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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합평회의 추억 글쓰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오해와 고정관념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런 것이다. 글은 고독한 환경 속에서 자기 결단의 결과로 나온다는 것. 그럴지도 모른다. 글을 쓰면서 친구 불러 상의하고 이웃 초청해서 묻고 하는 것은 번거로운 일임은 물론 정신 집중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을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글을 쓴 것은 누군가 읽어 주어야 글 값을 한다. 편지가 그러하듯이. 근래 문학이론에서 독자에게 주목하는 까닭도 이 부근에 있다. 독자의 문학 수용 그 결과의 집적이 문학사라는 주장을 펼치는 수용미학(受容美學)은 문학이론의 맨 마지막 남은 영토인지도 모른다. 작가는 문제를 제기한다.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비평가를 포함한 독자이다. 기억을 되살려 보라. 그동안 누가 내가 쓴 글을 읽어 주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에 이르는 교육의 과정에서 내가 쓴 글을 착실히 읽고 고쳐준 선생님이 몇이나 있던가. 내가 편지를 보냈을 때 답을 해 준(읽고 반응을 보인) 친구는 몇이나 있던가. 어쩌면 독자 없는 글을 참 많이도 썼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와서 경험한 글쓰기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합평회(合評會)’라는 모임 덕이었다. 당시 ‘사대문학회’는 회원 수도 많고, 여러 학과 학생들이 다양하게 모여 있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그 작품을 돌려 읽었다. 나아가 일주일에 한 번씩 날을 잡아 한 주일 동안 쓴 작품을 내놓고는 이른바 합평회라는 모임을 가졌다.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공개비판을 연상할 정도로 분위가가 살벌해지기도 했다. 시는 길이가 짧아 이야기감으로 삼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 소설은 그렇지를 못했다. 원고지로 60~70장 되는 단편을 한 자리에서 내려 읽었다. 그 낭독을 듣고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길 하자면 열심히 들어야 했다. 대학에 갓 들어가, 읽는 소설의 줄거리조차 파악이 잘 안 되는 판인데 선배들은 역시 노장들이었다. 플롯이 어떠니 문체가 어떠니 하며 공박을 하다가, 도대체 주제의식이 뭐냐고 따지고 들면 서로 얼굴이 벌개져서 자못 삼엄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래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배들의 비평을 소화해내는 가운데 제법 여러 편의 글을 쓸 수 있었다. 어떤 친구는 시작(詩作)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한 달에 시 10편을 썼다고 읽어 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 친구는 이미 잘 알려진 시인이 되어 있다. 매주 토요일, 거의 빠짐없이 이루어지는 합평회에서는 다음 발표할 순번을 정하곤 했다. 어떤 때는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에서 지목이 되기도 했는데 그럴 경우는 하루 밤을 새워서 단편 하나를 써야 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글을 내용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분량(分量)으로 쓰는 것이 글쓰기의 한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 하는 일은 열정이 식기 쉽다. 혼자 글을 쓰다 보면 이걸 누가 읽어 줄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일기를 쓰듯이 혼자 기록해 두는 걸로 가치를 삼기는 ‘세속적인 소통의 욕구’가 용납을 하지 않는다. 글쓰기는 일종의 인정투쟁(認定鬪爭)에 가담하는 결단이다. 나는 이런 감성으로 이렇게 세상을 본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글쓰기인 셈인데, 그 선언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면 선언의 의미가 없다. 모든 선언은 나를 인정해 달라는 호소이다. 고독한 글쓰기를 넘어서서 소통의 글쓰기를 모색해야 한다. 글 친구를 만들 필요가 있다. [PAGE BREAK] 화답시로 가는 우정의 길 동업자들끼리는 대개 짙은 교감을 하면서 살아간다. 문학이 고독한 개인의 작업이라는 점에서는 동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그러나 문인들의 친교(親交)는 글을 매개로 하기 때문에 유달리 짙은 우정의 향기를 남긴다. 또한 우정을 글로 남기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그 행적을 잘 알게 된다. 그러한 예로 우리는 박목월과 조지훈의 사귐을 기억한다. 박목월의 나그네에는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 芝薰”이라는 제사가 붙어 있다. 조지훈의 그 한 구절을 자신의 시에서 변용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선 박목월의 나그네를 보기로 한다.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앞에 예시한 제사는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시에는 “木月에게”라는 제사가 붙어 있다. ‘완화삼’이라는 말은 ‘꽃물 든 옻자락을 바라보고 즐긴다’ 정도의 뜻이다. 그런데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가 머물던 성도(成都)에 그의 초당이 있던 완화계(浣花溪)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음이 같아서이고, 두보와 이백(李白)의 우정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완화삼은 이렇게 되어 있다. 차운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七百里//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냥 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이 두 시인이 시를 주고받은 내력은 이렇다. 당시 조지훈(1920~1968)은 고향 경북 영양에 살고 있었고, 박목월(1916~1978)은 경주에 머물렀다. 조지훈이 박목월을 찾아 경주로 내려간다. 이 두 시인은 석굴암을 찾아가는 길에 불국사에 들러 찬 술을 마시고, 조지훈이 한기가 들어 떨고 있을 때 박목월이 외투를 벗어 덮어 주어 추위를 녹이게 해 주었다. 이후 조지훈은 경주에 2주가량 머물면서, 박목월과 함께 옥산서원에 방을 하나 얻어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눈다. 경주에서 영양으로 돌아온 조지훈은 “목월에게”란 제사를 달아 ‘완화삼’이란 시를 지어 박목월에게 보낸다. 이 시에 대한 화답시(和答詩)가 ‘나그네’이다. 친구가 보낸 시 한 구절을 자신의 상상력과 문학적 감성에 따라 다른 시로 변용하는 일은 깊은 공감과 정신적 교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반복이 아니라 창조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앞에 예시한 바처럼 두보(712~770)와 이백(701~762) 사이에 유별(有別)하다. 두보가 이백과 맺은 교유는 ‘飮中八仙歌(술마시는 여덟 신선을 노래함)’에도 나타나는 데, “이백은 한 말 술에 시 백 편을 짓고”, “나는 주중의 신선이다”하는 호방함을 칭송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백과 교유하는 가운데 그의 시에 대한 평을 하고, 그와 더불어 글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어 하는 절절함은 ‘春日憶李白, 봄날 이백을 생각하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백의 시는 당할 이 없고/ 자유분방하여 시상은 우뚝 솟았다/ 청신한 맛은 유신(庾信) 같고/ 뛰어난 재능은 포조(鮑照) 같다/ 위북(渭北)에는 봄날의 나무/ 강동에는 해질녘 구름/ 어느 때 술 한 동이 갖다 놓고/ 다시 더불어 꼼꼼히 글을 얘기해 볼까. 白也詩無敵 飄然思不群 淸新庾開府 俊逸鮑參軍 渭北春天樹 江東溢暮雲 何時一樽酒 重與細論文 (당시, 김원중 역해, 412쪽) 이백은 다른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과도 사귐이 깊었는데, ‘贈孟浩然(맹호연에게 보내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에서 광릉 가는 맹호연을 전송하다)’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친구와의 우정을 읊기도 하고, 상대방의 시를 평하는 내용을 시로 읊었다. 문학적 교감의 결과가 다른 시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은 남의 글을 읽어주는 데서 비롯된다. 문단에 나가는 이들이 동인(同人)을 조직하여 서로 글을 읽어 주고, 평을 함으로써 서로 간의 문학적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수준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쓴 글을 읽어줄 동료를 찾는 일이고, 그것이 발전해 나의 글을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료보다는 선배가 글에 대한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PAGE BREAK] 선배를 찾아서 만나라 문단 인사들의 호칭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형’이다. 나를 문단에 추천한 은사의 친구 분을 만났는데 나를 향해 ‘우형’ 그렇게 부르는 바람에 잠시 멈칫하고 아연(啞然)해진 적이 있다. 생각을 해 보니 우리들의 관계를 형제관계로 상정하고, 공경의 뜻을 담아 부르려 하매 그렇게 나오는 것이려니 수긍이 되었다. 후배를 ‘형’으로 부르는 문학 선배는 우선 내가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작품을 사이에 두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또한 문학인으로서 참조인물이 될 수 있다. 문학적 생애의 전범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그리고 문단(글 판)의 사람들과 연결 지어 줌으로써 후원자 역할을 해 주기도 한다. 그런데 ‘형’이라는 존칭을 붙이는 한, 후배의 자유로운 문학적 추구를 완벽하게 보장하고 지원해 준다는 점에서 이상적 패트론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다. 문학적인 선배는 추종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 선배를 극복했는지 여부는 작품의 질적 수준과는 별 관계가 없다. 각자 자기 세계를 구축한 일가(一家)를 이루었을 때는 서로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개성을 드러내는 대비만이 가능한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광수와 김동인은 문단의 선후배 격이지만, 이광수는 민족주의, 이상주의 작가로 자기 몫을 했고, 김동인은 개인주의, 자연주의 작가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했던 것이다. 한 작가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고 그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연계한 예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 널리 알려진 바로는 괴테가 만난 헤르더나, 괴테와 실러 사이의 우정에서 그러한 예를 보게 된다. 또한 이미지즘의 기수로 알려진 에즈라 파운드와 T.S 엘리어트, J. 조이스의 관계 또한 문학의 선후배 관계의 전범에 해당한다.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아마 단시(短詩)의 백미에 해당할 것이다. 그의 시를 설명하고자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이미지즘의 정수에 해당하는 시를 함께 보자는 뜻에서 달아 둔다. 군중 속에서 홀연 나타나는 이 얼굴들 물젖은, 검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The apparition o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장편시 ‘칸토스, The Cantos’가 대표작인데, 이미지즘을 선언한 행적이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는 평탄치 않다. 미국에서 태어나 서양고전문학을 공부한 그는 시작(詩作)을 하다가 유럽으로 떠나 베니스, 파리, 런던 등지를 돌아다니며 문학활동을 전개한다. 그 문학활동 가운데 T.E. 흄, D.H. 로렌스를 만나 교류한다든지, W.B. 예이츠를 만나 개인비서로 일을 하는 등은 문학수업과 연관되는 흥미로운 항목이다. 그는 이어서 J.조이스와 T.S.엘리어트의 문학활동을 지원한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게 하는 데에 온힘을 기울였고, 엘리어트의 시 ‘J. 알프렛 프루프록의 연가’가 빛을 보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파운드가 이들 작품을 읽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조이스가 시력이 약해지고 경제적으로 곤핍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떨쳐나서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한다. 제임스의 그 난해한 소설 ‘율리시즈’가 잡지에 연재되도록 주선하기도 하고, 그 작품이 책으로 나왔을 때는, “모든 세상 사람들이 함께 일체가 되어 율리시즈를 찬양해야 한다”는 평을 하기도 한다. 파운드와 엘리어트의 문학적 교유 가운데, 다른 사람의 작품을 얼마나 깊이 읽고 교감할 수 있는가 하는 사례를 보게 된다. 엘리어트의 장시 ‘황무지, The Waste Land’는 동서양의 신화와 역사 등이 호한하게 얽혀 있는 작품이다. 처음 썼을 때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의 배쯤 되는 분량이었다고 한다. 이를 파운드가 대폭 줄이고 내용을 수정하도록 해서 발표하게 되었다고 한다. 남의 작품을 읽는 정도가 진전되고 수준이 높아지면 심정적 공감은 물론 창작과정 자체를 조정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알게 된다. [PAGE BREAK] 읽기를 쓰기로 전환하라 모든 문학 창작은 읽기에서 시작한다. 달리 말하자면, 어느 작가도 독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결국 작가는 독자의 변신일 뿐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남에게 독서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읽기의 쓰기로 전환. 남에게 독서자료를 제공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내가 쓴 작품을 읽어주는 것이다. 읽어준다는 것은 들려준다는 뜻인데, 예컨대 자작시 낭송과 같은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내가 이런 글을 썼으니 읽어 달라고 선전을 하고 다니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기회도 냉큼 오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 내가 쓴 것을 읽어 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지도자 과정’이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교사를 양성하는 과정이다. 1년 단위로 운영하기 때문에 두 학기로 나누어 수업이 진행된다. 1학기 종강이 지난 6월 16일에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나서, “시를 하나 써 왔는데 읽을까요, 말까요”하는 사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시를 낭독해 주었다. 수강생들이 내 강의보다 시를 읽는 나를 더 좋아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욕심에서 오는 착각일지도 모른다.) 유월의 숲에서 우리는 우뚝한 나무로 서서 자기 삶의 깊이만큼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리는 숲을 이루어 살아가게 마련이라 그윽한 숲의 향기를 그리워하며 마음 조인다. 숲이 넓을수록 지평은 아득하고 숲이 깊을수록 정신은 웅건한 법이거니 우람한 나무로 날 기르는 나날이여 깊고 그윽한 숲에 익어가는 세월이여 나무와 나무가 가지를 곁고 향과 향이 서로를 감싸고 돌아가듯 숲 사이로 지혜의 바람은 살랑대고 나무 꼭대기마다 꿈처럼 피어나는 구름이 고와라. 내 작품에 대해 나 스스로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이게 시가 되는지는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내 시를 들어 달라고 읽어주는 일은 내 시의 독자를 현장에서 확보하는 일이다. 이것이 문학창작에 필요한 일종의 소통의 욕구가 구체화되는 예가 아닌가 싶다. 남의 작품을 읽어 주고, 그리고 내 작품을 읽어 달라고 적극 요청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작품을 터놓을 동료와 선배를 만나는 일이 급선무이다.
