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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드디어 한 학기가 갔다. 1학년인 우리 반 아이들은 처음으로 한 학기를 보내고 방학을 잘 보내고 있겠지.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으니 국어 쓰기 마지막 시간이 생각난다. 부모님께 감사의 편지를 쓰고, 그 다음은 나를 도와 준 친구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했다. 끝으로 선생님께 편지도 썼다. 아직 혼자서 글을 쓴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는 아이들이 많아서 편지의 틀을 어느 정도 잡아 주고 조금씩 바꿔서 쓰라고 지도하고 있다. 그것도 어려우면 지금은 선생님과 똑같이 써도 된다고 일러줬었다. 마침 과자도 넉넉히 있어 발표하는 아이들의 입에 과자를 하나씩 쏘옥 넣어주었더니 더 열심히 손을 들고 발표를 자청했다. 1학년 수업에는 가끔 과자가 사용되기도하는데 긴 빨대에 10개씩 과자를 묶었다가 하나 둘씩 먹으면서 덧셈과 뺄셈에 활용하기도 하고 물고기 모양이 다양하게 있는 과자를 이용해 ‘분류하여 세어보기’에 이용해보기도 하는 식이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는 이 수업방법은 그 모습에 나도 힘이 났었다. 비록 과자 때문에 발표하게 됐지만 그날 발표했던 학생들 중 J군의 편지를 소개해 보겠다. 비록 맞춤법은 좀 틀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정겹다. ‘선생님께, 공부 가리켜 주셔서 고맞습니다. 아프로 더 선생님 말씀 잘 들을 게요. 선생님, 하늘만큼 땅만큼 바다만큼 나무만큼 우주만큼 사랑해요. 오래사세요. 고맞습니다. 선생님. ○○○올림’ ‘세상에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분 좋아졌다. 편지 발표가 모두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됐을 때었다. S양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왔다. 나는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은빈아, 어디 아프니?” “아니오.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읽어 보니까 갑자기 졸업하는 것 같아서 슬퍼졌어요” 이 귀여운 녀석들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순수한 모습으로 늘 나에게 감동을 줬던 이 아이들, 벌써부터 개학이 기다려진다.
이원희 회장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0년 전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전국교육자대회에서 였습니다. 그 후 여의도 광장, 서울역 앞 등에서 정년단축반대, 사학법 개정, 교사평가반대 등의 큰 집회가 있을 때 마다 호소력 있는 사회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그 후 TV, 라디오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한 이론을 전개하며 설득력있는 토론모습으로 보여줬을 때 관심을 갖고 시청하던 교총회원들의 가슴에 든든한 믿음과 승리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또 서울사대 재학 시 학생회장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해 감옥살이까지 했던 쓰라린 경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언론을 통해 알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교총회장의 자리는 현학적 이론의 틀에 갇혀 음지식물처럼 있어서만 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들판에 있는 야성을 발휘해 때로는 정부종합청사 앞이나 국회, 또 거리에서 어깨띠를 두르고 용기 있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는 이론과 실천, 양면성의 능력 발휘가 필요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수석부회장을 맡아 발휘해 온 경험과 노하우가 앞으로 회장 업무 수행에 큰 밑거름이 되어 충분히 잘할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또 교총이 회세확장과 조직력 강화, 활발한 정책개발, 홍보력 강화 등 당면한 절체 절명의 과제가 많은 것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과제가 구호로만 남지 않고 실천적으로 실현되는데는 18만 회원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 유도로 다양한 창의력이 분출돼 최대공약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민주적 여과장치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번 선거에서 낙선한 두 분도 지금까지 우리 교총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분이시고 훌륭한 인적 자산입니다, 그분들이 내세운 공약들도 관심을 기울여 살펴보면 금과옥조로 삼을 번쩍이는 아이디어가 많을 것입니다. 대승적 견지에서 포용하는 마음으로 적극 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 3년 후 임기를 마칠 때에는 첫 케이스인 교사회장의 시대가 갚진 역사적 금자탑으로 기록되길 바랍니다,
이원희 회장의 취임을 축하드리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 60년이라는 긴 세월을 발판으로하여 이제야 보통교육자 중에서 회장이 선출되었는지 늦은감이 없지 않다. 그 중에서도 교장이나 교감이 아닌 교사가 회장으로 당선되어 회원들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지켜보고 있다. 나는 이 회장이 지난 3년 동안 수석 부회장으로서 TV 생방송, 라디오 토론, 각종 세미나와 학술대회에서 우리 교원을 대표하여 당당하게 이론을 전개하는 것을 보아왔다. 그래서 이 회장의 공약이 몸소 느낀 간절한 소망으로 생각하며 반드시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내친김에 교총회원으로서 몇 가지 희망사항을 적어 함께 꿈을 가꾸어 나갈 것을 약속하려 한다. 첫째, 교원들은 전문직 단체임을 확고히 해야 한다. 전문가로서의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수석교사제를 반드시 이루어 내기를 바라며 무자격자를 교장으로 공모하는 일을 막아 줄 것을 바란다. 둘째, 교원정년을 다시 원상 복구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국민 평균수명 80세를 넘어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고, IMF로 국민 고통을 함께 감수한다는 차원에서 단축한 것이기에 반드시 복구 돼야 한다. 셋째, 한국교총 회장은 전임으로 근무해야 한다. 18만 교총회원과 고락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학교의 수업이 우선돼야 한다면 어려울 것이다. 부회장과 이사중에서도 회장을 보필 할 분이 전임으로 함께 근무한다면 우리 회원들은 필요할 때 우리의 대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회원들의 역할도 있다. 임원진과 사무국이 우리의 권익을 위하여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늘 관심을 보여 줘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87%의 높은 투표율은 우리 회원들의 성숙도를 잘 증명해 주는 것으로 매우 고무적이다. 이제 전문직 단체의 회원답게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한다. 끝으로 우리 한국교총은 전문직 교원단체 이전에 교원으로서 학생들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와 미래를 함께 해 나가야 한다. 교원이 학생을 올바로 가르치지 않고, 나라가 바로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권익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세진 전북 전주공고 교사는 최근 그동안 기고했던 소설평론, 수필평론, 문화평론 등으로 만든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펴냈다.
김미영 전 한국교총 선임연구원은 최근 이화여대에서 ‘교육행정의 불확실성에 대한 공동체적 대응과 자율성 확보’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충북도교육청은 1일부터 사흘 동안 초등학교 교원들을 대상으로 과학실험실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연수를 실시한다. 도교육과학연구원이 실시하는 이번 연수는 지역교육청에 근무하는 초등교원 40명이 참가한 가운데 초등교원의 과학실험 지도능력을 배양하고 학생들에게 탐구능력과 과학적 흥미를 유발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추진된다. 연수는 그동안 학교에서 발생했던 크고 작은 안전사고에 대한 원인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안전에 대한 일반상식 위주로 지도교사들의 실험실습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안전이 확보된 효율적인 실험을 통해 과학교육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연수에 참가한 교원들은 내년 각 지역교육청별 안전부문 연수 강사 요원으로 활용된다. 도교육청은 앞으로도 교원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안전실험 연수를 통해 수준 높은 탐구학습을 실시하도록 할 계획이다.
