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전체기사 중 97,753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상세검색한국교총은 11일부터 전국 중학교 교원들의 교원연구비 삭감에 대한 ‘보전수당 신설’을 요구하며 '교권회복 및 보수삭감 저지 40만 교원 청원 운동'에 돌입했다. 사진은 13일 서울 등촌중(교장 이상수) 교사들이 교무실에 비치된 청원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
“도대체 교장선생님은 이 학교에 교육학자로 온 건가요, 아니면 교장으로 온 건가요?” 지난 연말 학부모 모니터 요원들과의 대화 모임이 있었다. 사실 대학교수로 한 평생을 보내고 고교 교장에 취임한 나로서는 학부모 모니터 결과가 궁금했다. 그런데 정작 결과보고가 시작되자마자,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아마도 첫마디에 ‘교장선생님’이란 호칭은 내심 “당신은”이란 표현을 차마 할 수 없어 붙여준 호칭이란 생각도 들었다. 학부모를 격분시킨 내용은 이러했다. 입시에 쫒기는 인문계고 학생들에게 ‘쉼’을 마련해 주기 위해 중간고사를 수요일에 끝내고 목, 금 이틀간을 창체 시간으로 정해 연휴를 만들어 주도록 한 것. 그것이었다. 학생과 교사의 피로가 정점에 이르는 중간고사 직후의 4일 연휴는 잠을 보충할 수 있고, 부족한 교과목 보충을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학을 방문 또는 여행으로 자기성찰을 하자는 취지였건만 학부모들의 불안감만 촉발한 모양이었다. 인성교육 강화를 내 걸었던 어느 고교 교장이 ‘고교에서 뭔 놈의 인성교육 강화냐’는 학부모들의 거센 반발로 좌절했다는 이야기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학부모의 요구는 거기서 끝나질 않았다. 밤 10시, 심화반 학생들의 경우 11시까지 이어지는 자율학습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집에 오면 대충 씻고 잠을 자게 되니 자정까지 붙잡아 두면 좋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그때 나의 목구멍을 타고 치솟아 오르던 이야기는 이랬다. “학부모님, 만약 당신의 남편이 이 학교의 교사였다면 그와 같은 요구를 할 수 있겠는지요? 교사도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고, 내일 수업을 위해 휴식과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62세까지 교단을 지켜야 하는 교직의 특성상 교사들이 매일같이 100m 경주를 하듯 달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답할 기회조차 박탈한 채 요구는 이어졌다. “교장선생님, 인근학교에서는 이렇게 학생들을 지도하고, 외고와 국제고는 또 이런 활동들을 하는데 우리학교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리고 또 교장 선생님….“ 학교시설 이야기를 꺼낼 즈음 교감선생님을 불러 학부모들의 이야길 듣도록 부탁하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교장이 무능한 건가 학부모의 요구가 과한 것인가. 학생들의 표현대로 난 아직도 맨붕 상태다. 오성삼 인천 송도고 교장 부모님의 자녀지만 나에겐 제자 하루는 수업 중 교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학부모가 찾아왔다. 자신의 아들이 왕따를 당했는데 그게 다 담임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고 지도하는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따라하기 때문이라며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렸다. 평소 아이들이 바른 자세로 공부하고 또박또박 글씨를 쓸 수 있게 지도하는 과정에서 해당 아이와 다른 아이들에게도 몇 차례 지적했는데 그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공부습관을 잡아 주지 못한다면 정규수업으로 이어가기 힘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오해하신 것이다. 학부모는 온갖 질타를 쏟아냈지만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그 비난을 다 들었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부모님의 자녀이기도 하지만 내 사랑하는 제자이기도 하다”고……김문희 경기 의정부 호동초 교사 어려도 교사인데…권위 인정해야 학부모들이 어린 여교사를 은근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있다. 초임 때는 학부모들이 전화통화하면서 대화 하는 중 은근슬쩍 반말을 하기 시작해 태도가 바뀌는 것을 느낀 적이 있다. 가끔 학교에 찾아와서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런 것을 해야 하는데 왜 안하느냐’며 오히려 가르치려 할 때도 있었다. 교사가 되려면 교대 4년 동안 가르치는 일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임용시험을 통과해야 되는 것이고, 또 교사가 되면 매일같이 전문성과 윤리를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데 무시하듯 대하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믿고 맡기는 마음도 함께 가져야 할 것이다. 서울 강남구 S초 김혜미(가명) 교사
혹자는 학부모가 ‘자식 맡긴 죄’로 교사 앞에선 약자라고 말하지만 그건 옛날이야기다. 학부모가 학교로 쳐들어와 교사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건 이제 뉴스도 아니다. 학부모와 교사 다툼이 극해 달해 서로 막장전술을 구사해도 다치는 건 대부분 교사다. 교사도 잘못하지 않았느냐는 한 마디면 끝이다. 학부모단체라는 소위 직업 학부모들은 한술 더 뜨기도 한다. 막장 학부모들처럼 깽판을 부리지는 않지만 어떤 요구를 해도 학교는 이렇다 할 제재를 할 수 없다는 것, 도리어 그럴수록 자신의 자녀들이 받을 불이익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으며, 최소한 밑져야 본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지가 현장에서 벌어지는 교원들의 희로애락 전달을 위해 마련한 연중기획 ‘생!생! 현장 애환 스토리텔링으로 풀다’의 세 번째 주제는 신학기 첫날 경남 창원에서 날아온 반갑지 않은 뉴스처럼 ‘학부모’로 인한 갖가지 어려움을 외국 사례 등과 함께 대화 형식으로 엮어봤다. 시험점수가 낮다고 ‘폭행’ “똑똑한 우리 애 그럴 리가 없다” 허위사실 주장하며 ‘고소’ “정신적 피해 입었다” 금전 요구 학부모 교사 폭행 ‘가중처벌’ 한다더니 교권보호법, 교과위서 6개월째 낮잠만 서울 A초교에는 ‘고소’가 직업으로 알려진 B학부모가 있다. 학생이 1학년일 때는 학습지를 받지 못했다고 담임교사와 실랑이를 한 뒤, 이 문제로 수차례 학교를 찾아와 항의하며 소동을 피웠다. 이후 B학부모는 경찰에 신고하고, 교육청, 권익위원회에 진정하는 등 문제를 키워갔다. 학교장에게는 자극적인 말로 학교장을 흥분케 한 뒤 이를 녹취해 교장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결국 20만원 벌금으로 약식기소 된 뒤 이를 수용하자, 이번에는 2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3차까지 간 끝에 물론 기각은 됐지만 B학부모의 기행은 계속됐다. 2학년 때 담임은 학급홈페이지 게시물을 가지고 명예훼손으로 500만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3학년 담임에게는 귀를 잡아당겨 상처가 나고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는 허위사실을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를 이어갔다. 학부모의 억지행동은 종종 폭행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최근 창원 E고교에서는 학부모와 일행이 학교에서 행패를 부리고, 담임교사의 머리를 잡고 정강이를 걷어차는 등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겨울방학 보충수업 때 드럼스틱으로 엉덩이를 몇 대 때린 것이 이유였다. 인천 F중학교에서도 학생들 사이에 폭력사건으로 불려 온 학부모가 집단폭행 운운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를 제지하자 학부모는 G교사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가격해 코뼈가 부러지는 중상해를 입혔다. “국회로 간 교권보호법, 개나 줘 버린 거야?” 영국은2002년부터 교사를 ‘위협’만 해도 학교에서 쫓겨날 뿐 아니라 체포한다던데. 교사 위협, 폭행은 ‘불관용’ 원칙을 적용한다잖아. 그뿐만이 아냐. 7500달러의 벌금 혹은 6개월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데. 미국도 비슷하고. 가만, 어디서 비슷한 내용을 들었던 거 같은데. 아! 교권보호종합대책을 교총의 요구로 교과부가 작년에 발표했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우리는 버젓이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학부모 폭행은 가중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 않았었나? 