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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지난 주 서울교육청은 그동안 교육전문직으로만 보임하던 서울교육연수원장과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 등에 ‘3급 일반직 지방공무원’을 보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서울특별시교육청 행정기구 설치 조례 시행규칙 일부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동안 교육전문직인 ‘장학관 또는 교육연구관으로 보하거나 개방형전문직위로 한다’고 돼 있던 현행 규정에 은근슬쩍 3급 일반직 공무원을 끼워 넣은 것이다. 일반직 공무원이 원장으로 보임될 수 있는 길을 공식적으로 열어놓고자 하는 의도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입법 예고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양 기관이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수업자료 개발, 교육과정 연구 등 그 책무가 고도의 학교 현장성과 교육 전문성을 요구하는 만큼 이를 이끌 원장은 현장 교육경험이 풍부한 ‘전문직’이 보임돼야 함에도 이를 간과한 처사이다. 특히 각시도 교육연수원장과 교육연구정보원장, 과학직업교육원장 등은 전문직 중에서도 전문직이 맡아야 하는 교육전문성이 충실히 담보되어야 하는 직위이다. 사실 이명박 정부에 이르러 학교의 자율적인 운영을 위한 효과적 지원체제 구축을 위해 지방교육행정기관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하여 왔다. 이는 지방교육행정기관인 시·도교육청과 지역교육청의 학교지원 기능 강화로의 역할 변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지원 기능의 핵심은 교육컨설팅, 장학 등의 학교 지원으로 교육전문직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교육 지원, 학교지원 및 교직원의 교육전문성을 함양하는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 교육연수원과 교육연구정보원, 과학직업교육원 등이다. 일반직 공무원 등 직급이 높다고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위가 절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서울교육연수원장은 서울교육청 소속 7만 명에 달하는 교원 및 지방공무원, 사립학교 일반직원의 각종 연수를 관장하는 중요한 직무를 수행한다. 또한 서울교육연구정보원장은 교육과정‧교육평가, 교수 학습 및 평가 자료 개발, 교원 전문성 신장 자료의 연구‧개발‧보급, 인성‧진로교육 연구, 학교평가, 이러닝에 관한 사항 등을 관장한다. 이 같은 직무는 일선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핵심적인 업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책무의 중함을 넘어,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의 다양한 측면과 이해관계를 이해하고 현장의 요구를 꿰뚫어 부응하는 고도의 전문성과 현장성이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연수원과 연구원이 학교교육을 지원‧조성하는 조직이어야 하고, 교육전문직이 보임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서울교육청의 입법 예고는 교육과 교육 행정이 구분되어야 하는 직위임을 간과한 것이다. 이번 서울교육청의 입법예고에서 교육연수원장과 교육연구정보원장에 일반직 공무원 3급 이상을 원장에 보임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은 학교교육을 지원하는 전문가 중심의 교육행정체제 구축을 바라는 현장 정서를 저버리고 일반행정 위주의 관리행정체제를 고착화 시킬 우려가 있다. 교육현장 경험이 없는 일반직 확대 일로의 인사 때문에 교육정책이 일반행정직 중심으로 수립‧진행되고, 제도와 정책이 학교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현장의 비판이 비등해지고 있음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미 서울시교육청 뿐만 아니라 교과부를 위시한 각 시도교육청의 조직과 인력이 일반직 위주로 확대되면서 현장의 불만이 가중돼 왔다. 이에 교육계에서는 전문직 보임 확대를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 그럼에도 되레 전문직의 영역에 일반직 보임을 확대하려는 것은 불필요한 갈등을 초래하고, 나아가 서울교육 발전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가 이번 서울교육청의 입법예고에 유의해야 할 점은 서울교육은 전국교육의 수범이고 표본이며 중핵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만약 이와 같은 서울교육청의 입법예고가 그대로 확정되어 교육연수원장과 교육연구정보원장에 일반직 공무원이 보임된다면, 그러한 사례가 16개 타 시ㆍ도 교육청에 일반화될 것은 명약관화하다는 점인 것이다. 물론 민선이고 직선으로 선출된 시ㆍ도 교육감의 인사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인사권이 존중받고 신뢰받기위해서는 종합젓 관점에서 현실을 감안한 합리적인 인사여야 한다. 또 교육감의 인사권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조직과 직무에 걸맞은 인사를 중용하는 전문성과 합리성에 입각해야 할 것이다. 투명성과 공정성 담보는 말할 것도 없다. 학교 교육의 실질적인 지원과 조성이 교육연수원, 교육연구정보원 등 두 기관의 핵심 기능이라는 점에서 교육경험이 풍부한 당연히 교육전문직이 보임돼야 하며, 나아가 기관 내 인력 구성도 전문직 보임을 확대해 현장감 높고 학교 지원에 충실한 교육행정을 구현하길 바란다. 분명한 사실은 양 기관이 교육전문성 신장을 위한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지 결코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여곡절 속에 새로 출범한 문용린 서울교육감이 이전의 곽노현 교육감의 교육 실험으로 야기된 시행착오를 답습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교육 정책은 연습이 아니다. 고도의 전문성과 기능을 바탕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문 교육감은 선거기간 학교현장을 중시하고 교원의 사기를 높이겠다고 공약했다. 능력을 가진 인재에게도 기회를 열어주는 것은 지당한 것이나 이번 입법예고의 핵심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다라서 서울교육감은 일반직 보임 규정을 철회하고 전문 교육행정을 펴는 것이 공약 실천의 길임을 숙고해야 한다. 특히 그동안 일반직 확대일로의 인사 때문에 교육정책이 일반행정직 중심으로 수립·진행되고 제도와 정책이 학교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현장의 비판이 많은 게 사실이다. 교육 전문 영역에 대해 일반직 진출의 문호를 열 것이 아니라 교육계의 지적대로 교육전문직 보임을 확대해 현장감 높고 학교 지원에 충실한 교육행정을 구현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서울교육은 어렵기는 하지만 서서히 발전해 가는 개선의 길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서울교육이 대한민국 교육의 향도라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커텐을 열었다.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맑은 하늘이다. 하늘은 맑고 더없이 깨끗하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선생님의 삶도 이러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자연은 언제나 나의 스승이다. 깨끗한 삶은 누구나 좋아한다. 맑은 하늘에 티 하나 없는 것같이 흠 하나 없는 삶은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도 유익이 된다. 창문을 통해 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말끔히 단장된 운동장이다. 인조잔디로 완성된 운동장은 학교다운 학교임을 나타내 보인다. 무언가 모자라보였고 부족해 보였는데 이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 보충해주는 역할이 우리 선생님들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운동장 둘레의 펜스다. 무언가 엉성해보였는데 펜스가 울타리 역할을 하는 걸 보니 든든하다. 우리 선생님은 언제나 학생들의 울타리 역할, 보호막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말없이 사시사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방패 역할을 우리 선생님들은 잘 감당한다. 그러니 선생님은 믿음직스러운 분이다. 학생들이 의지하고 학부모님들이 기대는 분이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일하시는 분들이다. 이분들은 새벽을 깨운다.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바쁘게 움직인다. 이분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하나는 성실함이다. 변함이 없다. 규칙적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는 추위를 잘 이겨냄이다. 춥다고 일을 멈출 수 없다. 아무리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옷을 하나 더 걸치고 모자를 쓰고서라도 쉬지 않는다. 송백은 서리와 눈을 견디어내듯이, 이분들은 잘 견디어낸다. 이분들은 감춰진 보배다. 진흙 속에 감쳐진 보배다. 아무리 더러운 흙도 이들을 더럽게 할 수 없다. 값진 보배가 따로 없다. 이분들과 같은 분이다. 이분들을 닮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또 이분들에게 배울 점은 부지런함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다시없는 보배”라고 명심보감 정기편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을 실천하는 분이 바로 이분들이다. 근면이 바로 보배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런데 실천이 따르지 않을 때가 많다. 새해에는 근면을 우리 선생님들의 한 덕목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명심보감은 분명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보배로운 책이다. 지침서다. 안내서다. 이 책을 통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학생들에게 인성교육을 시켜나가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우리학교에서는 4년차 명심보감을 통한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짧은 시간이지만 몇 구절의 말씀을 음미해 보았다. 오늘의 가르침은 우리 선생님들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도움을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말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나를 착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곧 내게 악이요, 나의 나쁜 점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곧 나의 스승이니라”고 명심보감 정기편에서 가르치고 있다. 남의 결점을 지적해주는 사람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도와주는 분이다. 무턱대고 칭찬만 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게 되면 유익한 점도 있지만 반면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병들게 만드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칭찬과 지적이 동시에 이루어지면 효과가 더 날 것 같다. 학생들의 결점을 지적해 줄 분은 선생님밖에 없다. 다른 분들의 말은 잘 듣지 않는다. 자식에게 부모님이 말씀하면 귀밖에 듣는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대든다. 하지만 선생님이 말하면 귀담아 듣는다. 아직 선생님의 약효는 유효하다. 학생들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말(言語)을 잘 사용해야겠다.