한일랑 교장선생님(2006년2월, 원평초교/정년퇴임), 40년의 긴 세월동안 사랑과 열정으로 학생교육에 전념하시다가 정년퇴임하신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갑니다. 우연히 교장선생님의 교단생활 마지막 1년을 같이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만 열정과 사랑이 넘치던 학생교육과 교직원을 관리하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아직도 학교교육의 현장(김제중/배움터지킴이)에서 학생 생활지도에 최선을 다하고 계시기에 참으로 다행이라 여깁니다. 교장선생님만이 지닌 학생교육의 노하우가 교육 현장에서 크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300여 명의 전교생 이름을 모두 아셨습니다. 부임하신지 1년밖에 안되었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시지도 않는데도 학생들 이름을 모두 아셨습니다. 아침 등굣길 교문에서 만나는 학생마다 이름을 부르시며 무슨 말씀이던지 한마디씩 해 주셨습니다. “잘 잤니?”, “더 예뻐졌구나!” 얼굴을 낮추고 등을 다독거리면서 하시는 말씀 한마디는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 주는 첫 인사가 되었었습니다. 출입구에서 복도에서 만나는 학생들마다 이름을 불러주며 생활지도상 필요한 말씀까지도 해주셨습니다. 문제점 있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가정실태, 학업실태, 성격 등을 미리 파악하고 계셨기에 짧은 한마디 속에도 교육적 배려가 배어있었습니다. 점심식사 후 쉬는 시간이면 으레 교장실에서는 서너 명의 학생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웃고 떠드는가 하면 진지하고 심각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생활지도가 필요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상담의 장을 만드셨습니다. 친구처럼 대하시기에 교장선생님이라는 벽을 느끼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사소한 일만 생겨도 우르르 교장실을 찾아가는 학생들을 수없이 보았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교육은 효과적이었습니다. 요즘의 학생들은 주의력 집중력이 무척 약합니다. 몇 분간의 짧은 시간조차 견디지 못하고 발장난, 손장난, 친구간의 잡담 등 때문에 전체 학생들을 모아놓고 하는 훈화 및 생활지도의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으시면 학생들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불을 토하는 듯한 열정적인 웅변은 학생들의 흩어진 정신을 집중시킬 수 있었습니다. 번뜩이는 시선에서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은 설득과 설명이 분명하였습니다. 감동과 감화를 일으키는 훈화였습니다. 근래에는 논술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온통 글짓기지도 열기에 빠져있습니다. 글짓기야 말로 논리적인 사고력과 창의성을 신장시킬 수 있는 교육방법이라고 합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이미 교직 초임시절부터 글짓기교육의 중요성을 아시고 글짓기 교육에 최선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글짓기반을 조직하고 특별지도를 하셨습니다. 재직 중에 학급문집은 물론 학교문집을 제작하는 등 글짓기 능력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셨습니다. 40여 년간의 일편단심 글짓기 특별지도로 상당수 제자들을 문인으로 기자로 길러 내기도 하셨습니다. 퇴임 전 마지막 1년 동안에도 모든 담임교사들의 출장 시 보결수업을 도맡아 학생들에게 글짓기지도와 생활지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모기업으로부터 글짓기 능력 최우수학교로 지정받아 많은 상금을 받기도 했습니다. 교직원 회의를 할 때마다 나눠주시는 유인물에는 아름다운 글귀(시)와 업무 추진에 애쓴 교사들을 칭찬하는 말씀과 학생생활지도에 필요한 사례 및 지도방법과 교사로써의 반듯한 품행을 당부하는 말씀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칭찬을 아끼시지 않았습니다. 큰 시행착오도 잘못을 지적하고 자극을 주기보다는 격려와 도움말로 기분 상하지 않게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을 실천으로 옮기셨습니다. 사소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퇴임하신 후 편안한 나날을 보내시기 보다는 어렵고 힘든 ‘배움터지킴이’가 되셨습니다. 학생 교육의 현장에서 훌륭하신 교육경험에 의한 교육력(상담)을 발휘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사춘기의 중학생들에게는 교장선생님 같은 훌륭한 선생님들의 교육이 절대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 학교에 초청받아서 학생특강(생활지도)을 하신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정년퇴임식을 할 때 장년의 제자가 연단의 교장선생님 앞에 가서 넙죽 엎드려 큰절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생이었던 교장선생님을 만난 짧은 인연이 평생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참석자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의 인연이 평생의 사제간의 인연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은 교장선생님의 지극한 인간적인 배려와 교육적인 추수지도의 결과라고 생각하면서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던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있을 때는 그저 그런가보다고 간과했던 일들이 1년 반이 지난 지금은 새삼 의미가 커져가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께서 보여주셨던 그 모습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바람직하게 학교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요즘,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성취하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시옵소서. 이천칠년 칠월 그믐날 이학구 드림
어느 등산가가 말 했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 그러나 때로는 자신이 거기 있어 산으로 가기도 한다. 나는 혼자가 좋을 때가 많다. 언제부터인가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 불편하게 여겨졌다. 마음이 편한 친구 몇이서 다니는 것은 좋다. 아니면 혼자가 더 좋다. 혼자는 쓸쓸한 반면 편안하다. 오늘은 혼자인 나를 일으켜 세워 산으로 데리고 가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무료하여 점심도시락을 준비하여 산으로 갔다. 물론 이름난 산은 아니고 동네에 있는 산이다. 버스를 대절해서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많다. 산행의 동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산을 만나기 위하여 가는 산행도 있지만 나를 만나기 위하여 산행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나는 명산의 수려함이나 그 꼭대기를 내 발로 밟아야 한다는 그런 목적은 아니다. 그냥 '산은 다 산이다'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내게 가장 편한 친구를 만나게 해준다는 마음으로 나를 데리고 나섰다. 사실 산은 쳐다보지도 않고 길만 따라 그냥 간다. 앞도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귀에다가 리시버를 끼우고 음악을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간다. 얼마간은 무심(無心)으로 가게 되고 때로는 이런 저런 묵상(黙想)도 하게 된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니 하얀 구름이 줄을 긋고 산허리를 넘어 갔다. ‘참 좋다’하고 가슴으로 말한다. 어쩌면 목표가 없이 사는 인생이 행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냥 가는 것이다. 가다 보면 가야 될 곳이 생기기도하고 보아야 할 것도 생기고 쉬어야 할 곳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자리에서 영면(永眠)하는 것, 그런 삶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한 시간을 걷고 나니, 고갯마루에 도착하였다. 누군가가 죽은 나무를 이용하여 걸터앉을 수 있도록 의자도 만들어 놓고 이정표도 세워두었고 붉은 천 조각을 매 달아서 가는 길을 알려 놓기도 하였다. 인생이 고달프더라도 쉴 수 있는 곳을 가지고 있을 때 다시 일어나 걸어 갈 수 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쉴 수 있는 공간이나 마음을 만들어 준다면 하룻밤 쉬어서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으리라. 인생에는 몇 개의 고갯마루를 거쳐야하는 것이다. 두려워하거나 힘들어만 할 일은 아니다. 그 곳에는 의자도 있고 안내표시도 있다. 천천히 산(山) 공기를 깊이 들여 마시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냥 일어나 계속 가는 것이다. 고갯마루에는 서너 곳의 갈림길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 같은 산행에서는 갈 곳에 대한 선택을 요구 받는다. 이정표에는 거리가 표시되어있다. 우선 보아 평탄하게 보이는 곳과 가팔라 보이는 곳이 육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건 육안에 들어오는 것에 불과하다. 보기에는 평탄해도 한 구비 돌아가면 어떤 상황의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 초행(初行)에는 알 수가 없다. 인생은 누구나 초행이 아닌가. 우선 보기에 가파르다고 외면할 것도 아니다. 그 가파른 고개를 넘어가면 얼마나 평탄하고 아름다운 길이 준비 되어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인생은 누구나 초행이니까. 그러니 머리를 굴리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잔꾀부리지 말고 그냥 가는 것이다. 이런 인생은 너무 대책 없는 인생인가. 인생의 대책이라. 그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로다. 산이 가지고 있는, 산이 보여 주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냥 쉬엄쉬엄 가는 것이다. 오늘은 가파른 길을 택했다. 평지 보다 속도가 늦은 것 같다. 그러나 숨은 더욱 가쁘게 쉬어야했다. 가파른 비탈 한쪽에 무덤이 있었다. 배낭을 벗고 죽은 자의 주택 툇마루에 앉았다. 물 한 잔을 마시고 한 개만 가지고 온 사과를 여기서 깎았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매일 산자와 산다는 것이 결코 생동감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친한 친구가 배신을 하고 믿었던 회사가 부도가 나고 사랑하는 부모형제가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자연산 회를 먹고 식중독이 걸리기도 한다. 살아 있는 것이 반드시 편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끔 죽은 자들 옆에서 죽은 자들의 평화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영원할 수 없으며 죽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살아있음에 대하여 감사하고 겸손함을 죽은 자의 옆에서 배우게 되는 법이다. 내가 여기서 물 한 잔을 마시고 단 하나 가지고 온 사과를 깍은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의미를 새겨 놓고 일어섰다. 다시 일어나 가파른 산길을 숨을 몰아쉬면서 올라간다. 그러나 산위에 무엇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나 반드시 올라가서 정복을 해야겠다는 절박함이나 간절함을 가지고 오르지는 않는다. 나는 길이 계속 있으니 가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좋은 것도 있다. 산을 오를수록 주변의 산이 낮아지면서 내 눈 아래로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나쁜 쾌감이라는 향의 유혹에서 멈칫 거리게 된다. 묵묵히 받아라. 그리고 마셔라. 그렇게 산신령이 말씀하시는데도 말이다. 삶을 연구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있는 대로 보고 다가오는 대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소유욕과 지배욕을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은 치열하여 때로는 열정으로 아름답다 하기도하고, 때로는 치졸하여 스스로를 한 없이 왜소하게 만들기도 한다. 산을 오를수록 낮아지는 주위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오를수록 낮아지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정상에 서서 '야호'를 외치는 마음은 정복자의 감격일가. 삶의 찌꺼기를 토(吐)해 냄에 대한 시원함일까. 두 시간을 걸어서 나는 첫 번째 작은 봉우리위에 올랐다. 많은 산들이 내 발아래로 엎드리고 있었다. 울컥 서러움이 몰려들었다. 그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첫 번째의 의미가 의미로 형상화 되면서 주는 새로운 깃발이 되어서 펄럭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잠시 후 고개를 돌려 사방을 둘러보니 더 높은 봉우리가 몇 개 더 눈에 들어왔다. 한숨이 나왔다. 채우고자 함으로 인해서 좁아진 나의 공간의 비명이리라. 인생에 있어서 목표는 부질없다. 목표를 위하여 살면 죽는 날까지 목표를 위해서 목표만 바라보다 죽게 될 것이다. 사는 것은 사는 것일 뿐이다. 스스로 굴레를 만들 필요는 없다. 내 마음과 산이 손을 잡으면 평화와 행복을 입고 안고 가는 것이다.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갖는 생각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라. 위로 올라 가야하는 이유를 물어 보라. 아, 인생의 본질은 욕심을 채우려고 허덕이다가 죽는 것이구나. 첫 번째 봉우리를 자신의 마지막 봉우리로 가슴에 품으면 행복할 것 같다. 법정(法頂)의 말씀 중에 한 벌의 다기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다기를 한 벌 더 선물로 받으니 그 소중함이 덜 하여 한 벌을 남에게 주었더니 훨씬 더 소중하고 좋아 보였다 하셨다. 정복은 욕심이며 욕심은 소중함을 갉아 먹게 되는가 보다. 나는 ‘첫 번째.의 의미를 잃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의 의미도 함께 공유하기를 원한다. 나는 그 작은 정상에서 다시 돌아 갈 것을 결정하였다. 나의 체력을 알기 때문이다. 언젠가 돌아올 체력을 생각지 않고 갔다가 혼이 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첫 번째 봉우리를 마지막 봉우리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음과 또 한 여기 까지가 오늘 내가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반드시 왔던 길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돌아갈 여력을 생각지 않고 앞으로만 가다 보면 어느 산길 험한 계곡에서 영원히 머물지 모른다. 욕심에 대한 자제와 자신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잃지 말아야한다. 자기를 지나치게 앞으로 내몰아 혹사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산이 허락한 이상의 영역을 침해하지 말아야한다. 더 이상 새로운 세계는 없기 때문이다. 모양과 색상만 다를 뿐이지 그 영혼의 세계는 한가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은 산 한곳에 이르고 세상의 모든 산을 너끈히 가슴에 품을 수 있는 인생이 아름다울 것이라 믿고 싶다. 나는 그 작은 산 정상에서 도시락을 열지는 않았다. 사방을 한 번 씩 둘러보고 나니 알 수 없는 산의 어떤 기운이 바람을 타고 발끝을 쓸며 머리끝으로 빠져 나갔다. 참으로 힘들게 오른 산이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곳에 오래 머무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인생은 언제나 황홀한 것은 아니다. 회사의 대리가 팀장이 되던 날 많은 동료나 친구들과 건배를 하면서 축배를 든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오래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과 다시 여기서 도시락을 함께 먹을 것에 대하여 염려하게 된다. 또 다른 사람들과 제2의 건배를 위하여 일어서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잦은 건배는 참으로 피곤한 일임을 아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 작은 산정(山頂)을 나는 다시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산 7부 능선을 걸으면서 휘청거리는 다리를 위하여 바람을 막아 주는 바위가 고고히 앉아 있고, 그 앞에는 천년을 한 결 같이 품기만 했음직한 노송이 굽어보는 양지에서 도시락을 풀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놓고 소리 없이 웃었다 .혼자서 침묵과 함께한 산행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산이 씩 웃어 줌을 내가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들래 마을에서 키 작은 아이들을 한 없이 사랑하는 무관의나를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 행복한 등산이었다.