대책 나온 지 6개월이 되었음에도 국회 교과위가 의원들이 발의한 유사 법안이 많다면서 아직 법안을 상정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하던걸. 아니, 의지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고소와 폭행도 힘들지만,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괴롭히는 스타일은 더 부담스럽다. 시험이나 평가 사안에 대해 거의 떼쓰기 수준으로 막무가내인 학부모도 있다. 경기 H초교에서는 주관식 시험문제 채점을 놓고 I학생의 학부모가 학원장을 대동해 교무실로 찾아온 사건이 있었다. 이 학부모는 “주관식 채점 기준과 다른 학생의 답을 보여 달라”고 하더니 교장 면담까지 요구했다. 교장도 “틀린 답을 맞게 해줄 수는 없다”고 하자 욕설을 하고, 경찰을 부르는 등 소란을 피웠다. “내 아이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럴 리가 없어요.” 서울 J초교 찾아온 학부모의 말이다. 학교에서 과학탐구대회를 했는데 선정되지 못한 팀의 학부모가 찾아와 항의를 한 것이다. 평가는 선생님들이 위원회를 구성해 실시했고, 결과는 만장일치로 다른 팀이 결정됐는데도 이를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이 학부모는 다른 학생들의 과제를 보겠다며 교무실을 뒤지고, 평가기준과 채점표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평가권 부여해야 교권도 있는 거지” 자꾸 외국 얘기해서 미안하지만 독일이었다면, 이런 학부모는 교사 앞에서 큰소리를 치거나 행패를 부릴 기회 자체가 없었을 거야. 왜냐고? 독일은 교과에 따라서는 지필고사 점수는 50%만 반영하고 나머지는 교사의 재량이니까. 시험문제는 다 맞았다 해도 수업태도 불량 등으로 나머지를 20점 줬다면 학생은 70점밖에 받을 수 없다는 거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했다면, 아마 학부모가 몽둥이 들고 쫓아왔을 걸. 교사의 권위는 법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평가권을 갖는다면 저절로 주어질 텐데 말이야. 그나저나 교권보호법은 어떻게 된 거야. 글쎄, 아직 정부법은 국회 문턱도 못 넘었다니까. 진짜 개한테 줘 버린 거 아냐? 드물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도 선생님을 괴롭히기도 한다. 충남 K초 병설유치원에서는 L학생의 어머니가 몽둥이를 들고 찾아와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유는 전화를 바꿔주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것. 나중에 학생의 외할머니가 찾아와 어머니가 산후 우울증이라고 했다. 경북 K초에서는 학생 한 명이 홍길동 복장을 하고 등교해 방송국에서 취재요청을 했으나, 교육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했더니 학부모는 다음 날부터 이 학생을 억지로 홍길동 복장을 시켜 10시부터 연단에 서있게 하는 시위를 했다. 그리고 ‘방송 출연료로 무릎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학교가 방해했다’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우리가 동네북이야? 화풀이 대상이야?” 듣다보니 우리나라 교사에겐 교권이 아예 없는 거 같네. 내 새끼 성적과 처우에 조금만 불이익이 생겨도 언제든 찾아와 따질 수 있는 존재로 교사가 남아있는 한 어떤 대책이 나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설사 아주 **같은 교사라도 일단 그 앞에서는 존중해야 하는 거 아냐? 교사가 뭐 대단한데 그러냐고? 바로 그거야. 너희 회사 상사가 아무리 부당하고 **같은 요구를 하는 **같은 분이라고 해도 그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 못하겠지? 근데 교사에겐 할 말 다 하는 거야. 바로 면전에서. 학부모가 약자라고? 자식 맡긴 죄? 그딴 거 다 개나 줘 버린 지 오래야….
나승일(사진‧51)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농산업교육과 교수가 13일 교과부 차관에 임명됐다. 신임 나승일 차관은 서울대 농업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조교수와 대구교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식물생산과학부 농산업교육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3~2007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 부설 중등교육연수원(현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육연수원)장을 역임하면서 ‘직업교육 CEO’과정을 개설하는 등 중등 직업교육의 기초를 닦았으며, 직업교육을 올바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교육행정가의 ‘경영자적 마인드’를 강조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행복교육추진단 추진위원을 역임했으며 이번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교육과학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유학기제, 직업진로교육 등 박근혜정부 교육정책의 핵심공약의 밑그림을 그린 나 차관은 현재 서울대 농업생명과학교육연구센터장과 교육연수원장을 맡고 있다.
교과부 차관에 13일 나승일 서울대 교수(52)가 임명됨에 따라 교육정책실장(1급) 자리를 사이에 둔 전문직과 일반직의 물밑싸움이 한층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정부조직법안의 국회 처리지연으로 직제는 아직 개편되지 않았지만, 교과부는 교육과 과학으로 분리되면서 3실 체제(기획조정실, 교육정책실, 대학지원실)로 바뀔 예정이다.(4일자 참조) 일반직 입장에서 보면 1급 자리가 하나 빠지는 셈이다. 현 직제에서 교육과 과학 일부를 아우르고 있는 인재정책실과 학교지원본부장(계약직) 업무를 통합한 ‘교육정책실장’ 자리에 일반직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서남수 장관이라는 ‘올드보이’(행시 22기)의 귀환으로 일반직 간의 경쟁이 더 가시화됐다는 것. 현재 교과부 실장급은 32기, 국장급은 38기, 과장급은 46기까지 내려가 있다. MB정부 5년 동안 교육실세로 통한 이주호 전 장관이 기수·서열 중심의 관료문화를 크게 흔들어 놓은 것이다. 기존 일반직 몫이었던 실장급 자리가 하나 줄어든 데다 시도부교육감 및 대학교 국장 등으로 나가 있던 중간 기수(22~28기)들까지 복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젊은 국장급에서는 이미 마음을 비운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교과부 전문직을 지낸 한 인사는 “서남수 장관이 현장을 존중하고 소통하겠다고 하더니 시작부터 전문직 홀대로 출발하는 것 아니냐”라고 일갈했다. 계약직 본부장제도가 사라지고 교육정책실(구 학교정책실)이 부활하면서 기대를 가졌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현 직제보다 후퇴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설상가상 창의인재정책관, 학생복지안전관, 학교정책관 등 국장급 세 자리 역시 전문직이 모두 꿰차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창의인재정책관이야 교육과정과‧교과서기획과 등 업무를 아우르고 있어 전문직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지만, 학교정책과‧공교육강화정책과‧교원정책과 등을 총괄하는 학교정책관과 학생복지정책과‧학교폭력근절과‧학생건강지원과 등을 관장하는 학생복지안전관도 일반직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전문직 출신 한 교장은 “관료들의 ‘기수·서열 문화’가 부활되면 아무래도 조직문화가 경직될 수밖에 없다”며 “이런 싸움에 전문직이 명함을 내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려는 기우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교과부의 한 전문직은 “실장이나 국장을 반드시 전문직이 해야 한다는 것도 편향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실무선에서는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의사결정은 관료가 빠르다”면서 “정책이 방향을 잘 잡았다면 실‧국장이 전문직이던 일반직이던 크게 상관 없다”고 덧붙였다. 교총 김동석 정책본부장은 “교육정책실장은 초중등교원들에게는 상징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MB정부도 학교정책실을 폐지했다가 계약직 형태로라도 학교지원본부제도를 만든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며 “정말 학교현장을 존중하려면 교육정책실장은 반드시 전문직으로 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남수 교과부 장관은 13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장관실에서 장휘국(광주광역시), 고영진(경남), 김신호(대전광역시) 교육감들과 면담을 가졌다.
