산책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항상 핑계를 대고 회피하였다. 번민으로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여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자게 되었으니 병에 걸려도 크게 걸린 것이었다. 이 병은 몇 년 전부터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1년에 두 번 치르는데, 3월 초와 9월 초 인사이동 시기다. 승진이나 영전을 하는 사람의 명단이 발표되면, 동료나 선후배 선생님들의 승진이나 영전에 대한 축하인사가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축하 인사를 하면 선생님 같은 분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먼저 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인사말이 이제는 해가 거듭 될수록 나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다가오기에 전화하기도, 하지 않기도 거북한 갈등으로 몸살을 치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번민의 시간이 한 두어 달 이상 거치게 되기에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3월 초에 대전시교육청에서 가진 교육혁신위원회의 승진규정 공청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주제 토론자 발표 후 참관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승진규정과 수석교사의 필요성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됐는데 참석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다. 이 내용이 한국교육신문 1면에 대서특필 돼 갑자기 전국의 교원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전국에서 격려 전화와 동감하는 분들의 이메일 등으로 신문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선생님들의 격려 메시지와 전화는 필자에게 자긍심과 용기를 북돋아 줬다. 그 후 필자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삶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문단에도 등단하여 수필가로 신인상을 받게 되었고, 7월부터 한교닷컴 e-리포터로 활동하면서 연 3회 베스트 리포터로 선정되었다. 필자의 글을 보고 인터넷 카페, 기업체 홈페이지, 종교단체 등에서도 청탁이 쏟아졌다. 글을 읽고 무명의 독자들이 보내주는 댓글은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찾게 하였다. 오로지 승진을 위한 삶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승진을 하지 않더라도 더불어 살면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음을 깨달은 것이다. 2006년에 우연히 필자에게 다가온 행복의 미소는 일생에서 가장 멋진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필자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글쓰기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2006년은 더욱 잊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직도 승진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이창희 | 서울 대방고 교사 오래전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아주 아끼던 후배교사가 있었다. 교원임용시험을 통하여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번째 세대였다는 것은 기억이 되는데, 정확히 몇 년 전이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첫 대면에서부터 서로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탓에 이후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풍기는 외모와 행동이 필자의 초임발령시절과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보다는 네 살 정도 아래였기에, 자연스럽게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학교에 온 지 1년여가 지났을 무렵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형님, 교사가 된 지 벌써 1년이 지났네요. 정말 빠르게 지난 것 같아요.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는지 모르겠네요. 봉급 열두 번 받았더니 어느새 1년이 지나 버렸네요.” “이 친구가 벌써 그것을 알아 버렸네. 조금 지나면 더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걸, 우리 지금부터 흐르는 시간을 멈추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해 볼까?” 그냥 웃고 지나쳤지만 그날 이후로 세월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 까라는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때 필자는 30대 중반을 넘어 막 후반으로 넘어간 직후였다. 집 근처에 자주 이용하는 약국이 있었다. 자주 가다 보니 약사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주고받을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부친이 교직에 몸담았었고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했다고 했다. 