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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반(反) 전교조' 기치를 내건 자유교원조합이 출범하기도 전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키로 하는 등 두 단체가 마찰조짐을 보이고 있다. 두 단체의 신경전은 출범을 선언한 자유교원조합에 대해 전교조가 한나라당과 연계성을 문제삼으면서 비롯됐다. 전교조 한만중 대변인은 지난달 10일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이 배후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음이 분명한 자유교조의 강령은 교원노조가 아닌 정당의 것처럼 보인다"며 자유교원조합과 한나라당간 연계성을 주장했다. 그러자 자유교원조합은 즉각 성명서를 내 "전교조가 무슨 근거로 한나라당과의 연계 주장을 펴는지 모르겠다"며 근거를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자유교원조합은 전교조의 답변이 없자 1일 조합추진위 명의로 전교조에 공식 공문을 보내 "전교조 대변인이 자유교원조합 설립과 관련해 마치 야당인 한나라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처럼 근거없는 언론 인터뷰를 해 명예를 심각히 훼손했다"며 재차 근거를 밝힐 것을 요구했다. 자유교원조합은 "12일 24시까지 근거를 제시할 것을 공식적으로 서면 요구한다"고 시한까지 못박았다. 최재규 자유교원조합 추진위원장은 "만약 전교조 측이 확인 가능한 사실에 기초한 근거를 밝히지 못한다면 자유교원조합 추진위원회는 법적ㆍ경제적ㆍ행정적 제수단을 통해 이러한 허위사실유포에 대한 전교조의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교조 한 대변인은 "한국교원노동조합 전 위원장 등이 참여하고 사학법 반대 등 한나라당과 이념적으로 같은 단체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는 취지였던 것 같다"며 "자유교원조합이 학교현장에서 어떠한 역할을 해나갈지 고민하기보다는 전교조와 대립 국면을 조성해 이슈화하려는 의도로 보여 공식대응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왜 한국 아저씨 아줌마들은 나만 보면 이담에 의대를 갈 거냐고 물어보는 거지?" "공부를 잘 하니까 그렇지. 너 듣기 좋으라고 그러시는 거야." "글쎄, 한국 사람들은 공부를 잘 하면 왜 모두 의대 아니면 법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느냐 말이에요. 세상에는 다른 재미있는 직업이 많이 있는데…" 새 학기가 되면 10학년(중 3)이 되는 아들애가 며칠 전 이런 식의 불만 아닌 불만을 털어놓았다. 학교 성적이 상위권에 드는 아들애에게 주위의 한국 분들이 칭찬삼아 하는 말이지만 듣는 제게는 부담도 되고, 왜 어른들은 한결같이 의대 아니면 법대에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아들 말마따나 한국 부모들뿐 아니라, 고달픈 이민생활을 자식들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강한 아시안 부모들은 일단 성적만 되면 자식들의 적성을 고려하기 이전에 의대나 법대로 진학시키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어디서나 떳떳하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전문 직종에 종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전문직하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법관 아니면 의사이다보니 이웃 자녀인 우리 아들한테도 어른된 도리인양 가급적 의대에 진학하도록 강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해 말부터 시작된 호주의 대학입시 결과발표가 지난주에 모두 마무리 되었다. 올해 입시결과 및 경향분석에 따르면 예상대로 아시안계 학생들의 상위권 진출이 도드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의 일간지들은 현추세가 지속된다면 불과 한 두 세대만 지나면 호주의 전문직은 거의 아시안 이민자들이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논평하고 있다. 중동계 이민자들이나 유럽의 초기 이주자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거나 하급 기술 및 기능공 출신의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반해, 아시안계 이민자들은 중산층을 중심으로 대거 호주에 유입되어 2세에 대한 높은 교육열을 보인 결과라고 덧붙였다. 호주는 200개가 넘는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된 2천만 명 남짓한 인구를 가지고 있다. 그중 20% 정도의 인구비율을 가지고 있는 아시안 계 이민자들의 자녀들이 매년 대학입학시험 때마다 최고 득점자 1000명 중 350명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과대학이나 치과대학 진학률이 매우 높은 편으로 정원의 30%내지 50%가 아시안 학생들이다. 그런가하면 법학과와 경영학과, 회계학 전공자 중에도 한국을 비롯한 중국 등 아시안 학생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소위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이 해마다 주로 진학하는 몇 개 학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셈인 것이다. 높은 성적을 받아야만 합격할 수 있는 몇 개 학과를 놓고 벌이는 학생들간의 치열한 입시 경쟁은 호주라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앞도 뒤도 안 돌아보고 의대나 법대에 진학하기 위해 학창 시절 내내 공부에 매달린 결과, 특별활동이나 다양한 특기를 개발할 기회 자체를 잃어버린 채 자기 적성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성적이 되니까' 무조건 진학을 하고 보는 현상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들애의 말처럼 요즘 세상에는 재미있는 직종도 많고 직업의 종류도 얼마나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있는가. 각 분야의 전문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대학의 학과는 또 얼마나 많은지 대학마다 학과를 소개하는 안내책자의 부피만 보아도 학문적 호기심과 지적 소양을 축적시킬 수 있는 교육의 장이 얼마나 풍부하게 열려있는 지를 충분히 가늠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안 수험생들의 경우는 성적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순서에 맞추어 의대와 법대 그리고 몇몇 귀에 익숙한 학과만을 장래 직업을 위한 전공으로 선택할 뿐, 나머지 수많은 학과는 단순히 커트라인이 낮다는 이유로 홀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호주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으로 구성된 이민자의 나라이다. 이들을 아우르는 국가 제도와 시스템이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각 이민자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 정서와 배타적 선입견이 사회문제의 불씨로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아시안 2세들의 특정직업의 대거진출 또한 인종분규나 사회적 갈등의 한 요인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본다면 한 커뮤니티가 사회의 전문지식 분야로 편중되는 현상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타 이민자 그룹들을 무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학 진학만이 능사가 아닌 것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 반드시 고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이민 생활이란 곧 자녀들의 전문직 진출이라는 등식을 적용하는 한국 커뮤니티를 비롯한 아시안 계 이민자들의 고정관념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광묵 전국시·도교총사무총장협의회장은 10~12일 제주교총에서 전국시·도교총사무총장협의회의를 개최한다.
교육부는 최근 ‘우리 몸에 영양이 되는 체조’ CD를 제작해 전국 6179개 초등학교에 보급했다. 식습관이 서구화된 데다 놀이문화 변화, 소규모 가정 증가로 홀로 지내는 어린이가 늘어나 신체 움직임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나날이 심각해져가는 어린이 비만 문제를 간단한 학교 체조를 통해 줄여보자는 취지다. 이번에 제작된 CD는 신체 각 부위의 긴장을 풀어주는 체조, 졸음을 쫓고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체조, 키 크기 체조, 몸치 탈출 체조, 친구와 함께 하는 체조 등 2분 내외의 체조 10종을 담은 3D 동영상물이다. 체육과 교육과정 개발위원인 장용규 서울교대 교수와 국제체조심판인 이은미 서울목원초 교사의 자문을 받아 기존에 많이 통용되고 있는 동작 위주로 친근한 음악을 곁들여 제작됐으며,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익숙한 어린이 캐릭터와 교육부 캐릭터인 ‘배움이와 희망이’를 활용한 점이 눈에 띈다. 교육부는 이 영상물을 각 학교의 교실 내 PC에 설치해 필요한 시간에 활용하도록 유도할 계획이다. 교육부 관계자는 “중·고등학생용도 개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정도로 현장 반응이 좋다”면서 “학교 현장에서의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영상물은 이달 20일에 교육부 홈페이지(www.moe.go.kr)에도 탑재될 예정이다.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라며 한국인의 예술혼을 세계에 알려온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7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EBS는 생전에 뉴욕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가졌던 EBS 단독 인터뷰를 비롯해 그의 생전 작품을 생생하게 재조명하는 시간을 마련한다. 오랜 병마와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작품세계와 한국에 대한 애정 등을 표현한 단독 인터뷰에서는 그의 생생한 눈빛을 만날 수 있다. 미국의 첼리스트 샤로트 무어맨을 소재로 한 비디오 작품과 파우스트 연작시리즈 등 그의 생전의 작품을 다시 만나보고 생전에 그와 절친했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며 손수 벌인 한국의 전통적인 굿 퍼포먼스도 소개된다. 또한 10여년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가진 백남준 회고전을 비롯해 생전의 왕성한 작품 활동 모습도 공개된다.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늘 변혁을 꿈꿔 온 예술 혁명가 백남준, 21세기에도 꺼지지 않을 그의 예술혼을 되새겨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2월 1일(수) 밤 10시부터 50분간 방송되며 재방송은 다음날 아침 6시 10분부터.
최상근 |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점수를 평가의 잣대로 삼는 것이 문제 모 고등학교에서 같은 학년을 가르치는 국어과 교사 간에(4명) 협의 부족으로 출제범위와 방향이 다르게 고지되어(출제는 편의상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 것 같음) 학급 간에 평균 차가 크게 났고(약 20점 정도), 그제야 교사들끼리 협의하여(학생들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내신 등급표에서 이 결과가 다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재시험을 치루게 하였다. 학생들 모두가 기분 나빴지만 학교내신제 때문에 불평도 못하고 수용하였다. 학부모들에게는 일언반구 공식 멘트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학교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으며, 아무런 사고도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학교는 공급자 중심의 교육을 시행하였던 과거 전통적인 학교의 유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학교에서는 교사에게 전문성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중학교 국어과 선생님이 한 반 평균을 82점에서 85점으로 올렸다. 이 선생님은 유능한 선생님으로 평가받는다. 반 평균 성적을 무려 3점이나 신장시켰으니, 유능한 선생님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 반의 학생이 80명일 때에도 이런 선생님이 유능한 선생님이었고, 한 반의 학생이 35명 정도인 오늘날에도 이런 선생님이 유능한 선생님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12년간 성적이 올라가면서 성장한 학생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에는 국어가 가장 어려운 과목이고, 별도로 과외를 해야 하며, 옛날에 비해서 국어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다른 과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학년 전체에서 담임한 반이 몇 등이냐가 잣대가 되는 담임교사의 능력 평가 체제가 수 십 년 동안 이어져 오고 있다. 늘 선생님은 유능했는데, 늘 점수를 향상시켰는데, 학생들의 실력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이처럼 점수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데에도 그 점수에 매달려야 하는 우리 학교사회의 맥락에서, 정작 유능한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일까? 전통적인 교육의 틀에서 벗어나야 학급 학생들에게 교육과정을 실행하면서 교사는 전체성 또는 평균성, 타율성, 획일성, 경직성을 강조하는 전통적 교육에서의 학습 원리를 고집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여럿이서 뭉친다고 될 일도 아니다. 학생들의 특성에 관계없이 경직되고 획일적으로 사전에 편성한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기술자에서 한 단계 격상하여야 한다. 전체 학생들 중 평균적인 학생들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일제식으로 수업을 전개하는 방식은 어느 학생에게도 유익하지 못하다. 학부모나 학생의 특성과 요구와 관계없이 교사가 일방적으로 조성한 교과 학습 환경은 교사의 전문성을 의심케 한다. 이제 교사는 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유연하고 다양한 교육과정을 편성 운영하여야 한다. 학생들의 개별적 또는 전체적 특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수업행위를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 학생들이 자기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추어 자율적이며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점을 강조하여야 하며, 학습자의 특성에 맞게 다양한 학습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한다(김차식, 2001). 교사는 담당하고 있는 교과목을 대상으로 교수 실천에 대한 지식, 내용지식, 교육과정 실행 지식에 정통한 자들이어야 하며(Doyle, 1990), 그러한 선생님들만이 유능한 선생님이다. 교수 실천에 관한 지식은 특정한 교사의 행위나 행위체제가 교실에서 사용되어졌을 때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에 대한 지식이다. 또한 내용지식은 교과지식과 교수적 내용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전자는 교과의 구조에 대한 이해, 개념적 조직의 원리에 대한 이해, 그리고 탐구의 원리에 대한 이해인 교과지식를 말한다. 후자는 교사가 갖고 있는 내용 지식을 교수적으로 강의하면서 학생들의 능력과 배경에 따라 교수학습 활동에 적합한 형태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말한다. 그리고 교육과정 실행지식은 교육과정의 실행을 형성하는 교실내의 구조와 과정에 대한 것으로 교실이 어떻게 운영되는가, 교수 효과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 등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스스로의 지식과 기술에 따라 결정 교사는 자신의 지식과 기술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재량권을 행사한다. 교수자의 일은 단순한 과정을 요구하고 사전에 주어진 지침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것으로 이루어야 할 목표와 목표달성을 위한 실행의 절차가 객관화·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수자의 일은 출발점에서부터 가시화·일반화될 수 없는 개성적 대상과 목표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행과정에 시종일관 개별성과 우연성이 수반되기 때문에 교육받는 대상의 고유한 가능성과 교육적 필요를 포착하는 일에서부터 그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의 소재들을 선정·해석·번역하여 전달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서 끊임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허병기, 1994). 그렇게 때문에 교사에게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며, 유능한 교사의 판정 여부도 여기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고객이 코를 높여 달라고 해서 코를 높여주고, 눈을 크게 해달라고 해서 크게 만들어주는 성형외과 의사처럼, 과학자를 원한다고 해서 과학자를 만들고, 피아노 연주자를 하고 싶다고 해서 피아노 연주자를 만들어 주는 그런 교육을 수요자 중심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형외과 의사도 고객의 건강 등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시술을 하지 않듯이, 교사도 학생과 학부모가 원한다고 해서 주문에 무조건 응하는 일을 자신의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이돈희, 2000). 교사는 도덕적·전문적 책무성을 담보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학생, 학부모의 주관적 요구와 필요에 응하며, 그에 부응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전문성을 발휘하여야 한다. 즉 학습목표와 학습활동과의 연계성 모색, 학습의 개별화 전략의 수립 실천, 교과 병행 학습과 통합 학습의 적절한 활용, 소집단 학습의 구성 및 학습 방법에 대한 이해와 실천, 학생의 학습 계획 참여 여부 및 방법 결정, 토론 학습에 관한 연구, 훈련 및 학습 결과에 대한 종합 토론 실시, 학습 결과 정리 및 확인 등과 같은 전문적 지식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이용숙, 1997). 