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숙영 교장(전남교육청자연탐구원 원장)은 38년 전, 음악교사로 교직에 첫 발을 내디딘 후 현장 교사를 거쳐 교육연구사,도교육청에서 장학사로, 교장으로여수 충무고, 순천 복성고에서 근무한 후 장성 전남교육청자연탐구원에서 올 8월 퇴임을 앞두고 'LEAVING THE TABLE'을 주제로 개인전을 열었다. 초대의 글 두 번째 서른, 두 번째 인생의 시작! 그림이 제 인생에 스며든 것은 교직생활을 시작하여 근무하던 중 선생님들과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만들고 함께그렸던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생들과 사제 동행전을 하며 그림에 대한 목마름으로 한 작품, 한 작품 그려내려 갔던 것을 많은 분들과 공감하고자 전시회를 갖습니다. 저에게 있어 이번 전시회는 올 8월, 38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 하는 동시에 새롭게 시작되는 삶의 전환점이며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붓을 들어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다양한 표정으로 형상화해 화폭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부디 따뜻한 눈으로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시 : 2024. 6. 24(월) - 7. 05(금) 장소 : 전라남도교육청 이음갤러리 (전
요즘 교육 현장에서는 학생들의 문해력 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와 아울러 한국 학생들의 기초학력 저하에심각성을 느끼는 교사도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필자는 교직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 문자지도에서 5학년과 6학년을 가르친 경험은 내가 교육계를 떠나올 때까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좋은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간과하였던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대분수' 정의이다. 지금도 3학년 교육과정에서 처음 다룬다. 아무 생각없이 아이들이 대분수의 본 뜻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당연시 하였고, 교사시절 내내 나도 사전을 찾으면서 정의해 본 경험은 없다. 돌이켜보면다 다른 사람은 잘 아는데 나만 모른 것 아니었는지 자책감이 들어 부끄럽기도 하다. 이 용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 5,6학년 과정에서 분수 계산 지도를 얼마나 많이 하였던다. 아아, 통재라! 대분수라는 한글에는 속뜻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요즘 필자가 한자를 뜯어보면서 전광진 교수가 편찬한속뜻풀이 초등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확실히 알게 되었다. 기본어인 분수를 알고 가분수, 대분수, 진분수의 구별은 그 속뜻을 이해하므로 완벽한 이해에
옥동자를 보려면 먼저 산통을 통과하여야 하듯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온 책이 속뜻풀이 초등국어사전이다. 이사전의 편저자인 전광진 전 교수(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모든 아이들에게 성적을 올려주는 사전을 펴내겠다는 목표 아래 오랜 세월 연구를 거쳐 2010년 처음으로 펴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교육은 어휘 학습에 관한 한, '빙산의 일각'에 대한 '수박 겉핥기'에 급급할 따름이었다. 무슨 뜻인지를 읽기(50%)만 할 뿐, 왜 그런 뜻이 되는지에 대한 이해하기(50%)가 결여됨에 따라 어휘 이해도가 50%를 넘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사전은 교과서 내용을 100% 이해하기 위한 속뜻학습을 교육현장에서 쉽게 활용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찬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속뜻학습이란? 어휘 습득에 있어서, 어떤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knowing) 데 그치지 아니하고, 왜 그런 뜻이 되는지 이유를 이해(understanding)하기 위하여 그 속(under)에 담긴 뜻을 찾아보는 학습을 말한다. '속뜻'은 2종이 있다. 1차적으로는 '글자의 속뜻'을 말한다. 이를테면, 〔열심]이란 낱말을 구성하는 〔열]은 '뜨겁다', 〔심〕은 '마음'을 말한다. '더
광양시에 하나뿐인 대학 광양보건대가 있다. 그러나 설립자의 횡령으로 정부 지원 제한 대학교가 되어 신입생 모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살리기 위해 뜻을 같이 한 많은 사람들과 대학 구성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광양보건대학교 살리기 시민운동본부’를 출범했다. 지난 13일 광양보건대학교 운동장에서 광양YWCA, 광양참여연대, 광양환경운동연합 등으로 구성된 광양시민단체협의회(상임대표 광양YMCA 정경수 이사장)는광양시민과 함께 ‘광양보건대 살리기 운동본부’를 발족해 마지막 희망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한다는 출범 취지를 밝혔다. 시민운동본부는 출범 기자회견을 통해 “비록 시작은 미약해 광양시단협이 마중물 역할을 감당하지만, 광양을 사랑하고 광양보건대 정상화를 바라는 모든 시민과 단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함께 연대해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했다. 광양보건대학교 살리기 시민운동본부는 △뜻있는 시민과 단체, 연대 확장 △광양보건대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운동 전개 △시민 1만원 후원 운동 통한 지역 상생 대학 기반 마련 △광양보건대 홍보 및 신입생 유치 노력 등 4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광양보건대 관계자는 “대학발전기금 30억원을 모으는 일에 한국사학진흥재단 승인이