필자보다는 14~15년 정도 위의 연배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요즈음 세월이 정말 빠르다는 생각이 듭니다”라고 했더니 “아직은 잘 모를 것입니다. 40대가 되면 세월의 빠르기가 마라톤을 하는 것처럼 빨라집니다. 그것이 50대가 되면 100m 달리기로 바뀌게 되지요.” 두 경우를 생각해보니 정말 그 이야기들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교사는 봉급 열두 번 받으면 1년이 지나고 새로운 아이들 만나서 지내다 보면 또다시 봉급 열두 번 받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또 1년이 지나는 것이다. 또 몇 년이 흐르면 새로운 학교에서 다시 둥지를 틀게 된다. 요즈음에는 그 약사의 이야기가 더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아니 그가 이야기했던 마라톤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느껴진다. 벌써 100m 달리기에 돌입한 것 같다. 2006년에도 필자는 어처구니없게 ‘빠른 세월을 어떻게 잡아둘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다. 2006년뿐 아니라 매년 해온 생각이다. 아니 매년이 아니라 매달 해왔을지도 모른다.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르지만 생각은 계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2006년이 가기 전에 그 생각을 접게 됐다. 얼마 전에 그 후배교수와 전화통화를 했다. “어이, 김 교수, 교수되어서도 세월이 빠른가 모르겠네.” “말도 마십시오. 마라톤을 하네요. 벌써 40이 넘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마라톤’이라는 이야기는 약사가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후배도 40대에는 마라톤 하는 기분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형님, 이제는 세월이 왜 빠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붙잡는 일 포기해야 할까 봐요. 그냥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아, 필자도 이제 결론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과의 숨바꼭질은 이쯤에서 접어야 할 것 같다. 오늘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세월을 잡기 위한 몸부림보다 그 세월을 즐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일까.
변종만 | 충북 청원 문의초 교사 2006년에 우연히 필자에게 다가온 행복의 미소는 일생에서 가장 멋진 삶의 이정표가 되었다. 필자의 취미와 적성에 맞는 글쓰기를 하면서 즐겁게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2006년은 더욱 잊지 못한다. 노랑과 빨강의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아름다운 이 가을에 아직도 승진에 얽매어서 헤어나지 못하였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10월 중순경이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 감독을 맡아 6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요즘 아이들이 평가에 관심이 부족한 것을 알지만 혹시라도 긴장하는 아이가 있을까봐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신경을 썼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필자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어왔다. 그중 하나가 ‘선생님은 뭐가 좋아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느냐’는 것이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최고 학년인데도 철부지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이 던진 뜻밖의 질문이었지만 마음속의 다짐까지 꿰뚫어본 관찰력이 대견스러웠다. 한편 낙천적으로 사는 모습이 아이들 눈에 좋게 보였다는 것도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똑같은 사물을 보거나 사건을 접하더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긍정적으로 보면 다 좋게 보이던 것도 부정적으로 보는 순간 다 나쁘게 보이는 게 순리다. 그러니 바보가 아니라면 굳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살 이유가 없다. 필자가 보내는 메일에는 ‘삶을 아름답게 하면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집니다’라는 서명이 함께한다. 누가 만들어 줄 때를 기다리면서 불평만 하면 멀리 달아나는 게 행복이다. 항상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주변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고 작은 것에도 만족해하면서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 삶이 바로 행복이다. 필자가 살아가고 있는 방법을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얘기해 주는 것으로 질문에 대해 답변했다. 아이들의 표정이 덩달아 환해지며 고개를 끄덕인다. 짧은 시간에 얼마나 가르칠 수 있으랴만 긍정적으로 즐겁게 사는 게 더 좋다는 것만은 이해한 분위기였다. 우리 반 아이들이 필자를 바라보는 눈도 6학년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냥 아이들이 좋아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다. 