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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검색연하장이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고 있다. 왜? 몇 년전까지만 해도 연하장을 대신 한 것이 이메일이었다. 지금은 문자 메시지, 페이스북, 트위터 등 SNS가 대신하고 있다. 어찌보면 우리 국민의 ‘빨리빨리’ 문화에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도 연하장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을까? 있다. 필자의 경우, 올해 일곱 장의 연하장을 받았다. 연하장 발송은 문자 메시지나 페북으로 대신하였다. 정성이 부족하지나 않았는지 반성해 본다. 연하장에 대한 생각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있다. 젊은 교사 시절, 사랑을 베풀어 주신 상관이나 선배님들께 보냈다. 제자들에게는 답신으로 보냈다. 손으로 쓰는 연하장이라 상대방마다 문구가 다 달랐다. 아마도 50 여장 이상을 보냈다. 상대 맞춤형 연하장이다. 연하장에 관한 몇 가지 질문. “연하장, 몇 장 받았지?” 이것은 내가 그만치 인간관계를 잘 맺고 있다거나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연하장, 누구에게 받았지?” 나의 존재 가치에 관한 질문이다. 직위가 한참 높은 분이 보내주었다면 나의 직책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자리다. “연하장, 몇 장 보냈지?” 지인들께 많이 보낼수록 희망과 미래가 있는 사람 아닐까? 연하장에 대한 유감도 있다. 한결 같이 인쇄된 글씨다. 대량 생산된 똑 같은 것을 내가 받은 것이다. 이런 경우, 개봉하였을 때 감동이 반감된다. 모 회사 회장은 인쇄본 청첩을 보내도 상대방 성함과 자기 이름은 꼭 자필로 기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소한의 예의는 표하는 것이다. 중학교 교장이라서 그런지 대통령의 연하장이 도착하였다. 청와대 설경 사진이 배경이다. “우리 경제가 달리는 말처럼 힘차게 뻗어가고 대한민국이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도록 국민 여러분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보내왔다. 특별히 교육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통령이 보낸 일반적인 문구로 추측된다. 지방자치단체장 연하장도 집에 도착하였다. 방화수류정 설경이 배경인데 “항상 우리 이웃과 함께 가슴 따뜻한 수원을 만들어가겠다”는 새해 약속이 담겨 있다. 의회의장도 덕담을 적어 보냈다. 교원단체인 한국교총 회장도 보냈다.경기교총 회장도 회원들에게 비교적 긴 문장의 ‘새해 새아침’의 인사를 전한다. 교직원으로부터 직접 전해 받은 연하장은 손글씨여서 정겹기만 하다. “환한 미소와 자상함으로 늘 친절하게 대해 주시는 교장 선생님과 한 학교에 근무할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칭찬이긴 하지만 내 자신을 반성해 보게 된다. 정말 선생님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지. 올해 연하장의 백미는 누가 보낸 것일까? 바로 제대한 아들이 전해 준 ‘Happy new year' 남자는 군에 다녀오면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그 영향이었을까? 자취방에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 위해 청춘을 불사르겠다”고 말미에 썼다. 아들이긴 하지만 부모와 대화가 많지 않은 편이다. 그저 부모의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가슴속 이야기를 들으니 뭉클하다. 사라져가고 있는 연하장. 인쇄본이지만 보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보낸 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더 바란다면 대상에 맞는 내용이 아쉬울 뿐이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연하장이다.
승희야, 이제 2014년 새해가 밝아 왔구나! 네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준비한고등학교에 합격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특별히 다른 분위기에서 공부하겠다고 많은 친구들이 가는 학교와는 다른 학교를 택한 너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네가 그 학교에 가서 내신이 불리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단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진학시에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 학교를 결정한 후 내신이 불리하니 그 학교를 그만두고 1년 후 다른 선택을 한 너의 선배들을 지켜 본 것 때문이다. 학교생활은 단순히 대학진학만을 위하여 수능준비만을 하도록 하는 곳이 아닌 공동체 생활을 통한 내신관리를 기본으로 하는 조직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그래서 예비 고1 학생들은 고등학교 내신 관리와 수능 준비는 물론 자신의 적성을 고려해 인문, 자연계의 진로도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순위를 정해 준비해야 한다. 고1은 대학입시에서 뜻하는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초석을 다져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따라서 예비 고1은 마음가짐부터 달라져야 한다. 고1이 되면서 3월, 6월, 9월, 11월에 모의고사가 실시되고 사이사이에 중간·기말고사가 있어 거의 매월 시험을 치르게 된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중학 3년간의 학습방법을 냉철하게 돌아보고 ‘잘 아는 부분’과 ‘모르는 부분’을 구분하여, 부족한 부분의 학습을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다. 내신 대비를 위한 공부 방법과 수능까지 내다보는 장기적인 공부계획, 과목별 전략에 따른 시간 배분 등을 생각하면서 공부 계획을 수정해 나가야 한다. 첫재로, 목표 설정과 평상시 공부 습관화이다. 고등학교의 공부는 중학교 때와 다르다. 중학교 때 성적이 좋은 학생이 고교 진학 후 성적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중학교와 고교 시험의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학시험이 수업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는지를 묻는 형성평가 중심이라면 고교시험은 서열화를 위한 평가시험이거나 작은 수능시험이라 할 수 있다. 시험 범위 지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아진다는 것을 알고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따라서 고1 때부터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확실한 학습계획을 세워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대학입시에서 성공할 수 있다. 또 고등학생은 수능과 내신 공부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1년 내내 꾸준히 공부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므로 공부와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둘째, 철저한 내신 관리는 기본이다. 고입에 비하여 대입에서의 내신 비중은 현격히 떨어진다. 정시모집은 수능 위주로 선발하고, 수시모집은 학생부·논술 위주로 선발하지만 상위권 대학에서 학생부의 실질 반영률은 10% 이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신 비중이 낮다고 하더라도 내신은 수능의 기초를 세워줄 수 있는 공부이기 때문에 등한시해서는 안된다. 특정 과목에 치중하지 말고 주요 과목(국·영·수·사/과)을 중심으로 공부계획을 세워 내신에 대비해야 한다. 평상시와 방학기간에는 수능대비 학습을 중심으로, 중간·기말고사 3~4주 전부터는 내신대비 학습에 주력해야 한다. 탐구영역은 고2 때부터 시작해도 되므로 내신기간에만 공부하고, 1학년 때에는 국·영·수를 중심으로 공부하는 것을 권한다. 국·영·수 내신 준비의 경우 국어는 중학교 3개 학년의 교과서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중학 기본개념이 잘 정리돼 있으면 고교 공부에서 자신감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교입학 전까지 선행학습보다는 중학교 과정 총정리에 초점을 맞춰야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비교과 영역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분야이다. 학생부는 교과와 비교과로 구분되는데, 흔히 내신이라 하면 교과 성적을 얘기한다. 그러나 최근 입학사정관에서는 각종 대회 수상기록, 출결, 봉사활동, 어학시험 성적, 학생회 활동 등 비교과 부분이 중요해지고 있으므로 비교과 영역도 관리해야 한다. 보통 고교 1~2학년 때는 비교과를 준비하고, 3학년 때 서류 평가 준비 및 비교과 내역에 대한 관리를 하는 것이 좋다. 선호되는 비교과인 텝스를 비롯한 각종 어학능력시험은 문과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유리하다. 주요 대학들이 수시모집에서 글로벌 전형이나 어학 특기자 전형을 통해 상당수의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이과의 경우에는 수학·과학 경시대회를 통해 특기자 전형에 응시하면 유리하다. 경시대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겨울방학 동안에 개념 학습과 더불어 기출문제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비교과 영역을 준비하는 데 따로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봉사활동이나 독서, 체험활동 등 평소 짬짬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리고 교과목별 과목 학습 전략을 항상 머리에 생각하면서 추진한다면 결코 후회함이 없는 고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너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나에게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만 줄인다.
2014년부터 교육감과 학교의 장에 학생건강증진을 위한 책무성 강화되고 학교에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 교육이 의무화된다. 국회 본회의(’13.12.10.(화))에서 학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이통과되었는데 이번 학교보건법 개정은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인「학교폭력 및 학생위험 제로 환경 조성」을 실효성 있게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었다. 개정 법률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육감에게 학생의 건강증진을 위한 학생건강증진계획을 수립․시행하도록 하여, 교육감의 학생건강증진을 위한 책무성을 강화하고, 그간 교육청 차원에서 개별적으로 지원되었던 학생 정신건강 관련 검사비, 치료비 등 필요한 비용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대구시교육청의 경우, 학생들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경북대 의대․영남대 의대 등 31개 병․의원과 상호 협력하여 학생들의 치료를 돕고, 치료비를 지원 (1,900여명, 7억3천만원 지원, ’12년)한바 있다. 학교의 장에게는 매년 실시하는 학생 정서행동특성검사 결과,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학생에 대한 상담 및 관리, 전문상담기관 또는 의료기관 연계 조치를 의무화하였다. 2012년 학생 정서행동특성검사 결과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 대한 관리를 위한 전문기관 연계․관리 현황을 보면① Wee센터 (29.6%, 66,271명), ② 보건소 내 정신건강증진센터 (12.9%, 28,937명), ③ 청소년상담센터 (4.2%, 9,407명), ④ 병원․의원 (4.1%, 9,103명)이다. 우리 나라 학생들이 가지는 각종 스트레스로 인하여 정서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이제 법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려 하게 되었다. 정서적으로 어려움을 경함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대하여 학교의 장이 나서야 하겠다.