광주시 교육청이 의욕적으로 추진중인 외국어고 설립사업에 제동이 걸렸다. 1일 교육인적자원부와 광주시 교육청에 따르면 시 교육청은 2010년 3월 개교를 목표로 지난 5월 호반건설 계열인 학교법인 태성학원을 적격대상으로 선정하는 등 외국어고 설립 사업을 추진중이다. 태성학원은 동구 선교동 1만2천여평에 5천400여평의 교육시설을 갖춰 2010년 3월 영어.일어.중국어 등 3개 과에 학년당 8개 학급, 720명의 학생을 선발한다는 구체적 청사진까지 마련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지난 5월 특목고 지정.고시 때 사전에 교육부와 협의토록 하는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내놓아 사업추진에 제동이 걸렸다. 더욱이 교육부는 "외고와 관련한 문제점들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며 신설에 신중한 입장을 보여 협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다 '입시명문고'로의 변질을 우려한 전교조 등의 반대여론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외고 설립은 자칫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시 교육청 관계자는 "외고 난립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 협의규정을 신설했다지만 광주의 경우 울산.충남.강원 등과 함께 외고가 없는 몇 안되는 곳"이라며 "시 교육청의 설립의지를 확고히 전달하고 교육부와의 협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교육부로서는 여러 지역의 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설립 전망을 예측할 수는 없다"며 "정책적 의지가 중요한 사안인 만큼 큰 흐름이 결정된 후에 구체적 논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1일 개별 법학전문대학원 입학 정원 상한선(150명) 등을 규정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로스쿨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이번 시행령은 지난달 27일 공포된 로스쿨법에서 위임된 사항과 시행에 필요한 부분을 담고 있으며 2005년 5월 16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3차 본회의에서 의결돼 교육부로 이송돼온 방안을 근거로 마련됐다. ◇ 로스쿨 인가 절차 = 로스쿨 설치 인가를 원할 경우 교원ㆍ시설 현황과 확보 계획, 과거 및 향후 3년간 재정 운용계획, 로스쿨 발전 계획 등을 담은 서류를 구비, 신청해야 한다. 폐지 인가 신청때는 폐지사유와 폐지 연월일, 학생 및 학적부의 처리 방법 등을 교육부에 제출해야 한다. ◇ 개별 로스쿨 입학 정원 = 교원과 시설, 재정 등 교육 여건과 총 입학정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결정하되 특정지역이나 소수 대학에만 설치되지 않도록 입학 정원을 150명 이하로 정했다. 로스쿨 총 정원은 법무부장관과 법원행정처장과의 협의를 거쳐 교육부 장관이 오는 9월말까지 결정하도록 돼 있다. 개별 로스쿨 입학 정원을 결정하기 위한 심의 기구로 법학교육위원회가 설치된다. 법학교육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해 13명으로 구성되며 법조인 4명, 일반시민 4명, 법학교수 4명, 교육공무원 1명이 참여한다. 법학교육위원회는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하되 로스쿨 설치 대학을 선정, 인가하고 개별 로스쿨 정원을 결정하는 사항 등은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법학교육위원회가 현지 조사를 실시할 경우 법학교수와 법조인, 회계 전문가, 공무원, 일반시민 등 7명으로 현지 조사단을 구성한다. 현지 조사 결과는 해당 대학에 송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한다. ◇ 로스쿨 교원ㆍ시설 현황 = 로스쿨 교원 1인당 학생수를 12인으로 정했으며 시설은 법학전문도서관과 모의법정 등을 갖추도록 했다. 교원의 교수 시간은 주당 6시간을 원칙으로 하고 겸임ㆍ초빙교원 등은 주당 9시간을 담당하는 경우 1인으로 인정하되 최대 인정 시간은 주당 9시간으로 한다. 로스쿨 석사학위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최소 학점은 90학점으로 정하고 법조윤리, 법률정보의 조사, 법문서의 작성, 모의재판, 실습과정 등 교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적성 시험은 연 1회 이상 실시하고 적성시험 시행 기관은 법학전문대학원협의체,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 법학적성시험 시행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중 지정한다. 적성시험 시행기관은 지원자가 응시한 모든 적성시험 결과를 로스쿨에 통보한다. ◇ 학위 및 학점 = 학위는 전문학위(전문대학원)로 하되 박사학위의 경우 학칙에서 규정해 학술학위(일반대학원) 수여가 가능하다. 다른 로스쿨에 다녔던 사람이나 법학에 관한 학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 입학 또는 편입할 경우 학칙에 따라 15학점 이내에서 학점 이수를 인정해 줄 수 있다. ◇ 특별전형 = 차등적인 교육적 보상 기준에 의한 전형이 필요한 장애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을 선발하는 특별전형을 대학이 정원내에서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저소득층 또는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한 특별전형도 대학측이 검토할 수 있다. ◇ 로스쿨 평가 = 로스쿨은 최초 개원후 4년, 그 이후엔 5년마다 로스쿨 평가위원회의 평가를 받아야 하며 2년마다 자체 평가보고서를 작성해 평가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평가위원회는 법학교수 및 법조인, 공인회계사, 일반시민 등 7명으로 현지 조사단을 구성, 교직원 및 학생 면담, 수업참관 등을 통해 현지 평가를 실시하고 결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개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입학 정원은 150명 이하로 하되 로스쿨마다 입학 정원이 차등 배분될 전망이다. 교육부는 1일 개별 로스쿨 입학정원 상한선(150명)과 법학교육위원회 운영 방안 등을 담은 법학전문대학원 설치ㆍ운영에 관한 법률(로스쿨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시행령에 따르면 개별 로스쿨 입학정원은 특정지역이나 소수의 대학에만 로스쿨이 설치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0명 이하로 정해졌다. 교원과 시설, 재정 등 교육 여건과 총 입학정원을 감안, 개별 로스쿨마다 입학 정원이 150명 또는 120명, 100명, 80명, 50명 등으로 차등 배분된다. 로스쿨 설치 대학을 선정, 인가하고 개별 로스쿨의 정원을 정하는 업무를 맡게 될 심의기구인 '법학교육위원회'는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개별 로스쿨 정원 등을 의결하며 교육부장관이 최종 결정한다. 법학교육위원회는 위원장을 포함한 13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며 위원 13명은 법조인 4명(판사 1명ㆍ검사 1명ㆍ변호사 2명), 일반 시민(시민단체 등 포함) 4명, 법학교수 4명, 교육 공무원 1명 등이다. 로스쿨 총 정원은 법무장관과 법원행정처장과 협의하고, 법학교수회와 변협의 의견을 수렴한뒤 교육부 장관이 결정토록 돼 있다. 총 정원은 법학계가 3천~4천명을, 국회 교육위는 2천~2천500명을, 시민단체 등은 3천명 이상을, 세계화추진위원회(1995년 당시)는 2천100명을, 서울변회는 700~1천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로스쿨 교원 1인당 학생수는 여타 전문대학원 및 대학원대학과 같이 12인으로 하고 시설은 법학전문도서관, 모의법정 등을 갖추도록 했다. 로스쿨법에서는 교원 1인당 학생수를 15인 이하로 정한뒤 시행령에 위임한 바 있다. 로스쿨 석사학위 과정에서 이수해야 할 최소 학점은 90학점으로 정했고 법조윤리, 법률정보의 조사, 법문서의 작성, 모의재판, 실습과정 등의 교과목을 개설해야 한다. 적성 시험은 연 1회 이상 실시하고 적성시험을 시행할 기관은 법학전문대학원협의체와 대학, 정부출연연구기관, 법학적성시험 시행을 목적으로 설립된 법인 중에서 지정할 수 있도록 했다. 로스쿨은 최초 개원후 4년, 그 이후엔 5년마다 로스쿨 평가위원회의 평가를 받아야 하며 2년 마다 자체 평가보고서를 작성, 평가위원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번 시행령안은 8월 규제개혁위원회 규제심사, 9월 법제처 법제심사 및 차관회의,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9월 28일 공포, 시행될 예정이다.