친근감을 느끼도록 편안하게 대하면서 아이들과 가깝게 지냈더니 부모님들까지 필자를 신뢰한다. 학교와 교사를 믿고 따르니 참교육은 부수적으로 이뤄진다. 사회에서는 교사가 무릎을 꿇게 하는 사태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잘못을 질타했었다. 하지만 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반의 부모님들이 보여줬다. 10월 초 이웃 반 선생님의 돈을 탐낸 아이들이 있어 급히 부모님을 학교로 불렀다. 부모님들에게 자초지종과 함께 사후처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해주자 다음날 바로 이웃 반 선생님을 찾아가 아이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비록 무릎은 꿇었지만 가슴 뭉클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누가 욕할 것인가? 교사라면 누구나 아이들에게서 행복을 찾는다. 그중에서도 담임을 맡은 아이들이 1년 동안 잘 따르면서 속 썩이지 않고, 말썽부리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좋은 방향으로 생활태도가 변하고, 소외감을 느끼던 아이들이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게 가장 큰 보람일 것이다. 그러니 올 한해 필자는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라는 좁은 울타리에서 생활하는 게 교사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직장의 분위기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 교직원 간에 마음을 터놓고 생활할 수 있다. 이왕이면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데 앞장서려고 노력했다. 누구라도 말 한마디만 꺼내면 회식을 비롯해 직원들과 어울리는 자리를 만들었다. 모든 것이 순리적으로 처리되니 직원들끼리 얼굴 붉힐 일도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방학 동안에는 학교에 출근한 직원들끼리 밥을 직접 지어먹으면서까지 동료애를 나누도록 만들었다. 2006년을 되돌아보면 아이들이나 직원들과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찾아내며 더 즐거워했던 한해였다.
이영관 | 경기 수원 제일중 교감 필자에게 2006년은 한마디로 격동의 해였다. 3월 1일, 2년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 거주지 가까운 곳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출근 시간이 20분에서 5분으로 바뀌었다. 학교에 볼 일이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가도 된다. 태어난 고향에서 물리적 공간이 가까워지니 마음도 편안해지고 학교에 애정이 더해지는 기회가 되었다. 4월 27일에는 교육칼럼집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1년여 넘게 ‘한교닷컴’에 쓴 기사 정수(精髓)를 모으고 평상시 쓴 글을 주제별로 모으니 번듯한 한 권의 책이 되었다. 하나의 창작품을 만든다는 것, 개인사에 큰 족적이 아니던가? 한편 이 날 참석한 100여 분의 축하 속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평상시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는 인생 공부를 하였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 덕분이었을까?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됐다는 소식은 필자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평생 잊지 못할 ‘연수의 꽃’이라는 교장 자격연수도 했다. 시·도 연수 1주일에 이어 6월 19일부터 교원대에서 5주간의 연수가 있었다. 과제물 제출, 논술고사, 분임장 활동 등 그 바쁜 와중에 연수 과정 기록으로 수백 장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여 한교닷컴에 관련 기사를 쓰고, 교육토론회에 출연하여 ‘교장 공모제의 허상과 음모는?’을 자신 있게 발표하였다. e-리포터 활동이 이론적 배경, 논리적 근거 제공에 크게 도움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수료식 때 전국의 600여 연수생들에게 나누어 준 ‘이영관 한교닷컴 e-리포터의 초·중등 교장 자격연수 기사 모음집’은 교원대 관계자로부터 20년 교장 자격연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과찬을 받았다. 7월 30일,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러시아와 중국에 산재하여 있는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39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탐방하였다. 연해주 신한촌기념비, 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 이상설 선생 유허지, 단지동맹비, 대성중학교, 윤동주 생가, 백두산 천지, 여순 감옥 등을 돌아보며 그 당시 애국선열들의 애국심에 고개를 숙이면서 국가와 민족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9월 1일, 전임 교장선생님이 정년 퇴임하시고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그러고 보니 교감 3년차 동안 네 분의 교장 선생님을 모신 셈이 된다. 2년차, 신규, 7년차, 3년차 교장선생님들이다. 