며칠 전 경북의 한 사립전문대가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고교 교사들에게 금품을 뿌렸다가 적발됐다. 검찰은 "학생 1인당 20만원씩의 사례비를 정해 교수와 교사가 학생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대구지검 포항지청은 이 같은 뇌물공여 협의 등으로 이 대학 총장을 구속 기소하고, 범행을 도운 입학처 교수·직원 6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또 학생이 지원하도록 권유한 뒤 이들로부터 돈을 받은 경북 지역 고교 교사 48명을 적발, 이 중 1,000만원 이상을 받은 7명을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고, 1000만원 미만을 받은 나머지 41명은 경북교육청에 비위 사실을 통보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이 같은 학생 거래를 속칭 '두당(頭當) 치기'라고 불렀다. 구속된 이 대학 총장 등은 지난 2008년 입시를 겨냥, 2007년 4월 홍보 교수들을 고교 3학년 부장 교사들에게 보내 "학생 모집이 완료되면 1인당 20만원씩의 사례비를 지급하겠다"고 제의했다. 이후 학생 모집이 끝난 이듬해 2월 고교별로 입학한 학생 수를 계산해 현금을 포장해 전달했다. 해당 대학의 이런 도덕적 해이에 휘말린 이 지역의 한 교사는 약 3년 동안 239명을 입학시켜준 뒤 4780만원을 받았고, 또 다른 교사는 같은 기간 3차례에 걸쳐 2480만원을 받았다. 1000만원 이상을 받은 교사 7명 중 4명은 공립, 3명은 사립고교 교사였다. 돈을 받은 부장 교사들은 고교 졸업반 담임교사들과 나눠 갖거나, 유흥주점 등에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검찰은 밝혔다. 매년 지원자 수와 등록률이 감소하던 이 대학은 2008년 돈을 뿌린 이후 2009년 2581명, 2010년 3377명, 2011년 3846명 등으로 지원자 수가 늘었다. 이 대학은 또 교직원 39명을 재학생으로 둔갑시키고, 교직원 지인의 명의를 빌려 입학원서를 작성한 뒤 제적시키는 수법으로 정원 충원율 등 대학 평가 지표를 부풀려 국고보조금 5억6800여만원을 타낸 혐의도 받고 있다. 육영을 근본적 목적으로 하는 대학의 도덕적 해이가 갈 데까지 간 것이다. 문제는 이런 대학의 비리와 부정이 비단 이 대학만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 학교처럼 학생 정원 채우려고 고교 교사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부실대학들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매년 초에는 고교 교무실에는 대학 교수들이 찾아오는 것이 이제 평범한 일이 된 지 오래되었다. 교수 손에는 커피믹스와 음료수 박스 등 금품이 들려있다. 교수들은 쭈뼛거리며 고교 졸업반 담임 교사들에게 당해 학교 졸업생의 자기 대학 진학을 부탁한다. 교수들은 또 수시와 정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다시 고교를 찾아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부 고등학교에는 '교수 출입 금지'라는 경고문이 내걸리는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하곤 한다. 일부 대학 교수들은 고교 졸업반 담임 교사들에게 회식을 시켜주고 회식 후에는 현금 봉투 등 금품을 건네는 경우도 있다. 입학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부실 대학들이 늘어나면서 일부 대학에서는 교수가 고교로 찾아가 “신입생을 보내달라”며 교사들에게 로비를 하는 것이다. 대학들이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고교 교사들에게 '로비'를 하는 관행은 수십년 째 이어져 오고 있다. 1990년대 후반 대학이 급증하면서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게 된 대학들이 '졸업장 장사'를 하기 위해 각종 수법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현상은 앞으로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사실 부실대학의 학생모집 부담은 대부분 교수들에게 떨어진다. 대학 교수가 학생 모집책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대학들은 교수들에게 각자 모집 학생수를 할당하기도 한다. 일부 대학은 신입생 유치 실적을 재(再)임용에 반영, 교수들 사이에서 "교수가 영업사원하고 다를 바 없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나온다. 학문 연구에 진력해야 할 교수가 학생 장사(?)를 위한 ‘영업 사원화’하고 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에 우리 모두는 반성해야 할 것이다. 대학들의 고교 교사 로비 백태는 매년 국정감사에서도 문제로 드러난 곤 하였다. 대학의 각종 접대성 로비도 혀를 찰 정도로 치졸하고도 치열하다. 형식상 입학설명회도 로비의 통로였다. 일부 고교에서는 노골적으로 대학의 로비를 경쟁적으로 부추기기도 한다. 대학 교수들의 로비 관행은 앞으로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저(低)출산 영향으로 대학들의 학생 모집이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10년 이내에 대학 입학 정원과 고교 졸업 정원이 역전하기 때문이다. 학생이 부족한 대학은 도태될 수 밖에 없는 우리나라 대학의 미래이기에 이와 같은 대학의 도덕 불감증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교수와 교사들 사이에서 이런 부정적인 거래가 이뤄지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교육이 현 주소이자 서글픈 자화상이기에 그저 씁쓸하기만 한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곧고 바르고 진솔하라’는 것인데, 대학과 대학 교수의 ‘학생 장사(?)’는 이와 같은 정직, 근면, 성실 등과는 어긋나도 한참 어긋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인 것이다.
젊은 선생님들, 특히 여선생님들 시부모님께서 정성들여 해드린 음식을 잡수시다가 "음식이 맛이 없다." "제 맛이 아니야."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면 섭섭해 하지 마세요. 다음 글을 읽으시면 이해가 될 거예요. 부모님의 음식타박 대처법 이런 비밀이 시니어세대들이 자녀나 며느리들에게 음식 타박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음, 맛이 있다. 그런데 옛날 맛이 아니야!” 시부모님이 이렇게 말을 하셨다면 그 말을 들은 며느리나 자녀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정성껏 해드렸더니 옛날 맛이 아니고, 맛이 없다니?’ 하면서 은근히 부아가 날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말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면 무슨 말이냐고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화의 원리를 안다면 바로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화하면서 모든 기관의 기능이 쇠퇴하게 마련이다. 그중에서 맛을 느끼는 미각세포인 미뢰는 30세부터 매년 1%씩 감소하게 되어 있다. 만약에 지금 어르신의 연세가 70세라면 이미 40% 이상의 미뢰가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이미 60% 밖에 느낄 수 없는 미각으로 옛날의 맛을 찾는다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에 기어이 그 맛을 느끼고 싶다면 그 맛 성분을 40%정도 더 나도록 요리를 해야 한다. 국을 끓일 때 고기를 40% 정도 더 넣어서 끓인다면 아마도 국의 맛을 조금은 옛맛을 느끼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보통으로 해서 옛맛을 느끼시도록 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겠는가? 다른 기관도 마찬가지이다. 70세를 기준으로 신체의 쇠퇴정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시력--노화 가장 빨라-적,황색이 구별 쉬워, 원시,70세 이상 95%가 백내장 (나) 청력--40세부터 퇴화--65세(55%), 70세(58.7%), 80세(66%) 청력 손실 (다) 미각--미각수용기(미뢰) 감소--30세 부터 매년 1% 수준, 70세(40% 손실) (라) 후각--40세부터 감소, 70대에 50% 저하 이제 이러한 노화의 메커니즘을 알게 되었다면, 노령인구인 어르신들께서는 젊은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은 함부로 하시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잘 안보여! 좀 크게 써봐!” “잘 안 들려 똑똑히 말해봐!” “옛날 맛이 아니야!” “맛이 없어!”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이런 말은 당연히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자신의 신체가 노쇠하였음은 느끼지 못하고 남의 타박을 하는 것은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젊은 자녀나 며느리들은 어르신들의 신체적인 변화가 그러하셔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이지, 자신의 재주가 모자라거나 자신의 음식이 잘 못 되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섭섭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어르신들의 말씀을 섭섭하게 듣지 않아도 되는 말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이고, 기분 나빠 하였다는 것을 생각하여서 하는 소리이고,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르신들은 자녀나 아랫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몸이 변화했음을 인식하고, 좀 더 조심스럽게 말을 해야 할 것이고, 젊은이들은 어르신들의 말씀이 자기 몸의 변화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섭섭해 할 일이 아니다. 가정의 화목과 평화를 위해서 어르신이나 젊은이들은 노화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여서 서로 조심하고, 서로 섭섭해 하지 말자.
오늘 드디어 67회 헌혈대에 누웠다. 내일부터 헌혈하고 인증 샷을 날리면 이벤트에 응모할 수 있는데, 하루가 빨랐지만 시내에 나온 김에 하고 가야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 헌혈을 시작 할 때에 요즘처럼 헌혈의 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헌혈에 대한 생각들이 별로 활발하게 권장도 되지 않았던 1980년대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정확한 말짜를 알기 위해 헌혈증명서 발급을 신청하고 있지만 얼른 출력이 되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다. 다만 1985년 1월 12일 방학 동안에 용기를 내어서 적십자혈액원을 찾아갔다. 나는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마포에 있던 혈액관리본부당시는 혈액원을 직접 찾아가서 첫 헌혈을 시작하였다. 헌혈을 할 시간이 거의 없어서 기회를 갖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경기도 파주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왕복 3시간이상이 소요되는 출퇴근 시간 때문에 헌혈을 할 시간에 도착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방학 중에 수원 교육위원회나 교총경기도지부에 출장을 가는 날이면 수원 역전의 헌혈의 집을 찾아서 헌혈을 하곤 하였다. 그러니 1년에 한 두 번이 고작이었다. 방학 때나 출장이 걸려야 헌혈을 할 수 있었으니 기회가 잘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85년에 시작한 헌혈 기록은 2000년이 되어도 겨우 11번을 기록할 정도로 매년 1회 조차 넘기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내가자신의 할 수 있는 봉사라고 생각되는 헌혈을 좀 더 자주 하자고 생각을 한 것은 2001년 부터였나 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해오던 헌혈이라도 포기를 해야 할 나이인 50대 후반의 일이었다. 이 무렵부터 전혈 보다는 혈장을 헌혈하므로 해서 최대 1년에 20회까지 헌혈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전혈이라면 최대 5회인데 4배나 기회가 더 주어지는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러는 동안 전혈로 32회를 한 뒤부터는 혈장을 헌혈하기 시작한 것이 이제 오늘로 35회를 하게 되었다. 이 혈장을 헌혈하면 15일 이 지나면 다시 할 수 있으니 한 달에 두 번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헌혈의 연령 제한이 만 65세로 되어 있어서 더 이상은 헌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가서 헌혈을 하려하자 연령 초과라고 헌혈을 받아주지 않은데 몹시 섭섭하였다. 이제는 헌혈도 할 수 없는 영감님이 되었구나 싶으니 서글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항의를 하는 글을 써 올렸다. 2008년 2월 23일 만 64세가 되기 4일 전에 내 블로그에 올린 섭섭하다는 내용을 쓴 글을 오마이뉴스와 혈액관리본부에도 보냈다. 관련기사 보기 A href="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suntaefolder=23list_id=9197660"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suntaefolder=23list_id=9197660/A 그랬더니 ‘만 65세까지 이니 1년간 더 헌혈을 하셔도 됩니다.’ 하는 소식이 오고 나서 꾸준히 헌혈을 해오고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약 1년이 지나서 나의 이메일로 연락이 왔었다. 만 70세까지 헌혈을 할 수 있게 규정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이 이야기도 내 블로그와 오마이뉴스에 올려서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 드리기로 하였다. 관련기사 보기 A href="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suntaefolder=8list_id=10554531"http://blog.joinsmsn.com/media/folderlistslide.asp?uid=ksuntaefolder=8list_id=10554531/A 이렇게 되어서 만 70세가 되는 2014년 2월까지는 아직도 헌혈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오늘 67회째의 헌혈을 하였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몇 번이나 더 할는지는 모르지만 내 목표인 70회는 넘기는데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제 겨우 3회가 남았을 뿐이니까 말이다.
