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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참여정부가 이제 임기를 몇 달 앞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임기가 있는 직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명확히 하여 그것을 수행하고, 다음 과제를 차기에 물려주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특히 정부 혹은 국가 수준에서의 일은 이러한 연속성을 전제로 일이 설정되고 추진된다. 따라서 어떤 정부의 정책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설정된 임무를 얼마나 달성하였으며, 차기 정부에 어떠한 과제를 물려주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다. 어떤 정부가 임기 중에 이룩한 것이 분명하고 뚜렷하면 그것에 대한 평가도 논쟁의 여지는 있을지언정 비교적 용이할 것이다. 그런데 참여정부는 그동안 무엇을 이룩하였는지에 대해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오히려 참여정부 집권기간 동안 여러 정책을 둘러싸고 논쟁과 갈등 그리고 혼란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참여정부 자신이 갈등과 논쟁의 한복판에 당사자로 서 있는 적이 많았다. 이러한 양상은 교육 분야뿐만 아니라 국정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동일하였다. 따라서 참여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무엇을 달성하였는가에 대한 평가의 비중보다는, 정책적 의도가 무엇이었으며 왜 혼란과 갈등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그리고 차기에 어떠한 과제를 남겨두었는지에 대한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본고는 먼저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이래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이 어떠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정책의 내용으로 어떠한 것들이 있고, 이 정책을 둘러싸고 혼란과 갈등이 왜 그리고 어떻게 불거지게 되었는지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이 이룩한 성과를 짚어보고, 남겨 놓은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의 역사적 위치 국가 및 정부의 정책 중에서 정책적 연속성과 일관성이 가장 중시되고, 또 장기적 전망 속에서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할 분야는 교육 분야일 것이다. 교육을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하는 것은 교육 분야의 이러한 성격을 잘 말해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 대해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문민정부 이전의 교육정책은 초·중등 및 직업 교육에 중점이 두어졌으며 고등교육정책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았다(한영환, 1998). 고등교육개혁을 위한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문민정부에 의한 ‘세계화·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신교육체제 수립을 위한 교육개혁 방안’의 수립(1차보고서)에 의해서인데, 여기서는 대학교육의 다양화·특성화(대학설립준칙주의, 단설대학원설치 허용 등)를 최우선 순위에 두었으며, 현안문제로서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대학입학제도(학생선발제도 자율화, 종합생활기록부 활용 등)를 제안하였다(이석열, 2004). 이후에도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는 3차례에 걸쳐 개혁방안을 수립하고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지금까지도 이것의 연장선에서 개혁이 추진되고 있으며(신현석, 2003), 문민정부에 의해 대학교육의 양적 성장이 이룩되고 다양화를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다 할 수 있겠다. 국민의 정부는 문민정부의 교육개혁기조를 그대로 계승한다고 천명하면서, 고등교육정책과 관련해서는 ‘대학경쟁력 강화’와 ‘교육복지’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리고 대학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립대학 구조조정 사업을 본격 추진하고 대학평가에 의한 차등적 지원 체제를 강화하였으며, 두뇌한국 21(BK 21)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교육복지 차원에서는 평생직업교육체제를 구축하고 지방대학육성과 학생복지 확대 및 학생활동 지원 사업을 추진하였다(반상진, 2005). 이렇게 국민의 정부는 대학의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고, 노동시장과 대학교육의 연계 강화를 새로운 핵심과제로 설정함으로써 대학교육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양 정부 기간 동안 지방대학의 위기는 심화되어갔으며, 대학평가와 재정지원을 연계하여 대학특성화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고자 하였지만, 평가지표의 문제 등으로 ‘획일적 변화’를 유도하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교육의 질 향상을 강조하면서도 대학원교육에 대해서는 손을 놓았고, 지나치게 많은 개혁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초점을 흐리기도 하였으며, 고등교육개혁을 위한 예산지원체제를 확립하지 못했다(신현석, 2000). ‘경쟁력 강화’보다는 ‘형평성’ 추구 2002년 10월 23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후보는 한국교총의 교육정책 토론회에 참석하여 “국가 교육정책의 기본방향을 교육의 형평성과 자유를 확충하는 데 두고자 한다”고 밝히고, 한 가지 더 부가하여 “우리 교육이 좀 더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강조했으면 한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노무현, 2002). 참여정부는 국정목표를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로 삼고, 교육 분야의 국정과제를 ‘교육개혁과 지식문화강국 실현’으로 내걸고, ‘교육적 가치로서 교육복지 확대’, ‘실질적 교육민주화를 통한 교육공동체 구축’,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내실화’라는 3대 교육정책 기조를 설정하였다(성병창, 2003). 그런데 참여정부의 3대 교육정책 기조는 노무현 후보가 교총 토론회에서 주장한 3가지 기본 방향에서 ‘자유의 확충’이 사라진 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교육의 공공성 강화’가 추가되었다. 요컨대 후보로서 공약과 정권인수위원회의 국정과제 설정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즉, 교육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갈등과 논란이 정책기조 설정 단계에서부터 배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참여정부 교육정책의 기조에서는 문민정부 및 국민의 정부가 일관되게 강조해오던 ‘교육경쟁력 강화’와 관련한 정책이 빠져버리고, 교육의 형평성 추구와 관련된 정책만으로 3가지 정책기조로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이 교육의 일관성과 계속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교육정책을 둘러싼 빈번한 혼선 참여정부의 초대 교육수장인 윤덕홍 부총리는 2003년 하계 대학 총장 세미나에서 참여정부 고등교육정책의 방향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정리하여 제시하였다. ‘세계적 수준의 대학교육·연구 역량 확충’과 ‘지역발전을 선도하는 핵심주체로서 지방대학 육성’의 2가지였다. 그리고 전자를 위해서는 대학 자율화의 계속 추진, 우수 RD인력 양성과 기초학문 인프라 구축, 전문대학원체제 정착 등 6가지 방안을 제시하고, 후자를 위해서는 지역인재 육성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한편, 대학구조조정과 산학협력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윤덕홍, 2003). 그런데 이러한 교육부총리의 고등교육정책 방향은 역대 정부의 고등교육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참여정부의 3가지 교육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교육부총리의 정책방향과 정권인수위의 정책기조 사이에 발견되는 괴리는 참여정부 교육정책의 혼란을 예고케 했다. 즉, 참여정부에서만 교육부총리가 5차례나 교체되는 등 교육정책을 둘러싼 빈번한 혼선은 정권 출범 때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다. 이제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기조에 따라 실제로 실행된 교육정책에 대해 검토해보면서 정책을 둘러싼 혼선과 갈등의 원인도 살펴보도록 하자. 근본적 검토 필요한 ‘3불 정책’ 첫 번째 정책기조로서 내세운 ‘교육복지의 확대’와 관련하여 시행한 대학교육정책으로서는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를 목표로 한 ‘3불 정책’과 지방대학육성을 목표로 한 NURI(지방대학혁신역량강화사업)의 2가지를 들 수 있다. 여기서 3불 정책은 국민적 갈등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취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가 정부의 교육정책을 통해 접근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NURI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중요한 대학정책의 하나로 설정하였지만 구체화되지 못하였던 것이 주요 정책으로 입안되어 추진 중에 있는 국책사업이다. 그 성공 여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지만 큰 논란 없이 비교적 무난하게 추진되고 있는 참여정부의 대표적인 정책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정책기조인 ‘교육공동체 구축’과 관련하여 추진한 정책으로서는 사학법 개정 등을 통해 대학의 지배구조에 대학구성원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초·중등교육에서 학생회, 교사회, 학부회의 법제화와 이들 대표의 학교운영위원회 참여와 맥을 같이 하여 추진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대선 공약 사항이기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원리에 반한다는 인식도 있어 국민들 사이에 격심한 이견과 갈등이 노출되었다. 세 번째 정책기조인 교육의 공공성 강화와 관련한 교육정책으로서는 평준화 정책의 기조유지와 유아교육의 공교육화 및 교원의 전문성 신장을 내세우고 있는데, 여기서 고등교육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없다(이명희, 2005). 그리고 위의 3가지 교육정책 기조와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참여정부 하에서도 대학의 구조조정 사업은 큰 성과는 없었지만 계속적으로 추진되어 왔으며, 대학평가사업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 또한 대학에게 운영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조치도 있었고, 법학전문대학원 설립과 국립대학 법인화도 추진 중에 있으며, 제주도 및 인천송도의 특구에서 교육개방을 부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조치들은 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문민정부 이래 국민의 정부도 공통적으로 추진하던 사업들이다. 그 결과 일부 단체 등에서는 “평준화 정책, 교육개방, 고등교육 정책 분야에서 경제정책이 교육정책을 결정하고, 경제원리가 교육원리를 대체하는 상황은 (참여정부의) 교육철학이 분명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것이다”(한만중, 2003)라고 참여정부의 고등교육정책을 이념차원에서 전면 비판하기도 한다. 반면에 또 다른 측에서는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은) 기본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교육의 수월성 추구에는 힘을 쏟지 못하고 평등정책에 치중해 왔다. 이러한 기조는 대학정책에도 이어져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드는 것보다 대학을 평준화하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서정화, 2006)고 노무현 정부의 정책적 일탈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참여정부의 교육정책과 관련한 논란은 평가를 둘러싸고도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생선발 과정의 간섭은 획일적 통제 교육은 전 국민의 관심사다. 교육정책의 추진과 관련해서는 국민 각계의 다양한 입장이 표출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부의 조정기능이 매우 중요하다. 국민의 정부 이래 평준화 문제 등 주요 교육정책을 둘러싸고 이념적 갈등이 반복되고 있으며, 현 정부 들어 심화되고 있다. 