새해 첫 주말이자 1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인 5일, 연인과 가족단위의 나들이객들로 시내 곳곳이 인파로 북적였다. 소한이 무색하게 청명하고 포근한 날씨에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은 다양한 볼거리와 놀이를즐기며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광양여중 3학년인 안소연 학생은 문학 소녀이다. 선천적으로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나 뼈가 약하다. 그래서 휠체어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잠을 자기가 싫어 책을 가까이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의 마음을 마음껏 누구의 제약도 없이 하얀 종이 위에 자유롭게표현하는 것이다. 2013독서감상문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학교,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글쓰기 대회에서 수차례 수상을 하였다. 앞으로 그와 함께 지낸 친구들이 추억으로 남길 수 있는 격려의 글을한 학급 친구들이 써 주었다. 소연아, 네가 신문에 난 것을 축하한다. 네가 그런 활동을 하는 줄 이제야 알았다. 앞으로 훌륭한 작가가 되길 바란다. 네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작가에 소질이 있는 줄은 몰라 놀랐다. 열심히 책 읽어 좋은 작가가 되길 바라고 나도 열심히 하겠다. 작가가 꿈인 줄은 몰랐는데 너는 훌륭한 작가가 될 것 같다. 열심히 해라. 중학교 때부터 넌 꿈이 확실하고, 그 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네가 아 직 정확한 꿈이 없는 나는 부럽단다. 졸업때까지 남은 기간동안 잘 지내 자. 평소에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한다면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바란다. 너를 볼때마다 훌륭한 작가가 될수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해 작가 가 되면 책 꼭 사 읽겠다. 비록 고등학교는 다른곳으로 가지만, 장래희망을 이루어 멋진 사람이 돼 다시 만나자. 꿈을 향해 많이 노력하는 네가 부럽고 나도 열심히 노력하겠다. 나도 노력해 커서 꿈을 이룰테니 너도 열심히해 훌륭한 작가가 되길 바 란다. 지금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앞으로 정말 열심히 노력해 꿈을 이루고 싶 다. 우리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꼭 만나자. 나는 네가 유명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너의 꿈을 위해 적극적으 로 행동하고 열심히 하길 바란다. 꿈을 향해 열심히 하는 모습이 대단하고, 작가가 되면 사인회에 찾아 가겠다. 너와 많이 친하지는 않지만 너의 좋은 점들을 닮고 싶었고 꼭 유명한 작 가가 되길 바란다. 앞으로도 열심히 공부하고 글 써서 똑 너의 꿈을 이루길 바란다. 나도 유명해 질테니 너도 성공해서 세계적인 작가가 되길 바란다. 나는 아직 꿈이 없는데 내 재능을 찾아 나의 멋진 세상을 만들어가고 싶 다. 너도 작가라는 꿈을 잃지않고 너의 세상을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너는 좋은 작가가 될거다. 앞으로 열심히 하고 항상 응원하겠다. 작가가 꿈인 줄은 알았지만 대단하다. 앞으로 노력해서 좋은 작가가 되길 바란다. 법정스님처럼 훌륭한 사람들 같이 살아가며 꿈을 이루길 바란다. 서로 열심히 해서 각자의 목표를 이뤄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만나자. 나도 너처럼 노력해서 꿈을 이룰 것이다. 네가 쓴 글이 나에게 와 닿았 다. 좋은 글 자주 많이 써 주었으면 좋겠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너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은 것 같아 지금처럼 노력 해 훌륭한 작가가 되길 바란다. 너의 글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장차 커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라는 꿈을 어떤일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네가 훌륭하고 멋진 작가가 될수 있을거라 믿는다. 나중에 같이 성공하여 웃는 얼굴로 만나자, 고등학교에 가서도 좋은 글 많이 쓰길 바란다. 지금처럼 열심히 노력하며 포기 하지 말고 꼭 너의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서울대가 2015학년도부터 문과생들의 의학계열 교차 지원을 허용하기로 한 방침을 철회했다. 서울대는 2013년 12월 27일 “수의과대학 수의예과, 의과대학 의예과, 치의학대학원 치의학과에 수능 응시영역에 따른 문·이과 교차지원을 허용하는 입시안의 2015학년도 시행을 유예한다.”라고 하며 “추후 교육 여건 및 사회 환경을 고려하여 시행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27일 밝혔다. 이에 앞서 서울대는 11월 14일 ‘2015학년도 대학입학전형 주요 사항’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간호대·건축학과 외에 의대·치대·수의대에도 문과생 지원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당시 발표 내용에 의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이과 수학(수학B)과 과학탐구 대신에 문과 수학(수학A)과 사회탐구를 치른 수험생에게도 응시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울대 방문석(재활의학) 교수는 “대학에서 문과를 전공하다 의대 본과에 편입한 학생들도 무리 없이 학업에 적응하고 있다.”라며 교차 지원 허용을 환영했다. 다시 말해서 한 달 만에 서울대는 중요한 입시 정책을 뒤집었다. 문과 학생들에게 의학 계열 입학을 허용했다가 다시 번복을 한 것이다. 입장을 변경한 배경에 대해 서울대는 입시 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초·중등 교육 현장과 수험생에게 혼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입학정책위원회, 입학고사관리위원회, 학사위원회 등 소정의 절차와 논의를 거쳐 시행 유예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물론 교차 지원 허용은 외국고등학교와 국제고등학교가 인기를 끌고, 일반고의 하락이 더욱 가속화될 우려가 있다. 이미 2014년 특목고, 비평준화고등학교 인기가 올라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의대에 집중하면서 기초 학문이나 기타 학문의 불균형이 가속화될 문제점도 있다. 그러나 문·이과 교차지원은 어차피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다. 즉 앞으로의 시대는 계열을 뛰어넘는 학문의 세계가 온다. 서울대도 문·이과 교차지원 허용한다는 발표 당시 융·복합 시대에 부응하는 인재를 육성하려는 취지라고 밝혔다. 의대 등의 문과생 진학 허용은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융합 학문의 시대정신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조치에 대해 50년 넘은 문·이과 구분 제도의 폐해를 줄이자는 취지라고 밝힌 바 있다. 고교 때 정한 문·이과 구분을 대학 학과 선정에까지 적용해 학생들의 진로 결정을 제한하는 것은 스스로 문제가 된다고 설명했다. 서울대의 입시 정책의 변경에는 개운하지 않은 면이 있다. 서울대의 입시 정책의 번복에는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가 개입했다. 대교협은 서울대의 발표에 전형안 재고를 요청했던 바 있다. 당시 대교협은 교차 지원을 허용한 서울대 입시안이 외고 등 일부 특목고에만 유리해 일반고의 반발이 우려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결국 서울대는 대교협의 요청에 따라 입시 정책을 변경한 것이다. 물론 서울대는 대교협의 구성원으로 재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울대의 문·이과 교차지원 입시 정책은 시대적 과제이다. 교육부도 2021학년도에는 수능을 통합형으로 치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울대의 입시 정책은 그 발판을 마련하는 준비 단계였다. 그런 점에서 정책의 번복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서울대는 우리나라 대학의 중심에 있는 학교다. 이미 서울대가 의대 진학에서 문·이과 장벽을 없앰에 따라 이에 동참하는 타 대학들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대학들은 대입 전형안을 대교협에 제출할 때도 서울대 발표안을 보고 한다. 따라서 서울대의 입시 정책은 신중해야 한다. 서울대를 준비하는 학생, 학부모 등을 배려하는 것을 떠나서 우리나라 입시 정책의 큰 줄기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대학 입학 전형 제도가 어떻게 수립되고 운영되는가는 우리 중등 교육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서울대 측은 입시 제도의 급격한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는데, 입시 정책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은 더 바람직하지 않다. 안정적인 입시 정책만이 공공성을 확보하고 신뢰성을 얻을 수 있다. 입시 정책은 입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의 기반이 되기도 한다. 아울러 잦은 정책의 변화는 사교육 시장으로 번져 피해가 심각하다. 우리는 21세기를 앞두고 문명사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적절하게 부응하지 못하면 낙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인식 아래 교육 내용과 방법 등이 변해야 한다. 최근 학문의 추세는 경계 허물기이다. 서울대가 애초에 의도한 의대 등의 문과생 진학 허용은 이러한 시대정신의 실천이다. 말로만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는 융합 학문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학의 경쟁력이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만을 유치하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서울대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맞는 입시 정책을 설계해야 할 운명도 안고 있는 것이다.
