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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근자에 들어 공무원 장외투쟁 가운데 규모가 큰 것을 꼽는다면 1998년 11월 서울 여의도 한강둔치에서 열린 ‘교원정년단축 반대 전국교육자 총궐기대회’가 아닌가 싶다. 7만여 명도 더 되는 교원들이 차가운 땅바닥에 앉아 초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쿠데타적 정년단축 철회’를 외쳤다. 교원들의 처연하기까지 한 공분(公憤)이 표출됐지만 언론은 짐짓 이를 외면했다. 조선일보에 사진 한 장 달랑 실린 것이 전부인 것으로 기억된다. 신문․방송은 연일 ‘노령교사 1명을 퇴출하면 젊은 교사 2.5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앵무새 같은 보도를 내보냈다. IMF사태로 경제는 파탄 나고 실업자가 넘쳐나는 때에 이보다 더 확실한 여론몰이는 없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 심리를 부추긴 행태는 교육계의 어떠한 논리와 주장도 먹혀들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당시 이해찬 장관과 교육부 고위관료들의 언론플레이가 무용담처럼 넘쳐나기도 했다. 교육계는 대패(大敗)했고 정년은 3년이나 싹둑 잘려나갔다. 물론 교단을 뒤로한 교원들 대신 젊은 교사가 2.5배로 충원되지도 않았다. 정년단축의 결과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우리 교단을 황폐화시켰으며 지금까지도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새삼 아픈 기억을 더듬는 것은 ‘공무원 연금 개혁’을 둘러싼 작금의 논쟁이 교원 정년단축 때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공적(公敵)의 범위가 공무원 모두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른바 개혁 논리부터 보자. 한 신문에 실린 찬성론자의 주장이다. “국민연금에 비해 ‘덜 내고 더 많이 받아오던’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과의 형평을 고려하여 수급액을 낮추겠다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공무원은 너나 할 것 없이 어려운 이 시기에 정년이 보장된 안정된 직업이라는 하나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청춘을 바쳐 공무원 시험에 매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공무원들의 집단이기주의는 안 된다.” 다음은 개혁에 저항(?)하는 한 공무원의 반론. “국민연금 대상자는 월 소득액의 4.5%를 납부하지만 공무원은 8.5%를 내고 있다. 그래도 연금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어 공무원들은 전혀 고통분담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먼저 연금 부실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정부가 공무원의 동의 없이 쓴 7조 원의 기금을 메우고 또한 그간의 공로보상을 어떻게 할지 납득할 만한 대책을 세운 후 대화에 응해야 한다.” 논지의 요약에 한계가 있을 수 있으나 핵심은 이런 것이다. 국민들 입장에서야 손해 볼 것 하나 없는데 반갑지 않을 리 없다. 게다가 공무원연금의 엄청난 적자를 국민세금으로 보전해 줘야 한다는 말까지 더해지면 공무원의 논리는 맥을 출 수 없게 된다. 이 정부의 주특기인 ‘편 가르기’가 마침내 공무원과 국민을 나누고 있다. 교원과 국민이 나눠졌던 시기를 생각하면 섬뜩한 기분마저 든다.
500년 전에 도입된 ‘윈-윈’ 전략 오늘날 기업경영에서 금과옥조처럼 강조되는 ‘윈-윈(win-win)’ 전략은 이미 500년 전에 우리 선조들의 자녀교육에서 강조되었다. 수백 년 전 선조들은 삶의 주도적인 원리로 ‘상호 이익을 도모하라’는 인간관계 기술의 핵심원리를 가르쳐왔던 것이다. 이는 조선 최초의 ‘여중군자(女中君子)’를 며느리로 두었던 운악 이함 가문의 ‘지고 밑져라’라는 가풍에서 대표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는 ‘대접 받고 싶거든 먼저 대접을 하라(마태복음 7장 12절)’는 성경구절을 연상케 한다. 이 구절은 세계 최대 부자들을 배출한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에서 고전으로 통하는 바로 그 율법이다. 삼보컴퓨터를 창업한 이용태 박사(박약회 회장, 퇴계학연구소 이사장)는 이 가문의 17대 종손이다.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당시 어린 손자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과 사귀거나 일을 할 때는 네가 지고 밑져야 한다”고 반복해서 가르쳤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흔히 “남을 밟아야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데 이 박사의 할아버지는 그와 정반대로 가르쳤던 것이다. 이 박사는 ‘지고 밑져라’ 가풍을 기업 경영에 적용해 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알려진 대로 이 박사는 한때 학원재벌로 통하기도 했다. 1970년에 동업자와 함께 학원을 개업했는데 몇 차례 위기를 겪다 급기야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놓였다. 그는 궁리 끝에 동업자에게 “학원을 계속 운영하려면 추가 증자를 하거나 빚을 얻어야 한다. 이 빚은 모두 내가 책임지겠다”는 단안을 내렸다. 이 같은 결정에는 “남과 더불어 일할 때는 희생하고 손해도 볼 줄 알아야 결국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할아버지의 교훈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자 동업자는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그가 하는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분위기가 싹텄다. 결국 학원은 크게 성공해 장안의 명문으로 떠올랐다. 이 박사는 80년대에 삼보컴퓨터를 우리나라 IT업계의 선두주자로 일구었지만 자금난을 겪다 경영에서 손을 떼야만했다. 이 역시 역설적으로 ‘지고 밑져라’ 가풍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3대에 걸쳐 영남 대표하는 학자 배출 재령 이씨 운악 이함(영해파, 1554~1632) 가문은 석계 이시명(1590~1674)이라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운악 종가는 의령현감을 지낸 이함에 이어 석계 이시명갈암 이현일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대학자를 배출해 영남의 명문가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이들은 영남에서 높은 벼슬보다 더 존경받는 대유학자로 우뚝 섰다. 운악 이함은 56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특이한 이력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운악의 며느리인 정부인 장씨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문열의 소설 〈선택〉에는 운악 이함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운악은 임진왜란으로 왜구가 침공하자 집의 창고를 풀어 굶주린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수 물자를 조달하는데 앞장섰다고 한다.“공이 창고를 풀어 기민(飢民)을 먹인다는 소문이 나자 부황난 사람들이 문간이 비좁도록 몰려들었다. 또 물자를 명군에 조달했다. 그 공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되자 나라가 어려울 때 세운 작은 공로에 의지해 벼슬살이하는 걸 구차하게 여기신 공은 마흔일곱의 연세도 늦다 아니하시고 과거에 응하셨다. 그만큼 당신의 학문에 대한 믿음도 있으셨을 것이다…(중략)… 복시(覆試)를 당당히 지나신 공은 선조 임금께서 친히 임하시는 전시(殿試)에 이르러서도 막힘이 없었다. 정대(庭對, 대과의 최종 시험인 전시에서 답하는 책문)의 말을 올리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고 곧아서 감탄한 시관(試官)이 장원으로 뽑고 임금께 올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책문을 보신 선조가 공이 장자의 말을 인용했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빼게 하고 파직까지 명하셨다. 그 뒤 여러 해 공은 벼슬 없이 지냈으나 선조 36년에 다시 대신의 추천이 있어 의령현감으로 나가셨다. 그러다가 선조가 돌아가시자 공은 다시 한 번 과장(科場)을 찾으셨다. 광해군 원년 공은 쉰여섯의 연치(年齒)로 문과에 급제(합격)하시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공은 벼슬살이가 싫어지셨고 광해조의 난정이 조짐을 드러내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오셨다.”(89~95쪽) 운악은 선조 때 장자의 말을 인용해 과거시험에 불합격된 토정 이지함처럼 그 역시 불합격 당한 것이다. 선조는 장자를 무척 싫어한 것 같다. 