예전에는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생활수준이 낮아서인지 겨울엔 여행을 하지 않는 계절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사계절 모두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행하면 봄철에 꽃구경을 하거나 가을철에 울긋불긋 단풍구경을 다니는 여행 철이라고 인식되어 왔다. 요즘도 봄과 가을은 관광 철이라 하여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 인파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빠져나간다. 학생들도 봄과 가을에 소풍을 실시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눈꽃이 온산을 뒤 덮고 나뭇가지에 상고대(霧氷, 樹氷)를 보며 감탄을 한다. 등산 인구가 늘면서 겨울산행을 하는 등산객도 많이 늘어났다. 설경을 감상하면서 눈길을 걷는 재미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에 충분해서 인 것 같다. 올해 초 친구들과 충주산성으로 올라가는 임도(林道)를 따라 눈길 산행을 한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한명의 등산객이 밟고 올라간 눈길을 따라 이야기를 나누며 올라갔다.등산화로 눈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뽀드득’소리가 정겹게 들렸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덮인 설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얼마나 살짝 내려왔으면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눈이 고스란히 쌓였을까? 자연이 빚어낸 또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것 같아 어느새 내 마음도 깨끗한 눈처럼 맑아지고 소박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겨울여행을 선 듯 나서지 못하는 것은 눈길 안전사고가 걱정이 되어 기차여행을 선택하기도 한다. 기차를 타고 차창 밖을 내다보며 스쳐지나가는 강산의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는 또 다른 추억여행이 되기에 충분하다. 수년 전 둘째 딸이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함께 세 명이 태백산으로 밤기차를 타고 겨울여행을 다녀왔던 추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어린 시절 경주 선산으로 성묘를 다닐 적에 중앙선 기차를 타고 가면서 삶은 계란을 먹던 추억이 새로워져 사먹었으나 그 시절의 맛을 느끼지 못하였다. 밤 이라 산천의 풍경은 감상할 수 없었지만 야간열차를 타고 어둠속에 태백역에 내렸다. 태백산 등산로 입구 찜질방에 들어가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등산객이 너무 많아서 찜질도 제대로 못하고 잠을 설치며 새벽을 맞이하였다. 눈길을 따라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을 맞으며 산을 오르다보니 주목군락지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설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진을 찍으며 좋아하는 딸과 아내는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제단(天祭壇) 부근에서 겨울 산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눈꽃축제가 열리는 축제장으로 내려오니 인산인해를 이뤘다. 눈 조각과 얼음으로 지은 축제장을 둘러보는 여행은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올겨울도 겨울축제장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추운 겨울을 이기는 모습에서 삶에 활기를 찾는 것 같다. 산천어, 송어 등 얼음구멍에서 낚시를 하는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았다. 겨울스포츠 인 스키장도 젊은 인파가 넘쳐나는 계절이다. 스키어들은 눈 덮인 슬로프(Slope)를 질주하는 모습은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패턴이 눈(目)으로 경치를 보며 즐기는 여행에서 요즘은 직접 체험하면서 즐기는 여행으로 바뀌었다. 단순한 관광 형 여행에서 레저, 스포츠를 직접 즐기는 체험 형 관광이 많은 사람의 흥미를 이끌어내고 농한기에 자치단체의 경기를 활성화 시키는데 한몫을 단단히 하는 곳이 많아 졌다. 겨울철 맛 집도 관광객을 유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느 음식점이 잘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 불원천리(不遠千里) 불구하고 찾아간다. 여행은 같은 장소라도 언제, 누구와 함께 가느냐에 따라 여행의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많은 인원이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가는 여행도 즐겁지만 가족단위, 또는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하는 즐거움도 있다. 일상을 벗어나 부부가 여행을 떠나면 또 색다른 정을 느끼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는 것 같다. 나이 든 사람들의 겨울 여행지로는 온천이나, 찜질방, 숯가마 찜질, 맛 기행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즐거운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역시 내 집이 제일 좋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상 속에 묻혀 사는 내 집은 삶의 안식처이고, 새롭고 짜릿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는 옹달샘처럼 새로움을 채워준다.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충전소를 찾아 추운날씨에도 여행을 즐기기 위해 떠나는 겨울여행의 방랑자(放浪者)가 늘어나고 있는 계절이다.
漢字속에 숨은 이야기 (26) 형성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회의(會意)문자이다. 나무 木과 삼수변(氵)部와 아홉 구(九)의 합자(合字)로 되어있다. 옷감을 물들이기 위해 나무에서 취한 물(즙)에 홑 단위로 가장 큰 수인 九를 썼다. 여기서 구(九)는 아홉 번이 아니라 몇 번씩이나 여러 번 되풀이 하여 넣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염색(染色)하다. ‘적시다, 담그다.’ 로 쓰며 ‘병균 같은 것이 옮다, 또는 더러워지다. 전염(傳染)되다.’ 로도 쓰고 있다. 염(染)자가 들어가는 사자성어(四字成語)로는『染指之物』이 있다. ‘染指’의 뜻은 손가락을 솥 속에 넣어 국물의 맛을 본다.’ 는 뜻으로 ‘분에 넘치게 가지는 남의 물건(物件)’을 비유(比喩)하여 과욕을 버리라는 교훈이 숨어있다. 염(染)자를 쓸 때 구(九)를 써야 맞는데 괜히 허전하다고 점을 찍어 환(丸)으로 잘 못 쓰는 경우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주희야, 이제 방학도 거의 끝나고 새로운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지금도 열심히 공부하겠지? 넌 너만의 스스로 생각하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면서 너를 지원해 줄 부모님이 계시고, 힘들때 네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언니, 친구가 있다니 너에겐 참 좋은 환경인 것 같구나. 넌 평소에도 '오랫동안 꿈을 그리면 사람은 마침내 그꿈을 닮아간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너의 생각에 적극 동의한다. 인생이란 자기가 생각한 꿈의 크기 만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네가 이루고자 하는 꿈이 책 써보기, 외교관 되기 ,대학에서 강연해 보기 등 여러 가지꿈을 갖고 있기에 오늘은 네가 롤 모델로 삼아도 좋은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하버드 로스쿨 교수로 이력은 화려하다 못해 경이롭게 느껴지는 석지영(40) 교수이다. 석 교수는 어릴 때부터 폭넓은 독서, 학부와 대학원에서의 문학공부, 발레와 피아노를 배우며 쌓은 예술적 감각이 어우러지며 세계가 주목하는 법조인이 됐다. 그녀는 6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 영재학교 헌터스쿨을 나와 미국 예일대에서 학사(영문학, 불문학)를 마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불문학)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 한 그는 미국 대법원 법률서기, 뉴욕 맨해튼 검찰청 검사를 거쳐 33세에 하버드 로스쿨 첫 한국인 교수로 임용됐다. 37세엔 아시아 여성 최초의 하버드대 법대 종신 교수가 됐다. 이로써 놀라운 한국인의 저력을 과시한 것이다. 자전적 에세이집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를 출간하였는데 그는 어떤 교육을 받았고, 어떻게 이처럼 놀라운 성취를 했을까 궁금하지 않니? 석 교수는 26세 전에는 법 공부를 한 적이 없단다. 청소년 시절은 독서와 발레, 피아노 공부로 시간을 보냈단다. 그는 미국으로 이민을 온 뒤 매일 방과 후 어머니와 함께 공공도서관에 갔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로 시작된 독서는 플라톤과 호메로스로까지 이어졌다. 방학 땐 하루에 20권을 읽었다니 놀랄만하지! 집에선 식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책만 읽어 어머니와 말다툼을 할 정도였다니 얼마나 그녀가 책과 살았는지 짐작이 가는구나. 헌터스쿨을 다닐 땐 수업을 빠지고 학교 화장실에서 문을 걸어 잠근 채 예이츠, 에밀리 디킨슨 등의 시를 읽기도 했다. 13세부터 3년간은 세계적인 발레학교인 ‘아메리칸발레학교’에서 발레를 배웠다. 줄리아드 예비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전 사랑하는 ‘놀이’를 하며 자랐어요. 다양한 모험을 하도록 자유를 허락한 부모님 덕분이었죠. 에세이집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의 영어제목은 ‘A Light Inside’입니다. 독서와 예술에 푹 빠져있던 학창시절은 제 내면세계를 충만하게 만들어준 시간이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데 한마디로 법에 문학을 접목한 ‘융합인재’라 할 수 있지. 석 교수는 “독서와 다양한 예술적 경험, 그리고 이민을 가면서 생기게 된 다른 언어에 대한 호기심 덕분에 시작한 문학공부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이구나. 80년간 풀리지 않던 천체운동의 원리를 연금술의 개념을 물리학에 접목해 증명한 뉴턴,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기술(IT)을 접목해 아이폰을 만든 애플의 고 스티브 잡스처럼 석 교수는 요즈음 이야기 되는 ‘융합인재’라고 말할 수 있다. 석 교수는 서로 다른 분야를 법에 접목한 창의적 시각으로 자신만의 분야를 개척했다. 2010년 허버트 제이컵 상(미국 법·사회협회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법률서적)을 받은 저서 ‘법의 재발견(At Home In the Law)’이 대표적 예이다. 문학박사 시절 집(고향)의 개념과 의미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로스쿨에 와서 집이 사적인 공간이 아닌 공적인 공간이라는 개념을 형법에 적용한 시각을 제시해 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정폭력 등 집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또한 하버드 로스쿨에서는 ‘예술공연과 법’이라는 새로운 강의를 도입했다. 뉴욕시티발레단 수석무용수와 함께 강의하는 이 수업을 통해 지식재산권과 노동권에 초점을 맞춘 공연법과 관련된 문제 등을 가르친 것이다. 오랜 문학공부는 법조문에 쓰인 단어와 표현을 정확히 독해하는 능력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석교수에게 많은 사람들이 천재라는 칭호를 주기 쉽지만 석 교수는 자신을 타고난 ‘천재’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헌신적인 부모님 덕분에 기회가 주어졌고 운이 좋았을 뿐”이라며 “사회적, 학문적 성과로 다른 사람보다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고 겸손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인생에서 화려한 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열정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한마디는 '즐길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라'는 것이다. “저는 말하기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매일 조금씩 반복하면서 극복해냈어요. 무엇이든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쉬워질 때까지, 아니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하고 또 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로 마지막 멧세지를 젊은이들에게 전하였다.