제주교육박물관 평생학습관이 여름방학을 맞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천자문 서당'을 1일 열었다. 이날부터 22일까지 제주시 이도2동 제주교육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전통초가에서 열리는 '어린이 천자문 서당'에는 인근 초등학교 4, 5학년 학생 16명이 참가해 천자문을 중심으로 기초 한자를 습득하고, 선인들의 학습방법과 전통예절도 익히게 된다. 서당의 훈장은 고응삼 전 제주동여자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교육박물관에서 천자문 서당을 개설한 1999년부터 줄곧 훈장을 맡아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교재는 '한석봉천자문(韓石峯千字文)'이며, 수업은 월∼금요일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진행된다. 첫날 수업에 참석한 윤동호(10.동광초 4년)군은 "학교 선생님께서 방학 중 천자문 서당이 열린다고 소개하셔서 찾아 왔다"며 "훈장선생님을 따라서 한자를 읽으니까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 재미도 있고 머리에도 쏙쏙 들어온다"고 말했다. 제주교육박물관 관계자는 "전통식 한문서당을 통해 단순히 천자문 만을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훌륭한 전통예절도 함께 배울 수 있어 어린이들에게는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북부교육청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사업 대상교인 인천한길, 진산, 삼산초등학교 학생 87명은 31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 장흥리에 있는 학생수련원 해양탐구수련원에서 갯벌체험학습과 농촌체험활동을 실시했다. 한길초등학교 주관으로 개최된 갯벌체험 활동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정도로 환경·자원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 있으며, 보호해야 할 중요한 자원임을 인식시키고, 신나는 여름방학동안 즐거운 추억과, 농촌체험을 통해 도시에서만 자라나, 농촌에 대한 경험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그저 공허하게만 들리지 모를 신토불이와 우리 농산물의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지금 피서를 떠난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 바로 충남 보령시 청라면 의평리에 자리한 냉풍욕장이다. 서해안고속도로 대천나들목을 빠져나와 36번 국도를 타고 청양방면으로 길을 나선다. 청천저수지를 끼고 2㎞정도 달리다 청보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해 1.8㎞를 달리면 성주산 자락에 들어선 냉풍욕장과 만난다. 필자가 2주전 5일간 떠난 충남여행에서 새로이 다녀온 여행지 중 가장 인상깊었던 곳이 보령 냉풍욕장이다. 보령은 한때 석탄을 채취하던 광산이 모여있던 곳이다. 이제는 폐광이 된 것을 냉풍욕장으로 관광자원화한 것이다. 폐광의 부활은 이곳 주민들에게도 의미가 크다. 연간 20여 만명의 관광객이 냉풍욕장을 다녀가고 있으며, 폐광의 찬바람을 이용해 버섯을 재배해서 벌어들이는 소득이 연간 150억원에 이른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곳의 굴 길이는 5km에 이르는데, 이중 200m 길이의 유도터널이 냉풍욕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년 4~10월 사이 약 12~14도 정도의 찬바람이 나온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찬바람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속은 최고 초속 6m로 에어컨보다 더 시원한 찬바람에 한기가 느껴질 지경이라 여름철 피서지로 더없이 좋은 곳이다. 관리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냉풍욕장 홍보관 역시 에어컨 없이 이곳의 찬바람을 끌어들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고 있다. “이야! 폐광의 바람을 이곳까지 끌어왔네요. 제가 사는 마산까지 이 바람을 가져갈 수 있으면 너무 좋겠네요.” 필자가 그곳에 들어섰을 때 한말이다. 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푹푹찌는 무더위에 이보다 더 좋은 피서지가 또 있을까 싶었다. 편의시설로 원두막과 파고라, 특산물판매장 등을 갖추고 있다. 한편 이곳의 찬바람을 활용해 양송이버섯을 재배하는 곳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냉풍농원(041-934-8154)을 운영하는 이선구씨의 비닐하우스를 찾았는데, 종균을 뿌리고 약 45~50일 후면 수확이 가능하다고 한다. 재배과정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볏짚을 깔고 그 위에다 버섯종균을 심는다. 그리고 점질토와 사질토를 썩은 흙을 60~65도의 온도에서 10일간 살균한다. 종균을 뿌리고 17~18일 후 흙을 얹는데, 흙의 농도는 7.5ppm에 맞춘다고 한다. 흙을 얹고 23~25일이 지나면 버섯을 수확하게 된다. 60평 정도인 비닐하우스 내부는 항상 17~18도의 온도를 유지하는데, 한동에서 하루에 80상자 정도를 수확한다고 한다. 이 마을 버섯작목반에서 약 200동의 비닐하우스에서 냉풍을 끌어들여 버섯을 재배한다. 그런가하면 하면 이곳에서 생산된 냉풍양송이를 이용해 ‘참바람골 냉풍양송이 된장.고추장(041-934-2463)’을 만드는 곳도 있다. 된장과 고추장에 건조된 양송이를 옹기에 넣어 2년정도 숙성시켜야 상품이 된다. 처음에는 버섯 건조에 실패해서 버리는게 더 많았다고 한다. 버섯은 약 3일간 건조하는데 2kg을 건조하면 120g의 버섯분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된장에는 약 3%의 버섯분말이, 고추장에는 약 5%의 버섯분말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건조하기 이전의 양으로 계산하면 상당히 많은 양이다. 양송이가 재래 된장에 들어가면 불포화지방산이 5배가 더 높아져 건강에 좋으며, 된장의 떫은 맛이 없고 한결 연하고 부드럽다. 문의 : 냉풍욕장 041-934-2463, 냉풍욕장 홍보관 934-3595 추천 맛집 동내동 원평마을의 다정식당에서 내놓는 다슬기된장찌개는 부드럽게 씹히는 다슬기의 쫀득한 맛과 얼큰한 국물이 속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추어탕과 토끼탕도 맛깔스럽게 내놓기로 유명하다. 041-936-9833 추천 숙소 SBS드라마 [쩐의전쟁] 주인공인 박신양과 서주희가 묵었다는 무창포 씨사이드호텔(041-936-8626, www.seasidehotel.co.kr)이 편안한 쉼터로 더없이 좋다. 씨사이드호텔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우수숙박업소 ‘굿스테이’에 지정되었다. 호텔 로비에서 주인공들의 사인과 촬영장면이 담긴 사진도 만날 수 있다. 박신양이 3일간 묵었다는 301호실에서 내려다보는 바다풍경은 한폭의 풍경화 그 자체다. 실내수영장도 갖추고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이 한결 편안하고 안전하다. 해수사우나와 찜질방, 강당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기업체의 세미나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일본의 시골 기타마쓰교육위원회 주최로 지역 주민의 봉사제도인「일일교사」가 정내의 초․중등학교에서 활용되고 있다. 이 사업은 1999년도에「학교교육을 보다 풍부하게 하자」라는 취지에서 시작된 기획이다. 현, 정 직원을 비롯하여, 정년 퇴직한 전 교사, 민간인 등 지역주민이 교육현장에 참가하여 아이들의 풍부한 성장을 돕고 있다. 지도 인사는 43명이 등록하고 있으며, 책 읽어주기, 스포츠, 그림그리기, 다도 등 17개 분야이다. 한 초등학교의 교실에서, 상공회의소 전 전무이사 아카기씨(67세)가 바쁘게 판서를 시작하였다. 매주 1회, 월요일에 있는 2학년을 대상으로 한「책 읽어주기」수업이었다. 판서를 끝내자 2학년 1반 아이들이 들어 왔다. 「셈하기 노래」가 시작되었다. 「“소다”촌의 촌장이 크림소다를 마셨다고 합니다. 계속 10번 먹었다고 합니다…」(‘~었다고 합니다’는 일본말로 ‘소다’라고 한다) 「“소다”는 몇 번 나왔지요?」라고 아카기씨가 질문하자, 아이들은 「18번!」「20번!」이라고 대답한다. 「정답은 22번입니다」라고 아카기씨가 답을 확인하였다. 「맞혔다 -」「틀렸다」라고, 아이들의 환성이 메아리쳤다. 만담에서 말하는「관객을 사로잡는 화법」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에는「종이 연극」을 하고, 맨 마지막에는「책 읽어주기」를 했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아카기씨의 「낭독」의 세계로 점점 빠져들어 갔다. 아카기씨는 일일교사 그룹「이야기 택배」의 이야기꾼이 된지 벌써 6년째가 된다. 「영상문화 속에서 자란 아이들을 독서의 멋진 세계로 끌어 들이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이 계기이다. 현재 30대부터 70대까지 10명이 등록해 있다. 매월 1회, 연구회를 열어서 회원 상호간에 책 선택에서부터 강좌의 내용, 억양 체크 등을 하고 있다. 아카기씨는 「나이도 들었고, 문장 암기 등 예습 복습이 힘들지만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라고 하며 웃는다. 1.2학년은 일주일에 한 번, 3~6학년은 한 달에 한 번, 수업을 받고 있다. 이 학교 교장은 「아이들의 반응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지역의 힘을 빌려서, 더불어 아이들을 키워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 지역 교육위원회에 의하면, 1959년도 무렵 탄광 전성기의 초등학교 아동수는 3631명이었는데, 폐광과 저출산 고령화 영향으로 해마다 감소하여 금년도는 두 개 초등학교에서 348명으로 줄어들었다. 일일교사는 지역 활력의 원천인 아이들을 지역에서 키우기 위한「지역의 인적자원이」이다. 동교육위원회는 「기획 당초에는 응모자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지역의 인적자원이 점점 늘어났다. 