당시 선조는 “유교경전에도 인용할 말이 많은데 어찌 장자의 밝지 못한 내용을 인용하느냐”며 토정을 불합격시킨 적이 있었는데 운악 역시 토정과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운악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무려 56살에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해 합격했다. 이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녀교육에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운악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시험에 다시 도전한 것이 아니라 선조에 의해 억울하게 낙방했기에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편이자 자녀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 다시 과거에 나섰을 것이다. 조선 최초로 ‘여중군자’ 칭호 받아 석계는 운악의 셋째 아들로 퇴계의 정통 학맥을 이은 인물인데, 병자호란 때 나라가 치욕을 당하자 경북 영양 석보에 은거하며 살았다. 이 가문은 석계에 이어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 등 3대에 걸쳐 퇴계학맥을 잇는 학자를 배출하면서 영남의 명가로 우뚝 서게 된다. 여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석계의 부인인 정부인 장씨(1598~1680, 아들인 갈암 이현일이 대사헌과 이조판서를 지내 정부인의 품계를 받음)가 회자되고 있다. 계모로 들어와 전처소생의 1남2녀 등 모두 7남3녀를 키운 장씨는 효행, 학문, 예술 등을 고루 갖춰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상은이 쓴 〈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이란 책 서문에도 정부인 장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모범적이요 대표적인 부인 한 분을 말하라 하면, 두말없이 율곡선생의 어머님 사임당 신씨 부인을 내세울 것이요, 혹시 어진 어머니를 말하라 하면, 저 신라 때 김유신의 어머니 만월(萬月), 또 어버이에게 효도한 여성을 헤아린다면 신라 때 지은(知恩), 그리고 다시 학문이 높고 시문에 능한 부인을 찾는다면 고구려의 여옥(麗玉), 글씨를 잘 쓰시었던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따님 장씨 같은 이들을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장씨는 퇴계 학맥을 이은 경당의 외동딸로 아버지에게 〈소학〉 등을 배워 시문과 경사에 능했다. 그렇지만 여성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던 장씨는 집안에서 그 역할을 찾았다. 특히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 있던 석계에게 후진양성에 힘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자칫 산촌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석계는 부인의 내조에 힘입어 학자로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자녀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장씨는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손자 등 4대에 걸쳐 정통 퇴계학맥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소설가 이문열은 바로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의 12대손이다. 그는 에서 이문열 자신을 있게 한 장씨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 자신의 재주 숨긴 채 명문가 이뤄 장씨는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중군자’ 소리를 들었던 여성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이름도 불려주지 않았던 여성에게 그들의 이상형인 군자 칭호를 부여한 것은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가문경영에 일가를 이룬 장씨를 현대 기업경영에서 보자면 최고의 인재를 키워낸 뛰어난 ‘인재전략 컨설턴트’로 금녀의 벽을 뛰어넘은 최초의 여성 CEO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인 장씨는 문화관광부에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고 자녀 교육에 귀감을 보였다며 ‘이달의 문화인물(1999년 11월)’로 선정하기도 했다. 장씨의 아버지 경당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의 학맥을 잇는 유학자로 장씨를 직접 가르쳤다. 무남독녀로 부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장씨는 남자로 태어났다면 입신양명에 나설 자질을 지녔다고 한다. 경당이 자신의 집에서 가르친 제자 중의 하나가 석계 이시명이었는데, 경당은 그를 훗날 사위로 삼은 것이다. 이시명은 당시 27세로 남매를 둔 홀아비였는데, 경당은 이 제자에게 19살 외동딸을 재취부인(再娶夫人)으로 시집보냈던 것이다. 석계의 자녀들 중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은 외조부인 경당에게서 배워 퇴계 학맥을 이었다. 장씨는 병자호란으로 수치를 당하고 벼슬에서 물러난 남편에게 “공께서 세상을 버리고 숨으셨으니 마땅히 시와 예로써 자손들을 가르치셔야 하는데 어찌 세월을 그냥 보내십니까? 아이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고 예의를 익히게 하여 앞날을 밝히시고 뒤를 열어주는 일을 어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말을 듣고 후학들을 힘써 지도했다. 남편과 자식을 통해 여성인 자신이 이루지 못한 길, 즉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기르는 일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장씨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칭찬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고 시를 지어 손자를 칭찬하기도 했다. 장씨는 자신의 재주를 숨긴 채, 한 가정의 평범한 가정주부면서도 자녀들을 대학자로 키웠다. 그렇지만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한다는 소리가 있지만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선행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기뻐하여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퇴계의 학문을 잇는 부친의 가르침을 받은 장씨 역시 과거시험 공부보다 〈소학〉의 본질을 하나라도 몸소 실천하기를 더 바랐던 것이다. 퇴계의 가르침대로 장씨 역시 근본이 없으면 학문이나 재력, 명성 모두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공부보다 먼저 행동거지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다. 재물이 아닌 의리 중시하는 교육 장씨도 요즘 어머니들처럼 같은 고민을 했다. 요즘 대부분 어머니들은 행여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아이의 행실이 잘못되어도 꾸짖지 않는다. 그렇지만 장씨는 먼저 아이에게 존귀한 것이 있음을 먼저 가르치고, 이어 아이의 기상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이의 기를 꺾을까봐 과잉보호에 나서면 결국 버릇없는 아이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아이의 기상을 기른다는 것은 그 꿈을 다듬고 북돋아주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의 젊은 어머니들을 보면 그 둘을 모두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존귀한 것이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기를 죽이는 것으로 잘못 알아 겁나는 것이 없는 아이를 길러놓는다. 아이의 욕구를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이의 꿈을 키워주는 것으로 믿어 절제할 줄 모르고 참을성 없는 심성을 부추긴다. 그래서 겁나는 것 없고 욕구를 절제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공공의 장소에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며 소란을 떨고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데도 제 아이 기 살아 있는 것만 좋다고 웃는다. 기껏 나쁜 버릇만 길러놓고 기상을 길렀다고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164~165쪽) 장씨는 또 아이들에게 재물을 쫓다보면 인간관계를 해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는 오늘날 강조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이 몸을 가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게 재물이나 물고기는 향기로운 미끼 때문에 죽고 선비의 아름다운 이름은 재물로 상한다. 재물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떠나서는 값이 없다. 