시은아! 2014 갑오년 새해가 밝아왔구나. 시간은 이렇게 가go 오go 하는 게 인생이 아니겠니? 무엇보다도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모두 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는 시기임에도 졸업과 동시에 취업에 성공한 너에게 축하를 보낸다. 요즘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어려운 주위의 젊은이들의 삶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올해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했다는 어느 청년의 글은 “안녕들 하시냐길래, 올 한해 내 삶을 돌아봤어요”로 시작한 글을 읽었단다. 봄에는 학점을 따기 위해 공부만 했어도 B+밖에 못 받았고, 평점이 4.0이 넘었지만 학점 괴물들 탓에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고 탄식했다. 여름에는 새벽 6시부터 학원에서 토익 공부를 했고, 가을에는 ‘진짜 나’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푸줏간에 걸린 돼지고기가 된 것 같았다고 자학했다. 면접에 실패해 신생아처럼 우는데 들려온 “이 세상 살다 보면 슬픔보다 기쁨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야”라는 이문세의 노랫말은 그에게는 ‘터무니없이’ 해맑게 들렸다니 우리는 제각기 자기의 입장에서 들려오는게 아닐까? 넌 일찌기 수도공고를 선택하여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가는 것을 보니 정말 대견스럽다. 네가 다닌학교의 취업률이 올해 94%를 넘었다니 자랑스럽구나. 그러나 취업이 전부는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기 바란다.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기만을 고집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할 것이다. 난 너처럼 발상을 바꾸고 방법을 찾으면 못할 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올해 우리학교 졸업생 가운데도 전체 성적이 2%내에 드는 학생이 특성화 고교를 진학하였단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의 대다수 젊은이는 수능과 대기업 공채라는 ‘외길’에 갇혀 좌절하고 있다. 우리 나라 젊은이들 실력은 최고다. 25~34세 대졸 비율은 6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영어 실력은 비영어권 1등, 수학은 세계 1위다. 하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다니 1위면 무슨 도움이 되겠니? 현대경제연구원 조사에서 행복한 20대는 절반(46.4%)이 안 됐다. 20대들의 걱정의 절반(53.2%)은 "일자리와 교육”이라고 한다. 한국의 청년 고용률은 40.4%로 OECD 평균(50.9%)에 한참 모자란다. 원인은 고학력에 따른 대기업 지원 쏠림, 지방 근무 기피 등에 따른 미스매치(구인·구직 불일치)다. 경기개발연구원은 미스매치에 의한 실업자를 40만 명으로 분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실업 손실 추정을 대입하면 장기적으로 약 30조원의 소득이 날아가고 있다. 청년단체인 청년유니온에 따르면 이력서 한 장을 쓰는 데 필요한 스펙 비용도 1인당 4269만원에 달한다니 이 돈은 누가 부담하고 있을까. 이렇게 해도 벽은 높다.아직도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취업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 4수 중인 김모(29)씨는 학점 4.3점(4.5점 만점)에 토익은 900점에 육박한다. 그는 “그저 그런 기업에 갈 수 없다는 압박감에 접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1996년 대학자율화 이후 대학이 많이 설립되어 대졸자가 급증하면서 ‘대학 나왔으니 대기업에 가야 한다’는 도식적 사고에 모두가 갇혔기 때문이다. 이같은 문제에 대하여 정치인과 행정을 한 지도자들이 결국 책임을 져야하는데 지금 책임지는 정치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형편이다. 넌 이제 평생학습시대를 대비하여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공부가 무엇인가를 찾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직장에서도 네가 없으면 안된다는 상사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네 자신을 잘 갈고 닦기를 바란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기에 학습하지 않고는 변하는 시대를 따라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네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으니그렇게 지칠 필요도 없으니 얼마나 다행이니.무엇보다 건강도 잘 챙기면서 삶의 여유를 만들어 가기 바란다.
학교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학교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어디일까? 사람마다 답이 다를 것이다. 어른들은학생 자살이 증가하고 있어'혹시 옥상 아닐까?'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옥상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굳게 잠겨 있다. 그러나 자살하려는 사람들은 학교보다는 아파트를 택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추락 위험을 막으려고 창문마다 안전 바(bar)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 학교 보건교사, 행정실에 위험한 곳을 알려준다. 미리 안전 조치를 취하여 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그 곳은 바로 동쪽과 서쪽 현관 출입구 경사로다. 장애인 휠체어 이동로인데 우리 학교엔 지체장애 학생이 없다. 그럼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급하게 내려가다가 넘어져 다치는 것이다. 눈이라도 오거나 빙판이 졌을 경우, 사고 위험은 크다. 교장인 필자도 학교 순회 중 이 곳을 이용하여 보았다. 학생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다. 정상인도 위험하다. 특히 실내화를 착용하고 내려가다가는 금방 넘어진다. 미끄럼 방지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면 보건교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대화를 나누어 보니 금방 알겠다. 본인이 직접 이용해 본 것은 아니고 학생들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보건반 동아리를 맡고 있는데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였던 것. "우리 학교에서 가장 위험한 곳을 직접 찾아 보세요?" 그래서 학생들이 찾아낸 것이다. 이런 것을 눈높이라고 한다. 학생의 입장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어른들의 시각과는 다르다. 아마도 이런 의견을 낸 학생은 직접 몇 차례 경험해 보았으리라. 그러나 학교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때마침 보건교사가 찾아 보라고 하니 넘어질 뻔한 경험이 떠올랐을 것이다. 작년 2학기 때 부터 행정실장과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임시로미끄럼 방지 테이프도 봍여 보았다. 그러나 그 테이프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떨어지고 만다. 습기에 약하다.미끄럼을 방지하는데 제 구실을 못한다. 학생들이 발로 비비면 금방 떨어진다. 경사 대리석에 일자로 홈을 파내어 저항을 주는 것도 생각해 보았다. 이것은 학생들이 운동화로 밟고 지나가면 홈이 메워지고 만다. 그러면흙이 메워진 홈을 긁어내야 한다. 홈이 흙으로 가득 차 있으며 미끄럼 방지 기능을 못한다. 그럼 어떻게 할까? 매트 설치도 생각해 보았다. 매트는 거추장스럽다. 쉽게 이동하므로 관리가 곤란하다. 또 수명이 짧다. 보기에도 흉하다. 현관 바닥 색깔과어울리지않는다. 그러고 보니 학교의 작은 시설물 하나 설치하는데도생각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장고 끝에 행정실에서 안(案)이 나왔다. 바로 슬립 키퍼(slip keeper) 고정시키기. 미끄럼 방지 재료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나사로 고정시키는 것이다.한 곳에 6개의 슬립 키퍼를 붙인다.두 곳이라 총 12개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하면 우천 시에도 견딜 수 있고장기간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소요비용은 70여만원 정도다. 학교장이 할 일, 여러 가지가 있지만최우선은 위험 시설 미리 발견해 안전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아닐까? 학생들이 학교에서 다치고 오면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아가 국가 공신력 실추로 이어진다. 사고는 예고를 하지 않는다. 관심과 사랑으로 미리 조치를 취해야만 예방할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인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나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나라, 수많은 신들이 삶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나라, 동물과 인간이 한 공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나라에 가서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기를 열망해왔다. 그 첫 번째 기회가 왔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한 달 동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때가 2005년 1월이었다. 나는 인도대사관에 찾아가서 직접 비자를 발급받고 비행기 표를 사가지고서는 배낭하나 걸쳐 메고 무작정 콜카타(캘커타는 영국식민지 시대의 이름)로 향했다. 첫 도착지로 캘커타를 정한 것은 그곳에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사랑의 선교회 ’ 본부가 있기 때문이다. 가는대로 바로 그곳에 가 ‘임종의 집’에서 5일 정도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그곳이 바로 동양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가 출생하여 성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일정에 따라 나는 콜카타에 여장을 풀고 닷새 동안의 봉사활동을 하고 타고르의 옛 집을 방문하였다. 이후 나는 아그라-사르나트-카주라호-바라나시-뉴델리를 한 달 동안 관광하였다. 그때 콜카타에 머물면서 나는 기차를 타고 200여km 떨어진 산티니케탄이란 곳을 잠깐 다녀왔다. 원래 일정엔 없었는데 여행 안내소에 타고르가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하고 집필활동을 하던 곳이라고 소개되어 있어서 부랴부랴 기차표를 사서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온 곳이다. 