13일 전국에서 2013학년도 첫 전국연합학력평가를 실시했다. 이번 전국연합학력평가는 서울에서 277교 11만 6천 여명, 전국에서 1,944교 58만 1천 여명이 참여하여 국어(A.B), 수학(A.B), 영어(A,B), 탐구(사회/과학) 영역 순으로 진행됐고 1교시 국어 듣기평가는 진행되지 않았다. 특히 서울시교육청(교육감 문용린)은 고3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대입수학능력시험을 대비하고 자기주도학습을 통해 역량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평가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부산교육청(교육감)주관으로 치러지는 1,2학년의 전국연합학력평가도 13일 같이 진행됐지만, 서울교육청과 경기교육청, 광주광역시 교육청에서는 참여하지 않고 6월과 11월에 있을 전국연합학력평가에 참여할 예정이다. 성적 발표 및 수준별 선택 현황은 3월 말에 발표 예정이다.
정부조직법 표류에 따라 업무공백 상태를 겪고 있는 춘천교대의 총장 부재 상황이 장기화 될 전망이다. 11일 교육과학기술부와 춘천교대에 따르면, 이날 박근혜정부 출범이후 첫 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춘천교대 신임 총장 임명안은 상정되지 않았다는 것. 앞서 교과부는 춘천교대가 1순위 총장 후보로 추천한 이면우 과학교육과 교수를 임명 제청했다. 그러나 국무회의가 정부조직법 개정안 처리 지연으로 잇따라 취소되면서 지난달 28일 김선배 전 총장 퇴임 후 춘천교대는 배성제 교무처장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경인교대와 부산교대의 경우 차기 총장의 임기 역시 4월1일부터 시작되는 점을 감안하면, 두 후보자의 임명안이 함께 상정될 가능성도 있다. 교과부 관계자는 “춘천교대는 이미 인사검증이 끝나 안건 상정만 되면 되지만 양 교대의 경우해당부처 인사가 오늘 난 상태라검증을 시작도 하지 못한 상황”이라며 “3건이 함께 상정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교과부 관계자는 "임명이 늦어지면 임기 시작일도 늦어지게 되므로, 총장 전체 임기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해 8월 첫 공모제로 뽑힌 이정선 광주교대 총장의 경우 임기 시작일인 10월 23일 오전 국무총리실에서 임명장을 받았다. 공모총장의 경우 현 총장의 임기 만료일 30일 전까지 총장후보자 1, 2순위를 교과부에 임용추천하면, 인사 검증을 거쳐 국무회의에 상정‧임명하게 된다.
◇부이사관 ▲장관 비서실장 한상신 ▲인사과장 설세훈 ◇기술서기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기획단 기획조정과장 김성수
11일 서남수 교과부 장관(왼쪽)이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16층 대회의실에서 취임식을 가졌다. 서 장관은 취임사를 통해 "창의적이고 인성이 바로서는 교육을 지향하고 교권확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11일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16층 회의실에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 신임 서남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취임사에는 앞으로의 정책 로드맵이 모두 담겨 있었다. 본인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A4 한 장 반 분량의 글을 통해 서 장관은 교원들이 수업과 학생 지도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시도교육감과 소통‧협력하며 현장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교육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2일 시도교육감협의회 임원진을 장관실로 초청, 의지도 보여줬다. 이날 고영진 시도교육감협의회장 등은 21, 22일 광주에서 열리는 교육감협의회에 서 장관을 초청하는 등 지난 정부와는 사뭇 다른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사진) 서 장관은 “중앙정부는 정책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교육청은 현장에서 정책을 시행하는 역할분담을 통해 상호 협력함으로써 아이들의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교육을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취임과 동시에 불거진 학교폭력에 의한 학생 자살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그는 취임사에서도 “가정과 사회의 역할 약화로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지고 있다”면서 “교육전문가로서 기대에 부응함을 통해 당당하게 존중받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수업과 학생지도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함과 동시에 교원 스스로 도덕성 기준을 높여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하는 등 책무성 역시 강조한 것이다. 대학평가에 대한 문제의식도 드러냈다. “구조조정 노력을 계속하면서도 고등교육과 대학에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평가방식을 논의를 통해 찾을 것”이라며 “대교협의 의견도 수렴해 평가방식 개선안을 연구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교과부 재직시절 대학업무를 많이 맡아봤기 때문에 ‘저렇게 하다가는 부작용이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은연중에 MB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관료 출신 첫 교육부 수장답게 공무원들에 대한 격려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교육부 직원 모두를 교육정책과 행정의 전문가로서 인정한 것”이라며 “우리가 그것을 증명할 차례”라고 당부했다. 한편 이주호 전임 장관은 11일 오전 부처 내 각 부서들을 돌며 직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별도 이임식 없이 ‘동영상’ 이메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로 다시 돌아가는 이 전 장관은 재임 1000일을 넘기지는 못 했지만 차관 경력(2009년1월20일~2010년8월15일)까지 합쳐 교육부 근무일 1497일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교사는 책임이 막중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교사의 수가 많아 희소성이 없어서인지 교사 자신이 스스로 지도자라는 인식이 약한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학기초가 되면 담임을 맡고 부장이 되고 여러 가지 업무를 맡는다. 그러나 크나큰 혁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작업환경이다보니 변화에 대한 감각이 무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수시로 변화를 거듭하기에 지도자로서 성공하려면 자신의 방법을 항상 변화시킬 준비를 해야 한다. 과거 60, 70년대 우리는 너무 가난했기에 잘 먹고, 잘 사는 일, 성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지식, 지위를 갖는 것이 중요했다. 잠을 줄여가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4시간 이상 잠을 자면 좋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불가능 한 일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에서도 논밭을 팔아서라도 자식 공부만은 시키고 싶어 했다. 자식이 공부 잘하는 것, 유명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부모들의 한결같은 소원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성공의 길처럼 보였다. 성공을 외치면서 장소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베트남 전쟁터에서, 사막의 중동에서, 알래스카에서 목숨을 걸고 일을 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일에 속도를 냈다. 빨리 빨리 외치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앞차를 추월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험을 하고 또 했다.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기기도 했지만 악, 엇 하는 사이에 ‘쾅’하면서 저 세상에 먼저 간 사람도 있다. 사고로 인해서 평생 고생하는 사람도 있다. 속도를 내다보니까, 서두르다 보니까 서투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건물도 붕괴되고, 인간관계가 깨지고 사람이 다치게 되었다. 건강이 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문제가 안 되었다. 배가 부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좋은 집, 멋진 차, 돈, 지식, 지위를 얻을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성공을 칭찬하고 부러워했다. 2012년 5월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한 나라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 20,000불, 반도체 세계 1위, 조선 세계 1위, LCD 세계 1위, 자동차 세계 4위, 세계에서 10위권의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징기스칸은 히틀러, 나폴레옹, 알렉산더 대왕이 차지한 영토를 합한 것 보다는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한 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징기스칸이 이룬 업적을 위대하다고 하는데, 한국이 지난 50년간 이루어낸 역사는 징기스칸이 이룬 것보다도 더 위대한 업적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이러한 역사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는 못 먹어서 걱정이 아니라 많이 먹어서 걱정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인 영양결핍, 결핵 등이 문제가 아니라,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인 고혈압, 당뇨, 뇌졸중 등이 문제가 되었다. 암이 가장 무서운 병이 된 것이다. 가슴이 아플 때는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보면 스트레스, 신경성이라고 한다. 처방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쉬라는 것이다. 그래도 성공, 성공 하면서 일을 하다보면 숨이 목에까지 차게 된다. 