1 사람들 사는 풍속과 세상 변화가 빠르다 보니, 갑자기 새로 생겨나는 말들이 많다. 신조어 사전을 보면 낯설고 이상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미 사전에 항목으로 등장하기까지에는 그 말이 이미 상당히 널리 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러자면 그 말이 의미하는 어떤 현상이 세간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PDA’라는 말이 신조어 사전에 올라 와 있었다. PDA가 뭐냐고 임의로 물어 보았더니, 내 또래들은 모르는 사람이 많아도, 학생들은 쉽사리 개인용 휴대 정보 단말기, 즉 PDA가 ‘Personal Digital Assistant’의 약칭이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그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PDA’가 ‘공공영역에서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Public Displaying of Affection’의 약칭이라는 것이다. 사전에 따라서는 ‘Displaying Affection in Public’으로 풀이해 놓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젊은이들이 주변의 다른 사람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성 간 애정표현을 하는 것이 크게 이상하지 않은 세태가 되었다. 그 ‘애정표현’이라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와 신뢰를 잔뜩 머금고 있을 때는 아름답고 멋있기까지 하다. 돌아보면 그런 애정 표현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나 같은 기성세대는 그런 모습이 부럽기까지 하다. 부럽다. 사랑하는 사람을 온 마음과 온몸으로 껴안고, 내 사랑의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을 위해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듯 가슴 벅차고 아름답다는 것을 마침내 세상과 우주를 향하여 보란 듯이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리 보면 사랑의 실존성을 몸으로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나와 너의 존재를 서로 가득 채우는 일이 되는 셈이다. 그것도 역전이나 대로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공공의 공간에서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다. 잠시 영웅의 기분에 빠져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 우리 사랑한다, 어쩔래’의 분위기가 약여하다. 그런데 모든 PDA가 반드시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PAGE BREAK] 2 지하철을 타고 다니다 보면 민망한 것 두 가지를 심심치 않게 겪게 된다. 하나는 나이가 들만큼 드신 어르신들이 연출하는 민망함이고, 다른 하나는 새파란 젊은이들이 보여 주는 민망함이다. 제발 저러지는 말았으면 좋겠는데, 누가 볼까 싶어, 조바심이 나는 것은 물론이고, 함께 있는 제삼자가 부끄러운 마음이 일어서 볼이 화끈거린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그냥 보아 주기 어려운 꼴불견이라는 점에서는 막상막하이다. 어르신들이 보여 주는 민망함이란 지하철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면서 생긴다. 빈자리 하나를 두고 어른이라는 사람들이 체면 돌보지 않고 우르르 달려와 밀치듯이 앉아 버리는 경우는 그래도 괜찮다. 약주 한 잔 걸친 불쾌한 얼굴로 자리 양보를 하지 않는다고, 앉아 있는 젊은이를 대갈일성 나무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 장면의 민망스러움은 극에 달한다. 그 젊은이가 주눅이 들고 볼이 부어 슬며시 일어나 다른 칸으로 가는 장면을 보아도 민망스럽기는 마찬가지이고, 무어라 화난 기색으로 자리를 박차며 욕이라도 한 마디 내뱉고 사라지면, 내가 그 모욕을 다 뒤집어 쓴 듯 마음이 불편해진다. 함께 타고 있는 전동차 안의 승객 모두가 정서적 훼손을 크게 입는다. 새파란 청춘남녀들이 전동차 안에서 연출하는 민망함은, 차 안에 아무도 없다는 듯한, 자기몰입에 가까운 애정 표현을 보여주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도 그 몰입이 어떤 진정성과 더불어 짙은 감동의 계기를 수반하고 있는 것이라면 애정 표현이 좀 진한들 흠될 것이 없다. 그런 애정 표현은 이미 보는 사람에게도 무언가 감동적 분위기를 은근하게 전한다. 아! 저들 젊은 남녀가 사랑의 시련을 눈물겹게 이겨나가고 있구나. 이런 분위기를 말없는 중에 전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이란 참으로 놀라운 힘을 머금고 있어서, 아무 말 없는 중에도, 그 애정표현의 분위기만으로도 어떤 웅변 효과 못지않게 사람들을 감동으로 이끄는 것이다. 문제는 애정표현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권태를 모면해 가는 방편인 듯, 성애적(性愛的) 희롱의 수준으로 상투화 된 경우이다. 남녀가 시도 때도 없이, 남의 이목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붙이고 비비고 만지며, 상대의 가슴이나 배를 쿡쿡 찔러가며, 그리고 끊임없이 무어라 부질없는 킥킥거림을 반복하는 행태를 보노라면, 우리가 소중하게 인식하는 ‘사랑’이 가당치 않은 방식으로 천박해지고 조롱 받는 것 같아서 나는 속이 상한다. 우리 사랑은 이렇게 눈치 볼 것 없고, 그래서 우리들 감정은 우리 기분대로 분방하다. 우리는 우리들 본능적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그 누가 우리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충동을 방해한단 말인가. ‘그래 우리 사랑한다, 어쩔래.’ 뭐 이런 심적 태도가 읽혀진다. 장난기가 없이 스킨십 자체에만 골몰하는 경우는 자칫 변태의 분위기로 치달아서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보면 이런 사랑 행태에는 어떤 불안 의식이 잠재해 있는 것 같다. 상대에 대한 소유에 집착하여, 소유를 안타깝게 확인하려는 면모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 사랑의 운명적 모습을 당당하게 선언하며, 자기들 사랑의 관계가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 각인된다는 점에서, 이른바 공시적(公示的)효과를 극대화 하는 점에서 만족을 찾는 것 같다. 이렇듯 공공의 자리에서 사랑의 몸짓을 공공연히 펼치는 심리 기제 속에는 ‘너와 나는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서로에게 소유된다’는 심리를 공공의 공간에서 확증 받으려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 메시지의 실질적인 발신자와 수신자는 그들 껴안은 두 남녀 자신들뿐일 수도 있다. 그들과 아무런 심리적 연대도 없는, 그저 기이한 호기심 정도로만 힐끗거리듯 훑어보는 대중들이 그들 ‘사랑의 연출’이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진정한 수신자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라도 서로에게 불안하게 죄어 오는 믿음 약한 사랑과 언제나 성에 안 차는 소유의 심리를 해소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그런 마음을 자기최면으로 강화하려는 몸짓은 아닐지. 에리히 프롬이 일찌감치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을 소유로만 확인하려 들면 그 사랑은 언제까지나 미숙할 수밖에 없다고. 사랑을 소유의 집착에서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한다고. [PAGE BREAK] 3 공공의 공간에서 시도되는 과도한 애정표현은 공공의 공간에 적합한 감동적 모티브를 가지지 못하면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된다. 우리들 모두 ‘사회적 인간’이고, 사회적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은 ‘사회적 공간’이다. ‘사회적 공간’은 ‘공공의 공간’이다. 애정의 표현이 사회적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공유되려면, 사회적 공감과 감동을 수반해야 한다. 하다못해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의 연애감정을 사회적 차원에서 어여쁘게 인정해 주는 어떤 사회적 감동의 계기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또 어찌 윤리적 정당성이 없는 감동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바로 그것을 문학이나 영화의 예술이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닐까. 1940년에 제작된 흑백 영화 애수(哀愁)(원제 : Waterloo Bridge)는 1950년대 말 이후 우리 영화 팬들에게도 큰 감동을 선사한 고전의 품격을 지니는 영화이다. 지금도 텔레비전 방송 명절 특별편성 ‘명화극장’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든 영화다. 로버트 테일러의 중후하고도 우수(憂愁) 짙은 연기와 여배우 비비안 리의 진실하고도 애틋한 눈빛이 아련한 잔상으로 오래 남는 영화다. 두 연인이 절박하고 간절하게 만나서 생사의 기약이 없는 전쟁터로 떠나야 하는, 워털루에서의 이별 장면은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린 명장면이다. 워털루 다리 위에서 이들 연인은 안타깝고 불안한 운명의 질곡 앞에서 실존의 사랑을 허무하게 확인하는 포옹과 키스의 장면을 연출하는데, 이 장면이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명장면으로 전해 온다. 이른바 공공영역에서의 애정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이 대목 애정 표현 장면이 당시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기표(記標)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진실을 향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윤리가 사회적 감동으로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써 사회적 갈등의 일대 사건인 전쟁을 감당하는 남자 주인공 로버트 테일러의 캐릭터 또한 사회적 감동을 견지해 내며 긴 울림의 의미를 생산한다. 더구나 신이 관장하는 운명의 변주 속에 약한 인간으로 아프게 순응하며, 사랑과 죽음을 동일한 인간적 책무로 감당하는 여주인공의 비극적 삶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 감동의 전체적 울림 속에서 워털루 다리에서의 포옹과 입맞춤은 사회적 감동으로 매김된다. 권태로운 장난의 시시한 ‘애정표현’이 어찌 여기에 끼어들기나 할 것인가. [PAGE BREAK] 4 아,그러나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렇게 사람들 보는 데서 해방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면 마음의 즐거움과 감동은 배가하여 충천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즐거움과 기쁨은 공공적 노출이 강할수록 오래도록 지속되는지. 세상의 온갖 에너지들이 모두 질량불변의 법칙에 귀속되는 것이라면, 우리들 사랑의 심적 에너지도 그 총량은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랑의 에너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그렇게 화끈하게 다 소진해 버리고 나면, 우리는 사랑에 관한 한, 좀 황폐한 마인드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문득 우리 민요 ‘밀양 아리랑’이 생각난다. 이런 구절 하나가 익숙하게 귓가에 맴돈다.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마음 가득, 몸 가득 사랑인데, 포옹도 없고 입맞춤도 없고, 달려가 손잡는 일도 없다. 오래 떨어져 있던 애인을 만나는데도 먼발치로만 보고 입도 열지 못한다. 공공영역에서의 애정표현(PDA)은커녕 온갖 사랑의 기표들을 애써 감추어 들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 대목이 던져주는 내적인 에로티시즘에 한결 더 이끌린다.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한다고? 그런 식의 표현은 화끈하지 못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고양되지 못한다고 누가 말하는가. 오늘도 전국의 야구, 축구 경기장에서 한국인들이 열광하는 단골 응원가로 ‘밀양 아리랑’은 맹위를 떨치고 있다.