그때 느낀 개발되지 않은 조용한 시골도시라는 것과 거대한 규모의 대학 캠퍼스가 고색창연하지만 무척 낙후되었다는 인상만을 안고 하루 밤 묵어 바로 콜카타로 돌아왔다. 그 후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했고 인도를 다시 가고 싶었다. 2012년 1월 역시 혼자 비자를 발급받고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2월초 콜카타로 떠났다. 이번 일정은 콜카타에서 1주일 정도 묵었다가 바로 산티니케탄으로 가서 나머지 70여일을 그곳 타고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고장에서 묵기로 계획을 세웠다. 미리 호텔이나 하숙집을 예약하고 간 것이 아니었다. 현지에 가서 모든 것을 해결하기로 하고 떠났다. 콜카타에 도착하여 7년 전에 여러 번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로 찾아가니 옛날의 그 지배인이 여전히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기억하느냐고 하니까 기억난다고는 하지만 반가워하기보다는 그저 덤덤한 반응이었다. 숙박업소 특성상 수없이 많은 여행객이 드나드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때 근무하던 젊은이 두 사람은 없었다. 이튿날 나는 다시 사랑의 선교회가 운영하는 ‘임종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하려고 찾아 갔더니 내부는 텅 빈 채 건물 내 수리작업이 한창이었다. 작업하는 인부들만 눈에 띄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인부 하나가 나를 데리고 2층 수녀님에게로 데리고 갔다. 건물 내부공사를 하고 있으며 여기 있던 환자들은 모두 다른 시설에서 보호받고 있다. 공사가 끝나면 다시 환자들을 이곳에서 돌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나는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콜카타의 박물관, 사원, 기념관 등지를 두루 구경하였다. 콜카타에서 며칠 머물다가 나는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목적지인 산티니케탄으로 출발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나는 인도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준비했다. 관광 안내 책뿐만 아니라 인도여행기, 타고르 시집, 타고르의 소설 등도 챙겼다. 그중에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이 곽재구 시인이 쓴 “내가 사랑한 1초들”과 하진희 교수가 쓴 “산티니케탄”이라는 책이다. “내가 사랑한 1초들”은 곽 시인이 1년 6개월 정도 산티니케탄에 머물며 체험했던 내용을 시적인 문장으로 기술한 산문집이다. 그리고 “산티니케탄‘은 비슈바바라티 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던 하진희 교수가 쓴 산티니케탄의 다양한 면모를 체험담을 곁들여 기술한 책이다. 이 책들은 산티니케탄을 이해하고 여행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산티니케탄에 도착하니 급선무가 숙소를 정하는 것이었다. 릭샤를 타고 2005년도에 하루 묵었던 산티니케탄 호텔로 가자고 했다. 가서 매니저와 얘기하면서 예산과 맞지 않는 숙박료 때문에 포기하고 다시 릭샤에게 하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더니 두세 군데 들러 한 로지 하우스(Lodge House)로 갔다. 주인집 아주머니와 흥정이 잘 되어 비교적 싼 가격에 2개월 머물기로 합의를 보았다. 2층 방이었는데 대학생 두 명과 함께 쓰는 조건이었다. 숙소를 정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아주머니와 의견을 절충하여 세 끼 식사까지 하숙집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두 달 용돈 수준의 돈으로 두 달 동안의 숙식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산티니케탄 생활은 시작되었다. 우선 알고 싶고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타고르기 세운 학교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원까지 한 대학 캠퍼스에 산재해 있었다. 나는 밥만 먹으면 대학캠퍼스를 찾았다. 캠퍼스 한 쪽에 망고나무숲(Mango Groves)이라는 아름드리 망고나무가 빼곡한 평평한 숲이 있다. 이곳이 유명한 숲속 교실이다. 타고르는 학생들에게 지식보다 먼저 자연과의 친화적 교육을 통하여 인성과 창의성을 배양시킬 것을 강조했다. 타고르 생존시절부터 시행되어온 그러한 전통은 지금도 변함없이 100여 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다. 아침 일찍 망고나무 숲으로 가면 여기 저기 나무 아래 이삼십 명씩 학생들이 둘러 앉아 수업을 받고 있다. 나무 밑에 반달 모양의 아주 낮은 시멘트로 된 울타리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교실이다. 아름드리나무엔 쉴 새 없이 다람쥐들이 오르내리고 수많은 새들의 노래가 그치지 않는 나무 밑에서 그들은 수업을 받고 있었다. 물론 과학실험이나 미술이나 음악처럼 특별한 시설이나 장비가 필요한 경우는 예외겠지만 그들은 그런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다양한 동식물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인생과 우주의 원리를 깨우쳐가고 있었다. 캠퍼스 내엔 온통 타고르의 기념물들로 가득하다. 타고르가 예배를 올리던 사원, 타고르가 산책을 하던 산책로, 타고르가 집필활동을 하던 다섯 재의 집, 그리고 타고르가 직접 가꾸던 장미 밭도 그대로 남아 있다. 타고르 기념박물관을 꼭 방문하고 싶었는데 대대적인 내부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관람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는 주인집에서 쓰던 낡은 자전거를 수리하여 타고 다녔다. 서너 시간을 걸려 시 외곽지역 농촌마을에도 가고 한 시간 남짓 걸려 숲속에서 열리는 주말 마켓에도 갔다. 들녘엔 염소와 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멀리 마을 인근 호수에는 여자들이 옷을 입은 채로 목욕을 하고 한쪽에선 소를 호수에 몰아넣고 목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는 텅 빈 들판에 앉아 망연히 인도의 시골마을 바라보기도 하고 멀리 호수를 바라보며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인생과 우주에 대하여 생각에 잠기곤 했다. 산티니케탄 도시의 거리도 2005년에 잠깐 보았던 거리가 아니다. 그때는 자전거 행렬이 무척 한가로워 보였는데 7년 후인 2012년엔 엄청나게 늘어난 차량행렬로 거리는 온통 먼지와 경적소리로 가득했다. 인도의 변화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산티니케탄이란 도시 이름은 ‘평화의 마을’ 혹은 ‘평화가 깃든 곳’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평화스럽던 마을이 지금은 생존경쟁으로 아우성치는 것 같아서 짧은 기간 머무는 나그네에게도 안타까움을 안겨 주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하숙집엔 데바(데바르밥 로이)라고 하는 주인집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었다. 타고르가 세운 비슈바바라티(Visva Bharati) 대학 일본학과에 진학하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데바도 우리처럼 과외 선생이 방문하여 지도하곤 했다. 데바는 결국 3일간 나눠 치룬 입학시험에서 합격하였다. 그 시험 중에 악기를 하나 다루는 것과 수공예품 하나를 만드는 시험이 있다는 것이 좀 특이했다. 데바는 지금도 가끔 페이스북을 통하여 소식을 전하곤 한다. 데바 외에 대학생 6명의 대학생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나와 한 방을 쓰는 사누, 바바이 말고도 아랫방에 사는 띠와리와 우짤, 옆방엔 딥과 다다가 있었다. 물론 원래의 긴 이름은 따로 있는데 평상시에 부르는 애칭 같은 이름이다. 핛생들은 수시로 내 방에 들러 수다를 떨고 궁금한 걸 물으며 무척 사이좋게 지냈다. 그 아이들은 나를 엉클(삼촌 Uncle)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하루는 하숙집 옥상에서 닭고기 파티를 얼기도 했다 모두 똑같이 돈을 걷어 닭도리탕을 만들고 모처럼 보드카도 두병 준비하여 파티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는 주인집 아들은 물론 주인아주머니 내외도 참석하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 보던 그 찬란한 별밭을 다시 보려면 아무래도 히말라야 어느 산골마을을 찾아가야 할까보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다. 나는 인도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만나 사진도 찍고 영어를 하는 아이들 하고는 대화도 나누었다. 하숙집에 찾아온 어린 여학생과 대화를 나눠보았는데 그 유창한 영어에 혀를 내둘렀다. 영어로만 수업하는 학교란다. 그런가하면 숲속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캠퍼스에서 자주 만났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곤 한다. 나는 그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이 너무 좋아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전혀 때 묻지 않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아이들 같았다. 한번은 산티니케탄 인근의 시골로 가서 넓게 펼쳐진 숲속을 걷고 있었다. 마치 원시의 아이 같은 아이들을 숲에서 만났다. 말이 전혀 통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전혀 경계하는 눈빛 없이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타고르가 머물던 다섯 채의 집으로 인도 전역에서 순례객들은 모여들 것이다. 단지 관광이나 견학 차원이 아니다. 타고르에 속한 모든 것은 신성시되고 타고르는 인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실제로 타고르의 시를 읽으면 시성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만큼 그의 시는 신비롭기도 하고 성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문학뿐 아니라 그는 민족의 지도자요, 사상가이며 음악가이고 화가이며 무엇보다도 위대한 교육자다. 그가 세운 학교 캠퍼스와 그의 옛집엔 오늘도 순례객들로 붐빌 것이다. 그가 만든 음악은 그곳 지역방송에서 온종일 울려 퍼질 것이고 서점가엔 계속해서 그와 관련된 연구서적들이 출판되어 나올 것이다. 그곳에 머무르며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면 비슈바 바라티 대학에 한국학과가 아직 없다는 것이다. 일본학과는 수십 년 전에 설립되어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는데 아직 한국학과가 없다는 것은 우리 정부의 대처가 미숙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전 세계 젊은이들의 상호교류를 위해서 타고르가 설립한 대학에 어서 한국어과가 세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나는 귀국길에 올랐다.