남이 모두 넉넉할 때 내 재물이 많은 것은 자랑과 여유가 되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짐은 재앙일 뿐이다. 남이 모두 굶는데 홀로 가득한 곳간은 마침내 화를 부르는 문이 될 뿐이니 너희는 그 이치를 알아 재물을 대하도록 하라. 의리는 무거운 것이고 재물은 가벼운 것이니, 재물은 지금 없다 하더라도 뒷날에 다시 생겨날 수 있으나 의리는 한번 깨어지면 되살리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취하는가.”(168~169쪽) 운악의 셋째 아들인 석계는 부인 장씨의 자녀교육에 힘입어 다시 일가를 이루어 분가를 하게 된다. 현재 운악 가문은 이용태 삼보창업자가 종손이고, 분가한 석계 가문은 이돈(李燉)씨가 13대 종손으로 일가를 이루어오고 있다. 석계가의 종가도 석계가 태어난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가 아니라 그가 은거했던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후손인 이문열이 세운 광산문학관이 있다. 수많은 명문가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가문의 토대를 쌓는 이른바 ‘가문주식회사의 CEO’의 존재 여부이다. 가부장적 신분사회에서 대부분 명문가의 경우 그 역할을 남성이 맡았다. 하지만 남성중심의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여성들이 주역 못지않은 조연역할을 했다. 정부인 장씨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창밖에 소소히 내리는 빗소리 / 소소한 그 소리 자연의 소리(窓外雨蕭蕭 / 蕭蕭自然)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 내 마음도 자연 그대로 일세(我聞自然聲 / 我心易自然) 이 시로 인해 정부인 장씨는 후대인에게 ‘부인 중에서 현명한 유학자(閨閤中賢儒)’라는 평가를 받았다. 즉, 여중군자라는 것이다. 또 장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요리책을 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1673년에 요리책 〈음식지미방(飮食知味方)〉을 썼다. 이미 10살 때 ‘소소음(蕭蕭吟)’이란 시를 쓴 정부인 장씨는 요즘으로 보면 요리에 정통한 전업주부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시인이자 자녀교육의 CEO였던 것이다.
김경원 | 저자 [문제] 괄호 안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을 고르시오. 1. 허구헌 날 밥그릇 (다툼만/싸움만) 허고 앉아 있는 놈들 좀 보게. 2. 갑돌이와 갑순이는 늘 1, 2등을 (다투는/싸우는) 라이벌이다. 3. 개 두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다투는/싸우는) 장면이 볼만했다. 4. 그 친구는 말로 (다퉈서는/싸워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다. 5. 고래 (다툼/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풀이] ‘다투다’는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 매일같이, 아니 시시각각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부딪히며 다투거나 싸우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다. 그런데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인 것은 왜일까? 그리고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인 까닭은? 또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것은 어째서일까? 실로 ‘다툼’과 ‘싸움’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먼저 ‘다투다’는 의견이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서로 따지며 옥신각신한다는 뜻이다.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아이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다투다”, “돈 문제로 집안 사람들끼리 심하게 다투었다” 등에서 ‘다투다’는 어떤 사안과 관련해 상대를 누르고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행동인데, 다행스럽게도 이때 이기고자 하는 의지는 ‘말’로만 나타난다. 즉, ‘다투다’는 상대의 감정을 언짢게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말로 시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니 말을 할 줄 모르는 동물들은 ‘싸우기는’ 해도 ‘다투지는’ 못한다고 봐야겠다. 한편 ‘싸우다’는 사람이나 동물이 힘이나 무기를 써서 상대를 공격하여 이기고자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때 ‘무기’에는 ‘말’이라는 수단도 들어간다. 따라서 ‘친구와 싸운다’나 ‘칼로 싸운다’ 같은 용례와 더불어 ‘말로 싸운다’는 표현도 성립한다. ‘다투다’ 안에는 이미 말로 치고받는다는 전제가 들어 있으므로 ‘말로 다툰다’는 표현은 어색할 수밖에 없으나 복합어로서 ‘말다툼’이나 ‘말싸움’은 모두 훌륭하게 성립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이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은 힘이 센 놈들끼리 싸우는데 뜻하지 않게 사이에 끼여 애꿎은 피해를 입는 경우를 뜻한다. 필자는 어릴 때 이 속담을 들은 뒤로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와 곧잘 헷갈렸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고래 싸움’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제대로 그리지 못했던 듯싶다. 고래 두 마리가 거대한 몸집을 서로 부딪쳐 싸우면서 바닷속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장면을 생동감 있게 상상했더라면 그런 혼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래들이 벌이는 수중 소동이야말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3자인 새우를 피해자로 만드는 원인일 테니 말이다. 여기서 조금 장난기를 발동해서 ‘고래 다툼’을 떠올려보자. 두 마리 고래 사이에서 끼이끼이 하며 고성(?)이 왔다갔다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흥분한 다혈질 고래라면 삿대질도 하고 몸부림도 칠 터이니 바닷속이 꽤나 시끄럽고 물살이 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말만 왔다갔다하는 시비인 바에야 새우 등이 터지는 비극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다. 물론 ‘다툼’이 ‘싸움’으로 번지면 새우의 안존이 위태로워질 터이니 눈치빠른 새우라면 몸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으리라. 이렇게 ‘고래 싸움’이냐 ‘고래 다툼’이냐에 따라 새우의 등은 무사할 수도 있고 터질 수도 있으니, 여기에 ‘다툼’과 ‘싸움’의 큰 차이가 있다. ‘다툼’보다 ‘싸움’의 규모가 크다 이렇게 새우 등이 터지느냐 마느냐 하는 절실한 문제에서 충분히 알아챌 수 있듯이, 어쨌거나 말로 싸우는 편이 물리적인 완력으로 싸우는 것보다는 덜 격렬하다. 물론 한마디로 상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독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력 자체만 따져보건대, 아무리 심한 말이라도 상대를 땅바닥에 쓰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투다’와 ‘싸우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수단의 차이는 겨루는 주체들이 누구냐 하는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투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일대일로 벌어지는 대립이나 갈등을 나타내는 데 비해 ‘싸우다’는 나라와 나라, 아군과 적군, 관군과 의병처럼 집단과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큰 규모의 대결을 가리키기도 하는 것이다. 즉 “이라크와 미국이 싸운다”, “죽창을 들고 적과 싸웠다” 할 때 ‘싸움’은 ‘전쟁’이나 ‘전투’와 동의어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갈등이 표현되는 격렬함의 정도에서도 두 낱말 사이에 차이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죽자사자 ‘다툰다’고 한들 ‘싸움’이 발산하는 격렬함에 비하면 약과일 따름이다. ‘싸움’의 대상이 더 고차원적이다 ‘다투다’가 주로 개인들 사이에서 사적이고 일시적인 사안을 두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의견 대립을 의미하는 데 비해 ‘싸우다’는 윤리적인 견해나 정치적 입장을 둘러싸고 공적으로 혹은 장기적으로 대립하는 경우를 포함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다투다’는 감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때로는 좀스러운 갈등이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싸우다’는 갈등의 면모가 거창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는데다 때로는 정신적 분투나 내면적 투쟁처럼 추상적인 차원까지 아우르는 어감이 있다. 