70년대 말 무렵, 필자는 중등 역사교사 자격을 가진 풋내기 사회과 교사였다. 사회·역사과목이학생들에게단순히 암기하는 과목으로만 치부하게 만든다면 나의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당시어떻게 하면 수업에 재미있는 스토리를 곁들어 할 것인가는 나의 가장 큰 과제였다. 이 무렵 건국대신복룡 교수님께서는 KBS 5분 칼럼을 통하여 인간의 삶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방송하셨고, 이 내용을 담은 아침의 메아리5권의 책과 부록까지 출판하셨다. 나는 그때 라디오로방송을 열심히 들었고,나에게 너무 많은 영감을 준 책이어서 선배, 동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그리고 오랫동안 수업시간에 활용하였다. 아이들도 좋아하여이 내용은 나 자신의 생각의 폭을 넓히는데많은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40년 세월이 지나고 보니 종이 색깔이 많이 누렇게 변하였지만 아직도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니 교수님께서는 약 7년에 걸쳐 신구약 성경을 교감하셨다는 기사를 읽고, 기사를 쓴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아 뵙겠다는 전화를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11일12시 30분 뵙는 기회를 갖게 되어 담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에 쓰신 개정 증
고흥은 우리나라 우주선 발사를 하는 곳으로 유명한데, 최근 이 지역 특성화고등학교가 드론교육으로 명성을 떨침으로학교에 대한 신뢰가 높아져,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곳이 되고 있다. 고흥산업과학고(교장 김창근)는 4일, 2024-2025 F9U 드론레이싱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 최종 선발 후보 인원 30명 중에서 그동안 대회 출전 포인트 산출 결과 최종 5명(포인트 합산: 대한민국 랭킹 4위)을 선발하는 드론레이싱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지역사회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번 ‘대한민국 드론레이싱 국가대표 선발’은 드론레이싱 입문 3년 만에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선발되었으며, 2024중국 월드 챔피언십 참가 출전권을 획득했다. 2016년 두바이에서 개최되었던 세계드론레이싱 총상금이 100만 달러(한화 12억 원대)였으며, 우승자에게는 25만 달러(약 3억 원)의 상금이 지급되어 매우 인기있는 스포츠로 부상하였다. 이번 국가대표로 선발 확정된 김민재 군은 드론레이싱 분야는 물론, 드론기체 분해, 조립 및 코딩드론에서 요구되는 SW 프로그래밍 능력도 뛰어나며, 2021년 드론분야 으뜸인재로 선정되었다. 이에 고교 재학중 3년간 총 1500만원(매년 50
전남 용정중(교장 박경선)은보성강가에 위치,교육법으로 인가받은 특성화중학교다. 교육공무원 시절,황인수 설립자는여러 시·군교육청과 전남도교육청에서 기획감사담당관, 기획관리국장, 부교육감을 엮임교육을 위해 온 정성을 바쳤다. 이에 필자가 아는 한 지인은 '전남교육의 전설' 그 자체라고 할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 정년을 맞아 여생도 한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가진 모든 것을 용정중학교에 쏟았다. 그의 꿈은 우리나라에 하나 뿐인 사립중학교를 운영하고 싶었다고 자서전 교육을 위한 작은 흔적에서 밝혔다. 그는 당시 보성농고를 졸업, 1967년 총무처 9급 공채에 합격하여 37년간 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부인과 자녀 가 없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만들었고 월급은 운동장 확장비 등 시설 개선과 교사들의 대학원 학비에 보태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동창회가 학교 운영의 주축이 되도록 할 계획이다. 통상 사학 이사장들이 학교를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과 전혀 다르다. "어차피 인생은 빈손으로 갑니다. 농사꾼 될 사람이 평생 공직생활을 했는데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사회에 환원하고 싶어 모든 것을 투자했습니다." 황 이사장은 사회 환원을 고민하던 중 자신이 가
최경화 동광양중교장은 90년대 개교한 동광양중 설립 때 5년 동안 근무,개학공신에 비유된다.교장 발령장을 받고, 개교 초창기 학교가 자리 잡는 데 기여한 추억이 있는동광양중에 남다른 애정을 가졌기에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별한’ 사연을 가진 선생님이 교장 선생님으로 부임하자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졸업생들이 연락해오기 시작했다. 개교 당시 학생 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학생들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던 최 교장은 학창시절 얼굴이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며 반가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이처럼 제자 몇 명과 꾸준히 연락을 이어가던 중 학부모 총회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제자들이 학부형이 돼 최 교장을 알아본 것이다. 잠잠하던 학교에 최경화 교장으로 인해 초창기 졸업생들이 뭉치기 시작,급기야 동문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동문회가 발족하면 90년대 이후 중마동에 생긴 중학교 중 최초 사례가 된다. 선배들이 직접 들려주는 ‘직업 특강’ 사연부터 특별한 (가칭)동광양중동문회는 여타 동문회와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외부 강사를 초청해 진행하던 ‘직업 특강’을 졸업생들이 직접 맡아서 실천한 것이다. 선배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되는 특강을 통해