그분들로부터 배울 점도 많고 ‘내가 교장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바람직한 학교장 리더십이 무엇인가’를 깊이 연구 중이다. 10월 9일, 62시간의 특수교육 장학과정 직무연수. ‘특수·통합학급의 장학 및 지원’이라는 연수 주제는 이 분야에 익숙치 않은 필자에게 세상과 인간을 보는 눈을 바꿔 주었다. 그리고 인생관, 가치관을 재점검해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그밖에 도교육청의 기획홍보 장학관 공모에 도전하여 실패의 쓴잔을 마셨지만 역량의 부족을 더 채우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경기교육인터넷방송 기획팀장으로 활동하여 교육 콘텐츠 제작 방향을 제시하고 경기도교육청 방과 후 학교 장학자료 팀장으로 활동하여 뜻을 같이하는 경기도 내 선생님들과 함께 어울리며 작은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또 경기교육자원봉사협의회 산하 서호사랑 팀장 역할로 학생들에게 애향심을 기르며 자원봉사활동의 즐거움을 익히게 하니 토요일도 바쁘기만 하다. 그리고 3년 전부터 시작된 대학 동기 인터넷 카페지기 활동은 친목도모와 교육정보 공유는 물론 정기적인 모임의 활성화로 이어져 구성원이 만족해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교직생활 30년. 이렇게 흥분했던 해가 또 있을까 싶다. 정말 잊지 못할 2006년이다.
조은경 | 전주 근영중 교사 누구나 이맘때 한 해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서면 아쉬운 점들과 기뻤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오를 것이다. 교육계는 급격한 사회 변화와 함께 공교육의 난항과 교육 개혁, 교권 회복을 위한 대책마련 및 자성의 목소리가 컸었다. 공교육 담당자의 입장에서 통감하는 바이며 개인적으로도 올해 유난히 학생들에게 역사와 국제이해 부분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하면서 무엇이 올바르고 적절한 것인지 고민하는 때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항상 넓은 시야, 다양한 경험 그리고 열린 마음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물은 흘러야 생명력을 유지하듯이 교육의 방향 역시 변화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6년 대외적으로는 한·일 공동수업, 한·중·일 평화교재실천교류회, 북경 역사회, 국제이해학회 참가 등 분주하고 귀한 경험과 배움을 하였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박물관 체험 교실’과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CCAP)’을 운영하며 학생들과 함께 실천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 시간들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봄, 가을에 일본의 역사 교사와 전통문화 전공 교수를 초청하여 공동 수업을 하였는데 3월 말에는 요코하마의 스즈키 선생님과 함께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 오오가와 쓰네기치를 주제로 수업을 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참 진지했다. 그네들이 한국뿐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을 지녔다는 사실이 학생들에게 전달됐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면 이처럼 학생들의 마음이 열린다. 10월 중순에는 미야모토 교수와 다도(茶道)를 시연하면서 평화와 화해를 이끌어보았다. 다른 나라의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서로를 위한 이해와 배려로부터 우호관계가 성립되고 아시아의 긍정적 미래를 얘기할 수 있었다는 게 보람 있었다. 평화교재실천교류 참가는 올해 4회째인데, 처음으로 중국까지 동참해 동아시아 3국 회의가 된 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남’에서 서로를 ‘앎’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1회 때부터 발표 및 토론자로 참가하며 느낀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만남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그릇된 역사 인식과 역사 교육에 관한 좋은 의견이 도출되고 일치하는 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회(역사) 교과와 창의적 재량 활동시간에 국제이해교육을 담당하고 있어 시간 나는 대로 다문화에 대해 학생들과 대화를 한다. 현재 국제결혼이 증가하면서 국제결혼가정 아동들의 증가가 두드러지고 있다. 따라서 다문화 이해 교육은 당연히 교육현장의 과제다. 대화의 전제는 무엇보다도 인권의 소중함을 자각하는 일이다.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인간에 대한 애정을 느낀 학생들 맘이 열린 것처럼 다문화 교육과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많이 만나고 얘기하는 것이다. ‘외국인과 함께하는 문화교실’ 운영에서는 각국의 지식인들이 학생들과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는데 상당히 효과가 있었다. 더불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 체험교실’을 전주 국립박물관과 연계하여 실천하였는데 가능한 한 지속하고 싶다. 분주하다면 분주하였다고 할 수 있었던 올 한해!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다. 교육이란 학생들이 건전한 몸과 마음으로 미래 사회를 선도하며 행복한 삶을 꾸리게 하는 데 그 진정한 목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한번 가르친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다. 