매일 들판 달리는 ‘웰빙학교’ 오전 10시 40분, 2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노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체조를 하더니 이내 인솔교사를 따라 교문 밖을 향한다. 잠시 후 한적한 시골길에 들어서자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다 곧 시골길을 따라 뛰기 시작한다. 어느새 저 멀리까지 뛰어간 아이들. 갈림길이 나오자 저마다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진지하게 전력 질주하는 아이, 얼마 가지 못해 걷기 시작하는 아이, 웃으며 서로 발맞춰 뛰는 아이…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길을 향해 뛰어간다. 그리고 10분 남짓 지나자 하나둘씩 결승점에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 굳이 시합을 붙인 것도 아닌데 결승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초시계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기록을 확인하며 저마다 기쁨과 아쉬움의 감정을 표출한다. 이것은 경남 김해용산초등학교(교장 김해영)의 ‘들판 달리기’ 모습이다. 김해에서는 이미 ‘웰빙 학교’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김해용산초는 매일 2교시가 끝나면 전교생이 들판 달리기를 한다. 평소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건강은 물론 바른 인성과 학습의욕도 함께 증진하겠다는 취지이다. 하지만 코스나 방법 등은 관여하지 않는다. 800m 코스부터 4500m 코스까지 각자의 역량에 맞춰 자유로운 방식으로 뛰도록 하고, 학생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기록관리도 알아서 한다. 흔히 생각하는 단체구보가 아닌 말 그대로 자유로운 들판 달리기인 것이다. 그래서 김해용산초의 학생들은 모두 건강한 구릿빛 피부와 밝은 미소를 갖고 있다. 주변 자연환경을 이용한 무공해 교육 김해용산초는 김해시에 속하기는 하지만 시내에서 17㎞ 이상 떨어져 있는 김해 유일의 벽지학교다. 도회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육여건이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주위의 자연환경을 십분 활용해 자연체험학습장을 조성하고 ‘1인 1 텃밭 가꾸기’를 하는 등 불리한 여건을 오히려 특색 있는 교육의 기회로 삼고 있다. 학교 뒤편의 자연체험학습장은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구성도 무척 짜임새가 있다. 수중생물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연못을 시작으로 뒷산 줄기를 따라 곳곳에 모둠별 학습을 할 수 있는 원형테이블이 설치돼 있고, 좀 더 올라가면 전교생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학습장이 마련돼 있다. 야외학습장 위로는 등산로가 계속 이어지는데 총 길이가 7㎞에 이르고 곳곳에 운동시설이 설치돼 있다. 이 정도 시설이면 충분히 만족할 만도 하지만, 김해영 교장은 “아직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며 “학생들을 위한 골프연습장을 마련하고 민속놀이 시설을 더욱 확충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다방면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김 교장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김해용산초는 자연의 흙과 친숙해질 수 있도록 학교 앞에 재배관찰학습장을 마련, 전교생이 1㎡ 정도의 개인 텃밭에서 농작물을 직접 기르고 수확하는 ‘1인 1 텃밭 가꾸기’를 하고 있다. 주말이면 학부모가 함께 나와 농작물을 살피고 자연체험학습장에서 등산을 하는 가정도 많다. 교직원들도 직접 텃밭을 가꿔 여기서 생산된 무공해 농작물을 급식에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경작해 먹는 즐거움에 자연스럽게 채소섭취량이 늘어 학생들의 식생활이 개선되는 부가적인 효과도 얻었다. 아토피 • 천식 친화학교로 지정 좋은 자연환경을 이용해 다양한 자연친화적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김해용산초는 지난해 보건복지부로부터 아토피 • 천식 친화학교로 지정됐다. 이에 보다 체계적인 관리를 하기 위해 보건소와의 협조를 통해 전교생의 아토피 • 천식 유무를 조사하고, 질환이 있는 학생은 개인관리 카드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저소득층 학생에게는 의료비를 지원한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이 건강한 생활습관을 가질 수 있도록 학생 • 교사 • 학부모 대상의 다양한 연수 •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방역이나 제초작업 등은 반드시 하교 후에 하고 학교주변에 알레르기를 유발할 수 있는 식물은 제거하는 등 학교관리에도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토피와 천식을 앓고 있는 학생 80%가량은 그 증세가 사라졌으며, 나머지 20%도 호전되고 있다. 영어교육도 전국 최우수 아이들이 아이답게 자연에서 뛰놀며 자라게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학과교육이 부실해지진 않을지 걱정이 되기 마련이다. 특히 점점 더 강조되는 영어교육의 경우 도시가 아니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은 김해용산초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학년 당 한학급 전교생 144명의 소규모 학교임에도 2명의 원어민 강사를 확보해 여느 도회지 학교 이상의 양질의 영어교육을 하고 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정규교과시간에 주당 3시간의 영어수업을 받고 있으며, 올해부터 매주 1시간씩 과학교과를 영어로 수업한다. 아직까지 완전히 영어로 하는 수업은 되지 않지만 수업의 75%가량을 영어로 진행하고 있으며, 2학기에는 이를 90% 이상으로 올릴 계획이다. 김해용산초의 영어교육은 교실에서 그치지 않는다. 화장실 천장에 영어회화 기계를 설치, 사람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인식해 영어회화를 따라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토킹 프렌즈’라는 이 영어회화 기계는 일상생활 중에도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생활영어를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김 교장이 창원전문대 교수진 등과 함께 개발했다. 향후 입식(立式) 영어회화 기계를 개발, 복도 6곳에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 교육은 학교에서, 교사는 무조건 수업부터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해용산초는 일반적인 정규교과과정에 영어수업을 더 추가해 운영하고 있으며, 5~6학년 교과과정에는 주당 2시간의 중국어 수업이 추가되기 때문에 정규수업이 다른 초등학교보다 늦게 끝난다. 방과 후에도 수준별 영어보충수업과 컴퓨터, 논술, 태권도, 국악, 무용 등 다양한 방과후학교를 운영한다. 그래서 모든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일반 직장인의 퇴근시간과 비슷하다. 이는 되도록 사교육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든 교육을 학교 내에서 받아야 한다는 김 교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전체 학생 45% 정도의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기도 하다. 김 교장은 “사교육에 기대지 않고 학교에서 충분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교사들이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수업시간 중 교사들의 핸드폰 사용부터 컴퓨터 사용, 행정업무 처리 등 일체의 다른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행정업무까지 금하는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김 교장은 “교사에게 수업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다. 모든 공문은 수업을 마친 뒤 처리하고, 정 급한 공문이 있으면 수업이 없는 다른 교사가 하면 되는 것”이라며 “그래도 처리할 사람이 없으면 교장이 직접 처리하거나 기한을 연장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하면 된다. 이런 것이 관리자로서 교장이 할 일”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의 결과 1998년 전교생이 38명까지 줄어 폐교 위기에 몰렸던 학교가 현재 전교생 144명의 학교로 정상화됐다. 현재 전학을 원하는 대기자가 70명에 이르고, 내년 입학을 원하는 학생도 벌써 24명이나 접수됐다. 김해용산초를 다니려는 학생 중 상당수가 차로 30분이 넘게 걸리는 시내에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실로 대단한 인기다
+ 서해 최북단의 매력적인 섬 그러니까 백령도 용기포 선착장에 도착하기까지 딱 12시간이 걸렸나 봅니다. 자정에 출발한 서울발 심야버스는 새벽 4시 30분경 강남고속터미널에 도착했고, 한 시간 정도 터미널 근처에서 대기했다가 전철을 타고 인천 연안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는 정각 8시에 출발하는 여객선을 타고 4시간 조금 넘게 달린 끝에 백령도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그리고 남한의 PSI 전면 참여, 개성공단 문제 등으로 어느 때보다도 남북 간 긴장이 팽팽한 때 서해 5도 중 한 곳인 백령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상외로 백령도는 침착하고 조용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백령도는 북한과 훨씬 가깝고 바다 건너에 북한 황해도가 한눈에 들어오기에 유사시에 어떤 상황이 발발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잔잔한 바다만큼 흔들림 없이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진촌리에서 만난 어떤 주민은 오히려 그런 긴장감이 있기에 훨씬 여유로운 곳이라고까지 합니다. 하지만 주민들과 달리 군인들을 보면서 미묘한 전운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휴가 나온 군인들은 군복을 입은 채 대기 상태로 언제든지 부대로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점점 더 많은 병력이 섬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들은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고, 북한은 군사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대거 군사력을 서해안 쪽으로 집결시켜 두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백령도를 포함한 우리 땅 서해 5도는 북한으로 봐서는 목에 가시와 같은 곳입니다. 서해 5도로 인해 북방한계선(NLL)이 생겼고, 그 북방한계선으로 인해 개성이나 해주 쪽에서 서해로 진출하려면 황해도 해안선을 따라 백령도와 가까운 장산곶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우리로서는 서해 5도를 확보함으로써 인천 앞바다를 통해 곧바로 서해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백령도에는 해병대 6여단을 중심으로 공군, 해군 등 국군이 배치되어 서해 최북단 우리 영토를 지키고 있습니다. 백령도는 행정구역상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에 속합니다. 전체 인구는 4000여 명, 남한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입니다. 옹진군은 북도면, 연평면, 대청면, 덕적면, 자월면, 영흥면 등 서해에 떠 있는 섬을 껴안고 있습니다. 백령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냉면집이 눈에 띕니다. 황해도식 냉면집이 대부분이라는데, 어느 식당에서 먹어본 냉면은 메밀로 만들어 시원했습니다. 짠지떡도 유명한데 이것은 백령도 사람들이 짠지라고 부르는 김치를 잘게 썰고 굴이나 조개 등으로 소를 만들어 먹는 것으로 생김새는 만두와 비슷합니다. 백령도 까나리액젓의 명성도 알아줍니다. 곳곳에서 숙성용 저장용기를 볼 수 있고 소금을 만드는 염전도 한 곳 있습니다. 그밖에 전복, 해삼, 우럭 등 신선한 해산물이 풍부한데 여행 기간 중 사자바위를 앞에 둔 고봉포구에서 본 팔뚝만한 숭어 떼가 기억에 남습니다. [PAGE BREAK]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곶해안, 콩돌해안, 점박이물범 군사적, 지리적인 특수성으로 인해 백령도는 그동안 자연 모습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몇 점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된 사곶해안은 규암 가루가 층층이 쌓이고 그 모래 사이에 뻘이 뒤섞여 형성되었습니다. 그 단단하기가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할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곳은 1970년대까지 비행기 이착륙 용도로 이용되었다는데 이탈리아 나폴리 해안과 함께 전 세계에 두 곳밖에 없는 천연비행장이라고 합니다. 4㎞에 이르는 긴 백사장은 해송이나 해당화와 함께 어울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해수욕장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된 콩돌해안은 말 그대로 콩알만한 돌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제 색깔을 잃은 녀석들이 물을 만나면 제 색깔을 드러내는데 그 화려함이 끝내 줍니다. 일반적인 모래사장을 밟는 느낌이나 굵은 몽돌해변을 밟는 느낌과는 다른 이색적인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이 해안은 백령도의 모암인 규암이 해안의 파식작용에 의해 마모를 거듭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똑같은 콩돌이 물을 만나면 색깔을 드러내고 그렇지 않은 곳은 제 색깔을 잃고 맙니다. 남북의 상황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결국 같은 색깔, 같은 모양인데 단지 드러나는 색깔이 다를 뿐이지 않을까요? 백령도의 중심지는 진촌리입니다. 고려시대 이후로 진(鎭)이 설치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진촌리 하늬바다에는 천연기념물 제393호로 지정된 감람암 포획 현무암 분포지가 있습니다. 이곳 현무암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황록색을 띤 감람암 암편들이 보이는데 이것은 용암 분출시 지하 맨틀 층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땅속 깊은 암석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는데요, 지금은 사람들에 의해 많이 채취되어 곳곳에서 감람암이 빠져나간 흔적만 남아 있는 듯합니다. 국가지정 천연기념물이 이렇게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하늬해변 일대 농경지는 진촌리 패총지역으로 이곳에서는 신석기시대의 맷돌을 비롯하여 토기, 돌도끼, 동물 골편, 돌 어망추 등 선사시대부터 옹진군에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천연기념물 제331호인 점박이물범은 백령도 주변에 약 200~300마리가 서식하고 있는데 하늬해변 앞 물범바위와 두무진 일대에서 잘 보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행을 하는 기간에는 한 마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네요. 백령도를 왕복하는 여객선의 운항횟수가 늘어나고 4시간 남짓이면 육지에 도착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외지인의 경우 편도 6만 원에 가까운 승선비가 들지만, 인천광역시민의 경우는 50% 할인의 혜택이 있고 백령도민일 경우에는 5000원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 접근성이 훨씬 나아졌습니다. 섬 주민들이 큰 병원을 갈 때도 훨씬 더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외부인들의 방문 기회가 많아지는 만큼 백령도의 자연을 그대로 남겨두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겠습니다. [PAGE BREAK] + 심청각과 두무진, 용트림바위 심청전의 주 무대가 어디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그 무대가 황해도 황주와 장산곶, 백령도 일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백령도에는 심청과 관련한 곳이 몇 군데 전해집니다. 심청이 바다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는 지금은 북측 바다에 있기 때문에 가지는 못해도 눈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또, 심청이 연꽃에서 다시 태어난 것을 말해주는 연화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연화리에는 옛날에 많은 연꽃들이 피어났다고 합니다. 그밖에 연꽃이 떠내려와 걸렸다는 연봉바위도 있습니다. 이런 심청의 고장 백령도에 1999년 심청각이 문을 열었습니다. 1층에서는 효와 관련한 자료와 소리, 영화, 소설로 심청전을 만날 수 있고 2층은 옹진군의 역사, 백령도 홍보, 북녘 땅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건물 바깥에는 심청이 인당수에 뛰어들기 직전의 모습을 조성해 기념상으로 설치해두었고요, 심청각 오른편으로는 화포와 탱크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 포구(砲口)는 북쪽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1층 전시관에는 효를 실천한 이야기 속 인물들이 몇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손순매아(孫順埋兒)’ 이야기도 있습니다. 