우리나라 교사들은 학생의 특성과 정보를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인식을 대체로 가지고 있으며, 주된 방법은 학생과의 접촉 또는 면담(46%), 학교생활기록부(31%) 등이었다. 학생지도활동에 가장 중요한 학생 특성·정보의 내용은 성적수준(46%), 태도 및 성격(36%)의 순이라고 한다(최상근, 1999). 이와 같이 교사들이 학생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는 조사연구에서 볼 때, 전체 교과목을 대상으로 한 점수, 그것도 아마 전체 학생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순위에 관한 의식을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교사들의 학생 파악 실태는 위에서 기술한 전통적 교육 상황에는 적합하다거나 효과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런 풍토가 우리 학교사회를 주도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지향하고 있는 학생, 학부모를 교육 공급자 입장에서 보지 않고, 교육의 선택권을 갖고 있는 고객이며, 교사의 전문성과 존재적 의미는 그러한 수요자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는 수요자 중심의 교수 학습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교사는 막연한 점수 중심의 학생 정보에 그치지 말고 자신이 담당하는 교과, 그것도 교과에서 가르쳐야 할 주요 내용 영역별로 구체적인 학생 개인별 정보를 파악하여야 학생 개인의 필요에 부응하는 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는 가르친 학생들의 능력 대변 각 교과별로 학년별로 교수하고자 하는 내용 영역이 있을 것이다. 그 내용 영역별로 각 개별 학생들의 출발점 단계에서의 이해도 수준을 진단해야 한다. 대체로 주지교과(여기서는 수업시수가 많은 교과를 말함)의 경우, 학교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4~6개반(100~200명)을 담당한다. 이 담당하는 학생들의 내용 영역별 출발점 정보를 소상히 파악·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수업 장면에서 학생에게 무작정 '그것도 모르니' 하고 못을 박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학생들의 학습 실태와 수준과는 전혀 관계없이 교사 나름대로 작성한 천편일률적인 교육 내용의 전달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 각 학생별로 내용영역별로 연간 지도 계획(방법)과 목표달성 내역을 작성하여 운영함으로써 주먹구구식 전체적, 일제식 수업을 지양하고, 맞춤형 수요자 중심 교과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과정 운영 및 실행자만이 전문직으로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실태가 그러할 때에 전문직으로서의 평가를 요구할 수 있다. 즉 전문직으로서의 교사의 업적은 교사 본인이 작성하고 수행한 내용, 영역별 성취도, 진단-교육과정 및 수업지도 운영-목표 달성도에 대한 자체 또는 전문가 평가를 통해서만이 평가되어야만 하며, 그 결과를 통해서 유능한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수행한 교사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 하나하나에 대해서 각 내용영역별 습득 수준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과를 예로 할 경우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 등으로 구분하여 학생이 갖고 있는 능력과 부족한 점 등을 지적할 수 있으며, 앞으로 어떤 노력을 더 경주해야 하는지 등에 관하여 자신의 입장을 후임 교사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잘 못하는 아이와 잘 하는 아이로만 구분되어 후임교사에게 인계인수되고 있는 낙인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교직 활동을 위해서는 동일교과 교사간의 협력은 필수적이다. 전문성 중심으로 상호 협력하고, 각자의 전문성을 제고할 수 있는 과업지향적 교과 풍토 조성을 위한 노력이 중요할 것이다. 매년 교사가 바뀌고, 독자적 전문성(예컨대 비밀주의, 폐쇄주의 같은 것)만을 중시하려는 교사들의 그릇된 직무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최원호 | 서울 중동고 교사 가르치는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 필자의 대학시절을 회고해보면 사범대를 다니는 동안 교사로서의 꿈을 탄탄히 키워온 것 같지는 않다. 사범대를 다니는 4년 동안 앞으로 교사로서의 생활이 어떠한 것인지 정확히는 커녕 감도 잡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원하고 있는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업이 아닌 교사를 직업으로 택한 것은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경험 때문이었던 것임은 확실하다. 사범대를 다니는 4년 내내 초등학교 1~3학년에 해당하는 유년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필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에 어느 정도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막연한 꿈을 키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교사는 가르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1997년 필자는 강남의 한 사립고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그 전 6개월 간 공립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서의 경험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때는 기간제 교사로서 정식 교사들에 비해 책임이라는 것에 상당히 자유로울 수 있었고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됐었다. 그 때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느낌은 '이렇게 재밌는 직업이 또 있을까?'였다.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지만 고등학교 1학년 공통과학을 가르칠 때는 생물을, 2학년 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물리1, 고등학교 2학년 이과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화학2를 가르치면서 수업준비의 부담과 다른 전공에 대한 불안감이 상당히 있었을 텐데, 늘 수업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고 준비한 내용을 학생들에게 빨리 가르쳐주고 싶었다. '여기서는 조금 지루하니까 이런 농담을 해야지'하는 식의 굉장히 자세한 대본을 짜서 수업에 임했던 것 같다. 사범대학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짜보았던 지도안의 형식 그대로 말이다. 솔직히 매시간 학생들과 만난다는 기대감보다는 준비한 내용들을 빨리 가르치고 싶어 몸달아 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필자는 남자 고등학교의 정식 교사가 되었을 때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식 교사가 되었을 때인 1997년을 회상해보면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물론 꿈에 그리던 명문 사립고에서 교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기쁨으로 교직생활은 즐거웠지만 임시교사로서 있었던 6개월 동안 발견하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상황을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임시교사 때와 마찬가지로 정식 교사로서의 첫 해는 학생들을 위해 나름대로 수업 교안을 열심히 준비했었다. 한 시간의 수업을 위해 3~4시간은 교재 연구에 매달렸고 머릿속으로 수업하는 모습을 미리 상상해보면서 수업교안을 고쳐나갔고 매시간 수업에서 부족했던 점을 반영하여 다시 수업교안을 수정해 나갔다. '분필수업'은 소극적 반응 보일뿐 하지만 필자가 알아챈 것은 교사 혼자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학생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특이한 몸짓을 연구해 가면서 학생들을 수업에 빠져들도록 노력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학생들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그 동안 필자는 교안과 칠판을 열심히 보면서 가르쳤던 것 같고 학생들의 눈과 가슴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열심히 수업을 듣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학생들은 열심히 듣는 것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말 그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고 필요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가르치고 있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점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화학이 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에는 적당치 않았다. 사범대학교를 다녔으면서도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 지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에 화학을 단지 시험점수를 잘 받아야만 하는 하나의 과목으로만 인식했었던 것이었다. 어떻게 하면 화학의 정수를 맛보게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화학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은 오랜 세월 수많은 과학자들의 실험에 근거하여 세워진 이론, 법칙, 사실들이다. 이 내용들을 분필 하나만으로는 가르칠 수는 없다. 학생들을 이해시킬 수는 있지만 진짜 화학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실험을 통하여 눈으로 확인하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자는 정보가 부족했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흉내만 내었던 어려운 대학교의 수많은 실험들은 고등학교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수업시간엔 교과서에 몇 개 나오는 실험을 흉내 내어 볼뿐 실험을 어떻게 구성해야할지, 무슨 재료가 적당한지, 양은 어느 정도 해야 하는지, 안전의 문제는 괜찮은지 등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필자는 비슷한 고민을 하는 교사들과의 만남을 갖기로 하고 서울·경기 지역 과학교사들의 모임인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에 매주 화요일마다 참석하기 시작했다. 멀리 인천과 평택에서까지 매주 그 모임에 참석하는 교사들이 있는 것을 보면 과학교사들이 얼마나 목말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모임은 학생들에게 과학을 신나고 재밌게 가르치기 위한 실험방법을 창의적으로 개발하거나 기존 실험을 교육과정에 맞춰 재미있게 변형하는 연구모임이었다. 필자는 정식교사가 된 1997년에 그 모임에 등록하였는데, 매주 참석해야 하는 성실함이 없었는지 장기결석에 들어가고 말았다. 역시나 그 당시 갈구하고 있었던 것은 얄팍한 실험 기술이었다. 그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실험 기술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대신 교육청 주관 여러 실험연수에 나가서 수많은 실험을 배웠고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도 거의 다 해보았다. 하지만 교사 대상의 실험연수는 교과서에 나오는 많은 실험을 배우는 기회는 제공했지만 그 실험 속으로 빠져들 수 있게는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연수가 끝나고 나면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다시 고민했었고 그러다가 실험보다는 개념강의 위주의 수업으로 다시 돌아가기 일쑤였다. 1999년부터 다시 그 교사연구 모임에 출석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정식 활동한지 6년이 되었다. 그 동안 화학을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의 실험과 답사 경험을 쌓으면서 실험에 자신이 생긴 것도 긍정적이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실험을 포함하여 교수활동의 시각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수업을 '가르치는 기술에 숙련된 사람이 학생들에게 과거의 지식을 전수해주는 시간'으로 여겼던 필자는 수업을 '학생들이 수업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경험과 사고과정을 이용해 과거의 지식을 전수받음과 동시에 주관적으로 재해석하는 활동'이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교사로서 생각하지 못했던 학생의 존재를 관객에서 주인공으로 격상시켰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수업을 화려하게 잘 진행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수업에 잘 동참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동료 교사들 간 정보 공유가 중요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과학교사들의 연구모임에서는 매주 두 명의 교사들이 순번을 정해 실험을 연구하여 발표해서 동료교사들의 수업진행 방식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과학시간에 매번 준비하면서 해보기 어려운 다양한 실험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개념적으로나 방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점들을 토론하여 해결하는 과정은 '신나는 과학을 만드는 사람들'에 참석하는 과학교사들의 수준을 한층 올려 주었다. 특히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에 일종의 과학교실과 과학캠프를 운영하면서 새로운 실험을 개발하였고 과학 동아리 학생들과 실험을 발표하는 경험을 가지면서 실험을 교수학습 방법의 한 도구 정도로만 바라보던 인식을 바꾸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교사들의 연구모임에서는 그 실험의 개발과정과 실험의 장단점을 함께 토론하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홈페이지를 통해 온라인 토론과정도 가지면서 단순한 테크닉만 익히던 실험교사 연수와 달리 실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려운 임용고시에 합격하여도 학교에서 가르칠 자신이 없다면서 교사모임의 문을 두드리는 초임 선생님들을 보면서 과학교사로서의 중요한 능력을 대학시절에 키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필자가 교사가 되기 전과 초임 교사시절에 생각했던 교사는 개념적으로 잘 구성된 교안을 가지고 잘 가르치는 교사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는 좋은 교사도 그러한 교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잘 구성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대학시절 동안 배운 것을 학교 현장에서 다시 가르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교사의 중요한 사명임을 느꼈다. 그렇지만 어느 한사람이 변한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이 아니다. 학교와 교사의 목표는 학생들을 훌륭하게 양성하여 좋은 대학에 합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앞뒤의 순서를 바꾸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진정한 교육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경쟁적인 방법으로 교육을 받아온 학생들은 한가하게 '진정한 교육' 따위를 논할 시간이 없었고 학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치열한 현실 속에서 학교가 살아남기 위해 많은 학생들을 그들의 소원대로 포장해주어야 했고 교사는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하여 학교의 위상을 높여야 하는 사명을 가져야 했다. 학창시절 경험했던 1차원적인 목표를 교사로서 다시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진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학생들에게 실컷 베풀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학문의 진수를 경험토록 유도해야 요즘 필자는 과연 이렇게 빨리빨리 서두르는 선행학습 위주의 공부가 진짜 효과적인지 반문하고 있다. 최소한 과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1차적인 목표를 삼는 대학입학 시험에서 조차도 천천히 학문의 진수를 맛보면서 커나가는 학생들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필자는 경험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전체 학생이 이상한 교육방방법에 얽매인 상황에서 개인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주위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현실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다. 필자가 속한 과학교사 연구모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과목과 다양한 방법적 수업을 추구하는 다양한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 교육학자들과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단지 대학 입학을 위해 문제풀이 적응력을 높이는 것이 아님을 교사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입시라는 현실 속에 서로의 진정한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의 극복은 학생들이 진정한 공부를 해볼 수 있고, 교사가 스스로를 진정한 스승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이루어 질 것이다.