목에까지 숨이 차는 것을 목숨이라고 한다. 목에까지 숨이 차면 견딜 수가 없다. 자살을 하게 된다. 최진실, 정몽헌, 박용오, 노무현 등 연예인, 경제인, 정치인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면 말을 하던 최윤희씨도 자살을 했다. 자살을 하지 않으면 “너 때문이야” 하면서 상대방을 원망하게 되고 상대방을 쏘아 죽이게 된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 조승희씨 사건, “세상 사람들이 내 속 타는 것을 몰라준다고 하면서 숭례문에 불을 질러서 태워버렸던 사건, 왕따, 공부를 견디지 못한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아직도 진행중이다. 살만 한데 의식주 수준은 세계에서 3%안에 드는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자살율 세계 1위, 이혼율 세계 1위, 저출산율 세계 1위가 되었다. 왜 그런가? 일 일 하면서 일에 속도를 내다보니까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갓 입학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다. “공부 재미있어요?” 학생은 “재미없어요, 죽기보다 공부하기 싫어요.” 아이들은 공부하기가 죽기보다 싫다고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죽기보다 싫다는 공부를 우리는 어떻게 시키는가? 공부를 우리는 아이들에게 죽도록 시킨다. 아침부터 저녁, 밤까지 시키는 나라는 드물다. 학생들이 때리고, 맞고, 왕따 당하고, 자살하고 하니까, 인성이 중요하다고 너도 나도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교에서는 공부(일)만 가르친다. 공부가 재미없다고, 죽기보다 싫다고 학생들이 이야기해도 죽도록 공부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속도를 내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 인성이 중요하다 중요하다고 외치지만 사람, 인성을 중시하는 모범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일을 잘 하는 모델은 많이 있는데, 사람을 보살피는 모델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선배도 일, 일, 일하면서 초스피드로 경제력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필리핀,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들과 같이 뒤집어 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자살율 1위, 이혼율 1위 등 약간의 부작용만 있었을 뿐이다.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다. 일을 하는 것이 힘들지 사람을 푸는 것은 정말로 쉽다. 일을 하는 것의 10분의 1, 20분의 1만 투자해도 된다. 이제는 느껴야 한다. 행복은 종착지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천천히 지속적으로 가지 않으면 빨리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교육은 이제 사회가 지속적으로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생각하면서 가야 한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더욱 더 서툴러 질 뿐이다. 일을 빨리 하기 시작하면 사람이 안 보이기 시작하고, 사람이 다치면 일이 안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는 속도를 낸다고 해서 속도가 나는 시대가 아니다. 제대로 가야 한다. 10, 20, 30, 60,100 가속도를 내면은 100km/h에서도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오래간만에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음악을 듣고, 휴게소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가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 현재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미래가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데일 카네기는 “목장에 흐르는 음악이나 웅장하게 울리는 숲의 교향악에 귀를 기울 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고 급하게 살지는 말자. 이 세상에는 부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사소한 것을 즐길 줄 아는 능력이다”고 말했다. 그래서 교육은 결과보다 과정을 따지는 것이다.
부산의 한 사립 전문대학에서 신입생 예절 지침 문건을 돌렸다. ‘디지털영상디자인과 신입생 예절’이란 제목의 이 문건에는 신입생이 선배에게 지켜야 할 행동 지침 5가지가 담겨있다. 이 중에 신입생이 선배와 있을 때 담배를 피려면 먼저 선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항목은 애교로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내용은 지성인의 모임인 대학생 문화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있다. 일부는 인권 침해 요소도 있다. 선배는 후배에게 대화법까지 지시하고 있는데, 군대 문화와 비슷하다. 신입생은 선배들에게 늘 먼저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히 가십시오. 선배님!”하며 인사를 해야 한다. 선배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OO학번 OOO입니다.”라고 대답하라고 권한다. 그리고 선배에게 전화를 할 때는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통화 가능하십니까?”라고 말을 건네야 한다. 어말어미를 ‘다’와 ‘까’로 끝내는 말투는 군대에서 사병끼리 사용하는 말투다. 이 말투는 군에서 선임자와 후임자 사이의 엄격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투다. 그런데 이런 말을 대학생 신입생에게 강요하는 것은 선후배 관계를 군대처럼 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물론 이것이 군대 화법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정중한 표현을 위해 이런 화법을 많아 구사한다. 문제는 잘못된 사용에 있다. 무조건 ‘다’나 ‘까’로 문장을 맺으려다 보니 자연스럽지 않다. 그리고 군대는 엄격한 계급 사회이니 정중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도 있다. 하지만 대학에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거부감이 인다. 배포된 문건에는 앞존법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압존법을 잘못 썼다. 압존법이란 문장의 주체가 화자보다 높지만 청자보다는 낮아, 그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압존법에 따라 “교수님, 선배가 아직 안 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과는 이런 표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나 보다. 다섯 번째의 3S(speed, sound, sense)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추측해 볼 때 선배들을 대할 때 ‘빠르게(speed), 큰소리(sound), 감각(sense)을 갖춰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 상황도 군대와 비슷하다. 선임자가 부르면 신속하게 대답하고 큰소리로 대답해야 한다. 마지막 신입생들에게 학과 행사에 불참은 없다며 무조건적인 참여를 강요하고 있다. 단체 생활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개인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강압적인 문화다. 대학에서 일부 학과는 강권의 문화를 전통으로 계승하는 경우가 있다. 대학에서 단체 생활을 강요하며 일렬로 줄을 세워놓고 기합을 주기도 한다. 심한 경우 구타를 한다. 2008년에 모 대학에서는 체력단련을 마친 신입생이 뇌사상태에 빠진 사건이 있었다. 당시 피해자의 몸에 생긴 심각한 구타 흔적으로 보아 체력단련이라는 명목 하에 폭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선배라는 이름의 폭력은 강제적인 술자리와도 연관된다. 대학가에서 새내기를 맞이할 때 사발 같은 큰 그릇에 술을 가득 담아 한 번에 마시는 사발식을 한다. 이때 후배들은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선배들이 주는 술을 받아 마실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신입생이 만취한 상태로 건물에서 추락사하거나, 급성 알콜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강요는 성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011년 대학 모임에서 성관계를 묘사하는 행위를 신입생에게 강제로 요구했던 사진이 인터넷 유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법의 심판을 받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는데, 아직도 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신입생은 학과 내 분위기에 저항하기 힘들다. 소위 전통의 계승이라며 따르게 한다. 그리고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선후배 관계가 원만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참는다. 아울러 본인도 선배가 되면 대물림해야 하는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 내 폭력 방지 교육이 없고, 가해자 처벌 규정도 미미하도 없다. 이러다보니 피해자들은 강압적인 문화를 수용하거나 학교를 떠나는 방법 밖에 없다. 대학은 지성인의 집단이다. 자율성과 타인을 존중하는 문화가 성행해야 한다. 대학 고유의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하에 자율성을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현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는 더 이상 대학 문화가 아니다. 서로 보살피고 돕는 아름다운 문화가 필요하다. 대학 당국과 교수들은 대학생이 성인이라는 핑계로 생활 지도를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성인이라도 제대로 가지 않으면 교육을 해야 한다. 적극적인 신입생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비민주적 전통을 타파하는 지도를 해야 한다. 대학에서 자신의 의도와 반하는 강압적인 지시를 받고, 인권을 침해받는다면 어른들이 보호해 주어야 한다. 교수들도 개인 연구와 함께 어린 학생 지도에 힘을 쏟아야 한다.