지난해 12월 18일. 추운 겨울 한파를 뚫고 따뜻한 ‘사랑의 연탄 나눔’ 봉사활동이 펼쳐졌다. 세경대 사회봉사센터가 세경대 교수와 직원, 학생들의 성금으로 영월군내 기초생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연탄을 배달한 것. 연탄 나눔은 차량이 지나갈 수도 없는 골목길 사이사이를 빠짐없이 이뤄졌고, 연탄을 받은 주민 송관호(68세, 남)씨는 “남의 일에 관심 갖지 않는 세태임에도 직접 찾아와준 정성에 눈물이 난다”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소방안전과 김용운 부총장은 봉사자들에게 “마음을 담아 전하는 연탄 배달 나눔 행사를 통해 겨울 추위를 덜고 이웃사랑의 온정을 따뜻하게 느끼기를 바라며, 앞으로 지속적인 지역사회 이웃사랑을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강원도부교육감 이경희△전라남도부교육감 정병걸△지방교육지원국장 박융수 (1월1일자) △기획조정실장 박백범 △교원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성삼제 △대학지원실장 한석수 △학생복지안전관 이진석 △대학지원관 배성근 △교육정보통계국장 승융배 △중앙교육연수원장 윤용식 △학술원 사무국장 황홍규 △충남대 사무국장 이중흔 △부산대 사무국장 김광호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맞이는 지상파 방송 3사가 내보낸 연말특집 가요 프로들이 특히 요란스러웠다. ‘2013KBS가요대축제’(2TV)와 ‘2013KBS트로트대축제’(1TV), '2013MBC가요대제전, ‘2013SBS가요대전’ 등이 그것이다. KBS가 가장 빠른 12월 27일과 30일, MBC 31일, SBS가 29일 밤 각각 연말특집 가요 프로를 방송했다. ‘연예대상’, ‘연기대상’ 등도 있었지만, 가요 프로가 특히 요란스러웠다고 말한 것은 방송시간과 그 스케일 때문이다. ‘2013KBS트로트대축제’를 빼고 3개의 가요 프로는 장장 4시간내외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그것들을 집에서 TV로 지켜본 필자는 내내 느긋했다. 그러나 “방송사 가요대전은 중고생 ‘귀가대전’”(서울신문, 2013.12.31)이란 기사를 대하니 생각해볼 점이 있어 보인다. 요점인즉 방청객으로 참여한 10대 중∙고생들이 방송 종료 후 귀가하기 수월치 않다는 것. 심지어 가요대전이 끝난 날 킨텍스(SBS)나 드림센터(MBC) 주변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단다. 방송사들이 어쩔 수 없다며 발뺌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방청객의 대다수인 10대 중∙고생들로 인해 연말특집 가요 프로가 그만큼 활기차면서도 역동적인 축제 프로로 방송될 수 있어서다. 방송시간을 앞당기거나 셔틀버스 운행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가수들이 특정 방송사에 전속된 것도 아니니 3사 공동 제작의 가요대축제도 생각해봄직하다. 연말특집은 방송 날짜가 서로 달라 그만큼 보고 즐길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에서 ‘3인 3색’의 쇼 프로였다. 굳이 평가하자면 3사 중 ‘2013SBS가요대전’이 연말특집 가요 프로로서 그 본령을 어느 정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2013년을 뜨겁게 달군 대박의 하나인 트러블 메이커의 ‘내일은 없어’를 볼 수 없어서다. 더욱 의아스러운 것은 SBS나 MBC 모두 트러블 메이커 현아(포미닛)와 장현승(비스트)이 출연했는데도 정작 ‘내일은 없어’ 공연이 없었던 점이다. 스페셜이란 이름으로 펼쳐진 공연이 적지 않았는데, 참 의아스런 대목이다. ‘2013MBC가요대제전’에 지드래곤이 나오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3MBC가요대제전’의 경우 태진아 등 트로트 가수 끼워 넣기라든가 인순이 무대 등 아이돌 가수 일색의 고정적 틀을 탈피하려 한 시도는 좋아 보인다. 다소 뜬금없어 보인 컨셉일망정 아이돌 가수들의 ‘트로트에 동화되기’ 몸동작 등 평소 보기 힘든 장면들을 덤으로 보는 ‘눈 호사’를 주어서다. 그러나 연말특집 가요 프로로 인한 정규방송 결방은 문제로 남는다. 특히 MBC ‘기황후’는 시청률 20%에 육박하는 꽤 인기 높은 드라마이다. 그런 드라마를 월요일엔 ‘2013MBC연기대상’, 화요일엔 ‘2013MBC가요대제전’으로 2회 연속 결방시킨 것은 문제다. 스스로(방송사) 귀히 여기지 않으면 남(시청자)도 그렇게 하게 되어있음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3사 공통으로 사회자들의 ‘무식한’ 멘트도 여전했다. 가장 거슬리는 게 존대보조어간 남발의 극존칭이다. 가령 “준비가 되셨는지”는 “준비가 되었는지”로 표현해야 맞다. “기획은 이효리 선배님이 다 하셨답니다”도 “기획은 이효리 선배가 다 했답니다”로 해야 정서법(높임법)에 맞는 멘트이다. TV방송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앵커가 뉴스에서 ‘박대통령님’이라 하지 않고 ‘박대통령’이라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사회자에겐 선배일망정 그렇게 높여 표현하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더욱이 대개 20대 초반의 어린 아이돌 가수들에게 극존칭을 예사로 써가며 사회를 보고 있어 굉장히 불편하거나 거역스러웠다. 사회자의 출연자에 대한 극존칭 대화는 시청자 무시하기 내지 국민 깔보기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얼마 전부터 창의와 창조라는 말이 화두가 되고 있다. 무한경쟁 기업의 세계에서 요구되는 요건이 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님은 ‘마누라 빼고는 다 바꿔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창조라는 것은 다름을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즉 남과 다른 차별화가 기업의 성패와 직결된다. 다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상품을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직과 판매 등 경영과 관련된 문제, 기업 풍토 등의 문제와 관련된다. 즉 이전과 달라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혁신이라는 이름이 우리 사회에 지배하고 있다. 새 정부에서도 창조와 창의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창조경제라는 말도 생겨났다. 정부 부처의 조직과 직위 가운데 ‘창조’, ‘창의’라는 단어가 71개나 이른다는 기사를 보았다. 창조경제를 통해 ‘경제부흥’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해온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창조란 문패와 같이 보여주기 식 행정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진정으로 창조경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패달기에서 그치지 말고 사회·경제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부도 창의교수학습과가 생겼다. 교육계도 창조와 창의라는 용어가 대세로 되었다. 기업에서 시작한 말이 교육계의 중심 단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창조와 창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교육부는 창의 인성이라는 말로 창의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창의인성이라는 말은 창의성과 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는 일거양득의 비타민이다. 시도교육청도 창의와 창조라는 다른 이름의 비타민을 만든다. 그런데 창의라는 비타민 제조자들은 이것만이 창의성과 창조성을 높이는 최고의 효과라고 맹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육계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한 교육연구 결과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효과를 믿어야 할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혹자는 더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바꾸어야 되지 않는가 하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행복지수가 최하위이고 자살자, 신용불량자, 이혼 가정, 학교 폭력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청소년 자아존중감, 선생님 존경심, 어른 존경심도 최하위이다.학교안에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는 많아도 사랑이라던가 우정, 존경, 배려 등의 낱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창의 비타민도 같은 전철을 밟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 창의 인성이라는 말도 그렇다. 창의와 인성을 한꺼번에 구하는 묘약이 세상에 있기는 한지모르겠다. 물론 인간의 우뇌가 하는 특성을 보면 창의성과 종합적 사고 능력, 정서지능 등에 관련이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지만 도둑놈도 창의적이어야 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방법으로는 도둑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남이 했던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겉보기와 다를 때가 너무 많아 창의성이라는 잣대만으로 평가할 성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일부 시도교육청에서 독서논술을 하면 창의성이 증진된다는 주장도 한다. 그런데 창의성은 언어, 수리영역을 지배하는 좌뇌의 활동보다 우뇌 활동이 훨씬 효과가 있다. 하워드 가드너도 인간의 창의성을 연구하기 위해 피카소라는 화가를 선택한 적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김연아도 창의적이지 못했다면 빙상에서의 탁월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박지성도 물론 창의적인 플레이와 성실성이 그를 유명한 선수로 만들었다. 창의성에서 우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대변한다. 한편 좌뇌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 활동에 유리하다. 즉 수렴적인 사고 활동에 유리하여 창의성 측면에서는 우뇌보다 불리하다. 에디슨을 살펴봐도 그렇다. 어느 날 자녀가 달걀을 부화하기 위해서 마구간으로 들어가겠다면 뭐라고 말할까? 어느 날 자녀가 자기 친구를 하늘로 띄우기 위해 가스를 먹였다면 칭찬할 수 있을까? 에디슨 어머니는 우뇌적인 생각으로나무라지 않고 아들의 창의성을 본 것이다. 독서논술에서 창의성이라는 맥락으로 글을 썼다면 몇 점이나 줄까? 독서논술이 창의성을 높인다는 말은 과장된 논리다. 창의라는 묘약이 누군가가꺼낸 말을 위해 이름 짓기 식, 묘약만 만들어 낸다면 아이들은 거짓 통계의 희생양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육지로부터 멀리 있는 섬 제주. 외롭게 있는 섬 제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그 제주가 없었다면 비행기를 타는 호사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 여행하는 즐거움도 없다. 