장옥순 | 전남 구례 토지초 연곡분교장 교사 당황스러움으로 시작한 교사생활 1980년 10월 25일, 48명의 담임교사로 교직에 첫발을 들여놓은 날의 풍경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마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첫 날은 가을대운동회였고 둘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바닷가로 가을 소풍을 갔었다. 그런데 필자의 기억은 셋째 날에 집중되어 있다. 마침 학력 진단평가 시험지가 준비되어 있어서 아이들에게 시험지를 나눠준 10분 뒤, 다 풀었다는 아이들의 말에 공부를 잘해서 금방 끝낸 줄 알고 좋아하던 필자는 시험지를 들고 교장실로 달려가고 말았다. 48명 중에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이 15명이었는데 1학년도 아닌 4학년 아이들이니 그만 겁이 나서 교장선생님께 학교를 그만 두겠다며 울었던 기억만이 새롭다. 그 때는 교사가 부족해서 우리 반 아이들은 두 달 이상 옆 반과 함께 공부를 해왔으니 아동수용소에 가까운 실정이었던 것이다. 교장 선생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어렵사리 배정받은 초보교사가 부임한 지 사흘 만에 그만두겠다며 울어버렸으니. 아이들 걱정이 커서 눈물을 보일 정도라면 한 달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설득하셨는데, 아버지처럼 인자한 교장 선생님의 따뜻한 격려가 여기까지 오게 만든 시작이 되었다. 최남단의 바닷가 마을에서 늦가을에 만난 그 아이들과 해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히고 받아쓰기를 하며 한글을 깨우쳤다. 그렇게 4학년을 마무리할 무렵, 동네 학부모님들이 음식을 장만해 와서 교실에 차려놓고 전 직원을 초대하는 '사건'이 생겼다. 12학급에 전교생이 500명에 가까운 학교이니 직원 수도 많았는데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음식으로 때 이른 책거리를 한 것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5학년 때에도 계속해서 담임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어서라고. 전 직원이 음식촌지를 받은 때문이었는지 필자는 우리 반 48명을 그대로 데리고 5학년을 맡았고 그 아이들 중 2명의 결혼 주례까지 서주는 인연으로 지금도 만나고 있다. 교직의 출발은 힘듦과 갈등 속에 눈물을 많이 보인 나약한 모습이었다. 가족들과 너무 멀리 떨어진 외로움, 학습 결손이 심한 아이들을 끌어올리며 애태우던 시간의 나열이었으니 결코 아름다운 출발은 아닌 셈이다. 감사의 크기만큼 행복한 교직생활 필자는 인터넷신문 '한교닷컴' 리포터로서 복식학급인 우리 1, 2학년 다섯 명의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써서 올리는 재미로 살고 있다. 20여 년 동안 줄곧 가르쳐 온 5, 6학년을 뒤로 하고 올해 처음 맡아본 1, 2학년 아이들과의 만남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와 생각 수준에 맞추느라 늘 쉬운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어려움, 순진하고 엉뚱한 질문과 대답에 웃느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으니,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은 내 쪽이다. 단순함과 밝음, 투명하게 세상을 보는 눈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못쓰게 된 어린이'이니 고치고 다듬어서 이제 겨우 아이들의 이야기를 알아듣게 되었다. '아름다운 시작보다 아름다운 끝을 선택하라'고 충고하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속삭임에 동감하는 즐거움으로 그 어느 해보다 아이들이 주는 행복함을 기록하는 즐거움으로 보낸 2005년이었다. 또 어미가 육아일기를 쓰듯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글과 사진으로 남겨 헤어지는 날 두 권의 책을 아이들 품속에 안겨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아름다운 끝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감사한다. 솔직히 산골 분교에 와서 아이들과 나눈 3년 동안의 기록만 되돌아봐도 몇 날 며칠을 웃으며 살 수 있을 만큼 행복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아이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온 3년은 앞서 살아온 22년 동안 교직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까지도 다 들어내고 새살이 돋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교실에 있다. 바깥은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유리창을 건들지만 아이들이 남기고 간 이야기들이 필자를 불러놓고 자판으로 데려가 놓아주지 않는 탓이다. 낮에는 가르치는 일이 행복하게 하고 밤에는 아이들 이야기를 남기는 즐거움이 자정까지 이어지곤 한다. 내일이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자기들 모습을 확인하며 즐거워 재잘대는 귀여운 참새들. 때로는 강아지이기도 하고 토끼처럼 큰 눈을 껌벅이며 웃음을 담고 바라보는 맑은 거울에 나까지 투명해지곤 했던 시간들. '감사함의 크기만큼 행복하다' 던 타고르의 말대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선생이다. 교직, 그 아름다운 선택에 후회는 없다. 법을 위반하는 행위인 수업침해 한국인의 특성을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2000년 교육부 인성정책자문위원회) 근면성이 좋은 국민인 반면 나쁜 습성으로는 부정직, 이기주의, 불공정이 판치는 전체적으로 불신사회라고 한다. 그러니 학교도 사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니 어느 만큼은 그러한 나쁜 습성이 있다고 본다. 정직하지 못한 회계처리나 인사부정, 권위나 자리에 연연한 극단적 이기주의, 신뢰감이 없는 불공정의 관행이 학교라고 예외적으로 없을 리가 있겠는가? 현직교사로서 겪었던 어려움은 수업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직장 분위기나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초등 선생님들의 대부분은 교실에서 아이들과 수업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생각한다.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만들어주는 리더를 만나고 수업침해를 법을 어긴 것만큼이나 깍듯하게 조심해 주는 관리자를 만나는 행운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8년 전에 모신 교장 선생님은 교직원들 사이에서 고약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오랜 동안 장학직에 몸담으며 확고한 교육 철학과 리더십을 소유한 분이었는데 필자가 모신 분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분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교장실에 들르면 첫 마디가 "빨리 교실에 들어가십시오. 선생님보다 아이들이 먼저 와 있으면 안 되지요"였다. 그런 분이니 수업 침해를 염려해서 아침 시간에 교실에 아이들을 두고 회의하는 일은 일체 없었으며, 혹시나 급한 공문을 들고 교장실에 들어가면 충고를 들어야 할 만큼(모든 공문은 수업 종료 후 결재 가능) 엄격하셨다. 혹시라도 학습지를 복사하는 경우에도 점심시간이나 하교 후에만 가능했으니 그 분이 얼마나 아이들을 귀하게 여긴 분인지 알 수 있다. 학교 아이들이 외부행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어 그 부모가 감사의 표시로 식사 초대를 하는 경우에 응했다가는 난리가 날 정도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혹시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놀면서, 복도를 지나치면서 큰 소리를 지르면 담임선생님까지 함께 지도를 받는 부끄러움을 선물하신 유별난 분이었다. "선생님이 저렇게 소리 지르라고 가르치셨습니까? 지나치게 목소리가 큰 것도 일종의 병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아동 지도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세요. 그 아이의 불만과 문제점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PAGE BREAK]교실 중심의 장학 방침 고수돼야 다음 날 학사 일정을 위해서 교실에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은 4시 이후에야 영역부장과 학년부장을 소집하여 간단한 협의를 마치고 다음날 일정을 미리 게시한 후 퇴근하여 아침부터 회의 소집으로 선생님들이 교실을 비우는 일은 없게 하는 일은 가장 기본적인 교무회의였다. 그러니 아이들과 선생님이 이른 아침부터 독서를 하거나 공부를 할 수 있어서 학교도 차분하고 질서정연했다. 어쩌다 방학 때 교장실을 들어가 보면 손때 묻은 교육 전문서적과 일본판 서적들이 즐비하여 엄청난 독서력에 감동하곤 했다. 말을 극히 아끼면서도 아주 중요한 부분은 확실하게 전문서적의 내용을 소개하고 해석하여 강의에 가까운 조언을 메모하며 듣던 직원협의 시간들이 참 그립다. 그 시간은 늘 교육학을 다시 공부하는 기분이었으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체 교직원 회의는 일주일에 단 한 번, 그것도 금요일 오후 4시 30분이며 5시를 넘기는 일조차 드물었다. 혹시 퇴근 시간 이후에 학교에 남아서 근무하는 선생님에게는 핀잔을 주셔서 근무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은 무능의 소치라며 면박을 주시니 일이 많은 분들은 일감을 들고 퇴근하거나 점심시간까지 쉬지 못하곤 했었다. 선생님들을 인자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험담하지 않아서 교직원들끼리도 화목했었다. 충고할 일은 혼자만 조용히 불러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꾸지람하고 공이 없는 데도 큰 상을 받게 하지 않으며 칭찬은 공개적으로, 꾸중은 남 몰래 하라는 교육자가 지녀야 할 상벌의 규칙을 엄히 지킨 덕분에 50명에 가까운 교직원들이 화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도 선생님이 특정한 아이를 싫어하면 덩달아서 그 아이를 싫어한다. 내 집에서 귀한 자식이 밖에서도 대접받는 것처럼, 관리자의 편애나 편 가르기는 직장 분위기를 죽이는 데 치명적이다. 아이들을 철저하게 훈육하고 바르게 키우길 바라셨고 교실수업은 교사의 생명이니 혹시라도 공문이 늦어지면 책임질 테니 수업부터 끝내고 오라셨으니 수업 시간에 결재를 위해서 교실을 비울 수도 없었고 수업 시간에는 면담조차 인정되지 않았던 그 엄격함이 그립다. 정년퇴임의 자리까지 거절하고 조용히 살아가시는 모습은 영락 조선시대의 선비 같으신 분이었으니 교육자에게는 그처럼 꼬장꼬장한 자존심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학부모에게 식사 초대를 받거나 졸업식 날 회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게 하고 당당한 교사의 자존감을 심어주셨던 분이다. 소풍을 가도 출장비로 점심을 주문하여 학부모의 부담을 사전에 차단할 만큼 철저해서 오히려 학부모님들이 안절부절 할 정도로 선생님들의 콧대를 높여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원 친목날이 되면 강당에서 밤 8시가 되도록 내기 배구를 하며 전 직원이 웃고 떠들며 끈끈한 동지애로 뭉칠 수 있게 은근히 뒤에서 부추기던 장난스러움도 있었다. 내기에 진 팀이 시합에 건 돈으로 저녁을 사게 하고 다음에 다시 도전하게 만들어서 한겨울에도 강당에서 배구를 하던 일이 생각난다. 업무는 분위기에 따라 극복 가능 그런 깐깐함과 확실한 교육철학을 지닌 리더 덕분에 전남의 명문초등학교로 이름을 날렸던 2년 동안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어쩌다 동학년 티타임이 1, 2분 늦어져서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날벼락이 떨어졌으니 최고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도 아무도 불평할 엄두를 못냈었다. 확고한 원칙과 교실중심의 장학 방침을 고수하는 관리자를 모시는 것은 선생님들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내인사까지도 교직원 인사위원회에서 조정하고 업무와 학년 배정을 점수화 하여 공개함으로써 투명성을 간직하여 교직원 간의 불화의 소지를 미리 차단하였으니 앞서가는 교육행정을 펼친 셈이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 연속하여 고학년을 맡게 하는 일이 없었고 업무의 경중을 따져서 수업시수가 적은 학년은 당연히 업무량이 많았다. 그러니 나이를 앞세워 업무를 회피하기보다 오히려 선배교사들이 더 열심히 일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서로 돕는 역할 분담이 철저했다. 필자는 6학년을 2년 연속 했는데, 그 이유는 6학년을 같이 했던 두 분 선생님들의 의견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6학년 3개 반을 교과 전담으로 구성하여 음악, 미술, 체육을 교담제처럼 운영하며 각자의 특기를 살려 학년을 이끌었다. 수학경시대회를 지도했던 필자는 수요일조차 5시까지 6학년 수학 반 아이들을 지도하느라 제대로 배구를 못했으며, 점심시간에는 교수용 TP 자료를 만드느라 바쁘면서도 각자의 역할분담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 수 있었다. 업무란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이 서로 아끼고 격려하며 도와주는 직장 분위기가 얼마나 좋은 가에 따라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직장 내의 분위기가 늘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서로 험담하여 신뢰하지 못하게 하거나 편 가르기를 하여 내 사람, 네 사람을 만들면 어떠한 조직도 살아남지 못한다. 특히 교직에서 교사의 자존감을 흔드는 관리자를 만나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이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선생님이 즐거워야 아이들이 행복한 특수한 조직이다. 그 명제 앞에서는 어떠한 논리를 앞세워도 괴변이라고 단언한다. 학부모 앞에서 학교 선생님들을 폄하하는 관리자나 선생님은 이미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학교에서는 호되게 질책하고 충고해서 바르게 가르치되 서로의 상처나 아픔은 최대한 참아주고 묻어주는 어버이나 형님 같은 관리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8년 전 그 교장 선생님이 참 그립다. 교사가 교실에 머물 수 있도록 해야 교육은 개혁을 한다고 변화 하는 것이 아니다. 수업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사들을 고무시키고 자존감을 키우며, 교사가 아이들에게만 사랑을 쏟을 수 있도록 철저하게 믿어주고 여건을 조성해주는 '교실중심'체제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선생님을 흔들고 교실에 머무는 시간을 빼앗으며 수업보다 업무 중심으로 가는 상황이 연출되면 이미 개혁은 물 건너 간 것이다. 교육은 한 시간 한 시간 수업을 통해서, 선생님과 아이들이 눈을 맞추고 앎의 기쁨과 가르침의 환희가 만나는 '예술적 경지'나 '절정적 체험'의 순간이 모여서 커지는 한 그루의 나무인 것이다. 교실수업을 지원해 주고 꾸준히 장학활동을 펼치며 사기를 진작시키는 일이 활기찬 교직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함께 근무한 선생님이 최근에 교감 선생님으로 승진해 가셨는데 그 학교 선생님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선생님들이 처리해야 할 공문의 대부분은 그 교감선생님이 거의 다 해 주신다는 것이었다. 급한 공문을 하느라 수업을 못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교무보조와 함께 처리해 주시면서도, 본인은 수업을 하지 않으니 그런 일을 도와 드리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신다는 것이었다. 현재와 같은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교직 풍토에서 그와 같은 관리자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어서 선생님들이 부러워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선생님들은 공문이나 업무를 할 때보다 아이들과 수업하는 시간이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급한 공문을 처리하느라 잃어버린 아이들의 시간은 찾을 곳이 없고 선생님이 바빠서 빈자리가 생기면 안전사고마저 도사리는 교실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아시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들이야 바쁘건 말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내는 관리자보다 훨씬 더 멋진 교감 선생님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겸손이므로. 2001년 2월 국내에서 상영된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원제 Pay it forward)는 누구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힘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 영화였다. 새 학기를 맞은 사회교사는 학생들에게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라'는 숙제를 낸다. 엄마와 단둘이 외롭게 살고 있던 트레버는 한 사람이 3명에게 사랑(선행)을 나누면 그 3명은 각각 또 다른 3명에게 좋은 일을 하게 돼 마침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세상 모든 사람이 선행을 주고받게 된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바로 그 교감 선생님은 오늘도 그 학교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소년 트레버처럼 나눔의 공식을 전파하고 계시리라. 자신이 근무하는 학교나 교실, 아이들이 내가 오기 전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서로 믿고 의지하는 공간으로 변화되었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니겠는가?