충남 서산 서령고(교장 김동민)가 올해부터 그린마일리지(상·벌점제) 제도를 전격 도입했다. 그린마일리지 제도란, 학생들이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상점과 벌점을 학교 구성원들이 합의 하에 제정한 규정에 따라 해당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상·벌점제도이다. 예를 들면 언론 매체에 선·효행 학생으로 보도된 경우 5점의 상점이 부여되며 학교폭력과 관련된 신고를 할 경우 4점의 상점이 부여된다. 1년간 상점이 10점 이상 누적되면 학교장 표창 및 외부기관에 장학생 및 모범학생으로 추천된다. 반대로 벌점이 40점 이상 누적되면 사회봉사 3일의 징계에 처해지며 50점 이상일 경우 강제 전학 및 퇴학처분이 내려진다. 벌점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음주 흡연으로 50점, 환각제 사용이 50점, 학교폭력 관련이 40점 등이다. 상점은 1년 단위로 부과되어 소멸되지만, 벌점은 졸업할 때까지 계속 누적되어 보다 엄중한 처벌이 가능해진다. 3월 4일부터 8일까지 학생계도 기간을 거쳐 3월 11일(월)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김상현 학생부장은 "이 제도가 잘만 정착되면 교권 및 학생 인권이 크게 신장될 것은 물론, 쾌적한 면학분위기 조성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교단 수기공모에 입상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미술 수업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문자 한 통. 얼핏 본 문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가라앉히기 힘든 기쁨의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자세히 살펴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금상’이었다. 열심히 미술 활동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나도 모르게 “얘들아, 선생님 금상 받았어!”하니 아이들은 일제히 “와!~”하며 일어서서 박수를 쳐줬다. 교단수기 공모에 응모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5학년 9반 꿈쟁이들’ 이야기를 글로 써서 공모전에 제출했는데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고 미리 얘기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금상’의 의미를 금방 알았다.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은 교실에서 내가 쓴 수기를 다시 한 번 읽어봤다. 부족한 글이지만 진정성을 인정해주신 교단수기 심사위원분들께 감사했다. 그리고 이 상이 특별한 목적 없이 출퇴근을 반복하던 10년의 월급쟁이 같은 생활을 마감하고 아이들을 향한 나만의 꿈으로 진짜 교사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최근 2년 동안의 노력에 대한 가장 큰 보상으로 여겨졌다. 어떤 교사가 훌륭한 교사일까? 수업을 잘하는 교사? 학급경영을 시스템화해 능숙하게 운영하는 교사?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읽어 주고 생활지도를 잘하는 교사? 다양한 연구대회에 참여해 좋은 성적을 내는 교사? 지금도 많은 선생님들이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난, 아직도 어떤 교사가 훌륭한 교사인지 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내가 맡은 아이들이 자기 안에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발견해 꿈을 꿀 수 있고, 미래에 이룰 꿈으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보여주는 교사이고 싶다. OECD 국가 중 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 꼴찌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공부하는 학생들. 학교폭력, 과도한 경쟁 등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스스로 세운 목표를 향해 즐거운 탐험을 하듯 공부에 몰입하고, 가치 있는 미래를 설계하며 매 순간 신바람 나는 학교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고 꿈꾸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교사생활에 새로운 힘을 얻게 해주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의미를 부여해 준 한국교육신문에 다시 한 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월급쟁이 같은 생활 마감 “연금 받으려면 학교에 얼마나 더 다녀야 하지? 어유~ 아직도 많이 남았네.”, “방학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 “학교를 그만두면 뭘 할 수 있을까?” 지난 10년 동안 난 ‘교사’가 아닌 그냥 그런 월급쟁이였을 뿐이다. 그런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이 갖는 정체성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2010년 겨울 길목에 들어선 11월 어느 날, 퇴근길 라디오 89.1MHz에서 평소 듣던 진행자가 아닌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귀를 기울였다. 김연아 선수의 슬럼프 이야기를 잠깐 하면서 ‘꿈 너머 꿈’을 꾸어야 한다는 그의 말에 이상하리만큼 몰입이 됐다. 우리 아이들이 ‘의사’, ‘변호사’, ‘교사’ 등의 명사형의 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형용사로 말하는 꿈을 꿔야 한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교사가 되어 행복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삶은 아름답다고 알려주는 작가가 되겠다’, ‘저소득층의 학생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경영자가 되겠다,’ 다소 포괄적이고 모호할 수 있어 보이지만 ‘꿈 너머 꿈’, ‘형용사로 말하는 꿈’은 내게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런 꿈을 꾸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학생들에게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지, 동료교사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면 좋을지 나만의 ‘꿈 너머 꿈’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새해가 밝았고 2011년을 새로운 선생님들과 새 학년을 시작하게 됐다. 나는 학년부장도 진로부장도 아니었지만, 학년협의 시간에 용기를 내 아이들에게 ‘꿈 너머 꿈’을 심어줄 수 있는 진로교육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꿈 교육은 아이들을 향한 특별한 목적 없이 출퇴근을 반복했던, 월급쟁이 같은 10년의 생활을 마감하게 했다. 2011년 순수한 마음으로 계획하고 진행했던 ‘꿈 너머 꿈 교육’은 아이들에게 작은 변화를 일으켰고 함께 연구했던 교사들도 의미 있는 상으로 보상받을 수 있어서 더없이 행복했다.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 내 마음속에 지펴진 꿈은 2012년 2월, 우리나라 최초의 맹인 박사인 강영우 박사의 ‘원동력’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더 강하게 타올랐다. 강 박사는 두 아들을 모두 미국의 필립스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그것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계획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필립스 아카데미의 건학이념에 있는데 ‘Not For Self’ 나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닌, 다시 말해 공부하는 이유가 자신의 출세나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사회, 국가, 더 나아가 세계를 위함에 있다는 말이다. 나 자신을 위한 작은 목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목표로 공부를 하니 출발부터 다른 것이다. 나는 ‘Not For Self’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꾸준한 실천 교육을 통해 과도한 경쟁에 의한 스트레스, 학생들 간에 이루어지는 심각한 학교폭력 문제, 그 밖에도 우리나라 학교에서 발생되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조금씩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기만 한 ‘Not For Self’의 꿈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학교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건 등은 ‘Not For Self 교육’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2012학년도 새 학기를 출발했다. 그렇지만 예상과는 달리 학생들 간의 다툼은 끊이지 않았고, 공부에 대한 의욕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한 학생을 여러 명이 이유 없이 놀리고 소외시키는 일까지 벌어지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아침마다 끊임없이 자성예언을 외쳤고, 59비전선언문(5학년 9반 비전 선언문)을 낭독했으며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Not For Self의 가치를 운운했다. 아이들의 변하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 사람이 변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하며 나를 다스려갔다. 점심시간마다 급식데이트를 하면서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보려 애썼고,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위해 내 시간을 쪼개 열심히 가르쳐 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그렇게 나 나름대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려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 내가 하고 있는 교육이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일이 발생했다. ‘찌는 듯한 더위’가 실감 나는 뜨거웠던 어느 날, 남아서 공부를 하기로 했던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으로 가버렸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아 그 아이와 친한 친구에게 전화했지만 통화를 할 수 없었다. 