손순이 모친의 음식을 뺏어 먹는 어린아이를 산에 묻기로 하고 갔더니 돌로 된 종이 나와서 아이를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집에서 그 종을 두드리니 그 소리가 흥덕왕에게 전해지고 왕은 그 사연을 알고는 후한 상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효를 강조하는 내용은 지역 곳곳에서 전래되고 있는데 울산의 경우에는 송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심청각 2층에서 북녘 땅을 바라봅니다. 남과 북 사이에는 잔잔한 바다만 있을 뿐입니다. 그 바다에는 지도에서 본 북방한계선 표시도 없고 이념의 대립도 없습니다. 그저 푸르른 바다 위에 배 한 척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잠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북한 측 해안과 백령도 북측 해안을 중심으로는 상대방을 경계하기 위한 지뢰가 수없이 매설되어 있을 테고 각종 무기로 중무장되어 상대방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겠죠? ‘백령도’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두무진(頭武津)에 가면 인당수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두무진은 명승 제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대암, 형제암, 코끼리 바위 등 해안선을 따라 깎아지른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어우러져 마치 장군들이 회의를 하는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합니다. 서해의 해금강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이곳에서 건너편으로 보이는 장산곶까지는 보이지 않는 금줄만 아니라면 배를 타고 20분만 달리면 닿을 것 같습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두무진 일대에는 통일로 가는 길 비, ‘통일기원비’가 서 있고 1970년 7월 9일 23시경 나포된 백령도 어민들 중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반공희생자합동위령비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서 의외의 수확이라면 용트림 바위를 찾아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용트림 바위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바위는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고 하지만 그 바위 자체보다는 일대가 갈매기와 가마우지떼의 집단 서식지이기 때문에 절벽을 이룬 곳에 틈을 비집고 자리 잡은 놈들을 만나는 기쁨이 대단합니다. 바로 눈 아래에 갈매기 알이 있는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미는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수백 마리는 됨직한 갈매기떼가 군사작전이나 한 것처럼 저를 향해 쌩 날아오더니 머리 바로 위로 지나갑니다. 저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릴 태세입니다. 제가 침략자가 되어 버린 셈입니다. [PAGE BREAK] + 110년의 역사 가진 중화동교회 백령도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다는 장로교회인 중화동교회가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을 넘어섭니다. 교회 옆에는 백령기독교역사관이 있어 백령도 지역 기독교 전래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역사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중화동교회의 설립과 기독교 전래사를 정리해 봅니다. 우리나라에는 영국인 선교사들이 제일 먼저 들어왔는데 이들은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습니다. 1816년 영국함대가 백령도에 처음으로 개신교의 씨앗을 퍼뜨렸고 1832년에는 백령도를 방문한 귀츨라프 선교사가 처음으로 백령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1846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가 막혀버린 육상통로 대신 서해상을 통해 신부들이 육지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열기 위해 백령도 근해에 나타났다가 옹진반도 인근 순위도에서 관군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척해 놓은 서해상의 잠입통로를 통해 1880년까지 무려 17명의 신부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서해상 항로의 거점은 백령도였습니다. 1865년에는 토머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함으로써 개신교 첫 순교자가 됩니다. 1880년 중반에는 서상륜 형제의 주도로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가 탄생하게 되기에 이르렀고 이후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령도에도 중화동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중화동교회는 허득의 주도로 세워진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母敎會)로 이를 계기로 대청도와 소청도 같은 인근 섬에도, 옹진반도와 대동반도에도 교회가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대개 섬이라면 전래 민간신앙이 두터운 편인데, 이 지역은 중국을 드나드는 통로로 각국의 배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인지 일찍이 새로운 문화에 좀 더 빨리 눈뜰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들어서고 난 뒤에 위기도 찾아왔는데요, 해산물을 잔뜩 실고 몽금포로 떠난 배가 갑자기 일기 시작한 바람과 파도로 파선되어 결국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배가 파선된 원인이 해신(海神)을 믿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며, 교회에서 서낭제를 못하게 한다고 해서 전래 민간신앙과 교회와의 충돌이 컸다고 합니다. 인천으로 향하는 여객선에서 생각해 봅니다. 이 백령도에서 군인들이 없어질 날이 언제일까, 우리나라 최서단 땅이라며 백령도가 아닌 평안북도 마안도로 마음대로 찾아갈 수 있는 날이 언제일까…. 백령도의 백령(白翎)은 ‘흰 날개’를 의미합니다. 갈매기 떼가 흰 날개를 휘젓고 마음껏 날아다니는 이곳이 대립과 긴장의 섬이 아니라 통일을 가장 먼저 기다리는 희망의 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여행자와 현지인을 함께 성장시키는 공정여행 공정여행(Fair Travel)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공정여행이란 우리가 여행에서 쓰는 돈이 그 지역과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직접 전달되는 여행, 우리의 여행을 통해 숲이 지켜지고, 사라져가는 동물들이 살아나는 여행,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경험하는 여행, 즉 여행자와 여행자를 맞이하는 이가 공평하게 같이 성장하는 여행을 말합니다. 이번 호에 소개하려는 책 희망을 여행하라는 이러한 공정여행을 소개하는 책입니다. 보고 즐기는 것이 중심이 되는 일반적인 여행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에는 유명 관광지나 음식점 정보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대신 공정여행을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정보나 유의할 점, 공정여행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줄 만한 장소에 관한 정보가 가득합니다. 현재 관광산업은 세계 GDP의 10.3%를 차지할 정도로 큰 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의 후진국에서 관광산업은 그 나라 산업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그렇다면 관광을 주력 산업으로 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제사정이 좋아져야 할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영국의 공정여행 단체인 ‘투어리즘 컨선’에 따르면 우리가 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를 여행할 때 여행에서 쓰는 돈 중 70~85%는 외국인 소유 호텔이나 관광 관련 회사들에 의해 해외로 빠져나가고 현지 공동체에 돌아가는 것은 단지 1~2%에 그친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 1~2%의 대가로 치러야 하는 환경파괴와 에너지 고갈 문제는 현지인들에게 가혹한 고통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후진국에서 여행자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는 매우 큰 힘을 갖습니다. 숲을 빙 돌아가는 길에 대해 여행자들이 불평을 늘어놓으면 얼마 가지 않아 숲을 관통하는 도로가 생깁니다. 또, 여행자 한 명이 하루 평균 3.5㎏의 쓰레기를 버리고,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주민 30명이 쓰는 전기를 소비하며 고급호텔 객실 하나에서 평균 1.5t의 물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평소에 이 정도의 자원을 소모하고 쓰레기를 배출하진 않을 텐데, 여행의 자유를 만끽하다 보니 평소보다 좀 더 과한 소비를 하는 것 같습니다. 희생 • 봉사가 아닌 배려에서 시작 이 책이 함께 하자는 공정여행은 희생이나 봉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현지인들을 조금만 배려하자는 것입니다. 평소처럼 자원을 조금만 아껴 쓰고, 이왕 여행을 왔으니 되도록 그 지역의 전통식당과 가게, 숙소를 이용하는 것 같은 대단치 않은 행동도 현지인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배려가 담긴 공정여행은 비단 후진국 여행을 할 때만이 아니라 국내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름휴가를 다녀오신 분들도 많겠지만 아직 다녀오시지 않았다면 출발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고 공정여행을 다녀오시면 어떨까요? 선생님의 여행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될지도 모릅니다. 필리핀의 행위예술가이자 환경교육자인 로잘리 제루도의 말처럼 말이죠. “어떤 여행은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고, 어떤 여행은 그 사람의 생을 뒤바꾸어 놓기도 하지요. 동시에 어떤 여행은 세상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당신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지구를 위한 선택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유럽을 일거에 사지(死地)로 바꾸어버린 흑사병, 15세기를 지나 16세기에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다.” 물론 가정의 이야기다. 그랬을 경우 유럽은 아마도 사람을 구경하기 힘든 땅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정치제도든 과학문명이든 유럽세계가 근대 이후 자랑해온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페스트로도 불리는 흑사병이 역으로 유럽에서 중동과 서역을 거처 동쪽으로 옮겨왔더라면 동아시아가 치른 희생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오늘날 조류 독감, 사스, 신종 플루, 수족구병 같은 고전염성 질병들이 지구촌을 무시로 위협하기에 역사상의 대역병인 흑사병을 되짚어 본다. 역사상 수차례 창궐한 흑사병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를 현대의 흑사병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14세기 중엽, 특히 1370년대 전후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 : 사망률이 80%에 달한 선(線)페스트와 사망률이 거의 100%였던 폐(肺)페스트로 나뉜다)은 에이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지만 흑사병으로 알려진 괴질은 역사상 수차례 창궐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세계도 전염성이 매우 강한 괴질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특히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존망을 건 30여 년간의 펠로폰네소스전쟁 중에 흑사병 혹은 티푸스로 여겨지는 괴질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페르시아전쟁사의 헤로도토스와 쌍벽을 이루는 고대 아테네의 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그 괴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아무 까닭 없이 사람들이 별안간 심한 두통을 겪고 눈이 충혈되고 염증을 일으켰다. 증상이 더 심해져 위장에 이르면 헛구역질을 했다.” 민주체제를 확립하고 파르테논신전을 재건하는 등 전성기 아테네를 이끈 페리클레스도 펠로폰네소스전쟁 중에 그 괴질로 타계했다. 그 괴질은 아테네 인구의 1/4 정도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14세기에 유럽을 죽음의 땅으로 변모시킨 흑사병은 확실치는 않으나 중국을 정복한 몽골족이 흑해의 크림반도 소재 카파를 공격하면서 검게 타 죽은 중국인 흑사병 사체를 성벽 안으로 던져 넣어 퍼지게 되었고(말하자면 중세판 세균전 내지 생물학 전쟁이었다), 발칸반도 남단의 ‘에게해-보스포러스해협-다나넬즈해협-흑해연안’ 교역로를 왕래하는 뱃길을 따라 이탈리아의 항구들에 전래되고 뒤이어 알프스를 넘어 중북부 유럽으로 퍼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흑사병이 인도에서 발생해 타르시스(Tharsis)와 사라센인(아랍인)를 거처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가들은 상인들의 가래침도 병균을 전파하는데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지만 특히 상선에 숨어든 쥐가 흑사병균의 주된 매개자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한다. 여하 간에 그 괴질은 1346년경 흑해, 비잔티움(이스탄불), 에게해 등을 거처 베네치아와 제노바 등 이탈리아 항구들에 전파되었다. 아버지를 흑사병으로 잃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은 이탈리아반도의 참상을 잘 전해준다. “명미하고 우아한 피렌체 거리에 죽음의 역병이 들이닥쳤습니다. 2~3년 전 동양에서 발생해 숱한 인간의 목숨을 빼앗은 후에도 그냥 정지할 줄 모르고 차차로 만연하여 마침내 여기 서방에까지도 화를 뿌려가며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탈리아를 강타한 페스트는 곧바로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 독일 • 영국 등 유럽을 휩쓸었다. 잘 알려져 있지만 흑사병이 내습한 시기의 이탈리아는 르네상스문화를 꽃피우던 중이어서,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를 비롯한 다수의 이탈리아인들이 알프스를 넘어 중북부 유럽으로 여행했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수의 중북부 유럽인들 역시 학문적, 문화적 일이나 교역을 위해 이탈리아를 향해 알프스를 넘나들었다. 14세기의 흑사병은 한 차례의 습격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한동안 거의 주기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유럽을 유린했다. 1348~1350년에 한 차례 창궐한 흑사병은 1360~1363, 1371~1374, 1381~1384에도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을 공포에 빠뜨렸다. 수치는 조금씩 틀리지만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거의 전 유럽에 걸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감소됐다. 그 무렵의 이탈리아 연대기 작가 M. 빌라니에 의하면 페스트로 인해 이탈리아의 인구는 60% 정도 줄었다. 보카치오에 따르면 피렌체에서도 10만명 이상이 죽었다(당시 피렌체 인구는 10만 전후로 평가되므로 꽤 과장된 것 같지만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베네치아의 경우도 심할 때는 하루 5~6백 명이 희생되는 등 18개월 동안 인구의 60%가 흑사병으로 죽었다. 알프스 이북에서도 흑사병은 엄청난 수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독일 함부르크와 브레멘은 각각 주민의 50~66%와 70%를 잃었다. 영국의 브리스톨 역시 인구의 1/3을 잃었다. 주민 15~20만 명의 파리에서 심한 때는 하루에 800명이 죽었다고 한다. 프랑스 부르고뉴(부르군드)의 한 교구 기록부는 1200~1500명의 마을 사람들 중 615명이 1348년 8월에서 11월 사이에 흑사병으로 죽은 것으로 전한다. [PAGE BREAK] 상류층도 흑사병을 피해가지 못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염병은 곤궁한 하층민들이 사는 무질서하고 불결한 거리에 즐겨 찾아드는 법이라 하층민의 희생이 무엇보다 컸지만 상류층 사람이라고 해서 흑사병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아라곤의 피터 4세의 왕비 엘레노르, 영국 에드워드 3세의 공주 요안, 캔터베리대주교 스트레드포드, 페트라르카의 영원한 연인 라우라 등이 그들이었다. 아비뇽 교황청(주지하듯이 1309년 이후 70년간 교항청은 로마가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아비뇽에 있었다)의 고위 성직자들도 1/4로 감소했으며 추기경들도 1/3이 흑사병으로 희생되었다. 마르세유 서쪽 지중해연안 프랑스 도시 몽펠리에에 있던 도미니쿠스 수도원의 경우 140명의 수도사 중에서 7명만이 생명을 보전했다고 한다. 