박하선 | 사진작가·여행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몇 해 전 일이다. 세계의 관심이 한 순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발표한 한 포고문에 집중되고 있었다. "신은 유일하기 때문에 형상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것은 잘못이다. 모든 불상들은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다. 지금부터 그 불상들이 신앙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미안' 석굴을 비롯한 아프간 내의 모든 불상들은 제거돼야 한다!" 상식을 벗어난 문화유적 파괴 상식을 벗어난 너무도 충격적인 내용에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이 발표 이후 유네스코는 물론 UN 189개 회원국이 서둘러 불상 파괴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며, 이집트, 터키,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들조차도 탈레반을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탈레반 정권은 이 같은 비난 여론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계의 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을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해 완전 파괴하였고, 그 충격적 현장이 미국의 CNN방송을 비롯한 세계 통신사들의 통신망을 타고 전 세계로 중계되도록 해 세계인들을 충격에 빠지게 하였다. 아프간 중부의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바미안.' 두 번째 아프간에 발길을 들여놓으면서 그토록 갈망해 왔고, 또 그 문제의 현장이었던 바미안 계곡을 찾아가고 있다. 수도 '카불'에서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미니버스로 엉망진창의 산길을 가는 고행길 곳곳에는 부서진 장갑차들이 전흔을 말해주고 있고, 군데군데 흰색으로 지뢰 지대임을 표시해 두고 있다. 그러나 긴장감을 느끼기보다는 오랜 숙제를 풀 수 있게 된다는 기대에 가슴 벅차 오를 뿐이다. 9시간이 걸려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 바미안에 도착했다. 도시가 아닌 산골분지 마을로 사방이 황토빛 산들로 둘러 싸여 있는 곳이다. 여관이라고 할 것도 없어서 'MAMA NAJAF RESTAURANT'라는 식당 겸 여관의 허름한 방에 일단 여장을 풀었다. 외국인이라고 제법 비싼 달러 요금을 받는다.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날도 춥고 어두워져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 건물 지붕 위에 올라서니 그 고대하던 바미안 석굴 쪽의 전방이 그만이어서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밤새 가랑비가 눈으로 변해 주변 높은 산들에는 하얀 눈이 쌓이고 구름들이 걸려 있는 모습이 일품이다. 중국 실크로드 지역에 있는 화염산맥이 풍기는 기기괴괴한 멋을 이곳 산들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힌두쿠시' 산자락이다. 이곳 바미안 석굴을 대표하던 2개의 대불이 있던 자리가 동쪽과 서쪽에서 또렷하게 들어온다. 마음이 급해진다. 라마단 기간이어서 아침 식사를 기다릴 것도 없어 곧장 석굴 쪽으로 걸었다. 분노 일으키는 파괴된 역사현장 석굴 입구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허가증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사무소에 허가증을 받으러 가면서 또 허가비를 톡톡히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했는데, 취재 왔다고 하니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이 엄청난 유적에 관람료가 없다는 것에 기분 좋아해야 할지…. 무장 군인의 감시 하에 첫 대면한 것은 서쪽에 있는 대불의 감실이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인 감실의 윤곽은 아직껏 또렷하게 남아있지만 1500년을 지켜오던 거대한 불상은 간데없고 빈자리 밑에 무너져 내린 흙덩이들만이 어지럽게 뒹굴고 있다. 당시 뉴스를 통해 봤던 그 충격적 화면이 떠오른다. 세계 각처에서 이 불상의 파괴를 막아 보려고 그토록 노력했지만 결국 탈레반 정권은 파괴하고 말았다. "非이슬람 우상과 싸우겠다"는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는 모든 것을 파괴대상으로 삼겠다는 그 잘못된 사고가 '반달리즘(vandalism - 문화 예술 파괴행위)'의 차원을 뛰어넘은 '반문명적 폭거'로 이어졌다는 것에 세계가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군데군데 많은 석굴은 이곳 주민들이 문을 달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불상이나 벽화가 남아있지 않는 텅 빈 곳이라지만 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이렇게 방치되고 훼손되어 가고 있다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복원 되야만 하는 불교 순례지 동쪽의 대불 또한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이곳은 그 불상이 있었던 자리의 윤곽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감실 옆으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여기저기의 석굴마다 놀랍게도 벽화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너무도 심하게 훼손되어 무슨 내용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당시의 화려한 모습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불교미술사에서 이 바미안 석굴이 특별히 유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 거대한 크기의 불상 때문이었다. 어느 지역의 어느 불상도 필적할 수 없을 만큼 큰 크기는 일찍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바미안 분지의 북쪽을 둘러싸고 약 1.3㎞에 걸쳐 펼쳐져 있는 암벽에는 이처럼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석굴이 파여 있다. 이 중 동쪽과 서쪽에 얼마 전 파괴된 그 커다란 대불이 하나씩 감실 안에 새겨져 있었다. 동쪽의 대불은 높이가 38m, 서쪽의 대불은 55m였다. 6세기쯤 바미안을 거쳐 가는 교역로가 본격적으로 열리고 이곳에 불교가 번성하면서 이처럼 많은 석굴들이 조성되었고, 그 안에는 바로 전에 확인 할 수 있었던 것처럼 훌륭한 벽화들도 그려졌다. 간다라의 쿠샨왕조 때부터 불교도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였던 이곳에는 400년경에는 중국의 법현 스님이, 630년에는 현장법사가, 그리고 8세기 초 우리나라의 혜초스님도 이곳을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이제 바미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경관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가장 좋은 자리가 석굴 맞은 편 남쪽의 언덕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볼 때 펼쳐지는 장대한 암벽의 동서를 장식하고 있던 두 대불은 그 경관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특히 두 대불은 이처럼 멀리서 볼 때 더 웅대하고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저민다. 유네스코와 아프간 새 정부에서 조만간 이 불상들을 복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옛 모습을 어느 정도까지 살릴 수 있을지 두고 볼일이다. 아직도 내전의 상처 남아있어 아쉬움에 잘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오니 중무장한 미군들의 한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 사주 경계를 펴고 있다. 그중에는 금발의 미녀도 한 명 끼어있다. 인상이 좋아 보여 "지금 뭐하는 중이냐?"고 물으니 아프간 한 정부인사의 경호를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군용 헬기 한 대가 머리 위에서 날더니 그 편으로 고위급 간부 일행이 이곳 바미안을 방문한 모양이다. 아직도 도처에서 탈레반 잔당들의 기습이 염려가 되기 때문에 이렇게 미군들이 직접 경호를 맡고 있는 것이다. 그녀에게 한 마디 더 물었다. "아프간과의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나는 잘 모른다. 직업일 뿐이다." 날이 점차 흐려져서 눈이라도 내릴 듯하다. 겨울철에는 엄청난 눈이 쌓여 바깥세상과는 내통이 쉽지가 않다고 한다. 그때의 바미안은 또 어떤 모습일까. 어수선한 시국이지만, 이곳 바미안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온 것처럼 별다른 동요 없이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 있다. *바미안 계곡의 세계적 유산의 흔적을 새교육 2월호에서 확인하세요.
신동호 | 코리아 뉴스와이어 편집장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흔히 쓰는 표현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본인 하면 불쾌한 과거의 역사가 먼저 떠오른다. 마치 DNA에 새겨져 있기나 한 것처럼 반일 감정은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한(恨)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DNA에 기록된 2300년 전 일본사 하지만 정작 DNA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족보를 파헤쳐 보면 두 민족은 형제나 다름없다. 2300년 전쯤부터 수백 년에 걸쳐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사실상 일본을 세웠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렇게 가까운 혈족이란 것은 한국인은 물론 일본인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우리는 그저 불교를 전파해 주고 도공들이 몇 백 명씩 건너갔다는 정도로 생각했지, 밝혀진 것처럼 한반도에서 수만 혹은 수십만 명씩 건너간 이민자들이 일본인이 됐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와 한국인이 일본인과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는 '일선동조론'을 우리에게 강요했지만 이는 조선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동북아대륙의 어느 인종과도 함께 자리 매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 하지만 한국, 일본 등 아시아 4개국 유전학자들이 1996년 유전자를 통해 일본인의 기원을 밝힌 논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이 연구는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가 주도하고 한국 학자도 참여했다. 이들은 남한, 중국, 혼슈 지방에 사는 일본 본토인, 오키나와인,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 등 모두 293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했다. 그 결과 본토 일본인의 23%, 한국인의 27%가 같은 유형을 갖고 있었다. 반면 본토 일본인과 중국인은 서로 겹치는 유형을 가진 사람이 전혀 없었고 본토 일본인과 아이누 족은 같은 유형을 가진 사람이 6%에 불과했다.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 사토시 호라이 박사는 "한국인과 본토 일본인의 유전적 거리는 거의 영(0)이다"고 논문에 썼다. 즉 2300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과 일본 원주민이 섞이면서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가 시작됐고 융합이 서기 600년까지 계속되면서 현대 일본인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이주자들은 처음에 일본 규슈 지방에 먼저 정착하고 이어서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로 이주했다. DNA 뿐만 아니라 문화도 비슷해 일본 돗토리 대학 의학부 이노우에 다카오 교수 팀은 2003년 더욱 확실한 증거를 발표했다. 벼농사 도입과 청동기 전래로 상징되는 야요이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전자가 현대 한국인의 그것과 일치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노우에 교수 팀은 야요이 시대 유적인 돗토리 현 절터와 사가 현에서 출토된 야요이인 유골 4점의 미토콘드리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했다. 그 결과 한국인과 혼슈의 일본인이 동일한 집단에 속했다. 유골이 발견된 돗토리 현은 동해와 맞닿은 혼슈 지방의 해안 도시이고, 사가현은 규슈 지방 북부에 있다. 두 곳 모두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다. 일본에는 수만 년 전부터 동북아시아에서 들어온 아이누 족, 류큐 인 등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수렵이나 채집 생활을 했다. 기원전 4∼5세기경 한반도를 통해 도래인이 건너가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 및 토기 문화를 전파하면서 일본에서는 비로소 농업 혁명이 시작된다. 일본 문명의 원형이 만들어진 야요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100여 개의 부족국가를 세우고 서로 경쟁하다가 마침내 4세기에 야마토(大和)라는 일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와 야마토 시대는 한반도 이주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정치권력이 들어선 야마토 시대는 고분문화 시대(AD 300∼700)라 불릴 정도로 무덤이 많은데 대부분 백제의 고분과 비슷하다. 대륙 혼란이 일본 이주사 만들어 그렇다면 한국인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한 2300년 전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대륙은 큰 혼란의 시기였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앞두고 진·초·연·제·한·위·조 7웅이 피의 전쟁을 벌이던 전국 시대(BC 453∼221)였다. 이때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는 고조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서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경 처음 등장해 기원전 4세기 무렵에는 중국 요녕 지방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친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 전 중국 전국 시대 칠웅의 하나인 연이 고조선에 쳐들어왔다. 이로 인해 고조선은 서쪽으로 2000리에 이르는 땅을 잃고 평양 지역으로 옮겼다. 이때 많은 고조선 주민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 뒤 삼국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4∼7세기에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대량 인구 이동이 세 차례 있었다고 본다. 먼저 삼국 간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던 4∼5세기에 백제 북부 지역 주민들과 낙동강 유역의 가야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어 5세기 후반에 백제 귀족과 한강 유역의 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7세기에 접어들어 신라가 3국을 통일하면서 백제와 고구려의 망명객들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DNA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특별한 관계가 드러나자 아키히도 일왕은 월드컵 공동 개최 직전 한일 왕실 간의 핏줄 커넥션까지 공개했다. 환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왕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환무 천황의 생모는 789년에 죽은 다카노 니이가사이다. '속일본기'는 다카노 황태후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순타 태자는 505년 일본에 파견됐다가 8년 만에 죽었다. 짧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 후손이 바로 일본의 황태후가 된 다카노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순타 태자의 후손들은 다카노 황태후가 나올 때까지 무려 270년 동안 일본 귀족 사회에서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산 셈이다.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 일본인과 일본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총지휘한 도쿄 대학 인류유전학자인 오모토 게이이치 교수가 한국에 왔을 때 그를 호텔로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100명의 일본 학자들과 여러 분야의 연구자를 총지휘하며 일본 민족과 일본 문화의 기원을 밝혀낸 중심 인물이다. 그 역시 대륙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이 일본인의 80%를 형성했고 한반도가 그 길목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다. 그는 도래인이 일본에 정착했을 무렵 사람들의 묘지가 있는 야마구치 현 도이가하마 인류학박물관에 가면 당시 묻혀 있는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한국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과 일본은 이처럼 가까운데도 왜 말이 다를까? 현대 일본어와 현대 한국어는 단어의 유사성이 15%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다. 핏줄이 가깝다면 말도 상당히 비슷해야 하는데 서로 말이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고대 고구려어가 일본어의 뿌리가 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대 한국어는 신라의 말이 뿌리가 됐고 그 후 훈민정음이 만들어지면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지만, 일본어는 이미 한반도에서는 사라진 고구려 언어가 뿌리가 됐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나오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제어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고대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른 언어를 갖고 있었으며 현재의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일본어는 고구려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어는 기원전 400년 경 한반도에서 일본 남부 규슈로 건너와 쌀농사를 짓고 이 농사법을 일본 북부로 퍼뜨린 고구려 농민의 언어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한국어는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는 이두나 구결, 향찰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다. 3, 5, 7 숫자는 고구려어로는 密, 于次, 難隱로 표기된다. 