교원연수, 수업자료 개발 등 전문교육행정 영역 ‘3급 일반직’ 끼워 넣기는 현장 정서 외면한 것 서울시교육청(교육감 문용린)이 교육연수원장과 교육연구정보원장에 ‘3급 일반직 지방공무원’을 보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서울시교육청 행정기구 설치 조례 시행규칙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데 대해 한국교총과 서울교총(회장 이준순)이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전문 교육행정 영역을 다루는 연수원장직에는 현행대로 ‘교육 전문직’이 보임돼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개정안은 시교육청이 25일 입법예고한 것으로 ‘장학관 또는 교육연구관으로 보하거나 개방형전문직위로 한다’고 규정돼 있는 현행 시행규칙 제25조 연수원장 자격 기준에 ‘3급 일반직 지방공무원’을 추가해 원장직에 일반직도 진출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대해 교총과 서울교총은 논평을 내고 “일반직 3급을 원장에 보임할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은 학교교육을 지원하는 전문가 중심의 교육행정체제 구축을 바라는 현장 정서를 저버리고 일반 행정 위주의 관리행정체제를 고착화 시킬 우려가 있어 철회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교총은 “이는 다른 16개 시·도교육청이 원장직에 전문가인 교육전문직으로만 보임하는 것과도 배치되는 사항”이라며 “교육연수원과 교육연구정보원은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수업자료 개발, 교육과정 연구 등 고도의 학교 현장성과 교육전문성을 요구하는 만큼 이를 이끌 원장은 현장 교육경험이 풍부한 전문직이 보임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울러 “일반직 확대일로의 인사 때문에 교육정책이 일반행정직 중심으로 수립·진행되고 제도와 정책이 학교 현실과 동떨어지고 있다는 현장의 비판을 귀 기울여야 한다”면서 “전문영역에 대해 일반직 진출의 문호를 열 것이 아니라 교육계의 지적대로 전문직 보임을 확대해 현장감 높고 학교 지원에 충실한 교육행정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총의 지적에 대해 시교육청 관계자는 “능력을 가진 인재에게도 기회를 열어주라는 지난해 말 감사원의 권고사항을 반영한 것”이라며 “아직 입법예고 기간 중인 사안으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 조항 삭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개정안 입법예고에 대한 의견수렴은 30일까지다.
한국교총(회장 안양옥)과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29일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나라사랑교육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식을 갖고, 초·중·고 학생들이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와 국가 안보 중요성을 함양시키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박 처장은 인사말을 통해 “올해는 6·25 정전 60주년의 해 다.양 기관이 노력해 교육현장에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안 회장은 “교사연수 프로그램들을 개발 해 교사들도 다시금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국가보훈처는 국가를 위해 헌신한 유공자 및 보훈가족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개발·계승·지원 하는 등 법령이 정한 보훈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지난 1월 29일 그동안 일선 학교 교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번 개정안은 단위학교와 교육청에 각각 교권보호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육감에게 교육활동 보호 시책을 수립‧시행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 개정안은 지난 해 8월 발표된 ‘교권보호 종합대책’의 후속 조치로 2월초 공포돼 3개월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금년 5월초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특히 이 개정안은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으로 기존에 유명무실했던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가 ‘학교교권보호위원회’로 개편되고 ‘시도교권보호위원회’ 설치 근거도 마련함으로써 ‘교권보호 종합대책’의 실효성을 1차적으로 확보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사실 그동안초.중.고교 각급학교에 설치돼 있는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는 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대한 최소 기준이 미흡해 대다수 학교에서 위원이 교원으로만 구성돼 있어 학생‧학부모와의 실질적인 분쟁 조정이 어려웠다. 또 교원의 교육활동과 관련한 분쟁 조정만을 담당하는 한계가 있고, 일부 역할은 학운위 등 타 위원회와 중복되는 면도 존재했다. 이 때문에 대다수 학교가 5년 동안 단 한번도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를 개최한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이번에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함으로써 ‘학교교육분쟁조정위원회’가 ‘학교교권보호위원회’로 개편돼 교원의 교육활동 관련 분쟁 조정뿐만 아니라 교육활동 침해 예방 대책 수립, 교육활동 침해 학생에 대한 선도 조치 등에 관한 사항도 심의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학교교권보호위원회 위원은 교원 외에도 학부모 및 지역사회 인사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하고, 위원 정수, 위원장 선출 및 회의 소집 등의 기준도 구체적으로 마련해 학교현장에서 실질적으로 교권을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교원들이 교권을 실질적으로 보호․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단위학교 차원의 분쟁 조정이 곤란한 경우, 교육청이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상대적으로 미약해서 문제가 되었던 부분도 보완됐다. 규정 개정안에 따르면 ‘학교교권보호위원회’에서 조정되지 않거나 ‘학교교권보호위원회’가 없는 학교에서 발생한 분쟁은 시‧도교육청에 신설하는 ‘시‧도교권보호위원회’에서 변호사․법학 교수 등 전문가 논의로 조정하도록 하고, 교육감이 수립하는 교육활동 보호에 대한 시책을 심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교육감에게 교육활동 보호시책을 수립․시행하도록 의무를 부과한 것도 큰 의미가 있다. 교육감은 교육활동 보호 전담기관 및 조직 구성․운영, 교육활동 침해 교원에 대한 치료․전보 등 보호조치, 교육활동 침해에 대한 조사 등의 시책을 마련해 시행해야 한다. 그동안 교원들은 욕설, 폭행, 명예 훼손 등 교권 침해에 대해 신분적 특성상 학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일반 형사법적 대응 자체가 어려웠다. 윤리적 통제는 교육 관련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여되어야 하는데, 실질적으로 교원들에게는 더욱 높은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 사회의 요구를 교원들은 묵묵히 감수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의 개정은 저하된 교원의 사기를 높이고 교원의 교육활동을 보호함으로써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교사의 교육권과 학생의 학습권을 동시에 보호하는 바람직한 장치로서의 역할을 할 것으로 사료된다. 현재 세계적으로 공교육 정상화와 함께 교권 보호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교권침해에 대한 적극적 대처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이번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에 즈음하여 ‘교권보호 종합대책’이 학교와 교육 현장에 정착되도록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교권보호법 및 교육기본법 개정안 등 관련 법률이 조속히 통과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이번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에 즈음하여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규정이라도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준수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현재처럼 교권이 땅에 떨어진 것은 제도와 행정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이 제도와 행정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잘못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결국 ‘교원예우에 관한 규정’ 개정 내용은 그 내용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를 지키려는 교육관계자들의 인식과 행동이다. 그러므로 교권보호와 교권회복을 위해서는 교원, 학생, 학부모, 학교운영위원, 지역사회 인사, 교육전문직 등 교육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교권보호에 대한 인식과 의식 전환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1951년9월 1일에 전남 보성군 율어국민학교에 1학년에 입학을 하였다. 왜 9월 입학이었느냐고 묻겠지만, 1951년에 우리나라에는 9월 학기제가 시행되었던 같다. 그것도 1951년만이고 1962년에는 4월 학기제로 바뀌었다는 것을 내가 다니던 모교의 연혁을 보면 알 수 있다. 1951년 7월 18일에 모교의 제4회 졸업식이 있었고, 1952년3월 22일에는 제6회 졸업식이 있었으니 이 사이에 학기가 4월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되어서 9월에 입학을 한 나는 교실도 없는 학교에 가서 운동장에서 모래밭에다가 막대기로 ㄱ, ㄴ, ㄷ...을 쓰고, 1,2,3...을 쓰고 다니다가 공비토벌이 시작되어서 온통 전쟁터가 되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다. 지리산의 공비를 토벌하기 위해 국군과 경찰력이 동원되어서 지리산의 자락인 벌교의 존재산태백산맥의 초기 무대가 되었던 산으로 부터 조계산으로 몰아서 지리산으로 작전 구역을 좁혀가는 과정에서 내가 살던 율어면은 존재산의 전투 현장이 되었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집에서 쉬고 있던 동안에 우리 집은 동네의 가장 뒤편에 위치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가 가장 큰 5칸 접집10칸짜리 집이라는 이유로 낮에는 경찰들이 주둔하는 경찰 본부가 되었다가, 저녁이 되면 경찰은 철수하고 공산당의 공비들이 들이 닥쳐서 공비들의 주둔지가 되고는 하는 낮과 밤에 국기가 바뀌어 달리는 집이 되었다. 그래서 날마다 보는 군인이나 경찰들과 공비들의 전쟁놀이나 무기 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시달리는 지긋지긋한 전쟁을 피하여 12월 하순쯤에 우리는 이웃면인 득량면 마천리 섬동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그리하여 아마도 12월 말인지 아니면 1월초인지에 전학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몹시도 추운 날에 학교에 전학 신고를 하고 나서 교실로 가니, 교실로 들어가는 현관을 막아서 교실로 쓰고 있는데, 처음 들어서니 어찌나 깜깜한지 아이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차차 눈에 익숙해져서 보니 책상으로 가득 찬 교실에는 60여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빼곡하게 들어 앉아 있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 하고 아이들은 열심히 따라 읽고 있었는데, 나는 겨우 ㄱ, ㄴ, ㄷ을 읽고 쓰는 것 밖에 모르는데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3월까지 석 달 동안 날마다 공부가 끝난 교실에 남아서 나머지 공부를 하여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월 달에 17일 2월 달에 25일 중에 23일2일 결석, 그리고 3월 달에 25일 이렇게 출석일수 67일 중에 65일 동안 출석을 하였다고 2학년이 되었다. 그래도 2학년에 되어서는 꽤나 열심히 공부를 하였든지, 2학년 말에는 우등상을 받았으니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고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못 배운 탓이었던가 보다. 이렇게 9월에 입학을 한 우리는 이듬해 3월 31일에 1학년을 수료하고 2학년으로 진급을 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짧은 1학년을 보낸 셈이다. 이렇게 1952년에 4월 학기제가 되었다가 10년이 지난 1962년에 다시 지금까지 시행해온 3월로 학기가 바뀌었으니,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에 학기 변동으로 인하여 총 7개월을 공부하지 않고 그냥 공짜로 진급을 하게 된 셈이다. 이렇게 혼란한 시기에 어렵게 살아온 나의 일생을 우리 부모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챙겨 주셨던지, 만 70이 되는 지금도 나의 성장 기록철에는 국민학교 1,3,4학년 [통신표]와 5,6학년 [아동발달상황표]가 잘 보존 되어 있고, 2학년에 받았던 우등상장도 보존이 되어 있을 정도이니 어쩜 무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할 때마다 목욕하는 습관이 생겼다. ‘목욕이 보약보다 낫다’는 말이 있듯 목욕을 하고 나면 쌓인 스트레스가 풀리고 몸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더군다나 동네 가까이에 목욕탕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가 있다. 