좀 더 자 자신을 돌아보고 그 중요한 사명감을 맡은 이상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어떤 즐거움을 향유하며 상생(相生)을 동감하며 학교에, 나의 수업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장옥순 | 전남 마량초 교사 올해로 교직에 첫발을 디딘 날지 26년이 됐다. 첫 부임지도 바닷가 학교였는데 올해 찾아온 이 학교도 운동장 너머로 출렁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이제 보니 저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편안하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 150일이었다. 마량항에서 완도 고금도를 향해 건너가는 여객선을 2층의 우리 반 교실에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우리 반 20명 개구쟁이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 부스러기들을 하나씩 주워 담아 청소를 하며 혼자서 실실 웃는 시간이 늘어나는 오후 시간의 즐거움. 며칠 전, 알림장을 제때에 쓰지 않고 영찬이와 쫑알대며 장난치는 승현이에게, “그렇게 늦게까지 알림장을 안 쓰면 선생님이 뽀뽀를 해버릴 거야! 선생님이 볼에 뽀뽀를 하면 장가도 못 가요”했더니, 승현이가 얼른 대꾸를 하였다. “그럼, 선생님한테 장가가면 되지요.” 뭐라고? 선생님은 이미 시집을 갔고 너무 늙었는데?” 그러자, 이번에는 영찬이가 말대꾸를 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은 하나도 안 늙었어요.” 그것뿐이 아니다. 밥을 늦게 먹는 강이와 아영이의 식사 지도를 하고 교실에 들어오니 유림이와 고은이는 “선생님, 사랑해요”를 써 넣은 쪽지 그림과 편지를 몰래 넣어두고 갔다. 아직도 나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연인처럼 아이들이 던지는 사랑의 밀어에 코끝이 찡해지는 철없는 선생이다. 필자는 이 선생의 자리를 오래도록 아끼고 사랑하고 감사하며 살아왔다. 그 사랑이 잠시 흔들렸던 2006년의 아픈 기억을 이제는 담담히 반추해 낼 수 있게 되었다. 고학년 담임교사 20여 년의 경험이 무색할 만큼 1학년 아이들에게 적응하지 못해서 좌절하고, 다시 ‘교육학’ 공부를 하기 위해 퇴근 후 도서관에 출근하며 이론과 현장을 접목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 증후군) 아이들과 특수교육 대상 아동이 함께 사는 교실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마저 느낄 수 없었던 1학기를 보내면서 몇 번이나 포기를 생각했던 아픈 상처들이 이제는 진주가 되어 20개의 보석을 만들어가고 있으니, 이제는 마음 놓고 2학년으로 올려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다행이다. 이른 아침이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발소리 줄여가며 책을 보는 귀여운 모습, 별점을 많이 올려서 더 좋은 선물을 받으려고, 모둠장이 되려고 자신을 통제하고 바람직한 생활태도를 습관들이는 모습, 이제는 글쓰기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 의젓해진 모습, 읽기 책 속에 나오는 동화들을 까만 눈 반짝이며 줄줄 외우며 드러낸 앞니 빠진 모습들은 한 볼때기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예쁘기만 하다. 싸우고 소리 지르고 다쳐서 단 1분도 교실을 비울 수 없어 전전긍긍 했던 지난 일들을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라는 울타리에 처음 들어온 나의 꼬마 고객들에게서 학교에 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소리를 듣는 요즈음, 나도 행복한 교단일기를 써서 종업식 날 아이들 품에 안겨 줄 숙제를 하고 있다. 교단일기를 20명의 어린 왕자들이 읽고 즐거워할 것을 상상하니 나도 행복하다. 아직도 필자에게 아이들을 향한 처음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 우리 반 아이들은 나의 스승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자는 자신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다.”고 한 아미엘의 말처럼 아이들의 아름다운 변모를 글로 노래할 수 있었던 2006년의 한복판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내 생애의 어린 왕자들이니 그들이 남긴 사랑의 언어를 기록으로 남겨 2006년을 가득 채우리라.
박준용 | 한양대 강사, 문화평론가 영화 같은 실제 교사의 고군분투 사람들은 어떤 극적인 사건을 접할 때 흔히 '이건 마치 영화 같은데!'라고 말한다. 하지만 살다보면 극적인 사건을 가상하여 만든 영화보다 현실이 더 극적일 때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새삼 놀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 가 다룬 1999년 미국 리치몬드 고등학교의 체육관 폐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농구부 코치 '겐 카터'가 학생들의 성적 미달을 이유로 당시 연전연승하고 있던 팀의 훈련은 물론 경기까지 포기하고, 아예 체육관마저 폐쇄시켰다. 낙후된 지역에서 유일한 성공의 희망을 농구에서 발견해 왔던 선수들은 물론 그들의 부모, 그리고 이들의 승리에 고무되어 있던 지역 주민들은 당연히 이 극단적 조치에 격렬히 항의하는 등 일대 물의가 빚어지게 되었고, 이 사건은 언론에 의해 집중적인 조명을 받게 된다. 영화 는 연전연패하던 쇠락의 빛이 역력한 리치몬드 고교에 카터가 부임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처음 학교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선수들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농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최소한 C정도의 성적 이상을 올리고 수업에 들어가 앞자리에 앉으며, 시합에 나갈 때 셔츠와 타이를 착용하라는 것이다.