그래서 ‘싸우다’에는 가난, 굶주림, 고통, 죽음, 병마, 추위, 유혹, 자신 같은 추상적인 대상에 맞서 그것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거나 시련을 참아낸다는 뜻이 들어 있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맞이한 군대는 살인적인 추위와 싸워야 했다”, “자유는 피 흘려 싸워야 얻을 수 있다” 등이 모두 이런 경우다. ‘다투다’와 ‘싸우다’는 공격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다투다’가 상대를 제압해서 쓰러뜨리려고 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 초점을 두는 데 비해 ‘싸우다’는 기필코 자신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싸우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자기 발아래 상대의 무릎을 꿇려야 하니,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의 오기와 승부욕이 따라붙을 수 밖에 없다. 목표가 초점이면 ‘다툼,’ 상대가 초점이면 ‘싸움’ 앞에서 왜 ‘권력싸움’이 아니라 ‘권력다툼’이며 왜 ‘파벌다툼’이 아니라 ‘파벌싸움’이냐는 질문을 던졌었다. ‘다투다’는 남보다 앞서거나 상대를 이기기 위해 서로 겨루되, 어디까지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긍정적인 뜻이 강하다. 즉 ‘권력을 다투다’, ‘왕권을 다투다’, ‘수석을 다투다’, ‘우승을 다투다’, ‘선두를 다투다’, ‘앞을 다투다’, ‘주도권을 다투다’ 등에서 ‘다투다’는 상대를 꺾어 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권력, 왕권, 수석, 우승, 선두, 앞,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따라서 ‘다툼’이나 ‘싸움’이 따라붙는 복합어의 경우에 앞에 오는 말이 어떤 목표를 제시하는 것일 때에는 응당 ‘다툼’이 되어야 한다. 이런 뜻을 좀 넓힐 때 ‘시간을 다툰다’는 관용 표현을 얻을 수 있다. “한시를 다투는 긴급한 출동”, “1분 1초를 다투는 위급한 수술”에서처럼 짧은 시간이라도 되도록 아끼려고 애쓸 때 ‘다툰다’고 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목표가 초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다. “고도의 정확성을 다투는 기술”, “1mm를 다투는 정밀성”같이 아주 미세한 차이로 성패가 갈릴 때 ‘다툰다’는 말을 쓰는 것도 똑같은 맥락에서다. 한편 ‘싸움’의 경우에는 대결의 상대가 표면으로 떠오른다. “최선을 다해 싸운 경기였다”, “강한 팀을 맞아 힘겹게 싸웠다”에서 ‘다투다’가 아니라 ‘싸우다’가 쓰인 까닭은 승리라는 목표 자체보다는 상대를 염두에 둔 전투적 대결의식과 승부욕에 초점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차이점이 또 하나 있다. ‘다투다’는 엇비슷한 힘을 소유한 이들끼리 대등한 관계에서 갈등하는 것인 데 비해 ‘싸우다’는 힘이나 실력에서 우위에 있는 상대와 대결하는 경우에 쓰인다는 것이다.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인 까닭 그렇다면 목표가 앞에 제시되어 있는 ‘밥그릇싸움’의 경우에는 왜 ‘밥그릇다툼’이 아닌 걸까? 그 까닭은 ‘밥그릇’이 단순히 먹을 것이나 이익을 비유했다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이권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밥그릇싸움’이라는 말에는 정당하지 못한 목표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사람들에 대한 윤리적 비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다툼’ 앞에는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목표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밥그릇’과 달리 긍정적인 대상인데 어째서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인 걸까? 여기서는 ‘사랑’이 쟁취의 대상이 아니라 갈등의 주체라는 데 열쇠가 있다. 즉 ‘사랑싸움’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서로 부딪치며 갈등을 빚고 있는 상황을 나타낸다. 이렇게 대결의 주체가 앞에 붙었기 때문에 ‘사랑다툼’이 아니라 ‘사랑싸움’이 된 것이다. ‘소싸움’, ‘닭싸움’에서 ‘소’와 ‘닭’이 대결의 주체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부싸움’이다. ‘부부다툼’이면 좋았을 것을, 왜 하필 ‘부부싸움’이 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해답은 부부라는 갈등의 주체가 전면에 등장하고 또 ‘상대’가 초점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아무리 부부라도 일단 ‘싸움’을 벌인 이상 우열을 가리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다투다’가 그저 남보다 더 잘하고자 하는 것이어서 상대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않는 데 비해 전투성과 공격성을 전제로 하는 ‘싸우다’에서는 진 쪽이 쓰라린 피해를 입게 되어 있다. 따라서 ‘부부다툼’이 아니라 ‘부부싸움’이 된 까닭은 무릇 이런 갈등이 상대의 가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히기 마련이어서인지도 모른다. 실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속담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요약] 다투다 ∙개인들 사이의 일대일 대립만을 가리킴 ∙말이 주요 수단 ∙대등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 경쟁, 비교적 일상적인 대립 싸우다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대결을 두루 가리킴 ∙말보다는 힘이나 무기가 주요한 수단 ∙제압을 목적으로 한 격렬한 대립 [답] 1. 싸움만 2. 다투는 3.싸우는 4.싸워서는 5.싸움
변수란 | 일본 동경한국학교 파견교사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수업이 끝난 후 학급 아이들을 잠시 남게 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임선생님이 남으라고 하면 야단맞는 일을 제외하고는 다들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보충 학습을 위해서 혹은 교실 청소를 위해서 반 아이들을 남게 하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게 되었다. 잠시 남으라는 말에 되돌아오는 첫 마디가 “저, 학원가야 하는데요”다. 그래서 요즘은 청소도 수업이 끝나고 하기가 힘들다. 한 분단에 열 명이나 되건만 청소를 할 수 있는 아이는 고작 한두 명이다. 거짓말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현 상황이 그렇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특기적성교육은 수업이 끝난 후 바로 시작이 되고, 개인적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학교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좀처럼 나질 않는다. 청소야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미리 해둘 수도 있다지만 보충 학습(보습)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남기를 꺼려하는 것에는 씁쓸함마저 느끼게 된다. 입시 전쟁을 비롯한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 등 비정상적 교육열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중·고교의 입학시험이 있는 일본의 경우 학원 수강에 있어서는 한국을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제법 오래된 통계이기는 하나 93년에 실시된 구 문부성의 조사에 의하면 500만 명이나 되는 초·중학생이 학원에 다닌다고 나와 있다. 컴퓨터다, 영어다 해서 배울 것이 더욱더 많아진 지금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숫자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왜 이렇게 학원이 날이 갈수록 강성해져 가는 것일까? 일본의 교육행정학회장으로 있는 유우키 마코토씨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그 첫째는 진학과 학력 획득을 위한 경쟁, 둘째 학원을 통한 학교교육의 보상, 셋째는 최근 높아지고 있는 사립 중·고교 지향을 들고 있다. 사립 중·고교로의 진학률이 높은 지역일수록 학원에 다니는 비율이 현저히 높게 나와 있다. 