너무 화가 나서 그 아이 집으로 향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사실 아이들이 도망가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애쓰는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서운함이 컸던 탓일까? 그날 난, 그 아이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집요했다. 퇴근길에 차 안에서 3월부터 있었던 많은 일들을 떠올리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에게 Not For Self가 가당하기나 한 얘기냐?’ 왠지 모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날 저녁,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혼날까 봐 기죽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하는데 화가 나기보다는 괜스레 측은히 여겨졌다. 다음 날 아침 조회시간, 없었던 일로 하고 그냥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아 반 학생들 모두에게 어제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아이를 앞으로 나오게 했다. “태성(가명)이가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고 그냥 가버린 것은 잘못한 일이고, 그런 행동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태성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생님이 공부를 시킨 것이 태성이에게는 힘들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는 태성이가 앞으로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너희들 모두가 한 사람씩 나와서 꽉 안아주며 격려해줬으면 좋겠구나. 남자들은 허깅(hugging)을 하고 여자들은 악수하며 격려해주자.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대사를 하고 난 후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는데,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장면이었다. 힘을 다해 꽉 안아주는 남자아이들이 너무 대견했고, 쑥스러워하면서 악수를 해주는 여학생들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태성이는 그날 안겼을 때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태성이는 비록 성적에는 큰 변화가 없어도 적어도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나는, 그날 본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새롭게 힘을 얻으며 또다시 열정을 뿜어낼 수 있었다. “선생님, 슈퍼맨이 된 것 같아요” 우리 반에서는 Not For Self 가치를 실현해보기 위해 많은 활동을 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국제 NGO ‘생명누리’에 기부금을 전달한 일이다. 그것은 4월 수학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국사에서 몇몇 학생들이 땅에 떨어진 돈 7000원을 주워왔다.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해서 사실 매우 난감했다. 그때 불국사는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학생들로 가득 차서 돈의 주인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안내센터로 가서 혹시 돈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온 사람이 있었냐고 물었지만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방법을 찾아야 했기에 이곳에 기부할 곳이 마련돼 있냐고 물었는데 그런 곳도 없다고 했다. 돈을 주워온 학생들과 의논한 결과 우리 반 저금통에 넣어 좋은 일에 쓰자고 결론을 맺었다. 우리 반 저금통은 돈을 발견했는데 찾아주지 못했을 때 넣는 통이다. 가끔 복도나 학교운동장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줍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런 동전들은 주인을 찾아 주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다. 이렇게 모인 돈과 미술․실과․도덕교과를 통합 운영한 바자회 활동을 통해 얻은 기금을 합치니 7만8000원이나 됐다. 이 기금은 Not For Self의 가치를 실천하는 일에 쓰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이들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될지 무척 궁금해했다.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지에 대해 고민하던 중, 대학 때부터 ‘생명누리’라는 NGO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학년 선생님을 통해 단체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액수가 크지 않았지만 기부의 취지를 알게 된 생명누리에서 고맙게도 직접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이 모은 기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영상을 보여주며 설명해 줬다. 그런 과정들은 아이들 스스로 지금 하는 행동이 얼마나 뜻 깊은 지 느끼게 해줬다. 아이들이 그날 일에 대해 쓴 소감문에는 “내가 생명누리 단체에 기부금을 전달했는데 그 순간이 우리 반의 Not For Self 정신이 담겨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고 즐거운 추억이 될 것 같다.” “우리가 바자회를 해서 모은 돈을 뜻 깊은데 쓰는 게 자랑스러웠다.” “정말 우리 반이 슈퍼맨이 된 것처럼 좋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학생의 변화, 진짜 교사 만들어 학생과 교사 모두가 행복한 학교생활이 되기를 꿈꾸며 시작한 Not For Self 교육. 그것을 통해 우리 반 28명 모두에게 가슴 뛰게 하는 꿈이 생기고,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사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활동 후에 학생들이 말한 소감이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Not For Self 교육을 계속 해야겠다 마음먹은 이유는 나 외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하는 학생들, 자기에게 더 어울리는 꿈을 찾았다고 말하는 학생들,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고 말하는 학생들, 공부하고 싶어졌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선생님을 좋아해 주며 내가 하는 말을 실천해보려고 애쓰는 우리 5학년 9반 꿈쟁이들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번지게 된다. “사랑한다. 꿈쟁이들!”
죄 없는 아이들의 고통은 ‘세상의 업’이라고 한다. 교육 현장에서 위기 가정의 아이들을 상담하면서 어린아이 시절 입은 영혼의 상처는 세상 뭇 어미인 나의 가슴에 슬픔으로 각인되곤 했다. 예전 같으면 아이들의 비뚤어진 행동을 질책하고,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쉽게 바뀌지 않는 그들에게 속상해 했겠지만 그들 역시 가정과 사회의 피해자라는 생각에 인내하며 기다려주게 됐다. 전문상담교사로서 나의 작은 소양을 그들을 위해서 쓸 수 있음에 감사한다. 영은이는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고 언니의 학대를 못 이겨 가출했던 아이였다. 아이를 찾았을 때 마른버짐이 핀 얼굴과 벌에 쏘인 것처럼 온몸에 생채기 투성이었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잘살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상이 각박하다고 하지만 온정의 손길도 많다. 당시 처녀티가 나던 아이를 잘 보살펴 주었던 시장의 국수집 할머니, 번갈아가며 아이를 보살펴주던 우리 반 학부모님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현재 전국에 가출이 아동 10만 명, 학업 중도 포기 청소년 20만 명, 학교 부적응학생 178만 명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예비 사회부적응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을까? 지금도 많은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상담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바라본다. 햇살이 앉은 책상을 쓸며 수업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수상을 확인하라는 문자를 받았다. 교사로서 할 일을 당연히 했을 뿐인데 이런 큰 상을 주신 한국교육신문에 감사드린다. 더욱 정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아이들을 섬기자’라는 내 교육 철학을 다시 한 번 다진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골고루 감싸주는 진정한 교육자가 되겠노라 다부진 마음으로 디딘 교직생활 30여 년. 그동안 나와 인연 맺어졌던 수많은 학생들을 나는 과연 사랑으로만 감싸줬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시행착오로 얼굴 붉어질 일이 더 많았다. 항상 아이들을 공경으로 섬기자는 마음 끝에 나풀거리는 단발머리 하나가 걸어 나온다. 3월은 새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설렘의 달이다. 생활기록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학부모 란에 사선이 그어져 있는 쪽에 눈이 머물렀다. 보호자는 외조모, 5학년 2학기에 전학 왔으며 교과학습 발달사항에 양, 가가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행동이 느리고 실천력이 부족하며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편이라는 아이, 영은이와 첫 만남이었다. 영은이의 부모는 생존해있었다. 생모는 영은이가 여섯 살 되던 해 남편과 헤어진 후 영은이는 친정에 보내고 언니만 데리고 재혼했다가 외할머니가 작고하자 할 수 없이 데려왔다고 했다. 단정치 못한 용모에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전학 온 후 줄곧 따돌림을 받아왔던 아이는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고 매사에 신경질적이며 공격적이었다. 한 학기에 걸쳐 반 아이들과 나는 영은이를 공경으로 대했다. 