이는 '미', '이쓰', '나나'로 발음되는 일본어와 비슷하다. 과거에서 벗어나 세계의 중심으로 우리는 일본인을 왜인(倭人)이라고 부른다. 키가 작기 때문이다. 키가 큰 한국 사람이 일본인과 어떻게 유전자가 같으냐고 할지도 모른다. 일본인이 키가 작은 것은 환경적 요인이지 유전자 때문이 아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생수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생수는 칼슘성분이 한국보다 매우 적었다. 일본인이 작고 치아가 튼튼하지 못하고 뻐드렁니가 많은 것은 칼슘 부족 때문이지 유전자가 우리와 달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일 간의 혈족 관계가 밝혀지고 월드컵을 공동 개최하면서 한일 관계에도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두 나라가 협력하면 아시아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 수 있는데도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만 집착해 일본인을 증오하고 있다. 일본인도 같은 핏줄을 괴롭힌 부끄러운 역사를 솔직히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한국도 무조건적인 반일 감정에서 벗어날 때 한국과 일본은 피를 나눈 진정한 형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신아연 | 호주칼럼니스트 2월, 새 학년 시작을 앞두고 지난해의 묵은 교과서와 노트, 필기도구 등을 제 방 한가득 펼쳐놓고 정리하는 아들애를 돕다가 잡동사니 사이에 묻힌 유난히 낡은 과학책에 눈길이 머물렀다. 겉장은 벌써 어디로 떨어져 나가 없고 손때로 갈피갈피 말려 올라간 각 페이지, 여백의 군데군데 낙서까지, 지난 한 해 동안 아들애의 손에 몸살을 앓았을 과학책의 고단함이 한 눈에 읽히는 듯했다. 옆에 있는 영어와 수학책도 꼴이 남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올해까지 계속해서 2년 연속 써야 하는 체육책은 그나마 좀 얌전하게 간수한 듯했다. 대학의 원서 버금가는 두꺼운 지질의 교과서가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책을 험하게 다룬 아들애에게 한마디 주의를 줄 법도 하건만, 책 더미 속에서 과학책의 표지를 찾는 손길 중에도 잔소리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고 내심 대견하기조차 했다. 아들애가 지난 1년간 사용한 과학 교과서는 실은 헌책이다. 표지 안쪽에 쓰여 있는 우리 아들의 이름 위에 또 다른 두 아이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교과서의 주인이 3년 내리 세 번이 바뀌었던 모양이다. 지난 해 9학년(한국의 중학교 2학년)을 시작하면서 아들애는 새 교과서를 갖고 싶어 했다. 그러는 녀석을 타일러서 되도록 깨끗하게 사용한 헌 책을 사도록 했는데 영어, 수학, 사회 등 죄다 남이 쓰던 것으로 장만하던 중에 과학책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새 책, 새 공책, 새 필기도구로 산뜻하게 새 학년을 시작하고 싶었던 소망이 일그러져서 제 딴엔 기분이 후줄근했을 텐데도 녀석은 헌 책들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여 학년말에는 우등상도 받고, 특히나 과학과목은 학년 전체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갖가지 펜으로 어지럽게 밑줄이 그어진 공식하며, 연습문제 풀이에는 새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해답이 쓰여 있는 열악한(?) 환경의 교과서를 가지고도 우수한 성적을 냈으니 책을 좀 험하게 다루었다한들 대수일 것도 없고, 어미의 마음에는 그저 기특하기만 할 뿐이었다. 우리 애 뿐 아니라 호주에선 매해 학년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구입을 놓고 부모와 자식들 간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선배들의 교과서를 물려받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대개는 부모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교과서뿐만 아니라 교복과 체육복, 가방, 심지어 신던 구두조차도 후배들에게 물려주어 재활용 할 수 있는 데까지 사용토록 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새 학기 시작을 앞둔 1월 초순경에, 더 이상 필요 없는 교과서나 교복 등을 팔고 싶어 하는 학생들로부터 수거하여 일정한 값을 매겨 신학기 준비물 기간동안 판매를 대행해 준다. 물건이 팔리는 대로 각 개인별로 집으로 수표를 보내주기 때문에 학생들은 되도록 빨리 새 임자를 만나게 하려는 조바심에 평소 사용할 때도 깨끗이 취급하는 습관을 들이게 된다. 부모 마음으로는 자식한테 다른 것도 아니고 교과서 하나쯤 새 것으로 사주지 못하랴 싶지만, 만만치 않은 신학기 준비물을 생각한다면 보통 가정에서는 그도 쉬운 노릇은 아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새 책으로 구입할 경우 과목당 5만원 내지 10만원을 훌쩍 넘는 게 보통이고, 여기에 교복을 비롯해서 학용품 및 기타 신학기 필요용품을 전부 합치면 한 자녀 당 최대 80만원을 상회하기도 한다. 초등학교의 경우는 이보다 덜 들지만, 호주에서는 1년간 필요한 수업 준비물 일체를 새 학년 새 학기에 한꺼번에 일괄 갖추도록 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목돈이 필요하고 형제가 여럿이다 보면 감당하기가 벅찬 가정이 많다. 그러다보니 되도록이면 쓰던 것을 물려받거나 비싼 값을 치루고 새로 산책은 절반이라도 건지기 위해 학생들의 신학기 용품 재활 습관이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교과과정이 개편되어 교과서가 바뀌지 않는 한 학교마다 펼치는 책 물려받기 전통은 좀체 대가 끊어지지 않으면서 학부형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데 한 몫을 하는 것이다. 한편 이맘 무렵이면 형편이 어려운 가정들의 새 학기 준비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사회도 십시일반 도움의 손길을 펼친다. 평소 생활 곳곳에 알뜰살뜰 배어있는 이 나라의 재활용 문화가 이웃을 향해 보람과 빛을 발하는 순간 중의 하나로 재활용품 판매 대금으로 장학금을 마련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일반 가정에서 내다버린 생활 집기나 옷가지 따위를 모아 깨끗이 수선하고 정리 정돈한 후 재활용 가게를 통해 1~2달러의 값으로 팔아 모은 수익금의 일부를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자금이나 학용품 구입비로 환원을 하는 것이다. 재활용 기금을 통해 고등학교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매년 50~100만원 정도를 보조 받으면서 학업을 마친 학생들의 경우 비록 액수가 많지는 않지만 그 돈이 모아지기까지의 따스한 손길과 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한 푼을 쓸 때에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고 감사를 표하곤 한다. 재활용품점은 또 신학기가 되면 시내 각 학교로부터 학생들의 작아진 교복이나 헌 가방 등을 수집하여 대대적인 할인판매에 돌입한다. 깨끗이 손질이 된 물건을 저렴한 비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잇점으로 인해 자녀수가 많거나 소득이 낮은 가정들을 단골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무엇이 되었건 자식들에게 최상의 것을 해주고 싶고, 학업이나 학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주는 것에는 그 정성이 더욱 앞서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고, 그로인해 학생들 간에 위화감이 생길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호주 학교처럼 빈부 구분 없이 아예 헌 책으로 공부하는 것을 전통으로 굳혀 버린다면 학생들이나 부모들이나 마음 언짢은 일 없이 새 학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선배들의 수고와 땀,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 있는 교과서의 갈피갈피를 넘기면서 앞서 걸어가면서 빠뜨린 공식이라도 있다면 뒷사람이 챙기며 따라가는 재미도 느끼면서 말이다.
수채화는 동심을 닮은 맑고 깨끗한 청량제 미술이 타고난 재주를 갖춘 몇몇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에서 우리 아동교육미술은 70년대 교육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경남지역 초등교사들의 뜻이 모여 1998년에 탄생한 '그림마실.' '마실'은 '동리 안을 나들이 가서 여가를 즐긴다'는 뜻이지만, 정작 그림마실의 탄생은 회원들의 열정과 노력 없이는 불가능했다. 더 이상 미술교육을 사교육기관에 맡길 수 없다는 것에 뜻을 같이 했지만 전문성이 없다면 공염불에 그칠 일이었다. 그래서 그림마실 창립회원들은 1996년부터 2년간 수채화에 대한 공부를 한 후 정식으로 활도을 시작하였고, 이후에도 저자인 전성기 씨, 아동 미술연구가 윤정방 교수, 진주교육대학 이쌍재 교수, 한국수채화협회 등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9회에 걸친 정기전을 개최하였다. 그림마실 회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특기적성지도. 교과 공부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수채화는 솔직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휴식처럼 편안한 시간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시작의 아름다운 감동을 그대로 살려서 표현하여 만족감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초벌 단계에서 포기를 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림마실 회원들은 수채화에 대한 공부에 더욱 충실히 하며 각 학교에서 클럽활동을 지도하고, 방학기간에는 미술캠프를 운영한다. 틈나는 데로 학생들과 야외스케치를 하는 것도 큰 보람 중 하나이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1998년 초·중등학교 수업혁신을 위한 교과 교육 연구활동 지원계획에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각종 아동 실기 대회에서 지도자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실력 향상에 힘입어 매년 각종 공모전에 10여명이 입상을 한다. 그림마실은 현재 더욱 더 변화하기 위해 아동그림캠프, 타지방 미술동호교사회와의 교류전, 세미나, 전국 아동미술 현황자료 수집, 전국 공모전 응모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림마실은 앞으로도 어린이들의 미적체험활동과 표현활동을 통한 참다운 인간육성을 유도하여 그들의 요구와 본능, 흥미를 건전하게 충족시켜 주고, 꾸밈없는 자연의 세계를 표현한 전시회를 통하여 미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그림마실에 대한 자세한 활동 내역과 회원 가입은 홈페이지 http://painting.gnedu.net를 참고하면 된다.
김연수 | 생태사진가 주로 가파른 암벽지대에 서식 체감온도가 영하 30도를 밑도는 강원도 고성군 건봉산 산마루. 이곳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DMZ가 인접한 민통선의 최북단으로 해발 1000~1500m의 가파른 암벽지대이다. 산양(천연기념물 217호)은 인간이나 또 다른 포식자가 접근할 수 없는 이런 곳에 서식한다. 눈이 쌓이고 영하 15도를 밑도는 추위가 계속되면 산양들은 먹이를 찾아 DMZ의 철책선 근처로 이동하여 주로 건봉산 오소동계곡이나 고진동계곡에서 월동한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강원도 설악산이며 오대산, 태백산 등지에 수천 마리가 넘는 산양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4~65년에 대폭설이 내려 굶주린 산양들이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왔다가, 그 어렵던 시절에 몽매한 주민들에 의해 무참하게 포획되었다. 그 후 196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지만, 강원도 고성과 양구의 DMZ와 민통선에서 얼마 안 되는 개체수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밖에 설악산과 오대산 등지에도 몇몇 마리가 생존해 있는 등, 남한에 살고 있는 총 개체 수는 200마리를 넘지 못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민한 탓에 사진 찍기 어려워 농가의 흑염소와 비슷하게 생긴 산양은 어미의 몸길이가 110㎝ 안팎이고 키는 55~70㎝, 몸무게 35kg 가량이며 암수 모두 10~23㎝ 정도의 검은 뿔이 나 있다. 사슴과 달리 뿔이 빠지지 않고 평생 자라기 때문에, 산양의 나이를 이 뿔의 크기로 가늠하기도 한다. 맹수를 피해 기암절벽에 살도록 진화된 초식성 산양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굵은 다리와 바위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스펀지처럼 탄력성 있는 발바닥을 가졌다. 게다가 적갈색의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마치 바위 같아, 눈밭이 아니면 육안으로 식별이 어렵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이곳 건봉산에는 '건봉사'라는 유서 깊은 사찰이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의병들을 훈련시켰던 곳이고, 한국전쟁 때는 남북의 군인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건봉사는 민통선 안 군작전지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민통선이 좁혀지면서 지금은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건봉사를 옆에 끼고 가파른 산악길을 지프차로 2시간이 넘게 올라가면 건봉산 꼭대기에 커다란 부대가 있다. 산양을 보려면 이 부대보다 더 북쪽인 오소동계곡으로 내려가야 한다. 낮이 짧은 겨울의 산간계곡인지라 오후 4시가 되니 어느새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도 산등성이는 백설이 반사되어 아직도 대낮처럼 훤하다. 운이 좋으면 이곳에 가는 길목에서 몇 마리의 산양을 목격할 수 있다. 산등성이 보다 약간 밑쪽을 주시하면 검은 바위같이 생긴 것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몸을 감추고 숨을 죽이면 이들이 꽤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지만 카메라 셔터 소리에 놀라 후다닥 달아 날 때가 많다. 군인들의 도움 받는 야생산양 오소동계곡에 다다르자, 산양 가족 일곱 마리가 떨어지는 해님을 아쉬워하며 부지런히 주린 배를 채우고 있었다. 필자의 카메라 셔터 소리에 간간이 고개를 들어 초소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온통 눈으로 도배한 산속에서 파란 먹잇감을 횡재한 녀석들은 두려움도 잠시 잊고 열심히 먹이를 먹는다. 이곳 군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야생동물을 보살피기 위해 이따금씩 파란 배추를 갖다 놓아주기 때문이다. 물론 야생동물에게 인위적으로 먹이를 주는 것이 권장할 만한가는 학술적으로 좀 더 검토해 보아야겠지만, 멸종위기에 놓인 산양을 한 마리라도 더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계곡의 얼음장을 녹이듯 훈훈하다. 산 너머 바로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는 이곳은 야생상태의 산양을 볼 수 있는 세계유일의 명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곳에 갈 수 없다. DMZ와 바로 붙어있는 곳이고 겨우내 눈이 쌓인 험로이기 때문에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출입이 통제된다. 산양을 보고 싶다면 용인 에버랜드나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으면 손쉽게 볼 수 있다. 산양 보호에 앞장서는 '산사모' 그러나 강원도 양구군 동면 월운리에 좀 특별한 곳이 있다. 1996년 '산사모(산양을 사랑하는 모임)' 회장인 정창수씨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1만 여 평의 야산에 산양 증식장을 세우고 멸종위기의 산양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곳에는 7마리의 산양이 자연 상태와 비슷하게 살고 있다. 정씨와 150여명의 산사모 회원들은 겨울철이면 산양보호에도 촉각을 세운다. 눈이 쌓여 먹을 것을 찾지 못하는 산양들이 민가 주위로 내려와 밀렵되거나 교통사고로 죽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사모 회원들의 노력으로 양구일원에서 산양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외지에서 잠입하는 전문밀렵꾼들을 감시하는 일은 조금도 등한시 할 수 없다. 간혹 부상당하거나 굶주림에 쓰러진 산양이 발견되면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는 비상대기조가 항상 운영되고 있다. 산사모와 같이 지역에서 요란하지 않고 조용히 활동하고 있는 NGO들이 늘어간다면 조만간 백두대간 곳곳에 산양들이 안정된 개체수로 늘어갈 것이다. *DMZ에 서식하는 산양의 모습! 새교육 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경민 | 역사 칼럼니스트(cafe.daum.net/parque) 아우구스투스의 사후, 로마는 서서히 몰락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었다. 제국은 이미 로마다움을 상실한지 오래였으며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제위에 오른 그 해에 폼페이를 매몰시킨 베수비우스 화산이 폭발하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역병이 돌고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로마다운 정신 잃고 분열의 길로 나라가 망하려면 여러 징조가 나타난다. 민심의 이반이 첫째요, 둘째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다. 특히 티투스는 자연재해 발생으로 이재민 구호에 정신이 없어 황제 노릇을 어떻게 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현재 로마 시에 있는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Titus Flavius : AD 81~96)는 엄격한 입법과 행정으로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여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측근의 배반으로 암살을 당함으로써 다음 황제인 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오현제(五賢帝)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오현제 가운데 마지막 황제이며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AD 161~180)치세 말기부터 제국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한나라의 무제가 흉노족를 치자, 민족 이동의 '도미노 현상'이 벌어져서 그 가운데 흉노족에게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제국 영토 내로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변방 수비군에 차츰 게르만 용병이 채워지게 되었다. 