이것은 정부의 국민 통합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며, 정부의 조정기능에 문제가 있다는 증좌이다. 따라서 국민통합을 위한 정책조정을 원활하게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차기정부에 남겨 놓은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를 위한 대원칙부터 제안하고자 한다. 즉, 교육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과정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리고 세계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인 가치는 헌법이 추구하는 기본가치이며,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개인주의에 바탕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세계인으로서 살아가는데도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이다. 따라서 국민통합과 정책조정을 위한 기본적인 기준이 되는 가치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교육은 헌법이 추구하는 기본 가치에 합치하여야 하며, 그 기본 원리를 벗어나서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둘째, 차기정부는 정부로서 능히 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해야 하는 목표를 설정하여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을 펴야 한다. 예를 들면, 학벌타파와 대학서열완화와 같은 목표는 바람직한 것일 수는 있으나, 한 정부의 정책으로서 접근하여 능히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사회운동을 통해 접근될 수는 있으나, 정부정책으로서는 학벌이나 대학서열의 강화를 가져올 수 있는 정책을 피하는 것이 고작이라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셋째, 정부는 투입이나 과정에 대해 관여하기보다는, 항상 결과에 주목하여 질을 관리하고 통제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정부는 제 아무리 유연성을 발휘하더라도 현대사회의 변화에 따라갈 수 없으며, 굳이 투입이나 과정에 개입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획일적 통제와 비효율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아무리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대학입시의 구체적 방법’과 같은 교육 과정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정부가 질 높은 고등교육을 원한다면 결과라고 할 수 있는 학위논문이나 졸업생의 취직이라는 마지막 산출의 질을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고등교육 예산확보가 과제 넷째, 정부가 투입과 관련하여 할 수 있는 일은 2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투입의 우선순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정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이다. 문민정부 이래 연속성과 일관성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정책과 관련해서 최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것은 대학의 세계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각 대학들이 특성화할 수 있도록 구조조정을 유도한다든가 지방대학을 육성하는 것, 그리고 전문 직업교육을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 수립 등을 다음 순위들에 둘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개혁에 투입해야 할 재정을 확보하는 일이다. 역대정부는 대학개혁을 위한 정책만 수립했지 이를 위한 예산을 제대로 확보한 적이 없다. 어쩌면 차기정부가 고등교육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개혁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여정부 하의 사학법은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쉽다. 주지하다시피 개정 사학법이란 부패사학 척결을 위하여 참여정부가 진통 끝에 지난 2005년 12월 9일에 전면 개정한 사학법을 말한다. 또한 재개정 사학법이란 개정 사학법에 대해서 사학측이 집단 반발함에 따라 그들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여 국회가 금년 7월 3일 개정사학법을 다시 개정한 사학법을 말한다. 참여정부 하의 사학법 개정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사학법의 개정 혹은 재개정 내용 자체를 평가하라는 의미일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러한 개정 혹은 재개정에 관여한 참여정부와 여당의 책임을 물어달라는 의미일 수 있다. 필자의 전공이 법학인 만큼 전자의 작업은 비교적 용이하지만 후자의 작업은 보다 정밀하고 입체적인 작업이 필요하여 단기에 해내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자의 접근 방법에 따라서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에 대한 법적 평가를 위주로 해보기로 한다. 지면 관계상 여러 가지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사학법의 전면 개정과 재개정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경과를 간단히 덧붙이기로 한다. 여당의 사학법 강행처리 사학법의 개정과 재개정 과정은 찬반 세력의 극심한 대립과 다툼을 유발하였다. 부패사학 척결을 위한 사학법의 전면 개정 운동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시작되었다. 2000년 10월 교육관련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사립학교법 개정과 부패사학 척결을 위한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처음으로 사립학교법 전면 개정안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4월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사학법 개정안은 물론 교수회를 대학의 공식기구로 규정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을 함께 발의하였다. 그러나 개정 작업은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였다. 이듬해인 2002년 12월 민주당은 대선정국을 맞아 “사립학교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하여 사학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 및 공공성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하는 공약을 채택하였다. 참여정부 하에서 사학법 개정이 정부와 여당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게 된 것은 이 공약 때문이다. 2003년 4월 참여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교육부는 2003년도 업무보고에서 사학의 투명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사립학교법 개정을 추진할 것을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2004년 4월 17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두고 새로 여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정부의 개정안을 수용하여 사립학교법을 전향적으로 개정하겠다는 공약을 다시 하였다. 한나라당은 그 반대로 사립대학 운영비의 10%까지 국고지원을 확대하고 사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학진흥법을 제정하되, 사립학교법 개정은 반대하는 정반대의 공약을 내놓게 된다. 선거 결과 야당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도에 대한 국민들의 견제심리 작용 등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사학법 개정은 탄력을 받게 된다. 결국 이 힘으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개정을 밀어붙여 마침내 야당과 사학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2005년 12월 9일 기습적인 야당 봉쇄작전을 구사하며 사학법 개정안을 국회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하여 강행처리하였다. 야당, 사학계 반대로 재개정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은 사학법 개정 무효화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사학계와 종교계는 휴교 및 학교폐쇄 예고 투쟁 및 사학법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헌법소원 등의 법적 투쟁을 시도하였다. 금년 들어서 다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7대 국회의 현안들을 매듭짓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여야가 사학법 개정에 대한 부담을 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 결과, 지난 7월 3일 여야의 합의로 사학계 주장의 일부를 반영하는 재개정안을 상정하여 민주노동당의 반대를 뒤로 한 채 관철시키게 되었다. 여기에서 개정 사학법과 재개정 사학법의 내용을 각각 일별하고 이를 필자의 관점에서 평가해본다. 2005년 12월의 사학법 개정은 개정안에 따르면 “사립학교운영의 민주성과 투명성 및 공공성을 제고하여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으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압축된다. 학교법인의 이사 정수의 4분의 1 이상은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가 2배수 추천하는 인사 중에서 선임한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이사가 7명이면 2명이 개방형 이사가 된다. 비리 등으로 이사 취임이 취소된 인사는 요건을 강화하여 복귀가 어렵도록 하였다. 감사 2명 중 1명도 학운위나 대학평의원회에서 추천받은 인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또 이사장은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학교의 장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법인의 이사장 또는 그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도 겸직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사장 친족의 이사 참여도 종전보다 더욱 제한하여 4분의 1까지만 허용하였다. 학교회계의 예산은 당해 학교의 장이 편성하되 학교운영위원회 또는 대학평의원회의 자문을 거친 후 이사회의 심의·의결로 확정하도록 한다. 사립학교 교원의 면직사유에서 노동운동을 한 경우를 제외한다. 공립과 마찬가지로 사학의 학교장에게도 임기제를 도입하여 4년 중임에 그치도록 하였으며, 교원채용 시 공개전형에 의하도록 하였다. 통제냐, 개혁의 기틀이냐 사학법이 개정되었지만 바로 시행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그것을 시행하기 위한 시행령의 개정이 필요하여 개정 법률은 2006년 7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2005년의 개정 사학법에 대한 여야 정당 및 관련 단체들의 입장은 당연히 크게 찬반의 두 갈래로 갈라진 바 있다. 한쪽에서는 개정안이 비리사학뿐만 아니라 건전사학까지 일률적으로 규제를 가함으로써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법 개정이 기대에 미흡하기는 하지만 이로써 부패사학을 개혁하고 정상화하기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역사적 진전을 이루었다고 평하고 있다. 필자는 이 개정의 전체 방향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모든 사회에는 구성원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이 요청된다. 그런 점에서 학내의 관련 기구를 통한 학교운영 참여 기회 보장은 필요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개정 법률의 내용에 문제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용 중에 헌법상의 기본권 제한에서의 비례의 원칙에 충실한 것인지 의문이 드는 사안도 있음을 지적하였다. 예컨대, 법인 이사장의 학교장 겸직 금지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한 것이다. 사학의 학교장 임기를 국공립학교와 동일하게 4년 중임으로 제한한 것도 설득력이 약한 것이다. 간과하기 쉬운 문제였지만 사립대학에 일률적으로 대학평의원회를 두게 한 것도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한 것이다. 아울러 그 기구의 기능, 조직, 운영 등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대통령령에 위임한 것도 포괄적 위임 입법 금지 원칙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을 한다. 