아마 제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허전했을 것이다. 제주는 멀리 있다는 느낌이다. 육지는 계획 없이도 훌쩍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제주 여행은 큰마음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자주 가본 기억이 없다. 신혼여행 때, 직원 연수 때 잘해야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마음은 늘 가고 싶지만, 막상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제 제주는 특별자치도라고 해서 행정적으로도 멀리 있나보다. 제주를 찾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다. 자연이 빚어놓은 모습이 보기 드문 경관을 만든다. 제주는 어디서나 바다가 보인다. 멀리 보이는 바다는 고요하게 웃는다. 그리고 기생 화산이 터질 때 형성된 능선이 보인다. 완만하게 흘러내린 곡선이 넓게 퍼져 있다. 선은 마치 왕릉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선과 여유로움이 보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 흔히 제주는 여자, 돌, 바람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만난 것이 바람이다. 바람은 먼 바다를 넘어서 온다. 하지만 바람은 머물지 못하고 곧 떠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아쉬움도 남기지 못하고 다시 바다 쪽으로 빠르게 여행을 한다. 이 바람은 제주 사람들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려 모두 낮은 자세로 엎디어 산다. 집은 작은 규모로 짓고, 지붕을 낮게 했다. 바람을 늦추기 위해 주변에 돌담을 쌓았다. 돌담은 얼기설기 쌓았다. 이는 바람을 막은 것이 아니라 품어내서 순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순응하며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구들이 평화롭다. 자연도 모두 바람 따라 산다. 키 큰 나무들은 바람을 맞아 기우뚱거리는 모습이다. 어느 나무는 모진 바람에 굴곡져 있어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오름에는 아예 나무 하나 키우지 못하도록 거세게 분다. 바람이 신령스러운 쉼터로 만들기 위해 나무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나보다 제주의 바람이 제주 사람들을 수없이 흔들었던 것처럼 역사의 수레바퀴도 제주 사람들을 할퀴고 지났다. 천주교도와 관리 사이의 충돌 사건했던 이재수의 난도 가슴 아프게 전한다. 당시 탐관오리와 그들의 지원을 입은 천주교도들의 탄압이 제주 사람들을 궁지로 몰았다. 무고한 양민의 집단 학살을 가져온 4․3사건도 제주의 풍경 속에 침묵으로 항변하고 있다. 모두 뭍에서 몰려가서 여린 제주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 느낌이다. 후세 사람들이 영화로 소설로 그들의 삶을 위로했지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은 에리다. 하지만 그들은 원한을 품지 않았다. 바람이 나쁜 기운을 휩쓸고 가듯 그들은 역사의 거친 바람을 흩날려 보내고 묵묵히 섬을 지키고 있다. 그래서 제주는 뭍에서 보던 풍경과 좀 다르다. 서글픈 이야기가 담겨 있어 쓸쓸하다. 곳곳에 보이는 오름의 황폐한 모습도 제주 사람들의 가슴만큼이나 휑하다. 나무 한 그루 허락하지 않은 자존심이 애처롭다. 그러면서도 바람에 씻겨 맑고 깨끗하다. 하늘빛 바닷빛을 머금고 있다. 풍경들은 신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는 수많은 사연들만큼이나 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여행 중에 섬을 지키고 사는 사람을 만났다. 민속학자 진성기 씨다. 국내 1호 사립박물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스물여덟에 개관한 이후 고난과 시련의 길을 왔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염원의 고통이다. 용암이 만든 척박한 땅에서 험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지키기 위한 신념이다. 제주 고유 풍습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삶이 경이롭다. 문명이 미치지 않은 모습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제주는 아픈 과거가 오히려 지금은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추사 김정희의 유배 생활이 그렇다. 추사는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고도의 섬 제주로 왔다. 이제 정치적으로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그러나 추사는 여기서 학문의 경지를 새로 세웠다. 추사 예술혼의 정수인 세한도와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는 세상의 모진 칼바람에 맞서는 과정에서 세한도를 완성했다. 유배지에서 느낀 고독감을 황량하고 메마르게 표현하면서도 제자 이상적의 따뜻한 인품을 담았다. 추사체 역시 마음속 독풍을 다스리고 도달한 경지다. 벼루 10개를 구멍 내고, 붓 1000개를 닳게 한 수련의 삶이 만든 것이다. 탄압과 맞서 싸운 질긴 삶의 여정만이 이룩할 수 있는 단계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듯, 세상살이란 누구에게나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자신을 짓누르는 불운과 기구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의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의 길에 깊은 울림을 준다. 사람은 누구나 큰일을 만난다. 그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일러주는 것은 아닐까.
2014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의 첫마디는 무엇일까? 아마도 해돋이, 해맞이, 일출 아닐까? 동해안 일출 관광객이 100만 이라는 뉴스도 들었다. 일출을 보면서 새해 소원을 빌기 위해서일 거다. 필자가 새벽 이부자리에서 아내에게 한 말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 해 보러 갈까?” 인근 지자체에서는 일출행사가 열리는데 시민들이 초등학교에 모여 등산을 하고 정상에서 해맞이 행사를 갖는 것이다. 거기까지 갈 수는 없고 인근의 저수지를 생각한다. 서호저수지나 일월저수지다. 서호는 역사적 의미가 깊고, 늘 가는 곳이 일월저수지다. 가까운 곳에서 해맞이를 해야 할 것 같다. 방송을 들으니 8분 후에 해가 뜬다고 한다. 아파트 바로 옆 일월저수지로 간다. 우리부부를 첫 번째로 맞이하는 것은 바로 직박구리 가족. 아파트 감나무에 매달린 감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다. 얼마나 즐겁게 식사를 하는지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저수지 전체가 얼었다. 그 많던 오리들은 어디로 갔을까? 상류쪽으로 가니 오리들이 떼로 모여 헤엄을 치고 있다. 이제 좀 있으면 일출이다. 촬영 위치를 정해야 한다. 카메라 각도를 잡아본다. 도심 속이니 자연히 아파트가 배경이 된다. ‘자연과 함께 하면 좋은데….’ 그렇다. 저수지 바닥에 남아 있는 하얀 눈 위의 오리 발자국과오리,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넣자. 카메라로 수 십 장 기록에 남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진 모습이 다 다르다. 그 중 좋은 것을 골라내야 한다. 아직 전문가 수준이 못 되어 여러 장 중에서 최상의 것을 고르는 것이다. 위치와 각도를 바꾸어 여러 장 찍다보면 한 두 장 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오리들이 비행을 한다. 몇 마리가 나는가 싶더니 오리 전체가 나른다. 군무의 장관이다. 오리들이 아침 운동을 하는 것, 이제야 알았다. ‘저 많은 오리들, 우리가 보기엔 모습이 비슷비슷하게 생겨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데 쟤들도 다 짝이 있겠지?’ 저수지를 돌다보니 이곳에서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찍는 사람도 있고 저수지 가까이 들어가 디카로 기록을 남기는 어르신도 보인다. 아침 운동이 일상화한 사람들도 보인다.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하는 분을 보면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 분’이라고. 저수지 한 바퀴 다 돌다보니 배수구다. 배수로의 보수공사가 다 완성되었다. 몇 달 전 공사 레미콘 차량을 보았는데 그만치 저수지 산책을 게을리 한 것이다. 아내는 말한다. “당신 공사 끝난 것, 이제 알았나 봐!” 아침 산책을 해서 그런지 시장기가 돈다. 아침 식사로 떡만두국을 먹었다. 나이 한 살을 더 먹은 것이다. 필자는 50대 후반, 아내는 50대 초반이다. 세월이 쏜살같이 흐른다더니 우리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문득 박두진 시인의 ‘해’가 생각난다. 국어교사 시절 학생들과 외었던 시다. 비교적 긴 시인데 학생들은 잘도 외운다. 그렇게 긴 시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외운 학생은 자신감이 넘친다. 운율이 살아 있어 낭송하기에도 좋은 시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2014년 새해,한국교육신문 독자들과 e리포터들 그리고전국의 교육가족들! 모두 함께 ‘앳되고 고운 날’ 누렸으면 한다.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어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것이 더 좋겠어. 네가 언제나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네시가 되면 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너에게 보여주게 될 거야. 네가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몇 시에 너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지 모르잖아. 일종의 준비의식 같은 것이 필요한 거야." "의식이 뭔데?" 어린왕자가 물었어요.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들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일정한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사냥꾼들에게도 의식이 있어. 그들은 목요일이면 마을의 처녀들과 춤을 추지. 그래서 나에게 목요일은 아주 신나는 일이야! 그냥 난 포도밭까지 산보를 나가거든. 만약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면, 하루하루가 모두 똑같은 날이 될 거야. 그러면 나는 하루도 산책을 할 수 없을 테고 말이야." 여우가 말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차츰 어린왕자는 여우에게 차츰 길들여져 갔지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이야기다. 