학교 현장의 필요에 따라 앞으로도 대처할 수 있도록, 귀중한 인재를 늘려 나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교정에 만개한 목백일홍 장마가 물러간 푸르고 청명한 하늘 아래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배롱나무'란 정식명칭보다 목백일홍이란 속명이 더 친근감이 가는 꽃입니다. 자기를 심어준 사람이 죽으면 삼일 동안 흰꽃을 피워 주인을 조상(弔喪)한다는 의리의 꽃이며, 참을성과 인내심이 강해 메마른 가뭄과 끈적한 장마에도 쉬임 없이 꽃을 피워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도 합니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목백일홍'이란 시를 지어 이 나무를 예찬하기도 했습니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 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석달 열흘을 피어 있는 꽃도 있고 살면서 늘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는 게 아니어서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 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은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사람들은 권불십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여 열흘 이상 붉은 꽃이 없고, 십 년 이상 가는 권력이 없다며 세상의 유한함을 이야기하지만 목백일홍만은 이런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석 달 열흘 내내 붉습니다. 꽃 색깔이 진한 분홍빛으로 아름다워 가정집이나 도로변의 정원수로 인기가 좋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목백일홍의 아름다움에 반했던 것은 전북 고창에 있는 선운사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한여름 선운사 산문(山門)에 들어섰는데 때마침 목백일홍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목백일홍의 진홍빛 꽃잎이 살짝살짝 흩날리며 떨어지는 모습과 늙은 스님의 쓸쓸한 회색 빛 장삼 자락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 장면에 한동안 넋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목백일홍을 짝사랑하게 되었죠. 목백일홍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간지럼나무라고 하면 금방 고개를 끄덕입니다. 어렸을 적 얼룩무늬가 있는 배롱나무의 줄기 한가운데를 손톱으로 살살 간질이면 나무전체가 경련을 일으키며 움직여서 이런 별칭이 붙었답니다. 배롱나무는 화려한 꽃도 좋지만 약재로서도 손색이 없습니다. 잎은 자미엽(紫薇葉)이라 해서 기름에 튀겨 먹거나 국을 끓여 먹기도 하며, 뿌리는 어린이들의 백일해와 기침에 상당한 효과가 있답니다. 여성들의 대하증, 냉증, 불임증에도 배롱나무 뿌리가 좋은데, 몸이 차서 임신이 잘 안 되는 여성은 배롱나무 뿌리를 진하게 달여서 꾸준히 복용하면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또한 조상들의 묘지 양옆에 심어놓으면 후손들이 오래도록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니 참으로 보배로운 나무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다양한 은혜를 베푸는 목백일홍이 우리학교 교정에 오래도록 피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목백일홍 나무 밑에서 한 컷! 목백일홍의 색깔은 여인의 연지처럼 관능적이다. 비에 젖은 목백일홍. 2층 창가에서 찍은 것입니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연기~” 한국의 정경과 정서를 듬뿍 담은 이 동요는 가사 덕분에 한동안 초등학교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즐겨 불렀다. 예전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에는 집 앞으로는 넓은 들판, 집 뒤로는 야트막한 뒷산이 있었고 저녁이면 당연히 집집마다 굴뚝에서 몽글몽글 하얀 연기가 솟아올랐다. 어쩌면 추상회화를 연상케 하는 저녁연기는 어머니 품속과 같지만 이 아름다운 저녁연기는 아쉽게도 지금은 보기 힘들어졌다. 이젠 저녁연기에 대한 추억이 없는 사람이 더 많다. 보온과 소독 효과에 탁월한 기능 발휘 옛날에는 집집마다 굴뚝에서 뿜어내는 하얀 연기로 저녁시간을 알았다. 저녁 무렵이면 굴뚝에서 나온 연기로 마을이 온통 자욱했다. 이러한 굴뚝 연기는 아궁이에 불을 피웠을 때 뽀얀 색을 내며 지붕 위로 솟아오른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기나 소죽을 끓일 때도 고유의 볏짚 냄새와 함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난다. 추운 겨울날 바람이 내리 불면 연기가 아궁이로 몰려나와 소죽을 쑤던 눈이 눈물범벅이 되기도 했다. ‘연가(煙家)’라 하면 연기 나는 집이란 뜻이 되겠지만 실제 전통적인 한국 주택의 굴뚝 위에 얹어 놓은 부재의 일종으로 고유한 명사이다. 연가는 진흙으로 빚어 구워낸 조그만 기와집 모양의 도예품으로 벽돌로 높직하게 쌓아올린 네모 굴뚝 위에 한 개 또는 여러 개로 얹어 놓아서 굴뚝 연기가 은은하게 퍼져 나오게 만든 것이다. 말하자면 굴뚝에 씌우는 지붕 구실과 연기의 솟음을 고르게 하는 바람받이도 될 뿐 아니라 그 생김새가 잘 생겨서 굴뚝치레로서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역할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한 굴뚝 쌓기에 남달리 정성을 들였다. 또 그 굴뚝이 후원의 조경에 매우 큰 구실을 하고 있는 전통은 한국 독자적인 양식인 온돌방 구조에서 발생된 것이다. 굴뚝은 우리 전통 가옥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구조물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보이지만 굴뚝은 단순히 연기를 집 밖으로 빼내는 구조물이 아니라 우리 건축 문화의 핵심이었다. 서양에도 굴뚝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구들 굴뚝과 서양 굴뚝은 차이점이 많다. 서양의 벽난로는 열기가 연기와 함께 그대로 굴뚝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구들 굴뚝 바로 밑에는 굴뚝개자리가 있어 고래를 통과한 연기가 집안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준다. 굴뚝이 처마 밑에 있기 때문에 굴뚝에서 나온 연기는 집안을 한 바퀴 감싸 돌아나가게 되는데, 이는 집 안팎을 소독하는 효과도 탁월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굴뚝은 신분과 계층에 따른 굴뚝에 따라서도 모양이나 크기가 다르며, 지역에 따라서도 형태가 달랐다. 보통 굴뚝은 높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데, 사찰의 굴뚝은 건물에서 떨어져 있는 듯 없는 듯 나지막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굴뚝은 기능의 가치로서도 그렇지만 그 가치를 넘어서 빼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겸손하면서 질박한 아름다움과 자연과 어울리는 자연미를 함께 지니며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포옹해 준다. 고장마다 집집마다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면서 푸근한 엄마 품을 느끼게 하는 굴뚝을 둘러보자. 겸손하고 검소한 소박미의 굴뚝치레 옛날 한 집안의 아침은 부엌문을 여는 아낙네의 치맛자락이나 잠시 후에 피어오르는 굴뚝의 하얀 연기에서 시작되었다. 황토색 벽과 초가지붕 위에 뽀얗게 솟아오르는 연기는 봉긋한 산봉우리와 어울려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기도 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온 우리 민족은 과학이나 생활의 지혜를 이용하면서도 하나라도 손끝의 멋을 놓치지 않았다. 굴뚝을 만드는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궁이를 아무리 잘 만들고 구들을 아무리 잘 놓아도 굴뚝의 높이 조절을 잘못하면 실패작이 되고 만다. 보통 아궁이 맞은편에 굴뚝이 자리 잡았다. 우리가 살던 집들은 대부분 한 아궁이나 혹은 방마다 한 개의 굴뚝을 설치하여 서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어릴 때 집 뒤로 가면 붉은 토관으로 처마까지 올려놓은 굴뚝도 있었고, 앞마당의 작은 구멍으로 타고 나오는 연기는 건넌방 아궁이 굴뚝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처럼 서민들이 살던 집의 굴뚝은 초가의 뒤란이나 모퉁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겨 만들었다. 크기는 다양하지만 대개 처마의 높이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굴뚝의 재료는 주로 돌과 흙, 옹기나 나무 널빤지 같은 것이었다. 모양은 예술적 기교나 장식은 없었으나 생활의 지혜에서 우러난 손의 느낌을 살려 질박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다양한 조형미 뽐내는 상류층의 굴뚝 우리나라의 궁궐에는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굴뚝이 있다. 궁궐의 후원은 물론이고 적어도 중류층 이상의 조선시대 주택에는 반드시 남향을 향한 밝은 후원이 있기 마련이다. 이 후원에는 으레 집 본채에서 조금 멀리 물러난 곳에 세워진 벽돌 굴뚝이 훤칠하게 세워졌다. 이 벽돌은 서양식의 붉은 벽돌이 아니라 회색 벽돌이며, 이 벽돌을 맵시 있게 쌓기 위하여 벽돌의 면과 네 측면을 모두 매끈하게 갈아서 사용했다. 이같이 네모 모양의 굴뚝은 굵기와 높이의 비례가 매우 쾌적해서 마치 하나의 탑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나의 정원에 세운 조각 작품 같기도 하다. 이 굴뚝은 하나만 세워질 때도 있지만 주택 구조와 규모에 따라서 여러 개 같은 모양으로 세워지기도 한다. 