의사들도 흑사병엔 속수무책이어서 몽펠리에 서쪽의 지중해 연안 도시 페르피낭에서는 9명의 의사 중에서 단 한 사람만이 흑사병에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짐작하기 어렵지 않지만 흑사병은 사회와 경제의 구조를 파괴하고 윤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촌락들 사이의 관계는 물론 교회와 신자 사이의 관계도 무너져 갔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심지어 가족관계도 파괴해 버렸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가 하면 형이 동생을,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 생존자는 “사람들은 이제 주검에 대해 죽은 염소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고 전한다. 작업장의 대부분이 문을 닫았는가 하면 곳곳에서 경작지가 황무지로 변했다. 의학 수준이 낮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페스트에 대한 공포는 더욱 컸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 아니지만 괴상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런 뜬소문은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했다. 다시 데카메론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그것이 천체 운행의 작용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죄과에 대한 정당한 노여움으로써 신께서 인간에 내리신 것이지….” 의사든 아니든 괴질의 원인을 옳게 파악한 사람은 없었다. 엉뚱하게도 개와 쥐의 천적인 고양이를 의심해 닥치는 대로 죽여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가 하면 이상하고 근거 없는 예방법이나 치료술에 매달렸다. 악마가 공기를 더럽혔기 때문이란 말이 나돌았으므로 공기를 맑게 하기 위해 약초를 태우거나 향기를 내는 수지(樹脂)를 흡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페스트 사망자의 방문을 못질하거나 환자의 물건을 태워 없애기도 했다. 자신의 둘레에 항상 불을 피워두려고 한 성직자도 있었다고 한다. [PAGE BREAK] 신의 징벌로 여긴 대중 집단적 광기 일으켜 보카치오는 어떠한 예방법도 기도도 소용없다고 전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여기기도 했다. 위의 빌라니에 따르면 신은 자비롭지만 일련의 재앙을 통해 인간의 사악한 범죄를 징벌하는데 흑사병도 신이 내린 징벌로 보았다는 것이다. 파리대학 의학부는 토성, 목성, 화성이 이례적으로 물병자리궁에 모여 뜨겁고 습한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지구가 독한 유기체를 발산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혹은 1345년에 혜성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심지어 마법사들이 주문 외우기를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번에도 집단 히스테리의 제물이 되었다. 십자군운동이 일어났을 때 내부의 적으로 지목되어 한 차례 살육과 약탈의 제물이 되었고 후일 히틀러에 의해 민족말살의 수난을 당한 유대인은 14세기 중 • 후엽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도 집단적 광기의 희생물이 되어야 했다. 페스트가 모종의 독에 기인한 것으로 믿은 자들은 그들이 미워하고 시기해온 유대인을 의심했다. 유대인들이 고의적으로 샘이나 수원(水源)에 독약을 풀어 넣어 페스트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십자군운동 때와 같이 흑사병이 창궐할 때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유대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1924년에 관동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자, 잔학한 일본인들은 한국인이 방화했다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무고한 한국인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육한 관동대지진사건을 생각하게 하는 만행이었다. 교황 클레멘트 6세가 똑같이 페스트의 피해를 당하는 유대인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포고문까지 발표했으나 기독교도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대인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유대인을 생매장하거나 불 속에 던져 죽이는 등의 집단광기 외에 자학고행도 등장했다. 페스트를 신의 징벌로 여긴 자들이 육체적 고통을 통해 신의 노여움을 풀어 역병을 피하려는 행위였다. 십자가와 가죽끈을 손에 잡은 전라 혹은 반라의 남녀가 성가를 부르며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의 거리거리를 돌아다녔다. 중세에는 여자도 벌거숭이로 밖에 나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은 듯하지만, 흑사병에 대한 공포와 자학적 광기가 심리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몸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못되었다. 그들은 군데군데에 매듭이 있고 못이 박혀있는 가죽끈으로 자신들의 몸을 줄곧 내려치면서 거리를 떼 지어 돌아다녔다. 피가 흐르다 못해 피부가 찢기고 살이 뜯기는 편타(鞭打)고행이었다. 페스트와 함께 그 기상천외의 고행이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등 유럽 각지에서 유행했다. 동방으로부터 전래된 흑사병은 1380년대 이후 알게 모르게 사라졌다(흑사병에 관한 유럽의 마지막 기록은 1771년에 6만 명을 희생시킨 모스크바의 흑사병이다). 1350~80년대의 흑사병이 그 자취를 감춘 것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역사상의 괴질이 대개 그러하듯 알게 모르게 수그러들었던 것 같다. 아마 계절의 변화도 그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결국은 극복했겠지만 흑사병이 더 오래 창궐했을 경우 지중해연안과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어떤 모습으로 남았을까? 근대 이후 세계사를 선도한 유럽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왕성한 창조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인적 드문 땅이 되지는 않았을까? 또한 그러했을 경우 흑사병의 피해는 유럽에 한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흑사병은 유럽에 전래된 경로를 따라 동양으로 되돌아와 동북아시아까지 포함한 아시아 인구의 반을, 혹은 그 이상을 죽음으로 내몰았을지 모른다.
전교조와 한국교총의 소모전이 펼쳐지는 것을 두고 언론에서도 관심이 높은 모양이다. 외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집안싸움이 흥미로워 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관심을 깊이 두고 있다는 생각이다. 7월 30일자 연합뉴스의 보도내용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교장과 교감이 주축인 교총과, 평교사가 주축인 전교조가.....'우리나라 신문이나 방송보도에서 연합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볼때 대단히 실망스러운내용이 아닐 수 없다. 전교조가 평교사 주축인 것에는 이의가 없다. 교장, 교감이 일부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미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총이 교장과 교감이 주축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실망스럽기 짝이없다. 어떤 근거로 그런 표현을 사용했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총의 회장도 평교사 출신이다. 예전에도 교장 교감출신이 회장이 된 적이 없었다. 대학교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교장과 교감이 주축이라는 것은 어떤 근거인지 궁금하다. 전국에 초,중,고등학교의 수는 대략 1만여개애 달한다. 단순히 계산하면 교장 1만명, 교감 1만명이다. 여기에 복수교감이 있는 학교를1천개 정도로 본다면 교장 1만명, 교감 1만 1천명이 된다. 전체 2만 1천명이 교장과 교감이 되는 셈이다. 그 중에 80%가 한국교총회원이라면교장, 교감 회원은 1만6천8백여명이 된다. 이들이교장, 교감회원의 전부인 것이다. 어떻게 교장, 교감이 주축인 단체가 한국교총이라는 이야기인가. 한국교총의 전체회원은 18만여명이다. 교장과 교감의비율이 채 10%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교장, 교감이 주축인 단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교장과 교감이 주축이 되어 정책의 결정들을하는 것도 아니다. 이사나 대의원 등도 교사들이 훨씬 더 많다. 근거없는 보도로 인해 일반인들의 오해를 불러일으킬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연합뉴스에서는 단순하게 표현을 했을지 몰라도, 이를 바라보는 한국교총 회원들의입장에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없다는생각을 하게된다. 아직도 한국교총을 교장과 교감이 주축이 된 단체로 생각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이다. 조금만 생각해보고 기사를 쓴다면 이런일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기사를 쓸때는 이런 측면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정보를 언론에서 다룬다는 것은 매우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연합뉴스를 비롯한 모든 언론들에게 확실히 밝혀둔다. 한국교총은 결코 교장과 교감이 주축이 된 교원단체가 아니고, 수많은 평교사들이 주축이 된 단체라고....꼭 기억해 주길 바란다.
며칠 전 모 대학에서 입시설명회를 백석고등학교에서 있었다. 지방대학이라 학생들의 관심도 없어 소수의 학생들만 앉혀 놓고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방 대학에서도 건실한 재정에 학사 관리가 우수하다고 정평있는 대학이었건만 학생들의 관심도는 전혀였다. 요즘 입시 설명회에 학생들의 관심도는 거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터넷으로 보면 된다는 등 자신이 갈 대학이 아니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입시설명회를 진행하는 동안 대학 당사자들은 학사 관리를 얼마나 학생들의 관심에 맞춤형 대학교육을 하는지를 절실하게 안내하여 담임으로서도 꼭 이 대학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특히 두드러지게 돋보이는 것은 포인트 점수제 관리였다. 포인트당 만 원도 있고 천 원도 있다. 1년에 포인트로 대학에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 이백 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어트 포인트 점수도 있다. 금연 포인트도 있다. 학생증이 현금카드처럼 포인트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학생증에 정립되어 인터넷으로 대학 당국의 전산망으로 연결되어 학생이 현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학생 개개인의 취업 준비와 취업도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울 정도로 만족도를 높인다고 한다. 교수 1인당 학생 배당 인원이 10정도라 한다. 교수 또한 10명에 대한 학사 관리 점수가 있어 학생이 학교를 휴학하는지 편입하는지 등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상담하여 진정한 대학생활의 일면을 교수가 전담하여 졸업시키는 책임 교수제가 도입되어 있다고 하여 놀라움을 자아냈다. 고교를 방문하는 대부분의 대학입시 설명자들은 고3 교무실에 와서 선전용 물건을 들여주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례다. 대학을 정말로 홍보하여 자신의 대학에 대한 메리트를 홍보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로 여러 학교를 다녀야 하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자신의 대학에서 내세울만한 학과를 소개하는 정도는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목타는 자가 우물판다고 하지만 지방 대학일수록 이런 입시설명회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수도권에 있다는 이유로 사실 대학 입시설명회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찾아오는 일은 더욱 드물다. 2023년이면 지금의 고등학생 60만 정도가 45만 정도로 줄어들어 종합대학 20개 정도가 사라져야 할 정도라고 한다. 그냥 흘러가는 말로 듣고 넘겨야 할 소리가 아닌 것 같다. 인천인데도 작년에 중학교 20개 학급이 없어지고 80명 정도의 교사가 고등학교로 올라오는 사실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도높게 전개될 양상이다. 죽어가는 대학은 지방대학이요, 고통받는 학생은 시골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임은 자명한 위치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대학이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치열한 학생 유치작전이 있어야 할 상황이다. 학생들에게 맞는 학과와 취업 잘 되는 홍보, 확실한 학사관리, 만족할 수 있는 대학 문화 정착이 이제는 학생 유치에 관건이 될 것이다. 수도권이라고 하여 학생 입학에 우선권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정답이다. 하지만 대학이라고 하여 모두 좋은 취업을 보장하는 길은 아니다. 죽어가는 대학은 살아가는 대학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돌아 보아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교육과학기술부가 31일 시국선언 참여 교사 89명에 대해 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중징계 조치를 단행키로 한 것은 더는 전교조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재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교과부는 지난달 26일 1차 시국선언에 참여한 주동자 88명에 대해 해임, 정직 등 중징계를 결정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이들의 징계 수위를 파면, 해임 등으로 격상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이에 따라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은 해임에서 파면으로, 전교조 중앙집행위원 및 시도 지부장 등 21명은 정직에서 해임으로 징계 수위가 높아졌다. 파면은 공무원 징계 가운데 가장 강력한 조치로 이 조치가 확정되면 교사직 박탈과 함께 향후 5년 간 재임용이 금지된다. 사실상 교단에서 퇴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교조 사상 현직 위원장이 파면 징계를 받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전교조는 이번 징계로 말미암아 위원장 파면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전원이 해임되는 사상 유례없는 사태를 맞을 위기에 처했다. 교육당국과 전교조의 대립은 그동안 계속됐지만 현 정부 출범 이후 그 강도가 어느 때보다 세졌고, 특히 근래에 최고조에 달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 시국선언 관련 징계자 수가 무려 90명에 가깝고 이들 대부분이 전교조를 이끌어 가는 노조 전임자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무관용' 카드를 들이민 것은 집권 2년차를 맞아 교육개혁의 고삐를 바짝 당겨 쥐어야 할 시점에서 전교조에 의해 발목이 잡혀서는 자칫 개혁의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전교조는 자율과 경쟁을 기반으로 한 정부의 교육기조에 강하게 맞서 지속적인 교육정책 반대 투쟁을 벌여 왔다. '고교 다양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한 자율형 사립고 설립 계획이 신청 학교수의 저조로 말미암아 다소 차질을 빚은 것도 전교조의 강력한 자율고 반대 투쟁에 기인한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여기에 내년 3월 전면 실시를 앞둔 교원평가제를 비롯해 교단사회의 개혁을 몰고 올 각종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에 앞서 사전에 걸림돌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으로도 해석된다. 정부의 초강수 조치에 전교조 역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양측의 충돌은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으면 파국으로 치닫는 '치킨게임' 양상으로 번질 것으로 예상된다. 전교조는 시국선언 참여 교사에 대한 징계를 지시한 안병만 교과부 장관을 최근 직권 남용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데 이어 31일에도 전의를 내보였다. 전교조는 성명을 내고 "중징계 방침을 철회하지 않으면 시도 교육감 고발, 부당노동행위 제소 등 법적 투쟁과 함께 국제인권위 제소 등 국제적인 연대활동까지 벌이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 전교조는 또 "교육당국이 현직 위원장을 파면까지 하겠다는 것은 전교조를 아예 교원노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중징계 방침을 철회할 때까지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 나가겠다"라고 경고했다. 이는 정부가 기존의 강경기조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전교조의 사활을 걸고 전면투쟁에 돌입할 것임을 천명한 것으로 해석돼 시국선언 참여 교사들의 징계를 둘러싼 파문은 당분간 확산하면서 새로운 정국 변수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돼 정부의 추가 대응이 주목된다.