한해의 마지막 달력을 걷어내고 새로운 달력으로 갈아치웠다.똑 같은 시간인데 사람들은 달력이 정한 날을 한해의 첫 시작으로 정하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새해 첫날(1월 1일)을 기다린다. 그것은 아마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이야기에 나오는 길들여지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질성과 위안을 느낀다. 이것이 행복인지 모르겠다. "만약 사냥꾼들이 아무 때나 춤을 춘다면, 하루하루가 모두 똑같은 날이 될 거야. 그러면 나는 하루도 산책을 할 수 없을 테고 말이야." 아무 때나 특별한 날이라면 어린왕자처럼 하루도 산책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1월 1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람들은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하루를 다르게 만든다. 달력이 그렇고 새해 첫 하루가 그렇다. 달력을 사용한 것은 동서가 각기 다르다. 유럽제국은 천 년 이상 동안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였다. 이 달력은 로마의 율리우스 시저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1년의 평균길이를 365일과 1/4일로 보는 것을 바탕으로 하였다. 달력에 1/4일을 둘 수 없기 때문에 4년 중 3년은 1년의 길이를 365일로 하고 네 번째 해만 366일로 해서 이것을 되풀이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년 중에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은 이틀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천문학자들은 춘분과 추분을 만들었다. 춘분은 3월에 추분은 9월에 정했다. 그러나 시저가 달력을 정할 때 1년의 길이는 약간 틀리다. 이것은 실제 길이보다 11분 정도 더 길다. 1년에 11분이면 매년 11분씩 몇 백 년이 지나면 몇 날이 된다. 서기 325년에 진짜 춘분은 3월 25일인데 율리우스력에 의하면 4일이 앞서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서는 춘분을 3월 21일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3월 21일은 또다시 점점 춘분이 일어나는 날보다 뒤져서 16세기의 중엽에는 10일 정도의 오차가 생겼다. 이 오차를 고치기 위해서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13세는 1582년 달력에 10일을 깎아서 10월 5일을 10월 15일로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그레고리우스력). 교황은 400년 동안 세 번만 윤년으로 하지 않고 평년으로 하였다. 즉, 400년에 3일만 달력의 날짜를 줄이기로 했다. 즉 4년마다 윤년을 두는 것은 변함없으나 각 세기의 끝 해 중에 400으로 나누어지지 않는 해는 윤년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고친 달력은 1만 년에 3일밖에 틀리지 않는 정확한 달력이 되었다. 이 달력을 그레고리우스력이라 불린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었으나 영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에서는 예외였다고 한다. 영국의 경우는 이 달력을 채택하는 것을 교황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달력을 외면하였다 . 그래서 영국은 그 후 200년 동안 계속 율리우스력만 사용하였다. 그러나 점점 달력을 바꿀 필요가 생겼다. 천문학의 발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영국에서는 부정확한 달력을 사용하여 난처한 입장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외교상의 문제 특히 문서, 협정 등에 날짜를 넣을 때 일어났다. 결국 영국에서도 그레고리우스력(신력)을 채택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정부에서도 1년의 첫 시작을 9월 22일(방데미에르 포도의 날)로 정하고 1년을 30일 단위 12개월로 나누는 달력(혁명력)을 만들었다. 자연의 시간을 이성의 달력으로 규율하려는 시도이다. 이 달력 역시 30일씩 12달이면 36일이 되어 5일이 남는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달력에서 제외된 5일은 축제의 기간으로 선포했다. 우리의 옛날 달력은 음력이라고 한다. 음력은 달의 변화를 중심으로 만들었다. 즉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에 따라 29일 또는 30일을 한 달로 정하여 만든 달력이다. 음력은 태음력이라고도 하며 태음력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사용하였으며, 아직도 이슬람권에서는 태음력을 사용하고 있다. 음력 역시 12달을 1년으로 한다. 태음력에 따르면 1년은 354일이 된다. 이렇게 되면 계절의 순환이 해마다 달라진다. 그래서 윤달을 끼워 넣어 해결하였다. 태음역은 고대 수메르인들과 바빌로니아인뿐만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인, 중국인 등 세계 많은 민족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했던 음력도 바로 태음태양력이다.
1980년 3월 수원매원초교에 발령을 받았다. 출퇴근 시외버스 통근에서 시내버스로 바뀐 것이다. 이 학교는 수원에서 가장 동쪽 변두리 원천유원지 인근에 있었다. 그 당시 학교가 많지 않아 학구가 넓었다. 지금의 동수원 한신아파트, 매탄아파트, 광교신도시 흥덕지구 부근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주경야독 생활. 낮에는 교육자가 되어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나가 공부하는 생활을 3년간 하였다. 1주일에 두 번 출석하는데 통학코스를 살펴본다. 매원초교→원천유원지 버스정류장→수원시외버스터미널→수원역→종로3가→삼선교→○○대학이었다. 귀가하면 11시 정도 되었는데 꿈이 있어 그런지 즐거운 야간대학 학창시절이었다. 이 학교에서 4년간 머무는 동안 포크댄스 지도자로 변신하였다. 전교생이 2교시 후 중간놀이 시간에는 운동장에서 민속무용을 즐겼다. 우선 필자가 교직원 연수를 통해 담임들을 지도하면 담임이 체육시간에 학급을 지도한다. 그런 후에 전교생 중간놀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록 사진을 보니 1년에 2회씩 총8회 연수를 가졌다. 그러고 보니 당시 어린이들은 4년간 30여개의 민속무용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반은 사열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필자는 무대 위에서 시범을 보이며 마이크를 잡았다. 교육자가 되면 성격도 바뀌는가? 내성적이었던 성격이 학생들 앞에 서면서, 레크리에이션을 지도하면서 점차 외향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대학 때 체육시간에 배우던 포크댄스와 초임지에서 녹음해 두었던 테이프 음악, 세계의 민속무용‘이라는 전문서적 탐독과 자가실습이 자칭 전문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입문은 삶의 궤적을 넓혀주었다. 입문과정과 기본과정 마치고 유년대 대장이 되었다. 매주 열리는 대집회, 뒤뜰야영, 휴일의 하이킹, 숲속생활학교, 스키학교 등은 새로운 세계를 펼쳐주었다. 개인시간 봉사가 즐거움으로 변하였다. 보장 훈련, 기본과정등 지도자 훈련 강사로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교직원들은 체육활동을 무척 좋아하였다. 어린이들을 귀가시키고 난 후 편을 갈라 운동장에서 배구시합, 축구시합을 즐겼다. 주말 퇴근 시간 후에는 테니스를 즐기기도 하였다. 대학 1년 후배 최○○ 교사는 축구부를 창단하고 필자는 여자 배구부를 창단하여 지도하였다. 선수들을 이끌고 역사가 깊은 매산초교에 와서 연습게임을 하여 기량을 향상시켰다. 6학년 6반 담임 때였다. 우리반 어린이 두 명이 수원세무서 주관 납세에 관한 글짓기 우수작을 제출하게 되었다. 당시 교감 선생님 원고지를 보더니 “이것, 선생님 글씨지요?” “아닌데요.” “그런데 어찌하여 선생님 글씨체와 같나요?” 자세히 보니 정말 그렇다. 알고 보니 1년여 가르치는 동안 담임의 글씨체를 학생들이 본받은 것이다. 사표(師表)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앨범 속 사진을 보니 이건 사람 얼굴이 아니다. 피골이 상접하다. 당시 키는 170cm, 몸무게가 45kg이었다. 한여름 도청입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는데 팔꿈치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몸이 그만치 허약한 것이다. 작은 형은 말한다. “너는 활동량이 많은데 먹는 것이 부실해서 그런가 보다” 5, 6학년 담임에, 야간대학에, 스카우트 활동에 1인 3역을 해서인가? 촌지(寸志)에 대한 추억도 있다. 지금은 부조리로 역사적 유물로 사라져 버렸지만 당시엔 학부모가 교사에게 건네는 정성의 표시였다. 받는 교사들도 당당히 받았다. 금액은 만원 정도였는데 촌지 학부모가 많은 반은 알짜반이었다. 어떤 교사는 학년이 바뀌면 명단을 인계인수(?)하기도 하였다. 수원매원초교에서 4년간 근무,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주위에서는 촌지가 많이 생기는 신풍초교, 남창초교, 화홍초교를 권유한다. 그 3개교는 당시 학부모들 경제 수준이 높아 교사들이 선호하는 학교였다. 필자는 모교인 세류초교를 택하였다. 학창시절 뛰어놀던 학교에서 교사가 되어 후배를 가르치는 보람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콩씨네 자녀 교육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고. -정채봉의 시 콩씨네 자녀 교육 일자천금의 시다. 가정 교육과 공교육을 모두 담고 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인생론까지 담고 있으니. 덧붙여 글을 쓰는 일이 사족임을 알면서도 짧은 깨달음을 남기고 싶어서 주절거림을 용서하시라. 위의 시는 지난 가을 아침 국어 시간에 3학년인 우리 반 아이들에게 들려준 시이기도 하다.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단순하다. 참으로 쉬워서 누구의 도움 없이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글자만 아는 정도로 한 번 듣고도 바로 깨칠 수 있는 시를 좋아한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담긴 시라면 더욱 좋다. 거기다 짧으면 더 좋다. 잔가지를 다 쳐내고 이파리마저 훌훌 털어낸 채 빈몸으로 서 있는 겨울나무 같은 시라면 더욱 좋다. 내 인생이 콩나무인지 콩나물인지 옷깃을 여미게 한다. 내가 콩나무 선생인지, 콩나물 선생인지 각성하게 한다. 내가 기른 제자들이 콩나무가 되고 있는지, 콩나물로 살게 하진 않았는지 머리 끝이 서게 한다. 콩나무와 콩나물, -ㄹ 받침 하나만 다르지만 그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다. 오늘 하루, 2013년을 마무리 하고 2014년을 여는 새벽에 만난 일자천금의 시를 새해의 화두로 정했다. 순간순간 콩나무로 살기 위해, 제자들을 모두 콩나무로 기르기 위해 깨어 살기를! 시는 모든 것의 시작이니 새벽 아침은 시 한 편으로 곳간을 채우며 사는 2014년이기를!