교원채용 시 공개 전형에 의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지만 종립학교의 경우 그 특수성을 보장하는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2007년의 재개정 사학법은 교육계와 학계의 이러한 지적들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이 법은 학교법인 이사장의 겸직금지의무 등을 완화하여 개인의 직업선택권 등 기본권 침해에 대한 논란을 해소하는 한편, 사학현장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개방이사의 추천방법에 학교법인의 관여를 일부 허용하기로 하는 등 현행 제도의 운영상 나타난 일부 미비점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재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방형이사제, 여전히 논란의 중심 첫째, 개방이사추천위원회의 설치(법 제14조 제3항 및 제4항) : 대학평의원회 또는 학교운영위원회에 개방이사추천위원회를 두고 학교법인의 이사정수의 4분의 1을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2배수 추천한 인사 중에서 선임하도록 하며, 개방이사추천위원회의 위원정수는 5인 이상 홀수로 하되, 대학평의원회 또는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개방이사추천위원회 위원의 2분의 1을 추천하도록 함. 둘째, 학교법인 이사장의 겸직금지의무 완화(법 제23조 제1항) : 종전에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은 당해 학교법인 및 다른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이나 다른 학교법인의 이사장을 겸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만을 겸할 수 없도록 하고, 이 경우에도 유치원만을 설치·경영하는 학교법인의 이사장은 당해 유치원장을 겸할 수 있도록 함. 셋째, 사학분쟁조정위원회(법 제24조의2 및 제24조의3 신설) : 임시이사의 선임·해임과 임시이사가 선임된 학교법인의 정상화 방안 등을 심의하기 위하여 교육부장관 소속으로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두고,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위원은 대통령이 3인, 국회의장이 3인, 대법원장이 5인을 각각 추천하도록 함. 넷째, 대학평의원회의 기능 조정(법 제26조의2 제1항) : 대학평의원회의 기능 중 대학헌장의 제정 또는 개정과 대학교육과정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대학평의원회의 심의사항에서 자문사항으로 변경함. 다섯째, 각급 학교의 장의 중임제한 완화(법 제53조 제3항) : 종전에는 각급 학교의 장의 임기는 4년을 초과할 수 없고 1회에 한하여 중임을 허용하였으나, 앞으로는 횟수 제한 없이 중임을 허용하되, 초·중등학교의 장은 1회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도록 함. 여섯째, 학교법인 이사장의 배우자 등에 대한 학교의 장의 임명제한 완화(법 제54조의3 제3항) : 종전에는 학교법인의 이사장과 그 배우자 또는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과 그 배우자의 관계에 있는 자는 당해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사립학교의 장에 임명할 수 없도록 하였으나, 앞으로는 이사정수의 3분의 2 이상 찬성과 관할청의 승인을 받은 자는 예외로 하도록 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학법 다툼 개정사학법의 이와 같은 재개정으로 그동안 지적된 개정 사학법의 문제들은 일부 해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각급 학교장의 중임제한을 완화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초·중등학교의 장은 종전과 동일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전히 문제가 있다.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보도에 의하면 사학법인 측은 조만간 재개정 사립학교법에 대해서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사학 측의 이 결정은 재개정 사학법도 수용할 수 없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 하겠다. 사학측이 재개정된 사학법에 대해서 헌법소원을 제기한 이유는 이 법도 그 추천 방법만 달리 했을 뿐 여전히 개방형이사제를 두고 있는데, 그것 자체가 사학의 학교설치운영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며, 임시이사제 또한 교육부와 산하 사학법인분쟁조정위원회 주도하에 운영되도록 해 사학 측의 권리를 침해할 소지가 높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원인사위원회의 교원 임면 등 인사에 관한 심의기구화 조항도 사학의 인사권을 명백히 침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다. 생각건대, 재개정 사학법에 대해서 사학측이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하더라도 헌법상 쟁점은 개정 사학법 때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쟁점의 핵심은 헌법 제37조가 “기본권은 보장을 최대로 하고 제한을 최소로 하도록” 천명하고 있는데, 재개정 사학법은 과연 그 규제 방법상 이것이 이러한 원칙에 따라서 사학의 경영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그 제한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아울러 그 판단의 향방은 사학은 국공립학교와 달리 그 특수성과 자주성이 공공성보다 더 강조되는 것이지만, 학교는 경영만이 아니라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중성을 띤 곳이므로 사학의 자율성도 법인만의 자율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구성원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사학법 개정 문제가 하루 속히 매듭지어져서 학생들의 학습권이 재대로 보장되는 안정을 되찾기를 기대해본다.
1997년 이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국회 상정과 폐기를 거듭해 오던 유아교육법안이 2004년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1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법률로서 공포함으로써 참여정부에 들어서 비로소 유아교육법이 제정되었다. 유아교육을 개인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유아교사의 자격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며 양성과 임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문제와 같이 한 국가가 어떠한 유아교육정책을 채택하는가에 따라 유아교육의 방향은 많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또한 여러 가지 선택이 가능한 유아교육정책 중에서 어떤 특정한 정책이 채택되면 이 정책을 일정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려는 국가적 의도가 나타나는데, 이런 결과로 형성되는 것이 유아교육법이다(이윤경 · 이일주 · 윤은주, 2005).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참여정부가 수립된 지 1년도 채 안되어 유아교육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유아교육은 새로 제정된 유아교육법에 의하여 2년 8개월 정도 행하여지고 있으므로 현재 시점에서 참여정부의 유아교육법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다소 이른 감은 있다. 그러나 유아교육법은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약 10여년에 걸쳐 이루어져 온 우리나라 유아교육에 대한 핵심 정책에 대한 논쟁점에 대한 합의적 성격이 있다고 볼 때, 유아교육법 제정 초기 정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아교육법 평가 준거는 몇 가지 관점에서 설정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참여정부의 유아교육에 대한 대 국민 약속인 제16대 대통령 선거공약과 유아교육법의 제정과 시행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였던 국가의 정책의지 및 그 방향을 담고 있는 유아교육법 입법취지의 주요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림 1과 같이 평가준거를 설정하였다. (그림 1 참여정부 유아교육법 정책 평가 준거 새교육 10월호 참조) 참여정부가 유아교육법 제정을 통하여 추진한 주요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본 결과 만 3〜5세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교육 및 보육법의 이원화 및 만 5세 초등학교 전면 취학안 추진, 보육 중시 정책에 의한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등 전체적으로는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러나 장기간 표류하였던 유아교육법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정하였고, 만 3, 4세 저소득층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 신설 추진 등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유아교육 기간 학제화 못해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유아교육의 기본적인 사항은 초·중등교육법에 규정하고, 유아교육의 지원·육성에 관한 사항은 유아교육진흥법에 규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유아교육의 일부 사항만이 기본법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지원·육성에 관한 사항도 한시법이 지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는 참여정부에 들어 유아교육법을 제정함으로써 해소되었으며, 헌법 제31조→ 교육기본법 제9조→ 유아교육법으로 이어지는 유아교육 법체계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아교육 법체계가 확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아교육단계가 기간학제로 포함되지 않고 있는 것은 종전의 유아교육체제가 지녔던 가장 큰 문제점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아교육법 제11조에 의하여 ‘만 3세부터 초등학교 취학 전까지의 어린이’를 유치원의 입학연령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만 3〜5세 유아’의 경우 유아교육법에 의한 ‘유아교육’과 영유아보육법에 의한 ‘보육’으로 이원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유아교육의 기간학제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이 뿐만이 아니라 2006년에는 참여정부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비전 2030’에 초등학교 취학 연령을 현재보다 1년을 낮추어 만 5세를 초등학교에 전면 취학시키는 방안을 발표하였으며, 2007년 2월 5일에는 만 5세의 초등학교 취학을 전제로 하는 ‘인적자원 활용 2+5전략’을 정부와 여당에서 발표하였다. 이로써 참여정부가 ‘유아교육을 공교육체제로 전환하고, 유아(만 3세)부터 국가 인적자원 관리체계를 확립하겠다’고 하였던 공약과 유아교육법 입법취지를 스스로 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유아교육법이 제정됨으로써 유아교육 공교육체제 구축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유아들은 보다 질적 수준이 높은 유아교육기관에서 균형적이고 조화로운 발달을 조장하는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유아교육법 제정의 중요한 의의로 평가 받았다(이원영, 2004). 이러한 평가의 관점에서 일반 국민, 특히 유아를 자녀로 두고 있는 부모들에게는 ‘적은 부담으로 질 좋은 유치원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충분한 유아교육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표 1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기대를 하기에는 아직도 시기가 이르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표 1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 유아교육 및 보육 현황 비교 새교육 10월호 참조) 표 1은 유아교육과 보육에 직접 영향을 미친 유아교육법 제정과 영유아보육법 개정이 공포된 2004년과 처음 시행된 2005년을 제외하고, 가장 인접한 년도인 2003년과 2006년도를 살펴 본 것이므로,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의 유아교육 및 보육 현황을 극명하게 비교할 수 있다. 표 1에서 보면 유아교육법 제정 후에 획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하였던 유치원은 그 규모면에서 오히려 감소추세로 들어섰음(특히 사립유치원)을 잘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아교육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영유아보육법에서 모든 영유아에게 보육기회를 확대함으로써 오히려 유아교육의 기회는 답보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유치원교육과 보육의 균등발전이라고 하는 당초 유아교육법 제정 및 영유아보육법개정의 취지인 형평성이 깨진 것이다(이일주, 2006). 