31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거행된 고 박세직 향군회장 영결식.지난 27일 오후 급성폐렴 증세로 타계한 고(故) 박세직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 영결식이 31일 오전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엄수됐다. 향군장으로 치러진 이날 영결식에서 김홍렬 장의위원장(향군 해군부회장, 전 해군참모총장)은 조사를 통해 “고인은 올림픽 준비 당시 매주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며 노력한 결과 올림픽 역사상 최대, 최고의 올림픽을 치러낸 분”이라며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을 강조했던 뜻을 받들어 자유, 민주, 통일조국을 향해 우리도 매진 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 위원장은 “평소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일이라고 답했던 고인께서 이제 하늘나라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히 쉬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사마란치 IOC명예위원장도 조전을 통해 “IOC위원장으로 재직 중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박 회장을 여러 번 만났다”며 “대한민국 올림픽을 위해 많은 일을 하신 고 박세직 회장께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며 유가족에게 심심한 조의를 전한다”고 밝혔다. 영결식에는 이원희 교총회장, 황수연 자유총연맹 부총재(전 환일고 교장) 등 교육계 인사,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이종구 성우회장, 이상훈 전 국방부장관(전 향군 회장), 등 군 원로, 김양 국가보훈처장, 장수만 국방부 차관, 김중련 합참 차장 등 현직 군 관계 인사, 박진 한나라당 의원, 김성곤 민주당 의원,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 등 정치계 인사를 비롯 3000여 향군 회원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길을 배웅했다. 김창석 향군회원(서울 화곡동)은 “올림픽조직위원장 뿐만 아니라 장관, 국회의원, 안기부장 등 맡은 일마다 성실히 해온 모습은 귀감이 됐다”며 “현 정부 들어 그래도 코드가 맞는 정권이어서 의욕적으로 일하시다가 무리하신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영결식을 마친 고 박세직 회장의 유해는 오후 3시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6·25 발발로 학도병을 참전한 뒤 육사에 진학, 군문에 들어선 고인은 3사단장,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거쳤으며 총무처장관, 체육부장관, 안기부장, 서울시장, 14·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06년 31대 향군회장에 이어 올해 4월 32대 회장에 취임했다. 특히 박 회장은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2002년 한일월드컵 조직위원장을 지내 세계 3대 스포츠 빅 이벤트의 조직위원장을 모두 지낸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고인은 교사의 꿈을 키워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남가주대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 등 교육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여왔다. 6월 16일 교총 방문 시에는 “지휘관, 지도자는 곧 선생님이라는 생각으로 그동안 일해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29일 박 회장 빈소가 차려진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조문하고 고 박세직 회장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이 자리에서 이대통령은 “평소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고 일하다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다”며 유족들을 위로했다. 또 Bell 전 연합사령관은 미망인 홍숙자 여사에게 위로서한을 보내 "연합사령관 및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재직 당시 박세직 장군님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신뢰 깊은 고문이었다"고 회고 한 뒤 "장군님을 오래 그리워할 것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존경받는 애국자 한 분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고 박세직 회장의 빈소에는 이 대통령을 비롯해 한승수 국무총리, 정정길 대통령비서실장,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 이원희 교총회장 등 전·현직 정부인사와 정치계, 종교계, 학계, 관계, 시민사회계, 경제계 등 대한민국 각계 주요 인사들이 직접 조문하거나 조화를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다른 가정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있나? 이와 관련하여 통계청에서 공식적인 자료가 발표되었다.이 조사는 아동청소년 종합실태 조사로 2008. 9 ~ 2008. 11의 3개월에 걸쳐 0세~18세 아동‧청소년 자녀가 있는 전국의 6,923가구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0~8세의 경우 관찰 및 검사를 통한 심층조사를 실시하였다. 가구 및 지역, 학교환경, 가족생활 및 환경, 인지 및 언어, 사회성 및 정서, 건강 및 안전, 활동 및 진로 등네 관하여 전문조사원 가구 방문 후 면접조사(조사기관 : 한국 갤럽)를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책임 : 이봉주 교수)이 사회과학연구소, 심리과학연구소, 다문화생활교육센터 등 연합하여 조사를 하였다. 부모의 양육태도를 4점척도로 알아본 결과, 전반적으로 자신의 양육태도를 평등주의적 태도라고 응답하여 평균 3.1점을 보여준 반면 아동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긍정적인 평가태도에서는 평균 1.9점의 낮은 점수를 보여주었다. 자녀를 돌보는데 본인이 유능한지를 평가한 ‘자기효능감’에서는 4점 만점에 평균 2.5점 내외로 중간수준을 보였다. 양육스트레스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높은 점수를 보여 상대적으로 양육에 대한 스트레스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 양육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는 것으로 주로 서로 합의하여 해결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자녀 훈육방법으로는 ‘말로 야단치기’와 ‘장난감/게임기 사용 제한하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칭찬․보상방법‘또한 ’말로 칭찬하기‘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자녀에 대한 희망교육수준과 기대교육수준 모두 대학교와 대학원이상에 90%이상이 집중되었으며, 희망교육수준은 55%이상이 대학교, 35%이상이 대학원을 선택하였고, 실제 기대하는 수준은 65%이상이 대학교, 23%이상이 대학원이상을 원하였다. TV와 비디오 시청시간의 경우 6~8세의 87.7%가 시청시간 제한을 받고 있고, 상대적으로 0~2세는 58%선으로 제한이 적었으며, 프로그램 종류 제한 또한 6~8세가 88.2%로 가장 높았다. 인터넷 사용시간 및 사이트 종류의 경우는 9~11세의 86.8%가 시간제한을, 6~8세 85.6%가 사이트 종류 및 내용제한을 받고 있었다. 1달에 1회이상 하는 여가 및 놀이활동을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영역에서 12~18세의 활동이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9~11세 아동의 약 1/4이 방과후 3일이상을 어른없이 혼자 혹은 형제․자매와 함께 보내고 있었고, 연령별로는 6~8세보다는 9~11세가 더 혼자있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자녀의 사회성 발달 중 가장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한 결과, 전반적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소극적임’, ‘자신감이 없음’, ‘산만하고 주의집중하지 못함’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으로 꼽혔다. 잘 울거나 혼자있는 것을 좋아하는 등의 내면적 문제행동은 8세까지 뚜렷한 차이가 없었고, 9~11세의 문제행동은 모든 계층에서 12~18세보다 낮게 나타나, 연령이 높아질수록 문제행동이 많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의 정서 발달 중 가장 걱정되는 부분에 대해 질문한 결과, 연령대별로 순위에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화가 나면 참지 못함’, ‘감정표현이 서툼’, ‘까다로움’이 가장 걱정되는 부분으로 꼽혔다. 외래진료횟수는 2세이하 평균 9.1회에서 연령이 증가할수록 줄어들어 12~18세의 경우 평균 3.2회 외래진료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자녀의 주요 질병은 아토피, 기관지, 천식, 비염이 1~3 순위를 차지하였고, 건강 중 가장 우려되는 부분으로는 아토피, 편식, 키, 시력이 손꼽혔다. 세끼 중 아침의 섭취 비율이 가장 낮았고, 특히 12~18세의 50.3%만이 항상 아침을 먹으며, 아침을 거르는 비율은 22.7%로 나타났다. 인스턴트 섭취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증가하고, 특히 12~18세의 1/2이 주3회이상 섭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주일에 운동 및 야외신체활동을 하는 시간을 물었을 때, 0~2세 및 12~18세는 40%가 넘는 아동․청소년이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연령대에서는 20%선이 운동부족으로 나타났다. 정기적으로 하는 운동으로는 3~18세 연령대 모두에서 ‘태권도/검도/합기도’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6~8세에서는 수영(12.3%), 12~18세에서는 구기종목(18.3%)순이었다. 특히, ‘수영’의 경우 소득수준이 높고 지역규모가 클수록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자녀의 안전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으로는 교통사고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였고, 다음으로 놀이 중 사고, 유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12~18세 활동시간을 살펴보면 평일에는 학교에 있는 시간(656분)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잠자는 시간(460분), 식사 및 간식시간(250분)순이었고, 주말에는 잠자는 시간(612분), 식사 및 간식시간(417분), TV보는 시간(192분)이 높았다. 아동․청소년의 평일 주요활동 시간을 살펴본 결과, 빈곤층에서는 TV시청, 컴퓨터하는 시간, 친구교제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120%이상층에서는 학원과외, 종교참가, 개인공부, 봉사동아리, 취미여가, 신문독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빈곤한 아동청소년은 문화, 예술 활동 등 활동참여에서도 열악한 처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 문화, 예술 관련 활동의 경우 전체 12-18세 45.5%가 지난 1년간 참여한 경험이 있다고 하였으나, 빈곤층의 경우는 평균에 못 미치는 39%만이 그러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다. 해외견문 경험의 경우도 소득수준에 따라 차이가 있어 12-18세 아동청소년 중 일반계층은 7.7%가 지난 1년간 해외에 나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였으나 빈곤층은 그 비율이 2.6%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자료를 부모님들은 참고로 하여 자녀교육에 임하여야 하겠다. 특히 12~18세 청소년들이 운동을 하지 않는 비율이 높고 주기적으로 운동을 하는 비율이 낮아 운동을 많이 하도록 하고 특히 정기적으로 운동을 유도하여야 하겠다. 그렇게 하여 너무 실내활동만 하는 자녀들에게 실외활동을 할 기회를 제공하여야 하겠다. 아울러 자녀들의 미래의 건강을 위하여 평소에 아침식사를 하게 하고 인스턴트 음식 섭취를 줄여야 하겠다. 또한 사회성중 ‘자신감이 없음’과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소극적임’을 탈피하게 하고 정서적으로 ‘감정 표현 서툼’과 '화가 나면 참지 못함’ 이런 현상은 자녀가 커서 사회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안되므로 수정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학교 인근에 납골당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법재판소는 학교 주변에 납골시설을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학교보건법 조항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위헌제청한 사건에서 합헌 결정을 내렸다고 31일 밝혔다. 재판부는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사망자 시신이나 무덤을 경원하고 기피하는 풍토와 정서를 가지고 살아왔고 입법자는 학교 부근의 납골시설이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해로운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규제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며 "납골시설 기피 풍토와 정서가 과학적 합리성이 없다해도 규제 필요성과 공익성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어 "학교 부근 200m 이내의 정화구역 내에서만 설치가 금지되는 것이어서 그로 인해 기본권이 침해되는 정도는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대학 인근에는 설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에 대해서도 "납골시설을 기피하는 정서는 사회의 일반적 풍토와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 대학생이 되면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보고 합헌 결정했다. 이공현ㆍ김종대ㆍ송두환 재판관은 "납골시설이 반드시 학생들의 정신적 교육환경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유해시설이라 단정하기 어렵고 오히려 삶과 죽음, 그리고 사후세계와 삶의 다양성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유익할 교육적 시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이 재판관 등은 "납골시설을 지나치게 크게 설치하거나 위생 및 환경상 고려를 하지 않고 방만하게 관리하면 학생들의 육체적ㆍ정신적 보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런 문제점은 입법자가 구체적으로 기준을 마련해 차단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봤다. 목영준 재판관은 일부 반대의견을 내고 "대학생은 신체적ㆍ정신적으로 성숙해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책임을 질 수 있어서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납골시설로 인해 부정적 영향을 받거나 학습에 지장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학교의 범위에 대학 등을 포함시키는 것은 최소한의 제한이라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단법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은 2005년 태릉성당 지하에 납골당을 설치하겠다고 구청에 신고했지만 중학교와 이웃하고 있고 주변에 초등학교 및 유치원이 있어 반려당하자 소송을 냈고,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납골당 설치에 반대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도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1차 시국선언에 이어 2차 시국선언에 참여한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을 비롯한 교사 89명에 대해 파면과 해임 등 중징계 처분이 내려졌다. 그러나 2차 시국선언에 서명 방식으로 동참한 일반 교사 2만8천600여명은 서명자 식별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징계를 유보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31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서 전국 시도 부교육감 회의를 열고 전교조의 시국선언 관련자에 대한 조치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교과부는 1차 시국선언 때와 마찬가지로 2차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에 대해 법에 따라 엄정 조치할 것이며 특히 1, 2차 선언에 중복 참여한 교사는 가중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이미 지난 17일 밝힌 바 있다. 교과부는 이에 따라 1차 시국선언 때 '해임' 조치가 결정된 정진후 전교조 위원장는 징계를 한단계 높여 '파면'키로 하고, '정직'이 결정됐던 전교조 전임 중앙집행위원 및 시도 지부장 21명은 '해임'하기로 했다. 또 나머지 본부 전임자 및 시도 지부 전임자 67명에게는 '정직' 처분을 내리는 등 총 89명에 대한 중징계를 단행하기로 했다. 이들 89명의 핵심 주동자는 지난 1차 때와 마찬가지로 검찰에 다시 고발할 계획이다. 교과부는 그러나 2차 시국선언에 서명으로 참여한 일반 교사 총 2만8천622명(추정치, 전교조 집계로는 2만8천711명)은 이름 식별이 어렵다는 이유로 징계를 유보했다. 교과부 이성희 학교자율화추진관은 "전교조가 2차 시국선언자 명단을 홈페이지에 동영상 형태로 공개했으나 해상도가 낮아 도저히 이름을 식별할 수 없다"며 "전문업체에 의뢰해도 기술적으로 판독이 불가능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교과부는 그러나 이미 명단이 뚜렷하게 공개된 1차 시국선언 참가자는 현재 시도 교육청별로 식별 작업을 하고 있는 만큼 참가 여부가 확인되면 당초 방침대로 행정 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교육청은 올해 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시험에서 토익, 토플 등 영어인증시험 관련 가산점제를 전면 폐지한다고 31일 밝혔다. 작년까지 중등 영어과 임용시험에서는 토익(TOEIC), 토플(TOEFL), PELT(국가공인민간자격실용영어) 등의 영어인증시험 고득점에게는 성적에 따라 가산점이 차등 부여됐다. 시교육청이 영어가산점을 폐지키로 한 것은 2007년 10월 개정된 '교육공무원 임용후보자 선정 경쟁시험 규칙'이 작년 9월부터 시행된 데 따른 것이다. 이 개정규칙에 따라 시교육청은 작년 영어과 시험을 영어듣기 문제가 포함되고 영어로 진행되는 형태로 변경했고, 재작년까지 최고 4점까지 준 영어가산점을 최고 2점으로 축소했다. 시교육청은 정보처리 및 사무분야 국가기술자격증 소지자에 대한 가산점제도 올해부터 전면 폐지한다고 밝혔다. 시험시행공고는 10월7일 시교육청 홈페이지를 통해 게재되며, 1차 시험은 11월8일(공통, 전공), 2차 시험(논술)은 12월13일 치러진다.