후원이 넓으면 멀찍이 떨어지게 세워 저녁연기에 알맞은 석양의 정서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 중 최고의 아름다움과 조형성을 지닌 굴뚝은 단연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을 꼽을 수 있다. 이 굴뚝은 보물 제810호로 지정될 만큼 그 조형성과 장식성이 빼어난 것이다. 굴뚝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꽃담으로서의 조형미도 살려 한국미를 간직한 유물로서도 가치를 지니고 있다. 경복궁 교태전 후원에 있는 아미산의 굴뚝은 우람하고도 멋진 굴뚝으로 유명하다. 아미산에는 굴뚝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교태전 방고래에서 지하로 뽑아낸 굴뚝들이 돈대 위에 우뚝 보기 좋게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다. 굴뚝으로서 기능뿐만 아니라 그 형태와 화면의 구성이 아름다워 교태전 후원의 장식물로도 효과를 겸비하고 있다. 교태전은 왕비의 중궁전으로 1394년(태조 3년) 창건되어 여러 차례 소실된 것을 다시 복구하였으며, 이 교태전의 굴뚝은 1865년 대원군의 불호령 아래 어느 명공이 정성을 다하여 쌓아올린 걸작품 중의 하나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대조전의 화재 후 일본인들이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교태전을 헐어 재목으로 사용하여 이 굴뚝만 남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굴뚝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그 중 궁궐의 굴뚝은 자경전 굴뚝과 같이 건물의 모양을 본뜬 것이 많다. 기와편을 벽돌처럼 쌓으면서 황토를 바른 ‘와편굴뚝’은 양반가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굴뚝이며 지붕 마감재로 기와가 많이 사용되는 사찰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와편굴뚝은 다른 굴뚝에 비해 규모면에서도 웅장함이 있고 투박하면서도 질박한 멋을 지닌다. 대체로 중상류층 건축에 만든 굴뚝의 재료는 검은 벽돌이나 기와, 돌을 주로 사용하였다. 서민의 굴뚝보다는 다양한 문양으로 화려하면서 조화롭게 꾸몄다. 그러나 번잡하거나 조잡하지 않고 본 건축과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자연미를 최대한 살려 만든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지붕의 구성이 수직과 수평적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것처럼 대단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규모도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위치는 대지가 넓고 크기 때문에 집이나 방과 가능한 멀리 떨어지게 하였다. 지역마다 고유한 특색 가지고 있어 조그마한 집이면 후원 양지바른 곳에 아담하게 장독대가 자리를 잡고, 큰집 후원이면 으레 장대석으로 쌓은 돈대 위에 모란꽃나무와 괴석들이 곁들여 지고 훤칠한 굴뚝들이 자리를 잡는다. 이렇게 굴뚝은 굴뚝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원치레로도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다사로운 입김을 하늘 높이 내뿜는다. 이러한 굴뚝은 지방마다 고유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서양식 화독 굴뚝이나 화이어 프레스의 굴뚝처럼 추녀 가까이에 붙여 세우는 경우도 많지만 기와집 추녀의 곡선에서 구저분한 것을 떼어 놓기라도 하듯이 굴뚝은 멀찌감치 후원 돈대까지 땅 밑으로 연장해서 적당한 거리에 자리 잡아 모양 나게 세우기도 했다. 추운 지방은 굴뚝이 높고 아래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그 높이는 점차 낮아지는 양상을 보이며 우리나라 전통건축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을 한다. 경기 중부지역에는 안방, 사랑방, 건넌방 등 각 방마다 아궁이와 반대편에 굴뚝을 설치했다. 서민가옥에는 통나무 한가운데를 파내어 만든 나무통 굴뚝과 깨진 항아리를 엎어서 사용한다. 강원 영동지역에는 안채에 한 개, 사랑채에 한 개가 대부분이다. 모양은 통나무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예도 있고, 판자를 짜서 만들거나 돌로 축조하고, 그 아래에 밑 빠진 항아리를 엎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강원 영서지역에는 판자, 흙, 벽돌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다. 굴뚝 아래 부위에 흙을 덧바르고, 굴뚝 높이도 처마까지 올라가 보온에 상당히 신경 쓰는 것이 특징이다. 경남지역에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굴뚝을 처리한다. 부엌에서 때는 아궁이의 불이 안방 구들을 돌아 댓돌 정면에 작게 뚫어놓은 구멍으로 연기를 내뿜도록 설치했다. 그리고 충북지역에는 윗방 뒤나 사랑방 뒤에 굴뚝이 위치한다. 대개 규모가 크고, 제대로 갖춘 것과 높이가 낮은 자그마한 보조 굴뚝이 있다. 큰 굴뚝의 경우는 가운데를 파낸 통나무를 연기 통로로 세우고, 밑은 넘어지지 않게 흙돌담으로 받쳐 쌓고 겉은 보온을 위해 짚으로 둘러 사용한다. 보조굴뚝은 흙담으로 쌓아 올린다.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작품인 굴뚝 세상에 민족도 많고 나라도 많지만 한국 사람처럼 굴뚝치레에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또 큰 돈을 들이는 민족은 드물 것이다. 굴뚝 기단은 으레 상아빛의 화강석을 곱게 다듬어 받치기도 하고, 사람의 눈높이에 알맞은 부위에는 백회와 회색 벽돌, 때로는 주황색 벽돌로 길상문자(吉祥文字)나 장생류(長生類)의 도안을 모자이크해서 굴뚝 하나가 그대로 작품으로 보이도록 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특하고 고유한 아름다움의 자취인 굴뚝도 서양식 건축에 밀려서 하나하나 그 명작이 자취를 잃어가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굴뚝은 고향이다. 굴뚝에 관한 이야기는 굴뚝의 느낌을 확실하게 한다. 옛날 글자를 모르던 시절에 시집간 딸이 ‘굴뚝과 참새’를 그린 편지를 친정어머님께 보내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은데 참새같이 바빠서 못 간다”고 표현했다는 이야기는 굴뚝이 말하는 사람의 심정을 잘 나타낸 것이다. 왜 굴뚝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굴뚝은 우리에게 과거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굴뚝은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언제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안개 속에 숨은 신비한 고층습원 대암산은 해발 1304m의 높은 산으로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큰 바위산인 대암산은 산자락에서부터 정상까지 바위들로 이루어진 험한 산이다. 큰 바위가 품었던 지하수가 솟아나 넘쳐흘러 정상의 남서쪽 사면인 1180m의 구릉지대에 만든 것이 용늪이다. 높은 두 봉우리 사이에 여인의 가슴처럼 약 9200평 크기의 넓은 풀밭이 있는데, 이곳이 고층습원인 용늪이다. 용늪을 적시고 내린 산성의 젖줄은 인북천을 이룬 다음 소양강에 몸을 합친다. 일 년의 절반이 안개에 쌓인 용늪은 그 자체가 신비스러움을 더한다. 이곳은 연중 온도차가 크고 안개일수가 많아 습도가 높고 표층수의 증발량이 낮아 자연스럽게 늪이 형성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예전부터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신령스런 곳으로 취급을 받아온 이곳은 가뭄이 들면 ‘용연기우제’를 하늘에 드렸다. 양구 지방 민요인 돌산령 타령에 따르면 용늪은 이곳 사람들의 삶의 장소였다. ‘문바위 용늪에 얼레지 돋거든 우리 나 삼동서 나물 가세….’ 대암산을 문바위로 표현하고, 용늪 주변에는 얼레지 같은 산나물이 많이 자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대암산에는 많은 산나물들이 나고 있지만, 군사보호지역이라 일반 사람들의 접근은 어렵다. 용늪은 희귀식물이 많이 자라고, 늪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곳이다. 그래서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용늪은 금단의 땅이면서 동시에 꼭 가보아야 하는 희망의 땅이다. 비무장지대 학술조사 통해 알려져 근래에 많은 산지늪이 발견되기 전까지 용늪은 휴전선 아래쪽에 위치한 유일한 고층습원이었다. 고층습원은 물이끼와 사초류의 번성으로 지하수위가 평지보다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일본의 야마사키 박사는 우리나라는 기후 조건이 맞지 않아 고층습원이 만들어지기 어렵다고 했지만, 1966년 한국자연보존연구회와 미국의 스미소니언연구소가 공동으로 실시한 비무장지대 학술조사에서 용늪이 세상에 알려졌다. 함경북도의 대택, 백두산의 장지와 오십리지에 이어 국내에서 세 번째로 발견된 용늪은 발견 그 자체로 큰 흥분을 일으켰다. 이끼의 사체가 쌓여 만들어진 이탄층의 높이는 1~1.8m로 나타났고, 이를 토대로 추정된 나이는 약 5천 살이다. 또 이탄층에는 이곳에 살았던 식물의 꽃가루가 차곡차곡 쌓여 있어 이를 추출하여 분석하면 수천 년 동안의 기후변화와 식물의 천이과정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층습원을 특별히 ‘자연의 고문서’, ‘타임캡슐’이라고 부른다. 이곳에서 화분을 추출하여 분석한 결과 이탄층의 밑바닥에는 포자, 그 보다 1천년이 더 쌓인 지층에서는 신갈나무의 꽃가루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지층의 윗부분에서는 소나무 화분이 조사되었다. 용늪을 품고 있는 대암산은 식물구계 상 아주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만주 구계, 우수리 구계, 중국 구계의 북방 식물들이 남하하다가 남방계 식물과 만나는 곳이 대암산이다. 