금요일 오후, 며칠째 계속되는 감기로 몸이 좋지 않아 목욕하면 조금 나아질까 하는 생각으로 목욕탕으로 갔다. 평일이기에 부담 없이 목욕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목욕탕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호자와 함께 온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친구들과 함께 온 초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맹추위로 밖에 나가 놀지 못한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려는 곳 중의 하나로 목욕탕을 선택한 것 같았다. 그리고 방학 중 받은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목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용히 앉아 목욕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함께 온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목욕탕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말 그대로 목욕탕은 아이들의 무법천지였다. 수영금지라는 경고문에도 일부 아이들은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냉탕에서 물장구를 치며 수영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아이들은 샤워기로 물싸움을 하여 주위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온탕은 많은 아이의 왕래가 잦은 탓인지 물이 식어 있었으며 온갖 부유물이 떠다녀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순간,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 자신이 목욕탕이 아니라 동네 놀이터에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누구 하나 아이들의 이런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목욕탕에는 아이들을 나무랄 연령의 어른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참다못해 장난이 심한 몇 명의 아이들에게 잠깐 주의를 주었으나 그때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람이 없는 데도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아 샤워기에서 물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으며, 목욕 중에도 물을 잠그지 않아 뜨거운 물이 대야 위로 넘쳐 하수구로 흘러갔다. 아까운 물이 하수구로 흘러 내려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 부족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물 씀씀이가 전국에 있는 모든 목욕탕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고 물을 물 쓰듯이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로서 왠지 모르게 조금은 책임감이 느껴졌다. 가정과 학교에서는 그나마 잘 실천하고 있는 물 절약 운동이 물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 목욕탕에서는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물이 계속해서 나오는 샤워기를 찾아다니며 수도꼭지를 잠그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한 아이의 행동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주위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용하지 않는 샤워기의 수도꼭지 모두를 잠그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세신을 하고 있던 또래 아이들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수도꼭지를 잠그는 것이었다. 내심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행동이라 생각하여 그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궁금해 졌다. 그래서 목욕탕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아이의 선행이 궁금하여 다가가 물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그 아이는 수업시간 물의 소중함을 배웠다며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그대로 실천했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대답을 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찾아간 목욕탕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일로 하마터면 기분을 망칠 뻔했으나 한 아이의 행동으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하루였다. 비록 목욕은 못했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배울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수용이 가능한 명제이다. 그러나 언어교육에서도 이같은 정의는 통할 것인가 의문을 가진 나에게 이런 사례 발표는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 브루스 발라드(59) 교사는 침묵교수법으로 언어교육, 협동학습을 하고 동기부여까지 실천한 사례를 들려 주었다. 그는 “한국어를 배울 때 선생님께서 거의 말씀을 안 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게 하는 모습에 그동안 제가 받았던 언어교육의 틀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라고 새로운 배움의 창을 연 이야기로 시작하였다. 눈높이 교육상 글로벌 교육부문 수상자인 브루스 발라드 뉴욕 브롱크스 차터스쿨 교사는 지난 해 11월 22일 롯데호텔 서울에서 대교문화재단 주최와 교총, 교과부의 후원으로 열린 ‘눈높이 글로벌 교육포럼 2012’에서 자신이 실천해 온 침묵 교수법을 발견하게 된 계기를 이같이 설명했다. 그는 평화봉사단원으로 1975년 한국에 왔을 때 한국어 교사가 수업 시간에 막대기를 하나씩 꺼내 ‘막대기’라고 알려준 뒤 다시 막대기를 꺼내들면서 침묵하자 학생들이 다같이 ‘막대기’라고 말하고 이어 서로 다른 막대기의 길이, 색깔 등을 표현하는 단어를 찾아갔다. 그는 이 경험을 계기로 교사가 직접 가르쳐주는 언어 수업에서 학생 스스로 찾아가는 수업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새로운 언어를 가르칠 때도 암기할 내용을 알려주기보다는 학생들이 도전할 과제를 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칼렙 가테뇨의 이론을 적용한 교수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교사가 할 일은 학생들 스스로 자신이 가진 경험과 능력을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발라드 교사는 한국어를 가르칠 때 한국어를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은 같은 발음이 나는 글자를 같은 색으로 칠한 영어 단어와 한국어 단어를 제시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학생들이 직접 각 글자의 음가를 찾아 글자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 방식으로 자음동화와 같은 음운의 변동에 대한 기준도 스스로 개발하게 된다. 발라드 교사가 보여준 자신의 수업 동영상은 그의 교수법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유치원생들이 4자리 숫자의 한국어 읽기를 배우는 수업 동안 그는 학생들이 틀렸을 때도 고쳐주지 않았다. 그러자 학생들끼리 서로 고쳐주며 규칙을 만들었다. 심지어 잘했다는 칭찬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스스로 더 높은 수준의 과제를 요구하며 수업의 방향을 이끌었다. 나중에는 학생들끼리 돌아가면서 나와 교사의 자리에서 다른 아이들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침묵하는 문자 교육을 넘어 협동학습과 동기부여까지 자연스럽게 이뤄진 것이다. 교수법의 핵심이 단순히 침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 스스로 학습하는 힘에 있기 때문이다. 이 학습자 중심 교수법은 수학, 사회, 외국어 등 다양한 교과에 모두 적용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발라드 교사는 “모든 학생은 자신의 경험, 직관, 상상력, 판단력, 지적 능력 등을 갖고 교실로 들어온다”며, “학생들은 교사가 넣어주는 정보를 머리에 집어넣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날 행사에서 발라드 교사의 사례 발표 외에 ‘글로벌 마인드를 갖춘 창의인재 양성’을 주제로 한 조벽 동국대 교수의 기조 강연과 그 실제 현장 사례를 소개한 피터 데일리 NLCS 제주 교장과 심옥령 청라 달튼스쿨 교장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역시 배움은 끝이 없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발견하는 호기심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갈수록 가관이다. 충남교육청의 교육전문직 장학사 선발시험에 부정의혹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만해도 ‘설마 그럴 리가’생각했다. 기우이기를 바랐다. 차라리 불합격한 사람들의 질투에 사로잡힌 투서나 경찰의 실적내기 경쟁이 부른 헛발질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하지만 하나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고 관련자들이 줄 소환되면서 일부가 구속되었고, 소환 대상자 한 명이 목숨을 끊자희망은 이제 절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소속된 교육청이 아니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시민과 학생들은 그러한 전문직 시험 비리를 어느 한 교육청으로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모든 곳들도 그러려니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필기시험 문제를 출제한 후에 밖으로 몰래 가져나와서 사전에 유출한 것으로 보도되었으나, 최근 언론지상에 나오는 것을 보면 출제 전부터 미리 문제를 알려주고서 알려준 문제를 그대로 출제한 것으로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어느 부도덕한 한 개인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고위층 연루설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속된 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매관매직을 한 것이다. 합격한 대다수 전문직 예비합격자들이 이런 식으로 합격한 것이라면 들러리를 선 탈락한 다른 사람들은 억울함을 넘어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벌인 것에 대하여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제일 문제인 것은 이러한 사태 때문에 평소 결과 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부정한 100점보다 정직한 50점이 낫다고 가르쳐온 교육자의 가르침을 학생들이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얼마 전 한국투명성기구에서 청소년과 성인 2천여 명을 대상으로 청렴성 조사를 한 결과 ‘부정한 입학이나 취업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응답한 청소년은 40.1%로 성인의 31%에 비해 높았다고 한다. 한편 청소년의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 중 큰 것은 학교, 가정, 언론매체, 또래집단 등이었다고 한다. 청소년이 생애주기에서 학교에서 생활하는 비중이 가장 큰 만큼 배우는 것 또한 많을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과 가르치는 사람의 행동이 일치해야만 받아들이는 학생이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쳐봐야 소용없다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 사례의 경우는 외양간을 지금이라도 고쳐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대책이 있겠지만 우선 교육전문직 1차 시험을 지금 같은 시험이 아닌 교원 재직 시 인성과 근무 성적, 다면 평가 등을 고려해 여러 가지 잣대로 다양화해서 적격 인원을 선발하는 것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시험의 공정성을 제고하고 유출 방지를 위해 외부인원을 과반이상 늘려야 한다. 그리고 자체적인 문제출제 보다는 오히려 제3의 전문기관에 위탁해서 객관성을 담보하는 방법도 있다. 이를테면 교육전문대학원에 선발을 의뢰하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현재의 신규교사 채용 문제 출제처럼 시․도교육청 공동출제로 하되 순번을 매겨가면서 주관 교육청을 정해서 시행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기회에 관련 법률 개정을 통해 교육전문직으로 임용된 교원에 대해서는 전문성을 위해서 교원으로의 전직을 제한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면 이 모든 사태의 근저에는 전문직 합격이 곧 교감, 교장 승진에 있어서 지름길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교육전문직 선발 부정사태, 단순한 어느 한 교육청의 문제로 치부하기 보다는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해서 개선책을 도모하는 것이 당면 과제다. 왜냐면 인사는 만사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교육을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바로 사람이 한다. 올바른 사람을 가려 뽑는 것, 그것이 바로 서야 교육이 바로 선다.