필자는 2006년 경부터 한국교육신문 리포터 활동을 했다. 이 지면을 통하여 교육 소식, 특히 지방 교육문화, 그리고 교단을 지킨 여러 선생님들의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감명을 준 박주정 선생님의 교직여정을 글로 정리하였다. 저서, 선생 박주정과 707명의 아이들 30여 년 동안 위기의 학생들과 동행 위(Wee)센터 모델 위탁대안학교 설립 위기학생 신속대응 24시간 부르미 운영 눈높이교육상 외 다수 수상 세바시 출연, 영화로 제작 다수의 언론사가 주목한 사랑과 헌신의 교육자 올해 2월, 그는 30여년 전에 교사로 출발, 헌신과 애정 가득찬교직생활, 광주에서 교장을 끝으로 모두 내려 놓았다. 홀가분한 기분을 느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아직도 힘든 길을가는지, 왜 가르치는 일을 택했는지는 자신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유전자의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니 한 어른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 나라가 가난하여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시절. 그때 그의 아버지는 서당에서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한자를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가르치셨다. 당시에는 동네 젊은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해 한글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다. 그들이 세운 공덕비가 여
설립자, 민족운동가로 계간 「삼천리」 발행 건학이념, 자주·창조·진취 교시, ‘아는 것이 힘이다’ 1984년 3월 2일, 제1기 입학식(6학급)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투자, 영어, 한자·한문 교육 돋보여 순천효천고(교장 조선용)는 1983년 학교법인 인가를 받아 1984년 3월 1일 유영위 교장이 취임, 3월 2일 6학급으로 1기 입학식을 하여, 올해 38회에 걸쳐 총 1만6666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남도의 사립 명문고등학교다. 올해 효천 5월, 40년사를 정리 펴냈다. 〈효천 40년사〉는 학교의 역사와 발전, 그리고 학교를 구성하고 지원하며 이끌어온 많은 분들의 노력을 담았다. 설립자님이신 고 효천 서채원 선생님은 원당골에 육영의 부푼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모은 재산을 쾌척해 건학과 민족 사학으로 닦았고, 지금의 벽봉 서동호 이사장은도약기, 웅비기를 거쳐 지금의 비상(飛翔)효천을 향해 정진한 결과 정계를 비롯하여 경제, 문화, 의료, 예술 분야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가고 있다. 필자가 〈효천40년사〉를 읽으면서 느낀 감동은 설립자에서부터 대를 이은 서동호 이사장, 그리고 학교 설립에 참여하시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르치고 계신 선생님들의
한강 역사 탐방 다섯번 째 길, 동작구는 충효의 얼이 깃든 유적이 많은 곳이다. 흑석역에서 가까운 산등성이 계단을 오르니 정자가 보인다. 첫 방문지효사정은 세종조에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노한대감의 별서였다. 노한대감의 자는 유린이며 시호는 공숙이다. 노한대감이 모친을 여의고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북쪽 개성에 있는 아버님 산소를 바라보며 추모했던 곳이다. 당시 이조판서 강석덕이 효사정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효사정을 지나 동작구 출생 심훈(1901-1936)선생을 기리는 유적지를 둘러보았다.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현 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박열, 박헌영, 윤극영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참여해 덕수궁 앞 해명여관에서 체포되어 재판에까지 회부되었는데, 이를 통해 주모자급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구속되어 수개월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특히, 서대문 형무소에서 어머님께 보낸 편지인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당시 서대문 형무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강전투는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6월 2
우리 나라 차의 고장 보성군이 다향대축제(5.3~7) 행사로 개최된 2024년 대한민국다향예술대전에서 김재순 화백(63세)이 출품한 묵매가 525점의 응모작품 가운데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김화백은 서울대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에서 30년간 근무 후 2022년에 은퇴하였다. 재임 기간 중 김대중 정부에서 기록관리 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기록분야 최고 전문가이며,제주4.3 수형인 명부를 발굴하여 제주도민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김화백은 한국 문인화의 거장인 운정 박등용 화백에게 사사를 받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며,역사학자다.