유아교육비 지원 확대 참여정부에서는 1999년부터 시행하여 온 ‘만 5세아 무상교육’ 확대 정책과 함께 ‘교육복지 투자우선지역 지원’(2003년 이후), ‘만 3, 4세아 차등교육비 지원’, ‘장애유아 학비 무상지원’, ‘농산어촌 교육여건 개선’(이상 2004년 이후) 정책과 ‘두자녀 이상 교육비 지원’(2005년 이후) 정책 등을 신규로 발굴 시행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시행을 통하여 4.1%에 불과하였던 1999년의 무상교육 수혜율이 2005년에는 13.2%(80,880명)로 증가하였고, 2006년에는 14만 2476명의 유아들에게 무상교육비를 지원하였다. 또한 저소득층 만 3, 4세아 교육비 지원규모는 2004년 2만 2000명(1.8%), 2005년 3만 2000명(2.8%)을 거쳐 2006년에는 77,540백만원을 투입하여 모두 15만 5258명의 유아들에게 교육비를 지원함으로써(교육부, 2005; 2006) 유아교육법 시행효과를 거양한 것은 참여정부의 성과이다. 그러나 2004년 이후 참여정부에서 지원한 유아교육비 규모를 보육비 지원규모와 비교하여 보면 유아교육비 지원이 순수하게 유아교육법의 제정에 의한 효과가 아니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아교육법 제정 전인 2003년에는 8413억원에 불과하였던 유아교육 및 보육예산(국비 및 지방비)이 유아교육법 제정 후인 2007년에는 3조 2459억원에 달하여 최근 4년 사이에 무려 385%가 증액되었다. 한편 유아교육법 제정 전·후(2003년 대비 2006년)의 유아교육 및 보육 수혜 비용으로 다시 환산해 보면 표 2와 같다. (표 2유아교육법 제정 전·후의 유아교육 및 보육 수혜 비용 비교 새교육 10월호 참조) 표 2를 통하여 수혜자 1인당 수혜비용을 비교하여 보면 2003년에는 유치원아 1인당 평균 74만원 정도였던 유아교육 수혜비용이 2006년에는 162만원으로 220% 증액되었는데, 보육 수혜비용은 2003년에 영유아 1인당 평균 51만원이었던 보육 수혜 비용은 2006년에 들어 202만원으로 무려 400%가 증액된 변화를 가져왔다. 유치원과 보육시설의 취원 및 입소 연령이 다소 다르고, 부분적으로 종일제를 운영하는 유치원과 종일제를 원칙으로 하는 보육시설의 연령별 표준교육비와 표준보육비가 다르기 때문에 표 2에서 산출된 수치를 절대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추세대로 비용지원이 이루어질 경우에는 앞으로 이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다(이일주, 2007). 이와 같이 유아교육예산과 보육예산 간의 격차가 커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보육을 관장하는 정부부처가 종전 보건복지부에서 2004년 6월에 여성가족부로 이관되면서 매년 보육예산이 증액되어 1조 1204억원인 2007년 여성가족부 예산 중 보육예산이 1조 446억원으로 전체 예산의 93%를 차지함으로써 ‘여성가족부는 보육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육예산의 확충이 괄목할 만 하다는 점이며, 또 하나는 유아교육과 보육을 저출산 고령사회에 대비하기 위한 육아지원정책으로 접근하여 현재는 대통령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아교육법에 명시한 교육비용 지원정책을 보육 및 저출산 대비 정책과 연계하여 추진하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2005년의 무상교육(보육 포함) 성과가 8만 1000명으로 전체의 30%밖에 미치지 못함으로써 “만 5세 무상교육의 3년내 완성”을 공약한(새천년민주당, 2002) 참여정부의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은 그리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에서는 유아교육법시행규칙 제5조의 지원특례에 의하여 2005년부터 2년간 192개의 유아대상 미술학원에 대하여 약 40억원의 지원을 하였다. 유아대상 미술학원 중 유치원으로의 전환을 희망하는 학원에 한하여 지원토록 되어 있는데도 유아교육비용을 지원받은 학원 중 유치원 전환을 희망하는 곳은 단 28개원(14.6%)에 불과하였는데 당초 2007년 2월까지 한시 적용되도록 규정하였던 특례조항을 참여정부에서는 오히려 2년을 연장하는 유아교육법시행규칙을 개정함으로써 유아교육계로부터 감사청구를 당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하였다(유아교육발전을위한유아교육대표자연대, 2007). ‘유아교육’과 ‘보육’ 통합 법 제정 필요 이상에서 참여정부가 유아교육법 제정을 통하여 추진한 주요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해본 결과 만 3〜5세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교육 및 보육법의 이원화 및 만 5세 초등학교 전면 취학안 추진, 보육 중시 정책에 의한 유아교육기회 확대 성과 미흡 등 전체적으로는 낮게 평가할 수밖에 없어 아쉽다. 그러나 장기간 표류하였던 유아교육법을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제정하였고, 만 3, 4세 저소득층 유아교육비 지원 정책 신설 추진 등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부는 바뀌어도 유아교육법의 입법취지는 변할 수 없는 것이므로 참여정부에서 해결하지 못한 정책은 차기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우선 차기정부에서는 참여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만 5세 초등학교 취학안을 폐기하고, 만3세부터 5세까지를 하나의 교육단계로 묶어 완전한 기간학제로 확립하여야 하며, 일제의 잔재인 ‘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유아교육의 기간학제화 및 세계적인 동향에 맞도록 ‘유아학교’로 변경하고, 부족한 유아교육예산을 사교육기관인 유아대상 학원에 지원토록 규정한 유아교육법 시행규칙 제5조를 삭제하는 등 유아교육법 제정 당시부터 과제로 남겨져 있던 문제점을 해결하는 한편 유아교육법과 영유아보육법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유아교육 법체계를 스웨덴 등과 같이 통합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시 나타난 처용 9월이나 10월이면 지역별로 각종 축제가 많이 열립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작물을 가을에 수확하듯 각 지역 축제도 이 시기에 특히 많이 개최되는데요, 필자가 살고 있는 울산에도 처용문화제가 개최됩니다. 처용문화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처용이 나타난 처용암이 울산 앞바다 개운포에 있다는 데 바탕합니다. 처용설화 중 처용가에 나타난 관용과 화합의 정신을 배우자는 것이 처용문화제의 취지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올해는 여느 해와 달리 축제 이름에서 ‘처용’을 빼야 한다는 논란이 공개적으로 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처용가의 내용이 외설적이기 때문에 처용문화제에서 주장하는 관용이니 화합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서 시작됩니다. 과연 처용가가 외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지역의 대표 축제에서 그의 이름을 빼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지금껏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다만 축제 이름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그 논란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처용, 잊혀졌던 처용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처용, 삼국유사 기록에 따른 그의 궤적을 쫓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출생지는 개운포 처용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기 전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대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답니다. 음악과 노래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지요. 이 때 그는 울산 앞바다를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당시 상황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헌강왕대는 신라 말기로 중앙 귀족들의 퇴폐와 향락이 극심했던 때입니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당시의 어려웠던 형편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추정은 처용설화에 이어 기록되어 있는 헌강왕의 또다른 행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즉,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오직 왕에게만 그 모습이 보였다거나, 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기록들이 곧 나라가 멸망할 것을 경계하던 춤이었다고 보죠. 왕이 신하들과 함께 돌아가려는데 갑자가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왕이 어찌된 연유인지 신하들에게 물어본즉, 일관(日官)이 이르기를 이것은 동해 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좋은 일을 해서 풀어야 한다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이에 왕은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였는데 그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구름과 안개가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헌강왕이 다녀갔던 그 울산 바닷가, 처용이 나타난 그 바닷가를 개운포(開雲浦)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용을 위해 지은 절은 이 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있다고 하여 망해사(望海寺)라고 하였습니다. 헌강왕이 왜 개운포로 내려갔을까요?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내려간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쩌면 지방순시를 통해서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또 절을 창건함으로써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해보자는 의도도 있었을 것 같고요. 신라 말기에는 이렇게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기울어진 나라의 운명을 문수보살에게 묻기 위하여 태화사라는 절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그러한 예입니다. 이 때 문수보살은 왕을 눈앞에 두고서 홀연히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을 문수보살의 뜻으로 알고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긴다는 그런 류의 전설이지요. 망해사에서는 과연 바다가 보일까? 개운포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수군이 머물렀던 영성(營城)이 자리했던 곳입니다. 이야기대로라면 망해사는 개운포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망해사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발돋움을 해봐도 공단에 가려져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 절은 전라북도 김제에 있는 망해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제 망해사는 말 그대로 바로 앞이 서해 바다이니까요. 망해사는 울주군 청량면 문수산 자락에 위치한 절입니다. 지금 망해사에서 처용과 관련한 흔적을 찾아보라면 근래 지어진 대웅전 외벽에 그려진 벽화 정도일 뿐입니다. 벽화에는 신라 헌강왕이 개운포에 내려왔을 때 갑자기 운무가 자욱한 모습, 동해 용이 나타나는 모습, 망해사 절을 짓는 모습, 절터에 남아 있는 석조부도를 만드는 모습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부도가 둘 남아 있습니다. 상륜부는 떨어져 나간 팔각 원당형의 부도탑으로 다소 형식화되었지만 보기 드문 쌍둥이 부도로서 당당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혹시 처용과 관련한 답사지로 이곳을 찾았다면 처용암이 있는 개운포 바다가 보이지 않음에 실망하지 마시고 통일신라 말기에 만들었을 이 부도탑을 통해서 그를 떠올리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동해용은 왕이 절을 지어준다는 그 말에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그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왕을 따라 신라의 서울인 경주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處容)이었습니다. 처용암은 처용이 등장한 바위를 말하죠. 앞서 언급한 처용문화제의 시작은 처용암 앞에서 펼쳐지는 처용에 대한 제의(祭儀)에서 시작합니다. 시장을 비롯한 지역의 대표 인사들이 제의에 참여하며, 이 때 처용탈을 쓴 채 처용무가 한 판 벌어집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처용암을 한 바퀴 둘러봄으로써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용암에서 등장한 처용은 왕을 따라 서울로 올라간 후 미녀를 아내로 맞고 급간(級干)이라는 벼슬도 받게 됩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이제 울산에서 경주로 바뀝니다. 