억대의 국고보조금과 교비를 횡령한 전문대학 총장 등이 구속되고 학생들을 입학시킨 대가로 이 대학으로부터 돈을 받은 고교 교사들이 무더기로 붙잡혔다는 소식이다. 검찰이 밝힌 내용을 보면, 정말 놀랄 정도다. 이 대학에서 학생 모집 대가로 1000만원 이상을 받은 고등학교 교사 7명을 뇌물수수 등 혐의, 1000만원 미만을 받은 교사 41명에 대해서는 도교육청에 비위 사실을 통보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가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제자들의 대학 입학을 위해 대학에 찾아가서 좋은 정보를 수집하여 제공하던 것과는 달리, 대학에 사례금을 받고 제자를 특정 대학에 지원하도록 했다는 얘기다.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 모집 대가로 대학으로부터 사례금을 받아 사법처리되는 초유의사건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이 지역만의 사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워낙 대학 숫자가 많고 대학진학률도 과거보다는 차츰 줄어들고 있는 이유도 이번 사건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일거다. 특히 MB 정부 들어 공기업을 중심으로 고졸 취업자가 늘고 있는 상황으로 볼 때 이번 일을 시작에 불과하다는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다. 그 이유야 어떻든 교사들이 저지른 교육자적 품위와 양심에 대해서는 관용이 어렵다는 생각이다. 학생들에게 대학의 선택은 우리 사회에선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마디로 학생들의 인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이다. 그래서 모든 학생이나 부모들이 대학입시에 목을 메고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복한 삶을 생각치 못하고 단순히 몇 푼의 돈을 받고 거래를 했다는 변명은 어떤 이유에서든 요서가 안 된다. 교사의 사명은 학생들에게 보다 좋은 교육을 통해 희망과 꿈을 주고 미래에행복한 삶을도와주는 일이다. 자신보다는 제자의 행복에 더 기뻐하며 보람을 느끼는 것이 교사의 바른 자세와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안되는 금전에 잠사 눈이 멀어 제자의 삶을 파는 이번 일은 우리 모두가 깊이 사죄하고 반성해야 하는 일이다. 정말 부끄러운 사건이다. 또한 이런 일을 일으킨 대학이나 교수들도 문제다. 교수는 우리사회의 최고의 지성인이며 존경받는 사람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이들이 최고의 지성인이라는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물론 대학의 최고 책임자인 총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지만 같은 교육자로서부끄럽기 그지 없다. 아무리 학교가 위기에 처하고 당장 존립의 문제라하더라도 학생들을속이는 거짓행위는 더 이상 대학의 진리탐구가 될 수 없다.새로운 대안이나 혁신으로 당당히 개혁해야 하는 것이다.돈을 주고 학생을 사오는 대학은 분명히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마땅하다. 더 이상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한다. 교육자로서 부끄러운 일이 재발 마지막이 되길 바랄뿐이다.
표를 산 다음 매표소를 지나 절 입구에 들어섰다. 제일먼저 청아한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가 길옆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독경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길을 걷는다. 특이하게도 사찰로 들어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구 전연 가파르지가 않다. 대로처럼 넓게 펼쳐진 길 양옆으로는 전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마치 오대산 월정사의 키다리 전나무숲길을 걷는 느낌이 든다. 하늘 찌를 듯이 늘어선 전나무들은 수령이 110년이 훌쩍 넘은 것들이라고 한다. 전나무들은 마치 방문객을 환영하듯 양손을 활짝 벌여 웅장한 터널을 만들어준다. 나무들이 만들어준 1km에 이르는 전나무터널을 걷다보니 속세의 미움도 애증도 봄눈 녹듯 사라지며 불국의 세계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 든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나는 속으로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읊조리며 150년 전 후손들을 위해 친히 이 나무들을 심은 스님들께 감사함을 표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곳 공기는 속세와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진다. 한참을 걷다보니 전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큼지막하게 지어진 일주문이 길을 막는다. 능가산 일주문(一柱門)이다. 이 문을 들어선 순간부터 오직 一心으로 부처님께 귀의하라는 뜻으로 기둥을 양쪽에 하나씩만 세우고 문을 지은 것이 일주문이다. 이제부터 이 문을 경계로 밖은 욕망의 속계이며 안은 부처님이 사시는 불국의 세계인 셈이다. 마치 역사책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건물처럼 일주문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기립해 있다. 전나무숲길이 끝나는 지점, 우리를 제일먼저 맞이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목이다. 수령이 무려 950년! 찰나와 같은 사람의 일생에 비하면 그 얼마나 위대한 생명력의 소산인가. 내소사 안마당에 자리 잡은 할매당산나무는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거기에 그렇게 우뚝 솟아 있었다. 우리나라 가람에서는 느티나무를 무당나무라 해서 좀처럼 심지 않는 법인데, 이곳 내소사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느티나무를 절 안마당에 심었다. 그것도 절 입구에 한 그루, 절 안마당에 한 그루 해서 두 그루나 심었다.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일컬어 절 입구에 있는 것을 ‘할배나무’, 절 안쪽에 있는 것을 ‘할매나무’라 칭하며 매년 당산제를 올린다고 한다.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나는 서둘러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대웅보전은 수리가 한창이었다. 얼기설기 설치된 비계가 대웅보전을 어지럽게 감싸고 있어 안타까움이 컸다. 마치 대수술을 받는 중환자처럼 대웅보전은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셈이다. 나는 조심스레 대웅보전 안쪽을 살펴보았다. 금빛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아미타여래가 한가운데에 계시고 그 중심으로 우측에 대세지보살, 좌측에 관세음보살이 인자한 미소를 흘리며 앉아 계시다. 때마침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맞춘 지붕에서는 희미한 후광이 비치는 듯하다. 비록 잠깐 동안이었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온몸에 스며드는 느낌이다. 대웅전을 나와 그 유명하다는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살창 문양을 구경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나무를 천연 나뭇결 그대로 살려 깎아 만든 것으로 꽃잎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여섯 개의 잎사귀를 기묘하게 맞춰나간 장신의 솜씨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대웅보전 안쪽에서 밖을 바라보니 꽃무늬는 보이지 않고 단정한 마름모꼴의 실루엣 문양만이 정갈하게 비쳐든다. 꽃살창에 넋을 놓고 있을 때, 나선형으로 떨어지는 석양과 보조를 맞추어 산사의 고요한 정적을 깨고 범종루에서 두두 둥! 법고가 울린다. 때맞춰 진행되는 예불시간이다. 도량의 댓돌 위에는 어느 스님이 벗어 놓은 것인지 흰 고무신이 자로 잰 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지런하다. 고무신의 빛깔은 새벽이슬처럼 신선하고도 정갈하다. 너무 희어서 갓 삭발한 스님의 머리처럼 푸르스름한 빛까지 발광한다. 그런데 고무신 빛깔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곳 내소사의 역사이다.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백제 무왕 때 지어진 것이라니 어림잡아도 1300년은 훌쩍 넘은 가람이다. 물론 그동안 수많은 증개축이 있어 왔지만 대부분의 재료들은 아직도 천년의 세월을 품고 있다하니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역사가 유구한 가람이다. 이러한 역사를 증명하듯 내소사에는 전설이 참 많다. 대웅보전을 지은 청민선사의 이야기부터 관음조가 그린 단청까지 기이하고 의미심장한 전설들인데 인간의 의심과 이해타산을 경계하고 진리에 대한 참구야말로 지극한 불교의 길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내소사 삼층석탑.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나 신라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3.46m이다. 면 아래의 받침대는 하나의 돌을 이용한 것이다. 몸체도 층마다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각 면마다 기둥을 새겼다. 몸체와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그 크기와 높이가 급격하게 줄었으며, 지붕들의 경사도 심한 편으로 날렵한 느낌을 주는 탑이다.다음은 청민선사와 대웅보전 증축에 관한 이야기다. 대웅전을 중수할 때 대목이 3년 동안 기둥, 서까래와 목침만한 나무토막만 깎아놓아 사미승이 장난삼아 나무토막 하나를 슬쩍 감추어 놓았다. 마침내 나무 깎기를 멈추고 대웅전을 짜 맞추는 날, 나무 한 조각이 부족한 사실을 안 대목수가 당황해 하며 주지스님에게 자신은 대웅전을 지을 자격이 못된다고 하며 포기하겠다고 고집한다. 