게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고 암살당한 그의 아들 콤모두스를 거쳐 로마제국은 한동안 심각한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어 군인들에게 의해서 황제의 선출과 폐위가 거듭되는 '병영황제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약 50년 사이에 26명이나 되는 황제가 폐위되어 중앙권력의 약화가 가속화되었다. 병영황제시대의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Gaius Aurelius Varelius : AD 284~305)의 즉위로 일단락되었으나 이미 제국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지 오래였다. 그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서 정치와 경제, 국경경비에 주력하는 한편, 원로원의 기능을 대폭 축소시켜서 로마 시 의회 정도로 만들어 버리고 태양신을 자칭하는 등 황제권을 강화하였다. 로마제국의 붕괴를 초래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전제 군주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신분제를 강화한다는 것이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전통적으로 로마의 힘이 되었던 시민의 자유가 상실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다운' 정신을 잃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함으로써 나중에 제국의 동·서 분열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편 거대해진 로마제국은 공룡들이 많은 먹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제국 관리를 위한 유지비가 많이 들어가게 되었고 도시에 중과세를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물건을 많이 팔면 팔수록 세금을 많이 거두어 가는데 누가 열심히 장사를 하겠는가! 자연히 상업의 쇠퇴를 가져왔으며 로마 제정시대가 열리고 정복사업이 중단되자, 일할 노예공급이 딸리게 되어 노예노동이 주가 되는 산업은 자연적으로 쇠퇴하였다. 제국의 탄압 속에서 탄생한 예수 로마의 정신적 유산인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유럽의 전통을 계승 유지하게 되었다. 원래 오리엔트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는 현실주의적 가치관과 사고방식, 도덕적 질서를 거부한 나머지 로마제국의 정치구조와 충돌하였으나 결국 종교성, 다시 말해서 순수성과 세계성은 로마사회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예수가 창시한 그리스도교는 그 뿌리를 유대교에 두고 있다. 때문에 두 종교는 많은 점에서 같지만 또 여러 면에서 다르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기록인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유대교의 배타적 구원관과는 달리, 구원의 전면개방과 국제화와 세계화를 표방하였다. 예수 탄생 이전의 약 250년 동안 유대민족은 거의 기적적으로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70여 년 동안 유다 마카베오와 그 후계자들이 독립정부를 유지하면서 그리스계 왕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탄압에 항거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의 결속을 다지고 있었다. 그 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를 정복하고 계속 세력을 확장하자 유대인들은 필사적인 저항으로 맞섰지만 결국 폼페이우스의 로마군단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특히 아우구스투스는 무자비한 진압을 통해서 3만여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을 노예로 만들고 시리아 총독의 위임통치를 받는 2급 속주로 전락시켜 버렸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민중들 사이에서는 영웅탄생(메시아)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의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팔레스타인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에서 30여 년을 지내다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본격적으로 복음전파 활동에 나섰다. 서기 30년경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이스라엘 민중들은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는 꿈에 부풀어 호산나를 외치며 열광적인 환영을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늘나라 건설에 주된 목적이 있다면서 물리적 혁명을 거부하였다, 마테오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현하는 메시아(장차 올 왕으로서의 구세주)였지만 당대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자'로서 국수주의적 왕만을 기대하고 예수에게 실망한 나머지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외쳐댔다. 결국 예수는 신성모독 및 군중선동 등의 죄목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는데, 십자가에는 'INRI'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INRI란 라틴어로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 즉 유대인의 왕, 나자렛의 예수를 나타낸 말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등장은 로마와 그리스 지역에서 숭배되고 있었던 종교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다(결국 모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테두리 안에 흡수되고 말았지만). 구원의 개방화로 널리 퍼진 종교 최초의 선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지역에 국한되어 전개되었으나 나중에 사도 바울로의 안티오키아 선교가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는 보편성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기존의 유대교 가운데 하나의 분파와 동일시되었으나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과격한 유대 민족주의 발생에 따른 지역적 이동과 사도 바울로에 의한 비유대인 교회의 성장으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완전히 결별하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유대인의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라면 당시 비유대인의 공동체는 안티오키아 교회였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예루살렘에 비해서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고,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비유대인의 중요한 공동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안티오키아 교회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로마제국의 황제 클라디우스(Cladius, Nero Germanicus Tiberius : AD 41~54)시대에 처음으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란 의미로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라 일컬어지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이제는 더 이상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거대한 하나의 독립된 종교 단체가 되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조상대대의 종교를 포기하느냐 마느냐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대표적 사도이며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이념적으로 정립한 바울로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비유대인들을 소중하게 여긴 바울로의 생각은 유대교의 율법주의 멍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중요했고, 베드로는 유대인 신도들이 국수적 유대 민족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여 유대교로 되돌아갈 위험성을 우려했다. 예수에 의해서 창시된 신흥종교였던 그리스도교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계층의 마음을 파고들었으며 복음화로 사회변혁을 이루려고 하였으나 이에 당황한 유대교의 탄압이 이어졌다. 로마제국은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유대교 자체의 유혈 종파싸움으로 간주하고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처형에 동참했던 사울(나중에 개종한 사도 바울로)의 개종으로 그리스도교는 극적인 전환기를 맞이하고, 사울의 세 번에 걸친 ‘전교여행’으로 로마와 그리스 세계로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나갔다. 그리스에서는 기존 제우스-디오니소스의 신앙체계인 오르페우스교를 포기토록 하였으며 로마로 확산되어 황제숭배 사상에 정면으로 충돌하여 무려 300여 년간 박해를 받았다. 절대왕권과 충돌한 그리스도교 처음에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유대교가 박해하고 처형하는 것을 보고 '같은 민족끼리 잘 들 하는 짓이다'하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왜냐하면 로마의 종교정책은 관대하였다. 황제에 대한 숭배와 국가종교를 존중하는 이상, 제국내의 모든 종교를 다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황제숭배사상과 충돌하자, 즉각 박해를 시작하였다. 체제전복 세력으로 본 것인데, 역대 황제들은 국경선도 없는 범세계적이고 초국가적인 성격의 종교가 국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3세기의 유능한 황제들(네르바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까지의 오현제 시대)이 로마의 종교를 토대로 하여 국가를 내적으로 견고케 하고자 시도하였을 때 그리스도교가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박해과정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다만 네로 시대의 박해는 개인적인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박해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는 유독 황제의 신성(神性)을 강조하면서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신도들을 줄줄이 묶어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서기 100년부터 250년 사이에 일어난 박해는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유대교와 완전히 구별되면서 위험한 종교로서 박해를 받았다. 체제전복 집단이 수호집단으로 가장 가혹한 박해를 하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은퇴한 이후,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말경에 그리스도교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313년 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며 서기 325년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전 로마제국을 통치하게 되자, 그리스도교 역시 제국 안에서 보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더욱이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국교화를 선포하고 모든 이교적인 행사를 금지시킴으로써 체제전복 집단이 제국의 체제수호체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국의 보호 속에 그리스도교는 날이 갈수록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되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새로 서양세계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을 개종시켜 라틴-게르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세문명을 일구어내었으며 유럽인의 정신적 지주로, 서구문명의 원천으로 자리매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 세계로 전파되어 33%라는 최대의 종교 인구를 가지게 되었다.
장세진 | 전주공고 교사, 문학평론가 어머님! 이렇게 불러보기는 처음입니다. 살아 계실 때는 ‘엄마’나 ‘어머니’로 불렀으니까요. 이렇듯 어머님께 편지를 써보는 것도 51년 만에 처음이지 싶습니다. 아, 아니군요. 대입에 실패하고 돈번다고 무작정 상경하여 대책 없이 살 때 돈 좀 보내달라며 한두 번쯤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그때만 해도 전화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 어떻게 지내세요? 불현듯 어머님 생각이 간절히 솟구쳐 헤아려보니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3년이나 지났군요. 그렇게 훌쩍 떠나실 것을 왜 그렇게 여유롭게 사시질 못하셨습니까? 나들이하실 때 택시도 타시고, 화려한 옷에 맛난 음식도 사자시라고 용돈을 넉넉히 드렸는데도 말이에요. 일흔 셋이라는,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연세에 딱 한번의 발병으로 그렇듯 허망하게 우리 곁을 떠나신 것이 혹 그런 고생 때문은 아니었나요? 아, 아니에요. 서른일곱에 청상과부가 되시어 우리 형제를 키우느라 몸에 밴 고생이 더 큰 연원이라 생각하니 그 죄를 씻을 길이 없습니다. 아들들 장성하여 웬만큼 먹고 살 만해져 어머님 편히 사시게 해드린다고 저희들 깜냥으로는 자부했는데, 그렇듯 허망하게 가실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정말이지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하고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라는 성현의 옛 글이 이렇듯 가슴을 파고들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답니다.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려 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씀을 조금만 일찍 깨우치고 실천에 옮겼더라면 어머님을 하늘나라로 인도한 그 발병은 아예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니, 더욱 스산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머님! 지난 추석 때 형네와 함께 외할머니와 이모를 찾아뵈었습니다. 어머님도 아시죠? 저수지 확장공사로 인해 외가 마을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산소를 이곳으로 옮겨 온지도 어느덧 이태가 되었답니다. 그 후 외가엔 설날에만 세배 드리러 갔는데, 이번엔 형이 굳이 가자고 했습니다. 외할머니는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아직도 막걸리쯤은 거뜬히 자신다는데, 저를 금방 못 알아 보시더라구요. 외숙은 옛집 옆에 큰집을 지어 작년에 이사했습니다. 외숙의 큰애는 작년에 결혼했는데 벌써 아들까지 낳았답니다. 이모는 여전히 두통기가 있어 편안한 잠을 자지 못한다네요. 이번에 이모로부터 어머님의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2000년 형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어머님이 그러셨다면서요. “작은 아들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속만 썩이던 놈이 이렇듯 듬직한 집안의 기둥이 되다니!”라고요. 그 말을 듣고 저는 한없이 기뻤답니다. 고 3때 59명 학급에서 59등을 한, 그리하여 무던히도 어머니 속을 상하게 한 저였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이제 제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어쩌면 눈썹이 휘날리게 공부하여 버젓이 교사가 되면서부터 저는 다시 태어난 셈이니까요. 사는 나라가 달라 어머님께 낱낱이 보여드릴 수는 없을지 몰라도 살아생전에 이모에게 털어 놓으신 저에 대한 그 신뢰만큼은 저버리지 않는 아들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어머님! 며칠 전 큰애가 대학 수시 실기시험을 봤습니다. 이곳에서 좀 먼 곳이라 하루 연가를 내고 제가 데리고 다녀왔습니다. 시험을 치르는 3시간 넘게 부모마음이 뭔지 알 듯했습니다. 자식 키워봐야 부모마음 안다고, 어쩌면 그 말이 그리도 딱 맞는지요! 그런데 큰애든 작은 애든 할머니 얘기 한번 안하는 거예요. 사실 걔들은 어미가 키운 게 아니라 어머님께서 키워주신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할머니와의 추억’ 예컨대 명절 때면 노상 두둑한 용돈을 주시던 할머니를 벌써 잊었단 것인지,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 떠올라 서글프기 짝이 없군요. 그렇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저도 50줄에 들고 보니 부모가 뭘 바라고 자식을 키우는 게 아님이 제법 진하게 와 닿는걸요. 이제 와서 말이지만 손자 생각이 나셔서 아이 하나 더 낳으라고 하실 줄 뻔히 알면서도 끝내 못들은 척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랍니다. 아들놈 있으면 뭐합니까, 뭘 바라고 키울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비록 ‘딸딸이’ 아빠지만 어머님이 저희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손녀들을 잘 키울께요. 어느덧 밤이 깊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밤 기온이 떨어지는 가을임을 실감하며 아침 출근을 위해 이만 접어야 할까 봅니다. 다음에는 더 많은 이야기해 드릴께요. 편안히 계십시오. 인영아비 드림.