처용은 왜 그 노래를 불렀을까? 처용의 아내가 너무 예뻐서일까요? 역신(疫神)이 그녀를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서는 처용이 없는 틈을 타 그녀와 동침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용을 둘러싼 논란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모습을 보고 과연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일반적으로 한바탕 난리를 부리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노라고 겁을 주었을 텐데, 그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습니다. 그가 부른 처용가는 해석에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밤에 夜入伊遊行如可 밤늦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로구나 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아내의 것이고 二肹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고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대 내 아내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겼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 이 노래를 들은 역신은 그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으며 하는 말이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역신은 질병을 옮기는 신으로 대표되기도 하고, 왕과 대립되는 기득권 세력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또 윤리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환락과 타락을 나타낸다고도 보기도 합니다. 처용가의 내용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외설입니다. 처용이 외출한 사이 처용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은 분명 지탄의 대상이지 관용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와 의견을 달리하는 입장에서는 역신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해서는 곤란하고 처용의 아내를 덮친 역병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용이 아내와 동침한 역신을 춤과 노래 등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 등에서 그의 관용정신과 화합정신을 본받을 만하다고 합니다. 삼국유사는 말 그대로 유사(遺事)입니다. 짧은 필자의 생각으로는 문자로 적힌 그 글을 그대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은유의 의미를 더 중시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은유와 과장의 표현이 수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또 처용설화에서 유래한 처용무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실리고 이후 궁중의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춤입니다. 처용이 가지는 ‘벽사진경’, 즉 악귀를 쫓고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한다는 정신이 반영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처용설화의 핵심이 외설이었다면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 그것도 신성한 왕실에서 행하는 행사 때 처용무가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나름대로의 판단이 궁금하네요. 괘릉에서 처용을 그리다 처용에 대해 나와 있는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이 전부입니다. 처용이 누구냐에 대한 다양한 논란은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 그가 서역에서 온 사람일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 의견은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악학궤범에 나타난 생김새가 우리네 얼굴과는 많이 다른 서역의 인물에 가깝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받는 곳이 바로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입니다. 괘릉에는 화표석(華表石), 무인석(武人石), 문인석(文人石)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어 흥덕왕릉과 함께 다른 신라의 왕릉과는 차별화된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무인상은 서역인을 닮아서 어떻게 신라시대 왕릉에 서역인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중세 아랍 사람들에게 신라는 대서양의 아틀란티스 섬과 함께 동방의 이상향이었다고 합니다. 뜨거운 열기와 척박한 자연 환경에 처한 그들에게 신라 땅은 산수 좋고 기름진 곳이었고 심지어 개 사슬도 금붙이로 만들어 다닌다는 소문이 날 만큼 황금의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 아랍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남해의 바닷길로 무역을 거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처용은 바다를 통해 울산으로 들어온 서역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다분히 가능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부는 자기 아내를 빼앗기고도 춤을 출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그가 벼슬은 있으나 세력이 약한 귀화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고려속요 ‘쌍화점’은 서역에서 건너온 이슬람 사람들이 이 땅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도 괘릉의 무인석과 같은 형태의 토용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서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귀화하여 하사받은 성씨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위에서 가끔씩 높다란 콧대에 우락부락한 서역인의 골격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실크로드 답사 중입니다. 서안을 출발해서 우루무치로 가는 여정에서 중국 내 박물관에서 만나는 토용으로, 양고기를 구워 파는 위구르인의 모습에서 괘릉의 무인석을 떠올리고 있답니다. 일행 중 누군가가 저더러 이쪽 사람을 많이 닮았다고 합니다. 혹시 제게도 처용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이 좋은 가을에 가까운 축제에 참여해 보심이 어떨지요?
앞으로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보다 더욱더 힘든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게 되었다. 내년 하반기에 실시되는 2009학년도 초ㆍ중등 교원 임용시험부터 전형절차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고 논술과 면접 비중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한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경쟁 시험규칙이 개정, 공포되기 때문이다. 특히 눈에띠는 것은 영어 등 외국어 시험을 강화한 부분으로, 실용 외국어 교육 강화를 위해 중등 영어교사 응시자들의 경우 필기시험에 영어듣기 평가가 포함되고 중등 외국어교사 응시자들은 논술형 시험 및 면접, 수업능력 평가를 해당 외국어로 치러야 한다. 초등교사 응시자들 역시 면접 및 수업능력 평가의 일정부분을 영어로 봐야 한다. 이번의 교원임용시험규칙개정으로 한층더 신규교사의 질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규정을 개정한데에는 교원임용시험의 응시자가 매년 증가하면서 한동안은 교원수급에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얼마전에는 사범대학이나 교직과정이 설치된 대학에서 교원자격증을 받기 위한 요건이 강화되었었다. 교원자격증을 받기가 한층 더 어려워지고 임용시험강화에 따라 더욱더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은 험난할 것으로 보인다. 교사의 질이 교육의 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환영할 만한 조치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어려운 관문을 뚫고 교사가 된 후의 사후관리도 중요하다. 사후관리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어렵게 관문을 통과했지만 교사가 된 후의 여러가지 여건으로 인해 실망스럽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교사가 되기전에 생각했던 교직사회의 메리트가 기대보다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원자격증 취득부터 교원임용시험까지 어려운 관문을 거쳤지만 그 결과에 대해 초라함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학교의 제반교육여건도 개선되어야 한다. 훌륭한 인재를 교사로 선발했다면 이들이 선발당시의 역량을 그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여건으로는 신규임용교사들이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배우고 익힌 다양한 교육방법을 적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몇십년이 지나도 그대로 방치되는 교육여건하에서는 어떠한 역량도 발휘가 어렵게 된다. 시설이나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수년째 답보상태에 있는 교원의 보수를 현실적으로 인상해야 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면 그들에게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보수가 필요하다. 관문통과는 어렵게 했지만 현실적인 메리트가 없다면 향후 훌륭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관문통과후 특별한 우대없이 현재와 같이 일관한다면 훌륭한 인재들이 더이상 교직에 몸담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현재처럼 교원을 희망하는 재원이 풍부할 이유가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부에서는 교원양성부터 임용까지의 요건을 대폭강화했으니 이제는 교직사회에 충분한 투자를 거쳐 교육환경개선과 시설개선, 그리고 교원의 보수를 현실화하여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여 신바람나게 학생들을 교육할 수 있는 여건조성에 힘써야 할 것이다. 훌륭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그대로 방치한다면 교육부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한해 동안 유학을 목적으로 출국한 초중고생이 3만명에 육박하는 등 조기유학생 숫자가 매년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26일 교육인적자원부가 한국교육개발원을 통해 집계한 2006학년도 초중고 유학생 출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3월1일부터 올해 2월28일까지 1년 동안 해외로 나간 유학생수는 총 2만9천511명으로 전학년도(2만400명)에 비해 44.6% 증가했다(한교닷컴, 9.26). 이렇게 조기유학에 오르는 이유는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국내에서의 공교육불신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의 모든 교육에 만족하지 못하고 조기유학길에 오르기도 한다. 또한 유학후의 막연한 혜택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조기유학을 위한 출국은 지속적으로 증가될 것으로 보인다. 공교육 활성화 등의 특단의 대책이 나오기 전에는 인위적으로 막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선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 대부분이 불법유학을 하고있다는 것이다. 현행 규정상 초, 중학생의 조기유학은 원칙적으로 허가되지 않고 있다. 국외유학에 관한 규정 제5조(자비유학자격)에서 ‘원칙적으로 자비유학의 자격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이 있거나 이와 동등이상의 학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 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중학생의 해외 조기유학의 길은 막혀있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자비유학은 ‘중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학생이 자비로 유학을 가는 것’을 의미하므로 중학교 재학생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규정을 준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규정을 어겼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적도 거의 없는 것으로 기억된다. 