지난 12월 13일 제 25회 인천문학상을 받았다. 1998년 내 다섯 번째 시집을 심사위원회에 응모했다가 고배를 마신 후 두 번을 더 실패를 한 후 획득한 3전4기의 쾌거(?)였다. 인천문학상은 대외적으로 권위를 알아주는 큰 상은 아니다. 하지만 인천문인협회 170여 명의 회원들이 출간한 책 중에서 1명을 선정하여 상패와 소정의 상금과 함께 주는 상이라 나를 비롯하여 책을 출판한 회원들은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수상하는 꿈을 가져보기도 했을 것이다. 책을 출간하지 않은 회원들도 11월이 되어 문학상 응모 작품집을 제출하라는 공고가 나가면 그 해의 수상자가 누가 될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다. 소설가가 될까 시인이 될까, 아니면 수필가? 아동문학가? 점쳐보며 지난해는 시인이 탔으니 이번엔 소설가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혼자 이리저리 상상의 날개를 펴며 수상자를 점쳐보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상이 인천 유일의 문학상이기 때문이다. 인천시 문화상과 각 구청에서 시행하는 구민문화상이 있으나 관에서 수여하는 각종 상엔 상금이 없다. 예전엔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없어졌다. 그리고 예총에서 시상하는 예술상, 공로상이 있지만 상금이 없는 명목상의 상이거나 상금이 아주 적어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적은대로 짭짜름한 상금까지 챙길 수 있는 유일한 문학상이 인천문학상이니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옛날에는 문학상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요 근래 들어서 나도 각종 문학상, 지원금, 우수문학도서 선정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한 시인의 프로필에서 여러 가지 문학상 수상 내역을 보게 되면 인상이 찌푸려지곤 했다. 왠지 상을 바라고 저 작품을 썼을 것 같고 끼리끼리 돌려먹기 식으로 수상자가 결정될 것 같은 부정적인 인식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 근래는 그런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 문학을 비롯한 각 예술계에서도 날이 다르게 경쟁이 심해지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예술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을 받는다든지 문예기금을 듬뿍 받는다든지, 우수문학도서에 선정이라도 되면 그것이 곧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고 자신의 위상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니 어찌 관심이 없겠는가. 나도 그렇게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문인의 경우 그가 어느 매체를 통하여 등단했느냐 하는 것도 그가 문인으로 성장 발달해 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출판했느냐가 곧 그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기도 할 것이니 전문 문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소한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챙겨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내가 문학을 한 것은 정말 순수한 문학의 본질에 근거하고 있다. 자아를 확인한다든지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여 카타르시스 효과를 얻는 등 오로지 내 영혼을 살찌우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차원에서 이제까지 문학을 해왔다. 그러나 근래 들어 문학상도, 지원금도, 우수문학도서 선정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학 활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작품이나 작품집이 문학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딜레마이기는 하다. 선정되지 않아도 정말 좋은 작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가 모든 작품을 직접 읽어보고 작품의 우열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의 평가를 전적으로 믿고 그 작품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문학 판이 아무리 끼리끼리 나눠 먹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도 내가 가장 야심만만하게 내놓은 작품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학상과, 지원금과 우수문학도서라는 문학 3중주가 문학계에서 아무리 불협화음처럼 들릴지라도 내 작품을 정성껏 만들어 내놓으면 그곳 시장에서도 통하리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시 몇 편 소개 하는 것으로 독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한다. 눈빛 -노 시인의 시를 읽고 젖먹이 어린것을 바라보던 병색이 짙은 엄마의 눈빛 어미 없는 어린것을 기르던 꽃샘추위 속 햇볕 같던 할머니의 눈빛 이제 다시 시인의 눈빛 그 엄마의 눈빛과 할머니의 눈빛을 닮은, 시인은 그 눈빛으로 축대 밑 어린 싹을 바라보며 생명의 고귀를 일평생 시에 담고 있다 졸시 ‘눈빛’ 전문 시간에 대하여 다만 꽃이 피었다가 사람들을 울려놓고 지는 것이다. 올챙이가 자라 개구리가 되고 도굴꾼이 왕릉을 도굴하듯 술꾼들이 개구리를 잡아다가 술안주로 먹는 것이다. 시간이 나를 데리고 꽃잎을 띄우고 흘러가는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는 시간을 가로질러 세상이 봄이 되었다가 가을이 되었다가 다시 봄이 되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은 참새고 나팔꽃이고 초승달이다. 가만히 있는 너를 시간이 한 발짝씩 죽음을 향하여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건 새가 울건 시간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다만 네가 시간 속을 헤엄쳐 그윽한 내일을 향하여 가고 있다. 시간이 기차처럼 너를 태워 데리고 갈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물갈퀴처럼 지느러미처럼 헤엄쳐 비단잉어처럼 꿀벌처럼 물총새처럼 시간의 집터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네 손발이 삿대가 되고 네 머리와 가슴이 돛대가 되어 푸른 하늘 은하수를 노 저어 가야 한다. 우주 속을 유영하는 행성처럼 너는 시간 속을 한 마리 황조롱이처럼 날아올라야 한다. 어제부터 터지기 시작한 산수유도 개나리도 저희들 날개로 훨훨 날아 저희들 집을 짓기 위해 예쁜 꽃을 피우고 있다. 시간이 너를 구름열차에 태우고 고대광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시간 속을 뚜벅뚜벅 가로질러 꽃도 되고 나비도 되는 것이다. 졸시 ‘시간에 대하여’ 전문 해바라기 저 멀리 꽃 같은 시절에 호롱불 앞에서 썼다가는 지우고 다시 썼다가는 지우던 그 첫사랑 애틋한 마음과 같이 네게로 네게로만 달려가 황홀히 꽃 한 송이 피워내고야 말 이 애달고도 간절한 비원은 나를 위해 예비한 조물주의 귀한 선물이거니 아! 다정한 동무여 끝내 염원은 염천 하늘에 뜨겁게 달아 피다가 어느 가을날 서느러니 부는 바람에 빈 들녘 홀로 서서 삭풍에 흔들리며 우는 날 온다손 치더라도 오늘은 내 목숨 뙤약볕 열기 속 뜨겁기만 하나니 내 마음 이제 나도 어쩌지 못하니라 저 빛나는 태양 아래 만물 너울너울 생명의 찬가 다투어 부르듯이 다만 너를 향해 커다란 꽃등인양 나의 마음 받쳐 들고 긴 여름 뜨거운 들녘 온종일 나는 이렇듯 정념에 불타 있노라 졸시 ‘해바라기’ 전문
광양여중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학교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한 변화(Change)에 착수햐였다. 이를 위해 2012년에 학교 교훈은 공모를 통하여 ‘배움에서 나를 찾자’로 개정을 하였다. 인생 100년 시대로, 배움이 학창시절뿐만이 아니라 장차 사회에 나가서도 평생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를 위해 선생님들은 수업을 연구하고 소통하는 수업을 통하여 지금 우리 아이들은 배움이, 학교생활이 즐겁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우리 아이들은 도종환 시인이 말했듯이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꿋꿋이 피는 아름다운 꽃이다. 꽃은 일찍 피는 꽃도 있고, 늦게 피는 꽃도 있다. 선인장을 키우는 방법과 나팔꽃을 키우는 방법이 같을 수 없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으며 ‘한 사람도 수업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즐겁게 배우면서 서로 협력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관심과 열정을 쏟고 있다. 늘 자랑스러운 선생님들이다. 학교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선생님이 변해야 하고 선생님의 변화는 수업에서 찾을 수 있다. 교사집단은 수업전문가 집단이다. 20년, 30년 고경력의 선생님들도 왜 수업이 어렵다고 할까? 아이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런 고민 속에 광양여중 선생님들은 수업과 생활지도 관련 전문 연수를 최근 2~3년 사이에 매우 강도 높게 받았다. 그런가하면 인성교육동아리 '옹기종기'는 교육부의 공모 심사에 응모하여 1,000만원의 연구추진비를 받았다. 전남의 중학교에서는 유일하게 그 활동과 2014년의 계획이 인정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업 속에서 학력과 인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노력하고 있다. 2011년부터 매주 화요일 교과 공개, 학년 공개, 제안 수업의 형태로 수업을 열고, 모든 선생님들이 수업연구회에 참여한다. 또한 최근 2년여 동안 수업컨설팅 전문가인 손우정교수로부터 20차례 가까운 수업컨설팅을 실천하였다. ‘수친수성(수업친구 수업성찰)’과 ‘독서토론 수업 연구회’ 등의 수업 관련 동아리를 자발적으로 만들고 참여하는 선생님들의 열정 속에 경청하고 참여하는 학생들의 눈이 유난히 반짝이는 학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