인명은 하늘의 뜻이라기에 애써 비통함을 감추려하지만 평소 우리나라 체육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위원장님과 유명을 달리해야 하는 자연의 섭리가 못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서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계시는 위원장님의 영정을 대하고 보니 오로지 이 나라 체육발전과 호국안보를 위해 노력해 오신 위원장님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비감을 금할 수 없으며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박세직 위원장님의 서거 소식을 듣고 충격 속에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88서울올림픽 당시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열정적으로 뛰시던 모습, 특히 개․폐회식에 출연한 초․중․고․대학 31개 출연 학교와 34개 단체의 1만6200여명의 출연자들을 운동장에서 직접 격려하면서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개․폐회식의 성공여하에 달려있다고 말씀하면서 독려하시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세대에 언제 또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생일대의 최대 행운이고 영광이다. 반드시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우리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고 선진국으로 도약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힘들어 하는 출연 학생들과 367명의 지도자들을 격려하며 긍지와 보람을 느끼게 해준 분이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380대의 버스로 1만6200명의 출연자들을 연습장으로 이동시키며 그 무더운 여름 뜨거운 뙤약볕과 줄기차게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잠실올림픽경기장과 보조경기장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위원장님도 야전침대를 사무실에 갖다 놓고 숙식을 하면서 올림픽을 준비하셨습니다.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2002 월드컵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스포츠를 세계 10위권으로 도약시킨 그분은 체육행정가이며 정치가였고,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교사가 되기 위해 부산사범학교를 진학했으나 6․25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으로 참전 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군인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박세직 위원장님께서는 6월 16일 한국교총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습니다. “지금 상황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전후세대가 늘어서인지 크게 위협을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500만명 이상의 우리 민족이 죽거나 다친 비극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과 국제사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선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학생에게 있고, 학생의 미래는 결국 교사에게 전적으로 달려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선 선생님들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이 시기에 올바른 국가의식을 갖고 교육현장에서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의 역할이야말로 실로 막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이념적으로 경도된 세력에 의해 우리 학생들이 잘못된 교육을 받지 않도록 선생님들께서 현장에서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그분은 우리 교육자들에게 호국안보를 당부하고 이 나라 교육을 진심으로 걱정하신 분이셨습니다. 재향군인회장으로 취임한 후 800만 회원들을 대표하면서 “북한의 핵무장은 한민족의 평화와 미래번영을 위해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발전적 보수를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의 체제수호를 위해 향군이 국가안보의 제2보루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하면서 호국안보를 위해 동분서주하셨고, 지난달 6․25 전쟁 59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과로가 겹쳐 갑자기 서거하셨습니다. 그리운 박세직 위원장님 아직 떠나실 때가 아닌데, 이 황망한 마음, 이 허무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든 체육교육인들은 두손을 모아 위원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마침 추풍령이 목적지였다. 화령장에서 만난 장꾼 할머니가 추풍령의 5일장까지 찾아간다는 말을 들은 터라 청주삼백리 회원들은 추풍령으로 가며 이곳의 지형과 거리를 살펴보기로 했다. 경북 상주시 화서면에서 화동, 모서, 모동을 지나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까지 가보니 의아심이 풀린다. 무척 먼 거리로 알고 있었는데 불과 32㎞에 불과하고, 고갯길이 한곳도 없이 편평한 평지만 이어진다. 또, 화령장이 열리는 화서면이 고원지대이듯 추풍령도 해발 240m에 위치한다. 도계를 넘어 추풍령면으로 들어서면 길가의 낮은 언덕에 신안리 석불입상(영동군향토유적 제20호)이 서있다. 고려시대의 석불입상은 도보로 서울과 부산의 중간에 위치한 반고개 마을의 수호신이다. 석불이 바라보고 있는 웅북리(곰뒤마을)에는 400년 숨결의 돌담길과 나라에 큰 변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렸다는 6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추풍령에 들어서니 거꾸로 내건 다방의 간판이 눈길을 끈다. 추풍령은 영남에서 충청과 한양을 이어주던 중요한 길이었다. 교통의 요지답게 지금도 경부고속도로, 경부고속철도, 4번 국도로 자동차와 기차가 내달리고 있다. 하지만 주막 등 옛길의 흔적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추장돼지갈비로 유명한 추풍령할매갈비와 고갯마루의 광천2리가 10여m 거리에서 경북 김천시와 충북 추풍령면을 가른다. 광천 2리의 표석에 왜 당마루(唐嶺)라고 써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지역의 변화 과정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살아계실 때 역사의 뿌리를 찾아내야 한다.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고개마다 한 많은 사연...' 그나마 추풍령 노래비의 가사들이 추풍령의 고단한 역사를 증명한다. 새로 생긴 4번 국도는 차들이 꼬리를 물지만 추풍령면소재지를 지나는 구도로는 차들이 없다. 세월이 거꾸로 가듯 도로변에 난전만 몇 개 있을 뿐 번듯한 가게도 발견하기 어렵다. 차라리 역사의 수레바퀴나 거꾸로 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추풍령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추풍령면사무소에 들렸다. 면사무소에서 만난 노랫말 '구름도 자고가는 바람도 쉬어가는'을 가로등에서도 만난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황금면이었던 곳이 추풍령면이다. 이곳에서 만난 직원은 멋있는 소나무들이 무척 많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 벌목했다며 아쉬워했다. 면사무소와 추풍령역 사이에 일본식 건물이 서너 채 있다. 일제 강점기 추풍령역에 근무하던 역무원들의 사택이다.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인데 관리를 하지 않아 낡았고, 여기저기 손을 대 본래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추풍령역 안에 있는 급수탑이 등록문화재(제47호)다. 예전 사람들은 나무나 석탄으로 물을 끓여 그 증기로 엔진을 움직이는 증기기관차가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대며 달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추풍령역은 경부선의 중간지점이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증기기관차들이 쉬면서 급수를 하는 장소였다. 현재의 추풍령역은 신청사라 번듯하다. 역사의 옛 모습은 대합실벽 높은 곳에 사진으로 걸려있다. 타고내리는 사람이 적어 옛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엇더라면 외지사람들이 일부러 구경올 만큼 운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풍령에서 백두대간이 지나는 작점고개로 향하다보면 면사무소에서 보이던 반쪽짜리 산을 만난다. 철도청에서 오랫동안 석산개발을 하다 환경단체의 반대로 공사를 중단한 곳이다. 흉물스러운 모습이 볼썽사나워 눈살이 찌푸려진다. 원인 제공자인 철도청에서 잘 정비한 후 나무를 심고 조형물을 세워 공원을 만들든지 차라리 지자체에서 필요한 만큼 더 캐낸 후 모습이 예쁜 암벽등반 코스를 만들어 활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석산개발현장에서 굽이 길을 돌아서면 죽전리의 추풍령저수지를 지난다.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이 저수지의 높이를 5m 높인단다. 저수지 옆으로 이어지는 한가로운 마을 풍경이 사라질 날도 멀지 않다. 작점고개 정상에 잠깐 차를 세웠다. 백두대간을 알리는 작점고개 표석을 카메라에 담고 백두대간 안내지도에서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있는 추풍령과 괘방령을 살펴봤다. 조선시대 과거보러가는 선비들이 추풍령으로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추풍령 옆 괘방령을 넘으면 '급제'했다는 일화가 재미있다.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이는 일이 '괘방(掛榜)'이다. 그러니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은 조금 돌더라도 괘방령을 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추풍령역에서 구도로를 이용해 황간 방향으로 달리면 사부리 길가에 장지현 장군을 모신 사당(충북기념물 제96호)과 순절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장지현 장군은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사당 앞으로 그림처럼 보이는 산이 백두대간의 눌의산이다. 다시 차를 몰면 황금교 건너기 전에 오른쪽으로 금보사 이정표가 보인다. 사부리의 황보마을과 금보마을은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인데 20여 년 전 추풍령면을 황금면으로 부르게 했던 장본인이다. 첫 번째 만나는 갈림길에서 왼쪽은 황보리, 오른쪽은 금보리로 가는 길이다. 지장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3~4㎞ 이어지는 금보계곡은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깨끗하고 조용하다. 금보계곡 끝에서 조계종의 작은 사찰 금보사를 만난다. 사람소리에 문을 연 주지스님이 반갑게 맞아준다. 날마다 쉬면서 마음을 비운다는 일휴(日休) 스님은 차를 따라주며 마음을 비우지 않는 세상을 탓한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 본인의 신장을 기증했다는 분이니 그런 얘기를 할 자격이 있다. 얼마나 쓰레기를 많이 버리고 가면 금보마을 사람들은 계곡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어쩌면 자기가 앉았던 자리 깨끗하게 정리하고, 자기가 가져간 것 되가져오는 것도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작고 하찮은 일이 어디 있나. 수시로 부닥치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비우는 게 행복이다. 추풍령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렇다.