즉, 이곳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식물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 남측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고층습원인 용늪은 그 희소성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여러 희귀 곤충과 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천연기념물 제246호(1973년)와 자연생태계보호구역(1989년)으로 지정됐다. 또 우리나라가 람사협약에 가입하면서 용늪은 우리나라 제1호 람사습지이자 습지보호지역(1999년 지정)으로 보호받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도솔산을 기점으로 대우산과 대암산을 엮어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처럼 대암산 용늪에는 많은 수식어가 붙어 있다. 꾸미는 말이 많다는 것은 용늪의 값어치가 높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소중한 용늪이 사람들의 무지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다. 늪의 한쪽 자락에 작전도로가 지나가면서 많은 토사가 흘러 늪이 육상화 되고, 1970년대에 체력단련을 위해 스케이트장을 만들면서 용늪의 일부가 갈라졌다. 또 곳곳에 파 놓은 배수구를 통해 늪의 수분이 빠르게 유출되면서 급격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때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지만, 만들어진 생채기는 아직도 둑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그 둑에는 탐방로가 설치되어 있다. 남과 북의 식물이 공존하는 산림 9부 능선에서 시작되는 용늪의 상부는 작전도로와 인접하고 있고, 그 외의 지역은 산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림을 이루는 나무 중 대부분은 신갈나무와 철쭉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 개회나무, 백당나무, 함박꽃나무, 갈매나무, 병꽃나무, 미역줄나무, 딱총나무, 물푸레나무, 사스레나무, 고로쇠나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용늪에는 쥐오줌풀, 처녀치마, 박새, 세잎종덩굴, 곰취, 좁쌀풀, 산오이풀, 개시호, 갈미사초, 대택사초, 물레나물, 터리풀, 물매화, 동의나물, 비로용담, 네 갈래로 벌어진 꽃 모양이 고깃배의 닻을 닮은 닻꽃, 끈끈이주걱, 금강초롱꽃, 제비동자꽃, 기생꽃이 자라고 있다. 수로와 물웅덩이 주변에는 물이끼, 갈미사초, 대택사초, 쇠털골이 자라고 있으며, 물웅덩이에는 조름나물, 개통발이 나타난다. 환경부 조사에 따르면 용늪에는 순수한 습원식물 22종류를 비롯하여 112종류의 식물이 있는데 여러 종류의 사초류와 물 주변에서 나타나는 왕미꾸리꽝이, 골풀, 달뿌리풀도 살고 있다. 이 중 숲속에서 자라는 함박꽃나무는 옥란 또는 천녀화로 불리는 북측의 국화이다. 6월에 피는 꽃잎은 6~9개이며 수술은 붉은빛이 돌고 꽃밥은 밝은 홍색이다. 용담과에 속하는 비로용담은 용의 쓸개인 것처럼 뿌리가 아주 쓴 맛을 낸다. 꽃은 여름에 가지 끝에 하나씩 달리는데, 벽자색으로 북측에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고 있다. 금강초롱은 한국특산종으로 8∼9월에 자주색 꽃이 피는데 종 모양이고, 줄기 위에 1∼2개가 붙거나 또는 짧은 가지 끝에 달린다. 백색 꽃이 피는 것을 특히 흰금강초롱이라고 한다. 북통발은 일명 개통발이라고 하는데 일반 통발과는 달리 먹이를 잡기 위해 벌레잡이 통을 매단 줄기를 땅속으로 길게 뻗는다. 지금까지 북통발은 대암산 용늪과 칠보산 습지에서만 기록된 매우 희귀한 식물이다. 용늪에는 앞의 여러 종류의 식물뿐만 아니라 복숭아순나방 등 224종류의 곤충이 서식하고, 이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새들도 많다. 군사시설로 제 기능 잃은 작은용늪 용늪을 오르는 길은 3갈래로 모두 해당기관(양구군청)의 허락을 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 하나는 돌산령 고갯길에서 군 작전도로를 따라 가고, 다른 하나는 광치고갯길에서 등산로와 임도를 따라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양구생태식물원에서 등산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용늪은 자연보호지역과 군사보호지역 안에 위치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그래서 용늪과 대암산 정상으로 갈라지는 부분에 출입금지 안내판과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초소에서 용늪으로 내려가는 길은 목재로 이루어진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이 탐방로는 용늪의 중심부까지 연결되어 있다. 용늪은 큰용늪과 작은용늪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큰용늪보다 위쪽에 위치한 작은용늪은 막사에서 흘려 내려온 토사에 의해 제 기능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큰용늪은 폭 225m, 길이 297m의 달걀 모양이며, 늪 가운데는 폭 8m의 연못이 2개 있다. 이 연못은 매우 찬 산성의 물로 이루어져 있어 물고기는 살지 않지만, 여러 종류의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물벼룩과 장구말이 살고, 이를 먹이로 살아가는 도룡뇽과 물두꺼비 및 개구리 등이 살고 있다. 비 내리는 9월 어느 날에 만난 용늪은 비안개에 쌓여 한치 앞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일 년 중 절반이 안개로 쌓인다는 이곳에 비바람까지 불어대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도 힘이 들었다. 다행히도 탐방로 주변에 물매화와 솔체꽃이 색깔의 대조를 이루면서 손짓을 하니, 금단의 땅 용늪에 오른 것 자체로 만족스러웠다. 전체 배경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용늪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 주위에서 진범, 눈개승마, 닻꽃, 만주송이풀을 만날 수 있었다. 작전도로를 되돌아 내려오면서 만난 길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금강초롱과 흰금강초롱은 그 자체가 등불이었다. 용늪은 일반인의 출입 통제 지역이라 이곳의 식물을 옮겨 심어 가꾼 곳이 바로 양구생태식물원이다. 양구군 동면 원당리에 위치한 식물원은 2004년에 개장했으며 400여종의 고산 식물들이 있다. 이곳의 학습장은 온실, 암석원, 수생습지식물원, 음지식물원, 약초원, 잣나무림, 천연보존림, 자생식물원, 야외학습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에는 대암산과 용늪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심어 두었을 뿐 아니라, 지리산과 금강산의 고산지역에서 자라는 칼잎용담, 개느삼, 깽깽이풀, 산꼬리풀, 둥근잎꿩의비름, 제비동자꽃, 금마타리, 하늘매발톱, 좁은잎구절초, 솔체꽃, 병조희풀, 솜다리, 노랑무늬붓꽃 등도 만날 수 있다. 대암산의 남서쪽 계곡에 위치한 이곳은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서 자연친화적 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반도 정중앙에서 용이 승천하다 끈적끈적한 용늪은 생물체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든 피조물까지도 빨아들이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피의 능선으로 불리는 도솔산 전투를 살피던 미군 헬기가 포연 속에 훤하게 보이는 초록의 들판을 잔디밭으로 생각하고 헬기를 내리게 된다. 용늪에 내린 헬기는 늪에 빠지게 되고, 결국 탑승자들이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이처럼 늪은 한 번 빠지면 헤쳐 나오기 힘든 곳이다. 용늪의 북동쪽 지역에는 움푹 파인 모습을 하고 있는 양구군 해안면이 있다. 일명 해안분지로 불리는 이곳은 23㎢ 넓이의 분지 전체가 해안면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운석이 떨어져 분지가 만들어졌다는 설과 차별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근래에는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 모양이 사발 모양이라 한국전쟁 중에는 ‘펀치볼’이라는 애명을 얻기도 하였다. 해안(亥安)이란 돼지가 마을을 편안하게 했다는 뜻을 지니는데, 움푹 파여 습한 곳이라 예전에는 뱀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한 도사가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라고 하여 길렀더니 뱀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도 해안이 되었다고 한다. 해안면으로 가는 길은 인제·원통을 거쳐 가는 길과 양구읍에서 31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돌산령을 넘어 갈 수 있다. 돌산령에서 만나는 아침의 해안분지는 구름이 가득 찬 그릇의 모습이라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비온 후 날씨가 맑아질 때, 분지를 이루는 산봉우리에만 구름이 걸리고, 분지에는 햇빛이 내려쬐는 모습을 보여 장관을 연출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암산과 도솔산 및 대우산에 쌓인 해안분지는 풍광이 아름답고, 다양한 생물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새끼를 낳는 생물들의 모태는 배꼽이다. 배꼽은 생명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인데, 한반도의 배꼽이 바로 용늪이 위치하는 양구군이다. 양구군 남면 도촌리 산48번지는 동경 128도, 북위 38도로 한반도 정중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독도와 마라도를 포함하면 나라의 중심은 양구이고, 육지 자체만 따지면 경기도 포천이 중앙이 된다. 한반도 중앙에 위치한 양구에 용이 승천한 용늪이 있다는 것은 우연히 아닐 것이다. 남과 북의 식물이 만나는 대암산 용늪, 국토의 정중앙에서 서로가 합쳐 하나가 되라는 메시지를 승천하는 용이 전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용늪은 금단의 땅이면서도 동시에 희망의 땅인 것이다.