일본의 한 일간지에서 얼마 전 ‘학원의 존립 여부’에 관한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응답자 6344명 가운데 약 80%가 학원은 ‘학력 향상을 위해서 있는 것이 좋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초·중학생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학원에 보내는 이유’에 대해 조사한 결과 ‘중·고교 수험을 위해서’라는 답변이 2135명 응답자 가운데 약 60%로 가장 많았고,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해서’, ‘학교 수업을 따라 가기 위해서’, ‘기타’가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또한 ‘다니고 있는 학원의 종류’에서는 ‘진학 학원’, ‘보습 학원’, ‘기타’의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여 복수 회답을 가능하게 한 결과 응답자 1920명 가운데 ‘진학 학원’이 65%, ‘보습 학원’이 25.2%, ‘기타’가 16.1% 순으로 나타났다. 교재비 등을 포함한 학원비 지출액 조사에서는 3만 엔 이상이라고 답한 응답자 비율이 30%를 넘어서고 있다. 위 여론 조사의 결과처럼 평소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 위해 다니는 보습 학원보다 입시를 위해 다니는 진학 학원 수강률이 몇 배나 더 높은 것은 사립이나 이름 있는 중·고교로 입학 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부터 진학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적이다.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보호자의 의식에는 공립학교의 전반적 분위기에는 만족하고 있으나 수업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는 부족함이 많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보호자들의 이런 생각은 근본적으로 학교의 기능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학교는 원래 지·덕·체 3요소를 아우르는 전인교육을 실시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최근에 와서는 정보교육까지 포함되어 교육과정 내용이 훨씬 많아졌다. 이에 반해 진학 학원 및 보습 학원은 상급 학교로의 진학 및 학력의 보강, 향상에만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학교와 학원의 존재 의의가 다르다. 의무교육1) 으로서의 공립 초·중학교 교육은 모든 아동·학생들에게 최저한도에서의 교육을 평등한 시각에서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요즘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가정의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적 여유가 있으니 수강료가 비싼 학원에 쉽게 보낼 수 있고 고액 과외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경제력과 학력은 비례한다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는 학교 무용론이 가시화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학급의 남자 아이 한 명이 결석을 하는 바람에 그날 실시한 국어 시험을 혼자만 보지 못했다. 그 다음 날 등교한 그 아이에게 오후에 남아 시험을 보고 하교하도록 지시했더니 수학 학원을 가야 해서 남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참을 그 아이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니 내일도 다른 학원이 있어서 안 되겠고, 모레쯤엔 남아서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쩔 땐 ‘그래, 모르는 건 학원에 가서 배우거라’, ‘학원 숙제도 많은데 학교 숙제는 조금만 내 줘야겠지?’라고 교사로서 무책임한 말을 할 때도 솔직히 있다. 물론 화가 나서 한 말이긴 하지만 학원에 의존하는 것은 책임 방치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 지난 호에서 일본 어느 지역의 중학교에서는 학원 강사를 불러 보습을 하게 하는 등의 활동으로 학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이 또한 교육 행정이 학원에 접근하고 있는 한 단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일반화가 되면 그다지 모양새는 좋지 않은 일이라 여겨진다. 어떻게든 공교육의 본질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체능과 같이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전문적 교육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한 교과 공부는 학교에서 마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의무교육 기간 동안 만큼은 학교에서 보충 학습 등을 통해 학습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수업을 끝내고 또 보충 학습을 한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에 본격적으로 학급 업무를 보거나 교재 연구 등을 해야 하는 교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몸은 좀 고될지언정 아이들이 학교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의식 없이 학원을 오가는 일은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학교 수업을 좀 태만히 해도 ‘학원에 가니깐 괜찮다’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그 아이는 계속적으로 학교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그런 아이들은 학원에 가도 여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학력 향상 또한 기대하기 힘들다. 결국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또 다른 학원을 찾게 되고 이중 삼중의 학원 수강은 불가피해진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빼앗기게 되고 보호자들은 보호자대로 교육비 지출에 부담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교육에 관한 근본적 의식의 전환이 없는 한 학원은 계속적으로 늘어갈 것이고 학교보다 학원을 더 신뢰하는 보호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원은 이제 더 이상 학교의 보조 기능을 하는 장소가 아닌 메인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고 고착된 사회 풍토로만 치부해서 간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이야말로 공교육의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한계점으로 지적되어 온 부분을 다채로운 시각에서 해결해 나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 우선 개념정리부터 필요하다. ‘소생’ 또는 ‘재생’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르네상스(Renaissance)’는 역사상 어느 특정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구분을 뜻하는 말이다. 즉, 중세를 졸업하고 근대로 가는 역사 구분의 전환점에서 바로 르네상스가 동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 특히 북부지역에서 시작된 배경은 옛 로마제국 시대로부터의 유산을 직접적으로 물려받고 일찍부터 다른 유럽 국가보다도 도시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 운동기간에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방의 여러 나라와 접촉하여 고도로 발달되고, 아라비아의 과학이 접목된 그리스 자연과학 및 철학사상과 접할 수 있었으며 이때 그리스-로마신화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적극적 후원자였던 교황들과 제후들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 있어서 인문주의자의 활동을 마치 자기 일처럼 관심을 가지고 지원하였는데, 특히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피렌체의 메디치가(家), 밀라노의 비스콘티가(家)가 대표적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쟁쟁한 인문주의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휴머니스트 중의 휴머니스트, 휴머니스트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루터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순수성과 소박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여 교회의 타성화된 의식(儀式)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뜬 참다운 생활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면서 당시 교회에서 사용되어 오던 ‘불가타역(譯)’이라는 라틴어 신약성서를 불신하고 그리스어로 된 원전을 다시 번역하여 수년간의 고생 끝에 초기의 필사본에서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1516년에 출판하였다. 