박준용 | 한양대 강사·문화평론가 '위험한 아이들'과의 첫 만남 어느 학교에나 '위험한 아이들'이 존재한다. 그 아이들의 위험은 타인에 대한 위험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제 스스로에 대한 위험인 까닭에 치명적인 잠재성을 지닌다.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배우고 가르친다. 위험한 것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그렇게 위험한 아이들은 학교와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점점 그런 위험한 아이들끼리만 뭉치게 되어 종국에는 정말 위험한 아이들이 되어간다. 그런 아이들로 이루어진 특수학급에 '루엔 존슨'이라는 임시 여교사가 부임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정보는 담임할 아이들이 '열정'과 '도전'에 가득 차 있는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모호한 이야기뿐이다. 이윽고 첫 수업 시간에 들어간 존슨은 제 멋대로 앉거나 선 채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흰둥이'라 놀리고 무시하며 떠들어 대는 거친 아이들을 만나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사랑은 오래 참음의 능력 문제아들과 그들을 변화시키는 선생님의 구도를 가진 대부분의 영화는 쉽게 주인공인 교사를 탁월한 카리스마를 지닌 말 그대로 극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런 선생님은 아이들은 물론 학교나 환경과의 어떠한 갈등과 충돌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모습으로 자신의 길을 뚝심 있게 걸어가고, 결국 아이들과 세상을 바꾸어 놓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 '위험한 아이들(1995, Dangerous Minds)'은 이와는 반대로 주인공 존슨 선생의 지극히 불완전한 인간적인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 놓는다. 거친 아이들과의 만남이 난감하기만 한 그녀가 먼저 하는 일이라고는 관련된 책을 뒤적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론이 제시하는 방법은 현장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일 뿐이다. 책을 접고 어느 영화에서 본 것처럼 나름대로 아이들 앞에서 강하게 보이려고 캐주얼 복장을 하고 다리를 책상 위에 올려 보지만 그럴수록 돌아오는 것은 아이들의 야유와 무시의 눈초리들이다. 과거 해병대에 근무하면서 배웠던 가라데로 관심을 끌어보기도 하고, 가르쳐야 하는 토머스 딜런의 시를 접고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밥 딜런의 노래 가사로 문학을 가르쳐 보기도 하지만 만만한 일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존슨은 매순간 자신의 방식이 아이들에게 잘 적용될지 어떨지를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게다가 전통에 따르지 않는 존슨의 새로운 교육법은 그간 해 왔던 조용한 방식으로 다만 물의 없이 학교를 운영해 왔던 이들의 견제와 동료 교사들의 시샘어린 경계의 눈짓까지 받게 된다. 지금껏 '문제아'들을 위해 손 끝 하나 움직이려 하지 않던 사람들이 그런 학생들을 위해 뭔가 해보려고 몸부림치는 교사를 돕기는커녕 색안경을 끼고 주저앉히려고 하는 절망적인 현실은 아이들을 더 깊은 불신의 어둠으로 빠져가게만 한다. 싸움을 말리려던 것이 도리어 싸움에 불을 지르고, 아이들을 화해시키려던 것이 반목과 질시를 낳는 소통불능의 상태에 직면한 존슨은 지금까지 자신의 문화에 아이들을 적응시키려 했지, 아이들의 문화에 자신이 적응하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그네들의 삶을 보다 깊이 알기 위한 가정방문이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아이들의 거친 삶의 터전과 그 가족들을 만나면서 그녀는 점차 진심으로 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해 간다. 싸움의 당사자였던 라울을 찾아간 존슨에게 가족들은 걱정스런 눈빛으로 아이를 보다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다짐하지만, 오히려 그녀는 라울이 얼마나 지혜롭고 뛰어난 아이인가 진심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번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아 본 적 없는 아이와 그의 가정에 존슨의 한 마디 칭찬은 소리 없는 감동으로 모두의 가슴에 스며들고, 드디어 라울은 그런 그녀에게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이렇듯 위험한 아이들을 변화시켜 가는 존슨의 방식은 눈에 번쩍 뜨이는 새로움이나 독특한 어떤 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녀는 다만 사랑은 곧 오래 참음의 능력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그렇게 오래 참음으로 기다린다. 결코 아이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한 걸음 밀어내면 두 걸음 다가서고, 또 밀어내면 다시 그만큼 다가서기를 반복한다. 시행착오는 거듭되고 아이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과의 싸움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최소한 존슨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이들 앞에서 당황해하고 아이들이 기대하는 만큼 좌절과 난감함을 드러내면서도 그녀는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렇게 포기하지 않는 어설픈 존슨 선생님을 조금씩 받아들여간다. 섣부른 실망을 경계하라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조금씩 생각하는 즐거움을 배워 나가던 '듀넬'과 '라이오넬' 형제는 먹고 사는데 쓸데없는 꿈만 키워준다며 홀로 이들을 기르는 할머니에 의해 자퇴를 당하고, 시에 재능을 가진 '캘리'는 임신으로 다른 학교로 옮길 것을 강요받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가지기 시작한 '에밀리오'는 여자 친구문제로 다른 친구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는다. 존슨은 현실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고뇌한다. 정녕 이 아이들에게 한 편의 '시'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에 채 답해 보기도 전에 그녀에게 충격적인 비보가 전해진다. 그녀의 충고에 따라 교장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러 간 에밀리오가 단지 노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장실에서 쫓겨난 후 총에 맞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깊은 절망감 속에 존슨은 결국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위험한 아이들과 존슨의 만남은 성공한 것일까, 실패한 것일까? 결과를 보면 실패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아이들의 가슴마다 작은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진 것처럼 얼마 자라지 못할 것이고 어떤 씨앗은 거친 황무지에 떨어져 말라 죽어 버릴 것이지만, 어떤 씨앗은 결국 싹을 틔우고 자라나 드디어는 멋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누가 씨 뿌리는 사람이 될지, 물주고, 가꾸고 또 수확하는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섣부른 실패와 실망은 이 모든 것을 제 홀로 해야 한다는, 하겠다는 성급한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당신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그것을 최선을 다해 행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하늘에 맡길 수 있을 뿐이다. 떠나려는 존슨에게 아이들은 바로 이 점을 상기시킨다. 현실에서 상처입고 죽고 떠나는 아이들이 있지만, 또한 당신으로 인해 새 생명과 삶을 얻는 우리들이 있다고…. 그러니 당신이 가르친 것처럼 결코 운명과 환경에 굴하지 말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외치기 시작한다. 영화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해피엔드로 마무리된다.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다운 결말처럼 보여 혹시 맥 빠진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가 9년간의 해병대 근무를 마치고 교사의 길에 투신한 루엔 존슨의 실제 이야기를 원안으로 했다는 사실이 위로와 도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영화정보 제목 : 위험한 아이들 (Dangerous Minds) 감독 : 존 N. 스미스 주연 : 미셸 파이퍼, 조지 준자, 코트니 밴스 제작년도 : 1995년 관람등급 : 15세 / DVD, VIDEO 출시
2월입니다. 학생들과 함께한 지난 1년간의 수많은 기억들이 떠오르시겠지요. 기억! 그 것을 철학자들은 인연(因緣)의 내면적인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활동하는 사유와 신체에 새겨진, 그리하여 그것에 방향성을 부여하거나, 적어도 그것에 간섭하여 영향을 미치는 ‘인연의 힘’이라는 것이지요. 기억은 그렇게 사람을 사로잡으며 머물게 하고 멈추게 합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과거는 소중하고 아름다워서, 안타깝고 아픈 과거는 안타깝고 아프기에…. 사람의 기억력은 어느 정도나 될까요. ‘해마'(은행나무)라는 책에 따르면 우리 뇌의 98%는 곤한 잠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사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눈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극이 없이 사는 사람일수록, 뇌는 게으름을 피우고 그래서 덩달아 IQ도 나빠진다고 말입니다. 뇌가 지닌 기능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정보를 처리하거나 저장하는 것.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기억’이라는 겁니다. 왜냐고요? 기억이 망가지면 정보처리를 못 하기 때문이지요. 뇌에서 기억을 맡은 곳이 바로 이 ‘해마’인데 외부에서 힘이 가해져도 원상태로 복구되는 가소성(可塑性)이 가장 풍부한 부위라고 합니다. 크기는 성인의 새끼손가락 정도로 작지만 말입니다. 뭐, 과학으로는 어떻게 설명을 하던지 간에, 겨우 2%만 기능하는 뇌를 가진 인간에게 ‘기억’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힘겨운 녀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잊고 싶은데 잊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그렇다고 그 기억을 모두 지워주겠다는 약이 있다면 그 것을 과연 먹을 수 있을까요? 영화 ‘동사서독(Ashes Of Time 1994)’에서 황약사(양가휘)는 구양봉(장국영)에게 ‘취생몽사’(醉生夢死)라는 술을 건넵니다.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는 그 술을, 그러나 구양봉은 마시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기 때문”이라면서, 말이지요. 그런 구양봉에게 황약사는 이렇게 말 합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다.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거다.” 여기에 황약사와 구양봉이 세상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숨어있습니다. 황약사는 새로이 시작하기 위해선 과거의 아픈 기억을, 먼저 거절하게 하고 먼저 움츠러들게 만드는 그 상처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구양봉은 여전히 떠나간 연인에 대한 배신감, 그녀를 떠나가게 만든 자신에 대한 실망, 다시 돌이키려 하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린 관계에 대한 절망 때문에 여전히 누구에게도 맘을 열지 않는, 오직 돈이라는 ‘외면적'형식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해결사'이길 고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연(因緣)을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그대로 긍정하지 못하는 한, 이미 지나간 뒤에도 못 잊어 집착하는 한, 인연은 이전의 삶과 기억, 상처와 원한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또한 지나가 버리는 이 현재를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한 그것은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며, 아직 오지 않을 것을 얻고자 연연해하는 한 인연의 저 넓은 가능성의 대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그 인연의 선에 집착하는 한, 인연의 선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은, 아니 더 나아가 삶이 긍정적으로 열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영화 ‘메멘토'를 통해 보았듯 기억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또 다른 고통이며, 번민을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잊게 해준다는 술 ‘취생몽사'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황약사처럼 ‘기억’이 아니라 ‘망각’의 소중함을 깨달아야만,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양봉처럼 ‘취생몽사’를 과거가 보내는 농담쯤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잊으려 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나” “갖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 한국교육신문 기자
김원석 | 협성대 교수, T.E.T. 트레이너 교실에서 교사와 학생 간에 흔히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매우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숙제를 안 해왔다든가, 혹은 남학생이 귀고리를 하고 있거나 교실에서 모자를 쓰고 있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놓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교사와 학생간의 욕구갈등이라기보다는 가치관 갈등에 해당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가치관 갈등은 욕구갈등과는 달리 학생이 숙제를 안 해오거나 귀고리를 하건 혹은 모자를 쓰고 있다고 해서 교사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갈등의 경우에는 교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제3의 방법을 통해 문제의 해결을 시도해야 한다. 가치관 갈등은 교사가 제3의 방법을 이용하여 승승의 해결책을 찾고자 아무리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가치관 갈등 상황이라고 진단한다. 가치관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치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교사가 강압적으로 결정하고 따라오라는 식이다. 학생이 겉으로는 선생님의 말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지만 사실은 강압적인 방법(제1의 방법)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선택안이다. 지난 호에서 공부하였듯이 교사가 원하는 대로 일방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따라오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가장 좋지 못한 해결책이다. 힘을 가진 교사가 그 힘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학생의 마음속에 패배감과 원망감을 쌓이게 할 수 있다. 결국은 나중에 감정이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 갈등의 선택안 교사역할훈련에서는 가치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안(Options)으로써 가장 위험도가 높은 선택안부터 가장 위험도가 낮은 선택안까지 차례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7 강압(힘을 사용하는 방법) +6 위협(힘을 사용하겠다고 말함) +5 문제해결(제3의 방법) +4 상담(상담자 되기) +3 직면하기/경청하기 +2 모범보이기(솔선수범) +1 자신의 가치관 바꾸기(태도변화) 첫째,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재론하는 것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서는 강압적인 방법이 유용하다. 둘째, 교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힘을 사용하겠다는 위협 내지는 협박이다. 즉, 한번만 숙제를 하지 않으면 그 때는 가만두지 않겠다라거나 선생님 말을 듣지 않으면 학생주임 선생님께 보내겠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강압적인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강압적인 방법보다 낫지만 여전히 힘에 근거를 둔 설득이라는 면에서 높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위협은 가끔 한두 번 사용하면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해서 반복 사용하면 학생들도 면역이 되어 효과성이 떨어진다. 셋째, 가치관 갈등이라고 판단하더라도 일단 제3의 방법을 통해 문제해결을 시도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가치관 갈등이라고 보았으나 제3의 방법을 통해 문제해결을 위해 시도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양자간에 서로 만족할만한 해결책이 나온다면 금상첨화이다. 최선의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차선의 해결책이 서로 의견일치를 이룬다면 이것도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고든 박사 부부는 고든 박사가 좋아하는 담배 피우는 문제를 가치관 갈등으로 보고 제3의 방법을 시도하여 보았다. 여러 가지 가능한 해결책을 열거한 후에 최종적으로 장단점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합의에 이르렀다. 즉, 담배는 집안에서는 피우지 않는다. 다만 손님을 맞는 방(사랑방 같은 곳)에서는 담배피우는 것이 허용되지만, 고든 박사가 먼저 가서 앉았을 경우에 한한다. 손님맞이 방에서 부인이 먼저 가서 쉬고 있을 경우에는 밖에 나가서 피워야 한다. 두 부부간에 이렇게 합의를 한 후 갈등은 사라지고 불편하지만 서로 약속한 것을 잘 지켰다고 한다. 넷째, 교사가 상담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담은 학생이 교사를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할 때 가능한 일이다. 상담자가 되어 교사의 경험과 지식을 나누고 싶다면 먼저 상담요청이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단 상담자가 되었다면 철저하게 공부하여 믿을만한 상담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상담자가 학생에게 신뢰를 얻으려면 상담자로써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상담자로써 가장 중요한 자세는 결정은 상대방이 스스로 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아무리 상담자인 교사가 좋은 결론이나 대안을 제시해도 학생이 원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자가 잔소리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결책을 한번만 말해주되 최종 선택은 본인이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 상담자가 되어 말할 때도 나-메시지를 이용하여 말하는 것이 좋다. 상담시 나-메시지를 사용하여 말한다면 상대방에게 저항을 덜 받고 하고자 하는 의견을 전달할 수 있다. 학생이 교사의 의견을 즉각 수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사가 자기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상담자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당장은 수용하지 않더라도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선생님의 의견이 옳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사는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때로는 교사에게는 최상의 결론이 학생에게는 최상의 대안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학생이 변했기 때문이다. 다섯째, 직면하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강한 직면적 나-메시지를 이용하여 교사가 자기 의견을 전달할 때 학생이 수용하지 못하고 감정이 격앙될 수 있다. 이때 교사는 바로 적극적 경청하기로 기어 바꾸기를 시도하고 감정이 누그러지면 다시 나-메시지를 시도할 수 있다. 직면적 나-메시지를 통해 교사가 자기감정을 전달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도 좋다. 여섯째, 모범보이기(모델링)는 교사가 먼저 솔선수범하라는 것이다. 학생은 교사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쉽게 모방한다.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가 좋다면 모방하기는 더욱 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모방과 흉내 내기는 상호간의 인간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많이 발생한다. 