기초 실력을 올리기 위해 개별 학습이 이뤄지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또래 도우미들이 나섰다. 진심 어린 보살핌으로 차츰 여느 아이들처럼 무리 속으로 들어왔다. 한시름 놓으며 그해 여름방학을 맞았다. 하지만 방학 끝 무렵, 반장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선생님, 영은이가 가출했답니다. 며칠째 시장 바닥에 돌아다니는 걸 국수가게 할머니가 데리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아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새로운 가정에서 잘 적응하는 줄 알았다. 생모가 재혼한 남편과도 헤어지고 자매에게 방 한 칸만 얻어준 채 아들만 데리고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한 살 터울인 언니가 툭하면 때리고, 잘못도 없이 제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다리를 지졌으며 대항하면 부엌칼로 위협한 것이 가출 이유라고 했다. 아이는 굶주림으로 시장을 헤매다가 인정 많은 그 할머니 눈에 띄었던 것이다. 연락을 받고 갔을 때는 아이가 이미 도망가버린 후였다. 여러 날 수소문 끝에 작년까지 살았던 W읍에서 영은이를 찾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고, 모기에 물린 얼굴은 벌집 같았다. 반바지 밑의 다리와 신발도 못 신은 맨발에는 여기저기 긁힌 생채기투성이였다. 버려진 아이 모습이었다. 집으로 데려가려는 나의 설득을 아이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아이의 연고자를 알아내기 위해 마을을 샅샅이 다녔다. 동네 소식마당인 미장원에서 영은이 외숙모의 연락처를 겨우 알아냈다. 오랜 설득 끝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이 쌓이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지척의 바다에서 파도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몸을 뒤채며 울고 있었다. 딱한 사정을 외숙모에게 소상히 전하며 아이를 맡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외숙모는 손사래를 치며 영은이 삼촌의 소재를 일러줬다. 가게로 들어서니 젊은 여자가 뾰족한 턱을 높이 들고 있었다. 첫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새된 목소리가 날아왔다. 절대로 아이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이의 친아버지 거처를 알려달라고 하니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고 했다. 그럼 할머니라도 뵙고 이야기하겠다며 이층 살림집으로 밀치고 올라갔다. 한쪽에서 버림받은 짐짝처럼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나에게 절박함과 용기를 주었다. 병색이 완연한 할머니는 흐느끼면서 아이를 보듬고 놓을 줄 몰랐다. 그 사이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협하듯이 팔짱을 끼고 왔다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렸다. “선생님, 우리 며늘아기 봤지예? 이 얘를 이 집에 들였다간 아픈 저까지 쫓겨 납니더. 차라리 고아원에 맡기소.” 들어서는 안 될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뛰쳐나갈까 봐 손을 꽉 잡았다. 나마저 몰라라 한다면 아이는 다시 시장바닥을 배회하거나 W읍의 외가를 서성이며 동네 구걸이나 할 것임이 뻔했다. 보호자를 찾을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새로 산 가방과 옷가지를 받고 빙긋이 웃는 영은이는 우리 집에서 가정의 온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생기가 돌았고 밝아졌다.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 집에서 함께 사니까 정말 좋아요. 선생님 딸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과 계속 함께 살면 안 돼요?” 간절하게 말하는 아이의 눈빛이 애처로웠으나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없었다. 생모의 행방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생모가 다방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막연했다. 할 수 없이 중학교로 영은이 언니를 찾아갔다. 한눈에 아이의 눈빛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 영은이 가출 후 새로 이사한 집으로 갔다. 어두침침한 방은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데 그마저도 나뒹구는 지저분한 이불과 수북이 쌓인 부탄가스 빈 병들로 꽉 차있었다. 가스 냄새와 눌어붙은 찬 찌꺼기 냄새가 뒤범벅된 방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말끔히 치우고 영은이를 데리러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언니를 본 영은이는 절규하며 결사적으로 버텼다. “흥! 또 때리고 젓가락으로 지지려고? 선생님, 언니에게 가느니 죽는 게 낫겠어요. 엄마도, 언니도 다 싫어요! 차라리 고아원으로 보내주세요!” 아이는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울부짖었다. 행복한 가정이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면 지금 영은이 앞의 현실은 무어라고 해야 할까? 가정은 춥고 어두운 밤길에서 멀리 보이는 불빛처럼 따뜻함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자매가 겪는 현실처럼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몇 날 며칠의 설득 끝에 드디어 영은이는 언니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에 대한 여전한 공포심으로 사흘간은 마당 한켠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주인집 마루 구석에서 몰래 잤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는 부진 과목 지도를, 퇴근 후면 곧장 자매 집으로 가서 엄마 역할을 했다. 아이들의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갈 무렵 드디어 생모와 통화가 이루어졌으나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출소한 생부가 딸들을 찾는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아이들이 만나길 원치 않아 모른 척했다. 어느덧 졸업이 다가왔다. 그날 영은이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영은이의 쓸쓸한 졸업을 축하해주려는 듯 눈이 내렸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영은이의 어깨를 감쌌다. 중학교에 진학한 영은이는 하키선수로 맹활약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님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언니의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오랜 교직 생활 동안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마른버짐 가득한 얼굴로 점심시간이면 생라면을 먹던 아이, 버림받아 할머니 같은 엄마에게 입양돼 가출을 일삼던 아이, 가정폭력에 시달려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있던 쌍둥이 자매…. 그들에게 부는 비바람을 막아주고자 애쓰며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다. 나는 섬세해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존재인 아이들의 상처는 보듬어주고 격려와 온정을 쏟아 그들의 보석 같은 잠재력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고 싶다. 그들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성껏 두레박질하는 것이 교사인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할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
새내기 교사로 교직에 들어왔을 때 열악한 교육환경 때문에 그리 보람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교사는 성직자 못지않게 소중한 직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정이의 담임을 하면서 1학년인 수정이가 혹시 잘못되지는 않을까 조바심과 걱정이 앞섰다. 수정이가 보통 아이들과 함께 건강하게 성장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들은 교사의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아이들은 교사의 관심만큼 성장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 수기를 쓰면서 다시 한 번 알게 됐다. 교사에게 있어 담임은 정말 매력적인 보직이다. 담임을 맡아 소속감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해야만 교사의 진정한 생명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있어 교사는 행복한 것이다. 비록 높은 보수와 지위는 없지만 교사는 세상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보람이 있어 행복하다. 한국교육신문 교단수기 공모 입상소식은 그동안 바쁜 교직 생활로 나를 잊고 살았던 차에 다시 한 번 삶의 활력소를 넘치게 해준 행복한 사건이었다. 더불어 앞으로 더욱 열심히 교직에 정진하라는 메시지로 이 상을 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은 작은 사회다. 교실 속의 작은 변화는 사회의 변화와 동일시해도 될 것이다. 이 시간에도 묵묵히 교단을 지키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땅의 수많은 선생님들 앞에서 나의 자그마한 이야기가 당선된 것 같아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올해 아들 녀석이 교대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합격했다. 아들을 보며 “부모로서 그래도 부끄럽게는 살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몇 개의 대학에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교사의 길을 가겠다며 매일 피아노를 연습하는 아들을 보면서 최소한 아들만큼은 좋은 교사가 되도록 조력하는 멘토 역할을 잘해야겠다는 다짐도 해봤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한국교육신문사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 더욱 좋은 교사가 될 것을 다짐해본다.