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카터의 탁월한 리더십과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훈련은 오합지졸과 같았던 농구팀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고, 이후 경기에서 연승행진을 계속한다. 가망 없는 선수들, 천재적인 교사의 헌신적 노력 그리고 성공과 승리라는 다소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맥락을 따르던 영화는 선수들 대부분이 형편없는 학업 성적을 올리면서 전형의 궤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경기에서의 승패와 관계없이 계약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자 카터는 망설임 없이 체육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선수이기 이전에 학생인 아이들에게 농구 연습 못지않은 강도의 집중적인 학습을 요구한다. 그는 이러한 결정을 극단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말한다. 만약 아이들이 자신이 정한 이 간단한 규칙조차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들은 결국 그 어떠한 규범이나 질서도 존중하지 않는 이들로 전락할 것이라고…. 그래서 결국 그런 주위의 무수한 범죄자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동시에 카터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생들에게 인생에는 농구 이상의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하며, 노력하는 자는 누구나 그 가능성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단이 아닌 가능성을 위한 교육 흔히 교육을 전인교육이라 한다. 온전한 교육이란 단지 인성의 일부분이나 혹은 가능성 있는 특정 기능만을 훈련하고 발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말 그대로 생각과 마음 그리고 의지 모두가 온전한 성장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부분을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전인교육'의 기치가 허공에 외치는 소리처럼 여겨진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오직 대학 입시만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교육의 문제점은 수십 년 전부터 지적되어 왔지만 여전히 해결의 기미를 찾아 볼 수 없다. 작은 전쟁터로 변한 교육 현장에서 교육의 세 주체, 곧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는 모두 오직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목과 방법론에만 매달리고 있거나, 혹은 매달리기를 요구받고 있다. 리치몬드 고교 농구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오직 농구만 잘하기를, 그래서 경기에 승리하여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해 주기를 열광적으로 바란다. 관객들은 어린 농구 선수들의 성적이나 이들의 보다 먼 미래 삶에 있을 가능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이겨주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아이의 생각과 정서와 의지가 어떻게 발달하든 말든 일단 좋은 대학에 어떻게든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코치 카터는 이를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 농구는 수단일 뿐이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하나의 작은 조건 말이다. 그는 아이들이 단지 농구만 아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닌 스스로 사고하고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할 줄 아는, 그래서 농구 이상의 가능성으로 삶을 가득 채워가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기를 바랐다. 이런 이유로 카터는 선수들에게 공부할 것을 요구한다. 읽고 쓰고 보고 듣고 말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학 진학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의 생각의 폭과 깊이를 더하게 함으로써 종국에는 참된 자신감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코치 카터는 몸소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농구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것이 필요했듯이 우리의 공부만하는 아이들에게는 농구가, 음악과 연극이, 영화와 미술, 철학과 문학이 절실하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오직 물질적 성공과 출세만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공부를 단순히 이런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만드는 사회의 미래는 참담할 뿐 아니라 암울하다. 