학문으로 대를 이어오고 있는 집안은 스위스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인 소쉬르 가문을 들 수 있다. 소쉬르 가문은 5대째 학자를 배출한 세계적인 학문의 명가이다. 소쉬르의 조부 니콜라스 데오도르는 즈네브 대학의 지리학과 광물학 교수를 지냈고, 부친 앙리는 지질학자로 미국과 멕시코를 탐험하기도 했다. 소쉬르는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산 윤선도 가문이 실용적인 학문을 연구하는 가풍을 대대로 이어왔다. 양반가문이지만 공재 윤두서(1668~1715)에서 시작해 그 아들 윤덕희 - 윤용에 이르는 3대 화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양반들은 책을 읽고 벼슬을 해야 성공하는 시대에 이와 거리가 먼 그림에 몰두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 아들이 3대에 걸쳐 화가가 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진화론 처음 제기한 다윈의 祖父 할아버지가 연구했던 학문을 손자가 물려받아 연구하고 또 그 손자의 후손들이 그 연구를 완성했다면 그 가문은 세상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 집안이 인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규명한 ‘진화론’을 내놓은 찰스 다윈(1809~1882)의 가문이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해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던 인물이다. 그 손자인 찰스가 할아버지를 이어 본격적으로 연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진화론을 내놓았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뒤엎는 획기적인 가설이었다. 찰스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1731~1802)은 과학자이자 의사, 발명가, 시인이었다. 그는 18세기 중엽 당시 영국에서 매우 유명한 의사였다. 1756년부터 영국 리치필드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불치병 환자를 구해 일약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식물뿐만 아니라 동물 생태에 대한 방대한 내용을 담아 진화론을 제기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진화에 관한 관념을 피력했을 때는 1770년이다. 그는 그가 타고 다니던 마차에 라틴어로 ‘E Conchis omnia’를 붙이고 다녔다. ‘모든 것은 조개로부터 왔다’는 뜻이다. 즉, 만물이 조개로부터 탄생했다는 의미로 진화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이지만, 그는 진화론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어 마차에 살짝 그려 넣고 다녔다. 그러다 혹시 부자들이 이를 알아챌까봐 이를 지우고 책의 표지에다 새겨 넣었다. 부자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어서 창조주인 하느님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조개에서 만물이 탄생했다고 한다면 경악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의사인 그에게 치명적이다. 하느님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아무도 치료를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라스무스가 유명한 명의였듯이 아들인 로버트 역시 의사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 역시 가난한 환자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진료를 해주었다. 찰스는 아버지와 동행하면서 가난한 환자들을 접하며 아버지가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는지,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하면서 진료를 어떻게 하는지를 보며 철이 들어갔다. 조부의 책 통해 자연학자 꿈 키워 어린 시절 다윈의 관심은 자연사에 쏠려 있었다. 아버지가 틈틈이 가르쳐준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그의 주된 관심으로 변해간 것이다. 찰스는 당시 화제가 된 길버트 화이트의 〈셀본의 자연사〉를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관심에 점점 빠져들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기대와 달리 의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는 마취제 없이 수술을 했고 찰스는 아버지를 따라 왕진을 갔다 수술하는 광경을 보고 너무 끔찍해 의사에 대한 매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한다. 반면 여행과 자연학에 대한 독서를 열심히 했다. 특히 독서로 자연사에 대한 관심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민은 깊어갔다. 결국 아버지는 아들에게 의학을 포기하고 목사가 될 것을 권유했다. 아버지의 생각으로는 당시 곤충 수집을 하는 목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사에 관심이 많은 찰스의 적성을 살리면서 직업인으로 살기에는 목사가 안성맞춤이었다. 자연학자로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목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관심분야인 자연사도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찰스는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19살에 케임브리지 대학 신학과로 옮겼다. 찰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는 이 대학의 교수로 식물학자인 존 스티븐스 헨슬로와 지질학자인 애덤 세지윅이라는 두 신부 과학자를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서 동·식물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면서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이들과의 만남으로 그는 신부 과학자라는 인생의 목표에서 자연학자로서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잡았다. 다윈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헨슬로가 찰스에게 세계를 항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이다. 당시 영국 군함 비글호가 해안조사를 위해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는데, 여기에 승선해 자연관찰을 하라는 제안이었다. 찰스는 5년 동안 항해하면서 진화론을 규명할 역사적인 단서를 얻게 된다. 빌 게이츠가 폴 앨런과 스티브 발머를 만난 경우처럼 찰스 다윈도 친구와의 만남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도약하게 했다. 아들을 목사로 만들어야겠다는 아버지는 처음에 아들의 여행을 반대했지만 아들이 여행을 통해 과학적인 발견을 접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허락했다. 찰스는 18살 때에 할아버지가 쓴 〈주노미아〉를 읽고 크게 감탄했다. 28살 때에는 노트에 자기 생각들을 기록하면서 자기가 할아버지를 이어 진화론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가 1794년에 출간한 〈주노미아〉는 그의 손자가 1859년에 출판한 〈종의 기원〉보다 65년 앞서 진화가설을 제기한 것이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출판되었고 독일어, 프랑스어, 이태리어로 번역됐다. 에라스무스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은 원시의 바다에서 자연적인 생명력에 의해 발생한 극도로 미세한 현미경적인 존재들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연구 완성 다윈이 5년 동안의 항해에서 돌아온 것은 28살인 1837년이다. 다윈은 이때부터 〈종의 기원〉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미뤄야 했다. 결혼을 하면 장기간 여행을 할 수 없을뿐더러 생계비를 벌기 위해 대학교수 같은 직업을 구하든지 근검절약하며 근근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혼이 부담스러웠던 그는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결혼문제를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매년 수입이 1만 파운드이고 재산이 10만 파운드가 된다면서 전폭적으로 후원해주겠다고 말한다. 재력가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는 평생 돈 걱정 없이 연구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결국 연구를 시작한 지 20년만인 50세 때에 세계사를 뒤흔든 연구 성과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찰스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교훈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돈에 대한 활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돈을 모으지만 그 돈을 쓸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모으는 데 열중한다. 그래서 나중에 죽음에 임박해서는 가족끼리 돈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돈을 왜 모으는지에 대한 목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돈은 가문의 악의 화신으로 변한다. 찰스와 아버지 로버트는 돈 문제로 부자 간에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버지는 모아둔 돈을 아들이 연구에 전념하게끔 전폭적으로 후원해주었다. 아버지는 의사와 재테크를 통해 모아둔 재산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고 가문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진화론 연구의 후원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로버트는 재력가인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어떻게 돈을 쓸 수 있을까에 대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부자아빠들이 다윈의 아버지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을 쌓아놓고도 자녀들에 게 무관심한 부모들은 얼마든지 많다. 발명왕으로 갑부가 된 에디슨은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세 자녀들이 모두 가난뱅이로 살아야 했다. 또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억만장자였던 피카소는 화가인 아버지가 그를 위대한 화가로 만드는 데 헌신했지만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의 성(피카소)을 따르면서 아버지를 ‘배신’한다. 더욱이 여성편력(7명의 여성과 동거)이 심했던 그는 아들과 손자들을 방치해 결국 장남은 알코올 중독으로 자살하고 손자도 자살하는 비운의 가정으로 만들었다. 손녀에 의해 빛을 본 〈종의 기원〉 다윈 가문이 진화론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대를 거듭하면서 진화론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할아버지가 진화론 연구에 첫 깃발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무엇보다 후손들에게 자연과학에 매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찰스의 아버지 또한 평생 아들이 진화론을 규명할 수 있도록 연구를 뒷받침하는 등 인생 스승으로서 멘토 역할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찰스의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공동으로 연구를 했다. 찰스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쓴 자서전을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애썼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150년 전에는 자칫 진화론을 주장했다가 가문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찰스는 이와 관련된 민감한 내용은 빼고 자서전을 출간했었는데, 그의 손녀가 온전한 자서전을 내 할아버지의 연구업적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진화론은 당시 서구사회에서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지동설처럼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우도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릴레이가 천문학자로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피렌체의 명문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그를 전속학자로 모셔와 연구를 후원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세계적 대문호인 괴테도 바이마르 영주인 아우구스트 공작이 평생 후원자가 되었기에 마음 놓고 일생을 창작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학자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다는 것은 생업에 신경 쓰지 않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찰스 다윈은 다름 아닌 부자아빠가 평생 후원자였기 때문에 진화론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했다.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진화론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진화론을 주장한 그의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진화론은 다윈 가문이 할아버지와 손자, 손자의 손자까지 5대가 매달려 연구해온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절묘한 가학과 가업의 가문 결합 그런데 다윈 가문이 진화론을 통해 가학을 대물림했다면 다윈의 처가는 가업을 대물림한 집안이다. 다윈의 처가는 지금도 도자기회사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다윈의 처가가 다름 아닌 그의 외가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처갓집을 둔 것이다. 이는 다윈의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인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에라스무스는 1776년경에 당대의 과학자와 자연주의 철학자들의 사교 클럽을 만들었다. 이 모임에는 18세기 영국에서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다 모였다. 회원으로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왓트, 산소를 발견한 조셉 프리스틀리, 위대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 등이 있었다. 미국 사람으로서는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토마스 제퍼슨과 벤자민 플랭크린 등도 포함돼 있다. 웨지우드 가문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다. 조시아 웨지우드는 에라스무스 다윈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에리스무스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에든버러 대학에서 고전문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반면 조시아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고 열다섯 살에 형에게 도제교육을 받아 도기장이 되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처럼 조시아도 과학과 발명에 푹 빠져 있었고 정치적 견해와 사상에서도 서로 통했다. 조시아는 부유한 집안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사업을 크게 번성시켜 한때 유럽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를 둔 도자기공장이 됐다. 또 영국여왕이 찻잔세트를 주문하면서 웨지우드는 ‘황실도공’의 직위에 올랐다. 이들의 우정은 결국 양가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연으로 웨지우드 가문은 두 번에 걸쳐 다윈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찰스 다윈의 어머니가 웨지우드 가문이고 아내 역시 이 가문의 딸로 다윈은 외사촌과 결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다윈 가문과 웨지우드 가문은 절묘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윈 가문은 정신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가학(진화론)으로 명가를 이루었고, 웨지우드 가문은 먹고사는 가업(도자기)을 통해 세계적인 명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등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어지고 있어 우리나라도 ‘가업’ 문화가 이미 불기 시작했다. 음식점에 가도 2대가 일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가업만들기가 유행처럼 붐을 이룰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가업과 함께 대대로 내려오는 가학(家學)이 있다면 더 격이 높아질 것이다. 같은 학문을 가족들이 공유하고 또 대를 이으면서 연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좋은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밥’만으로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밥과 함께 정신적인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이 가업이라면, 정신적인 양식은 가학이라고 할 수 있다. 끝 - 이번호를 끝으로 세계 명문가의 교육철학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