몇 해 전일이다. 우리 반에 여학생이 전학을 왔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수정이는 키가 보통 아이들보다는 조금 컸다. 아이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자리가 어디예요?”라고 묻고는 겸연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왠지 어딘가에 그늘이 있어 보였고 자꾸 눈동자를 마주치지 못했다. 수정이 아버지도 무슨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함께 온 여동생과 수정이를 잠시 나가 놀게 하고 아버님께 의자에 앉을 것을 권했다. 아버지는 묻지도 않았는데 “저 아이가 지난번 학교에서 좀 문제가 있었어요. 친구들 돈도 훔치고 거짓말을 해서 많이 힘들었답니다. 선생님께서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정도야 뭐 아이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문제지’하는 생각에 안심하며 “걱정 마세요. 제가 잘 지도하겠습니다”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다. 쌀가게 털이 사건 수정이가 전학 온 지 며칠이 흘렀지만 염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어느 날 방과 후 교실 정리를 하고 있는데 웬 젊은 남자가 수정이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교실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여기 사물함에 있니? 빨리 말 해봐!”하며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수정이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하고 묻자 “죄송합니다. 제가 외삼촌인데 글쎄 이 녀석이 돈을 훔쳤어요. 교실 사물함에 숨겨 놓았다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사물함 여기저기를 뒤져보더니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려는 나를 뒤로한 채 “다음에 말씀드리겠다”며 훌쩍 나가버렸다. 담임으로서 궁금하고 책임감도 들어서 퇴근 후 수정이가 살고 있는 임대아파트를 방문했다. 집에 들어서니 수정이 아버지가 천정만 바라보고 담배를 피우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제저녁 수정이가 쌀가게 금고에서 거액을 훔쳤다는 것이었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행동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수정이가 물건을 사러 동네슈퍼에 갔고, 100만 원권 수표를 수상히 여긴 가게 주인이 파출소에 신고해 발각됐다는 것이었다. 수정이가 돈을 숨긴 곳을 자꾸 번복해 학교 등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돈은 못 찾았다고 했다. 외삼촌에게 다리를 절뚝거릴 정도로 맞았음에도 돈의 행방을 말하지 않은 수정이가 한편으로는 불쌍해 보였다. 이런 큰 사건은 처음 겪는 일이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수정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환경 파악이 급선무였다. 가정방문을 해보니 아버지는 IMF 때 실직한 후 포장마차를 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장애인 판정을 받았고, 역시 양쪽 다리가 불편해 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어머니는 매일 침대에 누워 생활하고 있었다. 수정이네는 생활보호대상자로 정부에서 나오는 매월 70만원의 생계보조비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수정이 밑으로도 여동생(6세), 남동생(4세)이 있었는데 남동생은 “꺼~꺼~” 소리만 낼 뿐 말도 잘하지 못했다. 내가 방문하자 두 동생은 내 품에서 안아 달라고 조르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보챘다. 가정방문을 마치고 앞으로 내가 도와야 할 부분이 많음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학교는 잠자는 곳 쌀가게 사건 이후, 수정이는 학교에 오면 수업 시간에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교실 천정만 멍하니 쳐다봤다. 상담실에서 수정이의 손을 잡고 얘기해보니 파출소에서 아버지, 쌀가게 주인과 함께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았고 아빠한테 혼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부보다는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보건실에서 쉬다 오게 했다. 그런데 4교시가 끝나가도록 교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보건선생님께 좀 깨워달라고 부탁하니 워낙 곤히 잠들어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보건선생님이 깨워 오후 4시가 넘어서 교실로 들어오는 수정이에게 “잘 잤니?” 묻자 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이 없었다.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더니 “선생님, 저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아빠가 또 때린단 말예요”하며 꺼려했다. 수정이를 몇 번 설득했지만 거절을 해서 아버님께 조금만 데리고 있겠노라 전화를 드리고 교실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같이 먹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집까지 바래다줬다. 아버님께 잘 지도하겠으니 절대로 더 이상 매를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이의 세 가지 소원 며칠 후 경기도 아동학대센터 상담원이 학교와 수정이를 방문했다. 상담원은 어제저녁 편의점 직원의 신고를 받고 왔다며 수정이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상담원도 수정이의 집에 있는 사이 그가 보는 앞에서도 엄마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대드는 등 어린이답지 않은 행동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동학대센터에서 병원을 소개했고, 다음날 수정이 아버님과 함께 찾아갔다. 의사가 상담 중 수정이에게 세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다. 아이는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편안하게 모시는 것,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것,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말했다. 의사는 수정이의 소원이 대학생 정도 나이에나 할 수 있는 얘기라며 어떻게 초등 1학년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소아정신과 전문의가 아니어서 더 이상 도움은 줄 수 없다고 했다.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수정이의 소원은 불우한 가정환경과 가난 때문인 것 같았다. 아이는 급식시간에 언제나 다른 아이들보다 두 배 정도의 양을 더 먹었다. 혼자 먹기가 멋쩍었던지 “선생님, 제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셔야 해요. 약속할 수 있죠?”하고 다짐까지 받았다.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는 날이면 수정이가 정신없이 먹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시 시작된 절도, 결석 병원에 다녀온 후 며칠 조용했던 수정이가 또 도벽을 했다. 3교시 수업을 하려는데 남자아이들이 “수정이가 돈을 훔쳤어요”라며 1반 아이의 호주머니에서 꺼내 갔다는 것이었다. ‘설마’하는 생각에 1반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더니 사실이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았지만, 지난 일로 앞으로 도둑질, 거짓말은 절대하지 않겠다던 나와의 약속을 깨뜨린 수정이가 얄미웠다. 더구나 돈을 잃어버린 아이는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수정이의 행동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정이를 교실에 남게 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수정이는 도벽을 완강히 부인했다. 타일러도, 윽박질러도 봤지만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돌려보내고 퇴근 후 어머니와 통화해보니 아직 집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밤늦은 통화에서 수정이는 밤 11시가 다 돼서 들어왔으며 학교에서 1만1000원을 훔쳤다고 말했다고 했다.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약속을 깬 죄책감이거나, 혼날까봐 겁을 먹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수정이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생활지도가 이렇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문제아 한 명이 우리 반 전체보다 더 큰 느낌이었다. 학교 주변의 오락실과 PC방, 만화방을 찾아봤지만 헛수고였다. 가는 곳마다 오락실 주인들에게 수정이네 집과 내 연락처를 알려주고 앞으로 수정이가 올 때면 연락을 달라고 당부를 했다. 3시간의 추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튿날 학교로 출근하기 전 곧장 수정이의 집으로 향했다. “수정아 학교가야지”하고 아무리 불러도 이불을 쓰고 꿈쩍하지 않았다. 아빠한테 많이 혼난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달래 손을 붙잡고 학교까지 걸었다. 선생님한테 혼날까봐 학교에 오지 않았고, 아빠한테 벌을 받거나 매를 맞기 때문에 집도 싫다고 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반성하기보다 부모님의 체벌이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하면 수정이의 도벽을 고칠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자존감 높여주기 대작전 수정이가 학교에 잘 적응하고 도벽을 줄일 방법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방법이 좋을 것 같았다. 1반 아이의 돈을 훔친 뒤로는 아이들이 수정이를 왕따 시키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수정이는 학교에 오면 주로 나와 대화했다. 그런 수정이에게 “학교에 오면 친구들 하고 놀아야지”하면 “저하고는 안 놀려고 해요. 저보고 자꾸 00년이라고 해요”라며 내 손을 꼭 잡을 때가 많았다. 가끔씩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수정이를 꼭 안아주기도 하고 불끈 들어서 빙 돌려주면 “선생님이 수정이 아빠예요? 왜 수정이만 예뻐해요”라며 질투하는 아이도 있었다. 수정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 집에 가봤다는 얘기부터 선생님이 붕어빵과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자신의 집에 자주 오신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나에게 만이라도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레포 형성이 필요할 것 같아 수업이 끝나면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우리 집 구경도 시켜줬다. 우리 집에서만큼은 편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동화책도 읽어주고 받아쓰기 연습도 하고 라면도 같이 먹으면서 친해지려고 노력을 했다. 수정이의 손을 붙잡고 교실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앞으로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면 지난번과 같이 상도 주고 친구들 생일파티에 꼭 초대되도록 약속하겠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동안 여러 번의 생일파티가 있었지만 번번이 수정이는 초대받지 못해 간절히 원해왔었다. 그러던 중 얼굴도 예쁘고 똑똑한 우리 반 은아의 생일이 있었다. 하지만 은아 역시 수정이를 생일 파티에 초대하지 않았고, 수정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더구나 생일 파티를 집이 아닌 ‘정글인’이라는 곳에서 했기 때문에 수정이의 실망은 매우 컸다. 며칠 전 약속도 있고 해서 수정에게 “선생님이 노력해 볼 테니 걱정 말아라”하고 위로하고 은아네 집에 전화를 했다. 마침 학교운영위원의 자녀여서 부모님께 사정을 말씀드리니 걱정 말라며 은아를 설득해 초대하겠노라고 했다. 드디어 생일 파티에 수정이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정글인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마냥 신나서 정신없이 놀았고 수정이를 배척했던 아이들도 나와 학부모님이 놀이기구를 타고 수정이와 함께했더니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놀이기구를 신나게 타는 수정이는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초등 1학년이었다. 수정이에게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신념을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12월24일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기분으로 학예회를 준비했다. 노래와 율동, 닭싸움, 태권도 시범 등과 촛불의식이 있었다. 1년간 친구들이나 선생님께 잘못했던 점을 반성하고 새 학년의 각오를 한 가지씩 적어서 부모님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드디어 수정이 차례가 왔다. “부모님, 선생님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정직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수정이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다짐을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교사에게 담임은 정말 소중하구나, 정말 내가 보람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정이에게 이 순간은 매우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대부분의 도벽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의 왜곡된 표현이거나 경제적 빈곤 때문에 일어난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수정이 같이 누군가의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아이들이 많이 있지만 자칫 소홀히 여겨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어린이가 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선생님들께서 수정이와 같은 아이에게 좀 더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