얼마 전 인문학 관련 학과 교수들을 중심으로 최근 사회 전반에 걸친 인문학에 대한 '홀대와 무관심'이 결국 진정한 의미나 가치의 토대 없이 다만 물신숭배로 점철되어 가는 한국 사회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 이것이 어찌 대학만의 위기요, 문제이겠는가? 갈등을 신뢰와 사랑으로 극복하다 그러나 목적이야 어떠했든 코치 카터의 교육방식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해 보인다. 자신의 지시에 대한 작은 불이행이나 거부에도 팔 굽혀펴기 500회, 좌우 달리기 1000회를 거침없이 부과한다. 따르지 않는 선수는 가차 없이 팀에서 제외하거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벌칙을 내린다. 반발과 저항은 예견된 것이었고, 과정 중 몇몇 선수가 팀을 박차고 나가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카터의 극단적인 요구를 끝내 선수 자신들은 물론 그들의 학부모 그리고 동료 교사들이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그의 방법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 곧 충분히 타당한 근거와 분명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는 점과 무엇보다 학생들을 전인적인 차원에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카터에게 있어 체벌이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저지르거나 선택한 어떤 결정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생략한다면 사회 진출을 앞두고 있는 아이들은 자신이 내뱉는 말 한마디, 매순간 행동하고 선택하는 것들이 삶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코치 카터의 훈계 방식은 종종 체벌을 비롯한 훈계와 관련하여 학생, 학부모, 교사 사이에 종종 긴장과 갈등이 파생되곤 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곧 학생 훈육에 있어 본질적인 승패는 체벌의 형식이나 강도와 같은 외적인 부분보다는 학생과 교사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어 있느냐 하는 내적인 부분으로 말미암는다는 점이다. 단단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있는 사제지간이라면 경우에 따라 코치 카터가 사용한 것 이상의 엄격한 훈계 방식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사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사랑의 매'가 아니라 학생 자신이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매'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러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체벌은 고사하고, 야단치는 몇 마디 말만으로도 학생의 마음에 깊은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영화는 행복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비록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대회에서 아쉽게 패배함으로써 연승행진에 종지부를 찍지만, 이후 코치 카터의 바람대로 선수들 가운데 10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여러 유수의 대학에 진학해 농구는 물론 의대나 경영 등 다양한 전공 영역에 진출하는 등의 쾌거를 이룬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행복한 결말이 영화 속이 아닌 지난 2004년 실제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인생은 때로 영화보다 극적이다. *영화 정보* 제목 : 코치 카터(coach carter) 감독 : 토머스 카터 출연 : 사무엘 L. 잭슨, 롭 브라운 제작년도 : 2005년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무성영화 시대의 대표작 '모던 타임스'를 보면 찰리 채플린의 표정과 손동작만 봐도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말소리가 전혀 없는 작품인데도 요즘 영화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것은 채플린이 표정과 손동작 같은 제스처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의 70%는 제스처 제스처는 세계 공용어다. 채플린 영화는 번역 없이 세계 어디서나 인기를 끈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우리는 채플린처럼 할 수 있다. 대개 세계 어디서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긍정의 표시이고, 좌우로 흔드는 것은 부정의 뜻이다. 또 이빨을 드러내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은 적대적 공격 의사다. 악수는 우정과 협조를 상징한다. 말과 글이 있으니 제스처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구에 따르면 지금도 동일 언어의 문화권에서는 의사소통 중 30%만 말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70%는 비언어적 행동, 즉 제스처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인간의 말도 수화와 같은 제스처로부터 진화했다는 이론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손동작이 말할 때 단어를 빨리 떠올리게 도와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 쓰는 뇌의 영역이 보통 사람이 말을 할 때 쓰는 영역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이 이론의 지지자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인 침팬지는 매우 다양한 수화를 구사할 줄 안다. 