푸르고 푸른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날씨도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 나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한강 답사코스로 옛 동작진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다. 동작역 4번 출구 밖에는 해설을 담당하신 김윤성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이곳은 옛 동재기 나루터로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삼남지방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교통의 요충지다. 흑석동에서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넘어오는 강변 일대에 검붉은 구리빛 돌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 영상으로 자주 본 곳에 발길을 옮겨 나라를 지키시기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엄숙함이 풍겨왔다. 이곳은 서울의 푸른 동맥을 잇는 공작봉 기슭에 위치한 국립묘지이다. 조선시대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도를보니 아늑한 곳에 자리잡았음을 알게 된다. 약 44만 평 대지 위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18만 1천여 분이 잠들어 계시는 우리 민족의 성역이라 할 수 있다. 입구에는 종합민원실과 만남의 집이 있어 방문객을 위한 민원 안내 등 대민서비스를 한다. 가끔 승용차들이 주차장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들어가자 묘역과 안장시설, 참배 및 추모시설와 선양단지로 현충관 호국전시관, 유품
중앙정부, 지방정부는 교육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과 예산을 투입하여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정책이 현장과 괴리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쉽게 예를 들면 논에 물을 대지만 논 바닥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은 것과 같다. 교육정책이 교육현장의 구체적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최종적으로현장 교사의 몫으로 현장교사의 생각과 행동에 달려 있다. 특히 요즘처럼 교사의 교직 만족도가 크게 떨어질수록 큰 사고만 피하면 된다는 무사안일한교육활동으로 손해보는 쪽은 성장하는 아이들이다. 교직이 힘들다고 하지만 교직에 꿈을 안고 들어와 교직을 사명으로 알고 36년을 고등학교에서 살아온 사고(思考)뭉치 교사의 교단일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1. 업무 분야 1) 자신의 업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창의적으로 추진합니다(기존의 공문은 참고는 하되, 답습하지는 않고 불필요한 부분은 정리) 2) 협조가 필요한 부분은 사전에 협의하여 모든 업무가 시스템적이며 유기적으로 추진되도록 합니다. 3) 공문서는 가급적 당일 또는 수일 내에 처리하고 보고 기일을 엄수합니다. 정기적으로 보고할 사항은 따로 교무수첩에 기록하여 누락되지 않도록 합니다. 4) 중요한 사항은 사전에 관리자께 구두로 보고하고
5월 7일 오후 2시, 한강역사 탐방 참가자들이 한양대역 4번 출구로 나가는 길목에 모여들었다. 가장 많은 숫자가 참여하여 10여 명 정도였다. 김효 해설사의 탐방 개요를 안내받고 처음 찾은 곳은 행당중학교 앞에 있는 전관원 터를 찾았다. 전관원은 교통요지에 자리잡은 숙박시설 이태원, 홍제원, 보제원 그리고 전관원은 한양의 4대 원(院)이었다. 그중에 이태원과 홍제원은 현재 지명으로 남았다. 이태원은 특히 유명하다. 그런데 전관원은 왜 그 흔적이 사라졌을까. 왜 지명으로도 남지 않았을까. (이태원 외에 지명으로 남은 원이 있다. 남양주 퇴계원, 경기도 장호원, 충청도 조치원, 북한의 사리원 등등) 조선 시대에도 사람들은 오갔다.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나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을 타고 다녔겠지만, 백성들은 걸어서 다녔다. 길이 멀면 숙박도 한다. 나라에서 만든 숙박시설을 원(院)이라고 했다. 나랏일을 하는 이들이 말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역(驛)이다. 원은 역과 같이 있었다. 광희문 밖에 위치했던 전관원(箭串院)은 서대문 밖의 홍제원, 남대문 밖의 이태원, 동대문 밖의 보제원과 함께 도성 밖의 4대원 중 하나였다. 처