이때 사미승이 감춰둔 나무조각을 내어놓지만 이미 부정탄 나무라하며 한 조각이 부족한 채로 대웅전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도 대웅전 천장 우측에 나무 한 토막이 빠져있다고 한다. 대웅전 단청에 관한 또다른 전설도 있다. 대웅전이 완공된 후 한 단청장이가 찾아와 자신에게 단청을 맡겨주기를 간청한다. 단, 백일동안 아무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약속한 백일이 다 되도록 인기척이 없고 단청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막 백 일째 되는 날 사미승이 문틈으로 몰래 엿보았더니, 새 한 마리가 부리에 붓을 물고 제 몸에 물감을 묻혀 단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기척에 놀란 새가 마지막 한 부분을 칠하지 못하고 그만 날아가 버려 지금도 법당 한곳에는 단청이 빠져 있다. 전설의 내용을 되새기며 주위를 둘러보니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백팔 배를 드리는 신도가 여러 명 보인다. 백팔 배를 드리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성취시켜준다는 믿음 때문인지 많은 신도들이 각자의 소원 수대로 좌복(坐服)을 펼쳐놓고 예불 삼매경에 빠져 있다. 나는 따스한 겨울 햇살을 등으로 받으며 한참동안이나 좌복 위에서 정성스럽게 오체투지를 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불전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절을 하는 저네들의 소원은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저 아프지 않고 걱정 없이 하루 세 끼 맛있는 밥을 먹게 해주소서.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누어 가질 수 있고,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와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고, 공손하고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대할 수 있으며, 예의바르고 친절한 몸가짐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게 하소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사바하…. 둥, 둥, 둥! 다시 저녁 예불을 알리는 북소리다. 나도 이젠 그만 하산을 서둘러야할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알싸한 피톤치드가 가득 섞인 내소사 경내의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켜 본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였던 속세의 때가 부처님의 인자한 미소와 함께 한순간에 녹아나는 느낌이다. 아, 바로 이것이다. 이 기분 때문에 나는 오늘도 고단한 몸을 이끌고 깊은 산사를 찾아 이리 헤매는 지도 모른다. 문득 하산을 서두르는 사람들 등 뒤로 청민선사의 인자한 가르침이 환청처럼 들리는 듯하다. “선남선녀여, 하루 세 때 나를 돌아보고 남을 미워하기 보다는 내가 참회는 마음으로 살지어다.”
지란지교(芝蘭之交)란 한자 성어가 있다. 이 말은 명심보감의 교우 편에 나오는 것으로 공자는 "선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향기를 맡지 못하니, 그 향기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선하지 못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절인 생선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되면 그 악취를 맡지 못하니, 또한 그 냄새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붉은 주사를 가지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옻을 가지고 있으면 검어지게 되니, 군자는 반드시 함께 있는 자를 삼가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지란지교는 벗을 사귈 때는 지초와 난초처럼 향기롭고 맑은 사귐을 가지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벗 사이의 변치 않는 사귐을 일컫는 한자 성어로는 관포지교(管鮑之交), 막역지우(莫逆之友), 수어지교(水魚之交), 죽마지우(竹馬之友) 등이 있는데 모두 벗 사이의 두터운 우정을 가리키는 성어들이다. 벗, 친구! 참 좋은 말이다. 세상을 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사귐이다. 드라마 상도에서 ‘장사는 부를 남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장사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말은 신뢰를 동반한 사귐이 사람에게서 제일 중요 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새해가 시작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일월이었다. 둘째 녀석이 갑자기 5학년 말에 전학 간 친구 집에 가서 놀다가 우리 집에 와서 며칠 지내고 가게 해달라고 한다. 내심 방학 동안 외출도 한 번 제대로 못했으니 오죽 갑갑했을까 싶어 허락을 하였지만 남의 집에 보내는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둘째 녀석이 보고 싶어 하는 친구사이에는 거리라는 장애물이 있다. 그 거리가 둘 사이를 더 아쉬움으로 만들게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평상시에는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만 긴 사연을 주고받는다. 그런데 방학이라는 기회로 서로의 얼굴을 대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이틀을 친구네 집에 지내고서 그 친구와 같이 왔다. 대개 아이들은 자기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자는 것을 참 좋아한다. 아이들만의 세계에 있는 행복지수이다. 가만히 지켜본다. 두 아이는 새벽녘까지 도란거리며 이야기하다 늦게 잠을 이룬다.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다음날이 밝았다. 모처럼 단짝 친구가 사는 남해를 구경시켜 준다며 길을 나선다. 차가운 공기, 눈 덮인 논과 밭에 자라는 마늘,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길은 남해만이 주는 또 다른 겨울 풍경이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재잘거리던 녀석들이 말이 없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토라진 것일까? 왜 표정이 어둡지? 상황을 주시하며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앵강만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들린다. 차가 멈추기를 기다렸는지 문을 열고 뛰어나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바닷가에 서서 숨을 들이마신다. “음, 바다 냄새 너무 신선해.” 길이 좋지 않아 멀미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누가 약속이나 한 듯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팔매질을 한다.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남해 구경시켜 준답시고 나선 길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큰 짐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른의 시각하고 아이의 시각은 큰 차이가 있는데 대부분 무시하고 지내지 않았나 하는 어른의 자화상도 보게 되었다. 티 묻지 않는 고소한 웃음소리가 겨울 바다 공기를 가르며 퍼져 나간다. 친구! 참 좋은 말이다. 형제는 서로 피를 나누었지만, 친구는 타인과 타인이 서로의 교감을 통하여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어느 한 쪽이 자기입장만 내세워도 안 되고 그냥 있어도 안 된다. 아무리 단짝이라도 때로는 토라지고 서운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어릴 때의 다툼은 그 순수로 다시 원상태를 회복하기 쉽지만, 성인이 된 이후 서로의 오해로 인한 서먹함을 회복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순수성 보다는 생활의 만남으로 목적이 앞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녀석의 친구와의 만남이 끝난 늦은 저녁이었다. 나흘 동안의 친구와의 만남이 어땠냐고 물어보니 행복한 미소 반 석연치 않은 표정 반이었다. 행복한 것은 친구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심심하지 않아서이고 석연치 않은 것은 친구를 잘 안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 좋은 기억은 영원히 남도록 하고 석연치 않은 것은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며 그것 또한 친구의 장점임을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마음이 좋은 친구로서 오래 남는 것이라고 다독였다. 친구가 떠난 늦은 밤 둘째 녀석이 일기장을 앞에 놓고 멍하게 앉아 있다. 다시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한다. 그럼 이번 만남을 글로서 남겨보렴. 네 마음이 그대로 살아 움직일 것이야. 그러면 그 속에서 친구의 모습을 다시 그릴 수 있다며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온다. 친구 참 좋은 말이다. 살아가면서 정말 나를 대신하고 서로의 분신처럼 여길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 소중한 사귐의 연속은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친구와의 사귐을 통하여 배려와 존중을 알게 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모습도 배우게 된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해풍이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하는 가운데 앵강만을 향해 힘차게 돌팔매질을 하는 두 아이의 모습이! “얘들아! 언제나 지란지교를 꿈꾸며 살아라.”