관계당국에서 조기유학을 묵인하거나 방치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규정을 철저히 적용한다면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생의 증가폭이 크다는 것은 불법적인 유학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시대가 변해가는 시점에서 조기유학과 관련된 규정을 바꾸거나 기존규정을 철저히 적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현재처럼 묵인하에 방치해서는 안된다. 조기유학관련 규정을 완화하여 초등학교때부터 조기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위화감 조성등의 문제를 안고있다. 따라서 현재의 '중학교졸업이상'을 '초등학교졸업이상'으로 완화하는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이런 방안이 어렵다면 규정을 철저히 적용해야 한다. 규정이 있으면 당연히 지켜야 하고, 이를 지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규정은 있지만 그 규정이 사문화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결과적으로 조기유학 문제는 빠른시일내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어떤 방향으로 매듭되더라도 조기유학을 막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속적인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검토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달이 바뀌는 날은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된다. 지난달을 되돌아보게 되고 새 달을 설계하게 된다. 10월의 행사계획표를 보니 결실의 풍성한 계절답게 눈에 띄는 게 많다. 종합학예대회, 영어체험행사, 추계소풍, 발명교실 참가, 동천축제, 발명교실 참가, 봉사활동, 환경정화활동 등 많은 계획이 잡혀 있다. 이 많은 것들이 풍성한 결실로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오늘은 10월 첫날이고 월요일인데도 부담없이 잘 오게 된다. 많은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이 가볍기 때문일까? 그렇게 썩 좋은 날씨는 아니지만 마음이 상쾌한 것은 10월 첫날이 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우리 선생님들도 10월을 맞이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생님들 중에는 정말 애먹이는 학생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마다 몇 명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말을 잘 듣는다. 그렇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선생님이 말씀을 하면 아예 귀밖에 듣는 학생들도 있고 선생님 앞에서는 듣는 체하는 시늉을 하는 학생도 있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학생들 때문에 선생님들은 울기도 하고, 속상해 하기도 하고, 병을 얻기도 하고,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불면증을 앓기도 하고, 마음이 편치 못해 직장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도 보게 된다. 선생님을 괴롭히고 선생님의 말을 아예 말을 듣지 않는 막무가내의 학생들은 행동이 마음대로다. 말도 마음대로다. 태도가 엉망이다. 너무나 고집이 세다.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다. 너무나 거칠다. 너무나 난폭하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정도로 불안하고 안정감이 없다. 이러니 선생님들은 힘들어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속으로야 말을 듣지 않지만 겉으로는 듣는 체하고 행동을 옮기는 체라도 하는 학생들은 좀 낫다.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학생들은 사고를 치지도 않는다. 다투지도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만약 다투고 싸우고 하다가도 잘못을 뉘우치고 빨리 정상적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고 이런 학생들을 너무 오래 그대로 두면 안 된다. 체하는 학생들을 두둔하면 계속해서 더욱 체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선생님이 계시면 공부하는 체 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청소하는 체하고, 선생님이 계시면 얌전한 체하지만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공부도, 청소도, 해야 할 무엇도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다. 이런 학생들을 방치하면 나중에 가식적인 사람 만들고 만다. 거짓된 사람 만들고 만다. 이런 학생들은 선생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선생님과 진정으로 통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진정 통하지 못하고 대화가 되지 않으니 그 학생과 선생님과의 관계는 발전이 없다. 믿음이 없다. 희망이 없다. 그러니 아예 대화가 되지 않는 학생, 선생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는 학생, 무엇이든 하는 체, 무엇이든 듣는 체하는 학생들과의 필수적인 것은 대화다. 다시 말하면 통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변화가 올 수 있고 희망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고 고치게 되고 바르게 행하게 된다. 선생님과 학생과의 막힘이 있다면 더 이상 고민하거나 힘들어하지 말고 막힘을 뚫어야 한다. 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먼저 꼬리를 내려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생님이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문을 열 수 있다. 그래야 막힌 담을 헐 수 있다. 10월의 달, 결실의 달에 힘들어하는 학생들로 인해 좋은 수확을 거두었으면 한다. 그 비결은 통함이다. 그 비결은 대화이다. 그 비결은 겸손함이다. 그 비결은 꼬리를 먼저 내림이다. 교육은 통함이다.
“따르르릉~~” “안녕하세요? ○○○입니다. 아시겠어요?” 갑자기 나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떨려왔다. 이게 얼마 만인가? 대학 때 몇 번 만나다가 멀어진 지 삼십 년이 지나 그의 이름 석 자도 지워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갔다. 우리 동네에는 나처럼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는 남학생이 있었다. 예비고사란 것을 치르고 발표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그 남자애가 나에게 슬그머니 쪽지를 내밀었다. “점심시간에 도서관 입구에 잠깐 나오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를 따라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그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다가 저녁에 만나서 집으로 가곤 했다. 그 때만 하여도 남녀가 분리된 도서관이어서 나는 자리에 앉아 내내 가슴을 설레며 그를 생각하면서 시계만 들여다보곤 하였다. 입시가 끝나고 우린 사진을 교환하면서 평생 간직하겠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누나와 형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인사도 시켰다. 나도 언니에게 사진을 보여 주면서 착하고 모범생인 그의 자랑도 조금씩 늘어놓곤 했다. 언니는 피식 웃으며 ‘잘 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 어떤 방법으로 만나서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냥 즐거웠고 많이 웃었다는 것, 분식집과 음악 감상실도 갔었고 단발머리에서 생전 처음 커트를 치고 어색해 했던 기억들... 갓 스무 살의 우린 그렇게 하면서 각자 대학에 들어갔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집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대부분 안방에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를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되던 때에 새내기 1학년들이 소식을 통하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그의 전화가 와서는 “듣기만 해, 내일 네 시에 시민회관 앞으로 나와라”는 말을 하고는 부리나케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약속 장소에서 그는 ‘우리 한 달에 한 번씩 날을 정해 두고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무슨 계모임도 아니고 정한 날에 만나자니...’ 하는 듯한 나의 말에 머쓱했던지 그는 아무 말도 못하였다. 사실 입학하기 전에는 시간도 많았고 할 일도 없어서인지 무척 자주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그냥 만나면 될 것이지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생각과 그리고 솔직히 한 달에 한 번밖에 못 만난다는 것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인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었다. 그 때 그의 말대로 했었더라면... 그렇게 몇 번을 만나다가 미팅이다, 서클활동이다 하는 대학 생활에 젖어들면서 우리의 만남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각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뚜렷한 감정 표현도 없이 미지근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나는 졸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소식이 끊겼던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그를 만나러 갔었다. 만나면 어쩔 것인가? 만나봐야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머리가 가슴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는 내가 살아 온 이야기를 듣고 ‘잘 살고 있구나’ 하면서 자기의 얘기도 해 주었다. 나는 한 살 위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두었는데 그는 부인이 두 살 아래이고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했다. 그는 서른에, 나는 스물여덟에 결혼을 했고 맏이가 우리 아이보다 두 살 적었다. 평소 직장일로 무척 바빴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대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고 자부하였는데 잦은 야근 탓으로 가끔 의혹의 눈초리를 받을 때는 도대체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단다. 내가 생각해도 그는 성실하고 순수한 사람인데 아무리 부부라도 마음까지 다스릴 수 없으니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듯 싶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남남이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스운 것은 각자가 채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그냥 ‘날 잊었나 보다’라고 생각했었고 그는 내 생각이 날 때마다 ‘내가 무얼 잘못했을까?’ ‘왜 연락이 안 올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요즘처럼 ‘우리 사귀자’ 로 시작해서 쿨하게 헤어지는 남녀를 보면 그 때의 우리는 참으로 바보스러웠다는 생각이 든다. 왜 전화를 안 했냐고 뒤늦게나마 따져 보니 오히려 나더러 연락 없었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 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말 그대로 싱거운 옛날 이야기였다. 한참 동안 지난 추억을 더듬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것은 마치 조각난 퍼즐을 맞추는 것만큼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은 이것으로 다함을 슬퍼하며 물처럼 담담한 악수로 인사를 대신했다. 철없던 시절, 모든 것이 서툴었던 우린 좋으면서 손 한 번 못 잡고 억울하게 헤어졌었다. 만약 나의 청춘에 휴대전화가 있었더라면 이러한 오해는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나의 운명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첫사랑은 보란 듯이 이루어져 자랑스런 휴대전화의 수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속한 휴대전화여~ 나의 운명이여!