비록 우리나라보다는 200년이나 늦었지만, 이미 1447년에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였고 1454년에는 구텐베르크 성서출판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최초의 원어 신약성서 출판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에라스무스의 노력은 가톨릭교회의 타성적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이르렀는데, 대표적 저서인 〈치우신예찬(痴愚神禮讚, Encominum moriae)〉에 그의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이 책은 교회 성직자의 부조리와 부도덕성을 공격함으로써 루터의 종교개혁(1517)에 민중이 호응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놓았던 것이다. 새로운 항로 개척에 나선 두 나라 중세 말까지 유럽인의 세계관은 극히 제한적이었으나 십자군 원정 기간을 통해서 접한 동방 문명으로 세계관이 넓어짐에 따라 아라비아 저편의 동쪽 지역과 대서양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탐험의 시도는 있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5세기 전에 당시 노르웨이인 에릭이 아이슬란드에서 추방되어 그린란드를 발견하였고, 다시 11세기 초 에릭의 자손인 라이프가 아메리카 쪽으로 내려와 라브라도르에 도착하였으며 더 남하하여 뉴잉글랜드에 닿았다. 그 밖에도 노르웨이인들은 북극지방으로 항해한 적도 있었으나 하나의 전설로 유럽사에서 잊혀진 일이 되고 말았다. 7세기에 모하메트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점령을 당한 후에는 더욱 유럽 세계가 좁아졌고 실크로드를 통한 유럽과 동양 사이의 통로가 사실상 폐쇄되었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세계 탐험에 나서면서 탈 유럽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불가능해진 육로 무역을 포기하고 동양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기나 긴 세월동안 이슬람과의 국토회복 전쟁을 통해서 천문과 지리에 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몽골제국 시대에 유럽으로 전해진 나침반으로 장거리 항해를 위한 성숙된 여건을 갖출 수 있었다. 포르투갈이 먼저 선수를 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4년 전에 이미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인 희망봉에 도착하였고 10년 후에는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하였다. 당시 인도의 후추를 비롯한 향료는 유럽에서는 같은 비중의 금과 교환된다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어 유럽인들은 항로개척에 정열을 쏟아 부었다. 바다의 동쪽 길을 이미 포르투갈에 의해서 선점 당한 스페인은 바다의 서쪽 길을 통해서도 향료의 나라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에게 후원을 약속하였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산티페 협약(1492년)’을 맺었다. 식민지 건설로 이어지는 대항해 드디어 콜럼버스는 구름이 짙게 깔린 스페인의 사르테스 강을 핀타 호, 니냐 호, 산타 마리아 호를 이끌고 조용히 빠져 나와 대양을 항해 하였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선원들은 지치기 시작하였고, 콜럼버스 자신도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인도로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멀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그 순간, “육지다, 육지!” 핀타 호의 마스트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었던 갑판원이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2시 무렵이었으며 콜럼버스는 자신의 계산이 들어맞았다며 인도라 믿는 바람에 그 뒤로부터 졸지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인도 사람(인디오, 인디언)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콜럼버스가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고 네 차례의 항해 끝에 1518년 산또 도밍고(Santo Domingo)에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한 총독부를 설치함으로써 라틴 아메리카에는 유럽인들에 의한 침략과 정복, 약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항해술이라고 하면 결코 스페인에 뒤질 포르투갈이 아니었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는 1497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로부터 인도 항로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리스본을 출발하여 이듬해에 아프리카 동해안의 메린다에 도착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 항로를 찾아 인도에 도달하여 동양 항로를 개척하였고(1498), 까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하여 그곳에 포르투갈 식민지를 건설하였다(1500). 특히 원래 포르투갈 사람인 마젤란(?~1521)은 1518년 스페인 국왕(카를로스 1세)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카알 5세)의 특허장을 받고 1519년 5척의 함대와 승무원 280명을 이끌고 세비야(Sevilla)를 출항하여 세계일주여행(1519~1522)을 떠났다. 1520년 남아메리카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하자, 그 때까지 보이지 않았던 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는 계속 항해하여 1521년에는 괌도를 지나 필리핀 제도를 발견하였지만, 막탄섬에서 원주민들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으며 드디어 1522년 만신창이가 된 한 척의 배가 귀항하였는데, 그 배는 다름 아닌 마젤란의 탐험대 가운데 한 척이었다. 살아 돌아온 인원을 세어보니 거지꼴을 한 18명이 타고 있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인도로 항해하였고, 그 때 고아, 실론, 수마트라, 자바 등을 점령하여 무역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1542년에는 포르투갈 상선이 일본에까지 이르렀다. 1557년에는 마카오에 식민지를 건설하여 극동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사회 변화로 이어지는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루터의 주장이 많은 유럽인들의 호응을 얻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의 개혁(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단순히 종교적인 면에서만 출발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고 각 지역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요인이 추가되어 하나의 역사적 대사건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일차적인 원인은 가톨릭의 쇠퇴와 형식주의적 타성에 있었으며 또 한 가지 중세 말기의 경제 및 사회적 구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 르네상스가 ‘황금만능주의’를 유발시킴으로써 면죄부 판매의 길을 쉽게 열어주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루터는 세 가지 유일사상, 즉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총(Sola Gratia)’이라는 오캄의 유명론 신학을 발전시켜 ‘만인 사제론(萬人 司祭論)’을 주창하였다. 그는 1517년 면죄부 판매에 반발하여 95개 논제를 제기함으로써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는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바젤의 출판업자들이 이 내용을 출판함으로써 1518년에 들어서면서 이 논제가 세인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이는 활자매체를 통한 언론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 최초의 사건이었으며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에 공포된 교황의 교서에 의해 정식으로 파문을 당했다. 