따라서 모범보이기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영향을 이치고 학생이 성장하고 학습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만일 상대방이 교사의 가치관을 수용할 수 없다면 입장을 바꿔놓고 학생의 입장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관이 고루한 것인지, 새로운 세대에게는 맞지 않는 것인지, 혹은 교사 자신도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부모나 선배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보고 수용할 수 있다면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남학생이 교실에서 이어링을 하거나 피어싱을 하는 것은 교사들이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교실에서 이 정도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교사들도 남자교사가 머리를 뒤로 묶거나 귀고리를 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일은 보기에 따라서 달리 생각하는 것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위험이 낮은 선택안 채택 우리는 이상에서 모두 7가지의 가치관 갈등 선택안을 다루었다. 그중에서 가장 위험도가 낮은 선택안은 교사가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교사가 자기의 가치관을 포기하고 학생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로 하였다면 진심으로 수용하라는 것이다. 거짓 수용은 힘을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거짓수용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욱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가치관 갈등을 마치기 전에 정말 수용하기 힘든 경우에는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제가 좋아하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목사님의 기도를 함께 읽으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주여, 내게 평안을 주옵소서.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은 수용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변화시킬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 차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지난 호에서는 논술 단락 전개 ‘강조의 원리’ 대해서 살펴보았다. 강조의 원리란 독자가 글의 요점을 인상 깊게 받아들이고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주제나 소주제가 잘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와 같은 방식에는 대체로 서술 내용에 의한 강조, 위치에 의한 강조, 표현 기교에 의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특수단락의 구실과 쓰기 방법에 대해서 살펴본다. 1. 특수 단락의 구실과 쓰기 방법 글의 단락에는 일반단락과 특수단락으로 구분된다. 일반단락은 주어진 핵심 과제인 소주제를 뒷받침하여 발전시키는 구실을 한다. 특수 단락은 글의 시작, 끝맺음 등의 특수 목적만을 위해서 쓰이게 된다. 이들 특수 단락은 도입 단락, 전환 단락, 종결 단락 등으로 나누어진다. 본고에서는 대체로 많이 사용하게 되는 도입단락과 종결단락에 대해서 살펴본다. 1) 도입 단락 ① 도입 단락의 구실 도입 단락(導入段落)은 글 첫머리에 놓이는 단락으로서 서두 또는 서론적인 구실과 글의 문을 여는 구실을 한다. 글에 따라서는 도입 단락 없이 바로 일반 단락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런 글에서는 처음부터 주제와 관련된 문제가 뒷받침되어 전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글에서는 본격적인 전개에 들어가기 전에 그 예비적인 서술을 하게 되는데 이런 예비적, 입문적 구실을 하는 것이 바로 도입 단락이다. ② 도입단락의 기능 글쓰기에서도 글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첫머리가 중요하다. 글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첫머리가 잘못되면 독자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도입단락은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서 그 글을 읽도록 하는 기능을 갖기 때문에 가벼운 서술로 독자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③ 도입단락 쓰는 방법 도입 단락을 쓰는 요령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들을 참고하도록 한다. 첫째, 문제의 제기이다. 글의 첫머리에서 그 글에서 다룰 문제를 내세움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다. ꃚ 사랑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참사랑인가? 한번쯤 마음에 두어 따지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사랑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나머지 불행을 초래하는 젊은이들이 많음을 가끔 볼 때 그 필요성을 더욱 느껴마지 않는다. 둘째, 주제의 제시이다. 도입부에서 주제를 제시하여 처음부터 독자의 관심을 주제에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예컨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느낀 바를 주제로 하고 그것을 서두에 내세워 독자의 관심을 끄는 방식 등을 생각할 수 있다. ꃚ 인간의 삶에는 믿음(信念)이라는 줏대가 필요하다. 하느님을 믿든 인간을 믿든 진리나 사상을 믿든 하나의 대상을 믿고 행동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단지 어떤 추상적인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오랜 인생 체험에서 우러나온 고백이기도 하다. 셋째, 주제를 구분하여 제시하는 방식이다. 글에서 다루어질 주제를 몇 가지로 구분해서 제시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본문에서 다루어질 과제가 무엇인지를 낱낱이 보여 주는 이점이 있다. 예컨대 아래의 예와 같이 도입 단락에서 이 글의 주제인 ‘공장 부지의 최선 조건’를 4가지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앞으로 뒤따르는 단락에서는 한 가지씩 차례로 다루어 나갈 것을 시사하고 있다. 간결성을 요하는 설명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입 단락의 유형이다. ꃚ 치밀한 사업가는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다음 네 가지 문제를 고려한다. 원자재의 공급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가? 비교적 싼 비용으로 동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제품을 좋은 시장에 편리하게 수송할 수 있는가? 등이다. 넷째, 사건의 제시이다. 도입 문단에서 어떤 사건을 내세워 독자의 관심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그 사건은 그 글의 주제와 관련되어야 하고 되도록 특색 있는 것이어야 한다. 대개 사건은 독자들의 흥미를 끄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사건 뒤에 숨은 원인이나, 그 사건의 귀결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인용문의 제시이다. 도입 문단 첫머리에 인용문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관심을 끌고자하는 방식이다. 인용문은 글에서 다룰 문제점이나 주제와 관련되고 비교적 참신한 명언, 명구라야 그 효과가 크다. ꃚ 일찍이 나폴레옹은 "나쁜 장교는 있어도 나쁜 사병은 없다."라고 말 한 바 있다. 이 말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우리의 속담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2. 종결 단락 종결 단락은 글을 끝맺는 마무리 구실을 한다. 이 종결 단락은 일반 단락처럼 내용 전개나 뒷받침은 필요 없고 다만 맺는 말 정도로 그친다. 종결 단락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방식으로 쓴다. 첫째, 본문 내용을 간추려 주제를 다지는 경우이다. 본론에서 이미 밝혀진 결론을 간추려 되풀이한다. 이런 결론은 글 전체의 주제가 되는 수도 있고, 그 주제를 여러 갈래로 하위 구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래의 ꃚ는 글 전체의 결론(주제)을 간추려서 보인 종결 단락이다. ꃚ 이상에서 사람은 여러 가지 대상과 방법을 통하여 배운다는 것을 밝혔다. 첫째로,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며, 둘째로, 자연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운다. 셋째로, 내면적 사유를 통하여 많은 것을 탐구하고 깨닫는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다. 둘째, 주제를 마지막으로 상기시켜서 다짐하고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전망하는 것이다. ꃚ 그러므로, "은근"은 한국의 미요, "끈기"는 한국의 힘이다. 은근하고 끈기 있게 사는 데에 한국의 생활이 건설되어 가고, 또 거기서 참다운 한국의 예술, 문학이 생생하게 자라날 것이다. 셋째, 주제를 뚜렷이 상기시키는 대신에 글의 주제와 관련된 어구 등의 표현으로 여운을 남기면서 끝맺는 경우이다. ꃚ 1670년경에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비록 내일 세계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 구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했거니와, 마치 세상이 오늘만으로 끝나는 듯 착각하고 사는 우리들의 ‘조급증’은 언제나 사라질 것인가. 넷째, 종결 단락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남은 문제점을 가리키거나 전망을 곁들이기도 한다. 때로는 본론에서 서술한 내용을 간추리지 않고 독자에게 바라는 점이나 앞으로의 전망만을 적고 끝맺는 수도 있다. ꃚ 한국 사회에 공업화 현상이 진전함에 따라 그것이 뿜어내는 거대한 생산력이 한국 사회와 그 속의 구성원의 성격을 크게 바꾸어 갈 것이며, 정치와 사회의 구별이 더 뚜렷해짐에 따라서 새로운 권력 구조의 형성이 불가피해질 것이다. 다섯째, 종결 단락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글의 성격이나 필자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특색 있는 마무리를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글의 주제나 본문의 내용과 동떨어진 마무리를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새로이 딴 문제를 논의해서 추가해서는 안 된다. 마무리는 끝맺는 일만 해야지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AGE BREAK] 2. 논술의 실제 기주도적 학습능력 신장을 위한 방안으로 협동학습을 강조하고 있다. 협동학습의 개념과 필요성을 소개하고, 협동학습의 특징과 장점을 서술하시오. Ⅰ. 서론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 중심의 자기주도적 학습을 강조한다. 자기주도적 학습은 학습자 자신이 학습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학습자의 개인차에 적용될 수 있는 학습 과제와 자료를 스스로 선택하고, 학업 성취 수준을 스스로 평가하는 일련의 교수․학습 과정 혹은 방법이다. 이와 같은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기르기 위한 방안으로 협동학습을 강조하고 있다. Ⅱ. 협동학습의 개념과 필요성 ‘협동학습'은 ‘cooperative learning’을 번역한 용어이다. 학생들이 집단토의, 집단연구와 같은 활동에 참여하여 상호작용하고, 협력을 통해서 학습과제를 보다 더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 협동학습은 학생들이 동등한 입장에서 상호 작용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전형적인 학교 교실수업의 모습은 '바쁜 교사와 심심한 학생'으로 표현될 수 있다. 훌륭한 교사는 열강 하는 교사이고, 훌륭한 학생은 교사의 강의를 빠짐없이 열심히 듣고 상세히 필기하는 학생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수업의 형태에서 유일한 학습 자료원은 교사가 되고, 학생의 학업성취는 교사의 능력과 태도에 크게 좌우된다. 학생은 자신의 흥미와 적성에 관계없이 교사와 교과서가 정해 준 주제와 학습목표 내에서 학습을 해야 한다. 학생은 동료들로부터 학습정보를 얻을 수도 없고,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 동료들로부터 학습정보를 얻을 시간이나 같이 학습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또한 동료와의 정보교환은 신뢰성이 의심되고 위험부담이 있기 때문에 동료와의 교류를 기피한다. 유일한 정답은 교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협동학습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소규모의 집단에 공통의 학습목표가 주어지게되면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이 서로 도우면서 학습을 하게 한다. 여기서는 긍정적인 상호의존성을 가지게 되고, 타인이 성공해야 자신도 성공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협동학습은 인지적인 측면과 정의적인 측면의 약점들을 동시에 제거하여 집단의 응집성을 강하게 함으로써 학습분위기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이끌어 주게되어 학습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 그 필요성이 있다고 하겠다. Ⅲ. 협동학습의 특징과 장점 협동학습의 이론은 소집단 구성원간의 긍정적 상호작용을 최대화해서 인지적 발달을 도모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협동학습 학습자들의 긍정적 상호작용을 유도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첫째, 수업의 목표가 구체적이고 각 학습자는 목표 인식도가 높다. 각각의 학습자는 자신이 활동해서 얻어야 할 학습목표를 분명히 제시받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 활동을 한다. 둘째, 학생들 사이에 긍정적 상호 의존성이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협동학습은 구조적으로 동료들끼리 서로 도와주어야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긍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셋째, 대면적 상호작용이 있다. 협동학습에서는 3인치 목소리를 강조한다. 즉 3인치의 거리에서 말하고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낮은 소리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의사소통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집단 구성원 사이에 물리적으로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공동 과제의 성취를 위해 밀접한 상호작용을 유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넷째,ꡐ개별적 책무성’이다. 협동학습에서 집단 구성원 개개인은 다른 구성원에 대해 개인적인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개별적 책무성은 개인이 얻은 점수를 집단 점수에 반영하는 방식과 집단이 수행해야 할 학습과제를 분업화하는 두 가지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다섯째, 집단목표(집단보상)ꡑ이 있다. 협동학습에서는 개인의 목표달성이 각 집단의 공동목표 달성 여부에 달려있으므로 구성원들이 집단의 목표달성을 위해 동료들을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려 하는 등 활발한 긍정적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여섯째, 이질적인 팀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동료 간의 상호작용을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한 팀을 이루는 구성원의 질이 다양해야 한다. 인지적 능력의 차이 남녀의 차이, 문화적 배경의 차이가 많을수록 다양한 관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활발한 토론 등 상호작용이 극대화되며, 이는 인지적으로나 정의적으로 학습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조건이 된다. 일곱째, 집단 과정을 매우 중시한다. 한 수업이 끝났거나, 하루의 일과가 끝났거나, 며칠에 걸친 과제가 끝났을 때 소집단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이러한 기회의 제공은 학생들이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기능을 발전시키고, 집단적으로는 보다 효율적인 소집단 활동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협동학습의 특징은 협동학습의 종류에 관계없이 구성원 사이의 상호작용을 최대화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런 특징이 많이 반영된 협동학습 모형이 더 좋은 효과를 나타낸다. 협동학습의 장점으로는 교사에게 다양한 수업 전략을 제공해주고, 학습자가 수업 중에도 신체를 많이 움직일 수 있게 한다. 또한 협동학습은 학습자에게 타인을 배려하는 태도를 길러주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의사결정 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그리고 학습자에게 많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경험과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아가 협동학습은 학습자가 구체적 사고에서 추상적 사고로 이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고, 학생들이 교사의 통제나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학습을 함으로써 다양한 정보원을 접하고 독립심을 기를 수 있게 하여 준다. Ⅳ. 결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7차 교육과정에서는 자기주도적인 학습능력을 갖춘 인간 양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교수․학습 방법의 하나로 협동학습을 제시하고 있다. 협동학습은 학습자의 능력, 관심, 욕구 등의 차이가 있는 서로 다른 구성원들이 과제에 대한 공통의 목표를 달성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긍정적인 상호의존성을 가지게 하며, 개인의 능력 향상과 전체적인 학습 의욕과 참여 의식을 높여 공동의 문제 해결에 참여하고 학습의 능률과 성과를 높일 수 있다고 본다.
서울시 교육청에서 민원인(주로 학부모)의 편익을 도모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2006학년도 부터 팩스를 통해 전ㆍ입학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한다고 밝혔는데, 이 제도는 이미 서울시내 대부분의 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서울시 교육청에서 이 제도를 시행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주요내용은 이렇다. 민원인(주로 학부모)이 학교를 방문하면 학교의 담당교사가 해당서류를 확인(주민등록 등본-거주지 이전 확인)하게 된다. 확인이 끝나면 담당교사가 학생이동부에 기재를 한 후 결재를 받는다. 그리고 교육청에 해당서류를 작성하여 팩스로 보낸다. 교육청에서 이 팩스를 확인한 후 담당교사에게 연락을 취하여 새로 전입해갈 학교를 정하게 된다. 이렇게 학교가 정해지면 학부모는 배정받은 학교에 가서 전입절차를 밟으면 된다. 이것이 주요업무내용이다. 그동안의 전ㆍ입학절차(전출의 경우)를 보면 학부모가 해당서류를 준비하여 재학중인 학교를 방문한다. 담임교사로 부터 재학증명서를 발급받으면 담당교사가 서류를 확인하고 결재를 받는다. 그 서류를 새로 전입해갈 학교가 속한 교육청에 제출하여 학교를 배정 받으라는 안내와 함께 학부모가 해당교육청을 방문토록 한다. 학부모는 해당교육청에서 전입할 학교를 선택하여 배정을 받은 다음, 배정 받은 학교를 방문하여 전입절차를 밟으면 되는 것이다. 언론에 보도된 재학증명서를 발급받고 교육청에서 학교배정을 받은다음 다시 재학중인 학교에 와서 전ㆍ입학 수속을 해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단 서류를 발급받은 후에는 바로 전출이 가능했다. 이 제도에서 바뀐점은 학부모가 교육청을 직접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전입할 학교를 바로 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학부모 중에는 학교정보를 알고 싶어하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새로 전입해야 할 학교이기 때문에 재학중인 학교에서는 정보를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반면 재학중인 학교의 담당자(교사)는 기존의 방법에 비해 업무가 훨씬더 가중되고 있다는 평가다. 학적 담당교사들은 일단 서류를 확인한 후 교육청에 팩스를 보내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 시간이 짧은 경우도 많지만 점심시간이나 서류상에 오류가 있을 경우는 몇시간을 지체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부모는 도리어 학교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해당교사가 전ㆍ입학 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고 수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로인해 학부모가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고 한다. 교육청의 담당자는 기존의 방법에 비해 업무가 효율적이다. 학부모와 직접대면하지 않고 전화로만 상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육청에서는 팩스서류를 확인하고 전화통화를 하여 학교를 배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학부모 역시 편해진 점이 있긴 하다. 교육청을 방문하지 않고 직접 배정받은 학교로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의 담당교사는 업무가 도리어 가중되고 있다. 물론 민원인(학부모)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을 하지만 교사에게 업무를 가중시킨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정착시키고 학부모가 기다리는 시간도 줄이기 위해서는 전ㆍ입학 관련 업무를 행정실 등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