수업 연구 후 평가반성회 시간. 수업자는 긴장도 되지만 사실 이런 기회를 갖지 않으면 전문성은 신장되지 않는다.자기 수업을 참관자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다. 수업 준비,공개 수업도 중요하지만평가회를 통해 교직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수업 평가반성회는 연구부장 주관하에수업자 자평, 질의 응답, 참관자 소감, 교감의 수업지도, 교장 총평 순으로 진행된다. 과거엔 교감과 교장의 질책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잘한 점은 칭찬하고 개선할 점을 제언한다. 물론 수업자의 이해와 동의가 전제다. "수업 당일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이 없었는데 썬그라스를 쓴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생들에게 긴장을 주려고요." "……." "썬그라스를 쓰면 학생들이 교사의 눈을 볼 수 없어 함부로 장난을 치지않습니다." 학생들을 수업에 집중시키고 밀도있는 수업을 위해 또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수업자가썬그라스를 착용했다는 이유인데 일면 타당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인간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교육은 눈과 눈이 마주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사의 눈빛을 보고 학생이 그 의미를 읽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눈높이라는 말도 있다. 교사와 학생이 가까와지려면 맨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교사의 언어는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교육인 것이다. 어찌보면 잠재적 교육과정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가장 잘 된 교육은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신규교사에게 학생들은 감시와 감독의 대상이며 심지어 통제의 대상이라고인식시켜 준 사람은 누구일까? 대학에서? 임용고사 교육학에서? 아니면 험한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현 세태가 학생들은 순수함을 잃었다고 누가 알려주기라도 했단 말인가! 교사는 법규위반 운전사를 단속하는 싸이카 경찰관이 아니다. 교육의 안내자요 인도자인 것이다.학생들이 배움의 기쁨을 느끼도록 학습에 빠져들게 하는 학습촉진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교사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을 하고 선생님이 좋아서 그 교과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햇빛이 강하더라도 학생들 앞에서는 자주 썬그라스를 벗겠습니다." 체육교사의수용적인 태도다. 반쯤은 양보한 것이다. 신규 체육교사의 수업을 꾸짖는 것이 아니다. 남녀 혼성반의 체육수업 '축구' 단원을 넷볼 규칙을 이용하여 여학생을 적극적으로 수업에 끌어들였다. 남녀가 협동하여 서로 도와주고 협동하며 가르쳐주며 학습목표에 도달하였다. 성공된 수업이었다. 20대 신규교사의 학생관, 수업관을 보고 교육과 수업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소중한 평가회 시간이었다.수업연구가 필요하고 평가 반성회를 꼭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 비오리가 희푸른 파도를 밟으며 날아오르는 곳.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로 지내다가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 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300년 전 조선 영조 때, 한양에서 이조참의(현 내무부 국장급, 문관의 선임과 공훈봉작을 맡았음)란 벼슬을 지내다가 졸지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된 권적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그 유명한 암행어사인 ‘박문수’의 호남관찰사 임명을 반대하다가 영조임금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 벌로 정3품 당상관에서 종6품의 기장 현감으로 강등되고 말았다고 한다. 한양에서 떵떵거리는 고관대작 생활을 하다가 동해 남단의 보잘 것 없는 마을에 사또로 부임하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울분과 서러움에 휩싸였겠는가. 권적은 기장 현감으로 좌천된 후, 답답한 소회를 달래기 위해 원앙대라는 빼어난 절경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 원앙대는 기장군 동암리 남쪽해변에 있는 암석지대를 말하는데, 당시 그는 기장읍 교리 출신의 신오라는 사람과 사귀면서 늘 이곳에 놀러 왔다고 한다. 요새말로 하면 서울의 중앙관서에서 잘 나가는 고급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촌구석으로 발령받자 공무는 제쳐놓고 친구와 더불어 경치 좋은 곳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때웠다는 이야기다. 이곳이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 또한 무척 낭만적이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비오리가 많았다고 하는데, 높직한 암대 위에 서서 멀리 바다를 쳐다보면 비오리들이 대 아래 출렁이는 희푸른 파도를 탈듯 말듯 하다가 일시에 큰 무리를 지어 까마귀 떼처럼 날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비오포(飛烏浦)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이 ‘비오리’라는 오리과의 물새는 자줏빛이 찬란한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항상 암수가 함께 노는 새라고 한다. 결국 비오리는 바다의 원앙새라고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원앙대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적이 이곳의 큰 바위에다 ‘시랑대’란 글씨와 위의 시조를 각자한 후로, 이곳은 원앙대가 아닌 시랑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시랑’이란 판서에 버금가는 벼슬로서 권적은 그의 예전 벼슬인 이조참의를 판서 직에 버금가는 계급으로 자화자찬하면서, 자신의 노골적인 출세 욕구를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어쨌든 권적의 엘리트주의적인 개명이 눈에 거슬리긴 하나, 시랑대는 동해남단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경치를 가진 곳임에 틀림없었다. 파도가 흰 거품을 내며 밀려와서 암대의 칼 같은 바위에 부딪힐 때마다, 오색무지개 색깔을 띤 비오리가 춤추듯 날아오르는 모습은 얼마나 환상적이었겠는가. 또한 노송 우거진 절벽과 고요한 바다를 비추는 달빛을 보면 이곳이 과연 인간세상인가 절로 의심이 들지 않겠는가.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면, 멀리 중국의 시인 묵객들이 해동국의 시랑대를 보고 죽으면 원이 없다고 했을까. 권적의 시조 각자 후로, 시랑대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시랑대를 운자로 한 시조가 수도 없이 새겨졌다고 하였다. 기장현감 윤학동의 시와 김후 육천민의 시도 각자되어 있었고, 차성가라는 시조도 있었으며, 고종 연간에는 홍문관 교리 손경현이 남긴 시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월천선생(1714∼1786)은 라는 글에서 시랑대의 절경을 구구절절이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시랑대에는 어느 스님과 용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온다. 동해 용왕의 딸과 스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전설과 빼어난 풍광을 지닌 시랑대는 지난 1960년대만 해도 수많은 한시 가 새겨진 절경의 바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세월의 풍파에 못 이겨 이 절경의 바위들이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또한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이 바위들이 발파를 당해, 지금은 그 예전의 풍광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라고 하니 그 서글픈 심정을 어찌 필설로 다하리.
사범학교, 교원임시 양성소 수료자 임용 국공립 사범대 졸업자 우선 채용 -대학 소재 지역 교원으로 우선 발령 -부족 교원은 교직 과정 출신 등을 대상으로 순위고사를 통해 임용(1973년) ‘국립사대 우선 임용’ 위헌 결정(1990년)으로 공개경쟁 전형으로 전환 -위헌 결정에 앞선 1989년, 교육부는 미발령자 적체 개선 대책으로 국립사대 졸업생 우선 임용 제도를 공개 전형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음. -91~93년간 한시적으로 국립대 졸업생 70%, 사립 졸업생 30% 할당 선발 -1994년부터 완전 공개 전형 체제로 전환 사범계 대학 지역 가산점 위헌 결정 -위헌 결정(3월)에 따른 후속 조치로 2004년 9월 교육공무원법 개정해 2005학년도 입학생까지만 2010년 공고 임용 시험까지 한시적으로 가산점 적용키로 결정.
내년 후반기에 치르는 2009학년도 교사 임용 시험부터 전형 절차가 2단계에서 3단계로 바뀌고 논술과 면접, 영어 비중이 강화된다. 교육부는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 경쟁시험 규칙을 개정해 10월 1일 공포한다고 30일 밝혔다. 그동안 임용 시험이 단편적인 암기 위주의 1차 필기시험 비중이 지나치게 커 교사로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르면 현행 1차 필기시험(단답형 및 4지선다형), 2차 논술 및 면접ㆍ실기시험으로 돼 있는 시험방식이 2009학년도부터 1차 선택형 필기시험(5지선다형), 2차 논술형 필기시험, 3차 교직적성 심층면접과 수업능력 및 실기ㆍ실험평가로 바뀐다. 현행 1차 시험에서는 전공·교육학 100점, 대학 재학 성적 20점, 가산점 10점이지만 개정 규칙에서는 선택형 필기시험 100점, 대학 성적 20~40점, 가산점 5~10점으로 하고, 영역별 배점 비율은 각 시도교육청이 정한다. 외국어 구사력과 수업능력을 지닌 교사를 선발하기 위해 중등 영어교사는 1차 시험에 영어듣기 평가를, 중등 외국어 교사는 2차 논술형 시험, 3차 면접 및 수업 능력 평가를 해당 외국어로 실시한다. 초등교사도 3차 면접 및 수업능력 평가에서 일정 부분을 영어로 실시한다. 1차 시험에서는 임용예정 인원의 2배수 이상을, 2차 시험에서는 1.5배수 이상을 뽑고 1차 및 2차, 3차 시험 성적을 각각 100점 만점으로 환산해 합산한 성적순으로 최종 합격자를 선발하도록 했다.