미국 네바다 대학 연구팀은 1970년대에 침팬지 '와쇼'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와쇼는 한 연구원과 132단어의 수화를 주고받았다. 마침내 짖는 소리만 듣고도 개를 지칭할 수 있을 정도로 수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와쇼는 사람이 간섭하지 않아도 새끼에게 수화를 가르쳤다. 손의 진화로 음성 언어 탄생 과학자들은 인류가 직립을 하게 되면서 손이 자유로워져 제스처 언어를 많이 쓰게 됐고, 이런 의사소통 기술의 발전이 뇌를 발달시키면서 결국 고급 음성 언어가 탄생했다고 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의대 신경학자 프랭크 윌슨 박사가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윌슨 박사는 〈더 핸드 : 손의 사용이 어떻게 뇌, 언어, 인간 문화를 만들었나〉에서 "손의 진화가 뇌 용량을 급속히 팽창시켰고 이 과정에서 언어를 처리하는 부분이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손짓과 미분화된 말로 의사소통을 하다가 발성 기관이 진화하면서 말이 언어 행위를 도맡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고급 음성 언어가 생기는 데에는 발성 기관의 획기적인 발전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언어학자인 촘스키나 그의 후계자인 매사추세츠 공대의 스티븐 핑커는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언어를 탄생시켰다고 보고 있다. 성대가 갑자기 돌연변이에 의해 변화하더라도 이것을 구동할 수 있는 뇌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현생인류는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제스처를 통해 뇌의 언어중추를 발달시켰고 이어 목이 길어지고 고성능 성대를 갖게 되면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한 언어 치료사는 아기가 멍청한 것 같지만 6개월 정도면 마치 농아처럼 사인 언어나 제스처를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아기는 더 줘, 먹을래, 밀크, 아파, 졸려, 도와줘 등 50개의 사인 언어를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아기에게도 제스처는 뇌의 언어중추를 단련하는 걸음마인 셈이다. 수화도 언어중추가 담당해 연설을 하면서 이 가운데 적절한 단어를 골라 문법에 맞춰 말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입만 놀리며 말하는 것보다 손동작을 하면서 말을 하면 놀랍게도 단어를 빨리 찾게 된다. 이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손으로 표현하는 것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단어 찾기 퀴즈를 해보면 손으로 막대를 잡은 사람은 손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에게 질 확률이 높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늘 손을 힘차게 흔들면서 연설을 했다. 그는 훌륭한 연설 솜씨로 대통령이 됐지만 만일 그의 손을 꽁꽁 묶어 놓고 연설을 시키면 말을 더듬을지도 모른다. 아이가 왼손을 쓴다고 해서 강제로 오른손을 쓰게 하면 말을 더듬는 것도 손동작과 언어는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동안 많은 과학자들이 수화는 왼 뇌에 의존하는 말과 달리 시각·공간적 언어여서 오른 뇌가 담당할 것이라고 추측해 왔다. 음성 언어는 음의 청각적 시간적 변화에 의해 기호화되지만, 수화는 손이나 몸짓의 신호에 따른 시각적 공간적 변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화도 말처럼 언어중추가 담당한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캐나다 맥길 대학 심리학과 로라 안 패티토 교수팀은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도 정상인이 말을 주고받을 때처럼 언어중추가 활동을 한다는 연구 결과를 2000년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청각 장애인이 수화를 할 때와 정상인이 언어활동을 할 때 뇌 속의 피의 흐름을 양전자방출단층촬영법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청각 장애인과 정상인 모두 왼 뇌의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의 혈액의 흐름이 왕성했다.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은 사람의 뇌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중추이다. 뇌의 언어중추가 말하고 듣기뿐만 아니라 제스처도 관장한다는 것은 제스처와 언어의 뿌리가 근본적으로는 같다는 것을 말해 준다. 브로카 영역은 말을 할 때 문법에 맞게 적절한 단어를 찾아내 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언어 처리의 핵심 장소이고 베르니케 영역은 귀로 들은 말을 이해하는 일을 한다. 뇌의 언어중추인 이 두 영역은 19세기부터 뇌가 손상돼 실어증에 걸린 환자들을 관찰하면서 의사들이 발견한 곳이다.〈끝〉 이번 호를 끝으로 '과학교실'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신문수 화백의 '도루묵 선생'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도루묵 선생'을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