그러나 루터의 명성은 독일 전국에 퍼졌고 대다수의 독일인들이 그를 지지하여 루터는 1522년에 비텐베르크로 돌아가 루터교(Lutheranism)를 창립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주도로 개혁운동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루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제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에라스무스의 종교적 관념을 일상생활의 철학적 지침으로 받아 들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루터보다 더 과격하였으며 자유로운 성서 해석을 하였다. 츠빙글리의 프로테스탄트는 유아세례 문제로 1524년 재세례파가 등장함으로써 분열되었는데,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시작된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은 다른 주(canton)로 옮겨가고 차츰 스위스 밖의 지역, 예를 들어 슈트라스부르크 및 라인강 상류의 다른 독일 도시로 전파되었으나 1531년 츠빙글리가 전사하자 그의 개혁교회는 지도자를 잃고 침체하였다. 1532년 스위스의 가톨릭 주(canton)와의 싸움에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후 개혁운동이 주춤했으나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대륙에서는 루터파의 직접적인 영향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이외 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스위스·프랑스·네덜란드·스코틀랜드 지역은 칼뱅의 개혁교회 세력에 지배되고 있었다. 특히 스위스를 중심으로 칼뱅의 개혁교회가 쉽게 뿌리를 내린 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츠빙글리에 의해 기초가 다져진 덕분이었다. 사실 칼뱅의 개혁사상은 루터보다는 츠빙글리에 가까웠으며, 16세기 전반기 스위스 13개주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각기 독립적인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스위스는 상업과 교역으로 크게 번창하였고 스위스의 북부 도시, 예를 들어 취리히, 바젤, 베른 등은 일찍부터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을 받아들였으며 특히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칼뱅은 장로직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상공계급이 많은 북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파, 프랑스에서는 위그노파, 스코틀랜드에서는 퓨리턴파라 불렀으며 그의 개혁운동이 성공한 요인은 ‘경제활동의 합리화’로 이는 궁극적으로 근대적 자본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사람은 일생동안 사랑을 합니다.” 며칠 전 TV에 나온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혼 전문 변호사 입에서 나온 말이어서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었지요. “말도 안 돼!” 그러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말은 사랑도 사람처럼 일생이 있어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일생에 빗대어 생로병사라 해도 좋고 삼라만상(森羅萬象)에 빗대어 성주괴공(城主魁公)이라 해도 좋겠지요. 누군가 때문에 가슴 두근거려 본 일이, 마지막 불꽃이 스러진 게 언제였던 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자칭 애정학 박사라는 한 선배가 그러더군요. 혼자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실 때 떠오르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증거라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음악을 들을 때 같이 듣고 싶고, 맛있는 것은 같이 먹고 싶고, 재미있는 영화는 같이 보고 싶으며, 드라마를 볼 땐 그 사람도 이걸 보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거라고. 그래요. 그 말이 맞는 거 같습니다. 사랑을 할 때, 그는 길에도, 차안에도, 현관문에도, 사무실에도, 아침의 첫 커피 잔 바닥에도 저녁에 친구와 기울이는 술잔 바닥에도 있었습니다. 잠의 고갯마루를 넘는 순간까지 같이 있었고, 잠의 저편으로 떨어지면 가끔 꿈 자락에도 스며들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위해 머리를 감고 얼굴을 다듬고 무슨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모습. 거울에 비춰본 적 있으신가요. 그 진지한 모습이며 간절함 숭고함의 무게는 하느님을 배알하고자 복장을 가다듬는 사제의 그 것과도 진중함에 있어 차이가 없지 않았던가요. 수많은 고전에서 사랑에 목숨을 바친 자가 순교자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사랑의 종교적 신념에 버금가는 무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구차하게 현실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더더욱 영상이나 책 속에서는 화려한 이상을 위해 주저 없이 목숨을 바치는 광인을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사랑을 위해 한목숨 아낌없이 바치고 피를 뿌리며 죽어 가는 영웅의 모습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것입니다. 자고로 멀쩡한 사람의 피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건 바로 전쟁과 혁명 그리고 사랑.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함과 절박함에 있어 사랑은 전쟁과 혁명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 속에 전쟁이 터지고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 사랑이니까요. 전쟁, 혁명을 겪은 사람이 죽거나 바뀌듯 사랑은 사람을 죽이거나 바꾸어 버립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전쟁 같은 사랑'이란 노랫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겠지요. 영원한 전쟁이 없듯 사랑의 전쟁도 언젠가 끝이 납니다. 물론 사랑엔 승자와 패자도 없습니다. 성숙, 이것이 사랑을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보상입니다. 다른 보상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을 하는 자만이 사랑을 알고 있다”고 쉴러는 말했나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종교적 신념처럼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만이 우리에게 이 척박한 세상을 견디게 하는 힘을 줍니다. 줄리엣과 사랑에 빠지게 되기 전 로미오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가지면 시간도 잊게 되는 것을 왜 나는 가지지 못하였는가”라고. 그렇습니다. 사랑은 시간을 잊게 하지만 시간은 사랑을 잊게 합니다. 그래야 또 다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요. 같은 사랑의 감정이 두 번 타오르지 않기에 일생의 모든 사랑은 다 첫사랑입니다.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말은 죽은 다음에 비로소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은 첫사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몇 살인데 사랑타령이냐고요. 사랑타령이나 할 나이가 아니라고요? 아니요. 사람은 일생동안 사랑하는 겁니다.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 한국교육신문 기자