정부는 내년 시행하는 새 학자금 대출 제도는 졸업후 취업을 하고 나서 일정 수준 이상 소득이 발생할 때부터 원리금을 상환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정도 소득이 생겼을 때부터 갚아야 하는지, 채무불이행을 막을 대책은 무엇인지 등의 관심사항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정부가 '학자금 안심 대출'로 이름 붙인 새 제도를 문답식으로 풀어봤다. --무엇이 달라지나. ▲거치기간에도 소득 4~7분위는 이자를 내야 했으나 앞으로는 소득발생 시점까지 이자납부 부담이 없다.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 없었던 신용등급 9~10등급 학생도 대출 대상이 된다. 7분위 이하 중산층 가정의 자녀는 누구나 대출받을 수 있어 대학생의 절반 이상인 100만명 내외가 수혜 대상이다. --현 제도와 비교해 유리하고 불리한 점은.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450만원의 무상 보조나 1~3분위 계층에 대한 무이자 대출 등에서는 현행 제도가 유리하다. 반면 바뀐 제도가 가장 유리한 점은 최장 25년까지 장기 상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총 4천만원까지만 받을 수 있던 한도도 없어져 전액을 대출받을 수 있다. 상환 중간에 실직 등으로 소득 능력을 상실하면 상환도 자동 중단돼 신용불량자로 전락할 우려가 없다. --재학생은. ▲재학생에게는 선택권을 준다. 졸업 때까지 현행 제도와 새 제도 가운데 유리한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2010년도 신입생부터는 소득계층 구분없이 새 제도가 일률적으로 적용된다. --신용불량자로 분류된 상태에서도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나. ▲재학생이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졸업을 해서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라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상환 의무가 발생하는 기준소득은. ▲연간 소득이 기준을 초과하는 시점부터다. 기준소득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대졸 초임과 최저생계비 수준, 외국 사례 등을 고려해 9월 말까지 결정할 방침이다. 학자금 대출 상환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할 방침이다. --취업 후 상환금액 등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면. ▲A라는 학생이 대학 4년간 1년에 800만원씩 총 3천200만원을 대출받았고 대출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만 7년이 되는 해에 취직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자율이 5%라면 이자는 대출 첫해 40만원, 2년차 80만원, 3년차 120만원, 4년차 160만원이 발생하고 취직을 하지 못한 2년 동안에도 매년 160만원의 이자가 발생한다. 따라서 A학생이 취직하기 직전인 만 6년째까지 상환액은 총 3천920만원(원금 3천200만원+이자 720만원)이 된다. 이 금액을 취직 전에는 전혀 내지 않다가 취직이 된 시점부터 갚아 나가는 것이다. 원리금 상환 기준소득이 연 1천500만원, 상환율이 연 20%로 정해졌고 A학생의 취직 첫해 연봉이 2천500만원이라면 2천500만원에서 기준소득 1천500만원을 뺀 1천만원의 20%, 즉 200만원을 그 해에 갚으면 된다. 이런 식으로 계산했을 때 A학생은 취직 후 상환원금을 모두 갚기까지 12년이 걸린다. 원리금 상환 기준소득과 상환율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막대한 재정부담은 어떻게 감당하나. ▲대출자가 전체 대학생의 20%인 40만명에서 50% 수준인 100만명으로 늘어나면 내년부터 5년간 연평균 1조5천억원의 부담이 예상된다. 지금도 무상보조, 이차보전을 위한 재정 부담이 2006년 1천240억원에서 올해 4천657억원으로 증가한 상태다. 재정 부담은 초기에 많이 늘어나겠지만 상환이 시작되면 더 늘지 않고, 철저한 사후관리를 통해 장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채무불이행을 낮출 방법은. ▲국세청의 소득 포착 및 징수 시스템과 연계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개선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또 일정기간 상환하지 않으면 소득뿐만 아니라 재산도 조사해 상환액을 재산정하거나 해외로 이주하면 일반대출로 전환하는 방안, 대졸 전업 주부는 가계소득을 기준으로 상환액을 산정하는 방안 등을 강구한다. --학자금 대출 기준 성적을 높여야 하지 않나. ▲지금은 기초수급자 등록금 무상보조(연 450만원) 대상자만 B학점 이상이며 나머지는 모두 C학점 이상을 요구한다. 등록금 무상보조가 없으므로 'C학점' 기준은 같다. 성적 기준을 높이면 대출 대상자가 축소돼 부담이 높아지고 생활비를 조달하느라 공부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은 저소득층 자녀가 더 불리해질 수 있다. --등록금 인상을 부추기고 부실 대학을 지원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나. ▲대출을 받지 않는 학생도 많고 학생 1인당 교육비 산정근거를 내년 1월부터 공시하도록 하는 등 견제장치가 있다. 부실 대학 구조조정도 더욱 본격화할 예정이다. --고교 의무교육이 더 바람직한 것 아닌가. ▲소득이 생기면 갚아야 한다는 점에서 의무교육과 다르다. 고교교육 의무화는 재정능력상 현재로는 어렵다. 대신 학교운영비 지원 대상을 2학기부터 모든 차상위계층으로 확대하고 수업료 지원도 2007년 16만8천명(2천10억원)에서 올 2학기 21만2천명(2천393억원)으로 늘린다.
우리 서령에서는 2009학년도 '대학생귀향멘토링제' 운영의 활성화를 위해 1, 2학년을 대상으로 기초반 20명을 모아(학급당 4명씩 5개반)을 편성 여름방학 중에 대학생 과외수업을 실시한다. 선생님은 모교를 졸업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었으며 네 명의 강사가 총 20명의 학생을 1일 3시간씩 총 30시간의 학업을 도와주게 된다. 대학생 귀향 멘토링제는 동계방학과 하계방학을 이용하여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돕는 제도로 재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멘토로 참여하고 있는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이재민 학생은 “멘티와 만나 수업하면서 선후배간의 끈끈한 정이 인상깊게 다가왔으며, 다른 멘토, 멘티들과 교류하면서 그 속에서 행복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멘토링 프로그램은 멘티와 자신의 변화에 좋은 프로그램이라며 소감을 말했다.
지금 대부분의 학교가 여름방학에 들어가 있다. 농경시대에 여름방학을 보낸 기성세대들에겐 신나는 여름방학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데 요즘의 아이들은 어떻게 방학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래 친구들과 냇가에 가서 물장구치고 멱을 감으며 더위를 이겨냈다. 족대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며 좋아하는 얼굴모습이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내 어린 시절에 단오가 되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뒷도랑에서 삼촌과 함께 가재를 잡던 재미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한가한 시골길 원두막에서 참외, 수박을 깎아먹으며 더위를 잊고 매미채를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여름 방학이 되면 외갓집에 가서 보리밥에 감자를 넣은 웰빙(Wellbeing)밥상을 받고 호박잎과 된장찌개와 함께 맛있게 저녁을 먹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저녁을 먹고 나면 모기를 쫒기 위해 피운 모닥불연기를 맞으며 옥수수를 먹었다. 멍석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세며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이제 장년과 노년을 바라보고 있다. 1년을 두 학기로 나누어 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하는 것은 1주일 공부를 하고 쉬는 주말보다 더 큰 의미의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일한 다음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은 활력이 넘치는 재충전의 기회이기에 한 단계 도약하는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모두 직장을 다니는 경우 방학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하지만 방학은 교육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유익한 방학이 어떤 교육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방학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학기 중에는 틀에 짜인 교육과정을 이수 하느라 배우고 싶고 해보고 싶은 공부나 체험을 못하게 되는데 주어진 방학기간에는 자기 스스로 필요한 독서를 하며 시간 관리를 하며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주도적학습의 좋은 기회이다. 둘째, 가족의 정을 느끼며 함께 할 수 있는 기회이다. 평소에 소원했던 가족과 함께 피서나 여행을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핵가족화로 떨어져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가정의 소중함과 가족애를 배우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인성교육의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외가를 비롯한 친지를 방문하는 등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셋째, 대자연의 숲속에서 자연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여름철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이 너무 많다. “자연보다 위대한 스승은 없다.”는 말처럼 동식물이 자라는 자연을 벗 삼아 맑은 물과 공기를 호흡하며 신비스러운 자연을 탐구하며 교실에서 배운 것을 친구들과 어울려 현장에서 체험학습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넷째, 건강을 보살피며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하는 좋은 기회이다. 평상시 소홀히 했던 건강을 보살피고 방학기간에 마음 편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이다. 알맞은 운동과 휴식을 즐기며 영양을 보충하거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활력을 불어넣으며 심신을 단련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방학이다. 특히 교원은 방학을 통해 학생들 앞에 자신감에 넘치는 밝은 표정으로 서기 위한 재충전을 하여야 다음 학기 수업을 알차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방학을 알차고 유익하게 보내야 한다. 한 학기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휴식이 필요하기에 학생과 함께 교원의 방학은 다음 학기의 교육의 질을 결정하는 자양분이 되는 기간이기에 보람 있게 보내야 한다.
‘가름’과 ‘갈음’도 구분해서 써야 한다. 두 단어의 차이를 보면 ‘가름’1.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는 일. - 차림새만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름이 되지 않는다.2. 승부나 등수 따위를 서로 겨루어 정하는 일. - 이기고 지는 것은 대개 외발 싸움에서 가름이 났다(이문열, ‘변경’). ‘갈음’ 1. 다른 것으로 바꾸어 대신함.(동사 ‘갈음하다’) -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행운이 가드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치사를 갈음합니다. 2. 갈음옷(일한 뒤나 외출할 때 갈아입는 옷). ‘가름’과 ‘갈음’의 차이는 기본형을 보면 쉽게 해결된다. 먼저 ‘가름’의 기본형은 ‘가르다’이다. 이는 ‘쪼개거나 나누어 따로따로 되게 하다.’의 의미로 ‘편을 셋으로 가르다./수박을 다섯 조각으로 갈라 나누어 먹었다./마을 사람들을 여자와 남자로 갈랐다.’로 쓴다. 결국 ‘가르다’는 ‘나누다, 분류하다’의 뜻을 나타낸다. ‘갈음’은 기본형이 ‘갈다’이다. 이는 ‘고장 난 전등을 빼고 새것으로 갈아 끼웠다./컴퓨터 부속품을 좋은 것으로 갈았다./임원을 새 인물로 갈다.’라고 쓴다. 이는 ‘바꾸다, 대체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행사를 할 때 높은 양반들이 치사를 하며 끝에 ‘이것으로 인사에 갈음하겠습니다.’와 같이 말하는 것을 종종 들을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경우에 ‘갈음하다’를 사용한다. ‘가름’과 음운이 비슷한 ‘가늠’이라는 단어도 알아보자. 이는 1.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려 봄. 또는 헤아려 보는 목표나 기준. - 매사가 다 그렇듯이 떡 반죽도 가늠을 알맞게 해야 송편을 빚기가 좋다.2. 사물을 어림잡아 헤아림. - 그 건물이 높이가 가늠이 안 된다. ‘가름’과 ‘갈음’은 동사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가 붙어서 명사가 파생되었지만, ‘가늠’은 그 자체가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단어다. 여기서 다시 의문을 가져본다. 그러면 ‘긴 물체의 굵기나 너비가 보통에 미치지 못하고 얇거나 좁다.’는 뜻의 형용사 ‘가늘다’의 명사형은 ‘가늠’이 아닐까? 다음을 읽어보자. ○ 바디(베틀, 가마니틀, 방직기 따위에 딸린 기구의 하나. 가늘고 얇은 대오리를 참빗살같이 세워, 두 끝을 앞뒤로 대오리를 대고 단단하게 실로 얽어 만든다. 살의 틈마다 날실을 꿰어서 베의 날을 고르며 북의 통로를 만들어 주고 씨실을 쳐서 베를 짜는 구실을 한다.-필자가 붙임)란 베틀의 핵심 부분으로 베의 굵고 가늚을 결정한다(동아일보, 2008년 10월 30일). ○ 난엽체(蘭葉體) 또한 난초의 이파리가 지닌 굵고 가늚의 모양새를 본 따 서예에 탄력적인 형상미를 부여, 최초로 개발한 서체다(주간한국 매거진, 2008년 4월 25일). ○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두텁고 가늚, 획의 둥긂과 각짐’이 조화를 이룬다(세계일보, 2007년 12월 2일). 위의 예문에서 보듯이 형용사 ‘가늘다’의 명사형은 ‘가늚’이다. 우리말에 받침으로 ‘ㄻ’의 표기가 익숙지 않아서 어간의 ‘ㄹ’을 빼고 명사형을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주의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말에서 명사형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용언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 -음’을 붙이면 된다. 다시 말해서 어간이 모음으로 끝나면 ‘-ㅁ’이 붙는다. ‘가다/오다/다르다’는 명사형이 ‘감/옴/다름’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에도 ‘-ㅁ’이 붙는다. ‘돌다/만들다/갈다/달다/흔들다/베풀다’는 ‘돎/만듦/갊/닮/흔듦/베풂’이 된다. 마지막으로 어간에 ‘ㄹ’을 제외한 받침이 있는 말에는 ‘-음’이 붙는다. ‘먹다/젊다/검다/속다/접다’는 ‘먹음/젊음/검음/속음/접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