-14개 취미·건강·문해교실 3년간 운영- 전라북도교육청 지정 평생교육 시범학교를 운영한 김제 원평초등학교(교장 유주영)는 9월28일(금) 활동 공개 및 보고회를 가졌다. 원평초는 지역주민 대상 평생교육프로그램 14개 취미·건강·문해교실을 3년 동안 운영하고 있다. 2005년 4월부터 시작한 평생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매년 250여 명의 수강생들이 주2회씩 학교를 찾아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간의 성과 및 운영사례를 100여 명의 도내 각급학교 교사 및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공개 보고한 것이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수영반, 우리글교육반, 생활영어반, 어머니배구반, 사물놀이반 등 8개 반에서는 실증수업을 전개하였고, 생활도예반, 한지공예반, 사물놀이반, 사군자반, 서예반 등은 그동안 갈고 닦은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유주영 교장은 재정 부족으로 전문 외부 강사에 의한 수준 높은 교육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쉬웠지만 본교 교사들의 전문성 확보를 위한 전문학원 연수와 적극적인 열성으로 시골 학교에서의 평생교육의 붐을 조성할 수 있었으며, 특히 할머니들의 건강수영(92명)이나 우리글교육반(35명) 활동에 대해서는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최규호 전라북도교육감은 김범재 초등교육과장이 대신 읽은 격려사를 통해 원평초등학교의 평생교육 운영사례는 다른 학교에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며 평생교육, 방과후학교 등 지역과 함께하는 교육공동체의 견고한 구축으로 공교육 활성화를 당부하기도 했다. 박공우 김제교육장은 인사말에서 시골학교에서도 교육시설 및 교육인적 자원을 학생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에 활용하여 학교가 농어촌 지역 교육문화센터의 중추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참관 교사들은 시골학교의 특성상 수강생들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텐데 250여 명의 수강생들이 등교하여 활동을 하고 있는 점은 무엇보다 큰 성과라고 칭찬을 하였다.
이번 추석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방문하면서 한국인 남자와 외국인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흔히 코시안이라고 하여 한국인과 아세아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지칭한다. 지난 1980년대부터 농촌 총각의 결혼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외국 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을 강조한바 있다. 실제로 최근 수년 사이에 이러한 형태의 국제결혼이 증가하고 이러한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도 적지 않다. ’05년 우리나라의 국제결혼 건수는 4만3,122건으로 전체 결혼신고 건수의 13.6%가 국제결혼이다(통계청).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여 ‘90년 1.2% → ’00년 3.7% → ‘04년 11.4%→ ‘05년 13.6%이다. 특히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외국여성과 한국남성 결혼 비율이 급증하는데 농어촌 지역은 전체 결혼의 35.9%가 외국인 여성과의 국제결혼으로 농촌 총각 3명 중 1명은 국제결혼이다(06.3. 통계청). 국적별로는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이 47.5%, 중국 17.3%, 일본 10.6%, 필리핀 8.2%, 베트남 7.0% 순으로 나타났다. 현재 초・중・고 재학 중인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총 7,998명이다. 이 중 초등학생이 85%로 대부분을 차지(중 11.6%, 고 3.5%)하고 있다. 즉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초등학교가 6,795명, 중학교가 924명, 고등학교가 279명이다. 보건복지부 조사 결과 여성 결혼이민자 자녀 중 3세 이하 비중이 27%, 4~5세가 16.4%로 나타나 향후 학교에 입학하는 국제결혼가정 자녀수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복지부 2005년 여성결혼이민자 가정 945쌍 표본조사). 국제결혼가정 자녀 중 어머니가 외국인인 경우가 전체의 83.7%(6,695명)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초등학생 5,854명, 중학생 682명, 고등학생 159명으로 각각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1,852명(23.1%)으로 가장 많고, 서울 12.2%, 전남 11.8%, 전북 9.1%, 경북 6.0%의 순으로 나타났다. 최근 언론에서도 이들 외국인 어머니에게서 자라온 아이들의 문제를 여러 가지 제시하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들의 언어능력 부족, 정체성 혼란 및 이들에 대한 집단 따돌림현상이 심각하다. 이런 아이들이 한글을 터득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가서 학력이 떨어지고 있다. 특히 농촌에 사는 한국인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로 구성된 가정의 경우 한국인 아버지가 자녀의 교육에 무관심한 사례가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농촌 총각이 결혼하여 다문화 가정을 이룬 다음 아빠는 교육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학생의 받아쓰기와 같은 것은 한국인 아빠가 지도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받아쓰기 지도마저도 아빠가 돌보지 않고 있다. 이들 외국인 엄마를 둔 아이들의 문제는 언어 능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학습부진의 정도가 심각하며, 일상대화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독해와 어휘력, 쓰기, 작문 능력이 부족하며, 정체성의 혼란과 건강하지 못한 정서적 충격을 경험하고 있다. 국제결혼 가정의 자녀는 10명 중 2명 정도가 집단 따돌림을 경험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집단따돌림을 당한 이유는 엄마가 외국인이기 때문에가 34.1%, 의사소통이 잘 안되어서 20.7%, 특별한 이유 없이 15.9%, 태도와 행동이 달라서 13.4%, 외모가 달라서 4.9%, 기타 22.0%로 나타나고 있었다. 현재 자녀와 동거하고 있는 응답자들 중 그들 자녀가 또래 아이들로부터 집단 따돌림을 경험했다는 비율은 17.6%이다. 도시보다는 농촌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자의 자녀가 집단 따돌림을 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 미취학자녀를 두고 있는 결혼이민자 중 자녀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낸다는 사람은 14.5%로 우리나라 미취학 자녀의 보육시설 이용률 56.8%보다 현저히 낮았다. 결혼이민자가 자녀를 양육하면서 겪는 어려움으로 높은 양육비용과 사교육비를 들고 있다. 자녀의 숙제를 거의 못 봐준다는 비율도 55%나 되고 있다. 국제결혼가정에 대한 민・관 지원은 이제 태동 수준으로, 체계적인 지원은 미흡한 실정이며 특히 그동안 그 자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크지 않았다. 다행히 각 지자체 및 교육청에 전담 부서 신설하고, 다문화 가정 학습자를 위한 교재를 개발, 다문화 가정 이해를 위한 교사 연수 및 자료 개발을 추진중이다. 우리 교사들도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를 증대하고 이들 학생지도방안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특히 농촌지역의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이들 코시안 학생에 대하여 특별한 지도를 하여야 하겠다. 자녀교육을 위하여 한국인 아버지들이 더욱 관심을 갖고 자녀의 언어교육을 하도록 윧ㅎ하여야 하겠다. 아울러 초등학생들이 코시안 학생을 따돌림하는 것을 막아야 하겠다.
교육부의 일제 청산방침에 따라 기존의 교실에 걸려있던액자형 태극기가 족자형 태극기(사진 위)로바뀌었다. 민족정기 회복과 학생들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전국의 초·중·고 교실에 게시되었던 태극기가 이번에 전격 교체되었다. 종전의 액자형 태극기는 일제의 잔재로서,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한민족 말살과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우리나라 교실에 강제로 일장기를 게시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시행되어왔다. 따라서 우리 서령고에서는 이번 교육부의 일제 잔재 청산 방침에 따라 액자형 태극기를 정부 권장용인 족자형 태극기로 교체하게 된 것이다. 족자형 태극기는 원목으로 만든 판에 태극기를 부착한 것으로 액자형 태극기보다 훨씬 고풍스런 맛이 있으며, 크기 또한 황금비율인 3대2로 맞추어 예전의 액자형보다 아름답다. 전국의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실시된 정부의 액자형태극기 교체 정책은 일제식민지배의 잔재를 하나씩 없애고 우리 민족의 정기와 얼을 새롭게 회복해가려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9월 28일 8교시, 1, 2학년 학생들 모두가 교실 앞 화단에 모여 학교의 미관을 해치는 잡초들을 제거했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려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은 리포터의 무릎에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자라있었다. 또한 뿌리도 깊이 박혀서 뽑기에도 많은 힘이 들었다. 학생들은 옆 친구와 장난도 치고, 때로는 사마귀를 보고 놀라기도 하면서 한 시간 여 동안 열심히 잡초를 제거했다. 그동안 교정을 지나면서 잡초가 이렇게 무성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학생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맡은 일을 수행했다. 가벼운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벌어진 이날의 작업으로 학생들은 친목도 도모하고 깨끗한 화단도 만드는 등 일석이조의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작업이 끝난 후, 각자가 뽑은 잡초들을 퇴비로 만들기 위해 모두 한 군데로 쌓아올렸더니 그 무더기가 사람 키만큼이나 되었다. 학생들의 노력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교정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