노도에서 외쳐 부른 그리움의 노래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를 읽고- 그리움이 사무치면 바람이 되고 별이 되리라. 금산 아래 한 점 섬 노도는 자개처럼 반짝이는 앵강만을 뒤로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열세가구 노도의 집들은 한양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호구산과 망운산을 바라보는 섬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섬의 동쪽 응달진 곳엔 파도소리에 애환을 싣고 보리암을 바라보는 세월을 간직한 김만중의 초옥이 있다. 그 초옥 주변엔 해마다 봄소식이 북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하면 그리움을 물들인 동백꽃은 나무에서 땅에서 붉은 빛을 바래며 두 번씩 눈물을 흘린다. 남해에 살면서도 김만중의 일대기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단순히 한글소설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조선 시대 유배객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 그의 사람됨과 남해에 유배 온 삼 년 동안의 행적에 대하여서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임종욱 작가의 소설은 이런 무관심에 불을 댕겨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책의 표지에 실린 바닷바람에 몸을 갉혀 먹히며 서안 앞에 대추처럼 마른 모습으로 붓을 든 사람이 바로 김만중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나 소설가를 꿈꾼다. 하지만 표현력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은 제 삶의 행간에 소설가이며 주인공이다. 이 소설을 쓴 임종욱 작가는 한문학자이다. 남해와 전혀 인연이 없는 경북 예천 태생의 사람이 어떻게 김만중의 일생을 연구하고 그 중 3년간 남해의 유배생활을 실감 나는 이야기로 엮었는지 등장인물과 사건을 보며 고개를 숙인다. 이 책의 뒷부분을 보면 작가는 남해와 인연이 있었다. 촌은집, 자암집, 서포집 등 한문으로 된 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남해에 온 유배객들의 생을 알게 되었고 그 중 유독 김만중이 말년에 이곳 남해에서 한 일과 왜 한글로 소설을 썼는지에 의문을 갖고 이 소설을 엮어낸 것이었다. 이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은 남해이지만 작가의 고향이 경북이라서 그런지 장 선달댁 며느리의 친정인 경북과 인근의 하동, 진주도 언급되고 있다. 소설가들은 앉아서 시공간을 자주 넘나든다. 고(故) 박경리 선생도 하동 평사리를 지나치며 들은 이야기를 주축으로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를 배경으로 대하소설 ‘토지’를 강원도 원주에서 완간하였으며 조정래는 벌교를 무대로 삼 년 가까이 해방 후 혼란스런 한국의 근 현대사를 들은 이야기와 현지답사를 근거로 ‘태백산맥’을 완성했다고 한다. ‘남해는 잠들지 않는다’는 어떤 내용인가? 이 소설은 모두 열다섯 신으로 한양에 있는 김만중의 아내와 유배객 김만중 간의 주고받는 편지를 중심으로 각 신의 서두에 편지를 통하여 펼쳐질 이야기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본문으로 흡입을 시키고, 신의 끝에 다시 아내의 편지를 통하여 갈무리한 후, 다음 신에 대한 예고와 궁금증을 파도처럼 일으키게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관심을 두고 살펴본 것은 남해 토박이가 아닌 작가가 엮어내는 남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한문학자인 김만중이 왜 한글소설을 썼을까? 에 대한 해석이었다. 남해는 보물섬이다. 지천명을 바라보는 시점에 남해는 바다와 산, 들이 어우러진 유자향과 마늘냄새, 시금치의 푸름이 넘실대는 곳이다. 작가는 ‘제2신 남해에서 만난 사람들’에서 ‘바람을 맞으며 흙을 밟고 풀밭에 누워 자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풋풋함을 지니고 살고 있는 섬이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흔히 남해 하면 억세고 거칠다는 말을 하지만 김만중의 입을 빌려 남해는 ‘인정 있고, 사람이 살만하며, 신선의 고장으로, 의자 모양으로 편안히 앉기 좋은 곳’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울러 죽방렴과 금산, 대국산성, 각종 특산물도 글의 소재로 이입시키고 있다. 어쩌면 남해에 묻혀 무감각해진 남해사람보다 한층 더 남해의 독특한 풍광과 인심을 소설 속 인물들의 생활상을 통하여 그려내고 있다. 김만중은 왜 말년에 유배지에서 한글소설을 썼을까? 김만중의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지극했다. 김만중은 어머니의 삶을 ‘시간이 지나도 먹물을 빨아들이지도 증발시키지도 않는 계혈석으로 만든 벼루와 같다.’고 하였다. 어머니는 김만중이 쓴 몽환을 읽고서 ‘하룻밤을 새기기에는 글이 너무 짧으며 이웃집 아녀자들은 진서를 읽지 못하니 어찌하리오. 이야기를 좀 더 쉽고 진중하게 엮어보아라.’ 하신다. 또한 ‘주제는 생생하게 살리면서 내용은 알차게 다듬어야 하며 글은 만인의 것이니 누가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며 언문 글씨의 숨은 진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글은 화려한 꾸밈보다는 마음을 바로 담아내도록 깎아내야 하며, 내 마음을 글로 남기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내 마음을 반추하겠는가?’로 글쓰기의 진솔성을 당부하고 있다. 지극히 효성이 강한 김만중이 이런 어머니의 소원을 간과할 리 없었으며, 어머니의 임종도 못한 그의 한이 한글소설로 불타올랐던 것이라 생각한다. 어머니와 더불어 김만중의 집필 관을 바꾸어 준 사람은 유배 가서 죽은 그의 형 김만기이다. 김만기는 김만중에게 글을 너무 남발하는 것에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재주를 앞세운 글은 물과 같아 속히 훤히 들여다보여 저작할 맛이 사라진다.’고 글쓰기의 신중함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작가의 집필 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작가가 내세우는 김만중의 사람됨은 어떤 것일까? 그의 사람됨은 소설에 나오는 인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박태수와 옥진의 도피를 돕는 장면, 정처 없이 떠도는 장 선달 댁 며느리의 누명을 벗기는 지혜, 유배 와서도 호사를 누리는 벼슬아치들의 비판을 통하여 옳다고 생각하면 꼭 행동하는 모습이다. 이는 유배의 섬 남해사람의 성향과 같다고 하겠다. 이 소설의 근간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유배지 남해에 첫 발을 내디딜 때의 옥가락지를 둘러싼 장 선달댁 이야기는 사씨남정기에서, 여성편력증과 낭만에 물든 양설규의 삶은 구운몽을 통해 창조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다. 문득 김만중이 쓴 어머니의 행장을 생각하며 십여 년 전에 여읜 나의 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나의 어머니는 열여덟에 시집와서 평생을 길쌈과 농사일로 고된 몸을 건사하다 한 세상 못 보고 풍년초 연기에 한을 싣고 푸른 하늘 저편에 계신다. 어릴 적 길쌈을 하면서 내가 글을 알아 삶을 쓴다면 수십 권이 넘을 것이란 하소연이 귀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김만중은 어머니의 행장을 쓰고 구운몽도 지었지만, 정작 나는 어머니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는 클라이맥스가 있다. 박태수와 옥진의 탈출, 여성편력과 낭만에 물든 양설규의 죽음, 장 선달댁 며느리 바로 세우기의 이야기가 반전에 반전을 더하여 읽은 이의 흥미를 더하고 있다. 김만중의 초옥이 있는 노도! 해풍이 살을 갉아 먹고 그리움의 사무침은 동백으로 피어 늦겨울과 봄을 붉게 물들이는 섬. 파도소리 바람 소리가 휘파람을 불고 동박새 지저귐에 그리움이 가슴을 난도질하는 곳. 바다 건너 삼남 제일인 금산과 보리암 전의 해수 관음상은 김만중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2012년 가을! 노도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읽어본 이 책은 김만중의 삶과 아픔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가을 노도는 그리움의 흔적이 남아있다. 겨울을 지나 봄을 예견하는 흔적은 한 점 섬 눈물에 아롱져 선홍빛 같은 그리움이 몽우리를 맺어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다. 유배객 김만중! ‘오늘도 초옥 아래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파도는 대궐도 초막도 그리운 사람일 얼굴일 때가 많았다.’ 그가 불러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짧은 가을 낮 초옥 옆 샘가엔 세월의 흐느낌이 낙엽으로 앉아 물길만 가로막고, 잠시 몸을 뉘었던 유허엔 해풍만 빛바랜 풀잎을 흔들며 정지된 시간을 응시하게 한다. 남해는 항상 깨어 있다.
각 부서의 부장교사들이 둘러 앉았다. 그 사이에 행정실장이 뭔가를 배부해 주었다. 그 무엇인가는 바로 예산계획이다. 이미 12월에 각 부서별로 제출한 것을 돌려 받았다.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교장선생님이 설명을 했다. 각 부서에서 제출한 예산이 올해 실제 가용예산보다 더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각 부서의 부장들이 모여서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행정실의 이야기로는 실제로 가용예산이 지난해보다 6천만원정도 줄었다고 한다. 학교에서 강당임대와 각종 시험에사용되는 교실임대료를 지난해 수준으로 하더라도 6천만원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왜 예산이 줄었는지는 예측만 될 뿐 실제로 줄어든 이유를 설명하기 쉽지 않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예산이 전년대비 6천만원정도 줄었고 줄어든 예산으로 학교살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요금도 인상되고 물가도 인상되었는데, 올해 1년이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각 부서에서 제출한 예산을 1차로 삭감했는데, 반드시 필요한지 검토후에 조금씩 줄여 놓은 상태다. 그렇게 줄이고 줄였음에도 더 줄여야 하는 예산액이 3천만원 가까이 되었다. 우선은 지난해 보다 증액해서 신청한 항목을 살피기로 했다. 가급적 지난해와 같은 수준으로 동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나갔다. 이렇게 하다보니 새로운 사업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줄이는 작업도 여의치 않았다. 어쩔수 없이 부장교사들이 둘러앉아 아예 한 항목씩 점검을 해 나갔다. 점검이라기 보다는 각 항목에서 조금씩 예산을 깎아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사도 위축되고 학생활동에 들어가는 예산도 삭감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숨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아무리 해 나가도 그 많은 예산을 줄이는 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고 각 부서에서 최종적으로 삭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도 1천만원을 더 줄여야 했다. 다시한번 각 항목별 점검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9백여만원을 줄이지 못한채 끝나고 말았다. 어떻게 하던지 9백만원을 더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도 최종예산액을 맞춰야 했기에 공과금예산에서 줄였다. 억지로 가용예산액에 편성된 예산을 맞춘 것이다. 지금도 학생들은 냉, 난방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데, 공과금을 90만원도 아니고 9백만원을 삭감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는 유난히 덥고 추운 한해가 될 것 같다. 쾌적한 환경이 되어야 학습도 제대로 되고, 수업도 제대로 할 수 있을텐데...여러가지로 걱정이 앞선다. 추후에 예산을 추가로 편성해서 내려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다소나마 위안을 삼지만 불확실한 것에 기대를 하기에는 믿음이 덜 간다. 뭔가 조치가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퇴근길에 올랐다. 왠지 내 자신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