박준용 | 한양대 강사, 영화평론가 도라, 조슈에와 세상에 나서다 전직교사 출신의 도라는 브라질의 대도시 리우 데 자네이루의 중앙역에서 글 모르는 이들을 위해 편지를 대필해 주는 직업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다. 사랑을 호소하는 이, 아들에게 관심을 촉구하는 늙은 아버지, 받을 돈을 독촉하는 사람, 헤어질 것을 통보하는 연인 등 중앙역을 가득 메운 사람들처럼 그네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고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도라의 유일한 즐거움은 친구와 함께 편지를 뜯어 읽어보고 자신이 보기에 쓸데없는 소리를 적어놓은 편지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머지 편지들은 그냥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편지를 부탁하는 이들이야 절박할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 이 모든 일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한 기계적인 직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계나 자본과 같은 비인간적인 대상을 다루는 직업과 달리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는 ‘편지’를 써 주는 도라의 직업은, 학생이라는 살아있는 대상과 관계를 맺고 이를 토대로 성장과 변화를 이끌어내야 하는 일인 그녀의 전직이었던 교사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도라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로 인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일종의 거짓이나 허상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녀에게 있어 편지란 무의미하며, 대필하는 일은 말 그대로 고단한 직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온 젊은 여인 아나가 도라에게 떠나간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편지를 서랍 속에 내팽개쳐둔다. 그리고 다음 날, 도라는 전날의 편지를 고쳐달라며 다시 찾아온 여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을 목격한다. 졸지에 갈 곳 없는 고아가 되어 버린 소년 조슈에는 역 주위를 떠돌고, 도라는 소년의 미래를 위하는 것이라며 입양원에 팔아넘긴다. 그러나 사설 입양기관 직원을 자처했던 그들은 아이들의 장기를 빼내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꾼들이었고, 도라는 그 사실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결국 무작정 조슈에를 구해낸 도라는 소년의 아버지를 찾아주기로 결심하고, 둘의 여행과 더불어 영화는 본격적인 ‘로드 무비’ 장르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교제와 나눔을 전제로 하는 신뢰 월터 살레스 감독의 최근작으로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기 삶을 다룬 영화 처럼 로드 무비 형식의 영화는 대부분 등장인물들이 긴 여행 과정에서 다양한 인생의 굴곡을 경험하며 겪게 되는 변화와 성숙의 과정을 그린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함께 긴 시간을 보내면서 두 사람은 때로는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그 이상의 연민의 정을 나누기도 하며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을 연다는 것이 꼭 모범적인 삶의 실천을 통해서만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라는 어느 간이역 매점에서 배고픔에 음식을 훔치는 조슈에를 발견한다. 크게 놀라 야단을 치지만, 그녀는 좀 더 대담하게 많은 식료품을 훔쳐 나온다. 소년은 자신에게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음식을 훔친 그녀에게 대들지만, 먹기 좋게 빵을 잘라 나누는 도라의 손길에 마음이 풀어지고 만다. 대개 사람들은 참된 교육이란 진실한 신뢰의 관계를 토대로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시간의 교제와 나눔을 전제로 하는 신뢰는 상황과 현실에 대한 변명 속에서 애써 외면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결국 피상적 지식전달자와 수용자의 메마른 사제관계는 회피하기 어렵다. 마치 도라의 문장력이 일종의 기능적인 기술로 돈벌이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도라와 긴 호흡의 시간을 나누게 된 조슈에는 어린 나이임에도 메말라버린 그녀의 몸과 마음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다시 여성으로서의 삶을 회복하기를 응원하기에 이른다. 그렇다. 교사의 삶이 언제나 학생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세상에 그렇게 고단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는가? 교육의 진정한 기쁨 중 하나는 바로 이렇듯 도리어 아이들이 어른을, 학생이 교사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역설적인 나눔의 순간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라는 어린 조슈에로부터 너무나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삶의 생기어린 격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새로운 삶의 의지가 슬며시 일어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개개인의 다양한 ‘이야기’ 봐야 그러나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늘 이상적인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마을에 조슈에의 아버지는 이사를 가고 없다. 다시 떠나야 하는 고된 길.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둘은 서로 충돌하게 되고 조슈에는 ‘가출’을 감행하게 된다. 도라는 걱정스런 마음에 소년을 찾아 헤매던 중 그만 정신을 잃고 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도라는 밤을 새워 자신을 간호하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평범한 그러나 인생의 묵직한 지혜가 느껴지는 말처럼, 두 사람은 이 일로 인해 서로를 보다 깊이 사랑하는 관계가 된다. 이후 조슈에의 재치 있는 제안으로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도라는 시골사람들을 위해 편지를 써주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편지를 쓰면서 이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순박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고통, 감사의 살아있는 말들을 느낀다. 일이 끝나자 조슈에는 당연하다는 듯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려 한다. 하지만 황급히 그것을 말리면서 도라는 그동안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가를 가슴깊이 깨닫게 된다. 삶의 이야기로서 맥락을 잃어버린 ‘편지’는 글로 채워진 종이뭉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러티브’, 곧 살아있는 관계의 눈으로 보는 ‘편지’는 하나하나가 세상의 유일무이한 가치요 존재인 것이다.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학생들은 자칫 그저 번호나 명목상의 이름으로 불리는 단순한 교육대상인 집단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하면 열 명, 스무 명의 아이들은 각기 고유한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특별한 존재들이다. 도라가 ‘편지’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런 맥락을 발견하는 순간이 되었듯이, 교사에게 있어 학생이 그런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 되는 것은 마찬가지의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정해진 시간 이후 떠나는 마음 긴 여정의 끝에 드디어 도라와 조슈에는 아버지의 집을 찾게 되고, 그 곳에서 다른 형제들을 만나게 된다. 비록 아버지는 없었지만 소년을 너무나 잘 대해주는 장성한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도라는 이제 자신이 떠나야 할 때가 다가왔음을 느낀다. 마지막 날 새벽 도라는 소년이 사준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잠든 조슈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자신이 부치지 못했던 소년의 어머니가 쓴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린 편지를 남겨놓고 길을 떠난다. 새벽을 향해 걸어가는 도라의 발걸음은 희망찬 새 삶을 시작한 어떤 사람처럼 가볍고 경쾌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녀는 떠나가는 버스에서 조슈에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아버지로 말미암은 상처를 떠나보내며, 자신의 사랑과 진심 그리고 깊은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쓰면서 말이다. 이런 도라의 모습은 이상적인 교사의 삶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아니지만 어미의 심정을 가지고 한정된 시기를 아이와 함께 살아가다, 정해진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말없이 떠나 뒤로 물러나야 하는 삶 말이다. 떠나는 도라의 뒤를 숨이 턱에 차오르게 쫓아오는 조슈에의 모습은 그간 그녀의 노력과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소중한 열매이다. 모쪼록 새롭게 시작한 2007년, 모든 교사들에게 풍성한 결실의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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